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年
11月 13日
에 KBS 社長候補推薦委員會(委員長 홍수완)는 社長候補 共謀者들 가운데에서
이병순
社長과 金仁圭 디지털미디어協會長,
강동순
前 放送委員(以上 與黨側 推薦),
이봉희
前 美洲 KBS 社長(野黨側 推薦),
홍미라
전국언론노동조합 KBS契約職支部長(野黨側 推薦) 等 5名을 最初 候補者로 KBS理事會에 推薦했다.
[2]
11月 18日
KBS理事會는 次期 社長으로 김인규氏를 選定하였다.
[3]
이에 對하여 KBS勞動組合은 大選 當時 이명박 候補의 特報를 지낸 前歷을 問題삼아 社長 任命이 强行될시 總罷業을 公言하였다.
[4]
11月 18日 次期社長 選出을 위해 열린
KBS理事會
에서 1次 投票에서 在籍 過半數(6票以上) 得票者가 나오지 않았고 金仁圭와
이병순
이 決選投票에 進出하였다. 金仁圭 候補는 6名의 理事의 支持를 얻었고,
이병순
候補는 1票를 얻었다. 나머지 理事 4名은 棄權했다. KBS理事會는 金仁圭 候補를 次期 KBS社長候補로 李明博 大統領에게 任命提請한다. 社長選定과 關聯하여 投票에 參與했던 野黨側 理事 고영신, 진홍순 理事는 取材陣과의 懇談會를 통해 候補者面接 過程에서 候補者 中 金仁圭 候補가 斷然 頭角을 나타냈다고 밝혔다. 고 理事는“김인규 候補는 博學多識하고 KBS에 對해 누구보다 잘 알아 어떤 質問에도 막힘없이 答했다. 放送 全般에 對해 꿰뚫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 面에서는 欠 잡을 데가 없었다"고 말했다.
[5]
KBS理事會의 決定에 對해 言論界와 KBS內部組織, 그리고 與野間에 論爭을 일으켰다. 于先
KBS勞動組合
은 이런 結果에 對해 '落下傘 沮止와 放送掌握 粉碎 '總罷業 鬪爭'을 宣言한다!'라는 題目의 聲明을 發表하고 反對意思를 밝혔다.
[6]
김덕재
KBS PD協會長은 "이番 社長選任 過程에서 KBS勞組를 비롯한 構成員들은 政治獨立的 社長 選任을 위해 努力했으나 사추위는 껍데기에 그쳤고, 理事會는 擧手機로 轉落했다"며 "特別多數制와 公開面接도 導入되지 않았고, 密室理事會를 통해 言論特報 金仁圭를 落下傘 태워 다시 내려보냈다"고 指摘했다.
[7]
11月 20日
에 열린
國會
文化體育觀光放送通信委員會
에서는 金仁圭 KBS社長 內定者에 對해 與野議員과의 열띤 贊反論爭이 일었다.
전병헌
민주당 文防衛 幹事는 "公營放送인 KBS 社長에 지난 大選에서 特報를 맡았던 金仁圭 氏를 推薦한 것은 KBS를 直接 掌握하겠다는 意圖를 露骨化 한 것"이라고 批判했다. 이에 對해 與黨인
한나라黨
의
진성호
議員은 "KBS 社長 推薦自家 政治權에 몸 담았던 것은 欠缺이 있지만 이 때문에 그가 가진 長點들을 다 無視할 수는 없다"고 말했고 같은 黨
안형환
議員과
羅卿瑗
幹事도 "KBS 社長은 理事會가 獨自的인 權限에 따라 決定한 것으로, 이를 놓고 常任委에서 曰可曰否하는 것은 越權"이라고 線을 그었다.
[8]
11月 23日
李明博 大統領은
KBS理事會
가 新任 社長 候補로 任命提請한 金仁圭 候補者의 任命同意案 電子文書에 署名하였다. 金仁圭 社長의 任期는
11月 24日
부터 3年間이다.
[9]
11月 24日 午前 10時 豫定된 就任式에 參加하기 위해 汝矣島 KBS本館 앞에 到着한 金仁圭 社長은 KBS勞組의 沮止로 一旦 한次例 KBS本館 進入이 挫折되었다.
[10]
午後 2時 勞組의 出入을 遮斷한 채 TV스튜디오에서 就任式을 마쳤다. 立場을 저지당한 勞組員들이 扶助에 進入하여 社內放送을 通한 就任式 中繼를 中斷시키는 騷動이 있었다.
[11]
KBS勞組는 '李明博 大統領 特報 金仁圭 社長 反對 및 放送掌握 粉碎를 위한 KBS 總罷業 贊反投票'를 實施했다.
2009年
12月 3日
全體 組合員 4203名(投票者 3553名) 가운데 2025名이 罷業에 贊成한 것으로 나와 贊成率이 在籍 對備 48.15%에 그쳐 罷業이 否決되었다.
