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年
1·4 後退
當時 避難 中
華城郡
發案에서 태어났다. 그의 父母는 本來
서울
에 居住하였다. 從軍寫眞作家였던 아버지가
韓國 戰爭
中 戰死하고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라며 不遇한 幼年期를 보냈다. 初等學校 1學年 때 서울에 定着, 病弱하고 가난한 成長期를 보냈다. 讀書를 즐겼으며, 美術에 才能을 보였다.
1963年 3月
서울
청계초등학교
를 卒業하고
대광中學校
에 入學했다. 1966年
대광高等學校
로 進學했다. 高等學校 3學年 무렵 大學 進學 直前 美大와 國文學科 사이에서 苦悶하다 國文學科로 進學할 決心을 한다. 1969年
延世大學校
에 進學하였다.
延世大學校 在學 中 學科內 演劇部의 創設을 主導했고, 延世 文學會, 校內放送局 PD, 敎旨 記者, 等으로 活動했다. 1973年 연세대학교 文科大學
國語國文學科
를 卒業했다. 곧이어 大學院에 進學, 大學院 在學 中에는 韓國 最初의 마당劇 《兩班傳》을 脚色, 演出했다. 1975年 國文學
碩士
學位를 받았다.
1975年
延世大學校
國文學科 博士 課程에 들어가면서 母校인
延世大學校
國文學科 講師가 되었고, 以後 1978年까지
延世大學校
,
한양대학교
,
강원대학교
에서 講師로 活動했다.
1977年 雜誌 《현대문학》에 〈배꼽에〉, 〈망나니의 노래〉, 〈高句麗〉, 〈當世風(當世風)의 結婚〉, 〈怯(怯)〉, 〈장자사(莊子死)〉 等 여섯 篇의 詩를 發表,
朴斗鎭
是認
에 依해 推薦되어 文壇에 데뷔하게 되었다.
1977年 2月 博士 課程을 修了했다. 1979年부터 1983年까지
弘益大學校
師範大學 國語敎育學科 專任講師, 助敎授로 在職했다. "
尹東柱
硏究" 論文으로 1983年
延世大學校
大學院 文學
博士
學位를 받았으며, 이 해부터
延世大學校
로 돌아와 國語國文學科
助敎授
로 在職하기 始作했다. 以後 第5共和國·第6共和國 時節부터
大韓民國
文學의 지나친 敎訓性과 僞善을 赤裸裸하게 批判하고 諷刺하여 이름이 알려지기 始作했다. 以後
延世大學校
文科大學
國語國文學科
副敎授
를 거쳐
鄭敎授
로 在職하였다.
1989年 長篇 小說 《
倦怠
》로 小說界에 데뷔하였고, 《나는 冶한 女子가 좋다》를 出刊하였다. 그러나 이 冊이 出版되고 얼마 뒤 言論의 酷評을 받았고, 6個月 뒤 講義가 取消되는 試鍊을 겪었다.
1992年 長篇 《즐거운 사라》가 猥褻的이라는 理由로 1審에서 懲役 8月에 執行猶豫 2年을 宣告 받았다. 1992年 12月 28日 懲役살이를 끝내고 釋放되었다. 拘束 波紋으로 1993年
延世大學校
로부터 職位解除되었고, 1995年 大法院에서 上告 棄却 後 解職되었다.
그가 注目을 받기 始作한 것은 1990年 初였다. 以後 1991年 作品 《즐거운 사라》를 出刊하면서, 猥褻論爭에 휘말리게 되었다. 《즐거운 사라》의 內容 中 女大生이 自身의 大學 敎授와 關係를 갖는다는 것이 問題가 되어
保守
敵 言論과
文人
들, 大學 敎授들의 反撥을 招來했고, 大學敎授들 中에는 마광수가 現職 大學 敎授의 身分으로 쓴 冊이라 하여, 大學 敎授의 資質 與否를 問題삼기도 했다.
