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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正熙와의 運命的 만남-대구사범 入試 落榜이 轉禍爲福?[최영해의 THE 이노베이터]|東亞日報

朴正熙와의 運命的 만남-대구사범 入試 落榜이 轉禍爲福?[최영해의 THE 이노베이터]

  • 東亞日報
  • 入力 2022年 8月 14日 09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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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건 新韓銀行 創業主 스토리
製菓店 印刷所 轉轉한 慶山 村놈. 서울 生活 半年 만에 淸算
“日本에 가서 큰물에 놀고 싶습니더”


2022年 7月 7日 新韓銀行이 創立 40周年을 맞았다. 1982年 日本 全域의 在日僑胞 341名으로부터 돈을 모아 만들어진 新韓銀行의 誕生은 이희건(李熙健) 創業主의 努力 없이는 不可能한 일이었다. 15歲의 어린 나이에 玄海灘을 건너 第一 밑바닥 使喚에서 始作한 그의 삶을 들여다 본 ‘여러분 德澤입니다. 新韓銀行 創業主 이희건 回顧錄’(羅南)李 最近 發刊됐다. 2011年 作故한 朝鮮 靑年 이희건의 不屈의 삶을 追跡했다.

日帝 强占期인 1932年 3月 慶北 經産의 壓良普通學校(只今의 初等學校)를 卒業한 이희건(1917~2011)은 大邱師範學校에 入學試驗을 치러갔다. 喜건은 시골에서 工夫는 언제나 1等을 놓치지 않는 優等生이어서 校長 先生님은 學校의 名譽가 걸린 일이라며 大邱師範學校 進學을 勸誘했다. 擔任인 다나카 先生은 試驗日보다 열흘이나 앞서 學校 附近에 下宿집을 求해주면서 마무리 工夫에 沒入할 수 있도록 支援을 아끼지 않았다.

●朴正熙와 運命的인 만남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훈받고 박정희 대통령과 기념 촬영한 모습. 서있는 사람 왼쪽에서 5번째가 이희건 회장. 1968년 3월 21일. 사진 나남
國民勳章 동백장을 殊勳받고 朴正熙 大統領과 記念 撮影한 모습. 서있는 사람 왼쪽에서 5番째가 이희건 會長. 1968年 3月 21日. 寫眞 羅南


“朴正熙(朴正熙)? 나는 이희문(李熙文)이야. 男子 이름에 喜(熙)字가 든 境遇는 드문데, 우리 둘이 같은 房을 쓰게 됐으니 이것도 기막힌 因緣이다. 그쟈?”

“그렇네. 같이 合格하면 좋겠다!”

“너거 龜尾普通學校에서는 몇 名이나 凝視하노?”

“일곱 名….”

“일곱이나? 나는 혼잔데….”

朴正熙와 이희문(나중에 이희건으로 改名)은 이렇게 만나 11日 동안 한 이불을 덮고 한솥밥을 먹으며 試驗 準備에 沒頭했다. 朴正熙는 밥 먹는 時間이 아까워 下宿집 아주머니에게 비빔밥을 만들어 달라고 注文할 程度로 工夫에 熱心이었다. 朴正熙는 間或 휘파람을 불기도 했는데, 소리가 힘차고 맑아 듣기에 좋았다고 熙文은 記憶했다.

當時 大邱師範 募集 人員은 100名. 日本人은 10名, 나머지는 朝鮮人 學生으로 뽑았다. 그러나 合格者 名單에 熙文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朴正熙 이름 석字는 또렷이 보였다. 熙文은 씁쓸한 마음으로 故鄕으로 발길을 돌렸다. 落榜한 熙文은 故鄕 慶山에서 漠漠한 며칠을 보냈다.

“그래 이 村구석을 벗어나자!”

熙文은 擔任인 다나카 先生님과 進路를 相議한 끝에 先生님이 아는 서울의 製菓店 住所를 받아들고 無酌定 서울로 올라가기로 했다. 先生님은 紙匣을 열고 돈을 꺼내 熙文의 손에 쥐여줬다.

