生涯 初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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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年 2月 12日에
慶尙南道
宜寧
에서
이찬우
와 어머니 권재림 사이에서 2男 2女 中 막내로 태어났다. 本貫은 慶州로 16代祖 界番(桂蕃)李 입향조로써 慶南 宜寧에 定着하여 居住地로 삼으면서 宜寧,
晋州
에 居住한 士族(士族)이다.
[3]
李秉喆은 慶州李氏 宗親會 總裁를 오랜 期間 맡기도 했다.
어려서 할아버지 이홍석 勳章이 세운 書堂인 門算定(文山亭)에서 千字文, 四書三經, 論語(論語) 等을 배웠다고 主張한다. 李秉喆의 할아버지 이홍석(號는 문산, 1838~1897)은 星湖學派로 性理學과 實事求是 學風을 追求한 士大夫였으며 書藝와 詩文에 能했다. 아버지 이찬우(1874~1957)는 獨立協會와 基督敎靑年會에 關與한 人物로 李承晩과 因緣을 얻기도 했다. 李秉喆은 兄과 함께 이곳 門山堂에 가서 家門의 學問을 배우기 始作하였으나 才能은 생각보다 없었던 模樣으로 湖巖自轉에 依하면 進度는 늦었지만 꾸준하고 誠實히 工夫했다고 한다. 意外로 스스로 가장 많은 感動을 받고 必要로 한 冊은 論語라 主張하였다. 1919年 3月
漢學
數學을 認定받아
進駐軍
지수면
에 있는
指數公立普通學校
3學年에 編入했다.
1920年 11살에
指數公立普通學校
4學年 當時 어머니의 親庭이 있는
京城
의
輸送公立普通學校
로 轉學을 갔다. 學校를 다니는 동안 甚한 慶尙道 사투리 때문에 京城 地域 學生들과 意思疏通의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곧 學校 生活에 適應,
中東中學校
에 進學한 後에는 學習進度가 올라 優秀한 成跡을 거두게 된다. 以後 1926年에
박팽년
의 後孫인 박기동의 4女
박두을
과 故鄕에서 結婚하였다. 自敍傳인 《湖巖自轉》에서는 1929年에 結婚하였다고 밝혔으나 實際로는 1926年에 結婚하였다.
結婚式을 마치고 上京하여 다시 學校에 다니며 學業에 熱中하다 4學年 1學期 무렵
日本
留學을 決心한다. 李秉喆은 父母한테서 自身의 日本 留學에 對해 反對받았으나 옆 洞네에 살던
효성그룹
의 創業主인
趙洪濟
를 찾아가 事情했다.
日本
留學 警備 500원을 빌려달라고 付託하면서
趙洪濟
가 欣快히 受諾, 趙洪濟의 도움으로 그와 함께
日本
에 留學하였다.
中東中學校
를 卒業한 後 1929年에
와세다大學校
政治經濟學科에 入學했다. 留學 初期 한동안 冊에 빠졌다가 틈만 나면 곳곳의 工場을 訪問해서 日本 工業의 實相을 자주 살펴보았다고 한다. 大學 時節부터 李秉喆은
企業人
의 꿈을 꾸게 되었고 留學 時節 故鄕에서 每달 生活費로 200원을 送金해왔는데 이때 當時 日本 中産層 家庭의 한달 生活費가 50원이었던 것과 比較하면 豐足한 便이었다.
大學 時節 李秉喆은 工夫에 熱中하고 스스로 充實하게 生活했으나, 1學年 때 健康 惡化로 쉽게 지치고 조금만 冊을 읽어도 쉽게 疲勞해지는 症狀이 생겨 休學屆를 내고 溫泉을 찾아다니며 病을 治療하려 했으나 所用이 없었다. 後日 回顧에서 그는 "工夫해서 무슨 벼슬을 하려고 했던 것도 아니고 但只
도쿄
의 新學問이 어떤 것인지도 알았고 그 사람들의 생각도 알게 되었으니 留學生活을 더 하면 뭣하나 싶은 懷疑가 들었다."며 1931年에 自退하고 歸國하였다.
故鄕으로 돌아와 療養하면서 李秉喆의 健康은 回復되었다. 故鄕에서 特別히 할일 없이 무위도식하던 李秉喆은 親舊들과 노름판에 빠졌다. 밤새 노름에 빠져 달 그림자를 밟으며 돌아오는 날이 많았다고 李秉喆 스스로 回顧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平素와 마찬가지로 노름을 하다 집으로 돌아와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3名의 아이들의 모습을 보는 瞬間 李秉喆은 惡夢에서 깨어난 듯한 衝擊을 받았다.
後날 回顧에 依하면 그는 "그야말로 虛送歲月이었다. 어서 빨리 뜻을 세워야 한다."는 悔恨과 두려움에 며칠 꼬박 새웠으며, 自身에게 맞는 事業을 構想하기 始作했다. 事業을 하겠다고 決心을 굳힌 그는 며칠 後 아버지에게 自身의 생각을 말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別말 없이 아들에게 선선히 事業資金을 내주었다.
