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地震이 나면 롯데월드타워로 待避해야 하는 理由는?[최영해의 THE 이노베이터]|東亞日報

地震이 나면 롯데월드타워로 待避해야 하는 理由는?[최영해의 THE 이노베이터]

  • 東亞日報
  • 入力 2022年 1月 30日 09時 00分


코멘트

“롯데월드타워는 事業 아니야, 投資金은 回收 不可!”
죽은 者를 위한 피라미드보다 산 者를 爲한 유토피아
日本에서 번 돈 韓國에 國際的 名物 만들고파
“難關은 克服 對象이지 屈服 對象 아니야”


2020年 1月 19日 永眠한 롯데 創業主 故 신격호 會長이 別世 2週期를 맞았다. 울주 故鄕 한 山기슭에 端雅하게 묻힌 신격호의 人生은 韓國의 近現代史만큼이나 波瀾萬丈했다. 靑年 辛格浩는 小說家를 꿈꾸었지만 現實은 量을 키우는 植民地 朝鮮의 農業人이었다. 낯선 도쿄에서 롯데 神話를 일구기까지 신격호의 비즈니스에는 특별함이 있었다. 韓國의 랜드마크를 만들기 위해 世界 最高層을 만들겠다는 執念으로 일군 롯데월드타워에서 내려다본 漢江은 大韓民國의 奇跡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辛格浩 回顧錄 '熱情은 잠들지 않는다'(나남)에 나타난 故人의 挑戰과 企業家精神에서 우리 時代 巨人의 底力을 엿볼 수 있다.


“몇 年이 지나면 投資金을 回收할 것이라 보십니까?”
“回收 不可!”
“네?”

서울의 랜드마크로 우뚝 선 蠶室 롯데월드타워 建設 過程에서 롯데 創業主 辛格浩 名譽會長은 이런 質問을 가장 많이 받았다고 한다. 企業은 利潤 創出이 目的이다. 신격호의 생각은 달랐다. 롯데월드타워를 지으면서 事業性을 別로 考慮하지 않았다. 日本에서 牛乳 配達로 始作한 신격호의 꿈은 故國에 멋들어진 ‘名所(名所)’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것이 롯데월드타워다.

虎狼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던가.

辛格浩는 ‘漢江의 奇跡’을 世界人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日帝 治下 植民地 朝鮮에서 玄海灘을 건넌 辛格浩는 ‘재팬 드림’을 꿈꾸었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시모노세키 港에 내리자마자 얼굴에 피가 철철 흐르도록 흠씬 두드려 맞은 日本 刑事의 枚였다. 몸뚱이 하나로 朝鮮 靑年 辛格浩는 瘠薄한 日本 땅에서, 美軍의 攻襲으로 廢墟가 된 도쿄 땅에서 오직 誠實과 努力, 創意로 只今의 롯데 神話를 만들어냈다.

신격호 롯데 창업주가 서울 잠실 롯데월드타워 공사 현장에서 실무자에게 지시하는 모습. 사진 롯데
신격호 롯데 創業主가 서울 蠶室 롯데월드타워 工事 現場에서 實務者에게 指示하는 모습. 寫眞 롯데

●“롯데월드타워 돈 벌려고 했으면 못 지어”
“日本에 散在한 우리 文化財를 申 會長이 蒐集하면 어떻겠소?”

三星 創業主 이병철 會長이 生前 언젠가 신격호 롯데 會長에게 이렇게 勸誘했다. 湖巖 李秉喆은 대단한 文化財 蒐集家였다. 辛格浩는 이 會長의 文化財 蒐集品을 보면서 그저 부러울 따름이었다고 記憶했다. 그러던 中 이병철 會長이 던진 한마디는 辛格浩를 苦悶하게 만들었다.

‘나도 文化財를 蒐集해 볼까? 國家에도 도움이 될 것이고 보람도 느낄 수 있을 것 아닌가.’

