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日애니 巨匠 미야자키 하야오, 80歲에도 新作낸다…NYT 인터뷰|東亞日報

日애니 巨匠 미야자키 하야오, 80歲에도 新作낸다…NYT 인터뷰

  • 뉴시스
  • 入力 2021年 11月 24日 14時 09分


코멘트
日本 애니메이션 映畫의 巨匠 미야자키 하야오 監督은 80歲의 나이에도 旺盛한 作品活動을 하고 있다. 좀처럼 言論에 나서지 않는 그가 美國 뉴욕타임스(NYT)와 1時間 동안 畫像인터뷰를 했다. 西方言論과 인터뷰는 2014年 以來 처음이라고 한다. 通譯을 두고 이뤄진 1時間짜리 인터뷰에서 많은 것을 끌어내는 것은 不可能한 일이다. NYT는 인터뷰를 契機로 23日(現地時間) 미야자키監督의 作品人生 全體를 眺望하는 記事를 내보냈다. 다음은 記事要約.

미야자키 監督은 애니메이션 製作技術이 빠르게 發展하던 時期에도 캄퓨터를 使用한 製作을 限死코 拒否했다. 1988年作 “이웃집 토토로”에 나오는 두 어린이의 友情과 숲속의 怪物을 그린 場面은 勿論 1997年作 “모노노케 히메(一名 모노노케 公主)”의 主人公이 自己를 길러준 어머니 늑대의 傷處에서 흐르는 피를 빨아먹는 場面, 2001年作 “센과 치히로의 行方不明”에서 怯쟁이 少女가 勇氣를 내 돼지로 變한 父母를 救하는 場面까지 미야자키 監督은 極端의 想像力을 發揮하면서 휙휙 눈이 돌아가는 場面들을 거의 全的으로 손으로 그려냈다. 特히 미야자키와 唯一하게 견줄만한 애니메이션 作家인 월트 디즈니와 달리 미야자키는 80살이 된 只今도 企業 運營者로 물러앉지 않았다. 그가 映畫監督 다카하타 이사오, 製作者 스즈키 도시오와 함께 1985年에 設立한 스튜디오 지브리에서 그는 애니메이션 生産에만 沒頭하는 數百名과 函게 팀의 一員으로 일하고 있다. 때로는 動作을 直接 그리고 背景作業도 하며 淸掃도 하는 藝術家中 한 사람인 것이다. 다른 사람들 冊床과 크기가 비슷한 그의 冊床은 數十年 동안 똑같은 일을 反復해온 現場이다. 그는 如前히 映畫 한 篇當 數萬쪽에 達하는 場面을 直接 그리고 있다. 컴퓨터를 使用하는 境遇는 거의 없다.

그는 “애니메이터의 道具는 鉛筆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日本製 鉛筆이 特히 좋다면서 鉛筆心이 섬세해 表現을 잘 해낼 수 있다고 했다. 스나다 馬尾 監督 2013年作 “꿈과 狂氣의 王國”에서 그는 自身이 늙어서 5B 鉛筆이나 6B 鉛筆을 쓴다고 自嘲하면서 鉛筆을 만드는 日本 杉나무에 對해 “質좋은 나무들이 다 없어졌다”고도 했다. 미야자키 監督은 인터뷰에서도 “그건 事實”이라면서 웃었다. 그 말을 들으면서 “모노노케 히메”에서 마을 指導者 에보市가 數千年된 이끼덮인 삼나무들을 잘라서 대장間에 불을 지피는 場面을 撮影하기 위해 미야자키 監督이 南部 야쿠緦麻섬 詩라타니 韻詩쿄 峽谷으로 現地撮影을 나갔던 일이 생각났다. 그곳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는 25m 높이에 둘레가 16m가 넘는 2600年 以上된 나무들이다. 미야자키 監督은 그러나 韻詩쿄 峽谷의 숲이 映畫와 一致하지는 않는다면서 “옛날부터 日本人들의 마음 속에 남아 있는 숲을 描寫했다”고 說明했다.

