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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의 時間·공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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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의 時間·공간·생각



그가 떠나고 40年, 縫製工場은 移住勞動者로 채워지고

勞動運動은 資本의 機敏한 變身 앞에서 갈 길을 잃었네
登錄 2010-11-04 06:55  修正 2020-05-02 19:26
裁斷師·미싱師에겐 時間이 돈이다. 믹魔가 빨리빨리 ‘아이롱’을 해야 工程이 돌아간다. 일은 밤 9時30分에 끝난다. 13時間 동안 믹마는 스팀다리미 앞을 떠나지 않는다. 日曜日만 쉰다. 淸掃하고 빨래하고 잠만 잔다.
 봉제공장으로 가득했던 서울 평화시장에는 이제 도매상가들만 남았다. 상인들로 항상 붐비지만, 노동자는 이곳을 떠났다. 한겨레 류우종

縫製工場으로 가득했던 서울 평화시장에는 이제 都賣商街들만 남았다. 商人들로 恒常 붐비지만, 勞動者는 이곳을 떠났다. 한겨레 류우종

잿빛 구름은 한낮이 되었어도 하늘에서 비켜나지 않았다. 바람이 드세게 부는 날이었다. 午後 1時30分, 그는 石油를 끼얹은 제 몸에 불을 붙였다. 불꽃이 입술과 혀를 널름거리며 태웠다. 그의 말은 자꾸 흩어졌다. “우리는 機械가 아니다….” 쓰러진 그를 午後 2時, 救急車가 와서 실어갔다. 입술 없는 입으로 그는 病院에서 말했다. “배가 고프다….” 그리고 永永 말하지 못했다. 그의 마지막 끼니는 라면이었다. 前날 아침, 板子집에 둘러앉아 食口들과 나눠 먹었다. 이틀 동안, 죽음을 決心한 제 몸에 그는 밥을 더 넣지 않았다.

가난한 勞動에 불타는 더 많은 全泰壹

타버린 눈썹 사이로 눈물이 흘렀다. 繃帶 감은 몸에서 津물이 흘렀다. 1970年 11月13日 밤 10時, 看護師가 다른 寢臺로 그를 옮기려 몸을 부축했다. 문득 고개를 치켜들다, 그는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주린 제 몸에 불을 붙인 22살의 靑年 勞動者가 죽었다. 죽지 않고 살았다면, 40年을 더 버텼다면, 그는 김홍선처럼, 이승숙처럼, 믹마처럼 살았을 것이다. 衰落하는 産業의 邊두리 勞動에서 끼니를 求하며 2010年을 겨우 견뎠을 것이다. 전태일은 죽었으나, 더 많은 전태일이 우리 곁에 살고 있다. 가난한 勞動을 제 몸에 끼얹고 如前히 불타고 있다.


전태일의 時間- 40年

室內에서 담배를 못 피우게 하니, 김홍선(62)氏는 좀 살 만해졌다. 예전에는 종이컵에 담배꽁초를 짓이긴 쓰레기가 많이 나왔다. 치우느라 苦役이었다. 이제 담배 피우는 사람들은 全部 바깥으로 나간다. 꽁초 치울 일도 없어졌다. 이 程度면 견딜 만하다. 새벽 5時에 일어나는 것도 견딜 만하다고 그는 생각한다. 아침 6時부터 午後 2時까지, 金氏는 서울地下鐵公社 군자車輛基地 事務室을 淸掃한다. 驛務員들의 冊床을 一一이 닦는다. 쓰레기桶을 비운다. 琉璃 出入門을 닦고, 事務室 바닥도 닦는다. 化粧室 2個를 包含해 複道와 階段까지 치운다.

化粧室 淸掃를 하면, 옛 생각이 난다. 그때, 평화市場 化粧室은 1層에만 있었다. 水道물도 1層에서만 나왔다. 시다들은 1層에 내려가 洋동이에 물을 담고 4層 建物의 階段을 오르내렸다. 21살 金氏는 많이 失望했다. “서울에 오면 모든 게 번쩍번쩍할 줄 알았거든.” 1970年 3月, 처음 일하게 된 평화시장은 忠南 豫算의 故鄕집보다 못했다. 縫製工場 바닥에 깔린 다다미에 빈대가 슬었다. 시골에서 올라온 10代 少女들은 工場에서 잠을 잤다. 裁斷師·미싱師의 허드렛일을 돕는 그들을 ‘시다’라 불렀다. 시다의 어린 皮膚를 밤마다 빈대가 물어뜯었다.

