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만   중국   일본 
現代史 工夫하지마 다쳐!

한겨레21

記事 共有 및 設定

現代史 工夫하지마 다쳐!

登錄 2006-03-09 15:00  修正 2020-05-02 19:24

그들은 大韓民國을 卑下하기 위해 지워진 歷史를 찾아가는 熱情을 불태웠을까… <認識>과 <再認識>論難을 契機로 더듬어보는 70~80年代 ‘韓國史 硏究’의 追憶

요즘은 大學入試 首席 合格者를 인터뷰하는 慣行이 사라졌지만, 過去 우리는 판에 박힌 答辯을 들을 수 있었다. 課外는 받지 않았고, 오직 學校 授業만 忠實히 했다고…. 가물에 콩 나듯 그런 성실한 學生도 있었겠지만, 들리는 所聞은 그와는 正反對인 境遇가 많았다. 學校 授業만 誠實히 받았다는 말만큼이나 믿기 어려운 말이 ‘아무런 政治的 意圖가 없었다’는 말이다. 只今 “어떤 現實政治的 含意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自任하는 冊이 世間의 話題가 되고 있다. <解放 前後事의 再認識>(以下 再認識)이 바로 그 冊이다.

親日問題 다시 擧論하기도 힘들어

이 冊의 머리말에서 박지향은 “1980年代에 出刊된 <解放 前後事의 認識>(以下 海戰史)을 읽고 ‘피가 거꾸로 흘렀다’는 盧武鉉 大統領의 言及을 紙面을 통해 接하고, 우리 社會의 歷史 認識을 이대로 두고 본다는 것은 歷史學者의 ‘職務遺棄’라는 생각이 들”어 이 冊을 企劃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IMAGE1%%]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노무현 大統領이 이런 發言을 한 事實이 없다는 것이다. 盧武鉉 大統領은 2004年 8月25日 獨立有功者와 遺族 招請 午餐에서 “反民特委의 歷史를 읽은 많은 젊은 사람들이 거역할 수 없는 어떤 時代的인 흐름 때문에 直接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아무 實踐은 못하지만 가슴속에 불이 나거나 피가 거꾸로 도는 經驗을 다 한 番씩 한다”고 言及했다는 것이다. 누구 피가 거꾸로 돈 것인지, <再認識> 編輯委員은 歷史學者의 基本인 事實確認에서부터 誤謬를 犯한 셈이다.

대단히 攻擊的인 머리말과 卷末의 對談, 그리고 몇 篇의 뉴라이트 傾向의 論文이 問題이긴 하지만, <再認識>에 실린 多數의 論文은 가벼이 볼 수 없는 論文들이다. 歷史가 짧은 現代史 硏究의 깊이와 幅을 더한 글들로, 이 論文들의 問題提起는 學界에서 眞摯한 討論 對象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編輯陣의 過度한 ‘使命感’과 守舊言論의 호들갑으로 인해 이 冊이 뉴라이트나 守舊 陣營의 聖殿처럼 包裝되면서 정작 이 冊에 論文의 再收錄을 許諾한 몇몇 筆者들은 不便한 心境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賃貸食餌 <歷史批評> 2006年 봄號 머리글에서 適切하게 評한 것처럼 <再認識>은 뉴라이트와 脫近代論의 不適切한 만남의 産物이라고 할 것이다. <再認識> 自體에 對한 批判은 임대식의 글을 비롯해 여러 곳에서 이미 나왔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解放 前後事의 認識>이 처음 나온 1970年代 後半 以來의 現代史 硏究가 어떤 式으로 이뤄졌는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韓國에서는 現代史와 近代史를 칼같이 區分하지만, 우리가 애써 區分해보아야 英語로는 둘 다 ‘modern history’가 된다. 現代史를 ‘contemporary history’라고도 하지만, 이는 우리가 쓰는 意味의 現代史라기보다는 ‘唐代史’ ‘同時大使’라는 뜻이 더 强하다. 中國이나 日本에서 近代와 現代의 區分에 對해서도 考察을 해보아야겠지만, 韓國에서 類달리 近代와 現代의 區分에 執着하는 것은 分斷과 戰爭과 虐殺의 現場인 韓國에서 現代史 硏究가 胎生부터 지녀야 했던 政治的 宿命인지도 모른다. 이른바 ‘國史 찾기’를 하는 사람들이 흔히 ‘잃어버린 歷史를 찾아서’란 말을 쓰지만, 軍事獨裁가 판을 치던 1970·80年代의 現代史 硏究는 正말 지워진 歷史를 찾아가는 作業이었다.

