初期 活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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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涯 初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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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名은 正욜로 나중에 정민석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하지만 只今도 正욜이라는 元來 이름으로 活動하고 있다. 그의 이름 욜은
튀르키예어
로, ‘욜(Yol)’은 길 또는 人生의 航路를 뜻한다. 靑少年期에 性 正體性을 알게 되었고, 高等學校에 다닐 때도 또래 親舊들과 뭔가 다르다는 느낌을 가진 적은 있었지만, 丁氏는 그 때마다 남들과 趣向이 달라서 그러겠거니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넘겨 버렸다고 한다.
[2]
同性愛
者로서의 ‘性 正體性(sexual identity)’을 發見한 것은 大學에 入學한 뒤의 일이다.
[2]
1997年
어느 가을날, 多方面의 冊을 읽으면서 自身이 同性愛者일 수도 있다는 事實을 어렴풋이 깨달아가고 있던 그 무렵, 鄭氏는 大學 校庭에 나붙은 同性愛者들의 모임을 알리는 大字報를 發見했다.
[2]
“
|
믿고 따르던 先輩들도 제가 同性愛者라는 얘기를 듣고는 異常한 視線으로 바라보더군요.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周邊 사람들이 나를 낯설게 對하는 風景들…. 그건 當事者가 아니면 想像하기 어려운 苦痛입니다. 이쯤에서 나의 實體를 드러내지 못하고 멈춰 버리면 또 다시 孤立된 空間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지막 벼랑에서 救援의 줄을 잡는 心情으로 門을 두드렸고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發見한 거죠.
[2]
|
”
|
그리고 얼마 後 大學가 附近의 半地下 自炊房에 모여든 20餘 名의 性的 少數者들 틈에 鄭氏도 끼어 있었다. 鄭氏는 이날 모임에 나갈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긴 時間을 苦悶했지만, 막상 찾아간 뒤에는 自身이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막혔던 것이 툭 터지는 듯한 喜悅을 맛보았다고 한다.
[2]
軍隊에 入海, 軍 服務 時節 性 正體性이 드러나 服務 中
精神病院
에 半强制的으로 收容되기도 하였다. 軍 服務 中 어느 날 同性愛者로부터 날아온 戀愛便紙가 公開되면서 아주 특별한 存在가 되었다.
[2]
自身은 同僚들에 對해 아무런 感情도 느끼지 못했지만, 남들은 “네가 젊은 軍人들을 그냥 두겠느냐?”며 距離를 두었다. 結局 鄭氏는 迂餘曲折 끝에 精神病院에 2個月 가까이 收容돼 疑兵除隊 對象者에 오르기까지 했다.
[2]
“
|
精神病者임을 認定하면 除隊를 시켜 주겠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어요. 저는
同性愛者
가 어떻게
精神病者
일 수 있느냐고 抗議했지만 壁에다 대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저녁 무렵이면 ‘마음에 드는
看護
將校
가 있느냐?’는 質問을 받고, 무슨 藥인지도 모르고 받아먹어야 했고, 强制로 AIDS 檢査를 받는가 하면 獨房에서 혼자 잠을 자야 했어요.
[2]
|
”
|
除隊 以後 한때 生計를 위해 위해
製빵
四가 되기로 하고 만드는 일을 배웠으나 中途에 抛棄하였으며, 代身 有名 도넛 會社에서 7年 동안 製빵會社 事務職으로 일했다. 同性愛者人權連帶 創立 初期부터
靑少年
性小數者
와 HIV/AIDS 感染人 人權 問題에도 參與하였다.
人權 運動과 社會 運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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同人련 活動 初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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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年
8月
同性愛者人權連帶
(略稱 同人련)의 創立에 參與하였다. 初期에 그는 弘報局長 兼 宣傳局長에 任命되었고,
2001年
부터는 同人련 2001 大學캠프企劃團長과 機關紙 다이크6號 編輯人, 同人련 新入敎育擔當을 맡아보았다.
2002年
10月 31日
同性愛者 웹커뮤니티 '엑스존'李 靑少年有害媒體로 規定된 것에 對해 性 少數者 人權團體에서는 人權위의 意見을 물었다. 지난해 8月 1審 敗訴 以後 '엑스존'事件에 對한 抗訴審이 進行되고 있는 가운데, '同性愛'를 靑少年有害媒體의 判斷基準으로 삼고 있는 靑少年保護法 施行令이 人權의 原則에 맞지 않는다는 意見을 裁判部에 提出해 줄 것을 要請한 것이다.
[3]
10月 13日
委員會는 이 要請에 對해 "現在 關聯 陳情事件이 檢討 中에 있"으니 決定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라는 趣旨의 答辯과 함께, "엑스존에 對한 遺骸媒體 考試處分은 '淫亂'을 事由로 하고 있으므로 '法律上'의 問題가 아니라 '事實上'의 問題"라고 答했다.
