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監獄으로부터의 人間改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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監獄으로부터의 人間改造

登錄 2006-06-22 15:00  修正 2020-05-02 19:24

銃殺刑이 그나마 多幸이라 생각하며 始作된 신영복 敎授의 20年 監獄生活… 밑바닥 人生과 몸을 부대끼며 사람과 世上을 보는 눈을 뜬 ‘大學 時節’

▣ 한홍구/ 聖公會大 敎養學部 敎授

死刑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다는 것이다. 國家가 公式的으로 죽여버리겠다는 法的 決定이다. 사람이 죽음 앞에서 얼마나 義捐해질 수 있을까? 뒤에 民靑學聯 事件 當時 서울商大生이던 김병곤이 死刑을 宣告받고 “榮光입니다”라고 되받아 傳說을 남겼지만, 그 받아침은 眞짜로 죽이지는 못할 것이다라는 確信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死刑을 求刑받은 김대중도 宣告의 瞬間에 最大限 毅然한 척하려 했지만, 눈은 判決文을 읽는 判事의 입으로 가더란다.

無期懲役이라 하려면 입이 삐죽 앞으로 나오고, 詞兄이라 말하려면 입이 옆으로 찢어지는데, 그 짧은 瞬間에 입이 앞으로 삐죽 튀어나오길 懇切히 바라게 되더라는 것이다. 드라마 의 잊혀지지 않는 名臺詞 “나 떨고 있니?”처럼, 아무리 思想犯이라 한들 죽음 앞에선 떨리기 마련이 아닐까? 20代의 靑年 신영복은 1審과 2審인 普通軍法會議와 高等軍法會議에서 各各 求刑과 宣告, 그리고 軍法會議의 兄 確定 節次인 管轄官 確認을 거치며 모두 여섯 番이나 自身의 이름에 死刑이라는 무거운 꼬리票가 붙는 것을 들어야 했다.

國民學生 親舊들을 위해 글을 쓰다

처음에는 死刑이 根據 없다고 생각했지만, 곧 ‘아, 이 政權은 充分히 死刑을 執行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深刻하게 죽음의 問題를 생각하는 時間을 보내야 했다. 實際로 그가 남한산성의 陸軍矯導所에 갇혀 있는 1年 半 동안 日常을 같이 보내던 여섯 名이 次例로 死刑 執行을 當했다고 한다. 그들의 罪目은 大槪 上官 殺人인데, 신영복은 1960年代의 抑壓的인 兵營文化가 낳은 가슴 시린 悲劇을 連續的으로 가까이서 지켜봐야 했던 것이다.

死刑이 確定되는 瞬間 참으로 말로 表現하기 힘든, 너무 짧은 삶으로 끝나고 만다는 哀惜함과 쓸쓸함이 밀려왔다. 當時의 젊은 言語로는 죽음은 삶의 完成이기에 論理的으로 死刑이 삶의 斷絶로 歸結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또 當時 革命的 意識에 透徹했던 靑年들의 浪漫的인 情緖는 瘠薄한 植民地 땅에 태어나 軍事政權에 抗拒하다가 刑場의 이슬로 사라지는 것은 植民地 靑年들 앞에 놓인 삶의 當然한 한 形態라고 合理化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날 接見을 마치고 돌아가는 老父母의 쓸쓸한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신영복은 自身의 죽음이 自身에게야 삶의 完成일 수 있지만, 父母님께는 堪當할 수 없는 衝擊과 喪失일 수밖에 없지 않는가, 죽음이란 것도 決코 한 個人의 죽음일 수는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죽음을 앞둔 마지막에는 都大體 어떤 생각이 들까? 신영복은 只今 생각하면 意外지만, 或是 돈 빌리고 안 갚은 것은 없는지, 約束해놓고 지키지 못한 것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回想했다. 그가 아직 死刑囚였던 時節에 쓴 글에 ‘請求回 追憶’이란 것이 있다. 監獄에서 休紙에 적어서 이제는 이름조차 가물거리는 憲兵의 도움으로 집으로 傳해진 이 글은, 신영복이 우연한 機會에 사귀어 持續的으로 만나게 된 當時 國民學生이던 꼬마 親舊들을 위해서 쓴 것이다. 每月 마지막 土曜日 장충體育館 앞에서 2年 넘게 만나던 꼬마 親舊들은 왜 신영복이 갑자기 自己들 앞에 나타나지 않는지 모를 것이 아닌가?