빈대의 배를 채워주고 아침에 일어나면, 시다들은 배가 고팠다. 量은 도시락에 보리밥과 김치를 담아 30원에 파는 아줌마들이 평화시장을 돌아다녔다. 달걀도 풀지 않은 라면을 50원에 파는 賣店이 평화시장에 있었다. 賣店에선 하나에 10원 하는 크림빵도 팔았다. 그래도 시다들은 1層에서 길어온 水道물로 보리밥만 끓여 먹었다.

金氏는 그때도 지낼 만하다 생각했다. 金氏의 外三寸이 평화市場 옆 中部市場에서 縫製工場을 運營했다. 평화시장에는 옷가게를 냈다. 해가 뜨면, 金氏는 옷가게 店員으로 일했다. 해가 지면, 縫製工場에서 시다 일을 거들었다. 外三寸은 月給 2萬원을 줬다. 하루 終日 시다 일을 하는 게 아니어서 金氏는 또래들보다 나은 便이라 여겼다. 그때 전태일을 보았다.

1970年 여름 무렵, “아마도 한두 달 동안” 전태일은 金氏의 外三寸이 運營하는 縫製工場에서 裁斷師로 일했다. 그가 勞動運動을 했다는 이야기는 아주 나중에 들었다. 裁斷師 전태일은 키가 작았다. 얼굴도 작았다. “땅땅했다”고 金氏는 回顧했다. “뭐랄까, 아주… 아주 자그마했어.” 작고 조용한 22살 裁斷師와 수줍음 많은 21살 店員은 서로 눈길을 주고받았던가. 웃으며 이야기 나눈 적이 있던가. 還甲이 지난 金氏는 그런 것까지 記憶하진 못한다.

다만 전태일에 對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記憶한다. “우리 工場에 있다 그런 일 났으면 正말 큰일 날 뻔했다”고 外三寸은 나중에 말했다. 전태일은 죽기 석 달 前, 工場을 그만뒀다. 外三寸은 全泰壹 때문에 勞動廳 調査를 받게 될까 걱정했다. “自己 하나 죽는다고 뭐가 解決되느냐”고 말하는 미싱師度 있었다. 初等學校만 나와서 “아는 게 아무것도 없던” 金氏는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의 이야기를 그저 귓등으로 흘렸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집안에 누워 계시고, 오빠가 평화시장에서 미싱師로 일하고 있었다. 傳貰돈 20萬원을 주고 新堂洞 板子집 單칸房에서 세 食口가 살았다. 金氏는 돈을 벌어야 했다.

평화시장 일대의 봉제공장은 건너편 창신동으로 옮겨왔다. 창신동 봉제공장에서 한 미싱사가 박음질을 하고 있다.한겨레 류우종

평화시장 一帶의 縫製工場은 건너便 창신동으로 옮겨왔다. 昌信洞 縫製工場에서 한 미싱師가 박음질을 하고 있다.한겨레 류우종

契約職 淸掃夫가 된 40年 前 ‘시다’

1979年, 평화시장을 벗어난 金氏는 仲媒로 만난 男子와 結婚했다. 男便은 自動車 整備所에서 일하고 있었다. “얼굴은 못생겼지만 技術이 있으니 괜찮다”고 생각해 結婚했다. 結婚 以後 金氏는 집에서 두 딸을 기르며 副業을 했다. 머리끈에 꽃·나비·방울을 달면 하나에 2원씩, 한 달에 10萬원을 벌었다. 마늘·도라지 껍질도 깠다. 하루 6千원을 벌었다.

1980年代 後半부터 어쩐 일인지 副業이 줄었다. 함께 둘러앉아 마늘을 까던 洞네 아줌마들이 하나둘 淸掃 일을 始作했다. 金氏도 1991年, 事務室 淸掃를 始作했다. 父母가 새벽에 일 나가면, 初等學生 두 딸은 저희끼리 일어나 밥을 챙겨 먹었다. 金氏는 첫 月給으로 39萬원을 받았다.

