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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 古代 飼料 DB
黨에 留學하여 文殊菩薩의 奇別을 받다
煮醬은 스스로 邊方에서 태어난 것을 恨歎하여 西쪽에서 佛敎의 敎化를 배우기를 바랐다. 仁平(仁平) 註 145 3年 病身(丙申) 곧 定款(貞觀) 註 146 10年이다. 에 勅命을 받아 門下의 中인 失(實) 等 10餘 名과 함께 西쪽으로 黨에 들어가 淸凉山(淸凉山) 註 147 을 찾아갔다. 山에 만수대性(曼殊大聖) 註 148 의 昭詳이 있는데, 그 나라에 서로 傳하여 말하기를 “帝釋天 註 149 이 石工을 이끌고 와서 彫刻한 것이다”라고 한다. 慈藏이 消詳의 앞에서 祈禱하며 銘感(冥感) 註 150 을 하고는, 昭詳이 頂수리를 쓰다듬고 범게(梵偈)를 주는 꿈을 꾸었다. 깨어나도 뜻을 알지 못했다. 아침이 되자 異常한 중이 와서 풀이해 주고 이미 皇龍寺塔篇에 나왔다. 註 151 또 말하기를 “비록 萬校(萬敎)를 배우더라도 아직 이를 뛰어넘는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또한 歌詞와 舍利 等을 주고 사라졌다. 煮醬은 처음에 그것을 숨겼기 때문에 ≪黨高僧傳≫에는 收錄되지 않았다. 註 152 煮醬은 自身이 成人의 奇別 註 153 을 꿈꾼 것을 알고, 이에 北帶(北臺) 註 154 를 내려가 太畫紙(太和池)로 갔다.
長安에 들어가니, 太宗이 勅使를 보내 慰勞하였고 승광別院(勝光別院)에 安置하고 寵愛하여 私與하는 것이 자못 後하였다. 煮醬은 그 煩雜함을 싫어하여 票를 올리고 終南山(終南山) 韻祭祀(雲際寺)의 東쪽 벼랑에 들어가 바위 사이에 집을 짓고 3年을 居하였다. 人身(人神)李 戒를 받고 神靈의 應함이 매양 많았는데 말이 번거로워 싣지 않는다. 이미 다시 長安으로 가니 또한 勅命으로 慰勞하고 犬(絹) 200疋을 주어 衣服과 費用으로 쓰게 하였다.
註) 145
善德女王의 年號로 634年~646年에 使用하였다. 바로가기
註) 146
唐 太宗(太宗(太宗)의 年號로 定款 年間은 627年~649年이다. 바로가기
註) 147
中國 山西省 태原簿에 있는 五臺山을 가리킨다. 五臺山은 文殊師利의 情吐露 傳해진다. 이 山은 浙江省의 普陀山, 四川省의 峨嵋山, 安徽省의 舊火山과 더불어 中國 佛敎의 四大聖地의 하나이다. 바로가기
註) 148
文殊菩薩을 말하는 것으로 普賢菩薩과 함께 部處의 夾侍菩薩로 智慧를 맡고 있다. 傳說的으로 이 菩薩은 中國 山西省 五臺山에서 1萬菩薩과 함께 있다고도 하는데, 우리나라 江原道 五臺山에 있다고도 하여, 五臺山의 상원사(上院寺)는 文數를 州존으로 모시고 禮佛하고 있다. 바로가기
註) 149
欲界 第2千人 忉利天의 主人이며, 須彌山(須彌山) 위의 善見城(善見城)에 살면서 中턱에 있는 四天王을 거느리고 佛法과 佛弟子를 保護하는 存在이다. 바로가기
註) 150
隱密한 感應을 말한다. 바로가기
註) 151
≪三國遺事≫ 榻牀 皇龍寺區層石塔兆(皇龍寺九層塔條)에는 사구게(四句偈)를 解釋해주는 內容이 안 나온다. ≪三國遺事≫ 대산傲慢眞身兆(臺山五萬眞身條)에 그 內容이 보이는데 “‘牙婆佐郞’은 一切 佛敎를 깨달았다는 말이고, ‘달預置巨野’는 自己의 本性은 아무것도 없다이며, ‘랑가이가랑’은 佛敎理致를 이렇게 解釋한다 이며, ‘달豫老師나’는 勞使나 부처를 곧 본다는 말이다”고 解釋하였다(≪신편 三國遺事≫, 신서원, 1994, 279쪽). 바로가기
註) 152
≪속고승전(續高僧傳)≫에는 文殊의 感應을 받은 事實이 一切 言及되지 않고 있다. 本文에서는 그 理由를 中國에 있을 當時 慈藏이 숨겼다고 하고 있는데, 이는 新羅 佛國土說 等 主로 新羅 調整과의 關係에서 생겨난 것으로 解釋할 수 있다(김두진, 「磁場의 門柱信仰과 戒律」, ≪韓國史論叢≫ 12, 國民大, 1989, 8~9쪽). 바로가기
註) 153
性別(聖?)은 문수대性의 奇別(記?)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成佛할 수 있다는 豫言을 말한다. 바로가기
註) 154
五臺山에는 東臺·서대·男大·北帶·中隊가 있는 데, 그 中 北帶는 가장 높은 곳으로 海拔 3,058m이다. 바로가기
主題分類
  • 文化>史上>佛敎思想>僧侶生活
  • 文化>史上>佛敎思想>醫食口·不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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週)1 黃玹,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韓國史料叢書 第1卷,
1971).http://db.history.go.kr/id/sa_001_0030_0020 (accessed 2007. 09. 03)

週)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年 3月 19日.
http://db.history.go.kr/id/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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週)1 黃玹,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韓國史料叢書 第1卷, 1971).(國史編纂委員會 韓國社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sa_001_0030_0020, 2007. 09. 03)

週)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年 3月 19日. (國史編纂委員會 韓國史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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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料名
三國遺事
資料位置
資料詳細化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