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北 ICBM 硏究하던 박충권 當選人 “賂物이면 안 되는 게 없는 腐敗 社會가 北韓”|週刊東亞

週刊東亞 1437

..

北 ICBM 硏究하던 박충권 當選人 “賂物이면 안 되는 게 없는 腐敗 社會가 北韓”

豆滿江 맨몸으로 건너 脫北 後 서울대 碩博士 取得 “靑年 꿈·希望에 一助할 것”

  • reporterImage

    최진렬 記者

    display@donga.com

    入力 2024-04-28 09:00:02

  • 글字크기 설정 닫기
    4·10 總選에서 國民의미래 比例代表 2番으로 當選한 박충권 當選人(38)은 獨特한 履歷의 所有者다. 22代 國會에서 唯一한 脫北民 出身 議員이자 靑年科學技術人 出身이기 때문이다. 朴 當選人의 삶의 軌跡은 남다르다. 그는 北韓 國防綜合臺(現 金正恩國防綜合臺 化學材料工學部)에서 工夫하고 大陸間彈道미사일(ICBM) 等 核·미사일 關聯 硏究에 參與하다 體制에 懷疑를 느껴 脫北을 決心했다. 高校 卒業 後 바로 大學에 進學한 ‘直通生’에 部門費서·사상비서를 맡는 等 大學에서도 認定받은 엘리트였지만 그의 눈에 들어온 北韓 모습은 頂上이 아니었다.

    국민의미래 박충권 당선인. [박해윤 기자]

    國民의미래 박충권 當選人. [박해윤 記者]

    人間을 ‘가붕개’만도 못하게 봐

    朴 當選人은 1年 8個月 동안 準備한 끝에 2009年 4月 9日 맨몸으로 豆滿江을 건너는 데 成功했다. 그리고 13日 아침

    8時 무렵 仁川港에 到着했는데, 當時를 두고 “黑白TV를 使用하다가 바로 터치패드를 쓰는 느낌이 들 程度로 兩國 隔差가 크게 다가왔다”고 回想했다. 그는 서울대 材料工學科에서 碩博士學位를 받은 後 現代製鐵에서 責任硏究員으로 일했고, 이番 總選에서 國民의힘 迎入人材로 政界에 入門했다. 4月 23日 國會 議員會館에서 만난 朴 當選人은 “韓國 靑年들이 나를 보면서 未來와 可能性을 떠올렸으면 한다”고 말했다.

    國防綜合臺와 大量殺傷武器硏究所에서 硏究하다 脫北을 決心했는데.

    “大學生 時節 極限 環境에서도 作用하는 潤滑液과 不凍液 等을 硏究했다. 偵察衛星과 같이 宇宙에서 機械 部品들이 作動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分野다. 軍需工場이 密集해 있는 慈江道 等 추운 北韓 地方에서 武器들이 作動하도록 돕는 役割도 한다. 大學 同期들은 미사일 固體燃料를 生産하는 硏究所, 彈頭部 再進入體를 開發하는 硏究所 等에 있었다. 大學 卒業 後 軍需工場硏究所에 配置됐는데 그때는 이미 생각이 바뀐 뒤라서 出勤하지 않았다.”

    出勤을 안 하는 것이 可能한가.

    “거의 每달 데리러 왔다. 懷柔도 하고 脅迫도 했는데, ‘곧 가겠다’고 말하면서 時間을 끌었다. 아마 더 遲滯했다면 잡혀 갔을 수도 있다.”



    脫北을 決心한 契機가 있나.

    “大學을 卒業할 무렵 北韓 體制의 本質을 깨달았다. 人間을 可能性을 지닌 存在로 보는 것이 아니라, 가붕개(가재·붕어·개구리)만도 못한 存在로 보고 抑壓한다는 點이다. 北韓에서는 思想敎育을 위해 ‘勞作’이라는 授業을 한다. 김일성, 김정일이 썼다는 論文을 가르치는 授業이다. 當時 ‘社會主義는 科學이다’ ‘社會主義에 對한 毁謗은 許容될 수 없다’라는 題目의 두 論文을 工夫했다. 社會主義에 對한 外部 批判에 再反駁하는 內容이다. 論文을 읽어보니 外部 批判이 옳은 것 같더라. 사람들이 唯一思想 아래 있다고 하는데, 大學生 時節 만난 親舊들은 저마다 생각이 달랐다. 計劃經濟가 옳다는데, 當場 來日 아침 내가 뭘 먹고 싶은지 國家가 알 수 없지 않나. 逆說的이게도 社會主義를 讚揚하는 論文을 통해 資本主義 基礎를 배웠다.”