이제 金氏는 7千萬원짜리 傳貰집에 산다. 男便은 平生 제 事業을 못하고, 남의 整備所에서 일했다. 10年 前, 男便은 기름 만지는 일을 그만뒀다. 代身 미니 乘合車를 샀다. 宅配會社에 一週日에 6萬원을 내면 일감을 준다. 日傭職 宅配 記事다. “더 버는 것 같은데, 나한테는 한 달에 80萬원만 갖다준다”고 金氏가 말했다. 2年마다 재계약하는 金氏는 한 달에 120萬원을 번다. 그나마 契約職 淸掃夫들이 勞組를 만들어 그만큼 받는다.

두 딸은 나란히 商業高等學校를 卒業했다. 큰딸은 인테리어 일을 하는 男子를 만나 結婚했다. 작은딸은 建設社 契約職이다. 1970年代 末에 미싱師를 그만둔 오빠는 用達트럭을 몰았다. 지난 9月, 腦卒中으로 죽었다. 金氏 家族은 미싱·시다·整備에서 用達·淸掃·宅配로 職業을 갈아탔다. 形便은 크게 나아진 바 없다. 그래도 지낼 만하다고 金氏는 말했다. “처음엔 일이 짜증나고 힘들었지만, 마음을 비우면, 恒常 웃고 살면, 全部 괜찮아.” 울지 말고 웃어라. 그가 攄得한 生存法이다. 그렇게 40年이 흘렀다.


전태일의 空間- 縫製工場

韓國에 처음 到着한 날, 믹마 린部(38·假名)는 웃었다. 꿈결 같았다. 10年 前 겨울 金浦空港에서 그는 난生처음 눈을 맞았다. 故鄕 네팔에도 눈은 내린다. 마을을 둘러싼 巨大한 山봉우리 위로 萬年雪이 쌓여 있다. 그러나 네팔의 눈은 山에만 내린다. 韓國의 눈은 平地에도 내렸다. 믿을 수가 없었다. 親舊 紹介로 일자리를 求했다. 仁川·議政府의 家口·수세미 工場을 거쳐, 8年 前 서울 창신동 縫製工場에 왔다. 議政府 工場은 지저분하고 일이 힘들지만, 昌信洞 工場은 깨끗하고 일이 수월하다고 생각했다. 믹마는 피식 웃었다. “잘못 생각한 거죠.”

그는 ‘아이롱’ 擔當이다. 다림질을 그렇게 부른다. 아침 8時면 눈을 뜬다. 아침밥도 못 먹고 허겁지겁 工場에 간다. 커피부터 마신다. 하루에 대여섯 盞은 마신다. 아침 8時30分부터 다리미를 잡는다. ‘아이롱’은 서서 하는 일이다. 하루 終日 서 있는다. 點心은 午後 1時부터 먹는다. 近處 밥집에서 食事를 配達해온다. 部隊찌개가 第一 좋은데 普通 김치찌개가 온다. 된醬찌개는 영 脾胃에 맞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 밥은 5~15分 만에 먹는다. 그리고 곧장 일한다. 저녁은 午後 6時에 먹는다. 亦是 5~15分 만에 먹는다. 그리고 곧장 일한다. 食事 時間에도 쉬지 않는다. 잠깐 化粧室에 갔다가 다시 일한다. 縫製 日에는 ‘마감’이 있다. 約束한 時間에 約束한 物量을 納品해야 돈을 받는다. 裁斷師·미싱師에겐 時間이 돈이다. 믹魔가 빨리빨리 ‘아이롱’을 해야 工程이 돌아간다. 일은 밤 9時30分에 끝난다. 13時間 동안 믹마는 스팀다리미 앞을 떠나지 않는다. 土曜日엔 저녁 7時에 끝난다. 日曜日만 쉰다. 淸掃하고 빨래하고 잠만 잔다.

社長을 ‘主人’이라 부르는 昌信洞 移住勞動者

工場 밖을 나돌아다녀봤자 團束에 걸릴 걱정만 는다. 믹마는 旅行비자로 韓國에서 일하고 있다. 昌信洞에는 믹魔와 같은 네팔 勞動者가 많다. 聖水洞은 베트남, 신당동은 몽골, 가리봉동은 中國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네팔 사람들이 모여 사는 昌信洞에는 네팔 食堂도 많다. 食堂 社長들은 언제 어디서 團束班이 떴는지, 네팔 사람들에게 알려준다. 몇 年 前부터 團束이 심해졌다. 창신동에서 일하는 네팔 사람 數도 줄었다. 요즘엔 50~100名 程度가 창신동에 살고 있다.

