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都市라는 정글에서 새로운 世上을 發見합니다. 都市를 散策하고 探査하는 즐거움을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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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21~2024-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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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退勤하는 ‘妖精 펭귄’, 優雅한 ‘블랙스완’을 볼 수 있는 南極海의 섬[전승훈의 아트로드]

    濠洲 南部에 있는 멜버른은 시드니에 이어 2番째 큰 都市다. 地球 南半球에서 가장 높은 80~90層짜리 摩天樓 빌딩이 몰려 있는 都心 뿐 아니라 野生의 自然과 스펙터클한 風景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곳이다. 地球에서 가장 작은 大陸人 戶主에는 다른 大陸에서는 볼 수 없는 稀貴動物이 野生에서 뛰어논다. 濠洲의 動物들은 大部分 順한 草食動物들로, 주머니에 새끼를 넣어서 기르는 유대류다. 反面 肉食을 하는 大型 猛獸는 찾기 어렵다. 멜버른 南東쪽 車로 約 2時間 距離에 있는 ‘필립 아일랜드’는 野生의 自然이 잘 保全된 섬이다. 이 곳엔 펭귄과 캥거루, 코알라, 왈라비, 黑鳥, 可視두더쥐 等 稀貴한 野生動物을 만날 수 있다. 그 中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펭귄이다. 南極에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펭귄이 왜 濠洲 멜버른 바닷가에 살고 있는 것일까? ●필립 섬에서 만난 펭귄 필립섬에 가면 밤마다 妖精들이 뛰어다닌다. 어른 팔뚝만한 30cm 程度의 키에 몸무게도 1kg 남짓한 地球上에서 가장 작은 펭귄이다. 學名은 ‘쇠푸른펭귄’認知만 ‘리틀 펭귄’이라고 부른다. ‘妖精 펭귄’ ‘페어리 펭귄’이라는 別名이 붙을 程度로 귀여움의 極致다. 南極 大陸에 살고 있는 皇帝펭귄은 平均 1m22cm 키에 몸무게도 20~40kg나 나가는 것에 比較하면 매우 작다. 一般的으로 큰 펭귄은 추운 곳에 棲息하고, 작은 펭귄은 따뜻한 곳에 산다고 한다. 덩치가 작은 멜버른의 펭귄은 南極에 比해 相對的으로 氣候가 溫和한 濠洲에 定着한 것으로 推測된다. 펭귄이 濠洲에 살게 된 理由 中 하나가 大陸 移動說이다. 濠洲大陸은 元來 南極大陸과 南아메리카 大陸과 붙어 있다가 갈라져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濠洲 南部 멜버른, 태즈매니아 섬이나 南美 칠레, 아르헨티나 南部에도 펭귄이 살고 있는 것이다. 濠洲 南部에 있는 멜버른 앞바다는 南極海라고 불린다. 물이 차가워 여름에도 海水浴을 하기 힘들다. 代身 波濤가 거세 每年 世界的인 립컬(Rip Curl) 서핑大會가 열리기도 한다. ‘어제 歸家한 펭귄 數 : 2222마리’ 記者가 지난달 필립섬 펭귄 퍼레이드 센터에 찾아갔을 때 入口에 쓰여져 있던 數字다. 아침에 바다로 나간 펭귄 떼들은 2泊3日 간 바다에서 먹이 사냥을 마치고, 해가 질 무렵 海岸가로 돌아와 집을 찾아간다. 필립섬 서머랜드 비치에 해질녘에 찾아가면 數千 마리의 펭귄들이 日課를 마치고 ‘退勤’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온 섬이 떠들썩해질 程度로 長官을 이루는 ‘펭귄 퍼레이드’다. 