生涯 初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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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화는 1929年 2月 27日,
慶尙北道
金泉
에서 出生하여 지난날 한때
慶尙北道
尙州
에서 暫時 幼兒期를 보낸 적이 있다. 그의 19代祖 정종소는
成均館
四星을 歷任했으나
端宗 復位 運動
이 失敗로 돌아가자 落鄕하였다. 그 뒤 18代祖 정이교 司憲府 掌令과
弘文館
의 敎理를 歷任했지만
戊午士禍
로 禍를 當하자 정이교의 妻와 子息들은 外家인
金泉
으로 가서 隱居하였고 以後
金泉
에서 定着生活을 했다. 1947年에
朝鮮國防警備士官學校
에 5期生으로 入學하여 1948年 4月 卒業과 同時에 少尉로 任官하였다.
軍人으로서의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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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戰爭과 5.16 軍事 政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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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後
大韓民國 國軍
이 出帆하면서 陸軍 少尉가 되었고, 高速昇進 後 大尉가 되었다. 1950年
6·25 戰爭
이 일어나자 3師團 大隊長으로
洛東江 戰鬪
와
機械
-
안강
戰鬪, 兄山江 渡河 作戰에 指揮官으로 出戰했다.
현리 戰鬪
에서는 中共軍에게 捕虜가 되었다가 脫出하기도 하였다. 이어 陸軍 第3步兵師團 作戰參謀로 在職 中 1953年 休戰을 맞이하였다.
1961年 5月
5.16 軍事 政變
때는 陸軍 本部 隸下 防諜部隊長(現在의 名稱은 機務司令官)을 歷任하고, 現役 大領 階級으로써 陸軍 2軍團 作戰參謀를 거쳐 陸軍 2軍團 作戰과 課長으로 在職 中
國家再建最高會議
最高委員
[2]
等으로 電擊 任命, 兼任되었다. 그해 8月 11日 最高委員의 한 一圓 時節, 드디어
陸軍
准將
으로 進級하였다.
[2]
1962年 2軍團 作戰課長에서 다시 防諜部隊長으로 轉任되었다. 1962年 7月 30日에는
北韓
에서 越南한 越南歸順者 원호審査委員會 審査委員을 兼任하였다.
1963年 11月에는 野黨으로부터 軍 不在者 投票 當時 選擧過程을 造作했다는 疑惑을 받기도 했다. 11月 21日
民主黨
이춘기
選擧事務長은 鄭昇和 防諜隊長이 차규헌(車圭憲) 陸本 情報處長과 함께 第2群團防諜隊와 大戰地區防諜隊에서 兵士들의 選擧 無關心을 誘導했다는 疑惑이었다.
[3]
이어 이춘기 事務長은 그가 國會議員 選擧에서 不正選擧를 하도록 指令을 내렸다며 그가 내린 指令 一部를 入手하여 暴露하였다.
[4]
“
|
- 各 部隊에서는 이미 指示한 대로 選擧活動을 하고 있는 것으로 認定한다. 그러나 士兵들은 如前히 選擧에 無關心하다. 따라서 軍의 本來의 時間 外에 敎育시키는 것을 止揚하고 優秀한 士兵을 選拔해서 浸透工作으로 成果를 絶對 擧揚하는 方法을 쓰라.
- 選擧法을 無視하고 中隊別로 投票所를 定해 投票를 시키되 選拔된 士兵의 指示에 依해서 투표하게 하도록 한다.
[4]
|
”
|
그러나 민주당 等 野黨 側의 攻擊에서 그는 별다른 制限이나 制約을 받지 않았다. 以後 陸軍 步兵 第7師團 參謀長 等을 지내고
國防部
人事國 副局長, 1軍團 參謀長, 陸軍 第7師團 副師團長, 1965年 陸軍 第1軍團 副軍團長, 陸軍本部 特典감, 陸軍 第3軍團 參謀長, 陸軍 第3軍團 副軍團長, 1966年 11月 所長으로 進級, 1966年 12月 陸軍 第7師團長, 1967年 1月 國防部 人事局長이 되었다.