그들이 사는 昌信洞에는 3~10名 程度 일하는 縫製工場이 1千餘 個 있는 것으로 推定된다. 縫製工場의 90%는 事業者登錄證이 없는 ‘未登錄’ 狀態다. 버는 돈이 적으니, 正式으로 登錄해 稅金 내는 일을 業主들이 꺼린다. 1千餘 個 縫製工場 가운데 夫婦·家族이 運營하는 家內工場을 除하면, 勞動者를 雇用하는 工場은 얼마 되지 않는다. 창신동에서 일하는 縫製 勞動者는 300~400名 水準이고, 이 가운데 100餘 名이 移住勞動者라고 民主勞總 移住勞組 關係者는 說明했다. 昌信洞 네팔 勞動者는 이들 100餘 名 移住勞動者 가운데 一部다. 元來는 가장 比重이 높았으나, 最近 中國·베트남 勞動者 數가 늘고 있다.

月給 때문이라고 믹마는 생각한다. 그의 月給은 150萬원이다. 그런데 일감이 떨어져 쉬는 날이 생기면, 하루에 6萬~7萬원씩 月給에서 뺀다. 한여름과 한겨울엔 昌信洞 全體가 事實上 開店休業이다. 믹마는 月給으로 70萬원을 받은 적도 있다. 일을 하지 않으면 月給이 줄지만, 일을 더한다 해서 月給이 늘지는 않는다. 밤 10時까지, 일이 많으면 새벽 2~3時까지 일한다. 夜勤手當은 없다. 土曜日에도 저녁까지 일한다. 休日勤勞手當은 없다.

定해진 月給이 있고, 休日·夜勤 手當도 있는 競技도 工團의 製造工場에 가는 게 더 낫다고 믹마는 생각한다. 그가 일터를 옮기지 않는 唯一한 理由는 “縫製 技術을 배워 故鄕에서 일하려는 꿈” 때문이다. 맡은 일은 ‘아이롱’이지만, 믹마는 元旦 나르고 옷감 옮기고 다림질하고 안감 박음질하고 실밥 뜯고 淸掃하는 일을 모두 한다. “韓國 사람들은 맡은 일만 하지, 딴 거 시키면 氣分 나빠하죠. 우리는 시키는 일 全部 해요.” 겨울이면 적어도 서너 番씩, 여름에도 한두 番씩 感氣에 걸린다. 네팔에서 옥수수 農事를 지을 땐 없던 일이다. 눈이 따갑고 목이 붓고 허리와 다리가 아프지만, 病院에 간 적은 없다.

1970年代 평화시장에선 시골에서 올라온 10代 少女가 시다를 맡았다. 하루 16時間의 勞動과 低賃金, 劣惡한 勞動條件 等을 견뎌낼 사람은 시골 少女밖에 없었다. 2000年代 昌信洞에선 外國에서 건너온 移住勞動者가 시다를 맡는다. 그래도 믹마는 昌信洞 業主들 事情을 헤아린다. 그는 社長을 ‘主人’이라 부른다. “옛날 主人들은 돈 벌었지만, 요즘 主人들은 배운 게 이것밖에 없어서, 다른 것 할 勇氣가 없어서 繼續 버티는 사람들이죠. 昌信洞에는 힘든 主人들만 있어요.” 힘든 主人들은 賃金과 環境을 神經 쓰지 못한다. 그곳에서 일할 젊은 사람이 移住勞動者 말고는 없다. 그래도 괜찮다고 믹마는 말했다. “처음엔 힘들어도 버티면 괜찮아져요. 몸에 朴여요.” 몸에 익을 때까지 참고 견뎌라. 믹마가 攄得한 生存法이다. 昌信洞 縫製工場은 그렇게 버티고 있다.