[3]
이에 同性愛者人權連帶의 正욜 代表는 "委員會가 다른 國家機關을 意識해서 同性愛에 對한 積極的 判斷을 回避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며 委員會의 '눈치보기'를 批判했다.
[3]
同人련 代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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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年
에는 고승우 活動家의 拘束으로 空席이 된
同人련
事務局長을 맡아보다가
2002年
임태훈
의 辭退로 空席이 된 東人련 代表를 맡게 되었다.
2002年
가을부터 그는
同性愛者人權連帶
의 代表를 맡아
國家人權委
에 두 件의 眞情을 接受했다. 첫째는 同性愛 사이트를 頹廢·淫亂 사이트로 區分한 ‘靑少年保護法施行令 靑少年 有害 媒體물의 審議基準(以下, 審議基準)’에 對한 問題提起였다.
[2]
2002年
11月
한나라黨
김홍신 議員의 代表發議로 與野議員 20名이 ‘性轉換者의 性別變更에 關한 特例法案’을 國會에 提出하였다. 그는 性小數者에 對한 特別法 提出을 支持하였다. 이때 正욜 同性愛者人權連帶 代表는 “性轉換者 中에는 性轉換手術을 願하지 않거나 數千萬원의 手術費 負擔 때문에 手術을 받지 못한 사람도 있다”며 “性的 自己決定權을 尊重해 手術을 받지 않은 性轉換者度 本人이 願하면 戶籍訂正을 할 수 있도록 길을 터주어야 한다”고 主張했다.
[4]
同性愛 遺骸決定 廢止 運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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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年
가을 以後 그는
靑少年保護委員會
에서
靑少年 保護法
에
同性愛
를
禁飭語
로 指定 撤回 運動을 推進했다. 當時 P會社가 ‘審議基準’에 따라 만든 淫亂物 遮斷 프로그램은 全國의 PC房에 設置돼 同性愛 사이트에 對한 接近을 遮斷했고, Y포털 사이트는 ‘同性愛’라는 單語를 成人 專用 檢索語로 指定해 靑少年들의 接近을 막았다.
[2]
이때 그는 이 問題를 社會的 議題로 끌어내기 위해 다른 同性愛者 人權團體들과 함께
情報通信倫理委員會
를 訪問해 抗議示威를 벌이는가 하면, 인터넷 사이트 罷業을 主導하기도 했다.
[2]
以後
肉牛當
等 少數의 同性愛者들 外에도 人權 運動家들이 同參하기 始作했다,
國家人權委
는
2003年
3月
鄭氏의 陳情과 關聯해, “同性愛 自體를 靑少年有害媒體物 審議基準으로 둔 것은 性的志向에 依한 差別”이라는 決定을 내리고
靑少年保護委員會
에
靑少年 有害 媒體物
審議基準에서 ‘同性愛’ 文句를 削除할 것을 勸告했다.
[2]
그러나 一部 宗敎界에서는 사탄, 소돔과 고모라를 言及하면서 激烈하게 反撥했고, 그는 이들의 主張을 論破하였다.
反戰 運動 參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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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年
2月
부터는
反轉
平和 運動
에도 參與하였다. 當時 그는 "
에이즈
關聯 集會에 나갔는데 우리 때문에 이미지가 안 좋아진다는 말이 있었다.
勞動者
集會에 나갈 때에도 旗발을 내리고 나갔다. 그래도 얼마前 反戰 集會에는 처음으로
同性愛
者임을 밝히고 나갔는데 自信感을 얻었다"고 밝혔다.
[5]
2003年
4月 26日
午後 3時께
同性愛者人權連帶
의 常勤 職員인
肉牛當
의 屍身을 發見하였다. 以後 衝擊을 받은 同人련 會員들 等을 收拾하였다. 이때 윤현석의 屍身을 처음 發見한 正욜 代表는 차분하게 會員들을 다독이고 있었지만, "적지 않은 衝擊을 받았다"고 言論에 털어놨다.
[6]
그해
7月
基督靑年團體들과 함께
한기총
에
肉牛當
自殺에 對한 謝過를 要請하였으나 거절당했다.
[7]
基督敎 信者이기도 한 同性愛者人權連帶 正욜 代表는 "同性愛者들이 正體性 問題로 苦悶하다 마지막으로 信仰에 依支하는 境遇가 많은데, 韓國 敎會가 이들을 오히려 밀어내고 있는 形局"이라며 敎會의 變化를 促求했다.
[7]
9月 28日
反戰 集會에는 演士의 한 사람으로 參與하여 韓國 戰鬪兵의 이라크 派兵 反對 立場과 戰爭 反對 立場을 밝혔다.
