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대학교
經營學科 2學年을 마치고 中退하였다.
청주대학교
時節, 山岳班에서 專門的 登攀 訓鍊을 받았었다. 中退 後 淸州 煙草 製造廠에서 勤務하기 始作하며 職場 內에 '相當 山岳會'를 組織해 活動하였다.
1970年
3月
에는
對한 山岳 聯盟
會員으로 活動을 始作했고,
1974年
~
1977年
까지
에베레스트 山
遠征隊 訓鍊에 參加하였다.
1975年
엔 第1次 偵察隊로
에베레스트 山
現地 訓鍊에 參加하고
1977年
,
에베레스트 山
遠征隊 正規 隊員으로 選拔된다.
1971年
네팔
政府에 入山許可書를 提出한 지 6年 만인
1977年
에 登攀할 수 있었고, 그해
9月 15日
낮 12時 50分
에베레스트 山
을
韓國人
最初로 登頂하였다. 우리나라는 世界에서 여덟番째로 에베레스트를 登頂한 國家가 되었다. 當時 高相敦이 한 말은 “여기는 正常. 더 오를 곳이 없습니다”였다. 頂上의 눈을 손으로 파헤친 뒤
聖書
(
聖經
) 한 勸하고
寫眞
석 張을 묻음으로써 먼저 간 同僚들을 追慕했다고 한다.
1979年
알래스카 山脈의
디亂離山
[1]
(6194m) 遠征隊에 參加하여 같은 해
5月 29日
登頂에 成功하였으나, 下山 途中, 이일교와 함께 海拔 6,000미터 地點에서 1,000m
[2]
아래의 가파른 絶壁 아래로 墜落하여 30歲의 젊은 나이로 死亡하였다. 박훈규는 運이 좋게도 목숨은 건졌으나, 10個의 발가락과 7個의 손가락을 잃는 重傷을 입었다.
漢拏山
海拔 1,100m 高地에 墓所가 있다. 그가 죽은 後,
高相敦隊員 記念事業會
가 組織되어 해마다 追慕事業을 벌이고 있다.
2002年
6月
中旬에
에베레스트 山
에서 淸掃 活動을 벌이던 團體에 依해 高相敦 遠征隊의 旗발이 發見되었는데, 旗발에는 '77 K.E.E(77: 登攀鳶島, K.E.E: Korea Everest Expedition)'라고 씌어 있다.
- ↑
매킨리鳳이라고도 부르며,
에베레스트
에 비해 山勢가 엄청나게 가파른데다
北極圈
에 位置해 있어
强風
하고
블리자드
, 零下 40度 以下의 痼疾的인 酷寒으로 因해 登攀이 어려운 곳이다.
- ↑
250層
摩天樓
에 該當하는 높이로,
부르즈 할리파
보다도 더 높다.
外部 링크
編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