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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 넘어도 공 차는데 끄떡 없어…축구할 때 가장 幸福”[양종구의 100歲 時代 健康法]|東亞日報

“일흔 넘어도 공 차는데 끄떡 없어…축구할 때 가장 幸福”[양종구의 100歲 時代 健康法]

  • 東亞日報
  • 入力 2022年 7月 16日 14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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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국 전 대한축구협회 전무이사가 9일 경기도 고양 농협대 잔디구장에서 열린 60·70대 실버축구단 친선 경기에서 페털티킥을 차고 있다. 축구국가대표 공격수 출신인 그는 은퇴한 뒤에도 계속 공을 차며 건강한 노년을 만들어 가고 있다. 고양=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김진국 前 대한축구협회 專務理事가 9日 京畿도 高陽 농협대 잔디球場에서 열린 60·70代 실버蹴球團 親善 競技에서 페털티킥을 차고 있다. 蹴球國家代表 攻擊手 出身인 그는 隱退한 뒤에도 繼續 공을 차며 健康한 老年을 만들어 가고 있다. 高陽=양종구 記者 yjongk@donga.com
“야! 진국이兄에게 줘.”

7月 9日 京畿도 高陽 농협대 잔디球場에서 열린 60,70代 실버蹴球團 로얄 FC와 서울 江北區팀의 親善競技. 로얄 FC 選手들 사이에서 “진국이兄에게 패스해”란 소리가 자주 나왔다. 1970年代 中盤 韓國蹴球의 代表 攻擊手였던 김진국 前 대한축구협회 專務理事(71)를 부르는 소리다. 金 前 專務는 이날 攻擊型 미드필더로 競技를 調律했다. 70歲를 뛰어 넘은 그는 每週 土曜日 로얄 FC에서 공을 차며 ‘9988 234(99歲까지 팔팔하게 살다 2,3日 앓다 죽는다)’라는 信念을 實踐하고 있다.

金 前 專務는 現役 時節 키가 작아 ‘짤만이’로 불렸지만 뛰어난 발才幹과 페인트 技術로 팬들의 人氣를 獨차지했다. 그로부터 50年 가까운 歲月이 지난 只今도 60, 70代 실버蹴球界에서 鋼鐵 體力을 자랑하는 攻擊手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

김진국 전 대한축구협회 전무이사가 9일 경기도 고양 농협대 잔디구장에서 축구공을 들고 ‘엄지척’을 하고 있다. 축구국가대표 공격수 출신인 그는 은퇴한 뒤에도 계속 공을 차며 건강한 노년을 만들어 가고 있다. 고양=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김진국 前 대한축구협회 專務理事가 9日 京畿도 高陽 농협대 잔디球場에서 蹴球공을 들고 ‘엄지척’을 하고 있다. 蹴球國家代表 攻擊手 出身인 그는 隱退한 뒤에도 繼續 공을 차며 健康한 老年을 만들어 가고 있다. 高陽=양종구 記者 yjongk@donga.com
“前 한때 이름을 날리던 選手들이 나이 들어 빌빌거리는 게 보기 좋지 않았어요. 그래 選手를 隱退하고 指導者 할 때, 銀行에서 勤務할 때도 繼續 蹴球를 했어요. 김진국이란 이름에 걸맞게 나이 들려고 只今도 努力하고 있습니다.”

金 前 專務는 1972年부터 1977年까지 6年 동안 A매치(國家代表京畿) 97競技에서 27골을 터뜨린 스타플레이어 出身이다. 1975年 3月부터 1977年 2月까지 A매치 42競技에 連續 出戰할 程度로 剛한 體力을 誇示했다. 當時 김진국이 센터링(크로스)을 올리면 ‘꺽다리’ 김재한이 헤딩슛으로 골을 잡아내 둘은 ‘幻想의 콤비’로 불렸다. 金 前 專務는 “當時 內 센터링은 김재한龍‘이라고 불렸다”며 웃었다. 김재한 前 KFA 副會長(75)도 한 때 로얄 FC에서 金 前 專務와 공을 함께 차기도 했다. 金 前 專務는 只今도 25分씩 進行하는 親善競技에서 4,5競技를 거뜬히 消化하고 있다. 그는 “周邊서 미련하다 할 程度로 많이 뛴다. 하지만 이렇게 激烈하게 蹴球를 해야 온갖 스트레스도 날아가고 다시 태어난 것 같은 氣分이 든다”고 했다.

