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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진 石塔의 러브스토리… 우리 善花公主 어디로 갔나|동아일보

깨어진 石塔의 러브스토리… 우리 善花公主 어디로 갔나

  • 東亞日報
  • 入力 2022年 1月 8日 03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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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旅行이야기]百濟의 古都 全北 益山
百濟 武王때 創建된 彌勒寺
身分 콤플렉스 武王-甄萱 痕跡
옛 匠人들 숨결 가득 왕궁리 遺跡

익산 왕궁사지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미륵사지. 미륵산 자락 아래 아늑하게 들어선 미륵사지는 백제의 풍수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유적이다. 동탑(오른쪽)과 서탑(왼쪽), 가운데의 9층목탑(소실)은 명당 혈(穴)에 조성돼 있다.
益山 王宮四肢와 함께 유네스코 世界文化遺産에 登載된 彌勒寺址. 미륵산 자락 아래 아늑하게 들어선 미륵사지는 百濟의 風水文化를 살펴볼 수 있는 遺跡이다. 銅塔(오른쪽)과 서탑(왼쪽), 가운데의 9層木塔(小室)은 名當 穴(穴)에 造成돼 있다.
《서울 公州 扶餘 益山. 백제의 高度라는 共通點을 가진 이들 都市 中 가장 異色的인 곳이 全北 益山이다. 海上 交流를 重視하던 백제는 都邑을 어디로 옮기든 恒常 바다로 통하는 큰 江을 옆에 끼고 王宮과 都市를 建設했다. 漢江 邊의 風納土城, 錦江 邊의 公州 公山城과 扶餘 泗沘城이 그러했다. 反面 益山은 王宮으로 指目된 왕궁리 遺跡 周邊에 큰 江이 보이지 않는다. 平野地帶에 建設한 王宮 構造도 낯설다. 그럼에도 百濟 第30代 武王과 얽힌 구수한 얘기가 茂盛하고, 後三國 時代 백제의 榮光을 再現하려는 英雄들이 몰려든 聖所(聖所)가 바로 益山이다.》

高速道路로 益山으로 進入하기 直前 隣近의 甄萱王陵(忠南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을 먼저 들렀다. 新羅 末期인 900年 甄萱(?∼936)은 完山(全北 全州 圈域)에서 後百濟의 王임을 宣布했다. 혼란스럽기만 한 後三國 時代, 甄萱은 馬韓과 百濟 疆埸이던 完山에서 後百濟의 正統性을 찾았다. 特히 電柱 바로 위 益山(金馬)을 建國의 精神的 土臺로 삼았다. 馬韓의 中心 圈域이자 百濟 武王(在位 600∼641年)의 根據地였고, 彌勒信仰을 바탕으로 後三國을 統一하려는 그의 意志를 받쳐주는 彌勒寺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詩人 申東曄이 長篇 敍事詩 ‘金剛’에서 益山乙 ‘馬韓과 百濟의 꽃밭’이라고 描寫한 것도 이런 背景에서다.

그의 꿈은 高麗 創業主 王建에게 敗함으로써 挫折됐다. 그러나 그의 무덤만큼은 只今도 完山을 바라보고 있다. 무덤 入口에는 “完山이 그립다”라는 그의 遺言 때문에 이곳에다 무덤을 造成했다는 內容의 案內板이 서 있다. 이곳에서는 날씨가 아주 맑은 날 益山 미륵산 너머 저 멀리 全州 모악산까지 보인다고 한다.

○ 금 간 薯童의 러브스토리

甄萱의 行跡을 旅行의 燈불로 삼아 먼저 彌勒寺址(益山市 금마면 기양리)를 찾았다. 2015年 유네스코 世界遺産으로 登載된 미륵사지는 新羅 皇龍寺, 高句麗 金剛沙와 함께 백제를 代表하는 護國寺刹이었다. 査察 規模로 따지자면 慶州의 皇龍寺보다 2倍 넓은 16萬5000m²(藥 5萬 坪)에 達한다. 甄萱은 미륵산 자락 彌勒三尊불의 出現 說話를 갖고 있는 彌勒寺에 對한 愛情이 남달랐다. 922年 慧炬國師를 시켜 彌勒寺 個塔(開塔) 佛事를 통해 百濟人의 民心을 하나로 모았고, 彌勒信仰의 힘을 빌려 新羅를 征伐하는 正當性을 얻고자 했다.