전태일의 생각- 勞動運動

14살짜리 시다는 사흘을 버티지 못했다. “티가 나도, 너무 나잖아.” 社長은 勞動廳 監督官에게 걸릴까 걱정했다. 初等學校만 卒業한 少女는 150cm의 키에 바싹 말라 있었다. 누가 봐도 너무 어렸다. 처음으로 就職한 縫製工場을 사흘 만에 그만뒀다. 이승숙(47)氏의 키는 그 뒤로 더 자라지 않았다. 縫製工場을 옮겨다니는 삶도 바뀌지 않았다.

1977年부터 평화시장에서 시다로 일했다. 첫 月給으로 1萬원을 받았다. 工場에는 다락房이 있었다. 사람 머리 높이에 마루를 덧대 다락을 만들었다. 다락房에선 허리를 펼 수 없었다. 시다들은 허리를 굽힌 채 일하고 먹고 잤다. 어느 名節엔 15日 동안 連續 徹夜를 했다. 새벽 5時까지 일했다. 다락房에서 2時間을 자고 일어나 일했다. 일만 하면 조는 시다가 있었다. 18살이었다. 가위질하다 졸고, 밥 먹다 졸았다. 알고 보니 妊娠 中이었다. 누가 아이 아빠인지, 所聞만 茂盛했다.

1970年代 평화시장에선 시골에서 올라온 10代 少女가 시다를 맡았다. 하루 16時間의 勞動과 低賃金, 劣惡한 勞動條件 等을 견뎌낼 사람은 시골 少女밖에 없었다. 2000年代 昌信洞에선 外國에서 건너온 移住勞動者가 시다를 맡는다.

그곳에서 그렇게 나이 먹긴 싫었으므로, 李氏는 夜學에 나갔다. 박형규 牧師가 있는 第一敎會에서 平和市場 시다들을 모아 夜學을 열었다. 저녁 8時에 일을 마치고, 中部市場에서 튀김을 몇 個 사먹고, 제일교회에 갔다. 檢定考試 工夫를 할 생각이었는데, 夜學 언니·오빠들은 漢文을 조금 가르쳐주고, 以內 勤勞基準法을 講義했다. 그래도 좋았다. 예전엔 退勤길이 猖披했다. 校服 입은 또래를 만나면, 팔목에 묻은 실밥이 猖披했다. 夜學에 다니면서 그런 부끄럼이 사라졌다.

1980年 봄, 평화시장 屋上에 勞動者들이 모였다. 그들은 노래를 불렀다. “70年 全泰壹 이어받아 앞으로 앞으로…” 歌詞를 바꿔 를 불렀다. 그때까지 李氏는 전태일을 ‘무서운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 “全泰壹이라고 自己 英雄心에 죽은 사람이 있는데, 勞組가 그 사람을 앞세운다. 勞組에 들어가면 身世 조진다.” 工場을 옮길 때마다 社長들은 그렇게 말했다. 夜學을 다녔어도 그 印象은 지워지지 않았다. 평화시장 屋上 籠城場에서 ‘무서운 사람’ 전태일의 어머니를 처음 보았다. 어머니는 아들의 이야기를 잔잔히 들려줬다. 전태일을 새롭게 만났다. 그날 李氏는 少女 시다에서 勞動運動家로 거듭났다.

평화시장 시다로 출발해 청계노조를 거쳐 서울의류노조 간부로 활동한 이승숙씨가 10월27일 오후 청계천 ‘전태일 기념상’ 앞에 섰다.한겨레 류우종

평화시장 시다로 出發해 청계勞組를 거쳐 서울衣類勞組 幹部로 活動한 이승숙氏가 10月27日 午後 淸溪川 ‘전태일 記念像’ 앞에 섰다.한겨레 류우종

8時에 退勤하자, ‘셔터 내리기’ 運動

청계被服勞組는 전태일이 죽은 지 2週日 만에 結成됐다. 朴正熙 政權은 청계勞組를 끈질기게 彈壓했다. 勞組 事務室을 閉鎖하고, 勞組 幹部를 拘束하고, 勞組 集會를 妨害했다. 全斗煥 政權은 勞組를 아예 解散시켰다. 전태일의 親舊들이 모두 잡혀갔다. 청계勞組를 復元하는 일이 急했다. “그래서 우리를 ‘復舊世代’라고 불러요.” 李氏는 自炊房에서 祕密裏에 組合員을 모았다. 野遊會 자리를 만들어 勞組를 알렸다.