펭귄퍼레이드 센터에 조금 일찍 到着해서 로비 레스토랑에서 저녁食事를 하며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窓밖으로 캥거루보다 若干 작은 유대류 動物인 왈라비가 뛰어다니는 모습도 神奇하다. 午後 8時半 쯤. 해가 지기 始作해 바다로 나갔다. 벌써 海岸가에는 수많은 觀光客들이 펭귄이 나오는 길목을 차지하고 기다리고 있다. 리틀 펭귄이 해가 진 後 바다에서 나오는 理由는 天敵들로부터 가장 安全한 時間帶이기 때문이다. 펭귄은 陸地 위 풀숲에 땅을 파고 窟 模樣의 집을 짓고 사는데, 뒤뚱거리며 바다까지 가려면 한 時間 以上 걸리기 때문에 붉은 여우나 野生고양이 같은 天敵 捕食者에게 露出될 危險이 크다. 따라서 펭귄은 安全하다고 생각하는 해뜨기 前에 바다에 나갔다가, 다시 어두워졌을 때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해가 지자 갑자기 바닷물 속에서 리더 펭귄 한 마리가 고개를 쑥 내밀고 海岸 周邊 動態를 살핀다. 安全하다는 信號를 보냈는지 그를 따르는 數十마리의 펭귄들도 따라 올라온다. 뭍에 오른 펭귄들은 바위 위에서 數十마리씩 떼를 지어서 한참 동안 서 있다. 날개를 쫙 펴서 털을 말리는 놈도 있고, 周邊을 둘러보며 떠들어대는 놈도 있다. 夫婦인 듯한 커플 펭귄은 목周邊의 가려운 곳을 서로 부리로 긁어주고 있다. 自己 부리로 自己 목의 가려운 곳을 긁기는 힘들 것이다. 사랑하는 커플끼리 서로의 목周邊을 긁어주는 것이다. 몸이 어느 程度 마르고 나면 적게는 5마리, 많게는 20餘 마리의 펭귄이 무리를 지어 집을 찾아간다. 넘어질 듯 뒤뚱거리며 걷는 모습이 正말 귀엽다. 그런데 무리에 따라서 사는 곳이 다르다. 바닷가 近處에 窟을 파고 사는 녀석들은 餘裕를 부린다. 그런데 높은 山 위로 고갯길을 넘어서 힘겹게 올라가는 놈들도 있다. 또 칠흙같은 어둠을 뚫고 山비탈을 넘공, 풀밭을 건너 멀게는 2km나 걸어서 가는 녀석들도 있다고 한다. 젊은 펭귄 무리들은 채널A ‘鋼鐵部隊’의 部隊員들이 行軍하듯 날씬한 몸으로 펄쩍 펄쩍 龍鬚鐵처럼 뛰어서 집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배가 불룩한 펭귄들은 술에 醉한 듯 힘겨운 갈之字 걸음을 한다. 아마도 집에 돌아가 어린 子息에게 먹일 물고기를 뱃 속에 가득 담은 것이 아닐까 推測해본다. 저러다 넘어지고 말지! 하는 瞬間. 비탈길을 오르던 펭귄이 배를 깔고 그대로 躊躇 앉는다. 통통한 배를 깔고 엎드려 있는 모습이 소파나 물寢臺에 기대고 있는 것처럼 便安해 보인다. 한참이나 엎어져서 가지 않으면, 옆에 있는 同僚 펭귄이 흔들어 깨운다. ‘야, 집에 가자!’ 그러면 다시 일어나 뒤뚱뒤뚱 걷는다. 고된 日課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職場人 엄마, 아빠의 退勤길이 떠올라 울컥한 場面. 밤늦은 時間까지 돌아오지 않는 家族들이 서로 부르는 소리에 고요하던 필립 섬은 펭귄 울음소리로 가득 찬다. 어릴 적 洞네 골목길에서 해가 질 때까지 親舊들과 놀 때, 엄마가 大門을 열고 ‘저녁밥 먹어야지’라며 나를 부르던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가까이에서 본 펭귄은 발가락에 물갈퀴가 보였다. 날개는 지느러미처럼 작았다. 부리는 새부리처럼 날카롭고 끝이 아래로 휘어져 있다. 동그란 눈은 귀엽기만 하다. 땅 위에서는 느린 리틀 펭귄이지만 바닷속에서는 最大 秒速 1.7m(時速 6.4km)로 헤엄친 記錄이 있을 程度로 재빠른 水泳實力을 자랑한다. 또한 衛星追跡裝置를 달아 調査한 結果에 따르면, 리틀 펭귄은 하루 平均 15~50km를 헤엄치며, 平均 200~1300番을 潛水해 10~30m 깊이에서 멸치나 오징어 等을 잡아 먹는다고 한다. 유럽人들이 필립 섬에 定着하기 前에는 이곳에 10個나 되는 리틀 펭귄 群落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道路와 建物이 생기고, 사람들을 따라 野生고양이나 여우 等이 들어오면서 9個 群落地가 살아지고, 서머랜드 萬에 하나의 群落地만 남게 됐다. 