甄萱 以前엔 百濟 武王이 彌勒寺에 큰 功을 들였다. 彌勒寺 造成 時期에 對해서는 여러 說이 紛紛하나 639年 武王臺에 이르러 大規模 가람으로 完成됐다는 데는 大體로 意見이 모아진다. 當代 最高의 匠人들이 모여서 만든 이 寺刹은 가운데 木塔을 中心으로 東西 兩쪽으로 2個의 石塔이 配置됐고, 各各의 塔 바로 뒤로는 3個의 金堂(佛像을 모신 法堂)李 一直線上으로 놓여 있는 構造였다. ‘三國遺事’가 言及한 대로 塔 3個에 彌勒佛像 3基인 ‘3塔3金堂’ 樣式이다. 國內 다른 考察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獨特한 構造다.

彌勒寺의 가장 中心이었던 木塔은 언제 消失됐는지 알 수 없고, 彌勒寺址 發掘 當時 2基의 石塔 亦是 허물어지기 直前의 狀態였다. 1990年代에 먼저 東塔이 復元됐다. 그러나 文獻的 根據 없이 推定만으로 2年 半 만에 拙速 復元됐다고 해서 호된 批判을 받았다. ‘성형미인’으로 取扱받는 銅塔은 塔의 內部 構造를 直接 들여다볼 수 있다는 點에서 旅行客들의 好奇心을 채워준다. 서탑(國寶 第11號)은 東塔의 事例를 本보기 삼았다. 2001年 解體·保守 作業을 始作한 以後 無慮 18年 만인 2019年에 이르러 復元을 마치고 사람들 앞에 선을 보였다.

서탑 復元 過程에서는 깜짝 놀랄 만한 膳物도 發見됐다. 塔의 1層 심주석 아래 奉安된 禁制舍利봉영기에서 ‘薯童과 善花公主의 사랑 얘기’를 허물어뜨리는 文句가 나왔기 때문이다. 現在 國立益山博物館에 保管된 봉영기에서는 査察 創建의 主役이 武王의 王后이자 百濟 貴族인 舍宅積德의 딸임을 分明히 밝히고 있다. 新羅 眞平王의 셋째 딸 善花公主와 結婚한 薯童(武王)李 善花公主의 懇請으로 彌勒寺를 創建했다는 千年의 說話가 무너지고, 薯童이 武王인가를 두고서도 未審쩍은 視線을 보낼 만한 資料였다.

○武王과 甄萱의 同病相憐

금마저수지 변의 서동공원에서는 ‘서동 스토리’를 유등과 발광다이오드(LED)로 꾸민 서동축제를 매년 개최하고 있다. 축제가 끝나도 야경을 즐길 수 있다.
金馬渚수지 邊의 薯童公園에서는 ‘薯童 스토리’를 油燈과 發光다이오드(LED)로 꾸민 薯童祝祭를 每年 開催하고 있다. 祝祭가 끝나도 夜景을 즐길 수 있다.
분명한 건 益山에서 ‘薯童’은 歷史的 實體로 存在하고 있다는 點이다. 금마면의 마룡蓮못(聯動制). 薯童의 어머니가 이곳에 살던 龍과 情을 통해 薯童을 낳았다는 傳說이 隱隱한 蓮꽃 香氣에 실려 只今까지 傳해지고 있는 곳이다. 聯動制 道路邊에는 薯童이 태어난 生家 터(금마면 서고도리 383-12)임을 알리는 里程標까지 세워져 있다. 薯童은 이곳 사람들에게는 歷史 속의 實際 人物인 것이다. 한便으로 金馬渚수지 隣近의 薯童公園은 薯童 스토리를 有等과 發光다이오드(LED)로 꾸며 觀光客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백제 제30대 무왕의 묘인 익산 쌍릉(대왕릉). 이곳에서 출토된 목관은 국립익산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百濟 第30代 武王의 妙인 益山 雙陵(대왕릉). 이곳에서 出土된 木管은 國立益山博物館에 展示 中이다.
薯童 生家 터에서 不過 1.5km 거리엔 百濟 武王의 무덤이 있다. 規模가 다른 古墳 2基가 있다고 해서 ‘益山雙陵’(史跡 第87號)이라고 불리는 古墳이다. 큰 古墳은 대왕릉, 작은 古墳은 小王陵이라고 불린다. 대왕릉은 武王의 무덤이라는 게 定說이다. 小王陵의 主人은 아직 確認되지 않고 있다.