[%%IMAGE2%%]

1970年代의 韓國은 ‘에비’가 支配하는 社會, “묻지 마, 다쳐”가 先輩가 後輩들에게 들려주는 敎訓이었던 社會다. 이 亂을 통해 여러 番 强調했지만, 戰爭을 치르면서 어찌나 確實하게 죽여놨던지, 親日 問題를 다시 擧論하는 것도 몹시 힘들었다. 濟州 4·3 事件처럼 到底히 잊을 수 없는 事件을 입에 담아서도 안 됐다. 현기영의 小說 <순이 三寸>이 보여주는 것처럼 現代史의 悲劇的 眞實은 그저 삶을 가위 누르는 惡夢이었다. 외마디 悲鳴조차 지르지도 못하는 處地를 그린 <순이 三寸>도 販禁圖書 目錄에 올라야 했다.

그래도 文學이 조금 자유로웠던지 <創作과 批評>에는 더러더러 解放 直後의 狀況을 다룬 小說들이 실리곤 했다. 리영희의 <轉換時代의 論理>가 1974年에 나오고, 송건호의 <民族知性의 探究>가 이듬해에 나오면서 이른바 ‘意識化’(아직 儀式化란 말이 本格的으로 쓰이기 前이었을 것이다) 敎材가 豐盛해졌지만, 우리 自身의 歷史를 다룬 冊은 別로 없었다. <創作과 批評> 等에 실린 論文을 複寫·製本해 <現實認識의 基礎>라는 學生運動 陣營의 基礎 세미나 敎材를 처음 만든 것이 1979年이었다. 學生運動 陣營이 처음으로 ‘커리’(커리큘럼)를 만들어 意識化 敎育을 始作할 무렵, 大學街에서는 아직도 라인홀드 니버의 <道德的 人間과 非道德的 社會>, 존 롤스 같은 保守 思想家의 <正義論>, 얼마 뒤 전두환의 祕書室長이 되는 이규호가 쓴 <사람됨의 哲學> 等이 세미나 敎材로 利用됐다.

光州의 衝擊이 現代史 硏究를 이끌다

나는 1978年 系列別로 大學에 入學해 1979年 國史學科에 配定됐는데, 當時 國史學科에는 ‘現代史’라는 科目은 아예 敎科目으로 開設되지 않았다. 現代史는커녕 獨立運動史조차 講義가 開設되지 없었고, 아마 ‘韓國最近世史’라는 題目下에 義兵鬪爭에 對해서는 배웠던 것 같다. 서울大가 特히 事情이 나쁜 것이었지만, 다른 大學도 形便이 좋았다고 할 수는 없다. 1979年은 마침 3·1運動 60周年이 되는 해인지라 國史學科를 中心으로 學生들끼리 심포지엄을 하자고 해서 準備했던 記憶이 새롭다. 歷史가 지워진 時代이다 보니 資料도 많지 않았다. 1977年에 지식산업사에서 그동안의 日帝時代에 關한 論文을 모아 세 卷으로 엮은 <韓國近代史론> 程度가 그나마 쉽게 求해볼 수 있는 冊이었다.

[%%IMAGE3%%]

<海戰史>가 나온 것은 바로 이런 때였다. 初版 發行日이 1979年 10月15日로 되어 있으니, 朴正熙가 죽기 10餘 日 前에 나온 것이다. 正말 維新 末期에 나온 冊이다. <海戰史>는 1989年 第6卷까지 나왔지만, 처음부터 시리즈로 企劃된 것은 아니었다. 왜 分斷이라는 悲劇이 우리 民族과 國土에 닥쳐왔는지를 “論理的으로 認識”하고 이 時代에 對한 解明을 통해 “그 以後의 우리 自身에 對한 社會科學은 비로소 脈絡을 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期待下에 “하나의 試圖 乃至 入門書”로서 나온 冊이다.

