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汝矣島 벙커, 最近까지 管理됐다 : 이슈追跡 : 特輯 : 한겨레21
Home > 特輯 > 이슈追跡 記事目錄 > 記事內容     2005年05月17日 第560號
汝矣島 벙커, 最近까지 管理됐다

1980年代 後半부터 쓴 建築資材 發見… 昌德宮 地下에도 벙커를 만들었던 不幸한 歷史의 흉터들

▣ 길윤형 記者 charisma@hani.co.kr
▣ 寫眞 박승화 記者 eyeshoot@hani.co.kr

“이게 뭘까?”
4月 中旬, 서울 汝矣島에 버스換乘센터를 지으려던 서울市 建設安全本部 職員들은 苦悶에 빠졌다. 서울 굿모닝신한증권 本店에서 車길 하나를 건너 마주한 花壇 위에서 正體를 알 수 없는 綠色 鐵製門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鐵製門은 그곳에 오랫동안 있어왔기 때문에 이곳을 자주 오가던 市民들도 門이 거기 있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누군가 알면서도 沈默 지키는 듯


△ 汝矣島 벙커는 굿모닝신한증권 本店 앞에서車길 하나 건너 마주한 畫壇의 쇠鐵門 아래 잠들어 있었다. 5月인데도 벙커 안은 初겨울 날씨처럼 서늘했다.

撤去 與否를 놓고 苦悶하던 일꾼들은 窮理 끝에 鐵製門 안에 ‘內視鏡’을 넣어보기로 했다. 이풍근 現場 監理團長은 “(畵面을 보고) 너무 놀라 까무러칠 뻔했다”며 “처음에는 小說冊에서만 읽던 地下 祕密基地를 찾아낸 줄로 誤解했다”고 말했다. 地下에 있었던 것은 2個의 化粧室, 大型 待避실, 3個의 非常用 脫出口가 設置된 180坪 크기의 地下 벙커였다. 사람들의 好奇心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누가, 언제, 여기에, 왜 이런 施設을 만든 것일까?

只今까지 나온 한결같은 對答은 “모른다”다. 최진호 서울市 交通改善推進團長은 “關聯 記錄이 全혀 남아 있지 않다”고 말했고, 國防部는 “存在 自體를 모른다. 軍事 施設이 아니다”는 짤막한 論評을 냈다. 大統領 警護室이나 國家情報院 等에서는 이에 對한 言及 自體가 없다. 現在까지는 “朴正熙 前 大統領 時節 汝矣島 廣場에서 열린 ‘國軍의 날’ 行事 때 大統領과 政府 主要 要因들이 待避하도록 만든 施設일 것”이라는 서울市의 推定이 가장 그럴듯한 對答이다.

그렇지만 5月10日 <한겨레21> 取材팀의 踏査 結果, 現場에서는 1980年代 後半부터 쓰기 始作한 建築資材들이 發見돼 벙커가 서울市의 推定보다 훨씬 最近에 만들어졌거나 적어도 最近까지 管理돼온 것임이 분명해 보였다(상자기사 參照). 누군가는 벙커의 正體를 알고 있지만 沈默을 지키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벙커를 보자마자 自然스레 ‘朴 大統領’을 떠올렸다. 왜 그랬을까?

事實 그것은 朴 大統領의 잘못이 아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그때는 그런 時節이었다. 1960年 末부터 韓半島를 둘러싼 國際 情勢는 숨돌릴 틈 없이 急變했다. 1968年 1月21日 北韓에서 特殊 山岳訓鍊을 받은 124軍 特攻隊員 31名이 靑瓦臺 앞山까지 侵入한 이른바 ‘김신조 事件’이 터졌다. 그 이틀 뒤인 1月23日에는 美 情報艦 푸에블로호가 元山 앞바다에서 北韓軍에 拉致됐고, 같은 해 11月2日에는 蔚珍·三陟에 武裝共匪 100餘名이 나타났다. 이에 맞서 朴 政權은 그해 2月6日 只今은 서울警察廳으로 바뀐 서울市 警察局에 戰鬪警察隊를 만들었고, 4月1日에는 (38年째 大韓民國 成人 男子들을 웃고 울리는) ‘250萬 鄕土 豫備軍’을 創設했다.