신영복은 事件 當時 現役 陸軍 中尉였기 때문에 그의 死刑執行 形式은 絞首刑이 아니라 銃殺刑이었다. 絞首刑이 아니라 銃殺刑이란 것이 그나마 慰安이라면 慰安거리였다. 프랑스革命의 先鋒에 섰다가 獄死한 大數學者 콩도르세는 ‘燦爛한 햇빛 아래 죽는 것’을 그렇게 바랐다지 않는가. 모든 死刑囚가 哲學者가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 마음의 깊은 곳에 와닿는 신영복의 思索은 銃殺刑을 그나마 多幸으로 여겨야 했던 悽然한 浪漫과 갈라진 現代史의 悽絶한 아픔이 안겨준 젊은 날의 臨死體驗(臨死體驗)의 結果라 할 수 있지 않을까?

大法院에서 上告 抛棄로 兄이 確定된 뒤 신영복은 1970年 9月 安養矯導所로 移監되었다. 그는 安養矯導所에서 轉向書에 圖章을 찍었다. 신영복은 當時에는 轉向 問題의 政治的 意味에 對해 深刻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했다. 陸軍矯導所에서는 轉向 問題에 對한 勸誘도 없었고, 그런 苦悶을 하지도 않았다. 當時 安養에는 思想犯이라고는 신영복 한 사람뿐이었다. 轉向 問題에 對해 이야기해줄 수 있는 先輩도 없었다. 矯導所 當局은 金鍾泰, 이문규, 金叱락을 비롯하여 다른 사람들도 이미 다 轉向을 했다며 圖章을 찍으라고 했고, 家族들도 통혁당 事件의 다른 關聯者들도 轉向書에 捺印하였다는 事實을 들어 强力히 勸하였다. 그래서 人的事項을 적고, 北韓 共産主義에 反對하고 大韓民國을 위해서 살아가겠다는 簡單한 內容으로 ‘轉向의 便’欄을 메우는 것으로 轉向書를 作成했다.

에는 왜 고친 자국이 없는가

신영복이 轉向 問題에 對해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大田矯導所로 移監된 뒤, 非轉向 長期囚들을 보게 되고, 特히 朴正熙 政權의 强制轉向 工作이 本格化될 무렵이었다. 그는 한 사람이 自己의 思想을 끝까지 堅持하는 일의 重要性을 새삼 깨달으면서, 反省도 하고, 苦悶도 하고, 自己 合理化도 했다. 世上을 바꾸겠다는 사람이 自身의 思想을 끝까지 堅持한다는 것의 重要性에 對해 宏壯히 쉽고 便宜的으로 생각하긴 했지만, 그 重要性을 일찍 깨달았다고 해도 自身은 結局 轉向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點을 그는 否認하지 않았다. 그가 組織成員이었다면 좀더 深刻하게 苦悶했을지 모르나, 그는 朝鮮勞動黨員度 아니고, 통혁당院도 아니었다. 貧農 出身으로 政治 일꾼이 되어 온몸으로 社會主義 世上의 짜릿함을 맛본 적이 있는 南派 工作員들, 게다가 그들은 北에 家族을 두고 있었다.

