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은정의 沿革은 모은정기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英日鄭氏 圃隱公派 28代 胎用(1827~1895)李 晩年에 서암을 建立하여 講學, 自首하였는데 그 後 庵子가 무너지자 玄孫들이 서암 九地에 亭子를 세워 모은정이라 扁額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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程子는 正面 3칸 側面 2칸 規模의 八作기와집이다. 程子의 周圍에는 기와를 얹은 土石담牆을 둘렀는데, 前面에 있던 使嗾門을 現在 허물어진 狀態이다. 平面은 大廳을 中心으로 左右에 溫突房 1칸씩을 連接시킨 後 全面에는 半 칸 規模의 退칸을 둔 重黨協實刑(中堂挾室形)인데, 大廳의 前面에는 4分合 들어열개門을 設置하여 마루房을 이루게 하였으며 退칸의 周圍에는 平欄干을 設置하였다. 家口는 宗樑위에 劑形板대공(梯形板臺工)을 세워 마룻대와 장혀를 받게 한 五樑家의 二翼工집이며 처마는 겹처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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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年代 初期에 重建한 建物로, 建築的인 側面에서 볼 때는 별다른 特徵을 찾아볼 수 없는 平凡한 形態의 亭子이다. 그러나 영주댐(訟理원댐) 建設로 사라져 가는 文化遺産을 保存하고, 失鄕民의 情緖 等을 勘案할 때 保存하는 것이 妥當하므로 文化財資料로 指定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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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尙北道 告示 第2010-82號, 《慶尙北道 文化財(文化財資料) 指定 告示》, 慶尙北道知事, 慶尙北道步 第5409號, 6面, 2010-0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