벙커의 追憶, 그 元祖는 朝鮮總督府

朴 大統領은 그래도 不安했는지 이듬해인 1969年 1月1日 “올해를 ‘싸우면서 建設하는 해’로 한다”는 新年辭를 냈다. 이로부터 엿새 뒤 ‘援助 불도저’ 김현옥 서울市長은 ‘서울市 要塞化 計劃’이라는 걸 내놓는다. 여기서 ‘요새’란 象徵的 意味에서의 ‘요새’가 아닌, 말 그대로의 ‘요새’를 뜻한다. 이를 土臺로 平素에는 交通手段으로 쓰고 戰爭이 터졌을 때는 30萬~40萬名을 受容하는 待避所로 活用되는 南山 1·2號 터널과, 1970年 7月7日 開通된 京釜高速道路 2곳에 ‘軍用飛行場’을 만들었다.


△ 汝矣島 벙커는 180坪 크기에 化粧室, 待避실, 非常用 脫出口等을 갖추고 있다.

1971年 3月 美 7師團이 撤收했고, 베트남을 거쳐 라오스·캄보디아 等으로 共産化 도미노 現象이 벌어졌다. 戰爭의 그림자가 日常에 드리워진 때였다.

汝矣島廣場은 그때 태어났다. 當時 서울市 企劃管理官과 都市計劃局長을 지낸 손정목 서울市立大學校 名譽敎授는 “1970年 10月 末 ‘汝矣島에 大廣場을 만들라’는 朴 大統領의 指示가 있었다“며 “이는 戰爭이 일어났을 때 軍事用 飛行場으로 쓰기 위한 것이었다”고 回顧했다. 1971年 2月20日에 始作해 工事費 7億6千萬원, 延人員 6萬7300名, 裝備 1萬1千臺를 들여 그해 9月29日에 工事를 끝냈다. 廣場의 길이는 1350m, 넓이는 12萬坪. 完工 이틀 뒤인 10月1日 全國의 學生과 軍人 30萬名을 모아 이곳에서 ‘國軍의 날’ 行事를 열었다. 汝矣島廣場의 元來 이름은 ‘5·16廣場’이었다.

서울 要塞化 計劃의 一部였는지 알 수 없지만 이때부터 ‘文化財의 要塞化’도 始作됐다. 같은 民族인 北韓軍이 民族의 얼과 魂이 담긴 文化財를 向해 함부로 銃과 大砲를 쏘지 못할 것이라는 計算이 깔린 措處였다. 文化財 要塞化의 痕跡은 아직 곳곳에 남아 있다. 2004年 文化觀光委員會의 文化財廳 國政監査에서 천영세 民主勞動黨 議員은 “서울 昌德宮 안의 防空 진지 等 全國 文化財 區域 안에 設置된 軍事施設이 8곳 12萬3千坪이나 된다”고 指摘했다. 한국방송도 1976年 當時 문화공보부의 ‘忠武’ 計劃에 따라 昌德宮, 朝鮮 成宗과 正弦王后의 妙인 宣陵, 肅宗과 張禧嬪의 西五陵, 高宗의 繼妃 嚴氏의 妙인 永徽園 等에 50坪 안팎의 放送用 벙커 4個를 만들기도 했다(이들 벙커는 2003年께 모두 撤去됐다). 나라 全體가 미쳐 돌아가고 있던 時節, 汝矣島에 벙커 하나 만드는 것쯤은 일도 아니던 時節이었다.


△ 慶熙宮 벙커는 今方이라도 鬼神이 튀어나올 듯 을씨년스럽다. 서울市는 콘크리트 構造物은 日帝 時代에, 電氣와 換氣 施設은 1970年 以後 現代建設이 만든 것으로 推定하고 있다.

