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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처럼 즐겁게 刑場으로, 天國으로 : 李德一의 時代에 挑戰한 사람들: 칼럼 : 한겨레21
Home > 칼럼 > 李德一의 時代에 挑戰한 사람들 目錄 > 內容     2008年02月14日 第697號
아이처럼 즐겁게 刑場으로, 天國으로

풍양 조氏의 迫害에서 天主敎를 지킨 정하상

▣ 李德一 歷史評論家

父親 정약종(丁若鍾)과 異服兄 정철상(丁哲祥)李 死刑당하던 純祖 1年(1801) 2月25日 정하상(丁夏祥·1795~1839)은 6살에 不過했다. 父親이 死刑당하던 날 정하상은 어머니, 누이同生과 함께 獄에 갇혀 있었다. 1800年 正祖가 死亡하자 垂簾聽政하게 된 定順王后는 正祖 때 成長한 南人들을 除去하기 위해 純祖 1年(1801) 天主敎徒를 逆賊으로 다스리겠다는 私學(邪學) 嚴禁 敎書를 내렸는데, 丁夏祥의 父親이 이때 死刑당했던 것이다. 財産이 沒收되면서 玉에서 풀려났지만 갈 곳이 없었다. 丁夏祥과 母親 類素砂(柳召史), 2살 어린 누이 정정혜(丁情惠)는 이리저리 流浪해야 했다. 정하상은 洗禮名 바오로를 따서 情報錄(丁保祿)이라 불리는데, 1890年 홍콩 主敎 約網(若望)李 정하상이 쓴 ‘商才相서’(上宰相書·재상에게 올리는 글)를 刊行하면서 ‘情報錄 日記’를 덧붙였는데, 이것이 그에 對한 基礎 史料이다. 여기에 따르면 “(釋放된 뒤) 餉穀(鄕曲)을 流浪하다가 叔父 집에 들게 되었는데, 이 사이에 當한 苦楚는 붓 하나로 쓰기가 어려웠다”라고 쓸 程度로 많은 苦痛을 겪었다. 叔父는 茶山 丁若鏞을 뜻하는데, 丁若鏞은 百部 丁若銓과 함께 流配 中이었다.


△ 19世紀 西洋의 神父들이 主로 머물던 北京北天週當. 정하상度 이곳에서 朝鮮에 와줄 新婦를 찾았을 것이다.(사진/ 권태균)

아버지 死刑당한 뒤 떠돌아

叔父 집에 얹혀살게 되면서 밥은 굶지 않게 됐지만 問題는 如前했다. 어머니 流蘇社가 天主敎를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丁若鏞은 正祖 21年(1797) ‘同副承旨를 辭讓하는 上疏’에서 天主敎에 對해 “當初에 (西學에) 물든 자취는 아이의 장난과 같았는데 知識이 자라자 문득 敵手(敵讐·怨讐)로 여기고, 分明히 알게 되어서는 더욱 嚴하게 排斥하였다”라고 밝혔음에도 귀양간 것이었다. 이런 狀況에서 天主敎를 버리지 않은 一家를 따뜻하게 對해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丁若鍾이 “兄과 동생은 이미 天主敎를 버렸다”고 證言해서 丁若銓과 藥用이 목숨을 건졌으므로 이들을 거두어준 것인지도 몰랐다. ‘情報錄 日記’는 “정하상은 이미 廢고(廢固)되었기 때문에 親戚과 奴僕들의 迫害를 甚하게 받았다”라고 傳하고 있는데, 實狀은 天主敎를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迫害받은 것이었다. 파리 外方傳敎會 宣敎師인 샤를 달레(1829~78)는 이때의 狀況을 더 仔細하게 描寫하고 있다.

“여러 사람이 아직도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鄭氏 一家는 天主敎란 말만 들어도 벌벌 떨며, 그런 校를 繼續 믿으려 한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親戚들은 丁夏祥과 그 집안 食口들이 天主敎를 버리게 하려고 온갖 努力을 기울였다. 痛烈한 非難, 脅迫, 蔑視, 조蘇, 甚至於 虐待까지도 모두 動員되었다.”( <한국천주교회사> 달레, 86~87쪽)