大韓體育會 關聯 活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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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年 2月 初에는
베트남 戰爭
派兵 軍人들의 不在者投票 選擧管理團腸이 되어 選擧節次管理委員에 選定된 軍人들을 帶同하고
베트남
에 다녀왔으며, 그해 2月 24日
大韓體育會
理事에 選出되었다. 8月에는
문교부
體育審議委員에 委囑되어 兼任하였다. 1967年 11月에는
스페인
마드리드
에서 열리는 第22次 國際軍人體育大會(CISM) 年次 總會에
大韓民國 國軍
側 代表團의 한 사람으로 參席하고 12月 16日에 歸國하였다.
1968年 2月 17日에는 非常措置로 全 將兵의 轉役 保留 政策을 起案하여 上申시켰다.
[5]
이로써 그 무렵 轉役 豫定된 將兵들의 轉役은 2~4個月 以上 延長되었다. 3月 4日
大韓體育會
理事에 再選任되고 3月 16日에는 陸本 人事局長으로
大韓體育會
海外派遣, 招請審議委員會 委員을 兼任했다.
陸軍綜合行政學校 校長과 陸軍士官學校 校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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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後 1968年 陸軍本部 人事參謀部 次長으로 8月 19日 陸軍綜合行政學校 創設委員會 委員長을 겸하였고, 1968年 10月 16日 陸軍 綜合行政學校 校長이 되었다.
1970年 1軍司令部 參謀長을 거쳐 그해 7月 陸軍本部 企劃參謀部腸, 8月 陸本 政策企劃部長이 되어 8月 29日 英國, 프랑스, 벨기에, 터키, 西獨, 스웨덴을 訪問하였으며,
유럽
巡訪 中 9月 初 다시 陸本 企劃參謀部腸이 되어 9月 6日
서종철
陸軍參謀總長
을 遂行하여
벨기에
카스討議 유럽駐屯 聯合軍 最高司令部(SHAPE)를 訪問
앤드류 J. 굿페스터
司令官을 面談하고 歸國했다.
1972年 陸軍本部 企劃管理參謀部 部長, 1973年 3月 6日
陸軍
中將
으로 特進하여 以後 陸軍 第3軍團 軍團長 等을 等을 두루 歷任하고 1975年 9月부터 1977年 12月까지
陸軍士官學校
校長을 歷任했다. 1977年 12月 陸軍 第1軍司令部 司令官, 1979年 2月 1日에
第22代 陸軍參謀總長
으로 昇進했다.
10.26 事態 顚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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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는
朴正熙
大統領이 被殺된
10.26 事態
때에 그 場所인 궁정동 安家 '가'棟에 있었으며(피살장소는 '나'桐이었음), 이러한 事實이
陸軍 保安司令部
司令官
全斗煥
이 쿠데타를 일으키는 名分이 되었다.
10月 27日 새벽 4時 濟州島를 除外한 全國에 非常戒嚴이 宣布되었고, (戒嚴司令官 정승화) 國務總理 최규하가 大統領 職務代行이 되었다.
[6]
10月 27日 새벽 4時附로 戒嚴司令官이 되어
김재규
逮捕 作戰을 指示하였다. 그러나 鄭昇華는 心證만 있고 確實한 證據를 잡지 못해
김재규
를 쉽게 逮捕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11月 19日 戒嚴司令部는 戒嚴布告 8號를 鞏固해서 全國 大學에 내려졌던 休校令을 거두어 들였다. 다시 學校에 나온 大學生들은 維新憲法 撤廢를 要求하는 示威를 벌인다.
[7]
12·12 軍事 叛亂 前에 大權 論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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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화는 不利한 立場에 서 있었지만 野黨 人士들과 손잡는 것을 拒否하였다. 그는 野黨 人士들의 眞情性을 疑心하였다.
11月 26日에는 言論社 社長들을 招待한 點心 자리, 27日에는 言論社 編輯局長, 30日 國防部 出入記者들과 자리에서 김대중이 大統領 되는 길을 막겠다고 發表한다.
[7]
정승화는 後날 그 發言에 對해 김대중에게 謝過하고 言論에 所懷를 “
中央情報部
의 ‘김대중 파일’을 보고 그렇게 생각했다고 밝혔다.
[7]
그런데 本人이 當하고 나서 ‘정승화 파일’이라는 것을 들어보니 捏造된 것이 많았고, 只今은 그런 ‘文書’에 對한 本人의 생각이 달라졌다고 밝혔다.
