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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아리에는 處女菩薩 없습니다” : 라이프 & 트렌드 : 社會 : 한겨레21
Home > 社會 > 라이프 & 트렌드 記事目錄 > 記事內容     2005年02月15日 第547號
“미아리에는 處女菩薩 없습니다”

오손도손 모여 앉은 ‘미아리 點成村’의 40年 歷史… 새로운 力學 트렌드의 波高에 조용히 늙어가나

▣ 글 理由주현 記者 edigna@hani.co.kr ·寫眞 류우종 記者 wjryu@hani.co.kr

서울이 急膨脹하기 以前 彌阿里고개는 서울의 關門에 該當했다. 비록 길이 넓지도 包裝도 돼 있지 않았지만 1950年代 서울의 唯一한 北쪽 外郭道路였던 彌阿里고개는 韓國戰爭 때 서울의 最後 防禦線이었다. 北에서 내려온 人民軍과 서울을 지키던 韓國軍의 交戰이 彌阿里고개에서 벌어졌고, 北으로 끌려가던 家族을 눈물바람으로 배웅해야 했던 곳도 彌阿里고개였다. 大衆歌謠 <단장의 미아리고개="">는 그렇게 태어났다.

이도병氏 成功神話에 하나 둘 몰려 와

동선동·돈암동과 貞陵을 잇는 只今의 미아로, 곧 彌阿里고개는 本來 되너未고개(돈암縣)로 불리던 곳이었다. 由來에 對해서는 紛紛하다. 丙子胡亂 때 되놈(胡人)이 이 고개를 넘어 侵入해왔다고 하여 되너美고개가 됐다고도 하고, 서울에서 議政府로 나가는 마지막 고개로서 끝에 이른 고개, 마지막 고개라는 뜻으로 되너美고개라는 說도 있다. 또는 고개가 몹시 가팔라서 虛飢가 질 程度이기 때문에 밥을 되먹는 고개라는 말이 變했다고도 한다. 여러 가지 說을 綜合해보자면, 彌阿里고개 곧 되너美고개는 예로부터 傾斜가 急한 交通의 要衝地였다는 點은 分明하다.


△ 70餘곳의 占집이 들어서 있는 미아리 點成村. 視覺障礙人들의 일터이자 보금자리다.

미아리에 粘性村이 들어선 것은 1966年 視角障礙 曆術人 이도병(64)氏가 이곳에서 卜術業을 始作하면서부터다. 本來 서울에는 南山 기슭인 中區 양동 板子집에 盲人 曆術人들이 모여 살았는데 이 洞네가 再開發되면서 撤去를 避할 수 없게 되자 南山에 살던 이도병氏는 집값이 싸고 電車 終點이 가까워 交通이 便利한 미아리로 옮겨왔다. 1960年代 初 서울市는 미아로 擴張工事를 벌이며 傾斜를 緩慢하게 만들기 위해 길 周邊에 擁壁을 세웠다. 南北 方向으로 擁壁을 만들면서 東西 橫斷하는 길을 그 밑으로 뚫어 自然스레 窟다리가 생겨났다. 이도병氏도 처음엔 이 窟다리 밑에 작은 椅子를 하나 놓고 ‘露店’을 始作했다고 한다. 擁壁과 窟다리로 그늘지고 으슥한 ‘낮은 곳’은 視角障礙 曆術人들을 보듬는 ‘人工 構造物’李 된 셈이다. 窟다리 밑에서 거리에서 點을 쳤던 이도병氏의 點이 漸次 입所聞이 나면서 사람들이 꼬였다. 開業 2年 만에 李氏는 가게를 얻어 손님을 받았고 10年 만에 꿈에 그리던 내 집 한칸을 마련했다.

當時야 모두가 배고프던 時節이었지만 特히 生計가 寞寞하던 視覺障礙人들의 꿈이야말로 子息들 안 굶기고 남들처럼 가르치는 일이었다. 第집 마련하고 4男妹 고이 길러낸 이도병氏의 ‘成功神話’에 힘입어 갈 곳 없던 同僚 曆術人들度 하나둘 옮겨왔다. 밤 12時 通禁이 있던 80年代 初까지만 해도 여름밤이면 自動車가 다니지 않는 彌阿里고개 道路에 앞 못 보는 사람들이 安心하고 올라 閑談을 나누는 風景이 익숙할 程度였다고 한다. 高度成長期였던 70~80年代엔 미아리도 함께 好況의 雰圍氣를 나눠 80年代 中盤에 이르면 視覺障礙人 曆術院이 100餘곳에 이를 程度로 繁昌했다. 現在는 1km 남짓한 道路 兩便에서 70餘곳이 營業 中이다. 大部分 占집과 살림집을 겸하고 있으며 曆術人의 60% 程度가 自宅을 所有하고 있어 比較的 安定된 生活을 維持하고 있다.