그러나 ‘情報錄 日記’에서 “귀기울여 어머니의 가르침을 따라 祈禱文(經文)을 배울 수 있었다”라고 쓰고 있는 것처럼 정하상은 母親 類小使에게 天主敎 信仰을 傳受받았다. 그러나 어머니에게는 體系的인 天主敎 敎理를 배울 수 없었기 때문에 10代 後半의 정하상은 咸鏡道 霧散(茂山)에 流配 中이던 조동섬(趙東暹)을 찾아 떠났다. 조동섬은 鄭氏 一家의 故鄕인 마재 附近의 양근(楊根) 出身으로서 亦是 辛酉迫害에 連累됐다가 겨우 死刑을 면하고 北方으로 流配된 人物이었다. 달레는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여러 달 동안 그(조동섬)와 함께 지내면서 敎理 硏究와 漢文 學習에 끊임없이 專心했다”며 “그에게서 自己의 크나큰 計劃에 對하여 激勵를 받고 돌아왔다”고 傳하고 있다. ‘自己의 크나큰 計劃’이란 朝鮮에 다시 新婦를 入國시키는 일이었다. 中國人 神父였던 周文謨(周文謨)는 辛酉迫害 때 國境 附近까지 逃走했다가 信者들을 버리고 避할 수 없다는 생각에 義禁府에 自首해 1801年 5月 殉敎했다. 以後 朝鮮에는 新婦가 없었다.

서울에 돌아온 정하상이 조동섬의 親戚인 양근 出身의 早熟(趙淑)의 집에서 居住하게 되는 것은 조동섬의 紹介였을 可能性이 높다. 정하상은 ‘自己의 크나큰 計劃’을 實踐하기 위해 譯官의 종이 되었다. 그래야 北京에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정하상은 滿 21살 때인 純祖 16年(1816) 드디어 北京에 들어가 北京敎區의 神父들을 만났으나 神父 派遣을 約束받지는 못했다. 그는 抛棄하지 않고 繼續 北京으로 가서 新婦 派遣을 要請했다. ‘情報錄 日記’는 “처음에는 許諾해주지 않을 것 같더니 다섯 番째에 許諾을 받고 변문(邊門)에서 기다리면서 틈을 타 맞이하려 나갔으나 神父는 오지 않았다”고 傳하고 있다. 1805年 中國에서도 天主敎 迫害가 發生해 聖堂과 神學校들이 破壞되고 中國人 神父들이 殺害됐기 때문에 朝鮮에 新婦를 派遣할 餘力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하상은 抛棄하지 않았다. 叔父 집에서 어머니와 女同生을 데리고 漢陽으로 移住하는 한便 繼續 北京으로 가서 新婦 派遣을 要請했다.


△ 정하상이 殉敎를 覺悟하고 作成한 良心宣言人 ‘商才相서’ (寫眞/ 권태균)

中國에 가서 新婦를 要請하다

1824年부터는 譯官 유진길(劉進吉)李 加勢하면서 狀況이 好轉됐다. 神父 派遣을 要請하는 劉進吉의 長文의 便紙를 받은 敎皇 레오 12歲가 朝鮮을 獨立된 布敎地로 指定해서 敎皇廳에 直屬시키고 布敎事業은 파리 外方傳敎會에 맡기기로 決定했던 것이다. 파리 外方傳敎會의 브뤼기에르 神父가 朝鮮 宣敎를 自願하고 나서자 敎皇 그레고리오 16世는 1831年 9月9日 朝鮮敎區를 設定하고 브뤼기에르를 初代 敎區長으로 임명했다. 朝鮮이 獨立 敎區로 格上된 것이다. 1832年 7月 自身이 朝鮮敎區 初代 敎區長에 任命된 事實을 알게 된 브뤼기에르는 곧바로 朝鮮으로 길을 떠났다. 旅費가 不足했으나 그는 싱가포르와 필리핀·마카오를 거쳐 泗川(四川)으로 오는 途中 모방 神父를 만나 합류시켰고, 샤스탕 新婦도 合流했다. 브뤼기에르는 朝鮮 立國의 機會를 엿보았으나 朝鮮 信者들과 連結이 원활하지 않아 쉽지 않았다. 純祖 33年(1833) 겨울 劉進吉은 奴婢 出身 趙信喆(趙信喆)과 함께 로마 留學 出身인 中國人 유방제(劉方濟) 新婦를 入國시키는 데 成功했다. 유방제는 로마 敎皇廳 布敎誠意 許諾을 받아 朝鮮에 入國한 것인데, <일성록>(日省錄) 憲宗 5年(1839) 8月7一助는 유방제가 서울 丁夏祥의 집에 묶었다고 傳하고 있다. 그러나 유방제 新婦가 “北京 主敎의 管轄 밑에서 혼자 朝鮮 布敎地를 맡아가지고 있기를 希望”하면서 問題가 發生했다. 自身이 朝鮮 布敎를 專擔하려 했기 때문에 브뤼기에르 神父 入國에 誠意를 보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滿洲에서 朝鮮 入國길을 기다리던 브뤼기에르 新婦는 1835年 10月 死亡하고 말았다.

