景福宮 石物에 反해 30餘 年間 蒐集數億 원짜리 中國 文化財級度 사들여양평에 世界 最初 獬豸博物館 建立 꿈“돌 기운 받아 좋은 일 많아지길”서울 종로구 孝子童에서 태어나 보낸 6年이었다. 이인한 氏(65)의 半平生 ‘돌과의 사랑’을 결정지은 건. “景福宮 仁王山 北漢山을 만날 다녔어요. 돌도 보고 바위도 보고. 景福宮에 動物 模樣 石物(石物)이 많잖아요. 보면 재미있고, 親近하고….” 李 氏는 世界에서 해태 石像을 가장 많이 保有한 사람일 것이라는 얘기를 듣는다. 韓國을 비롯해 中國 東南아시아 유럽 等 數十 個國 獬豸像(像)을 7000餘 點 所藏하고 있다. 주먹만한 小品부터 等身大(等身大)까지, 1000年 前 것부터 最新 作品까지. 이달 初 京畿 楊平郡, 三面이 山으로 둘러싸인 一種의 收藏庫에서 이 氏를 만났다. 高句麗부터 朝鮮時代, 中國 名(明) 靑(淸)大, 150餘 年 前 泰國 것 等 獬豸像 500餘 點이 여기저기 놓여 있다. 해태는 善과 惡을 區別하고 火災 같은 災殃을 물리치며 상서롭지 못한 것을 누른다는 傳說 속 動物이다. “해태는 正義를 象徵하고 福을 가져다주지요. 陵(陵)이나 山所 앞 文官石(文官石)은 죽은 者를 위한다면 해태는 산 者를 위한 것입니다. 더 재미있지 않나요?” 李 氏에 따르면 옛 中國에서 사자(獅子)를 想像해 그려놓은 게 獬豸다. 光化門 앞 獬豸像을 보고 中國人들은 ‘獅子賞(像)’이라 한단다. 泰國 ‘싱下’, 싱가포르 ‘머라이언’ 같이 獅子를 守護動物로 삼는 東南아시아는 勿論 유럽에도 事實上 獬豸像이 있다는 얘기다.돌과의 鳶(緣) 獬豸像을 모으기 始作한 건 30代 初盤인 1980年代 말이다. 오퍼상을 하던 이 氏는 서울 仁寺洞에서 ‘조그맣고 오래된 돌’을 보고는 그냥 샀다. 李 氏는 “돌이 재미있으니까”라고 했다. 價格은 20萬 원 程度였다. “20萬, 30萬 원이면 하나 샀어요. ‘술 한 盞 안 먹고 이거 산다’는 생각이었죠. 한두 個, 서너 個 사다 보니 인사동이나 장안평 돌 장사들에게서 連絡이 오는 거예요. 좋은 돌 나왔다고.” 獬豸像에 빠진 것도 다 因緣이라고 생각한다. 仁王山 北岳山 四方이 다 花崗巖 덩어리인 孝子童에서 태어난 것도 年(緣)이다. 初等學校 다닐 때 外家가 있던 구의동은 開發이 한창이었다. 山을 깎아 길을 내고 터를 닦느라 主人 없는 酸素가 파헤쳐졌다. 길바닥에 나동그라진 文官石을 보며 ‘아깝다. 참 예쁘게 생겼는데’ 하곤 생각했다. 이 또한 鳶이라는 것. 以後 브라스베드(brass bed·놋쇠 틀 寢臺)를 美國에 輸出하는 家具製造業이 잘 되면서 獬豸像 蒐集은 軌道에 올랐다. 좋은 獬豸像이 나왔다는 말을 들으면 全國 어디든 달려갔다. 보기만 하면 샀다. 한꺼번에 100點을 산 적도 있다. 中國에 가서 文化財級 돌들을 뭉텅이로 購入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마냥 좋아서 샀는데 나중에는 ‘저건 내가 꼭 갖고 陳列을 해야지’하는 義務感도 생겼다. 한 點에 몇 億 준 것도 있고, ‘몇 億을 주겠으니 팔라’는 것도 있다. 해태 關聯 中國 書籍을 돈 주고 飜譯해서 읽으며 해태를 工夫했다. 只今은 ‘나보다 獬豸像을 더 잘 아는 사람이 韓國에 누가 있을까’ 하는 水準이다. 그래도 如前히 正確히 어느 時代 것이라고 特定하기는 어렵다.다 다른 獬豸像 獬豸像은 뭐 하나 같은 게 없다. 손으로 彫刻한데다 돌마다 性質이 다르고 數百 年 비바람에 쓸리고 깎이며 獨特한 얼굴이 생겨난다. 大部分 花崗巖으로 만든 韓國 獬豸像은 위트가 있고 溫和해 보인다. 