인혁당 事件 關聯者들이 維新政權에 依해 죽고 남베트남 政權이 崩壞되던 1975年은 <東亞日報>와 <朝鮮日報>에서 言論人들이 大擧 解職당한 해이며, 緊急措置 9號가 發效된 해이기도 하다. 많은 言論人이 新聞社에서 쫓겨난 뒤 糊口之策으로 出版社를 차렸고, 緊急措置로 쫓겨난 學生들은 先輩들이 차린 出版社의 職員이 되었다. <海戰史>도 이렇게 만들어진 出版社 中 하나인 한길사에서 나온 것이다. 朴正熙의 갑작스런 죽음이 가져온 虛脫感과 期待 속에서 많은 大學生들과 知識人들이 <海戰史>를 읽기 始作했다. 생생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大部分 여기저기 以前에 發表된 글을 모은 冊이었지만, 10·26 直後의 狀況은 8·15와 4·19에 뒤이은 또 하나의 轉換期가 아니었던가? <海戰史>로 새롭게 만난 8·15와 20周年을 맞게 되는 4·19. 그러나 ‘서울의 봄’은 속절없이 끝나고 말았다.

軍事獨裁가 强化된 1970年代 後半부터 우리 問題에 對한 關心이 高調된 것은 분명했지만, 現代史 硏究의 起爆劑가 된 것은 亦是 1980年 5月의 光州가 준 衝擊이었다. ‘우리에게 美國은 무엇인가’라는 質問은 자연스럽게 살아남은 모두를 解放 直後로 이끌었다. 不幸하게도 <海戰史>는 깊이 있게 다루지 못했다. 1982年 末 돌베개에서 <韓國現代史의 再照明>이 나오고, 이어 1983年 初 일월서각에서 <分斷 前後의 現代史>街 나왔으며, 1984年에는 四季節에서 <韓國 現代史, 1945∼1975>이 나왔다. <海戰史>가 徹底하게 國內 筆陣의 글을 모은 것이라면, <韓國 現代史의 再照明>은 英語와 日語로 쓰인 主要 論文이나 硏究書의 한 部分을 飜譯해 모은 것이고, <分斷 前後의 現代史>도 國內 筆者의 글이 2篇 실려 있지만, 基本的으로 海外 硏究者들의 成果를 모은 것이다. <韓國 現代史, 1945∼1975>는 美國의 進步的 韓國 硏究者들이 펴낸 의 飜譯本이었다. 이 세 冊에는 모두 브루스 커밍스의 글이 실려 있는데, 1981年 美國에서 刊行된 그의 <韓國戰爭의 起源>은 飜譯 出刊되기 前부터 널리 읽혀졌다.
初期 現代史 冊의 出刊에서는 現在 열린우리당 所屬인 유기홍 議員이 當時 學內 示威로 實刑을 살고 나와 出版社에 다니며 큰 구실을 했다. 나도 그 무렵 軍隊에 끌려갔다 온 뒤 大學院에 進學하면서 <1960年代>(거름出版社), <進步黨>(지兩社) 等을 先後輩들의 도움을 받아 編輯했고, 돌베개에서 이정식·스칼라피노의 <韓國 共産主義 運動史> 1∼3을 飜譯하면서 現代史 工夫를 始作했다.
[%%IMAGE4%%]