이에 1985年 빅토리아州 政府에서는 리틀 펭귄을 保護하기 위한 30年 計劃을 세우고, 서머랜드 만의 집과 땅을 모두 다시 사들여 펭귄 棲息地를 만들었다. 이같은 努力으로 필립섬에 2007年 2萬6000마리였던 펭귄이 現在 3萬2000마리로 늘어났다고 한다. ●‘黑鳥’의 湖水 필립아일랜드에는 코알라 保護센터度 있다. 그런데 交通滯症 때문에 時間이 늦어서 코알라를 觀覽할 수 있는 時間이 지나버렸다. 멜버른 現地 가이드인 대니얼 徐 氏는 代身 “現地人들만 알고 있는 힐링場所인 白鳥의 湖水(Swan Lake)를 紹介해드리겠다”고 말했다. 유칼립투스 나무가 우거진 숲 속을 지나자 閑寂한 湖水가 나타났다. 湖水가 풀밭에서는 왈라비가 조용히 풀을 뜯고 있다가, 사람이 다가서면 깡충깡충 뛰어 달아났다. 왈라비는 캥거루와 비슷하게 생긴 紐帶類인데, 몸집이 좀 작고 털色깔이 짙다. 湖水 위에는 수많은 새들이 있었는데, 그 中에서도 優雅한 모습의 커다란 새가 눈에 들어왔다. S字로 굽은 긴 목을 물에 담갔다가 빼는 실루엣이 영락없는 白鳥였다. 그런데 몸이 흰色이 아니라 검은色이 아닌가. 말로만 듣던 ‘블랙 스완(Black Swan)’, 黑鳥였다. 世上에 黑鳥가 眞짜 있다니! 놀라웠다. 黑鳥는 온 몸에서 부리만 빨간色이었다. 차이콥스키 발레 ‘白鳥의 湖水’ 3幕에는 白鳥 오데트로 變裝한 黑鳥 오딜이 지그프리트 王子를 誘惑하는 場面이 나온다. 映畫 ‘블랙 스완’에서 나탈리 포트만이 完璧하게 延期하고 싶어했던 1人2役 變身 場面이다. 블랙 스완은 童話나 映畫에서 黑化韓 主人公에 對한 象徵的 隱喩인줄 알았는데, 멜버른의 湖水가에서 眞짜 黑鳥가 눈앞에 存在하는 것을 보게 된 것이다. 經濟用語로 ‘블랙 스완’은 ‘到底히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이 實際로 일어나는 現象’을 이르는 말이다. 全 世界의 經濟가 豫想하지 못한 事件으로 危機를 맞을 때 使用하는 用語다. 黑鳥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特産種이라고 한다. 西歐 유럽人들이 濠洲에서 白鳥와 똑같은 黑鳥를 처음 봤을 때 얼마나 놀랐을지 理解가 가는 用語다. 스완 레이크에는 조그만 통나무 집에 있었다. 門을 열고 들어가보니 눈높이에 日子로 뚫린 窓門으로 湖水 위에 떠다니는 새들을 觀察할 수 있었다. 새들이 바로 앞까지 헤엄쳐 다가오기 때문에 望遠鏡도 必要없다. 눈 앞에서 이렇게 평화롭고 고요한 大自然을 鑑賞할 수 있는 곳이 있다니. 沈默 속에 驚歎하며 스마트폰으로 撮影했다. 며칠 머물러도 지루하지 않을 힐링의 湖水가였다. 湖水가에서 돌아오는 데 길섶에 등에 뾰족한 바늘이 촘촘히 박힌 生物體가 땅에 얼굴을 박고 있었다. 처음엔 고슴도치人 줄 알았다. 그런데 좀처럼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 動物은 다음날 그레이트 오션 로드 海邊 풀숲에서 또다시 만났다. 이番엔 얼굴을 들고 네발로 어기적 어기적 걸었는데, 길쭉한 주둥이가 있어 고슴도치와 달랐다. 찾아보니 ‘가시 두더지’ 또는 ‘바늘 두더지’라고 불리는 놈이었다. 개미핥기처럼 길쭉한 주둥이로 개미나 벌레, 昆蟲을 잡아먹는다고 한다. 濠洲의 特産種인 ‘오리 너구리’처럼 가시 두더지는 哺乳類인데 알을 낳는 特異한 動物이었다. 알에서 태어난 새끼를 배에 있는 주머니에 넣고 키우는 유대류이기도 하다. 전승훈 記者 raphy@donga.com}

    • 2023-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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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Z世代가 내추럴 와인에 熱狂하는 理由는?