[3]
李文烈
은 新聞 社說에서 그의 作品을 ‘嘔逆질을 同伴한다, 보잘것 없다’며 露骨的으로 批判하기도 했다. 少數의
進步主義
,
自由主義
敵 文人만이 마광수를 擁護하는 가운데, 1992年 10月 29日 《즐거운 사라》 가 淫亂物로 分類되어 淫亂物 製作 및 配布 嫌疑로 電擊 拘束되었다. 檢察은 作家의 表現의 自由도 認定해야 하나, 社會的인 通念에 어긋나고, 特히 靑少年 讀者들에게 模倣心을 부추겨 情緖에 惡影響을 미칠 수 있다고 判斷하였다. 뿐만 아니라 以前에도 警告 措置를 取하고, 各種 制裁를 加했음에도 不拘하고 自發的인 淨化의 餘地가 없는 것은 勿論 오히려 더 露骨的으로 宣傳했기 때문에 馬 敎授를 拘束했다고 밝혔다.
[4]
[5]
그는 法學者 出身의 國務總理
현승종
이 그를 잡아 넣으라는 特別指示하여 令狀도 없이 講義室에 逮捕되었다고 알고 있다고 밝혔다.
[6]
그가 拘束되자 사람들은 內容에 對한 好奇心 때문에 이 冊을 사기 위해 努力하였고, 結局 《즐거운 사라》는 賣盡되기까지 하였다
[7]
. 馬敎授를 拘束한데에 對하여 成均館, 유도회(儒道會) 等의 儒林 6個 團體
[8]
와 作家
李文烈
, 10個의
宗敎
團體는 마광수 敎授를 拘束한 檢察의 措置를 歡迎하였다
[9]
. 反面, 마광수 敎授를 擁護하는 쪽에서는
고은
,
金炳翼
,
유안진
等을 비롯한 文人 200~300餘 名이 文學作品의
表現의 自由
侵害와 出版彈壓에 對한 文學·出版人 共同聲明書를 發表하고
[10]
, 示威를 벌였다. 11月 2日에는 文人들과
延世大
學生 50名이
瑞草洞
서울地檢 앞에서 馬敎授의 拘束을 糾彈하는 示威를 벌이기도 했다
[11]
. 그러나
第6共和國
政權은 이를 容共으로 몰아 鎭壓해버렸다. 마광수는 抗訴하였고 이때마다 棄却되었다.
理由 없이 그렇게 썼겠어요.
文學
의 品爲主의, 兩班主義,
訓民注意
이런 것들에 對한 反撥이지.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리 冶한 小說을 쓴다고 해도 語法이나 全體的 틀은 敬虔主義를 維持하려 애를 쓰고 꼭 結論에 가서 勸善懲惡的으로 맺는다거나 反省을 한다거나 그런 式으로 글을 맺잖아요. 저는 그런 것에 對한 反撥로 사라를 浮刻시키려고 했어요. 우리나라
小說
에 사라 같은
女子
있나요. 다
自殺
하거나 反省하거나 그러지.
- 言論과의 인터뷰 中에서
[12]
裁判 過程에서 文學 彈壓, 政府와 檢察에 依한 藝術의 自由, 表現의 自由 侵害라는 文學界와 文化 言論界의 不平 不滿이 터져나오기도 했다. 1992年 10月부터는
軍事政權
에서 그의 拘束을 使嗾했다는 疑惑이 터져나오기도 했다. 1992年 12月 28日에는
서울
刑事地方
法院
에서 懲役 8月에 執行猶豫 2年을 宣告받고 釋放되었다
[13]
.
마광수는
李文烈
의 成功을 批判하기도 했다. 그는 1990年 1月에 言論에 發表한 글에서 이문열의 商業的 成功의 根本的 原因을 ‘
大韓民國
讀者들의 敎養主義 選好 現象’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말했다.
[14]
한便 그는 제5공화국
全斗煥
政權의 敎育政策 中의
大學校
學生數 定員을 無條件 늘린 것을 批判하기도 했다.
特히 1980年代 初부터
문교부
에서 大學校의 定員을 大幅 늘임에 따라 大學生 數字가 엄청나게 불어났다. 그래서 그들은
高等學校
때 미처 못 배웠던 여러 가지 敎養的 知識들에 對하여 게걸스럽게 貪食하는 쪽으로 나아갔는데, 아무래도 딱딱한 理論書籍 보다는 小說을 통해 敎養을 習得하는 것이 더 재미있기 때문에 敎養主義 小說이 많이 읽히지 않았나 싶다.