辛格浩는 實際 ‘文化財 工夫’도 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敎養 水準의 學習이었지 文化財를 探究해 蒐集할 만한 ‘광(狂)’은 아니라는 點을 깨달았다. 過去의 遺産보다는 未來에 남길 文化財를 創造하는 것에 興味가 있었다. 그 마지막이 ‘롯데월드타워’라고 辛格浩는 그의 回顧錄에서 밝혔다.

辛格浩가 롯데월드타워를 構想한 것은 1980年代로 거슬러 올라간다. 蠶室이 荒凉한 허허벌판이었을 때다. 辛格浩는 거기에서 樂園을 그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 길이 얼마나 險難한 苦難의 길이 될지를 그 때는 몰랐다.

“會長님, 뭐 하러 사서 苦生을 하십니까. 그냥 아파트 지어서 파는 게 골치度 아프지 않고 收益도 엄청날 겁니다.‘

1980년대 잠실 석촌호수와 주변 모습. 사진 롯데
1980年代 蠶室 석촌호수와 周邊 모습. 寫眞 롯데

周邊 많은 사람들이 辛格浩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아파트 지어서 올리면 分讓收益만 챙겨도 크게 남는 장사인데, 뭣 하러 타워를 올리느냐는 疑問이었다. 하지만 辛格浩는 빙그레 웃기만 할 뿐 아무 얘기를 하지 않았다. 笑而不答(笑而不答). 돈은 이제 벌만큼 벌었다. 社會에, 國家에 뭔가 意味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企業家精神을 넘어 市民精神이 앞선 辛格浩였다. 이병철 會長의 過去 文化財 蒐集을 넘어선 現代版 國寶級 文化財를 만들겠다는 것이 念願이었다.
●이집트의 파라미드와 北韓의 유경호텔
1994年 4月 이집트 피라미드를 보러 간 辛格浩는 그 때의 衝擊을 잊지 못했다. 燦爛한 人類史에 빛나는 文化遺産인 피라미드 안에서 느낀 感興은 마치 天體를 游泳하는 듯한 妙한 氣分을 자아냈다. 피라미드는 永生(永生)을 追求한 專制 君主의 欲望이 奴隸의 勞動을 搾取한 舊時代의 遺物이었지만 이집트 文明을 代表하는 象徵이었다. 10萬 名이 20年이나 매달려 지은 것이 피라미드였다. 人間과 建築物 사이에서 辛格浩는 혼란스럽기만 했다.

롯데월드타워 디자인 보고를 받는 신격호 회장. 사진 롯데
롯데월드타워 디자인 報告를 받는 신격호 會長. 寫眞 롯데


”언제까지 서울을 찾는 外國 觀光客들에게 古宮만 보여줄 것인가? 崇禮門 景福宮이 大韓民國의 랜드마크가 될 수 있을까? 韓國을 찾아오는 地球村 市民 누구나 享有할 수 있는 共有 建築物, 世界的 名聲을 가진 建築物이 있어야 關心을 끌 수 있을 것이다. 現代的인 文化 遺産을 반드시 남기고 싶다.“

롯데월드타워가 들어선 곳은 當初 辛格浩가 ’媤월드‘라는 室內 海洋公園을 造成하려고 買入한 것이었다. 여기다 地上 33層 規模의 호텔과 百貨店 文化觀光홀을 만들기 위해 1987年 12月 14日 敷地 8萬7183㎡(2萬6372坪)를 사들였다. 當時 돈으로 863億원이나 되는 巨金이었다. 서울올림픽 主競技場이 막 完工되고 蠶室 開發이 한창이던 때였다. 石村湖水 앞의 이 敷地는 當時 裸垈地였다.