신영복이 20年 監獄 生活에서 꼬박 15年을 보낸 大田矯導所로 移監된 것은 1971年 2月이었다. 安養과는 달리 大田은 韓國의 모스크바라 불릴 만큼 左翼 思想犯이 많았다. 그는 이미 轉向書를 쓴 狀態에서 大田으로 移監왔기 때문에 特別舍棟에 收容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矯導所 當局은 轉向했지만 통혁당 事件 無期囚인 신영복을 바로 工場에 出役시키지 않았다. 한 1年 程度 獨房과 混居를 거듭하면서 觀察한 뒤에야 矯導所 當局은 出役을 許諾했다.

을 인쇄본으로 읽을 때는 그런 느낌을 갖기 어렵지만, 監獄에서 보낸 便紙를 그대로 影印한 를 보다 보면 고친 자국이 거의 없다는 點에 문뜩 깜짝 놀라게 된다. 글 쓰는 사람 立場에서 볼 때 正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여기에도 다 事緣이 있었다. 20代 後半의 知識靑年 신영복은 監獄이라는 새로운 環境에서 生活을 始作하면서 여러 가지 衝擊的인 經驗을 많이 하게 된다. 그냥 두면 다 잊어버릴 것 같은 이 經驗을 어딘가 記錄해둬야 한다는 생각이었는데, 分斷된 祖國의 監獄에서 그런 생각을 담아둘 수 있게 唯一하게 許容된 空間은 한 달에 한 番 보내는 葉書였다. 밖으로 보낸 葉書가 모여 있으면, 언젠가는 내가 다시 읽어보리라 하는 생각에서 監獄 時節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努力의 하나로 葉書 쓰기가 始作된 것이다. 主題를 하나 잡으면 한 달 내내 監房 안에서 面壁 冥想을 통해 생각을 거듭하고 미리 머릿속에서 矯正까지 다 봐두었다가 葉書를 쓰는 날, 머릿속에 完成된 文章 形態로 갖고 있던 것을 吐해냈다고 한다.

面壁 冥想이나 讀書를 하기에는 獨房이 좋을 것 같지만, 20年 監獄 生活 中 5年餘를 獨房에서 보낸 신영복에 따르면 獨房의 懲役살이가 더 힘들고 때로 精神的으로 危險하기까지 하다. 혼자 있으면 言語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房을 왔다갔다 하며 혼잣말을 하는데, 그러면 矯導官은 通房하는 줄 알고 앉으라고 惹端을 친다. 혼자서 이야기하다 보면 種種 異常한 생각에 빠지기도 하는데, 스스로에게 깜짝 놀라서 후딱 그쳤다가, 다시 혼자서 말을 하기를 反復하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사람이란 亦是 같이 對話하고 부대끼며 사는 存在였던 것이다.

長期囚들의 歷史와 만나다

신영복이 破棄還送 後 다시 再審을 받고 大田矯導所로 移監되었을 때, 親舊나 後輩들 中에 이미 大田에 와 있는 사람들도 제법 있었다. 이들 中 相當數는 懲役살이가 人生에 있어서 조금도 마이너스가 되지 않도록 밤잠 줄여가며 熱心히 工夫하겠다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監房에 있는 사람들과 어울리거나 工場에 出役하는 것보다는 오로지 讀書에 熱中하려는 態度를 取했다. 矯導所 在所者란 勿論 우리 社會의 下層民이긴 하지만, 룸펜的 性格을 벗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기에 이들과 接觸이 別로 意味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신영복은 이런 생각에 同意하지 않았다. 신영복이 보기에도 在所者의 大部分이 룸펜的 性格이 剛해서 社會 變革 意志라든가, 勞動階級으로서의 健康한 自負心 같은 것은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그들도 亦是 民衆이었고, 그들의 삶을 통해 우리 社會의 抑壓構造를 充分히 읽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신영복은 그들 한복판으로 들어가 그들과 맨살을 맞대는 接觸을 하면서 知識靑年이었던 自身이 가졌던 觀念性에 對해 痛切한 反省을 하게 된다.