다만 韓國 獬豸像은 宮闕이나 절에 있던 것이 大部分이라 그 數가 적다. 景福宮의 많은 石物 中에도 있다. 옛 文獻에는 개라고 돼있지만 事實은 獬豸人 것도 있고, 해태의 한 種類인 天祿(天祿 또는 天鹿)도 있다. 反面 中國 것은 사납고 세 보인다. 花崗巖보다는 玉 系統 大理石인 한백옥, 단단해서 風化를 잘 견디는 鐵石, 歲月이 흘러도 이끼가 끼지 않는다는 抱川席 等을 選好한다. 中國産 花崗巖 獬豸像을 찾아보기 어려운 理由다. “不老長生하라는 뜻을 象徵하는 복숭아를 들고 있는 해태도 있고, 새끼를 위로 떠받치고 있는 해태도 있지요. 옛날 中國 貴族이 말에서 내릴 때 쓰던 下馬石(下馬石) 해태도 있습니다. 獬豸像에도 암수가 있어요. 동그란 區(球) 模樣의 것을 발로 누르고 있는 건 수컷입니다. 世界를 支配하라는 象徵이죠. 아기를 데리고 있는 게 있는 암컷이죠.” 7000點 넘게 샀지만 李 氏는 언제 누구에게서 얼마를 줬는지 大部分 記憶한다. 愛着이 가는 獬豸像을 꼽아달라고 했을 때 躊躇하던 까닭이다. 骨董品 專門 競賣 業體에서 物件을 내놓자고 했지만 拒絶했다. “젊었을 때는 物件 파는 걸 罪惡視했어요. ‘眞正한 컬렉터가 무슨 物件을 팔아’ 하는 생각이었어요.” 30年 넘게 石物을 蒐集하다 보니 에피소드도 적지 않다. 10餘 年 前 石燈이나 벅수(돌로 된 장승) 같은 文化財級 石物을 購入했다. 다시 그 販賣商을 찾아갔지만 物件은 온 데 간 데 없었다. 모두 警察署에 있었다. 盜掘꾼이 내다 놓은 贓物이었던 것이다. 世界 最初 獬豸博物館의 꿈 40代 때는 世界 最初 獬豸博物館을 짓자는 抱負가 있었다. 6年 前 全南의 한 基礎團體가 約 9萬9000㎡(3萬 坪) 터에 獬豸테마公園을 짓겠다고 했다. 李 氏는 獬豸像 1000餘 點을 寄託했고 2年 뒤 起工式도 했다. 하지만 基礎團體長이 바뀌자 計劃은 取消됐다. “그럼 나라도 博物館을 지어야겠다고 해서 定한 게 여기(楊平)입니다. 2000坪(藥 6600㎡) 밖에 안 돼서 展示空間이 不足하죠. 展示空間을 키우려면 資本力이 뒷받침 돼야 하는데 그렇게 할 수가 없어요. 李健熙 氏가 ‘내가 돈이 없어서 (遺物과 美術品을) 못 사는지 누가 알겠느냐’고 했을 程度니까요.” 古美術品이나 遺物은 僞作(僞作) 是非가 적지 않다. 돌 같은 境遇는 僞作이 적다고 한다. 돌을 한番 움직이려면 運搬費나 人件費가 많이 들기 때문에 僞作 製造費用이 크기 때문이다. 運搬費가 物件 값의 30~40%를 차지한다. 相對的으로 石物 값이 다른 것에 비해 쌌다. 李 氏가 돌에 入門한 또 다른 理由이기도 하다. 좋은 物件을 싼 값에 살 때의 喜悅이 相當했고, 이른바 돈 쓰는 재미도 많이 느꼈다는 李 氏도 60을 넘어서부터는 힘에 부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제는 熱情이 식어버렸는지 좀 지쳤어요. 내가 欲心을 너무 부렸나, 에이 다 없애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하지만 해태博物館 建立을 돕고 있는 李 氏의 知人은 “그래도 좋은 돌 있다고 하면 눈을 번쩍 뜬다”라고 했다. 李 氏가 생각하는 獬豸像은 守護神이다. 精神的으로 懦弱한 現代人에게 慰安이 되고, 그들을 지켜주며 좋은 일이 생기게 해줄 것 같은…. “1000年 된 돌에서 나오는 氣(氣)를 받아서 잘 되시라는 겁니다.” 돌과의 戀愛를 멈추지 못하는 이 氏가 해태 같은 微笑를 지었다.민동용 記者 mind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