    지난달 25日 서울 城東區 레이어57 展示場 앞에는 이른 아침부터 긴 줄이 이어졌다. 손에 와인盞과 生水甁을 든 MZ世代 젊은이들이었다. 3年 만에 열리는 ‘살롱誤(Saloln O)’의 스탠딩 파티에서 最新 流行의 내추럴 와인(Natural Wine)을 마음껏 맛볼 수 있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이날 살롱惡에는 프랑스, 이탈리아, 獨逸, 스페인, 오스트리아, 슬로바키아 等 6個國에서 40餘 名의 와인메이커가 自身이 만든 내추럴 와인을 直接 紹介했다. 參加者들은 生水로 입을 헹구어 가며 화이트, 레드, 로제 와인을 번갈아 한 모금씩 마시며 幸福한 웃음을 지었다. 이날 行事를 主催한 主人公은 프랑스 파리에 있는 와인 에이전시 최영선 非老筆 代表(55·寫眞). 2017年 처음 내추럴 와인 살롱을 開催하면서 國內 食飮料(F&B) 市場에 큰 變化를 가져온 人物이다. 팬데믹으로 中斷됐던 살롱오가 서울과 釜山에서 3年 만에 다시 열리자 와인 마니아들이 1200名 가까이 몰려온 것이다. “내추럴 와인은 農藥이나 除草劑를 使用하지 않은 有機農 農法으로 栽培한 葡萄로 만드는데, 釀造 過程에서도 化學的 添加劑 없이 발효시켜 만든 와인입니다. 유럽 와인의 最新 트렌드를 이끌고 있는 革命的인 와인이죠.” 서울대 佛文科를 卒業하고 10餘 年間 外國系 金融會社에 다니던 崔 氏는 2004年 잘나가는 職場을 그만두고 36歲의 나이에 프랑스로 와인 留學을 떠났다. 디종에서 와인 비즈니스 碩士(MBA)를 卒業한 그는 2008年 와인 에이전시 非盧疋을 차렸다. 崔 氏는 보르도, 부르고뉴, 論 等 프랑스 各 地域의 와인 맛을 熱情的인 講義로 풀어내는 名講師였다. 그런데 2014年 初쯤 그女가 갑자기 “이제부터 내추럴 와인만 마시겠다”고 宣言했다. “랑그도크루시용 地域에서 와이너리를 하는 親舊 베로니크가 파리에 올라와 함께 새벽까지 와인을 마셨어요. 그런데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는데 머리가 全혀 아프지 않고 말짱한 거예요. 그날 唯一하게 달랐던 點은 내추럴 와인만 마셨다는 事實이었죠.” 내추럴 와인이 旣存의 컨벤셔널 와인과 다른 點은 製造 過程에서 二酸化黃(SO2)을 거의 넣지 않는다는 것. 二酸化黃은 와인을 甁入할 때 酸化防止劑 役割을 하는 添加物이다. 二酸化黃은 와인을 常溫에서도 比較的 쉽게 保管할 수 있게 하지만, 宿醉와 頭痛을 가져온다. 反面 내추럴 와인은 新鮮한 과일香이 넘쳐나지만 冷藏 保管해야 하는 注意가 必要하다. 崔 代表는 프랑스 내추럴 와인의 先驅者들을 찾아가 인터뷰해 ‘내추럴 와인메이커스 1, 2’(한스미디어)라는 두 卷의 冊을 펴냈다. 2020年에 나온 1卷은 내추럴 와인 革命을 이끈 傳說的인 1世代 生産者 15名에 關한 이야기이고, 올해 初에 나온 2卷은 現在의 내추럴 와인 市場을 이끌어가고 있는 43名의 스토리를 담았다. 그는 “내추럴 와인은 패션이 아니라 自然을 살리고, 葡萄의 元來 맛으로 돌아가기 위한 農夫의 哲學”이라며 “化學肥料와 除草劑는 葡萄가 發效하는 데 必要한 天然이스트까지 다 죽게 한다. 硏究結果 土壤을 元來 自然대로 90∼95% 회복시키는 데는 7∼8年이 걸리지만, 100% 回復되는 데는 300年이 걸린다”고 말했다.전승훈 記者 raphy@donga.com}

    • 2023-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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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Z世代가 내추럴 와인에 熱狂하는 理由는? “와인은 工夫하는 것이 아니라 마시는 것”[전승훈의 아트로드]