李文烈
뿐이 아니라
大韓民國
의 많은 作家들이 本能的 表出 欲求에서 보다는 敎師的 知識人의 使命가므로 敎養主義 小說을 많이 生産해 내고 있다.
[14]
고 批判하였다. 全斗煥 政權의 無條件 大學校 定員 늘리기가 水準 낮은 大學生들을 大量 生産해낼 수 있다는 警告였다. 이때에도 마광수는 現職 敎授의 身分으로 敎育 政策을 正面 批判했고, 이는 學界와 知識人들 사이에서도 論難거리가 되었다.
이에
李文烈
은 마광수에 對해 "敎育的인 效果는 抛棄한 듯함에도 不拘하고 大學 敎授라는 身分을 애써 維持하려는 點"李 못마땅하다고 批判하였다.
[14]
論難은 擴大되었고, 後에
康俊晩
은 이것이 이들 두 사람의 敎育者 官의 不和였다고 解釋했다.
마광수의 批判은 곧 '文學의
敎養主義
'를 克服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便
盧泰愚
大統領
이 1988年의 新年辭에서
大統領
과 政府를 藝術 作品의 素材로 活用해도 된다는 言明을 하였으나 政府와 統治者에 對한 批判이 조심스러웠던 1990年代 初에 政府 當局(
第5共和國
)의 政策을 批判하면서 話題가 되기도 했다.
그는 文學의 非現實性과 지나친 國民啓蒙性 等을 批判하였고 現實에 맞지 않는 理想主義的인 文學觀을 批判하기도 했다. 李文烈 批判 以後 權威主義, 道德主義, 嚴肅主義, 國民 啓蒙主義的 文學, 僞善 等에 對한 批判을 發表하면서 保守的 文學家들의 批判을 받기도 했다.
作品 즐거운 사라에서 大學敎授가 女大生과 벌이는 歡樂과 享樂의 饗宴은 社會的으로 衝擊을 주기도 했다. 이는 정비석의 自由夫人 事件과 1960, 1970年代 韓國 建設勤勞者 派遣 後 派遣勤勞者 夫人들의 카바레, 스탠드바 等 出入, 1980年代의 自由夫人, 애마부인, 젖소夫人 바람났네 事件 以後 꾸준히 불거져 나왔던 것임에도 不拘하고 처음 對하는 것처럼 날이 선 攻擊을 받게 됐다. 特히 作品 즐거운 사라에 登場하는 人物이 大學敎授라는 點에서 다른 大學敎授들의 不滿을 몰고 왔다.
1993年 12月
서울大學校
敎授
손봉호
는 "마광수 氏는 敎授라는 稱號 없이 마광수 氏로 불려야 된다"고 主張했다.
[15]
[16]
[17]
이에 對해
康俊晩
은 "性 表現에 對해선 “다른 意見에 귀 기울이는 雅量”李 必要없다는 것인가? 孫 敎授가 肯定的으로 評價하는 것으로 보이는 <朝鮮日報>에 對해서만 그런 `雅量'李 必要하다는 것인지, 또 조선일보가 果然 그런 `雅量'이 있는 新聞이라고 생각하는지, 分明하게 밝혀주시기 바란다.
[18]
"고 反駁하기도 했다.
大學敎授 이태동은 “즐거운 사라에 나오는 女大生과 그를 가르치는 敎授 사이에 紊亂하고 變態的인 性 關係가 성실한 努力의 象徵인 學點의 흥정 對象이 된다는 것은 커다란 社會的인 問題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라고 主張했다.
[15]
[19]
1993年 初부터 表現의 自由와 藝術의 自由를 主張하는 文學界와 文化演藝界의 批判과 함께 ‘마광수 敎授 復職 署名’과 ‘福券運動’이 꾸준히 꾸준히 展開되었다. 軍事政權의 沒落과
文民政府
出帆 以後 마광수 復權 輿論은 漸漸 고개를 들게 되었다.