그래도 勞組 事務室의 門을 닫을 순 없다. 百貨店 부티크 숍이 運營하는 縫製工場, 大企業 브랜드 衣類業體의 下請工場 等에서 미싱師·裁斷師·시다 等이 間間이 門을 두드린다.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勞組를 찾아온다.

그 時節, 청계勞組는 韓國 勞動運動의 象徵이었다. 1980年 봄, 11日의 屋上籠城 끝에 청계勞組는 賃金引上을 爭取했다. 그 물결은 사북·九老·馬山·大邱·裡里 工團의 暴發的 賃金引上 鬪爭으로 번졌다. 新軍部가 解散시킨 여러 民主勞組의 復舊 運動을 이끈 것도 청계勞組였다. 軍事政權의 서슬이 퍼렇던 1985年 同盟罷業을 성사시켰고, 이듬해에는 서울勞動運動聯合 結成을 主導했다. 서노련은 以後 전노협, 민주노총으로 이어지는 불씨가 됐다. 1987年 7月, 청계勞組의 ‘復舊世代’는 警察이 閉鎖한 勞組 事務室을 奇襲的으로 되찾아 長期 籠城했다. 이를 信號彈으로 全國 事業場에서 ‘87年 勞動者 大鬪爭’李 번졌다.

1988年 마침내 勞組 申告畢證이 나왔다. 合法 活動의 길이 열렸다. 勞組 事務長을 맡은 李氏는 평화시장을 다니며 勞組를 알렸다. 사람들은 슬슬 避했다. 自身이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은 李氏를 ‘무서운 사람’으로 對했다. 두세 달이 지나자 사람들이 反應했다. “슬쩍 박카스를 주더라고요.” 그 말을 하는 李氏의 목이 멘다. 눈물도 흘린다. 시다의 박카스에 感激할 程度로 그는 懇切했다.

‘셔터 내리기’ 運動을 했다. 저녁 8時에는 반드시 工場 일을 끝내자고 社長과 裁斷師·미싱師를 說得했다. 저녁 8時만 되면 평화시장을 돌며 工場의 셔터를 내렸다. 名節에는 반드시 쉬도록 단협을 맺었다. 納品한 만큼 手當을 쳐주는 이른바 ‘客工第’ 代身 精液을 따박따박 받을 수 있는 月給制를 導入했다. 1990年 團體協商에선 ‘유니온숍’ 을 導入했다. 평화시장에 就業한 모든 勞動者가 勞組에 自動的으로 加入되는 制度였다. 그것이 청계勞組의 絶頂이었다. 그 뒤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

元來 평화시장 業主들은 가게와 工場을 兼業했다. 團協은 平和市場 가게 協議會 代表들과 맺었다. 그런데 1990年代 들어 業主들이 縫製作業을 下請으로 돌렸다. 가게만 運營하고, 生産은 창신동의 家內工場에 떠맡겼다. 돈이 더 많은 業主들은 아예 中國·베트남으로 工場을 옮겼다. 裁斷師·미싱師·시다 等 勞動者들이 평화시장을 빠져나갔다. 最大 2萬 名이 加入할 것으로 期待한 ‘유니온숍’은 껍데기만 남았다. 창신동에 就業한 勞動者들은 1970年代 평화시장의 勞動條件에서 일했다. 청계勞組의 힘은 그곳까지 가닿지 못했다.

나름대로 變身을 試圖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衣類産業 勞動者 全體를 아우르는 組織으로 거듭나려 했다. 1998年 서울衣類勞組와 統合했다. 서울 地域 衣類業體의 營業·販賣職까지 더하면 서울衣類勞組의 潛在的 組合員은 30萬 名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只今 組合費를 내는 組合員은 150餘 名이다. 이름만 올려둔 組合員을 더해도 400餘 名이다. 組合 前任者의 活動費도 支給하지 못한다. 委員長을 包含해 2名의 前任者만 두고 있다. 1998年 서울衣類勞組가 出帆한 뒤, 김정호 委員長이 줄곧 이끌고 있다. 金 委員長은 李氏의 男便이다. 1994年에 結婚했다. 李氏는 男便만이라도 勞動運動에 專念하길 바랐다. 미싱師·保險設計士 等으로 일하며 돈을 벌었다. 只今은 서울衣類勞組 技術敎育센터 事務長을 맡고 있다. 勞動部의 支援을 받아 運營한다. 서울衣類勞組의 命脈은 이를 통해 艱辛히 維持되고 있다.