신격호의 計劃이 180度 바뀐 것은 그 무렵 北韓이 105層 높이의 超高層 유경호텔을 建設한다는 計劃이 알려지면서였다. 北韓이 서울올림픽에 對應하기 위해 높이 330m인 피라미드 模樣의 最高層 호텔을 짓는다는 플랜이었다. 이 計劃은 資金難으로 工事가 中斷되는 바람에 한동안 平壤 市內의 凶物로 放置돼 있었지만, 辛格浩에겐 큰 刺戟이 됐다.

무수히 반복된 롯데월드타워 디자인 회의. 사진 롯데
無數히 反復된 롯데월드타워 디자인 會議. 寫眞 롯데

●”언제까지 外國人들에게 景福宮과 古宮만 보여줄 것인가“
”景福宮 같은 古宮 外에도 韓國을 象徵하는 새로운 空間, 사람들을 매료시킬 수 있는 築造物을 만들어 보자.“

辛格浩는 北韓의 유경호텔에 맞서 100層 以上 規模의 호텔과 百貨店, 免稅店을 짓기로 方向을 急旋回했다. 單純한 建物 欲心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노태우 政府가 財閥의 投機抑制 對策을 發表, 非業務用 不動産 處分 命令을 내리면서 롯데월드타워 建設은 한동안 漂流 狀態에 빠지게 됐다.

敷地를 사들인지 24年이 지난 2011年 6月 4日 새벽 5時 辛格浩는 稀微한 餘名(黎明) 속에서 레미콘 車輛들이 쉴 새 없이 工事 現場을 드나드는 것을 바라보면서 感激의 눈물을 흘렸다. 이제야 주춧돌을 놓는 作業이 始作된 것이다. 地下 巖盤에 108個의 파일을 박아 補强하고, 그 위에 5千300代의 레미콘이 32時間 동안 쌓아 올린 두께 6.5m의 基礎 매트와 함께 콘크리트 量은 다른 建築에 비해 2.5倍나 많이 들어갔다. 世界 最高 水準의 安全性과 堅固함을 갖춘 公使의 始作이었다.

롯데월드타워 공사 진행 모습. 사진 롯데
롯데월드타워 工事 進行 모습. 寫眞 롯데

롯데월드타워 공사 진행 모습. 사진 롯데
롯데월드타워 工事 進行 모습. 寫眞 롯데

●23番 바뀐 마스터플랜, 最終 勝者는 ’붓‘
20年이 넘는 동안 롯데월드타워 마스터플랜은 23番이나 바뀌었다. 建物 外觀에서부터 다른 超高層 建物과 差別化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持論이었다.

처음엔 뉴욕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이나 세계무역센터(월드트레이드타워)를 參考했다. 2002年에는 파리 에펠塔에서 靈感을 얻어 20世紀 初 프랑스 파리의 모습을 具現하기도 했다. 無慮 23次例의 디자인 變更 끝에 韓國籍 外觀이 좋다는 意見이 優勢했다. 傳統美를 살린다는 趣旨는 좋았지만 이를 建物로 具現한다는 것은 또 다른 問題였다. 幢竿支柱(幢竿支柱), 防牌鳶, 삼태극, 대나무, 葉錢, 傳統門살, 瞻星臺, 伽倻琴, 陶瓷器, 붓 等 韓國을 代表하는 傳統的 要素를 모티브로 10個가 넘는 디자인을 만들어냈다.

苦悶을 거듭한 끝에 最終 디자인은 韓國의 傳統美를 含蓄的으로 보여주는 曲線美를 擇했다. 처마와 저고리, 버선 等에서 나타나는 曲線美를 建物 上層部에 보여주고 새 부리 模樣의 展望臺를 만들었다. 롯데월드타워를 멀리서 보면 붓을 거꾸로 세워놓은 모습임을 알아 챌 수 있다. 設計는 美國 建築設計會社人 KPF가 맡았다. 設計費만 3000億원이 들었다. KPF社는 뉴욕 세계무역센터와 상하이 金融센터 等을 設計한 超高層 建物 建築의 베테랑 企業이었다. 天文學的 金額이었지만 辛格浩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KPF는 前例 없는 複合 區의 超高層 建物인 롯데월드타워를 設計하면서 많은 애를 먹었기 때문이다.