[12]
- 金仁圭 新任 KBS社長은 2009年 11月 24日 午後에 汝矣島 KBS本社 TV스튜디오에서 열린 就任式에서, <<우리 모두 하나가 되어 公營放送의 새로운 歷史를 만들어 나갑시다>>라는 題目의 就任辭를 통해 KBS를 確實한 公營放送으로 만들기 위해 努力하겠다면서 向後 KBS의 經營方針을 밝혔다. 大大的인 蕩平人事를 펼치고, 職種間 葛藤을 없애며, 急變하는 미디어 環境에 戰略的으로 對應하고 視聽者를 最優先時 하는 組織으로 바꾸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懸案 課題로는 29年間 2500원으로 묶여있는
受信料
現實化를 위해 最大限 努力하겠다고 밝혔다. 金仁圭 新任社長은 無料地上波 디지털TV플랫폼 構築에 對한 一端도 밝혔다. 그는 英國의 世界的인 公營放送
BBC
가 主導하는
프리뷰
처럼 韓國의
無料 地上波 디지털 TV
플랫폼, 假稱
케이 뷰 플랜
(K-VIEW PLAN)을 主導하겠다고 밝혔다.
[13]
- 就任 以後 첫 人事發令은
11月 25日
字로 發令받은 박갑진 人力管理室長(局長級), 백운기 祕書室長, 이선재 南北協力團長(本社 팀長級)이다.
[14]
金仁圭 KBS社長이 코디마(KoDiMA, 韓國디지털미디어産業協會)協會長 時節 靑瓦臺를 通한 外壓으로 通信3社에 基金을 出演하려했다는 疑惑關聯이다. 2009年 10月 7日 國會의 放送通信委員會 國政監査에서 野黨은 靑瓦臺 某 行政官이 移動通信社에 코디碼에 對한 基金出捐을 壓迫했다는 疑惑을 펼쳤다. 民主黨
전병헌
議員 等은 "靑瓦臺 朴某 行政官이 8月 初 SK텔레콤과 KT, LG텔레콤 關係者들을 靑瓦臺로 불러 코디碼에 基金 出捐을 要求했다"면서 具體的으로 SK텔레콤과 KT에 100億 원씩, LG텔레콤에 50億 원을 要求했다고 밝혔다. 野黨議員들의 追窮에 對해 최시중 放通委員長은 "適切하지 않은 일"이라고 一部 잘못을 是認하면서 "眞相 調査 後 不適切한 것으로 結論나면 措置를 取하겠다"고 答했다.
[15]
한便 박선규 靑瓦臺 代辯人은 "放送通信 關聯 協會가 만들어지면 會員社들이 基金을 造成하는 것은 一種의 慣行이었다"면서 "通信 3社를 包含한 會員社들 스스로 基金 募金을 決定한 事案으로 안다"고 解明했다.
[16]
이 問題와 關聯 野黨議員들은 文化體育관광부 豫算案 審査會議에 앞서 基金募金 疑惑에 關한 眞相調査小委員會 構成을 要求하며 繼續하여 政治爭點化하고 있다.
[17]
KBS次期社長 候補 面接過程에서 金仁圭 候補者가 한 發言에 對해 KBS勞組組合과 KBS理事會 事務局의 主張이 엇갈리고 있다.
[18]
이 外에도 KBS의 報道와 時事프로그램에 對하여 政權 눈치보기를 助長하고 있다는 批判을 받고 있다. KBS 新入 記者들은 集會를 갖고 金仁圭가 "입맛에 안 맞는 記事는 막고 批判的인 記者는 잡아가두던 軍事政權의 化石이, 저희가 다니고 있는 會社에서 되살아나고 있다"고 批判했다.
[19]
以後
2010年
12月 30日 楊正哲 前 靑瓦臺 祕書官은 金仁圭가 靑瓦臺 高位 人士를 만나 "KBS를 掌握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말한 事實을 暴露하면서 放送 掌握 論難이 加重되기도 했다.
[20]
KBS
追跡60分
에서 4大江 事業에 對해서 다룬 內容이 갑작스레 放送이 取消되고, 이에 對해 抗議하는 懸垂幕을 걸었다는 理由로 新入 PD들을 무더기 懲戒하면서 KBS 勞組의 反撥을 사기도 했다.
[21]
金仁圭 社長은 1982年 記者 時節 <特別立體 企劃, 第5共和國 1年>을 製作하였다. 該當 特輯 프로그램에서는 "第5共和國 出帆 1年은 그 以前의 어지러움과 어두움과는 反對의 安定과 밝음으로 完全히 바꿔놓은 것", "온 國民의 團合과 自身의 勇氣와 指導者의 領導力이 渾然 一致를 이룬데서 發揮 될 수 있었다" 等의
全斗煥
을 美化하고 讚揚하는 內容이 담겨 있었다. 本人은 "이제 韓國을 보는 世界의 눈은 分明히 달라졌고 驚異의 눈길로 바뀌었다. 그것은 第 5共和國 出帆과 함께 전두환 大統領의 歷史的인 美國 訪問과 아세안 巡訪 그리고 88年 올림픽 서울 誘致 等이 成功的으로 이뤄져서 大韓民國이 世界的인 先進國 隊列에 浮上했기 때문"이라는 發言을 했다.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