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트페테르부르크, 白夜의 譫妄 속에 아른거리는 모더니티의 都市
그 幻覺의 空間을 거니는 도스토예프스키 삶과 文學의 腹話術!
상트페테르부르크 모더니티의 版타스마고리아는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스며들었고, 도스토예프스키의 版타스마고리아는 다시 우리를 비추고 있으니, 도스토예프스키는 ‘우리 모두가 枯骨에서 나왔다고’ 말했지만 이제 우리는 모두가 도스토예프스키에게서 나왔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本文 中에서 (404쪽)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版타스마고리兒의 都市에서 스무 番 理想을 移徙 다녔다. 그는 平生 한 番도 이곳에 自己 집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마치 歡迎이나 그림자처럼 그는 ‘집’의 實體를 모르는 浮草였고 小說을 쓰다가 어슴새벽의 餘名에 겨우 잠드는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모더니티의 한 現象(現象)이었다. 그가 무엇인가에 홀린 듯 白夜(白夜)의 빛과 함께 걸어 다녔을 그 거리와 골목과 모퉁이를 같이 따라 걷다 보면 도스토예프스키와 상트페테르부르크는 元來부터 하나였다는 생각이 든다.
상트페테르부르크-版타스마고리아-도스토예프스키, 그래서 크로노스의 時間的 偏差를 뛰어 넘는 이 셋은 位格으로는 差異를 가지지만 本性은 하나인 三位一體의 屬性을 고스란히 물려받는다. 이 세 겹의 울림은 다시 세 겹의 地層을 만든다. 도스토예프스키가 散策하고 居住하던 空間, 그리고 그의 主人公들이 居住하던 作品 속의 空間, 마지막으로 이 둘을 重疊시키면서 벤야민의 파리처럼 우리가 散策하며 보고 듣고 냄새 맡으며 思惟할 수 있는 現實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空間이 그것이다. - 本文 中에서 (22~23쪽)
# 歡迎의 都市를 거니는 散策者 도스토예프스키 - 그 자취를 되짚는 文學의 巡禮 旅行
朴泰遠과 鏡城을, 카프카와 프라하를, 보들레르와 파리를 떼어놓을 수 없는 것처럼, 도스토예프스키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關係 亦是 그저 한 人物과 그 人物의 居住地라고만 바라볼 수 없는 獨特하고 끈끈한 結合 속에 있다. 모든 藝術家의 作品에는 그 藝術家가 살았던 空間의 痕跡이 녹아드는 法이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魂縱的이고 矛盾的인 都市는 도스토예프스키라는 作家에게 各別히 깊게 스며들어 그의 作品世界를 만드는 데 一助했다. 執筆을 하는 동안 繼續 房안을 돌아다니는 버릇이 있었던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바로크 都市의 수많은 대로, 公園, 廣場, 골목을 거닐었고 샛江과 섬 사이 수많은 다리들을 건너며 이 都市를 돌아다녔다. 거기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사는 平生 동안 한 番도 自己 집을 갖지 못했고, 모두 스물 두 番 移徙를 다녔을 程度로 繼續 헤매고 떠돌며 苦惱하는 삶을 살았다. 도스토예프스키라는 人物의 肖像, 그리고 그 삶의 자취가 어떻게 그의 文學 속에 녹아들어갔는지를 더 깊이 알고 짙게 느끼기 위해 그가 平生 主 活動 舞臺로 삼았던 都市, 그러나 그가 한 番도 自己 집을 갖지 못하고 浮草처럼 떠돌았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속속들이 누빈 濃密한 巡禮의 記錄을 只今 선보인다. 한 도스토예프스키 硏究家의 眞率한 批評 에세이이자 旅行記로 보는 도스토예프스키 評傳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獨特한 텍스트 위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삶과 文學과 藝術과 哲學이 은은히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 흐름은 19世紀末에서 20世紀 初 모더니티를 目擊한 文藝批評史를 훑어가고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대표되는 東邦 世界가 맞부딪친 모더니티의 거울 위에 도스토예프스키가 보여주는 近代文學의 風景들이 비춰지는 幻燈機 或은 萬華鏡을 들여다보자.