마침 너의 몫으로 硏修 300席의 財産을 나누어 주려던 참이다. 스스로 納得이 가는 일이라면 決斷을 내려보는 것도 좋다.
그는 장사를 할 곳으로
京城
부터
釜山
,
大邱
等地를 直接 物色하여, 생각해 보았으나 故鄕 隣近의 포근 港口
馬山
이 떠올랐다.
쌀
을 생각한 그는
馬山
은 朝鮮 各地에서 生産한 쌀을 蒐集하여 道政해서 日本으로 보내는 搗精工場이 있는 것을 알아냈고, 搗精工場은 數 百 가마니씩 道程을 기다리는 벼덤이들이 있었다. 바로 그는 親舊 2名과 힘을 합쳐서 同業으로 精米所를 차렸다.
企業 活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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事業家로서의 始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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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1938年 3月 29歲에 30,000원(父母에게 물려받은 財産-한달月給 約15원꼴(166年 일해야되는 돈)의 資本金으로
大邱
手動
에서 〈三星上廻〉라는 看板을 내걸고 事業을 始作하였다. 1941年 株式會社로 改編하고 靑果類와 魚物 等을 生産者로부터 供給받아 都賣, 小賣業과 輸出 等도 하면서
中國
에도 輸出하기 始作하였다. 1942年 朝鮮兩朝를 引受하여 함께 運營하던 中 光復 後 1947年
京城
으로 上京하여 다음 해
三星物産工事
를 創設하고 貿易業에도 參與하였다.
1950年 初 日本工業視察團원의 한사람으로 選定되어 出國,
日本
內 製造業, 手工業 等
日本
의 工業界와 前後 工業施設 復舊 現場을 直接 視察하고 歸國했으나 그해 6月 25日
서울
에서
韓國 戰爭
을 맞았다.
戰爭
直後 避難을 떠났다가 1951年 무렵
釜山
에서 다시
三星物産
을 세워 다시 貿易業에 本格 뛰어들면서 1953年에는 製造業에도 投資하였다.
製造業과 企業 活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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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年에
第一製糖
, 1954年에
제일모직
을 設立, 製造業에서 크게 成功을 거두었다. 製造業에서 크게 成功을 거두면서 事業 領域을 擴張해나갔다.
동방生命
,
新世界百貨店
,
安國火災保險
, 全州製紙 等을 引受, 經營하였고,
성균관대학교
의 財團 理事로도 敎育事業에 投資하기도 했다. 以後 事業 領域을 크게 擴大해갔으며 中央開發, 高麗病院 等을 引受하여 運營하기도 했다. 1961年부터 1987年까지
韓國經濟人聯合會
의 會長을 歷任했다.
1964年初 韓國肥料를 引受 運營하였으며, 1964年 5月 東洋라디오, 텔레비전
東洋放送
을 設立하여 放送에도 進出했고, 그 해
대구대학
의 財團 理事長이 되었다. 1965年 9月
中央日報
를 創設하여 言論社에도 進出하였다. 그러나 中央日報 等은 査頓인
홍진기
에게 넘겼다.
東洋放送
은 1980年 言論統廢合이 될 때까지 運營하였다.
사카린 密輸 事件 前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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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年 8月 13日
알리앙스 프랑세즈
프랑스聯合會 韓國委員會 移徙에 委囑되고, 1964年 東洋라디오 및 텔레비전 放送과 1965年,
中央日報
를 創設하여 言論社 經營에 參與하였다.
1966年 5月 24日 三星에서
慶南 蔚山市
에 工場을 짓고 있던 韓國肥料가
사카린
2259 砲隊(藥 55t)를 建設資材로 꾸며 들여와 販賣하려다 들통이 났다. 이것이 누구의 指示에 依한 것인지는 確實하지 않다.
뒤늦게 이를 摘發한 釜山稅關은 같은해 6月 1059 包袋를 押收하고 罰金 2千餘萬 원을 賦課하였다. 三星은 韓國肥料 工場을 짓기 위해 日本
미쓰이
社로부터
政府
의 支給保證 아래
商業借款
4千餘萬달러까지 들여왔다. 사카린 密輸를 現場指揮했다고 밝힌
이맹희
가 1993年 發刊한 《回想錄 - 묻어둔 이야기》에서 韓國肥料 사카린 密輸事件은
朴正熙
大統領과 이병철 會長의 共謀 아래 政府機關들이 積極 감싸고 돈 엄청난 規模의 組織的인 密輸였다고 다음과 같이 告白하였다.