憲宗 2年(1836) 1月 모방 神父는 朝鮮 天主敎人들의 案內로 드디어 朝鮮으로 向할 수 있었다. 그는 主로 水門을 통해 城을 通過하는 方法으로 危機를 넘기면서 漢陽 近處까지 이르렀다. 모방 神父는 漢陽 到着 이틀 前에야 유방제 新婦가 보낸 朝鮮 天主敎徒 5名을 만나는데, 정하상을 ‘中心이 되는 引導者’라고 表現하고 있다. 정하상은 朝鮮 天主敎徒들의 中心 人物이었던 것이다. 모방 神父 亦是 丁夏祥의 집을 宿所로 삼았다. 模倣은 유방제의 問題點을 追窮한 뒤 中國으로 되돌려 보냈다. 그리고 1836年 4月 敎皇은 앙베르 神父를 새 主敎로 임명했다. 憲宗 3年(1837) 1月에는 샤스탕 神父가 入國하고, 그해 12月에는 앙베르 主敎까지 入國함으로써 神父는 3名으로 늘어났다. 模倣의 入國 當時 6千 名이 채 되지 못했던 敎人 數는 憲宗 4年(1838)에는 9千餘 名으로 膨脹했다. 朝鮮人 新婦 養成의 必要性이 더욱 커져갔다. 新婦들은 神學生 候補들을 募集했는데, 정하상이 適任이었으나 海外로 나가 工夫만 하기에는 朝鮮에서 할 일이 너무 많았다. 憲宗 2年(1836) 김대건·최양업·최방제가 神父 候補로 選拔됐는데, 國境까지 이들을 引導한 人物도 정하상이었다. 이들은 迂餘曲折 끝에 마카오로 가서 新婦 授業을 받게 된다.

朝鮮 天主敎는 1801年의 迫害를 딛고 다시 成長하기 始作했다. 母親이 傳해준 信仰의 씨앗이 크게 成長했던 것이다. 그러나 朝鮮 情勢가 다시 어두워졌다. 辛酉迫害를 主導한 老論 僻派 定順王后가 1805年에 죽은 뒤 政權을 잡은 純祖의 丈人 金祖淳은 老論 時派로서 天主敎 抑壓에 그리 積極的이지 않았다. 그러나 純祖의 아들 驍名世子는 夫人으로 풍양 조氏 조만영(趙萬永)의 딸을 맞아들이는데, 풍양 조氏는 天主敎 排斥에 積極的이었다. 順調가 在位 27年(1827) 驍名世子에게 代理淸淨을 시킨 것을 契機로 조만영·조인영(趙寅永) 兄弟를 中心으로 풍양 조氏가 勢力을 신장시켰다. 그러나 純祖 30年(1830) 驍名世子가 죽고 1834年 順調마저 죽으면서 驍名世子의 아들(憲宗)李 卽位했으나 8살의 未成年이어서 純祖의 王妃였던 순원王后 金氏가 垂簾聽政을 했다. 調整은 순원王后의 安東 金氏 勢力과 憲宗의 外家인 풍양 조氏 勢力의 角逐場이 되어갔는데, 憲宗 9年(1839·己亥年) 趙萬永이 弘文館 大提學이 되고 趙寅永이 吏曹判書, 그의 조카인 趙秉鉉이 刑曹判書가 되었고, 右議政 이지연까지 풍양 조氏에게 加擔해 풍양 조氏가 優勢하게 되었다. 이들은 순원王后 金氏에게 天主敎 抑壓을 繼續 要求했다. 드디어 憲宗 5年(1839) 4月18日 私學토치令(邪學討治令)이 내려졌다. 40餘 年 만에 다시 中央 政府 次元의 天主敎 迫害가 再開된 것이다.

天主敎가 女色을 流通한다고?