[8]
이날 正욜 同性愛者人權連帶 代表는 演說에서 "國家에서
同性愛
를 '變態行爲'라고 하는데, 부시의 이라크戰爭이나 盧武鉉 大統領의 派兵이야말로 變態"라고 말해 拍手를 받았다.
[9]
2004年
다시 製빵師가 되기로 하고 同人련 代表職을 물러났으나 適任者가 없어 다시 同人련 代表로 留任되었다.
性 少數者 差別 撤廢 運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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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年
그는 꾸준히
靑少年 保護法
에서 性 少數者 差別 條項의 撤廢를 促求하였다.
2004年
2月 2日
靑少年保護委員會(아래 청보위)는 靑少年保護法施行令 第7條의 '靑少年有害媒體물의 審議基準'에서 "樹幹을 描寫하거나 混淫, 近親相姦, 同性愛, 加虐, 被虐性淫亂症 等 變態性行爲, 賣春行爲 其他 社會通念上 許容되지 아니한 性關係를 助長하는 것" 中 '同性愛' 削除를 立法豫告 했다.
[10]
同性愛者人權連帶의 正욜 代表는 “청보위의 決定을 歡迎한다“면서 “그러나 政府가 사이트內의 揭示物을 問題삼을 可能性은 있으므로, 同性愛 關聯 사이트가 全般的으로 許容될 지 與否는 좀 더 지켜봐야할 것”이라고 밝혔다.
[11]
그러나 情욜 代表는 "法 改正을 통해 同性愛 條項이 削除되더라도 象徵的인 것일 뿐이지 靑少年을 保護한다는 美名 下에 國家가 同性愛 關聯 表現物에 미치는 影響力은 如前할 것"이라고 내다 봤다.
[10]
2006年
부터는 軍 服務 中 同性愛者(게이, 트랜스젠더)라는 理由로 차별당하는 男性들의 相談, 助言을 맡기도 했다.
2006年
2月 8日
에는 最初로 A氏를 相談한 正욜 同性愛者人權連帶(桐因緣) 活動家는 “被害者는 처음에는 全혀 全域을 考慮하지 않았고, 軍隊에서 잘 適應하기 위해 努力했다”며 “團地 軍隊 生活에서 몇가지 어려운 點이 있었고, 이를 率直히 말하고 解決하고 싶어했다”고 傳했다.
[12]
正욜 活動家는 이어 “그러나 願치 않게 自身이 同性愛者라는 事實이 알려진 以後 被害者는 온갖 人權侵害와 性暴力에 시달려야만 했다”며 “더 以上 견딜 수 없었던 被害者는 部隊 側의 要求에 應할 수밖에 없었다”고 說明했다. 또 그는 “被害者를 만났을 때 그는 이미 自殺을 決心하고 있었다”며 當時 被害者의 深刻한 狀況을 傳했다.
[12]
現穴問診表 同性愛者 差別條項 撤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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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年
2月 4日
<
한겨레新聞
>의 '女性同性愛
에이즈
感染 첫 確認', '男性同性愛者 28% 獻血經驗'(1月 8日子) 報道를 糾彈하는 8個 團體 共同記者會見에 參與하였다.
[13]
이날 <한겨레>는 正욜 同性愛者人權連帶 代表와의 電話通話에서 "公文을 보내면 一週日 以內에 答을 하겠다"고 約束했다.
[13]
2004年
2月
부터 그는 에이즈 感染者 人權團體인
HIV.AIDS 人權連帶 나누리
에도 參與하여 活動했다. 또한
同人련
亦是 이때부터
HIV.AIDS 人權連帶 나누리
의 에이즈 感染者 人權活動을 支援하게 되었다.
以後 그는
獻血
問診表에 同性愛者를 差別하는 內容이 들어 있다는 內容에 對해
國家人權委員會
에 鎭靜하였다. 實際로 現在 獻血問診表에는 ‘同性이나 不特定 異性과 性 接觸이 있었다’는 部分이 包含돼 있다.
[2]
鄭氏는 “同性愛와 AIDS가 無關하다는 것이 다양한 硏究를 통해 立證되고 있음에도, 同姓間 性 接觸이 있었다는 事實만으로 AIDS 바이러스에 感染될 수 있는 것처럼 解釋할 수 있는 質問을 問診表에 包含시키는 것은 同性愛者에 對한 人格的 侮辱”이라며 獻血 當局의 早速한 文句 改正을 促求했다.
[2]
國家人權위는 이 陳情事件과 關聯해, 2004年 8月 “合理的인 理由 없이 性的 志向을 理由로 平等權을 侵害하는 差別行爲”라고 認定했다.