우리도 벙커 만드는 데 一家見이 있었지만, ‘벙커의 追憶’의 元祖는 日帝의 朝鮮總督府다. 서울市 歷史博物館의 뒤를 돌아 慶熙宮 터쪽으로 恒河는 길에 입을 쩍 벌리고 서 있는 우악스런 벙커가 이를 代辯한다. 벙커 周邊에는 청계천 復元工事 때 뜯어온 광통교 等 朝鮮時代 돌다리 不在들이 널브러져 있다. 서울市가 2003年 作成한 ‘(慶熙宮) 防空壕 遮斷壁 鑿掘 內部調査 結果報告’를 보면 이 벙커의 너비는 7.1m, 左右로 뻗은 길이는 105m나 된다. 當時 學生 勞役에 動員됐던 경성중(現 서울고) 學生 최준희(78)氏는 2年 前 서울市 關係者와의 面談에서 “1943年 末쯤 朝鮮總督府 遞信部 職員이 學生들을 動員해 꽤 오랜 時間 建物을 지었다”며 “日帝가 通信施設을 갖춘 展示司令部로 쓰려고 이 벙커를 지었을 것”이라고 證言했다. <한겨레21>이 現場을 둘러보니 T字 模樣으로 생긴 벙커는 2層짜리 構造物이었고, 곳곳에 事務室用 房이 20餘個 있었다. 日帝는 이보다 조금 規模가 작은 벙커를 서울 昌德宮에도 만들었지만 黃평우 韓國文化遺産政策硏究所腸 等의 指摘에 따라 2003年 撤去됐다.

그 地下에서 버스카드 充電한다

周邊 곳곳에 남아 있는 地下 벙커들은 우리가 버텨온 歲月의 嚴酷함을 證言하는 삶의 흉터다. 흉터는 감추고 外面하기보다는 똑바로 凝視할 때 治癒할 수 있다. 1970年代 사람들은 왜 그렇게 氣를 쓰고 콘크리트를 부어 벙커를 만들고 땅속으로 기어 들어가려 했을까. 當時 事情을 귀로 傳해듣고, 눈으로 冊을 읽어 알 뿐인 後世 사람들이 그렇게라도 해 不安感을 떨치려 했던 當時 사람들의 당혹스러움을 評價할 수는 없을 것이다. 結局 朴 前 大統領은 戰爭터가 아닌, 술자리 心腹의 銃에 맞아 숨을 거뒀다.

새로 發見된 汝矣島 벙커는 撤去하지 않고 市民들에게 開放해 化粧室과 賣店 等으로 活用할 것이라 한다. 6月부터는 非常時에 大統領의 목숨을 救하려 만들었던 그 空間에서 사람들이 웃고, 茶를 마시고, 버스카드를 充電할 수 있게 된다. 歷史는 느린 듯 보이지만, 그렇게 끈질기게 조금씩 앞으로 進步해가는 것인가 보다.


1992年9月30日에 마지막 點檢?


△ 化粧室 便器 點檢票에 9月30日이라는 點檢 날짜가 鮮明하다.

서울市는 汝矣島 벙커가 1970年代 朴正熙 政權 때 國軍의 날 行事에 對備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럴듯해 보이는 推定이지만 釋然치 않은 구석도 있다. 一旦, 當時 核心 關係者가 否認한다. 當時 서울市 企劃管理官과 都市計劃局長을 지낸 손정목 서울市立大 名譽敎授는 “當時 汝矣島 廣場을 만드는 作業에 參與했기 때문에 (그때 만들어진 것이라면) 내가 모를 理 없다”며 “空軍이 汝矣島를 使用하던 1960年代에 만들어진 것으로 봐야 한다”고 主張했다.

