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邱FC는
2002年 FIFA 월드컵
의 蹴球 붐에 힘입어
大韓民國
最初로 市民 球團의 槪念을 導入하면서 創團되었다. 월드컵이 끝난 後 2002年 8月 6日 創立 會議를 始作으로 2002年 10月 9日 (週)大邱市民프로蹴球團이라는 公式 名稱으로 첫 創立 總會를 열면서 創團하게 된다. 以後 2002年 11月 15日부터 12月 24日間 1次 시민주 公募를 實施해 127億원의 資金을 確保하였으며, 2002年 12月 26日
한국프로축구연맹
에 依해 創團이 承認되었다. 2003年 3月 19日 公式 創團式을 擧行하였으며
[3]
初代 監督으로 1980年代와 1990年代
大韓民國 國家代表팀
을 이끌었던
박종환
을 選任하고
K리그 2003 시즌
에 參加하였다. 같은 해
光州 상무 不死鳥
의 參加로 總 12個의 팀이 리그를 構成하였다. 첫 番째 시즌에 오주포가 主張으로 選任되었고, 김학철이 副州長으로 任命되었다. 두 名의
체코
選手인 로만과 얀을 迎入하였고,
튀르키예 國家代表
出身 守備手
라힘 자파르
또한 選手 生活의 黃昏期에 大邱로 왔다.
한便,
大邱廣域市
를 象徵하는 새가
禿수리
라 '大邱 이글스'로 定해졌으나 市民들과 프로野球
한화 이글스
팬들의 反對로
[4]
霧散됐다.
K리그
에 첫 參加한 2003年,
대구월드컵경기장
에서 열린 創團 첫 리그 競技
水原 三星 블루윙즈
와의 競技에서 敗한 것이 첫 K리그 公式 競技였고, 4月 2日
安養 LG 치타스
戰에서
오주포
가 골을 記錄하며 球團 窓단골의 主人公이 되었다. 以後
2003 K리그
는 11位로 마쳤다.
2003年 FA컵
에서는 32强에서
명지대학교
, 16强에서는
建國大學校
를 꺾고 8强에 進出했지만
蔚山 현대
에게 敗하고 말았다.
仁川유나이티드 FC
의 參加로 13팀이 競爭限
2004 시즌
에서는
富川 SK
,
仁川유나이티드 FC
,
大田시티즌
에 이어 10位에 올랐고,
2005 시즌
에는 9位에 올라 처음으로 한 자리 順位를 차지하게 되었다.
2006 시즌
을 앞두고 參加한 統營컵에서
仁川유나이티드 FC
,
퀸즐랜드 露語
, 그리고
베이징 궈안
을 제치고 優勝을 차지하였다. 統營컵은, 大邱에게는 첫 番째 優勝 트로피를 안겨 준 大會였다.
[5]
그러나 막상 正規 리그에서 그들의 成跡은 悽慘했다. 前期 리그에서 單 2勝을 따내었다. 그러나 後期 리그에서 그들은 6勝을 記錄하며 4位에 올랐고, 最終 成跡 7位를 記錄했다.
2006~2009
編輯
2006年 시즌이 끝나고 契約이 滿了된
박종환
監督과 재계약하지 않기로 했다.
[6]
그리고 2006年 12月 1日
大韓民國
의 代表的인 攻擊手였던
변병주
가 2代 監督으로 選任되었다.
[7]
변병주
는 大邱 FC의 監督으로 選任되기 前까지 프로 팀 監督 經驗이 全無했다.
2007年에
K리그
는 制度를 바꿔 6强 플레이오프 制度를 導入했다. 參加 元年부터 꾸준히 成績을 상승시켜 온 大邱는 6强에 對한 希望을 품고
2007 시즌
에 突入했다. 그러나 6勝을 따내며 12位에 그쳤다. 그 渦中에도 2006年 시즌 後
仁川 유나이티드 FC
에서 트레이드로 迎入한
이근호
는 韓國인 最多 得點을 記錄했다.
三星 하우젠컵 2007
에서는 그룹 스테이지에서 탈락했다. 그러나
루이지뉴
가 9競技에서 7골을 터뜨리며 大會 得點王에 올랐다.
FA컵
에서는 16强에서
仁川 유나이티드 FC
에 敗하고 말았다.
2008 三星 하우젠 K리그
에선 攻擊 蹴球를 强調하였고, 相對 팀에 相關없이 꾸준한 攻擊을 펼친 結果 試合마다 많은 골이 나는 팀으로 有名해졌다. 시즌 最多 得點인 46點(
水原 三星 블루윙즈
와 同率)을 記錄함과 同時에 또한 最多 失點人 58點을 記錄하였고, 無勝負 競技 亦是 單 2競技에 不過하며 勝敗에 相關없이 흥미로운 競技 內容을 펼친 德에 '銃알 蹴球', '
K리그
의 로맨티스트'라는 別名을 얻기도 하였다.