[7]
11月 28日 以後 大權 問題가 이슈가 되었다. 정승화는 言論社 幹部들을 세 次例나 陸軍本部로 招待하여 次期 大權을 둘러싸고 國民의 關心이 쏠린 세 사람을 極烈하게 非難했다. 卽 김대중은 思想이 의심스럽고, 김영삼은 無能力하며, 김종필은 너무 腐敗했다는 말이다.
[8]
[9]
이것은 當時 軍部의 一般的인 생각이었다. 이런 所信을 가졌던 정승화는 結局 野黨 人士들에게 어떠한 協力, 人情도 拒否하였다. 전두환이나 노태우에게 抵抗하기 위해서라도 野黨에 參與하라는 어느 後輩, 同僚들의 勸告도 冷靜하게 잘라버렸다. 이것은 非常戒嚴下에서 軍이 政治介入을 한다는 印象을 줄 憂慮가 있어 每日 열리는 時局對策會議에도 參席안하려 했으나
崔大統領
의 勸誘로 不得已 參席하는 等에 아주 조심스런 行步였다.
[10]
또, 전두환氏가 鄭昇華 戒嚴司令官은 3金氏의 資質과 資格에 對한 批判을 했다고 證言했으나, 實際로는 김대중氏의 資格에 對한 批判만 했을 뿐 김영삼, 김종필氏에 對한 批判을 한 적은 없었다고 1990年 1月 3日 反駁 聲明에서 이 問題를 言及한다.
[11]
홍문年
文書를 參考하십시오.
12月 9日 전두환 保安司令官을
東海警備司令官
으로 轉補 시키겠다는 建議를 골프場에서
노재현
國防長官에게 했으나, 김재규 裁判이 繼續中일 때 搜査責任者를 轉補 시키는 것은 一般의 疑惑을 불러일으킬지 모르니 一時 留保하라는 國防長官의 말에 따랐다.
[10]
生涯 後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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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等兵으로 强制 豫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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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年
12.12 事態
當時 전두환의 部下
허삼수
等에게 連行되고,
陸軍參謀總長
職이 剝奪됨과 同時에
陸軍 保安司令部
西氷庫 分室에서 當時 陸軍 首都警備司令官
장태완
所長
等과 함께 拷問을 받은 그는
國防部
軍法會議 裁判에 回附되어 첫 公判에서 內亂幇助未遂罪로 懲役 10年型을 宣告받았다. 裁判 直後
補充役
陸軍
二等兵
으로 强制 豫編되었고 곧이어 國防部 長官의 刑量 確認 過程에서 懲役 7年型으로 減刑되었다.
軍 矯導所에서 服役하다 1980年 6月 10日 刑執行停止로 釋放되었으며, 執行猶豫型이 내려졌지만 81年 3月 전두환 大統領 就任記念 特赦로 赦免, 復權되었다가 1988年 軍籍이 回復되었다.
生涯 後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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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後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1987年
第13代 大統領 選擧
直前 電擊的으로
統一民主黨
에 入黨하여 統一민주당 常任顧問으로 김영삼 候補를 支持하였다. 하지만 1988年 4月 25日을 期하여 政界 隱退 以後 事實上 政治에서 完全히 손을 떼었다. 1993年에는
全斗煥
과
盧泰愚
를 內亂 性向 叛亂 主犯으로,
김계원
前 타이완 駐在 大使와
金鎭基
豫備役 陸軍 准將을 間接 道義性 責任 回避 關聯 從犯으로 모두
金永三 政府
에 告發하고자
장태완
,
李建榮
等과 함께 작은 모임을 가진 바 있다. 1997年 "
김재규
內亂企圖 幇助未遂嫌疑"에 對하여 無罪를 宣告받았다. 그 後
大韓民國 성우회
會長 等을 歷任하기도 했다.
1999年부터는
糖尿
와
高血壓
等 各種 疾患으로 苦生하였고, 晩年에는
파킨슨病
을 앓기도 했다.
[12]
2002年에 病勢가 惡化되어
서울
신촌세브란스 病院에 入院했다가 그해 6月 12日 死亡했다.
셋째 아들 정이열은 그의 生前에 陸士 38期로 卒業하고 陸軍本部 等에서 勤務하였다. 정승화는 事後 2002年 6月 陸軍張으로 葬禮式을 치른 뒤 大田 顯忠院에 安葬되었다.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