# ‘스핑크스의 都市’ 상트페테르부르크, 그 幻覺과 魅惑
상트페테르부르크가 建設될 때 第一 먼저 區劃되는 二 대로들은 바로크 都市의 理念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대로들은 곧게 뻗어나가는 直線의 水平的 擴散 運動을 無限으로 延長시키고, 中間 中間의 接點과 같은 廣場을 마련하여 그 가운데에 記念碑를 세움으로써 視線의 準據를 마련했다. (…) 그러므로 大路를 걷는 것은 無限한 權力과 그들의 이데올로기 속을 걷는 것과 다름없다. 그러나 地平線 너머의 그 無限은 우리가 다가가면 다가 갈수록 언제나 그 만큼을 뒤로 물러서는 歡迎의 機制이다. -「幾何學이 登場했다」중에서
‘성스러운 베드로의 都市’라는 이름을 가진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스핑크스의 都市’라는 別名을 얻게 된 것은 그저 네바 江邊에 1832年 이집트 테베에서 들여온 스핑크스 上 한 雙이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1703年 표트르 大帝가 設立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유럽도 아시아도 아닌 地理的 二重性, 로마 가톨릭도 콘스탄티노플 正敎徒 아닌 이념적 二重性을 지닌 矛盾과 混種의 都市이기에 이런 別名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표트르 大帝가 꿈꾼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유럽의 바로크 都市를 모델로 삼은 絶對 王權의 象徵이자 帝國을 輝煌하게 비춰줄 ‘演劇 舞臺’로서의 都市였다. 파리·런던·암스테르담과 같은 유럽의 格子形 都市를 模倣해 만들어진 이 都市는 표트르 大帝의 欲望과 西歐 유럽의 바로크 이데올로기는 잘 들어맞고 있었지만, 모스크바의 正敎的인 傳統과는 相剋이었다. 표트르 大帝는 그럴수록 모든 文化的 土壤을 뿌리부터 西歐的으로 改編하려고 했다.
# 都市와 欲望의 幻燈上, 版타스마고리아
그러한 試圖 속에 正敎的 러시아의 靈魂이 유럽의 모더니티와 錯綜된 이 都市는 그 自身의 混亂인 同時에 魅力이라 할 수 있는 矛盾과 逆說, 二律背反, 兩價性, 混成毛紡績人 文化를 構成해갔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譫妄과 幻覺과 歡迎을 都市 文化 全般에 걸쳐 神話, 傳說, 民譚, 小說 等의 形式을 통해 定着하기 始作했다. 이런 幻想에 기초하는 문화소를 ‘版타스마고리兒(phatasmagoria)’라고 부를 수 있다. 이 말은 ‘歡迎’이라는 뜻의 ‘版타스마’에서 由來하며, 元來 意味는 18世紀 末 프랑스에서 發明된 幻燈機의 透寫 이미지, 卽 圜(등)賞을 指稱한다. 資本主義 體制 아래에서 모더니티가 가장 잘 具現된 場所를 ‘메트로폴리스(metropolis)’로 看做하는 발터 벤야민은 19世紀 모더니티의 首都를 파리로 보았고, 이 모더니티의 首都를 構成하는 核心 據點을 ‘파사주’라는 아케이드로 把握했다. 이곳은 使用價値보다 交換價値가 優先視 되는 最新 流行 商品을 파는 場所였고, 이 商品은 眞正한 必要에 依해 만들어진 것이라기보다는 流行에 依해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追求하는 同一 反復과 欲望의 産物이었다. 이런 現象을 벤야민은 『破邪젠베르크』에서 이것을 版타스마고리兒라고 불렀다. 卽 版타스마고리아는 마르크스가 物神(物神)이라고 불렀던 商品의 欺瞞的 外樣인 幻想的 이미지와 類似한 槪念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벤야민은 이 版타스마고리아를 아케이드의 商品만이 가진 屬性이 아니라 資本主義 메트로폴리스와 都市 計劃 全體도 이런 版타스마고리兒의 範疇에 包含시켰다. 巨大 都市는 그래서 集合 無意識의 幻想이며 꿈꾸는 集合體이다. 벤야민이 모더니티의 首都 파리의 版타스마고리兒에서 商品과 流行과 아케이드의 物神性 속에서 版타스마고리아를 目擊했다면, 우리는 이 같은 版타스마고리兒의 歡迎·幻覺·恍惚境의 또 다른 환유를 파리의 ‘醫師 變異形’이라고 부를 수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도 發見할 수 있다. 표트르 大帝의 欲望을 實現하기 위해 完璧하게 計劃된 人工都市人 상트페테르부르크. 西歐的 유럽의 모더니티와 아시아的 러시아의 靈魂이 對峙하는 同時에 맞물리며 混種되고 있는 이 都市는 奇異한 수수께끼를 내어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는 스핑크스만큼이나 危險하고도 魅惑的으로 다가오고 있다.
# 빛의 都市에서 떠오르는 作家와 作品의 腹話術
骨랴드킨을 分裂로 이끈 안개 낀 11月의 폰탄카와 零下 20度의 겨울 네바를 건너서 ‘病弱한 少女를 聯想’시키는 페테르부르크의 봄을 지나면 이곳의 世上은 어느덧 不眠症에 사로잡힌다. (…) 世上은 빛으로 흘러넘치고 사람들은 그 빛을 주체하지 못한다. 그 빛의 過剩 속에서 사람들은 이따금 길을 잃고 夢想이나 幻覺의 抒情에 생각을 내맡긴다. 그 빛은 ‘나는 只今 여기에 있다’와 같은 空間的 定位(正位)를 모두 忘却하게 만든다. 안개와 같은 白夜 속의 夢遊病者, 이것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散策者가 꿈꾸는 또 다른 版타스마고리아이다.