롯데월드타워 전경. 한국의 전통적인 곡선미를 살려 붓을 세운 모습을 연상케 한다. 사진 롯데
롯데월드타워 前景. 韓國의 傳統的인 曲線美를 살려 붓을 세운 모습을 聯想케 한다. 寫眞 롯데

●’地震이 나면 롯데월드타워로 待避해야 한다‘

롯데월드타워 建築에 들어간 投資金은 總 4兆2000億원이다. 555m 높이에 地下 6層 地上 123層 超高層 빌딩이다. 世界에서 5番째로 높은 建物이다. 신격호의 꿈은 世界에서 最高로 높은 빌딩을 짓고 싶었지만 許可가 늦어지면서 希望을 이루지 못했다. 垈地 2萬6372坪에 延面積은 24萬3776坪이다. 延面積을 蹴球競技場으로 따지면 115個에 該當한다.

只今까지 해마다 5000萬 名이 롯데월드타워를 드나들었다. 大韓民國 國民이 1年에 한番은 롯데월드타워를 다녀간 셈이다. 이 가운데 10%인 500萬 名이 海外觀光客이다. 신격호의 꿈은 이렇게 達成되고 있다. 서울을 찾는 外國人에게 롯데월드타워는 名所(名所)가 된 것이다. 2014年 10月 월드몰 開場 以後 只今까지 다녀간 사람이 累積으로 2億8000萬 名에 이른다. 서울 明洞과 홍대 等 江北에 密集된 外國人 쇼핑地價 롯데월드타워로 擴張되고 있다.

”롯데월드타워의 모든 記錄은 歷史가 될 것이다. 무엇보다 安全이 重要하다. 空間의 效率性 보다 構造的 安全性에 最優先을 둬 設計했다. 40層마다 대나무의 마디 役割을 하는 構造物을 設置했다. 珍島 9度의 강진과 秒速 80m의 바람에도 견디도록 했다. ’앞으로 地震이 나면 無條件 롯데월드타워로 待避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올 程度다. 롯데월드타워에 適用된 設計와 核心 技術은 以前의 大韓民國 建築士에서는 볼 수 없던 것들이 많다. 롯데월드타워 建設 現場은 每 瞬間이 새로운 試圖였고, 모든 結果는 大韓民國의 新記錄이었다.“

辛格浩가 生前 그의 回顧錄에서 밝힌 心境이다. 2015年 12月 外部 工事를 마무리하고 內部 工事에 들어가기 前에 大들보를 들어올리는 上樑式(上梁式)李 이뤄지던 날 辛格浩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超高層 建物에 對한 憂慮를 希望으로 바꾸고, 叱責을 激勵로 바꾸기 위해선 뼈를 깎는 努力이 뒤따라야 했다. 工事에 參與한 500萬 名의 作業者와 롯데월드타워를 應援해 준 國民들에게 感謝의 마음을 傳하는 자리였다.

롯데월드타워 건설 현장의 신격호 회장. 사진 롯데
롯데월드타워 建設 現場의 신격호 會長. 寫眞 롯데

● 少年 같은 신격호의 모습을 보다
롯데월드타워 建設이 한창 마무리에 들어갈 즈음 신격호의 健康은 別로 좋지 않았다. 外部 活動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畢生의 宿願인 롯데월드타워 完工을 내 손으로 이루고 말겠다는 執念은 그를 病床에서도 가만 누워 있게 하지 못했다. 한 달에 두세 次例 대면 報告를 받고 工事 現場도 찾았다. 롯데의 한 幹部가 傳하는 뒷얘기다.