    大學生 時節 北韓에 失望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賂物이면 안 되는 게 없었다. 大學 等 北韓 內 아래 單位만 腐敗한 것은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卒業 무렵에 보니 北韓 最高地圖機關이라고 하는 朝鮮勞動黨까지 腐敗해 있더라. 이곳에까지 賣官賣職이 있는 것이다. 平壤이나 選好 地域의 工場·硏究所에서 일하려면 돈을 얼마 내야 하는지가 定해져 있었다. 위아래로 모두 腐敗했다는 事實을 깨달으니 꿈과 希望이 사라졌다. 內部에서 혼자 바꿀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해 脫北을 決心했다.”

    現代製鐵에서 責任硏究員으로 일했다. 北韓에서 硏究할 때와 어떤 點이 달랐나.

    “韓國에 오니 大學院生이 무척 많았다. 北韓은 博士가 貴하다. 흰머리가 있는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 博士인데 韓國은 빠르면 20代 後半, 30代 初盤 博士도 있더라. 現代製鐵에서 일하면서도 人材가 많다고 느꼈다. 個人的으로 힘들다고 느낀 것은 없었다. 다만 韓國 企業들이 좀 더 일하기 便한 與件을 造成할 必要가 있다고 생각했다. 韓國은 製造業이 國家 競爭力의 核心인 나라 아닌가.”

    잘할 수 있을까. 잘해야 한다

    政治라는 낯선 領域에 발을 들였다. 決定이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

    “그間 學業과 會社 일에 集中해왔는데, 삶의 軌跡 때문인지 마음 한便에 ‘社會에 도움이 되는 意味 있는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恒常 있었다. 韓國을 두고 ‘規制共和國’이라고 한다. 이와 關聯된 問題 解決을 돕고 싶다. 政治라는 새로운 分野에서 잘할 수 있을까 苦悶도 많이 했다. 잘할 수 있을까. 잘해야 한다.”

    國會에서 어떤 役割을 맡고 싶나.

    “政治人에게는 各自 주어진 疏明이 있다고 한다. 苦悶이 많다. 나는 脫北者이면서 工學徒이며 靑年이다. 이와 같은 正體性, 캐릭터가 어떻게 보면 다 未來와 連結돼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世代의 課題인 南北統合은 勿論, 科學技術 人材를 育成하고 靑年들이 希望을 펼칠 수 있는, 새치기가 없는 社會를 만드는 데 一助하고 싶다.”

    靑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

    “韓國에 온 지 15年이 넘었다. 가진 것 하나 없고, 別 볼일 없는 靑年이었는데 많은 분의 도움과 사랑으로 서울대 博士 課程을 거쳐 좋은 企業에서 일할 수 있었다. 이제 國會議員으로 새로운 挑戰을 始作하게 됐다. 어찌 보면 이것이야말로 大韓民國의 힘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個個人의 努力과 社會의 공정한 시스템, 共同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도움이 어우러져 靑年들이 꿈과 希望을 펼칠 수 있는, 社會가 되도록 努力하겠다.”



    최진렬 기자

    최진렬 記者

    安寧하세요. 週刊東亞 최진렬 記者입니다. 産業界 이슈를 取材하고 있습니다.

    [映像] “國民年金, 이대로 두면 亡國의 길로 갈 것”

    “아내의 賢明치 못한 處身” 謝過한 尹, ‘김건희 特檢’은 反對

    댓글 0
    닫기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Copyright ⓒ 2020 By '전통문화연구회(傳統文化硏究會)' All Rights reserved.
     한국   대만   중국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