그가 인터뷰에 應한 場所는 도쿄 郊外 코哥네이에 있는 작은 建物로 스튜디오 지브리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個人 作業室로 使用하는 그곳을 그는 “돼지 우리”라고 불렀다. 돼지를 좋아하는 그는 스스로를 돼지로 그리는 일이 적지 않았다. 建物 앞에 세워둔 어두운 灰色의 시트로엥 2CV는 2馬力짜리 엔진이 달린 컨버터블로 1990年에 단종된 모델이다. 1979年作 “루팡 3歲: 칼리오스트로의 性”에서 벼랑끝에서 追擊戰을 벌리는 와인色 모델로 登場한다. 每年 12月이 되면 부엌 窓가에 1970年代 TV 시리즈로 放映된 “하이디: 알프스의 少女”에 나오는 끌어안고 싶게 만드는 鹽素 人形을 놓아 둔다. 지나다니는 아이들을 위해서다. 아카데미 博物館이 이 염소를 展示하겠다고 했을 때 그는 아이들이 보고 싶어한다며 拒絶했었다.

미야자키 監督은 ‘돼지우리’를 隱退 後에도 繼續 使用할 計劃이다. 1998年 더以上 作品을 만들지 않겠다고 宣言하면서 지은 이 建物은 이듬해 지난해 가을 開封한 “귀滅의 칼날, 無限 列車” 以前 日本 歷史에서 가장 많이 돈을 번 “센과 치히로의 行方不明”의 아이디어를 내면서 스튜디오 지브리에 返還됐다. “센과 치히로의 行方不明”은 書房 以外 地域 映畫로는 처음으로 2002年 아카데미賞 最高 애니메이션映畫賞을 받았다. 2013年 34年 동안 11篇의 映畫를 만든 그가 두番째로 隱退宣言을 하면서 스튜디오 지르비는 生産部署를 閉鎖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는 只今도 이곳에서 映畫를 만들고 있다. “하고 싶어서”라고 理由를 말하며 그는 마치 마지막 도둑질을 하려고 準備中인 머리가 하얗게 센 도둑처럼 웃었다.

미야자키 監督은 서스펜스의 代價다. 물흐르는듯 하면서도 대충 그린 듯한 善과 細部 描寫는 時間을 많이 들여 製作하는 主流 애니메이션과 다르지만 그의 映像 스타일은 보는 사람이 單숨에 沒入하도록 만든다. 밝지만 淺薄하지 않은 彩度높은 色을 차가운 灰色, 灰褐色과 對比시킨다. 빛과 그림자를 가르는 銀빛, 깊은 밤을 描寫하는 그림자 속의 그림자 같은 것들이 그만의 特徵이다.

미야자키는 리얼리스트이기도 하다. 2004年 映畫 “하울의 움직이는 性”을 끝部分에 登場하는 飛行船의 爆擊場面은 검은 煙氣와 타오르는 불꽃, 붉게 물든 하늘이 登場한다. 이는 미야자키가 戰爭에 對해 가진 記憶을 그려낸 것이다. 그는 日本이 眞珠灣攻擊으로 美國과 戰爭을 始作한 1941年生이다. 그가 네살이던 해 그의 家族들이 도쿄에서 避身해 지내던 禹츠노미야를 美國 爆擊機들이 爆擊했다. 그는 그때의 記憶을 “꿈과 狂氣의 王國”의 한 場面으로 그려냈다. 燒夷彈이 쏟아지는 속에서 아버지가 그를 업고 江둑을 기어올라 작은 트럭을 타고 逃亡쳤다. 미야자키는 映畫에서 아이를 안고 있는 女人이 트럭에 타도 되느냐고 묻는데 트럭이 그냥 떠나버리는 것으로 描寫했다. 미야자키는 實際로 그들을 두고 떠났었다고 했다. 한달 뒤 美國이 原子爆彈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投下했고 日本이 降伏했다. 어렸던 미야자키가 當時 狀況의 危重함을 제대로 알진 못했을 지라도 當時의 記憶이 그의 作폼에 짙게 배어 있다. 他界한 畫家 이케다 타츠오, 小說家 무라카미 하루키 等 同時代의 日本 藝術家들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實際로 怪物과 수퍼 히어로가 登場하는 日本 애니메이션의 負傷은 原子爆彈의 落塵으로 遺傳 變異가 發生하는 狀況을 많이 그리고 있다. 954年 登場한 고질라는 美國의 水素爆彈 實驗 때문에 深海에서 成長한 怪物이며 1963年 TV 시리즈로 放映되기 始作한 宇宙少年 아톰은 英雄主義를 表象한다. 原子力에서 動力을 얻는 少年 로봇이 平和를 위해 싸운다는 設定이다.