1980年代 中盤까지 국민은행에서 플레잉 코치로 뛰었던 그는 1992年까지 코치와 指導者를 한 뒤 이듬해부터 本格的인 銀行 業務를 始作했고 支店長까지 했다.

김진국 전 대한축구협회 전무이사(가운데)가 9일 경기도 고양 농협대 잔디구장에서 열린 60·70대 실버축구단 친선 경기에서 상대 수비를 피해 볼을 패스하고 있다. 고양=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김진국 前 대한축구협회 專務理事(가운데)가 9日 京畿도 高陽 농협대 잔디球場에서 열린 60·70代 실버蹴球團 親善 競技에서 相對 守備를 避해 볼을 패스하고 있다. 高陽=양종구 記者 yjongk@donga.com
“指導者 땐 選手들 訓鍊 때 함께 運動했어요. 銀行 일을 볼 때도 蹴球를 놓을 순 없었습니다. 그 즈음 서울市 生活體育 女子蹴球團이 創團됐는데 저 보러 指導해달라고 해서 自願奉仕로 함께 運動하기도 했죠. 1995年부턴 제가 사는 서울 陽川區에 ’김진국 蹴球敎室‘을 열어 週 2回씩 어린이들하고 공을 함께 차고 있습니다.”

2001年부터 2011年까지 KFA에서 行政을 했다. 幼少年委員長과 企劃室長, 專務까지 하며 雨水 幼少年選手 海外留學 프로그램도 進行했다. 그 프로그램 德澤에 孫興慜(30·토트넘)李 獨逸 함부르크 幼少年 클럽에서 留學하며 世界的인 選手로 跳躍할 機會를 잡았다. 金 前 專務는 2002年 創設한 MBC꿈나무蹴球財團의 理事長을 맡아 只今까지 幼少年蹴球 發展을 위해 일하고 있다.

金 前 專務는 KFA를 떠난 뒤 2012年부터 로얄 FC에 合流해 本格的으로 ’실버蹴球 人生‘을 始作했다. 로얄 FC는 2005年 이회택과 김재한 等 1960, 70年代 韓國 蹴球를 주름잡던 스타플레이어와 早起蹴球 會員들이 만든 팀이다. 每週 土曜日 全國의 실버蹴球團 1, 2個 팀을 招請해 4~5時間 공을 찬다. 地方 遠征 競技를 다니기도 하고 生活蹴球 全國大會에 出戰하기도 한다. 國家代表 出身들이 많아 日本과 中國, 泰國 等 海外 招請 競技에도 자주 간다. 水原北中 1學年 때부터 本格的으로 공을 찼으니 近 60年 가까이 蹴球를 하고 있는 셈이다. 무릎 等 關節은 괜찮을까.

김진국 전 대한축구협회 전무이사가 9일 경기 고양시 농협대 잔디구장에서 드리블을 하고 있다. 고양=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김진국 前 대한축구협회 專務理事가 9日 京畿 高陽市 농협대 잔디球場에서 드리블을 하고 있다. 高陽=양종구 記者 yjongk@donga.com
“先天的으로 健康한 身體를 준 父母님 德分에 아직 關節엔 問題없습니다. 또 技術蹴球를 하면 힘도 안 들고 負傷 危險도 없죠. 前 키가 작아서 어려서부터 技術로 勝負手를 띄워야 했죠. 70이 넘은 只今도 가볍게 無理 없이 공을 차기 때문에 아직 어디가 不便하진 않습니다.”

金 前 專務는 경신고 在學時節 165cm에서 더 以上 크지 않는 키를 克服하기 위해 技術蹴球를 驅使했다. 그는 當時 경신고 축구팀을 맡고 있던 장운수 監督이 “蹴球는 키가 작아도 얼마든지 技術로 커버할 수 있다”고 助言해 技術 蹴球에 專念했다고 했다. 當時 아침부터 밤까지 多樣한 技術을 硏磨했고 結局 ’援助 접기(페인팅)왕‘으로 팬들을 사로잡았다. 그 때 익힌 技術 德에 大學, 實業팀, 國家代表는 勿論 選手生活 막판 進出한 獨逸 프로蹴球팀에서 活躍하면서도 큰 負傷이 없었다.