如前히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가난한 이들

李氏가 靑春을 바친 勞組는 資本의 機敏한 變身 앞에 갈 길을 놓쳤다. “事業者가 아니라 政府 政策과 맞서야 하는데, 이젠 나이가 들어 힘이 부친다”고 李氏는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李氏의 작은 몸이 잠깐 떨린다. 悔恨이거나 설움일 것이다. 그래도 勞組 事務室의 門을 닫을 순 없다. 百貨店 부티크 숍이 運營하는 縫製工場, 大企業 브랜드 衣類業體의 下請工場 等에서 미싱師·裁斷師·시다 等이 間間이 門을 두드린다.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勞組를 찾아온다. 전태일은 가난했으나, 더 가난한 이를 아꼈다. 그래서 勞組를 만들려 했다. 전태일의 꿈은 勞動者가 尊重받는 일터를 만드는 것이었다. 키가 작은 전태일의 꿈을 키가 작은 李氏는 놓아보낼 수 없다. 그 꿈을 붙잡고 一生을 살아냈다. 그 꿈조차 잃는다면, 全泰壹마저 잊어버린다면, 어찌 가난한 勞動을 버텨내겠는가.

안수찬 記者 ahn@hani.co.kr



全泰壹 藥典
남루했으나 崇高하게 타오른 삶

전태일은 1948年 陰曆 8月26日 大邱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전상수는 縫製 勞動者였다. 家內手工業度 했으나 거듭 失敗했다. 어머니 이소선의 親아버지는 抗日獨立運動에 加擔했다는 嫌疑로 洞네 뒷山에서 日帝 警察에 죽임을 當했다. 1954年 食口 모두 서울에 올라왔다. 家族은 서울驛 近處 염천교 밑에서 노숙했다. 어머니는 만리동 一帶를 다니며 동냥했다. 전태일은 初等學校를 마치지 못했다. 東大門市場에서 行商을 했고, 新聞配達·구두닦이 等을 轉轉했다. 17살이 되자 평화시장 삼일사에 시다로 就職했고, 以內 裁縫師·裁斷師 等으로 일하게 됐다.
裁斷師가 된 전태일은 어린 女工들의 處地를 안타깝게 여겼다. ‘勤勞基準法’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法典을 사서 혼자 工夫하면서 勞動者의 權利에 눈을 떴다. 周邊 同僚를 모아 1969年 ‘바보회’를 만들었다. 이듬해엔 ‘삼동親睦會’로 모임 이름을 바꾸었다. 1970年 평화시장 一帶의 勞動實態를 調査해 勞動廳에 勤勞條件 改善 陳情書를 냈다. 當局의 無關心과 冷待에 크게 失望했으나, 스스로 示威를 열어 世上의 關心을 促求하려 했다. 警察과 事業主의 妨害로 示威가 失敗하자, ‘勤勞基準法’ 法典을 불태우는 集會를 새로 準備했다. 1970年 11月13日 午後 1時30分 ‘勤勞基準法 火刑式’ 現場에서 焚身했다. 11月18日 京畿道 마석 모란공원에서 葬禮式이 열렸고, 11月27日 청계被服勞組가 結成됐다.
1981年 청계勞組 活動家를 主軸 삼아 ‘전태일 記念館 建立委員會’가 만들어졌다. 나중에 ‘전태일 記念事業會’로 이름을 바꿨다. 1983年 이 出刊되면서, 生前에 남긴 手記 等이 世上의 빛을 봤다. 1987年 11月 ‘全泰壹 精神 繼承 勞動者大會’가 처음 열려 只今까지 이어지고 있다. 1988年에는 전태일文學賞, 全泰壹勞動上 等을 制定해 每年 施賞하고 있다. 2005年 9月 청계천 다리에 전태일 記念像이 세워졌다. 40週期인 올해는 淸溪川 ‘버들다리’를 ‘전태일 다리’로 改名하는 署名運動을 벌이고 있다. 追慕祭 等 다양한 行事는 ‘全泰壹 40周忌 行事委員會’ 홈페이지(www.chuntaeil.org/40/)에서 確認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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