“京城에 가려면 깨끗한 옷을 입어야 한다. 이 돈으로 옷을 사 입고 車費로 써라.”

“先生님 恩惠는 平生 안 잊겠심더!”

●製菓店, 印刷所 轉轉한 서울 生活

1947년 일본 오사카 쓰루하시 국제상점가연맹 발기인들과 함께.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이희건. 사진 나남
1947年 日本 오사카 쓰루하시 國際商店街聯盟 發起人들과 함께. 오른쪽에서 두 番째가 이희건. 寫眞 羅南


喜건은 大邱 서문시장에서 파르스름한 洋服을 사 입고 서울行 列車에 몸을 실었다. 滿 15歲 때다. 대구역에서 저녁 6時에 타 이튿날 아침 6時에 到着했으니 꼬박 12時間 걸렸다. 行人들에게 물어물어 다나카 先生님이 紹介해 준 忠武路 製菓店을 가까스로 찾았다.

“1等으로 卒業했다며? 나는 學校 다닐 때 내내 꼴찌 近處를 맴돌았어.”

니시모토 요시오 社長이 喜件을 맞이했다. 난生 처음 보는 빵과 菓子 種類는 열 손가락으로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카스테라 단팥빵 센베이…. 故鄕에서는 全혀 볼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런데 喜件이 製菓店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정작 그리 많지 않았다. 며칠을 지난 뒤 니시모토 社長이 말했다.

“자네는 아무래도 製菓에는 適性이 맞지 않은 것 같네. 다른 일자리를 찾을 때까지 負擔 없이 여기 머물게.”

事實上 解職 通報였다.

그런데도 틈날 때마다 書店에 들른 喜건은 서울에 오기를 正말 잘했다고 생각했다. 鍾路2街 박문서館을 즐겨 찾았다. 시골에선 구경도 할 수 없는 冊들이 書架에 櫛比하게 꽂혀 있었다. 冊값이 비싸 살 엄두를 내지 못했지만 틈만 나면 書店에 와 書架 앞에 서서 冊을 읽었다.

“冊을 좋아하는 模樣인데 무슨 일을 하냐?”

하루는 書店 主人이 물었다.

“製菓店에서 店員으로 일합니다.”

“우리 書店에 印刷所도 있는데, 거기서 일해보지 않을래? 冊을 실컷 읽을 수 있지.”

일자리를 求하던 喜건은 印刷所로 일터를 옮겼다. 書店 맞은便의 鍾路 YMCA 뒤쪽이었다. 于先 잔심부름부터 했다. 印刷한 冊을 박문서館으로 옮기고, 地方으로 보낼 冊 뭉치를 들고 서울驛으로 갔다. 印刷所로 原稿를 갖고 오는 이광수, 廉想涉, 현진건 같은 巨物 小說家들을 먼발치에서 구경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갑작스런 死亡, 日本을 向한 꿈

이희건이 1947년 미 연합사령부를 찾아가 설득한 끝에 쓰루하시가 국제시장에 간판을 열고 상인들이 다시 문을 열어 장사를 할 수 있게 됐다. 사진 나남
이희건이 1947年 美 聯合司令部를 찾아가 說得한 끝에 쓰루하시가 國際市場에 看板을 열고 商人들이 다시 門을 열어 장사를 할 수 있게 됐다. 寫眞 羅南


1932年 9月 어느 날 喜건은 갑자기 아버지를 여읜다. 서울에 있던 中에 아버지가 危篤하다는 電報를 받고 故鄕으로 갔지만 夜間列車가 到着한 때는 이미 돌아가신 뒤였다. 享年 64歲. 아버지의 臨終을 못한 不孝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다시 서울로 돌아와 첫 職場인 製菓店의 니시모토 社長을 찾아갔다.

“日本에 가려고 합니다. 社長님 故鄕인 오사카에 가서 일자리를 求해보려고 하는데요.”

“오사카? 좋아! 내가 紹介해 주는 곳에 가 일하면 밥은 먹을 수 있을 거야. 慶山에 가서 다나카 先生님께 推薦書를 付託드리게.”