大寒盲人驛吏學會의 學術理事이자 彌阿里고개에서 哲學館을 運營하고 있는 심남용氏는 彌阿里고개에 占집이 蕃盛하게 된 理由에 對해 占星學的인 풀이를 내놓았다. “彌阿里고개 너머엔 日帝 때 造成된 韓國人 專用 墓地가 있었다. 예로부터 사람의 靈魂은 北으로 드나든다고 믿었는데, 서울의 北北東에 該當하는 彌阿里고개는 靈魂이 다니는 길목이었던 셈이다. 北쪽은 皇帝의 별인 紫微星의 기운이 서려 있는 곳으로서 北斗信仰이 기대는 防衛다. 사람의 靈魂과 運勢를 다루는 미아리 粘性村이 盛行하게 된 데는 이런 關聯이 있다고 생각한다.”

團結 誇示하며 70餘곳 營業 中

1984年 議政府에서 미아리로 옮겨온 以來 꾸준히 哲學園을 運營하고 있는 송오순(64)氏는 “占집이 많이 모여 있다 보니 딱히 단골이 없더라도 ‘미아리’만 보고 찾아오는 손님들도 있어서 다른 곳보다 벌이가 낫다. 또한 協會(大寒盲人驛吏學會) 會員들끼리 함께 모여살기 때문에 工夫도 함께 할 수 있고 서로의 形便도 걱정해주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移徙갈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 미아리 粘性村의 始祖인 이도병氏. 南山 再開發에 밀려 미아리에 定着한 그는 맨주먹 露店으로 始作해 집을 마련하고 4男妹를 길러내는 成功을 거뒀다.

協會의 影響力이 莫强하다 보니 占집이 많이 몰려 있는 신촌·狎鷗亭 一帶와 달리 團結이 잘된다. 나름대로 定한 原則에 따라 ‘상도’를 遵守하는 것도 特徵이다. 假令 미아리 點成村엔 다른 洞네 占집 看板에서 흔히 볼 수 있는 ‘道士’ ‘處女菩薩’ ‘도령’ 等의 文句가 없다. 송오순氏는 “處女도 아닌데 處女라고 하거나 영험한 超能力이 있는 道士라고 내세우면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 되기 때문에 協會 次元에서 그런 表現은 쓰지 않기로 決定했다”고 說明한다. “우리는 앞 못 보는 사람들이니 손님이 金半指를 꼈는지 緋緞옷을 입었는지 알 길 없다. 團地 年月日時에 따른 四柱풀이를 正直하게 말해줘야 한다. 譯書에 나와 있지 않은 失言을 늘어놓는 것은 금기시된다. 우리들이 말할 수 있는 部分만 말해야지 허황되게 꾸미면 안 된다.”

이들의 團結力은 利益 保護 次元에선 더욱 徹底하다. 미아리 粘性村이 所聞이 나면서 몇몇 非障礙人들이 占집을 열려고 했지만 발을 붙일 수 없었다. 曆術人 大部分이 집主人이기 때문에 가게를 賃貸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몇年 前엔 熱血 基督敎人들이 이곳에 찾아와 ‘예수 믿으라’는 피켓 示威를 여러 날 繼續하다 曆術人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이들을 내쫓았다고도 傳한다.

100年 前 開化期때나 只今이나 ‘迷信 打破’는 미아리 粘性村에 恒常 들러붙는 批判이다. 90年代 末 성북구는 미아리 粘性村을 整備하는 計劃을 세웠다. 美術大學에 依賴해 點成村 看板을 새로 디자인하고 距離 象徵物을 세울 豫定이었다. 그러나 ‘地自體가 나서서 迷信崇拜를 助長한다’는 基督敎界 新聞의 一喝에 성북구는 꼬리를 내렸다. 事業은 흐지부지됐고 擔當 公務員들도 모두 자리를 옮겼다. 성북구의 한 公務員은 “基督敎 信者들의 抗議가 두려워 미아리 粘性村에 對해선 어떤 整備 計劃도 세우지 않고 있다”고 傳했다. 요즘 미아리 粘性村에 가면 들머리에 粘性村의 由來를 알린 看板이 서 있을 뿐이다. 가장자리를 五方色으로 꾸민 비슷한 看板들에서는 當時 中途 下車한 整備事業의 痕跡을 읽을 수 있다.

整備事業, 基督敎에 번번히 막히고

視角障礙 按摩師들이 ‘아가씨’들을 앞세운 遊興資本의 浸蝕에 설 자리를 잃었듯, 미아리 點成村 亦是 타로카드를 비롯해 인터넷·電話를 利用한 運勢풀이 等 나날이 새로워지는 ‘力學 트렌드’의 波高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내 四柱가 돈 많이 버는 게 아니니 딱히 돈 벌겠다는 所願이 있을 理 있나. 이제 子息들 다 키웠으니 이렇게 미아리에서 살다가 나중에 便하게 죽는 것만이 所願이지.” ‘梅花夫人 豫言家’로 20餘年을 살아온 송오순氏는 얘기 끝에 한마디 보탰다. 미아리 點成村 또한 연 2兆~3棗園路 推算되는 巨大한 ‘點 市場’의 한켠에서 조용히 늙어가고 있지 않은가. 그의 말은 미아리 粘性村의 오늘과 來日을 要約한 듯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