[2]
2005年
1月 18日
午後 2時
國會 圖書館
講堂에서 열린
민주노동당
主催 '性 認知的 政策 生産 및 豫算 敎育에 參與하였다. 敎育을 지켜본 正욜 同性愛者人權連帶 代表는 "進步陣營 안에서
性小數者
에 對한 疏通이 막 始作된 것 같아 기쁘다"며 "只今까지 同性愛人權運動이 外部에 對해 消極的 防禦를 했지만 이제 積極的으로 政策 生産을 苦悶해야 한다"고 主張했다.
[14]
이날 鄭 代表는 "大選과 總選 過程에서 다른 黨에도 質疑書를 보냈지만 家族制度와의 衝突이나 社會的 合意 未備 等을 理由로 별다른 答辯을 하지 않았다"며 "민주노동당은 性小數者 政策을 苦悶하는 唯一한 政黨"이라고 强調했다.
[14]
2005年
부터
2006年
까지 暫時
同人련
代表로 事務局長職을 兼任하였다.
2005年
5月 1日
에는 進步系列 人士 82名과 함께 새 民衆
言論
創刊 推進作業에 參與하였다.
[15]
社會 團體 活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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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年
6月 1日
흥국생명 硏修院에서 인터넷言論네트워크(blog.jinbo.net/newsnet) 主催 인터넷言論네트워크 政策워크샵:社會的 少數者와 代案미디어의 役割에 參席, "同性愛 미디어"라는 主題로 發表하였다.
[16]
2007年
大選 期間 中 性小數社共同行動에 參與하였다.
12月 4日
同性愛者人權連帶, 性轉換者人權連帶 지렁이, 韓國게이人權運動團體 親舊사이, 韓國레즈비언相談所, 韓國成績少數者文化人權센터 等 23個 性小數團體로 構成된 '차별금지법대응및성소수자혐오차별저지를위한긴급공동행동'(性小數者共同行動)은 이명박 한나라당 候補, 鄭東泳 大統合民主新黨 候補, 李會昌 無所屬 候補 等 11名의 大選 候補들에게 性小數者 人權 當面課題에 關한 公開 質疑書를 發送했다.
[17]
正욜 同性愛者人權連帶 活動家는 候補들이 答辯書조차 보내지 않고 있는 것에 對해 "性小數者 政策과 關聯한 候補들의 立場을 떠나서 大選 候補라면 最小限 有權者인 性小數者團體들의 質疑에 答辯을 하는 것이 最小限의 禮儀가 아니냐"며 "票에만 눈이 팔린 大選 候補들은 性小數者들을 有權者로도 보지 않고 있다는 事實을 確認했다"고 批判했다.
[17]
그는 이어 "大選 候補들은 우리를 有權者로 보지 않았지만, 그들의 이番 質疑에 對한 態度를 性小數者 커뮤니티 안에 積極的으로 알려내 投票로서 候補들을 評價하겠다"고 덧붙였다.
[17]
2008年
1月
健康權 實現을 위한 保健醫療團體聯合(保健聯合) 主催로 1月 25日부터 27日까지 3日間 서울大學校 保健大學院(혜화동)에서 開催된 ‘2008 保健醫療 進步포럼’에 參席하였다.
[18]
1月 26日
에는 정동만 健康社會를 위한 藥師會 政策팀長이 ‘治療劑 生産者, 製藥會社가 生命을 威脅하다’라는 主題로, 강신익 인제醫大 敎授가 그의 著書 ‘몸의 歷史, 몸의 文化’를, 禹晳熏 성공회대 敎授가 그의 著書인 ‘88萬원 世代, 未來世代의 展望’을 主題로 講演한다. 이어 ‘社會, 保健醫療運動에게 묻는다’라는 主題로 토르나(移住勞組), 문현아(女性文化硏究所), 윤상훈(綠色聯合), 正욜(同性愛地人權連帶) 等의 討論者가 參與 해 保健醫療運動과 社化運動과 連帶를 主題로 討論하였다.
[18]
2009年
1月
地區地域行動네트워크
(NGA/SF) 推進委員의 한 사람이 되었다.
[19]
2010年
1月
에는 龍山慘事 撤去民 汎國民醬의 葬禮委員의 한 사람으로 參與하였다. 그해
1月 9日
龍山慘事 撤去民 葬禮式에 參席하고 돌아왔다.
人權財團 活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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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年
까지
同性愛者人權連帶
의 代表였다.
2011年
5月
에는
게이
의 一生을 다룬 映畫
鍾路의 奇跡
에도 出演하였다. 그러나 映畫 出演 以後 文字 爆彈에 시달렸다.
2011年
2月
부터는 '
人權財團 사람
'의 人權委員과 事務處 職員이 되었으며, 人權센터 設立을 準備하였다.
2012年
同人련 代表職에서 물러나 同性愛者人權連帶 靑少年自矜心팀長으로 轉任되었다.
2012年
4月
統合進步黨
性小數者委員會가 組織되자, 그는 統進黨 性小數者位 委員長으로 推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