文化日報
1993年 11月 26日子 記事는
檢察
關係者가 밝힌 內容을 根據로 마광수의 拘束 背景에 對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最近 연세대 敎授와 學生들 사이에 馬 敎授의 復職運動이 일고 있는 가운데 지난해 10月 檢察이 馬 敎授를 司法處理 하게 된 背景이 밝혀져 關心을 끌고 있다. 當時 中立內閣의
현승종
國務總理는 平素 元老敎授들 사이에서 評判이 나쁜 馬 敎授의 司法處理를 法務部長官에게 間接的으로 暗示, 拘束事件으로 擴大된 것으로 알려졌다.
[20]
政府에서
法務部
와
檢察
에 壓力을 넣어 마광수의 司法處理를 指示했다는 疑惑이 提起되던 中, 保守的 法學者 出身이며
軍事政權
의
國務總理
였던
현승종
等이 祕密裏에
法務部
와
檢察
에 그의 拘束을 暗示했다는 것이 記事로 報道되면서 그의 拘束에 對해 政治的 彈壓 疑惑은 繼續되었다. 擔當 檢事는 서울地檢 特殊2部
金鎭台
檢事였다. 마광수 敎授는 抗訴했으나, 1995年 6月 16日
大法院
은 그의 上告審을 棄却하고 原審을 確定지었다
[21]
[22]
. 1995年 8月 8日
延世大學校
는 마광수 敎授를 免職措置하였다. 以後 1998年 다시 敎授職에 復職하였다. 그러나 그는 한동안
憂鬱症
을 앓았다.
2000年 6月 延世大學校 敎授 再任用 心思에서 論文 實績 等의 問題로 탈락하였고, 이 過程에서 國文學科 同僚敎授들의 集團따돌림으로 再任用이 거부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學生들의 거센 反撥로 延世大學校 當局은 任用脫落을 保留하였으나, 마광수는 極甚한 背信感으로 인한 外傷性(外傷性) 憂鬱症으로 精神科 病院에 入院하게 되어 學校에 休職屆를 提出한다. 2002年 다시 復職되었다. 한 學期 동안
延世大學校
로 復職하여 講義하던 中,
憂鬱症
이 惡化하여 學期 말에 다시 休職하였고, 2004年 健康을 回復하고 연세대학교에 復職, 講義와 講演活動을 하였다.
2000年代 中盤에 다시 마광수의 拘束이 政治的 彈壓이라는 主張이 다시 提起되기도 했다. 2006年 강준만은 그自身의 著書 韓國現代史散策:1990年代 便 1卷에서 大學敎授 出身 현승종 國務總理가 法務部長官과 檢察 쪽에 마광수의 司法處理를 暗示했다는 것이다.
[20]
1990年代 後半 以後, 保守主義 言論의 批判에도 不拘하고 마광수의 作品은 淫亂하지 않았다는 評價도 나타나고 있다. 한便 時代를 앞서간 作家라는 視角도 있다.
[23]
以後 2003年 公式 辯論書格인 冊 《마광수 살리기》가 出刊되었다.
그러나 大韓民國 檢察은 2006年 11月 24日 個人 홈페이지에 淫亂物을 揭示한 嫌疑(
情報通信網 利用促進 및 情報保護 等에 關한 法律
違反)로 마광수를 不拘束 立件시켰다. 이때 그를 拘束시켜야 된다는 言論들의 對應에, 文化藝術界에서는 表現의 自由, 藝術의 自由 彈壓이라고 反撥하였다.
2006年 發表한 다섯 番째 詩集 《冶하디 얄라숑》에 실린 〈말(言)에 對하여〉와 〈바이올린〉이 各各 弟子와 知人의 作品을 自身의 作品인 것처럼 發表한 疑惑이 提起되었고, 實際로 마광수의 잘못임이 드러나 詩集을 全量 回收하는 事態가 벌어진 적도 있다.
[24]
專攻講義에서 排除되어 2009年 연세대학교의 '演劇의 理解'와 '文學과 性'이라는 敎養 授業을 맡았다. 其他 여러 講演에 演士로 招聘되기도 했다. 또한
tvN
의 토크쇼 <
백지연
의 피플 Inside>에 出演하였다. 馬 敎授는 韓國 社會와, 젊은 作家들, 延世大 敎授들, 自身을 拘束시킨 檢事들과 自身을 裁判한 判事들에 對해 不滿을 吐露하기도 했다
[25]
[26]
[27]
2010年 4月에는 마광수의 에세이 《나는 冶한여자가 좋다》(원본-1989, 改訂版 2010)가 演劇으로 脚色되어 話題가 되기도 했다. 이 演劇에는
異派니
가 ‘사라’ 役割로 出演한다. 題目과는 달리 《즐거운 사라》의 主人公인 女大生 ‘사라’가 主人公으로 나오며, 原作者인 마광수가 ‘馬敎授’라는 캐릭터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28]
.
