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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特權에 따르는 義務와 犧牲 甘受하라”… 支配層 向한 ‘일리아스’ 메시지[조대호 神話의 땅에서 만난 그리스 思想]|東亞日報

“特權에 따르는 義務와 犧牲 甘受하라”… 支配層 向한 ‘일리아스’ 메시지[조대호 神話의 땅에서 만난 그리스 思想]

  • 東亞日報
  • 入力 2021年 12月 17日 03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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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대호 연세대 철학과 교수
조대호 연세대 哲學科 敎授
《戰爭 이야기에는 敵軍과 我軍, 善과 惡, 勝利와 敗北가 있다. 讀者나 觀客의 마음은 勝利하는 善한 便으로 끌리기 마련이다. 大多數 戰爭小說이나 映畫를 볼 때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 움직인다. 하지만 그리스의 戰爭 敍事詩 ‘일리아스’에는 그런 二分法이 통하지 않는다. 그리스 軍隊의 內紛에서 始作한 이야기는 敵對者들 사이의 和解로 끝나고, 죽인 者들이 죽임을 當하는 殺戮의 사슬 속에서 勝敗의 境界가 흐려진다. 무엇보다 그리스 便이 아니라 트로이아 便이 더 讀者의 마음을 끈다는 點이 특별하다. 特히 헥토르와 사르페돈의 活躍이 빛난다.》

사람의 溫氣를 가진 敗北者

트로이아의 王子이며 最高 指揮官인 헥토르는 그리스의 最高 英雄 아킬레우스의 맞手다. ‘맞手’라고 해도, 둘의 對決 結果는 누구나 쉽게 豫想할 수 있다. 헥토르는 싸움에서 神의 아들을 當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아킬레우스에게 없는 것이 있다. 사람의 溫氣다. 헥토르는 斷乎하지만 包容力이 있고 戰場의 英雄이면서 한 家庭의 자애로운 家長이며, 名譽를 바라지만 그가 追求하는 名譽는 共同體를 위한 犧牲에서 오는 것이다. 헥토르에게는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凝視하면서도 萎縮되지 않는 勇氣와 義務感이 있다.

전투에 나가기 전 헥토르의 모습을 그린 카를 프리드리히 데클러 작 ‘안드로마케와 아스티아낙스에게 이별을 고하는 헥토르’(왼쪽 사진)와 사르페돈의 시신이 죽음의 신과 잠의 신에 의해 고향으로 옮겨지는 그림이 실린 기원전 515년 무렵 제작된 술동이. ‘일리아스’에서 헥토르와 사르페돈은 패배자가 아닌 자신의 의무를 다한 영웅으로 그려진다.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戰鬪에 나가기 前 헥토르의 모습을 그린 카를 프리드리히 데클러 作 ‘안드로마케와 아스티아낙스에게 離別을 告하는 헥토르’(왼쪽 寫眞)와 사르페돈의 屍身이 죽음의 神과 잠의 神에 依해 故鄕으로 옮겨지는 그림이 실린 紀元前 515年 무렵 製作된 술동이. ‘일리아스’에서 헥토르와 사르페돈은 敗北者가 아닌 自身의 義務를 다한 英雄으로 그려진다. 寫眞 出處 위키미디어
헥토르의 眞面目은 아킬레우스와의 맞對決을 위해 城 밖으로 나가기 前, 아내와 어린 아들을 만나는 場面에서 생생하게 드러난다. 아내 안드로마케는 永遠한 離別을 豫感한다. 그女는 哀願한다. “제발, 城안에 머물고 밖으로 나가지 마세요. 當身의 아내를 寡婦로, 어린 아들을 孤兒로 만들지 마세요.” 不屈의 戰士도 눈물짓는 아내의 懇請은 뿌리치기 힘들다.

“난들 어찌 그러한 모든 일들이 念慮가 안 되겠소, 여보./하지만 내가 萬一 怯쟁이 模樣 싸움터에서 물러선다면/트로이아인들과 옷자락을 끄는 트로이아 女人들을 對할 面目이/없을 것이오. 그리고 내 마음도 이를 容納하지 않소. 나는 언제나/勇敢하게 트로이아人들의 先頭 隊列에 서서 싸우며 아버지의/위대한 名聲과 나 自身의 名聲을 지키도록 배웠기 때문이오.”(천병희 驛)

“싸움은 避할 수 없는 義務”


사르페돈은 헥토르와 事情이 全혀 다르다. 그에게는 헥토르처럼 싸워야 할 切迫한 理由가 없다. 그는 먼 南쪽 나라 뤼키아에서 援軍을 이끌고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支援軍의 將帥 사르페돈은 트로이아 軍隊의 어떤 將帥보다 霸氣 있고 勇猛하다. 戰場에서 싸움을 躊躇하는 헥토르를 꾸짖을 程度이니까. “헥토르餘! 그대가 前에 보여주었던 勇氣는 어디로 갔소?” 사르페돈을 빛나게 하는 것은 勇猛과 武勳뿐이 아니다. 그를 眞짜 돋보이게 하는 것은 英雄의 義務感이다.

아킬레우스가 아가멤논과 다투고 戰場에서 물러난 뒤 트로이아 軍隊는 물밀듯이 그리스 軍隊를 攻擊한다. 그 先鋒에 사르페돈이 있다. 그는 남의 나라 戰爭에 參與한 援軍으로서 名分과 實利를 함께 챙기는 약삭빠른 人物이 아니다. 適當히 눈치를 보며 距離를 두는 것은 사르페돈의 性格에 맞지 않는다. 그는 同僚 장수의 突擊을 재촉하며 이렇게 외친다.