미야자키의 映畫들은 또 鎖國하던 日本이 强制로 西歐의 價値觀을 받아 들여야 했던 近代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番 인터뷰를 仲介한 로스앤젤레스 아카데미 博物館의 니벨은 미야자키의 作品들에 나타나는, 옅은 애절함을 간직한 熱望이 帝國主義時代의 自負心과 西歐 物質主義를 모두 敬遠하는 나이든 日本人들의 鄕愁를 刺戟한다고 말한다.

미야자키의 아버지는 가미가제 攻擊으로 惡名높은 제로 戰鬪機의 날개를 生産한 武器工場을 運營했다. 決코 戰爭의 被害者가 아니었다. 1995年 아사히 新聞에 寄稿한 글에서 미야자키 監督은 아버지가 缺陷있는 製品을 눈감아달라고 官吏들을 賂物로 구워삼는 詐欺꾼으로 描寫했다. 戰爭이 끝나자 아버지는 남은 두랄루민으로 粗雜한 숟가락을 만들어 家財道具가 없어 苦生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팔았다고 했다. 뒤에 工場을 댄스홀로 만든 적도 있었다. 미야자키는 네 아들 가운데 둘째였다.

미야자키는 아무나 드나들 수 없었던 軍需工場에 한番도 가본 적이 없지만 어릴 때부터 마음껏 날아다닐 수 있는 飛行機에 心醉했다. 리비아 沙漠에 부는 뜨거운 모래바람을 뜻하는 지르비(영어로 Ghilbi)는 2次大戰에 使用된 이탈리아 偵察 兼 爆擊機의 이름이기도 하다. 航空機에 魅了된 痕跡이 미야자키가 만든 모든 映畫에 나타난다. 하늘을 날거나 하늘을 걸어다니는 怪物로 變하는 사람이나 1986年作 “穿孔의 라퓨타”에 登場하는 半透明 날개로 飛行하는 飛行物體처럼 말이다.

미야자키는 成長하면서 아버지가 戰爭을 통해 돈을 벌면서도 아무런 罪意識을 느끼지 못한 것이 잘못임을 깨닫게 됐다. 그는 1995年 “나도 아버지와 마찬가지”라고 告白했다. 映畫製作者로서 그 自身도 映像을 만들어내지만 映像이 마구 만들어지는 것을 非難하고, 子息을 사랑하지만 보살피지 못하며, 담배를 끊지 못하는 環境論者라는 式으로 말이다. 矛盾을 끌어안는 이같은 態度가 西方에서 그의 作品이 人氣를 끈 祕訣인 同時에 그에 對한 拒否感의 源泉이기도 하다. 善惡을 分明히 區分하지 않는 態度는 일新論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미야자키는 “나는 옳고 그른 것을 判定하는 神이 아니다”라면서 “우리 人間은 失手를 하기 마련”이라고 했다. 그의 世上에선 分明한 惡黨이 없으며 다만 나쁜 일을 하는 役割만 있을 뿐이다. “모노노케 히메”에 나오는 마을 指導者 에보市는 숲을 破壞하지만 同時에 몸파는 사람들과 문둥病 患者들을 위한 救護所를 만들기도 한다.

디즈니 映畫에 對해 미야자키는 1988年 한 講演에서 디즈니의 가벼운 情緖를 싫어한다고 밝힌 적이 있다. “디즈니의 映畫가 觀客에 對한 冒瀆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미야자키의 作品에는 男子 主人公보다 女子 主人公이 더 많이 登場한다. 大部分 어린이도 아니고 女人도 아닌 어중간한 나이의 少女들이지만 아는 게 많고 獨立的인 人物이다. 스스로 職業을 擇하고 집안을 이끌며 戰鬪를 벌이고 少年들을 救해낸다. 童話속 浪漫的인 캐릭터와는 距離가 멀다.

미야자키 監督은 謙遜한 世俗의 聖者와 같은 삶을 살아왔다. 일을 통해 이웃에 사는 아이들에게 기쁨을 주려하고, 쉬는 날은 江가의 쓰레기를 줍고, 20年 넘게 自己 집 近處 療養院에 있던 癩患者를 남몰래 보살피고, 親舊가 된 癩患者가 숨질 때 손을 잡아 줬다.