矯導所에서 사람을 만나고 같이 지낸다는 것은 바깥의 都市에서 잠깐 握手하고 헤어지는 그런 사이가 아니다. 온몸을 부대끼며 살아가는 懲役 生活에서 道德的 假飾을 부리거나 무언가를 숨기고 감추는 일은 不可能하다. 어쩔 수 없이 正直한 알몸 그대로가 될 수밖에 없다. 韓方에서 大槪 몇 年을 같이 보내며 서로의 삶과 살아온 來歷을 共有하면서 個人에 對한 理解를 넘어, 우리 社會의 가장 밑바닥을 사는 사람들을 통해서 認識하게 되는 또 다른 社會가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아하, 木手가 집을 그릴 때는 지붕부터 그리는 게 아니라 일하는 順序대로 주춧돌부터 그리는 거구나” 하는 깨달음은 冊이나 敎室에서 認識했던 것과는 다른 펄펄 뛰는 世上에 對한 새로운 認識을 可能케 했다. 校長 先生님의 아들로 學校 舍宅에서 쭉 자라고, 冊을 통해 情緖를 키워온 사람으로서, 그런 自身의 認識의 틀이 깨어지는 것은 監獄 初年에 그가 겪은 가장 衝擊的인 일이었다.

신영복이 陸軍矯導所 時節이나 獨房에서만 있은 安養 時節에는 잘 몰랐다가 大田에 와서 새삼 發見한 事實은 矯導所에 老人들이 그렇게 많다는 事實이었다. 工場에서건 四方에서건 그들의 事緣을 들으면서 신영복은 個人의 性格과 犯罪를 連結시켜왔던 그때까지의 單純한 論理를 反省했다. 그들의 波瀾萬丈한 一生에 關해서 이야기 듣노라면 그 酷毒한 狀況에서 罪를 犯하지 않을 수 없는 事緣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犯罪가 個人의 性向보다는 社會나 時代의 反映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신영복은 밑바닥 人生들과 맨몸으로 부대낀 오랜 監獄 生活을 통해 知識靑年으로서의 觀念性을 깨고 人間과 社會에 對한 새로운 理解를 갖게 되었다. 監獄은 靑年 신영복에게 여기에 더해 어떤 새로운 歷史意識을 일깨워주었다. 1970年代 初盤은 아직 解放으로부터 채 30年이 지나지 않은 時節이었다. 曺國이 찢어진 狀況에서 戰爭의 激動에 몸을 내던졌던 사람들, 또는 그 激浪에 휘말린 사람들 中에 아직 監獄 生活을 하는 이들이 많았다. 歲月이 흘러 이제는 勿論 50代 60臺를 넘긴 老年이었다. 그들 中에는 韓國戰爭 當時의 賦役事件으로 들어온 사람도 있었고 빨치산 出身도 있었다. 빨치산에도 韓國戰爭 中에 入山한 ‘新빨치’만이 아니라 戰爭 勃發 以前에 入山했던 ‘舊빨치’들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또 北에서 내려온 工作員, 案內員들度 있었다. 신영복은 解放 前後의 分斷 現實을 온몸으로 담아내고 있는 분들과 日常을 같이했다. 漠然하게 冊에서 보았던 韓國 近現代史의 사람들을 만나 이들에게서 생생한 그 時節의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다. 앞날을 期約할 수 없는 老人들로서는 20代의 明晳한 신영복에게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傳해주고 신영복은 마치 體驗하듯 歷史를 대면하게 된다. 그것은 ‘生還된 歷史’였다. 化石에 피가 통하고 숨결이 이는 듯한 그 느낌!