茫茫大海에서 목말라 하는 硏究者

現代史 工夫에는 여러 가지 制約이 많았다. 普通 古代史는 該當 時代의 資料를 다 쌓아도 무릎을 넘지 않고, 高麗史는 文集을 合쳐도 키를 넘지 않는데, 朝鮮時代는 房 하나 가득이 되어 資料가 넘쳐나기 때문에 高麗時代史를 硏究하는 方法으로 朝鮮時代를 硏究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있다. 朝鮮時代 資料가 房 하나 가득이면 現代史는 그와는 比較되지 않을 程度로 資料가 많아서 取捨選擇에 苦悶해야 한다. 그러나 정작 現代史 工夫를 하겠다고 나선 우리는 마치 四方을 둘러봐도 물뿐인 茫茫大海에서 목말라하는 사람들처럼 資料 不足에 허덕였다. 周邊에 冊 빌려주었다가 問題가 되어 懲役을 살고 고문당한 事緣을 심심치 않게 듣는 마당이니, 資料를 가진 사람들도 빌려주는 것은 고사하고 여간해선 資料를 보여주려 하지도 않았다. 圖書館에 解放 直後에 刊行된 資料가 있어도 大部分 特殊資料로 分類해 보여주지 않았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때는 資料를 求해서 읽은 時間보다 헌冊房 뒤지거나, 어디에 무슨 資料가 있는지를 確認하고, 어떻게 빼낼까 窮理하는 데 더 많은 時間을 보내지 않았나 싶다.
1986年 김남식 先生님과 함께 <韓國 現代史 資料總署> 15卷을 돌베개에서 묶어 낸 것도 巨創하게 말하자면 資料 不足 때문에 現代史 硏究를 할 수 없다는 敗北主義를 깨버리자는 것이었지만, 資料 接近에 加해진 制約이 지긋지긋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무튼 그동안 題目으로만 들었던 單行本, 左翼系 新聞과 雜誌의 主要 論文, 會議錄, 팸플릿 等이 2萬 쪽假量 쏟아져나와 解放 3年史에 關해서는 資料 不足 때문에 硏究하기 어렵다는 핑계를 대지 못하게 되었다. 또 美國의 國立文書保管所에 所藏된 美軍政 資料가 15卷 分量으로 일월서각에서 影印本으로 刊行됐다. 朝鮮共産黨 機關紙 <解放日報>나 남로당 機關紙 <努力人民>과 같은 資料를 모아서 내다 보니 當局의 團束이 憂慮됐지만, 多幸히 無事히 넘어갔다.
主要 大學 史學과의 學部는 勿論이고 大學院에도 現代史 講義나 세미나는 設置되지 않았다. 題目에 ‘現代史’라 되어 있어도 適當히 日帝時代나, 甚至於 어떤 大學에서는 現代史에서 大院君에 對한 講義를 하기도 했다. 現代史를 工夫하겠다고 하면 워낙 險한 時代이다 보니 先生님들께서는 다친다고 挽留하셨다. 正規課程에 近現代史 講義가 不足하다 보니 史學科 大學院生들이 밖에서 세미나팀을 組織했다. 1984年 望遠韓國史硏究室이 門을 열었고, 여기서도 이듬해에 現代史 팀을 만들어 工夫를 始作했다. 1986年에는 歷史問題硏究所가 만들어졌는데, 望遠韓國史硏究室은 主로 韓國史 專攻醫 碩士課程 中心으로 모여 使命感은 衝天했으나 論文을 執筆할 만큼 成熟하지는 못한 反面, 歷史問題硏究所는 私學 專攻者들에 비해서는 한결 몸이 가벼운 社會科學硏究者들까지 包含해 모였고, 이미 硏究 力量을 갖춘 長年層의 進步的 知識人들이 積極 加擔해 더 빨리 成果를 내었다.