只今도 힘들이지 않고 공을 차고 있는 原動力에 技術蹴球가 있다고 했다. “技術은 한番 익히면 平生 잊혀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蹴球를 잘 하기 위해 홈트레이닝으로 體力도 키우고 있다. 스쾃과 팔굽혀펴기는 基本이고 啞鈴 等 機構로 筋肉運動을 한다. 그는 “나이가 들면서는 筋力이 急激하게 떨어지기 때문에 꾸준히 웨이트트레이닝을 해줘야 버틸 수 있다”고 했다.

김진국 전 대한축구협회 전무의 축구대표팀 시절 모습. 김진국 전 전무 제공.
김진국 前 대한축구협회 專務의 蹴球代表팀 時節 모습. 김진국 前 專務 提供.
잘 알려지지 않은 事實 하나. 金 前 專務는 1980年에 獨逸 2部 리그 다름슈타트에 入團했다. ’車붐‘ 차범근 前 水原 三星 監督(69)에 이어 韓國選手 유럽 進出 2號였다.

“이미 代表팀에서도 나온 狀態였기 때문에 選手로서 유럽舞臺에서 成功해 보겠다고 간 건 아니었습니다. 그냥 見聞을 넓히는 次元에서 挑戰한 겁니다. 그때 西獨이 蹴球로는 最高 先進國이라 直接 가서 배우고 싶었어요. 그냥 구경하는 것보다는 選手로 뛰면서 體驗하면 더 좋을 것 같아 試圖했는데 多幸히 契約이 돼서 入團하게 됐죠. 범근이 때문에 韓國 選手에 對한 好感이 있을 때였죠. 1980年 1月부터 다름슈타트에서 6個月 뛰고, 여름에 같은 2部 리그에 있던 보름스(Worms) 팀으로 옮겨서 1982年 시즌까지 두 시즌을 뛰었습니다.”

김진국 전 대한축구협회(KFA) 전무(오른쪽)가 국가대표 시절 ‘꺽다리’ 김재한 전 KFA 부회장과 찍은 모습. 김진국 전 전무 제공.
김진국 前 대한축구협회(KFA) 專務(오른쪽)가 國家代表 時節 ‘꺽다리’ 김재한 前 KFA 副會長과 찍은 모습. 김진국 前 專務 提供.
金 前 專務는 車 前 監督의 故鄕(京畿道 華城) 先輩이자 경신고 先輩이기도 했다. 車 前 監督이 高校 2年 後輩로 入學하면서 車 前 監督 집과 4km 程度 떨어져 살았던 것을 알았다고 했다. 車 前 監督이 어린 時節을 回顧하는 글에 ’김진국 先輩가 유니폼과 트레이닝服을 입고 다니는 게 멋있고 부러워서 蹴球 選手가 되고 싶었다‘고 쓰기도 했다. 金 前 專務는 “나중에 알았는데 시골 中學生 범근이의 눈에는 내가 서울에서 蹴球로 有名한 高等學校에 選手로 뛴 다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 같다”고 했다. 그는 高等學校를 마친 뒤 바로 失業 기업은행으로 갔고 나중에 건국대를 다녔다. “일찍 實業 舞臺에 뛰면서 實力도 늘고 代表팀에도 뽑혔다”고 回想했다. 金 前 專務는 1982年 보름스 나온 다음에 쾰른 體育大學에서 6個月間 指導者 코스 工夫도 하고 돌아왔다.

김진국 전 대한축구협회 전무(뒷줄 왼쪽에서 세 번째)의 1972년 축구대표팀 시절 모습. 뒷줄 오른쪽에서 다섯 번째가 차범근 전 수원 삼성 감독이다. 앞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김재한 전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축구자료수집가 이재형 제공.
김진국 前 대한축구협회 專務(뒷줄 왼쪽에서 세 番째)의 1972年 蹴球代表팀 時節 모습. 뒷줄 오른쪽에서 다섯 番째가 차범근 前 水原 三星 監督이다. 앞줄 오른쪽에서 세 番째가 김재한 前 大韓蹴球協會 副會長. 蹴球資料蒐集家 이재형 提供.
그는 남은 人生 幼少年 有望株들을 키우며 平生 蹴球를 즐기겠다고 했다.

“率直히 언제까지 공을 찰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죠. 하지만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진 공을 찰 생각입니다. 이 나이에도 蹴球를 한다는 것 自體가 健康하다는 意味 아닌가요. 前 공 찰 때가 가장 幸福합니다.”


양종구 記者 yjong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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