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解도 안 가고 믿고 싶지도 않다. 그냥 너무 火가 난다.”(2014년 5月 12日) 김도연 氏(27)가 沈沒하는 歲月號에서 가까스로 살아 돌아온 뒤 約 한 달 만에 처음 쓴 日記엔 方向 모를 混亂과 憤怒가 가득했다. 알 수 없었다. 왜 수많은 親舊들이 犧牲됐는지, 政府는 어디에 있는지, 왜 만나는 사람마다 “어른들이 未安해”라며 謝過하는지…. 여러 해가 지나도 그는 ‘단원고 2學年 3班 김도연’이었다.감정이 북받칠 때마다 日記를 썼다. 떠난 親舊가 그리울 때도, ‘나만 살아남았다’는 罪責感에 가슴이 옥죌 때도 펜을 들었다. 그렇게 쌓인 日記帳이 17卷이 됐다. 9日 東亞日報와 만난 도연 氏는 日記帳 一部를 열어 보였다. 社會的 災難에 對한 認識을 換氣하고 被害者를 支援하는 行事에 꾸준히 參與하면서 ‘어른들이 未安해’라는 말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도연 氏는 “저도 이제 아이들의 눈에는 ‘어른’이잖아요. 社會的 災難으로 傷處받는 아이들이 없는 社會를 만들 責任이 저한테도 있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했다. 그는 歲月號 慘事 10週期를 앞두고 關聯 白書 發刊 作業에 參與하던 올 2月 21日, 日記帳에 이렇게 적었다. “내 곁을 단단하게 지켜주는 사람들 德分에 4月이 悽慘하지만은 않을 것 같다. 조금 더 勇氣 낼 수 있도록, 조금만 더 燦爛해줘, 4월아.”“慘事뒤 살아남았다는 罪責感… 災難 反復 않도록 내 할일 할것” [歲月號 10周忌]잊지 않은 사람들“나도 모르게 自害… 閉鎖病棟 入院, 單짝 무덤 다녀오는 길에 平穩函周邊 梨泰院 慘事 映像에 덜덜 떨어… 生存者 傷處 안받게 役割 苦悶할것”도연 氏가 처음 그 惡夢을 꾼 건 2015年 1月이었다. 꿈에서 그는 透明人間이 되어 珍島 앞바다에 떠 있다. 세월호 안에서 親舊와 先生님이 絶叫한다. 도연 氏는 그 모습이 훤히 보인다. 失踪者 收拾을 돕기 爲해 沈沒 當時 狀況과 배의 構造를 수도 없이 服朞했기 때문이다. ‘저기 사람 있어요. 한 名만 더 살려주세요.’ 소리치지만 아무도 듣지 못한다. 눈물에 젖은 채 깨어나면 다시 잠들지 못했다. 같은 일이 每日 밤 反復됐다. 잠이 不足해 멍한 狀態로 있다가 문득 손목에서 피가 흐르는 걸 發見했다. 다른 손에는 날카로운 學用品이 들려 있었다. ‘아니야. 이건 내가 아니야.’ 고개를 가로저으며 손목을 숨겼다. 그러다 더 버틸 수 없게 됐을 때 처음으로 精神病院 閉鎖病棟에 入院했다. 自害에 쓰일까 봐 볼펜 搬入이 禁止돼 네임펜으로 日記를 썼다. 곧 狀態가 나아져 退院했지만 惡夢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 時期에 도연 氏를 사로잡은 건 罪責感이었다고 한다. ‘그날’ 午前 8時 48分, 이름까지 비슷한 單짝 親舊 徒言은 歲月號 4層 客室에 머물렀다. 反面 도연 氏는 물을 마시러 3層 食堂으로 내려가 있었다. 그게 둘의 生死를 갈랐다. 當時 4層 乘客 大多數는 ‘船內에 있으라’는 말을 믿은 탓에 生存率이 3層의 折半에도 못 미쳤다. ‘내가 徒言에게 같이 가자고 勸했더라면….’ 이 생각이 도연 氏를 떠나지 않았다. 도연 氏도 머리로는 알았다. 親舊들의 죽음은 自身의 잘못이 아니란 걸. 하지만 그걸 認定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도연 氏는 “저도 사람이다 보니 (慘事 以後로도) 幸福해지는 瞬間이 있잖아요. 그런데 그때마다 ‘내가 幸福해도 되나’라는 생각에 멈칫하는 거예요”라고 말했다. 그가 每年 4月 16日 追慕 行事에 積極的으로 參與하거나 大學에서 틈틈이 노란 리본 等을 周邊에 나눠준 것도 罪責感의 影響이 컸다. 떠난 親舊들에게 堂堂해지려면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大學 授業을 準備하느라 4周忌 永訣式에 參與하지 못한 2018年엔 日記에 “‘괜찮아. 發表였잖아’ 스스로를 다독이지만 몰려오는 罪責感이 너무도 크다. 未安해요, 모두들”이라고 적었다. 特히 도연 氏는 徒言이 잠든 京畿 평택시 西湖追慕公園에 들를 때마다 마음이 무거웠다. ‘내가 네 앞에서 堂堂할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이 컸다. 그런데 2019年 12月 8日, 徒言의 生日을 맞아 勇氣 내어 追慕公園으로 向한 그날 ‘작은 奇跡’이 벌어졌다. 돌아오는 길에 처음으로 平穩함을 느낀 것. 그날은 惡夢도 꾸지 않았다. 도연 氏는 “세월호 追慕 活動을 熱心히 한 건 罪責感을 덜기 위해서이기도 했는데, 어느 瞬間 實際로 삶의 原動力이 된 것 같다”고 했다. 도연 氏의 不眠은 잦아들다가도 다시 심해지곤 했다. 2021年 2月부턴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새로운 惡夢이 始作되면서 몸무게가 10kg이나 빠졌다. 트라우마 症勢가 나아졌다가 惡化되면서 長期間 이어지는 건 드문 일은 아니다. 하지만 도연 氏는 ‘時間이 藥’이라는 믿음이 깨졌다는 事實에 더 큰 衝擊을 받았다. 그는 그해 4月 16日 日記에 “스스로를 너무 過大評價한 탓일까. 時間이 지난 만큼 成長해야 할 것 같은데…”라고 적었다. 그러다가 2022年 10月 29日이 왔다. 서울 龍山區 이태원에서 159名이 숨진 날이었다. 도연 氏는 차마 뉴스를 보지 못했다. 모든 트라우마가 다시 始作될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周邊에서 스마트폰으로 慘事 場面을 再生하는 것까지 막을 순 없었다. 梨泰院 犧牲者의 絶叫가 세월호가 沈沒하는 소리와 겹쳐 들렸다. 손이 덜덜 떨렸다. 도연 氏는 最近 한 북콘서트에서 이태원 慘事 遺家族을 만났다. 歲月號와 梨泰院 慘事로 各各 兄弟姊妹를 잃은 遺家族을 招請해 對話를 나누는 順序였다. 衝擊이었다. 그의 經驗은 自身의 日記帳을 옮겨 놓은 듯 똑같았다. ‘비슷한 災難이 反復되지 않기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苦悶하고 있다’는 다짐까지도. 現在 移職을 準備하며 에세이 發刊에 參與하는 等 歲月號 關聯 活動을 이어가는 도연 氏는 “제가 할 일이 더 明確해진 것 같아요. 萬若 歲月號 慘事 같은 災難이 다시 일어나더라도, 生存者가 저처럼 傷處받지는 않도록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끊임없이 苦悶하려고요”라고 말했다. 이상환 記者 payback@donga.com이수연 記者 lotu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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