運動圈 사냥, <韓國民衆史>를 잡아먹다

1986年 아시안게임이 成功的으로 마무리되자 軍事獨裁 政權은 1988年 올림픽 以前에 運動圈을 싹쓸이하기로 마음먹은 것 같았다. 1986年 建國大 事件으로 1千餘 名의 學生을 잡아들이더니 1987年 初 박종철이 治安本部 對共分室에서 拷問 殺害됐다. 緋緞 學生運動뿐 아니라 勞動, 農民, 宗敎, 文化 等 前防衛에 걸쳐 軍事獨裁의 攻勢가 始作됐고, 이런 雰圍氣에서 出版도 例外는 아니었다. 當代 最高의 公安檢事로 有名한 김원치에 依해 풀빛에서 刊行된 <韓國 民衆史>가 標的이 되어 풀빛의 實質的인 發行人 나병식 等이 拘束됐다. 民靑學聯 事件의 無期囚인 나병식은 歷史를 專攻했고, 當時 後輩들과 폭넓은 關係를 維持해왔다. <韓國 民衆史>는 유기홍이 中心이 되고 도진순(現在 창원대) 等 大學院生과 制憲議會 事件의 核心인 최민 等 서울대 國史學科 77·78學番들이 처음에는 鄭澈英語에서 英語로 韓國史를 내려 한다며 韓國語 底本의 執筆을 付託받아 作業하다가 中間에 정철영어 쪽에서 抛棄하는 바람에 풀빛에서 내게 된 것이다. 유기홍, 최민 等이 各各 手配되는 等 事故가 생겨 현대 便이 마무리되지 못했는데, 윤대원(現在 歷史學硏究所)李 마침 軍에서 除隊해 마무리하여 冊이 나왔다. 民衆을 前面에 내세운 最初의 歷史書는 當時 讀者의 相當한 呼應을 얻었지만, 公安當局은 더 뜨겁게 나왔다. 그동안 나온 現代史 關聯 書籍들이 모두 販賣禁止를 當해 禁書 目錄에 이름을 올렸지만, 發行人이 拘束되거나 筆者들이 잡혀가지는 않았는데, <韓國 民衆史>의 境遇 出版社 四柱가 拘束된 것이다. 多幸히 6月抗爭이 겹치면서 나병식은 釋放됐지만, 누구보다 熱心히 그의 釋放을 위해 뛰어다니던 풀빛 週間인 文學評論家 채광석이 이 무렵 不意의 交通事故로 世上을 떠난 것은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現代史에 對한 關心이 高調되는 가운데 <海戰史>도 1985年에 강만길 先生을 代表著者로 하여 2卷이 나왔다. 김광식이나 洪姻叔 等 1970年代 後半에 大學을 다니면서 <海戰史> 1卷을 읽고 ‘피가 거꾸로 도는’ 衝擊을 받았던 사람들이 筆者로 參與했지만, 如前히 40·50代 筆者들이 主를 이루었다. 1987年 말에는 박현채 先生을 代表著者로 하여 3卷이 나왔는데, 이番 <再認識>에도 論文이 收錄된 이완범 等 젊은 筆者들이 中心이 되었다. 1989年에는 4, 5, 6卷 세 冊이 무더기로 나왔다. 최장집 先生이 代表筆者가 된 4卷은 韓國戰爭 以前의 빨치산 運動이나 4·3抗爭 같은 敏感한 問題를 처음 다루었고, 김남식 先生이 代表筆者가 된 5卷은 統一部 長官이 된 이종석 等 젊은 筆者들이 北韓의 革命傳統과 人民政權의 樹立을 主로 다루었다. 6卷은 박명림ㆍ이완범 等이 硏究史를 整理했다. 1979年 1卷이 처음 나온 <海戰史>는 이렇게 1989年 6卷까지 나오면서 新進 筆者들을 大幅 發掘해 國內의 硏究成果를 集大成했다.
光州의 衝擊 속에서 現代史 工夫를 해야 한다는 必要性을 느끼며 新聞 쪼가리, 잡지 쪼가리를 모아 論文 目錄을 作成해가던 것이 벌써 25年 가까이 지나버렸다. 勞動‘現場’에 가는 代身 冊床이 當時 現代史 硏究를 마음먹은 사람들의 ‘現場’이었고, 硏究者들은 自身들의 工夫가 世上을 바꾸는 知識이 되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先生님들은 이렇게 工夫해라 가르쳐주는 代身, 現代史 工夫하면 다친다고, 韓國史에는 아직 硏究되지 않은 主題들이 너무나 많이 기다리고 있다고 걱정하셨다. 公安當局은 <韓國 民衆史> 事件이나 <韓國現代 民族解放 運動史 事件>에서와 같이 現代史 硏究가 大衆化되거나 運動과 結合할 境遇 그냥두지 않았다.

그 工夫가 나라를 卑下하기 위해서인가

그 疾風怒濤의 時代에 ‘묻지 마 다쳐’를 뿌리치고 現代史 工夫를 始作한 우리는 다듬어지지 않은 20臺였다. <再認識> 編輯者들이 말하는 것처럼 民族至上主義와 民衆革命必然論으로 武裝한 것은 아니지만, 民族과 民衆을 所重히 여겼음은 틀림없다. 日帝時代를 親日과 反日의 二分法으로 說明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는 것은 當時에도 알았지만, 獨立運動史 硏究를 不溫히 여기던 狀況에서 硏究領域의 確保를 위해서라도 치고 나갈 수밖에 없는 面도 分明히 있었다. <再認識>의 編輯陣이 主張하는 것처럼 果然 우리가 大韓民國을 卑下하기 위해 어렵게 現代史 工夫를 始作한 것이었을까? 1989年의 <海戰史> 段階에서는 아직 다가서지 못한 民間人 虐殺의 眞實이 <再認識> 編輯陣이 “市民의 權利와 義務는 또 무엇인지를 모른 채 나라 만들기의 첫 삽을 뜬 우리 할아버지-아버지 世代”의 “暗中摸索에서 일어난 施行錯誤”에 不過한 것일까? 1980年代의 現代史 硏究에 分明히 未熟하고 거친 部分은 있다. 그것을 現代史에 關한 限 先生님에게 배워본 적 없는 20代들의 小兒病이라 불러도 좋다. 그러나 50代 大學敎授들이 親日派나 虐殺者, 獨裁者들에 對해서는 限없이 너그러워지면서, 現在의 過去 淸算에 對해서는 獨立軍이 親日派를 미워하는 것보다 더 剛한 檄文을 내세우며, 同僚 硏究者들에 對해 自虐史觀에 빠져 있다고 批判하는 것은 어떻게 불러야 할까?

한겨레는 妥協하지 않겠습니다
眞實을 應援 해 주세요
맨慰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