2017年 登壇 40年을 맞아 《狂馬集》(1980)부터 《모든 것은 슬프게 간다》(2012)까지 媤집 여섯 卷에서 고른 作品들과 새로 쓴 10餘 篇을 合해 119篇을 묶은 詩選集 《마광수 視線》을 펴냈다.
2017年 9月 5日 서울 東部이촌동 自宅에서 自殺로 生을 마감했다. 享年 66歲.
그는 知識人의 僞善을 攻擊하였으며, 盲目的인 體制 擁護性 御用 文人들을 批判, 諷刺하기도 했다. 또한 文學의 지나친 嚴肅主義에 對해서는 “大韓民國의 知識人들은 가벼움을 輕薄함으로 그릇된 認識을 하는 境遇가 많고, 泄瀉 輕薄하다고 해도 그것이 意圖된 輕薄性이라는 것을 아는 이가 드물다.” “小說 文章에서 使用되는 單語가 日常語 또는
[29]
卑俗語日 境遇 흔히들 그런 印象을 받는 것 같다.”며
[12]
韓國文學의 僞善性과 지나친 嚴肅主義를 叱咤하기도 했다.
마광수는 朝鮮朝式 兩班 文學, 그리고 理念과 敎訓으로 包裝된 僞善의 文學에 挑戰하고자 하는 意欲을 불태워 왔다. 聖域 없는 批判을 敢行했다. 當然히 그는 民衆文學에 對해서도 마땅치 않게 생각했다.
[12]
只今의
韓國
의 文學人들은
民衆
을 부르짖고
民衆文學
等을 부르짖으면서도, 實際로는 文章을 驅使하는 데 있어서는 (民衆的이라기 보다는) 兩班文學이 갖는 品位注意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12]
그는 입으로만 口號를 외치고 現場에 投身하지 않는 一部
大學生
들과 大學院生들에 對해서도 批判하였다.
그들은 勞動文學이나 民衆文學 또는 社會主義的 리얼리즘 理論 等을 그저 재미있게 工夫할 수 있는 素材距離로만 생각하고 있을 뿐, 스스로의 삶 自體를 文學觀과 一致시키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12]
그러나 그의 內部省察론, 自省論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都大體가 요즘의 우리나라 小說들은 그 길이가 너무 길다. 걸핏하면 대여섯卷 짜리 大河小說이요, 短篇도 100枚가 넘는 게 普通이다. ...(以下 中略)... 이러한 現象 亦是 敎養主義 小說의 流行과 짝을 이루는, 作家들의 物量主義 選好 現象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나는 본다.
[12]
[30]
전북대학교
新聞
放送學
과
敎授
康俊晩
은 이를 놓고 “大河小說 가운데 萬人이 稱讚해마지않는 有名 文人들의 大河小說度 包含되어 있지 않는가” 하며, ‘꼭 必要한 大河小說度 있지만’이라는 單語 하나만 달아줘도 좋을 터인데 그는 그런 수고를 할 뜻이 없었다며 아쉬워했다.
[31]
그는 韓國의 敎團이 學生에게 權威的인 것도 批判하였다. 그에 依하면 敎育者가 學生을 아랫사람처럼 對하는 것도 問題點으로 指摘하였다. 康俊晩에 依하면 그는 平素 “敎授님들, 學生은 아랫사람이 아닙니다.”라고 主張하는 敎授였다.
[15]
[32]
以後 大學校 敎授와 學校의
敎師
들이
學生
들을 非人格的, 權威的으로 對하는 風土에 對한 論難이 持續되었고, 學生들의 人權에 對한 社會的 關心度도 增加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옵저버 지 1991年 5月號에 같은 題目의 칼럼을 올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