“
|
1965年 末에 始作된 韓國肥料 建設過程에서 日本 미쓰이는 工場建設에 必要한 次官 4200萬 달러를 機械類로 代身 供給하며 三星에 리베이트로 100萬 달러를 줬다. 아버지는 이 事實을 朴 大統領에게 알렸고 朴 大統領은 "여러가지를 만족시키는 方向으로 그 돈을 쓰자."고 했다. 現札 100萬달러를
日本
에서 가져오는 게 쉽지 않았다. 三星은 工場 建設用 裝備를, 靑瓦臺는 政治資金이 必要했기 때문에 돈을 부풀리기 위해 密輸를 하자는 쪽으로 合意했다. 密輸現場은 내가 指揮했으며 朴 政權은 隱密히 도와주기로 했다. 密輸를 하기로 決定하자 政府도 모르게 몇가지 欲心을 實行에 옮기기로 했다. 이 참에 平素 들여오기 힘든 工作機械나 建設用 機械를 갖고 오자는 것이다. 密輸한 主要 品目은 便器,
冷藏庫
,
에어컨
,
電話機
, 스테인레스 板과 사카린 原料 等이었다.
[4]
|
”
|
生涯 後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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復歸와 企業 活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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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66年에
사카린 密輸
가 摘發되면서 物議를 빚게 된다. 1966年 11月 韓國肥料의 常務로 있던 次男
唱戱
가
서울矯導所
에 收監되었다. 그後 1968年 2月 李秉喆은 다시 經營에 復歸하였다.
[5]
그 뒤 毛織會社가 成長하면서 1972年 7月
제일모직
慶山工場을 分離하면서 合成纖維를 製造하는 施設을 갖추어
제일합섬
을 設立했고, 1969年
三星電子
와
三星電機
를 設立하여
三星그룹
育成의 跳躍臺를 만들었다. 1974年
삼성석유화학
,
三星重工業
을 設立하여 重化學 工業에 進出하였고,
第3共和國
과
第4共和國
當時 輸出爲主 經濟 成長 政策에 맞추어 電子製品, 化學製品과 重工業 等의 大量 海外 輸出을 통해 莫大한 富를 創出하여 大企業으로 성장시키는 발板을 마련했다. 以後
삼성정밀
·
龍仁自然農園
等을 設立하였다.
[6]
1975年 5月 特別히 제일합섬의 工場 시스템을 公開하기도 했다. 제일합섬은 1982年부터
새한그룹
을 차려 分家한 次男
唱戱
에게 徐徐히 넘겨주었다. 1977年 5月 삼성전자와 三星電機를 合倂하여 삼성전자로 單一化하고, 1984年 8月 相互를 三星電子 株式會社로 바꾸었다.
三星電子
는 그의 死後에도
三星그룹
成長의 基盤이 되었다.
末年과 死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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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年에
胃癌
判定을 받았으나 手術을 받고 健康을 回復하였고, 以後
삼성정밀
等을 設立하고 1982年 三星半導體通信을 設立하였다. 이 밖에도 文化財團·奬學會 等을 設立하였고, 百貨店·호텔 等의 經營에도 參加해서 事業의 多角化를 통하여 國家經濟 發展에도 크게 貢獻하였다. 1981年 2月 韓日經濟協會 顧問에 委囑되었고 이듬해 다시 再委囑되었다.
美術에 心醉했던 李秉喆은 많은 所藏品을 蒐集하거나 所藏해 오다가
호암미술관
을 建立하였고,
國樂
과
書藝
에도 큰 關心을 가졌다. 1977年 三星美術文化財團 理事長이 되었으며,
現代그룹
會長이었던
鄭周永
等과 함께
蔚山
에
工團
을 造成하는 데에도 一定部分 投資하거나 寄附를 하여 設立에 一翼을 擔當하기도 하였다. 이는 後에
蔚山工團
으로 크게 發展하였다.
1985年에
肺癌
判定을 받았고, 以後 金塔産業勳章을 비롯하여 世界最高經營引上을 받았다. 1987年 11月 初 李秉喆은 韓日經濟協會 顧問職을 辭退하고 같은 달 19日에 78歲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墓所는 現在
龍仁에버랜드
에 位置하고 있다.
[7]
1987年
國民勳章 無窮花章
이 特別 追敍되었다.
三星電子
는 3男
건희
에게 相續되었고 長女
인희
는
扞率그룹
을 創業하였으며 나머지 네 딸 中 막내인
新世界그룹
의 會長 名姬를 除外한 3名은 出家 後, 企業 經營에 關與하지 않았다.
[8]
中央日報
는 査頓인
홍진기
系列에게 相續되었고,
第一製糖
等 제일제당그룹은 長男
맹희
에게 相續되었다. 次男
唱戱
는
새한그룹
을 創立하였다. 1995年 第2回 한국경영사학회 創業對象이 追敍되었다.
日本
으로부터 日暈一等서보장이 追敍되었고,
[9]
1999年 12月에는
每日經濟
와
全經聯
이 主管한 20世紀 韓國을 빛낸 30大 企業人의 한사람으로도 選定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