-「白夜의 歡迎과 새로운 義人 體驗」中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지닌 矛盾과 歡迎의 版타스마고리아를 누구보다도 먼저 敏感하게 느꼈다. 그가 이 都市에서 貰房을 轉轉하며 平生 한 番도 이곳에 自己 집을 가져본 적이 없었기에, 마치 歡迎이나 그림자처럼 ‘집’의 實體를 모르는 浮草이며 그 自身이 都市의 版타스마고리아였기에 그랬을지 모른다. 안개와 白夜 속의 夢想을 더듬고, 무더위와 惡臭 속에서 醜惡한 現實을 直視하다가, 窮極에는 이 地球 밖 또 다른 行星으로 脫出을 꿈꾸는 恍惚境을 맛본 도스토예프스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모더니티 속에서 體驗한 版타스마고리兒의 幻覺을 이 都市에서 모욕당하고 傷處받은 사람들의 靈魂에 비추어보았다. 雄壯한 대로와 莊嚴한 廣場, 華麗한 다리 너머에 있는 가난한 下級 官吏와 大學生, 夢想家와 地下生活者, 浮浪兒, 거리의 女子, 典當舖 老婆……. 바로크 演劇 舞臺의 脚光 뒤便에 있는 이 어두운 暗礁들의 눈에 비치던 圜(등)上의 輪廓과 形態를 도스토예프스키는 받아 적었다. 그 過程을 통해 이 都市를 眞情으로 理解하고 이 都市 自體가 되었던 것이다. 版타스마고리兒의 幻覺으로 얼룩진 이 都市는 빛조차도 矛盾的이다. 이 都市에는 빛이라는 말을 들으면 바로 聯想되는, 환한 姿態로 世上을 비추는 빛이 勿論 存在한다. 그러나 잦아들어야 할 때 오히려 흘러넘치는 미친 빛, 白夜(白夜)도 함께 存在한다. 어둠보다 더한 幻覺과 夢想으로 사람을 휘두르는 이 미친 빛은 도스토예프스키와 그의 作品을 비추고 있는 가장 큰 舞臺 照明일지 모른다. 그 빛 속에서 도스토예프스키가 끊임없이 걸어다녔을 그 거리와 골목과 모퉁이, 交叉하는 수많은 대로들과 부연 안개를 빚어내는 譫妄의 運河와 샛江들,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다리들을 細細하게 더듬어 가 보자. 少年 時節 工夫하고 成長한 工兵學校, 을 執筆하던 구석房, 社會主義 共同體를 꿈꾸던 콜롬나, 思想犯으로 投獄된 페트로파블로스키 要塞와 총살당할 뻔한 세묘노프 練兵場, 두番째 新婦와 結婚하던 이즈마일로프스키 寺院, 자주 거닐던 유스포프 庭園과 步즈네센스키 大路……. 이런 空間들은 그의 作品 속에 그대로 살아나, 라스콜리니코프가 내려간 13階段이 되고 소냐의 구석房이 되었으며, 骨랴드킨이 分身을 만나는 다리가 되었다. 발터 벤야민과 같은 散策者의 視線으로 더듬다보면 도스토예프스키와 상트페테르부르크는 眞實로 하나였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冊속으로
그리보예도프 運河 위에서 小說이 되지 못한 이야기를 듣다
니콜라이에게 이 地域이 도스토예프스키와 그 主人公들이 살던 地域이라고 말하자, 그는 今時初聞인 듯 두 어깨를 움츠린다. 自身은 只今 집貰가 밀리고 하루하루 고단하고 疲困한 삶을 사는데, 먼 異國에서 여기까지 날아와 도스토예프스키 타령을 하고 있는 異邦人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냐는 表情이다. 나도 내 自身이 왠지 모르게 理由 없이 쑥스러워졌다. 文學과 藝術은 世界의 얼굴을 改造하는데 아주 無力하기만 하고, 自己 存在의 苦痛스러운 分裂조차도 治癒하지 못하는 휴머니즘의 나르시스日 뿐이라는 事實은 라스콜리니코프度 알고 있었다.
-「그리보예도프 運河의 검은 물, 그해 여름」 中에서
『카라마조프價의 兄弟들』의 生家에서 죽지 않은 作家를 發見하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집은 이제 博物館이 되었으나 그가 쓰던 帽子와 雨傘, 卓子와 椅子, 펜과 잉크병과 그의 筆體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原稿紙는 늘 그 자리에 놓여 있다. 불쑥 門을 열고 나와 콜록 콜록 마른기침을 하며 누구시냐고 물을 것만 같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아직 죽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새로운 世界에 屬하는 ‘全的으로 아름다운 사람’이길 願했으니 그는 時間 밖의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루카치는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아직 한篇의 小說도 쓰지 않았다고.
-「맺음말 : 우리는 언제나 첫사랑으로 돌아간다」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