그렇지만 벙커 出入口는 영등포에서 麻布大橋를 잇는 道路 한가운데에 設置된 花壇에 있다. 벙커가 汝矣島 都市計劃이 끝난 뒤에 만들어졌다는 意味다. 孫 敎授가 모른다면 在職 時節 以後에 만들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5月10日 <한겨레21>의 現場踏査 結果 벙커는 적어도 1980年代 以後에 만들어진 것이 確實해 보였다. 現場에서 發見된 ‘아남’ 商標의 螢光燈 스위치, 豫備用 白熱燈, 化粧室 便器 等은 1970年代가 아닌 1980年代 後半부터 只今까지 쓰이는 것들이다. 內部 電氣裝置 안에서 發見된 使用 點檢票의 點檢 番號가 1989年을 뜻하는 것으로 보이는 ‘89’로 始作되는 點도 이런 推定에 說得力을 더한다.

다만, 化粧室 便器에 붙어 있는 點檢表에는 鳶도 없이 ‘9月30日’이라는 點檢 날짜가 적혀 있어, 10月1日 ‘國軍의 날’을 앞두고 마지막 點檢을 했을 것이라고 推測할 수 있다. 國軍의 날 行事 場所가 서울 汝矣島에서 陸·海·空 3軍 本部가 있는 계룡대로 바뀐 것은 1993年부터다. 1993年 以前이라면 노태우 前 大統領 時節이다.

以後 汝矣島 廣場은 1998年 調馴 서울市長 때 7萬坪의 公園으로 改造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現場에서 만난 工事 關係者는 “나중에 改造됐을 可能性도 있기 때문에 벙커가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確實하지 않다”며 “적어도 最近까지 持續的인 管理가 이루어진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놈들은 王宮에까지 벙커를 지었다”

[인터뷰 | ‘벙커博士’ 코털아저씨 김용훈氏]


“코털의 집. 雜人 出入禁止. 臺종로구청 公園綠地課 公採 常傭職 백.”
日帝가 서울 慶熙宮 터에 設置한 地下 벙커 앞에는 예전에 서울歷史博物館 案內所로 쓰였던 2坪 남짓 되는 簡易 建物이 있다. 이 집 主人은 종로구청 公園綠地課 施設管理원 김용훈(56)氏. 그는 歷史博物館과 종로구청 職員들에게 ‘코털 아저씨’로 알려졌다. 別名은 코털을 기르는데다 목소리가 크고 남의 일에 나서기를 좋아해 붙었다. 1991年부터 이곳에서 勤務했다는 金氏에게 벙커에 對해 묻자 거침없이 意見을 쏟아냈다. 목소리는 컸지만, 그의 말은 大部分 歷史的 事實과 一致했다.

벙커가 언제 생겼나.

1943年 朝鮮總督府 애들이 예전 京城中學校 學生들을 데리고 만들었다. 部隊 이름은 通信司令部라고 했던 것 같다. 옛날에 서울高 애들이 벙커 위로 난 換氣筒을 통해 자꾸 아래로 내려와 말썽이 甚했다. 그래서 벙커 中間을 甓돌로 막았다(이 甓돌은 서울市가 2003年 5月20日 現場調査를 하면서 다시 부쉈다).

元來 이곳은 慶熙宮 터라는데.

맞다. 신문로에 있는 救世軍빌딩 앞에 慶熙宮의 正門인 흥화문이 있었다. 그리고 歷史博物館 앞에 다리가 있었다고 한다(궁궐에는 正門을 지나 작은 개川과 다리가 하나씩 있는데, 개川은 衿川, 다리는 禁川橋라 부른다). 이 땅을 현대건설에서 사서 아파트를 지으려 했는데 文化財 區域이라 못 지었다. 이 땅 代身에 只今 牙山病院 자리의 땅을 받아 돈을 꽤 벌었을 것이다(벙커 안에는 工務部·海外플랜트部 等 옛 現代建設이 使用한 痕跡이 發見됐다).

벙커 끝까지 가봤나.

벙커는 옆으로 朝鮮總督府까지 連結돼 있다(벙커 길이는 105m로, 總督府까지 닿을 수 없다. 그는 여기서 딱 한番 틀렸다). 戰爭 나면 總督이 祕密 通路를 타고 이곳으로 移動해 죽을 때까지 싸우려고 했던 것 같다. 남의 나라 王宮에 이런 것을 짓다니 나쁜 놈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