대왕릉에 서 있다 보니 北쪽으로 미륵산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는 甄萱王陵이 떠오른다. 武王과 甄萱王은 여러모로 닮았다. 두 王은 백제의 榮光과 復興을 위해 新羅를 相對로 가장 熾烈하게 戰爭을 치렀던 人物들이다. 背景도 비슷하다. 武王은 마를 팔아 生計를 維持하던 地方 出身이었다. 콤플렉스에 시달리던 武王은 正統性을 인정받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을 것이다. 新羅 出身 甄萱왕이 百濟人의 全幅的인 支持를 끌어내기 위해서 新羅를 몰아치던 것처럼 말이다.

○水洗式 化粧室 갖춘 백제王宮

武王의 主 舞臺였던 것으로 推定되는 王宮도 生家 터에서 멀지 않다. 왕궁면 왕궁리의 왕궁리 遺跡(史跡 第408號)이다. 百濟의 离宮(離宮) 或은 武王의 執務處로 使用되다가 백제 滅亡 後 이곳에 寺刹을 세운 것으로 推定되는 獨特한 遺跡이다. 風水的으로 살펴보더라도 百濟 本宮보다는 別宮日 可能性이 높아 보인다.

왕궁사지의 인공수로. 자연 지형을 이용해 경사면을 따라 물이 흐르도록 설계한 구조가 인상적이다.
王宮四肢의 人工水路. 自然 地形을 利用해 傾斜面을 따라 물이 흐르도록 設計한 構造가 印象的이다.
야트막한 둔덕에 자리 잡고 있는 이 遺跡에서는 東西 245m, 南北 490m에 이르는 王宮 內部의 建物址와 石築, 金 有利 洞 等을 製作했던 攻防 터, 백제 最高의 定員 遺跡 等이 發掘됐다. 特히 緩慢한 地形의 傾斜面을 따라 지은 人工 水路와 貯水施設, 殿閣마다 물을 活用한 治水施設 等은 當時로서는 尖端을 달리는 公法이다. 共同 水洗式 化粧室도 갖추고 있었다. 宮의 아래 四面에 마련된 化粧室은 糞尿가 日程 自淨 作用을 거친 뒤 水路로 排出되도록 한 것이다. 1400餘 年 前 先祖들의 智慧가 놀랍다.

왕궁사지의 오층석탑. 이 탑이 완성되던 날 익산의 하늘이 3일간 어두워졌다는 전설도 있다.
王宮四肢의 五層石塔. 이 塔이 完成되던 날 益山의 하늘이 3日間 어두워졌다는 傳說도 있다.
왕궁리 遺跡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건 五層石塔(國寶 第289號)이다. 王宮으로서의 機能을 喪失한 後 세워졌을 이 石塔은 扶餘 정림사址 五層石塔과 많이 닮았다. 이 塔과 關聯한 흥미로운 얘기도 있다. 益山郡 邑誌인 ‘金馬地’(1756年)는 “甄萱의 都邑인 完山의 地勢가 앉아 있는 개의 形象이므로, 道詵이 個의 꼬리에 該當하는 이곳에다 塔을 세워 누름으로써 甄萱의 氣勢를 꺾어 王建이 이기게 되었고, 이 塔이 完成되던 날 完山의 하늘이 사흘 동안 어두웠다”고 傳한다.

익산의 새 명소로 부상하고 있는 금강 변의 용안생태습지공원.
益山의 새 名所로 浮上하고 있는 錦江 邊의 容顔生態濕地公園.
神祕한 說話가 켜켜이 묻어 있는 益山은 그 自體가 스토리텔링 旅行地다. 最近 익산시는 코레일과 連繫해 列車, 렌터카·觀光택시, 宿泊 等을 한데 묶은 觀光 商品을 運營하고 있다. 益山의 歷史觀光 資源에 더해 숨겨진 또 다른 旅行地를 즐길 수 있도록 한 것이다. 日帝强占期 日本 家屋과 搗精 工場 等이 穩全히 남아 있는 춘포리 마을, 雄壯한 메타세쿼이아 500그루에 ‘거룩한 사랑’을 담고 있는 아가페 庭園(全北 第4號 民間庭園), 탁 트인 祕境을 갖춘 錦江邊 容顔生態濕地公園 等이 새로운 名所로 人氣를 끌고 있다.






글·寫眞 益山=안영배 記者·風水學 博士 ojong@donga.com
#善花公主 #石塔 #百濟 #益山 #全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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