그런 그에 對해 미야자키의 멘토이자 競爭者였던 다카하타는 “싸우기도 잘하고 울기도 잘하고 놀기좋아하고 사람 좋아하고 才能을 認定해주길 期待하며 期待가 깨지면 불같이 火를 내던 사람”이라고 描寫했다.

미야자키는 또 限死코 日本의 再武裝을 反對해 온 탓에 日本 右翼들로부터 至毒하게 攻擊을 當하고 있지만 컴퓨터를 全혀 使用하지 않는 그에겐 아무런 意味가 없다.

戰爭中 武器를 만들어 富者가 된 아버지 德分에 미야자키 監督은 넉넉한 어린 時節을 보낼 수 있었다. 日本 貴族들이 主로 다니는 가쿠슈인대를 卒業했다. 그러나 그의 成長期는 日本의 激變期였다. 傳統 農業에서 重工業으로 經濟가 發達하면서 發展 速度가 눈부셨다. 日本의 産業化 理論을 工夫하면서 미야자키는 스스로를 共産主義者라고 생각했다. 主動者는 아니었지만 1960年代 美日安保條約 反對示威에 加擔하기도 했다. 高等學生 時節부터 漫畫를 그리기 始作해 大學을 卒業한 뒤 日本 最大 애니메이션 製作社인 土에이에 就職해 곧바로 애니메이터 勞動組合의 事務總長이 됐다. 1994年 “出生 階級과 無關하게 바보는 如前히 바보고 좋은 사람은 如前히 좋은 사람”이라는 말로 共産主義와 訣別했음을 밝혔다. 그는 “모든 世上사람을 幸福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哲學者는 없다”고 말했다.

미야자키는 自身의 作品에 對해 理念性이나 道德性을 附與하지 않는다. 그의 映畫作業은 “當身의 마음과 當身의 日常 사이의 빈 자리를 채워줌으로써 慰安을 提供하는 것”李 使命이다. 다만 그의 作品들은 人間이 環境에 미친 破壞的 影響을 慨歎한다. 모든 事物에 神이 깃들어 있다는 日本 信徒(神道)의 影響이 엿보인다.

또 運命論과 樂觀論이 妙하게 交叉하는 것도 그의 作品의 特徵이다. “모노노케 히메”에서 모노노케 公主가 主人公과 女主人公이 아무리 애를 써도 結局 죽지만 숲은 繼續 살아 남는다. “나로선 鬱蒼한 숲이 나의 靈魂 깊숙한 곳에 자리한 어둠과 連結돼 있다”고 미야자키는 1988年의 인터뷰에서 말한 적이 있다. “숲이 사라지면 내 靈魂 속의 어두움도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내 存在도 稀薄해지는 셈”이라는 것이다.

미야자키는 그러나 自然을 純粹한 것으로 描寫하지도 않는다. 善惡을 區分하지 않는 것이다. “모노노케 히메”에 登場하는 곰의 神이 銃을 맞자 火가나서 아시타카 王子의 마을을 攻擊한다. 이 때도 아시打카는 그를 죽이려 하기 보다 떠나달라고 哀願한다. 미야자키는 인터뷰에서 내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前에 본 적 없는 낮選 것과 마주치면 怯부터 내지 말고 疏通해봐야 한다”고.

미야자키는 只今 오랜 同僚 스즈키(73)와 함께 다음 作品을 만들고 있다. 두 사람 모두 作品에 對해 說明하기를 꺼렸지만 요시노 겐자부로의 1937年作 小說을 土臺로 하고 있다는 事實은 公開했다. 아버지가 世上을 뜬 지 얼마 안된 열다섯살 장난꾸러기 少年에 對한 이야기다. 그렇지만 두 사람의 作品은 小說과는 딴 版인 “大型 판타지物‘이라고 스즈키는 밝혔다.

約束한 時間이 끝나자 미야자키 監督은 머리를 문지르며 禮義 기다란 세븐 스타 담배에 불을 붙였다. 마지막 質問을 했다. ”다음 作品의 題目이 ’社는 方法?‘인가요?“라고 묻자 그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걸 모르기 때문에 이 映畫를 만들고 있다.“

[서울=뉴시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火나요
    0
  • 推薦해요

댓글 0

只今 뜨는 뉴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Copyright ⓒ 2020 By '전통문화연구회(傳統文化硏究會)' All Rights reserved.
 한국   대만   중국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