[8]
2009 K리그
에서는
이근호
,
진경선
,
에닝요
等 팀의 主軸 選手들이 모두 移籍하는 바람에 크게 不振한 모습을 보였고 結局 最下位로 시즌을 마감하게 되었다. 大邱 FC 서포터즈를 中心으로
변병주
監督의 辭任을 促求하는 運動이 벌어지기도 하였으나 2009年 11月,
변병주
監督과 大邱 FC는 1年 再契約에 合意하였다.
[9]
그러나 재계약한 지 얼마 되지 않아 傭兵 迎入 過程에서 에이전트들과의 非理에 摘發되어
변병주
監督은 2009年 12月 7日 不名譽 辭退하였고, 國內 프로스포츠 監督 中 처음으로 選手 入團과 關聯된 金品 收受 嫌疑로 拘束되었다.
[10]
갑작스레 空席이 된 監督 자리를 메우기 위해 公開 監督 共謀를 하게 된 結果, 27名의 應募者 中
2009 시즌
까지
FC 서울
의 首席코치를 歷任했던
이영진
이 2009年 12月 22日 者로 大邱 FC의 第 3代 新任 監督으로 選任되었다.
[11]
2010~2011
編輯
2010 K리그
에는
대구스타디움
의 陸上 트랙이
2011年 世界 陸上 選手權 大會
의 開催를 위해 補修 工事에 들어감에 따라
2011 시즌
까지
대구시민운동장
을 홈 球場으로 使用하게 되었다.
2008 K리그 드래프트
에서 合流한
房大宗
은 새로운 主張으로 選任되었다.
2009 시즌
이 끝나고 떠났던
레오
가 새 監督
이영진
의 부름을 받고 다시 돌아왔고, 또다른
브라질
의 스트라이커
안델송
이 合流하였다. 어린
아르헨티나
의 守備手
루카스 바수알道
度 大邱에 合流하였으나 한番도 그라운드에 서지 못하고 시즌 中盤에 팀을 떠났다.
안델송
은 競技를 뛰었으나 큰 活躍을 하지 못하고 같은 때에 떠났다. 代身 아르헨티나 攻擊手
이삭
이 合流하여 後半期에 몇 競技를 뛰었다.
8月 15日 열린
2010 K리그
17라운드
浦項 스틸러스
와의 競技에서 흐린 날씨에 저녁 時間이 되어 어두워지고 있음에도
대구시민운동장 野球場
에서 照明을 모두 使用한 탓에 電力 不足을 憂慮하여 照明塔을 作動시키지 않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서포터즈들과 關係者들의 抗議로 後半戰부터는 3個의 照明塔을 稼動하기는 하였으나, 競技 以後 蹴球팬들과 球團 關係者들은 蹴球場을 考慮하지 않은 野球場의 照明 使用과 프로蹴球聯盟의 安逸한 事前 對應을 叱咤하였다.
[12]
大邱는 지난 시즌과 마찬가지로 좋지 못한 競技를 펼쳤고,
光州 常務
와 같은 勝點을 記錄하였지만 得失差에 밀려 15位로 리그를 마치었다. 守備는 57點을 獻納했다.
조형익
은 8골로 팀 內 最多 得點에 올랐다.
2011 시즌
中盤에
勝負造作 事件
에 連累된
온병훈
,
조형익
等이 退出되어 팀을 떠났다. 核心 主軸을 잃었지만 大邱 FC는 16個 팀 中 12位에 오르며 僅少한 發展을 이루었다. 그러나 시즌이 끝난 後, 契約 期間이 1年 남은
이영진
監督을 更迭하였다.
[13]
그리고 이틀 後인 11月 2日,
브라질
出身의
某아시르 페레이라
를 새로운 監督으로 選任하였다.
[14]
2012~現在
編輯
브라질
有數의 名門 클럽과 브라질 U-20, U-23 國家代表팀의 首席코치職을 遂行한 經驗이 있는
某아시르 페레이라
監督은 自國 選手들에 對한 情報力을 바탕으로
브라질
靑少年 代表팀 出身의
레안드루 리마
와
코린치앙스
時節 有望株로 이름을 날렸던
지네郵送
을 迎入하며 탄탄한 外國人 選手 라인을 構築하였고
이진호
,
유경렬
等을 迎入하며 攻守에 걸친 補强을 實施하였다. 開幕 以後 꾸준히 中位圈 順位를 維持하며 企業 球團을 除外하고는 唯一하게 上位 스플릿에 屬하는 8位 以內의 順位를 維持해 왔으나 28라운드에 9位로 下落한 後 스플릿을 나누는 마지막 라운드인 30라운드에서
서울
에 敗하며 下位 스플릿에 屬하게 되었다. 하지만 實觀衆 集計로 大多數 K리그 팀들의 平均 觀衆 數가 下落한 狀況에서 平均 觀衆 數 上昇을 記錄하여 地域 팬들의 關心을 끌어모으는 데 成功하였다.