”工事 初期엔 名譽會長님이 日本과 서울을 오가면서 이른바 ’셔틀 經營‘을 할 때였습니다, 氣分 좋게 보고 받는 모습을 보면 마치 童心(童心)으로 돌아간 해맑은 모습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任員들이 뭔가 껄끄러운 報告를 해야 할 때는 롯데월드타워 보고 때 살짝 끼워 넣는 境遇도 往往 있었습니다. 名譽會長님이 氣分이 좋은 때라 묻어가는 境遇가 있었지요.“

롯데월드타워 42層부터 71層까지엔 ’시그니엘 레지던스‘라는 住居 團地가 있다. 最小 63坪에서 넓게는 376坪까지 豪華 居住施設이다. 平均 分讓價가 坪當 6900萬원으로 한 채에 60億~300億원에 이른다. 俳優 조인성과 클라라, 동방신기의 시아遵守 等 有名人들이 살고 있다. 롯데는 올해 分讓을 마치면 1兆 5000億원의 賣出을 올릴 것으로 豫想하고 있다. 投資金(4兆2000億원)의 3分의 1 水準이다.

울주 둔기리에 위치한 신격호 롯데 창업주의 묘소. 와석에 울주 청년 신격호의 꿈이 서려 있다. 사진 롯데
蔚州 둔기리에 位置한 신격호 롯데 創業主의 墓所. 瓦石에 蔚州 靑年 신격호의 꿈이 서려 있다. 寫眞 롯데

●空手來空手去, 朝鮮 靑年 辛格浩가 남긴 것
辛格浩는 그의 回顧錄 末尾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帳簿上으로는 回收 不可일지 몰라도 長久한 歲月에 걸쳐 얻는 無形의 利益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서울의 品格을 높이고 大韓民國의 國格을 높이는 데 一助한다면 그 價値는 돈으로 換算하기도 어렵지 않겠는가? 이 프로젝트는 事業으로 봐서는 안 되는 일이다. 나는 다만 他地에 가서 번 돈으로 韓國에 좋은 建築物, 國際的 名物로 韓國이 자랑할 만한 作品을 만들고 싶었다. 사람들을 幸福하게 한다는 롯데의 비전을 품고 잠실벌에 우뚝 솟은 롯데월드타워는 이제 21世紀 大韓民國의 랜드마크가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기꺼이 우리 國民과 顧客 모두에게 ’家族이 함께 하루를 즐겁게 보낼 수 있는 空間으로 바친다.“

辛格浩는 只今 自身이 태어난 蔚州 山골의 둔터 마을의 山기슭에 묻혀 있다. 日帝 時代 千字文을 배우면서 보낸 어린 時節, 그는 未來의 꿈을 찾아 普通學校에 進學했다. 小說家의 꿈과 羊을 치는 農業人이라는 現實 사이에서 煩悶하다가 어느 날 京城(서울)을 보면서 큰 世上을 發見했다. 曺國이 먹고 살기 어려울 때 靑年 辛格浩는 蔚山에서 北韓 咸鏡道 蓋馬高原까지 올라가 腫瘍(種羊)場에서 1年 동안 羊치기 見習生度 했다. 스무 살 되던 한겨울 工夫를 더 하고 싶어 83원을 들고 釜關連絡船을 타고 시모노세키港으로 向했다. 未知의 世界 日本에서 辛格浩는 오로지 信義와 誠實, 努力과 創意로 日本人을 감동시켰다.

素朴하다 못해 초라해 보이는 무덤 한篇의 瓦石(臥石).

”여기/ 蔚州 靑年의 꿈/ 大韓海峽의 巨人

辛格浩/ 울림이 남아 있다

거기 가봤나?

2020年 1月 19日

永眠“


蠶室에 우뚝 솟은 롯데월드타워, 그리고 蔚州 둔기리에 있는 故(故) 신격호 롯데 創業主의 素朴하기 그지없는 墓所가 人生無常(人生無常)을 實感케 한다.

우리 時代의 巨人(巨人) 신격호의 冥福을 빈다.


최영해記者 yhchoi65@donga.com
#롯데월드타워 #辛格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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