△ 京畿道 光州市 퇴촌면에 있는 丁夏祥의 墓. 그는 刑場으로 갈 때 欣快히 웃으며 수레 위에 매달려 즐거워했다고 한다. (寫眞/ 권태균)

五家作統法이 强化되면서 天主敎徒 檢擧 旋風이 일자 정하상은 主敎 앙베르를 地方으로 避身시켰다. 서울로 다시 올라온 정하상은 逮捕가 臨迫했음을 느꼈다. 그는 逮捕를 覺悟하고 自身의 見解를 밝히는 文書를 作成했는데 이것이 바로 ‘商才相서’, 곧 宰相에게 올리는 글이다. ‘商才相서’는 殉敎를 覺悟하고 作成한 良心宣言이자 信仰告白으로서 李蘗의 ‘性交要地’(聖敎要旨), 父親 丁若鍾의 ‘主敎要旨’와 더불어 朝鮮 天主敎徒들의 天主敎 認識과 信仰觀을 알 수 있게 해주는 資料이다. 丁夏祥의 豫想대로 憲宗 5年(1839) 6月 初하루 捕卒들이 집에 들이닥치자 스스로 집안에서 붉은 오라로 結縛하고 나갔다. 母親과 누이同生이 함께 逮捕됐다. 정하상은 미리 準備한 ‘商才相서’를 傳했다. ‘情報錄 日記’는 官員이 “너는 어째서 朝鮮의 風俗을 따르지 않고 다른 나라의 道理를 行하는가?”라고 묻자 “다른 나라의 훌륭한 物件은 사람들이 모두 골라 使用합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唯獨 天主 性交는 다른 나라의 道理라고 말하면서 그 참되고 올바르며 훌륭한 것을 採擇하지 않습니까?”라고 答했다고 적고 있다. ‘商才相서’도 마찬가지 見解로 쓰여 있다.

“옛날에 君子는 法을 세우고 禁令을 制定할 때 반드시 그 義理가 어떠하며, 해롭게 하는 것이 어떠한가를 안 然後에 마땅히 禁할 것은 禁止하고, 禁止하지 않을 것은 禁止하지 않았습니다.”

정하상은 ‘商才相서’에서 朝廷에서 天主敎를 批判하는 論理를 條目條目 反駁했다. 調整은 天主敎를 ‘賃金도 없고 父母도 없다’(無父無君)고 批判했는데, ‘商才相서’는 “十誡命 가운데 네 番째가 孝道로서 父母를 恭敬하라”는 것이라며 “忠과 孝는 萬臺가 흘러도 바꾸지 못하는 道理”라고 說明했다. 또한 天主敎가 “女色(女色)을 서로 流通한다”고 非難받은 것에 對해선 “이른바 女色을 流通하는 것은 짐승도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인데 하물며 거룩한 敎會에 그것을 돌립니까? 十誡命 가운데 여섯 番째가 ‘姦淫하지 말라’이고, 아홉 番째가 ‘다른 사람의 아내를 바라지 말라’는 것입니다”라며 正面에서 反駁했다. 그는 天主敎의 하느님이 <주역>(周易)이나 <시경>(詩經)에서 말하는 喪制(上帝)나 孔子가 말한 千(天)과 같은 槪念이라고 說明했다.

그러나 이미 論理 싸움이 아니어서 그는 無數한 棍杖을 맞고 周牢(周牢)兄을 當했다. ‘情報錄 日記’는 “두 넓적다리와 살갗은 모두 벗겨져 떨어져나가고 뼈가 드러났다”며 “피는 용솟음쳐 땅으로 흘러들었지만 얼굴빛은 平素와 다름없었다”고 傳하고 있다. 憲宗 5年(1839) 8月14日 朝鮮 天主敎會의 中心 人物이던 정하상은 譯官 劉進吉과 함께 西小門에서 死刑당했다. 3名의 프랑스人 神父 범세형(范世亨·앙베르), 羅伯多祿(羅伯多祿·模倣), 鄭牙各伯(鄭牙各伯·샤스탕)은 새남터에서 死刑당했다. <헌종실록>은 “정하상은 辛酉邪獄(辛酉邪獄·1801) 때 死刑당한 丁若鍾의 아들로서, 洋술(洋術·天主敎)을 家計(家計)로 삼고 유진길·趙信喆과 서로 얽어서 兩漢(洋漢·西洋人)을 맞이해 와서 新婦·敎主를 삼았으며, 또 金(金大建)·崔(崔良業) 두 어린이를 西洋에 보내어 그 洋술(洋術)을 죄다 배울 것을 起筆하였다”라고 傳하고 있다. ‘情報錄 日記’는 “正바오로가 刑場으로 나갈 때 수레 위에 매달려 서서 欣快히 웃으며 즐거워할 따름이었다”고 傳하고 있다. 정하상은 1984年 成人으로 詩聖(諡聖)됐는데 母親과 女同生도 함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