다시 慶山에 간 喜건은 卒業한 壓良普通學校를 찾아가 다나카 先生님을 만나 就業推薦書를 付託했다.

“校長 先生님! 日本에 가서 큰물에 놀고 싶습니다.”

“그래, 只今 생각해보니 大邱師範에 不合格한 게 轉禍爲福이 되겠군. 자네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敎師보다 다른 일이 더 어울리는 사람이야. 오사카에서 뜻을 펼쳐보게나!”

喜건은 校長先生님 推薦書를 들고 大邱警察署에 가 渡航(渡航)證明書를 發給받았다. 日本語를 不便 없이 쓸 수 있어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證明書를 쉽게 받을 수 있었다.

書堂에서 배운 限時(漢詩)를 읊조리며 悲壯한 覺悟로 喜건은 짐을 샀다.

“손바닥만한 논밭, 해마다 보릿고개를 넘어야 하는 故鄕 땅, 上級學校에 進學하진 못했지만 平生 시골洞네에서 살기는 싫어.”

●관부連絡船, 玄海灘을 건너다
재일교포 경제인 모국경제시찰단 모습. 앞줄 중간 안경 쓴 이가 이희건 회장. 사진 나남
在日僑胞 經濟人 母國經濟視察團 모습. 앞줄 中間 眼鏡 쓴 이가 이희건 會長. 寫眞 羅南


1932年 11月 喜건은 3630t級 관부連絡船人 덕수환을 타고 玄海灘을 건넜다. 釜山港에서 945名을 태운 관부連絡船 3等 客室은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平生 처음 타는 배는 몹시 흔들렸다. 倍 멀미를 하는 사람들이 곳곳에 눈에 띄었다. 속이 안 좋아 甲板에 나가 보니 四方이 茫茫大海(茫茫大海)였다.

이튿날 아침 시모노세키港에 到着한 喜건은 渡航證 檢印이 있어 無事通過했다. 入國 節次는 釜山에서의 出國 審査보다도 簡單했다. 시모노세키에서 夜間 列車를 타고 다시 오사카로 向했다. 모든 驛에 서는 緩行 列車는 오사카까지 15時間이나 걸렸다. 하지만 그에게 지루함 같은 것은 찾을 수 없었다. 車窓 밖으로 펼쳐지는 風景을 보면서 日本 땅에서 어떤 삶이 展開될지 궁금했다.

“여기가 내 人生의 새 삶을 開拓할 日本이란 말이지? 그래 이제 始作이다!”

오사카에 到着한 喜건은 忠武路 製菓店의 니시모토 社長이 알려준 곳을 찾아갔다. 外國人을 위한 社會福祉機關人 오사카 게이메이回(啓明會)라는 事務所였다. 日本에서의 첫 일터, 喜건은 여기서 잔심부름을 하는 使喚으로 일하게 됐다. 門짝이나 冊床, 椅子가 故障 나면 도맡아 修理하고 建物 안팎을 淸掃하는 것이 주어진 일이었다.

나중에 在日同胞의 돈을 모아 韓國에서 신한은행을 만든 創業主 이희건의 日本 生活의 始作은 이처럼 밑바닥이었다.

롯데그룹 創業主인 故(故) 신격호 會長과 마찬가지로 喜件이 日本으로 온 것은 가난한 故國에서 벗어나 對處(大處)를 向하는 冒險心, 새로운 機會를 찾으려는 不屈의 意志, 몸을 아끼지 않는 誠實性과 忍耐心, 땀과 눈물이 어린 努力이었다. 日本에서 맨 손으로 成功한 喜건은 나중에 5살 어린 辛格浩를 만나 顧客을 向한 뜨거운 愛國心을 發揮하면서 불타오르는 意志로 投合한다(계속).

1946년 신혼 시절 아내 이쓰카게 미수와 함께. 두 사람은 만난지 석 달 만에 결혼했다. 사진 나남
1946年 新婚 時節 아내 李쓰카게 미수와 함께. 두 사람은 만난지 석 달 만에 結婚했다. 寫眞 羅南



최영해 記者 yhchoi6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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