西歐 近代를 뛰어넘는 關係論 構想

신영복은 그 時節 漢學의 代價인 노촌 이구영(老村 李九榮) 先生과 4年間 한房에서 지내는 幸運을 얻게 된다. 朴齒音이 란 노래를 獻呈한 노촌 先生은 참 特異한 분이시다. 名文 沿岸 李氏 집안의 宗孫으로 朝鮮 封建社會에 태어나 日帝 植民地 社會를 거쳐 戰爭을 겪으며 越北해, 社會主義 社會를 몸소 겪고 分斷의 現實 속에서 南派되고, 日帝 때 그를 逮捕했던 刑事가 그를 알아보는 바람에 다시 逮捕돼 20餘 年을 監獄에서 보내고, 그리고 高度로 發達한 80年代의 資本主義 社會로 튕겨져나온 분이 이구영 先生이시다. 漢學을 工夫한 사람들은 大槪 保守的이기 쉽지만 노촌 先生은 드물게도 더불어 고르게 잘사는 大同의 꿈을 간직한 채 社會主義的 思考를 體化하셨고, 또 古典에 對해 進步的 解釋을 내리셨다.

신영복이 東洋 古典에 關心을 갖게 된 것은 勿論 노촌先生을 만나기 以前부터였다. 60年代 大學 時節의 文化에 對한 反省과도 關聯이 깊다. 日帝 植民地 時節부터 韓國 社會는 近代化 모델을 따라 줄달음쳐 갔다. 解放 以後의 激動과 韓國戰爭, 그리고 戰爭 뒤의 腐敗와 가난을 겪는 동안 韓國 社會는 오로지 西歐的 文化, 西歐的 價値 等을 理想的인 모델로 삼아 그쪽에 沒頭했지, 우리 것에 自負心을 갖기 어려운 時節을 보냈다. 自尊心이 없는 個人, 自負心이 없는 民族처럼 不幸한 人間은 없을지도 모른다. 이런 反省 속에서 신영복은 監獄에 들어가서 東洋 古典을 깊이 읽어보자는 決心을 하게 된다. 西歐 資本主義 社會를 批判的으로 省察하는 準據를 東洋 古典의 智慧와 價値에서 찾아보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런 巨創한 問題意識 말고도 獄中의 신영복이 東洋 古典에 빠져들게 된 데에는 아주 現實的인 理由가 있었다. 當時의 矯導所 規定은 在所者가 冊을 세 卷 以上 所持할 수 없도록 되어 있는 아주 까다로운 것이었는데, 懲役 初年의 旺盛한 知識慾에 하루 한두 卷씩 冊을 읽을 나이였으니 冊을 當해낼 才幹이 없었다. 自然히 곁에 두고 오래 읽을 수 있는 冊을 붙잡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런 點에서 中國 古典이 딱이었다. 같은 冊은 5200者에 不過하지만 몇 달을 두고 읽을 수 있지 않는가. 신영복은 東洋 古典을 통해 얻은 內容과 懲役살이에서 깨달은 內容을 ‘關係論’이란 槪念으로 整理해간다. 西歐 社會는 個別的 存在性을 패러다임으로 하는 社會인 反面, 東洋이나 近代를 뛰어넘는 社會는 關係論을 基盤으로 하는 社會일 것이라는 생각이 바로 2004年 末에 出刊한 의 核心的 內容이다.