2012 시즌
大邱FC는
某아시르
監督과의 再契約을 檢討하였으나 上位 스플릿으로 進出하지 못했다는 點과 外國 國籍의 監督과 코치들을 데리고 있는 것이 財政에 負擔이 된다는 理由로
某아시르
監督을 재계약하지 않았다.
[15]
以後 首席코치職을 遂行하던
당성증
을 監督으로 昇格시켰으나,
2013 시즌
8라운드까지 勝利를 거두지 못하는 不振에 빠지자
당성증
監督은 成績 不振의 責任으로 自進 辭退하고 後任 監督으로 K리그 得點王 出身의
백종철
을 選任하였다.
[16]
2013 시즌
大邱는 33라운드까지는 12位를 維持하고 있었으나 34라운드 以後
江原 FC
에 밀려 13位로 처졌고, 리그 最終戰에서 0:0 無勝負를 記錄하여 順位를 뒤집지 못하고
K리그 챌린지
로 降等되었다. 시즌 終了 後 백종철 監督이 辭任하였고
최덕주
監督이 赴任하였다.
K리그 챌린지
에서의 첫 시즌인
2014 시즌
이 한창이던 2014年 8月 末에
조광래
前
大韓民國 國家代表팀
監督이 團長으로 赴任하였고, 2달 後에는 球團의 代表理事를 兼任하게 되었다.
[17]
프런트로 일하기 始作한
조광래
團長은 老朽化된
대구시민운동장
主競技場을 蹴球專用球場으로 리모델링할 것을 提案했고, 그의 提案이 收容되어 2017年부터 工事에 들어갔다. 한便 챌린지에서는 7位라는 실망스러운 成績으로 시즌을 마무리하였고,
최덕주
監督은 任期를 채우지 못한 채 시즌 後 電擊 解任됐다.
2015 시즌
을 앞두고 2010年부터 2011年까지 大邱를 이끌었던
이영진
監督이 復歸했다.
2015 시즌
꾸준히 上位圈을 維持하다 35라운드에는 마침내 1位에 올라섰다. 하지만 리그 2競技를 남기고 2位로 떨어지며 優勝과
K리그 클래식
自動 昇格의 機會를 놓친 채
昇降 플레이오프
에 參加하였다. 플레이오프에서 다시 昇格의 機會를 노렸으나
水原 FC
에 2-1로 敗해 시즌을 마감하였다.
2016年 8月 12日 成績 不振으로
이영진
監督이 辭退하였다. 以後
손현준
코치가 監督 代行을 맡아 殘餘 시즌을 치렀고, 2016年 10月 30日
大田 시티즌
과의 홈 競技에서 勝利해 리그 2位 자리를 守成하며
K리그1
昇格에 成功했다.
[18]
[19]
以後 指導力을 인정받은 손현준은 正式 監督으로 昇進하였다.
[20]
2017年 5月 22日 손현준 監督이 成績 不振으로 辭任하자,
안드레
코치가 監督 代行을 맡았다.
[21]
안드레는 特有의 指導力을 바탕으로 大邱의 上昇勢를 이끌었고, 10月 28日
浦項 스틸러스
戰에서 2:1 勝利를 거두며 K리그 클래식 殘留를 이끌었다.
指導力을 인정받은 안드레 코치는 監督으로 昇格되어 2018年부터 大邱를 이끌게 되었다.
[22]
2018年에도
K리그1
殘留에 成功했으며, 創團 첫
FA컵
優勝을 차지하며 2019
AFC 챔피언스리그
進出을 確定지었다. FA컵 優勝이기는 하지만, 모처럼 거둔
大邱
緣故 프로 스포츠團의 優勝이다. 主戰 골키퍼
조현우
는 球團 歷史上 最初의 월드컵 國家代表 選手로 記錄됐고, 월드컵을 마친 後 와일드카드로 出戰한 아시안게임 金메달로 兵役特例를 얻으며 球團의 福덩이로 登極했다.
2019年에는 시즌을 앞두고
DGB大邱銀行파크
가 開場瑕疵, 홈 球場을
DGB大邱銀行파크
로 移轉했다. 이에 따라
대구시민운동장
은 第2 홈구장에서 메인 홈구장으로 昇格됐으며, 대구시민운동장의 綜合運動場 機能은 自然히
대구스타디움
으로 移管됐다.
2019年 基準으로는
조현우
效果, 新築 蹴球專用球場인
DGB大邱銀行파크
가 가져온 效果에
三星 라이온즈
의 不振으로 인한 反射 利益이 더해지자 前年 對比 2倍 넘게 觀衆 數가 增加하여 2019 K리그 名實相符 最高의 人氣 球團으로 떠올랐으며, 只今도 人氣 球團의 地位를 누리고 있다. 이로 인해 大邱는 野球의 都市에서
蹴球 特別市
로 不過 1年 만에 탈바꿈하였다. 여기에는
조광래
代表理事의 힘도 크게 作用한다. 結局 大邱 FC는 創團 첫 上位 스플릿 進出로 成功的인 시즌을 보냈다. 팀의 主軸인
세징야
와
조현우
는 K리그1 베스트 11에 選定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