“글라우코스餘! 大體 무엇 때문에 우리 두 사람은 뤼키아에서/윗자리와 고기와 가득 찬 술盞으로 남달리 尊敬 받으며,/모든 이들이 우리를 神처럼 우러러보는가?/그리고 무엇 때문에 우리는 크산토스講義 堤防 옆에/과수원과 밀밭이 딸린 아름답고 큰 領地를 차지하고 있는가?/그러니 우리는 只今 마땅히 뤼키아인들의 先頭 隊列에 서서/치열한 戰鬪 속으로 뛰어들어야 할 것이오.”

사르페돈에게 先鋒에서의 싸움은 回避할 수 없는 公的인 義務다. 그런 義務 履行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故鄕 사람들은 그에게 높은 자리와 호사스러운 삶을 許諾하고 果樹園과 領地를 내어 주었겠나? 特惠에는 義務가 따른다. 사르페돈의 말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傳統을 要約한다. 그래서 글라우코스度 그의 외침을 外面할 수 없다.

“敵에게도 배우라”

어떻게 그리스의 詩人 호메로스는 트로이아의 英雄들을 이렇듯 堂堂하고 멋진 모습으로 그려내었을까?

‘일리아스’가 ‘半指의 帝王’이나 ‘1917’ 같은 한 個人의 創作物이 아니라는 點부터 記憶하자. 數百 年 동안 입에서 입으로 傳해진 이야기들이 새롭게 脚色되어 하나의 作品이 誕生했다. 이 作品의 出現 背景에 關해서는 많은 問題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일리아스’에서 그려진 트로이아 戰爭은 實際로 일어났을까? 戰爭의 時點에서 500年 뒤에 살았던 詩人이 어떻게 戰爭의 모습을 그토록 생생하게 그려냈을까? ‘일리아스’ 안에서 口傳된 部分과 創作된 部分은 各各 어떤 것일까? 對答하기 어렵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獅子처럼 사나운 아킬레우스, 欲心 많은 아가멤논, 怜悧한 오디세우스 같은 그리스 英雄들에 對한 이야기와 달리, 葛藤과 煩悶 속에서도 義務를 다하는 헥토르와 사르페돈의 이야기는 詩人의 創作과 脚色이 가장 많이 덧붙여진 部分이라는 點이다.

기원전 11세기 이후 그리스인들은 에게해를 건너 지금의 터키 서부지역에 정착했다. 이 새로운 정착지에서 일리아스가 탄생했다. 키오스와 스미르나(현 터키 이즈미르)는 호메로스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다.
紀元前 11世紀 以後 그리스인들은 에게海를 건너 只今의 터키 西部地域에 定着했다. 이 새로운 定着地에서 일리아스가 誕生했다. 키오스와 스미르나(現 터키 이즈미르)는 호메로스의 故鄕으로 알려져 있다.
大多數의 文學作品이 그렇듯이 ‘일리아스’는 餘興을 위한 公演 作品이었고 最初의 聽衆은 貴族들이었다. 이들은 트로이아 遠征의 主役들이 活躍한 미케네 文明(紀元前 1600年∼紀元前 1200年)李 沒落한 뒤 바다를 건너 이오니아 地方(只今의 터키 西部)에 定着한 移住民들의 後裔였다. 낯선 곳으로 移住한 그리스인들은 300年 넘게 困窮한 ‘暗黑時代’를 보낸 뒤 紀元前 800年 무렵부터 蕃盛期를 맞았다. 삶의 餘裕가 생기면 族譜를 따지는 法. 移民者의 後裔들도 先祖들의 過去를 記憶해 내려고 했다. ‘일리아스’는 그런 뿌리 찾기의 産物이었다. 必是 當代의 貴族들은 先祖들의 勝利와 榮光을 기리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호메로스가 그들에게 보여준 것은 오히려 英雄들의 傲慢과 失手, 그로 인한 悲劇的 運命이었다. 그런 點에서 ‘일리아스’는 過去에 對한 讚揚이 아니라 現在와 未來를 위한 警告였다. 눈먼 詩人은 親舊와 敵, 善과 惡, 勝利와 敗北의 境界를 넘어 人間의 運命을 꿰뚫어 보았다. 口傳 속 이야기에 트로이아 英雄들의 모습을 그려 넣을 때도 詩人은 警告를 잊지 않았다. 敵에게도 배우라! 特權에 對한 代價로 義務를 다하고 犧牲을 甘受하는 英雄들의 모습 속에 호메로스는 貴族들을 向한 大衆의 바람을 담았을 것이다.

사르페돈과 헥토르는 戰場에서 죽었다. 하지만 그들은 敗北者가 아니라 義務를 다한 英雄으로 後代 사람들의 記憶 속에 살아남았다. 이들이 作品에서 뛰쳐나와 우리를 보면 뭐라고 말할까? 우리 社會에도 ‘貴族들’이 있다. 이들은 數十 年 동안 成長과 發展의 特惠를 누려 왔지만, 헥토르나 사르페돈을 찾기 힘들다. 아예 없을까, 보이지 않을 뿐인가? 成長 萬能 社會의 온갖 疾患들, 最高의 産災率과 밑바닥의 幸福指數, ‘炭素排出 깡牌國家’의 汚名, 最低 出産率, 便 가르기와 低質 藝能으로 轉落한 政治를 보면서 그들은 責任과 義務를 느낄까?

조대호 연세대 哲學科 敎授
#特權 #義務 #犧牲 #일리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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