신영복은 現在 書藝家로도 이름이 높다. 곳곳에 들어서는 建物, 特히 民主化運動 關聯 記念物은 그가 도맡아 글씨를 쓰고 있다. 어디 記念物뿐이랴. 最近 大舶을 터뜨린 燒酒 ‘처음처럼’도 그의 글씨다. 얼마 前 어느 書藝學會에서 ‘書藝의 實用化’라는 主題로 學術大會를 연다는 記事를 보고 신영복 先生님 생각이 나서 혼자 웃음지은 적이 있다. 그의 ‘作品’으로 처음 ‘戰時’된 것은 아마 ‘凍傷豫防 注意事項’이나 ‘在所者 遵守事項’ 같은 所內 揭示物들이 아니었을까? 어려서 할아버지께 暫時 배우다가 잊어버렸던 붓글씨를 신영복은 獄中에서 다시 만났고, 監獄에 鉏道伴이 생기면서 晩唐 성주표(晩堂 成柱杓), 丁香 조병호(靜香 趙柄鎬) 先生에게서 體系的인 指導를 받게 된다. 特히 풍양 조氏 老論 대가집 後裔인 丁香 先生은 秋史의 書法을 이은 민형식(閔衡植) 先生이나 韓末의 書畫 代價이자 獨立運動家인 오세창(吳世昌) 先生에게 배운 분이었다. 矯導所長이 글씨 한 點 얻을 欲心에 鉏道伴이 생긴 뒤 한 番 모신 것인데, 矯導所란 殺人犯·도둑놈이나 가는 곳으로만 알던 丁香 先生이 신영복 等 思想犯들이 獄中에 있는 것을 알고는 깜짝 놀라시며 “아, 이분들은 귀양 온 사람들이구나” 하고 생각하시고는 7年間 每週 矯導所에 오시어 글씨를 指導해주셨다고 한다.

民體, 우리 書藝의 重要한 境地

신영복의 한글 글씨는 우리 書藝의 發展史에서 極히 重要한 位置를 占한다. 그 以前 한글 글씨는 宮體가 主流를 이루었다. 靜的이고 貴族的인 美學을 지닌 宮體는 時調나 別曲, 聖經 句節을 쓰면 內容과 形式이 썩 잘 어울리지만, 신경림, 申東曄의 詩나 民謠, 또는 鬪爭 現場의 목소리 같은 것을 쓰면 內容과 形式이 全혀 맞지 않게 된다. 신영복은 그런 內容과 形式 사이의 問題를 두고 苦悶하던 中 어머니께서 보내는 毛筆 書簡體 글씨를 보며 깊이 느낀 바 있어, 어릴 적에 春香傳 筆寫本 等 어머님이 갖고 계셨던 두루말이 글씨를 생각하면서 漢文 西島에서 익힌 筆法을 導入해 宮體에 對比되는 民體(民體), 또는 連帶體(連帶體), 어깨동무體라 불리는 書體를 創案해 庶民的 形式과 民衆敵 內容을 담아내는 獨特한 境地를 이루었다.

신영복은 矯導所에서 보낸 20年을 ‘나의 大學 時節’이라고 種種 表現한다. 사람과 世上을 보는 눈을 새롭게 키우고, 생생한 歷史意識을 길렀으며, 게다가 量化工·縫製工·木工·英선·페인트 等 여러 가지 技術까지 익히고 나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1988年 8月14日 잡혀간 지 꼭 20年 20日만(그러나 어머님 말씀에 따르면 陰曆으로 꼭 20年 만이다. 生日날 잡혀가서 生日날 풀려났다고 한다)에 出獄했다.

그는 20年의 懲役살이가 헛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가 自慰를 넘어 一種의 成就感을 느낀 部分은 自身이 完全히 다른 사람이 되어 나왔다는 것이다. 레닌을 包含해 수많은 實踐家들이 成功하지 못한 自己 個組를 이뤄냈다는 것! 그런데 오랜만에 만난 親舊들은 “야, 너 하나도 안 變했구나”라며 稱讚하더란다. 신영복은 그렇게 世上과 다시 만났다. 하나의 나무가 變하는 것도 重要하지만, 나무들이 더불어 숲을 이뤄가는 것이 더 重要하구나 하는 깨달음을 차분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傳해주던 그가 지난 6月8日 아쉬운 停年 告別 講演을 했다. 20餘 年의 靑年期, 꼭 20年의 귀양 生活, 그리고 귀양이 풀린 뒤의 解配(解配) 期間이 20年假量이었다. 解配 2機라고 할 수 있는 앞으로의 20年, 더불어 숲의 中心에서 신영복은 우리에게 어떤 자유로움을 보여주고 들려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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