    지난달 25日 서울 城東區 레이어57 展示場 앞에는 이른 아침부터 긴 줄이 섰다. 손에는 와인盞과 生水甁을 든 MZ世代 젊은이들이었다. 3年 만에 열리는 ‘살롱誤(Saloln O)’의 와인 페어에서 最新 流行의 내추럴 와인(Natural Wine)을 마음껏 맛볼 수 있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生水로 입을 헹구어가며 화이트, 레드, 로제 와인을 번갈아 한모금씩 마시며 幸福한 웃음을 지었다. 이날 살롱惡에는 프랑스, 이탈리아, 獨逸, 스페인, 오스트리아, 슬로바키아 等 6個國에서 40餘 名의 와인메이커들이 直接 自身들이 釀造한 내츄럴 와인을 가져와 와인製造法과 맛, 香에 對해 說明해주었다. 손에 와인盞을 든 젊은 와인 마니아와 外食業界 從事者들은 冊이나 映像에서만 보던 유럽의 스타 와인메이커와 直接 對話를 나눌 수 있는 機會를 즐겼다. ●살롱 오 祝祭에서 만난 젊은이들 이날 行事를 主催한 主人公은 프랑스 파리에 있는 와인 에이전시 최영선(55) 非老筆 代表. 2017年 國內에 처음으로 내츄럴 와인을 紹介하는 살롱오를 開催한 以後 國內 내츄럴 와인市場 底邊擴大에 큰 役割을 해온 人物이다. 팬데믹으로 中斷됐던 살롱오가 3年 만에 다시 열리자 와인 마니아들이 몰려 온 것이다. “내츄럴 와인은 農藥이나 除草劑를 使用하지 않은 有機農 葡萄, 비오디나미(Biodynamie) 農法으로 栽培한 葡萄로 만듭니다. 여기까지는 有機農(Bio) 와인으로 말할 수 있는데, 와인을 만드는 釀造過程에서도 어떠한 化學的 添加劑 없이 발효시켜 만든 와인이 내추럴 와인입니다. 유럽에서 最新 트렌드를 이끌고 있는 革命的인 와인이죠.” 서울대 佛文科를 卒業하고 10餘年 間 外國系 金融會社에 다니던 崔 氏는 2004年 잘 나가는 職場을 가만두고 36歲의 나이에 프랑스로 와인留學을 떠났다. ‘와인을 마실 때가 가장 幸福하다’는 事實을 깨닫고 불縣 듯 떠난 것이다. 디종에서 와인 비즈니스 碩士(MBA)를 卒業한 그는 2008年 와인 에이전시 非盧疋을 차렸다. 記者가 파리特派員으로 勤務하던 時節(2013~2016年) 崔 氏는 보르도, 부르고뉴, 論 等 프랑스의 各 地域의 와인의 맛을 熱情的인 講義로 풀어내는 名講師였다. 그런데 2014年 初쯤. 그女가 갑자기 “이제부터 내추럴 와인만 마시겠다”고 宣言했다. “랑그독 루시용 地域의 도멘 魔湯 칼므(Domaine Matin Calme)의 안主人이자 共同 양조자였던 베로니크와 저녁을 함께할 자리가 있었어요. 韓國人 入養兒 出身이라는 獨特한 履歷 때문에 오랜期間 親舊로 지냈는데, 파리에 왔으니 함께 새벽까지 와인을 마셨어요.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일어났는데 머리가 全혀 아프지 않고 말짱한 거예요. 酒量을 훨씬 넘게 마셔 當然히 宿醉 恐怖에 떨었는데 말이예요. 그날 唯一하게 달랐던 點은 내츄럴 와인만 마시는 베로니크를 따라서 저도 내추럴 와인만 마셨다는 事實이었죠.” 내츄럴 와인이 旣存의 컨벤셔널 와인과 가장 크게 다른 點은 製造 過程에서 二酸化黃(SO2)를 아예 넣지 않거나, 거의 넣지 않는다는 點이다. 二酸化黃은 와인을 甁入할 때 酸化防止劑 役割을 하는 添加物이다. 二酸化黃은 와인을 常溫에서도 比較的 쉽게 保管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와인을 開封했을 때 特有의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酸素와 쉽게 結合하는 特性 때문에 宿醉와 頭痛을 가져온다. 反面 二酸化黃을 넣지 않은 내츄럴 와인은 新鮮하고 活力있는 과일香이 넘쳐난다. 反面 冷藏庫에 잘 保管하지 않으면 急激한 散花歌 일어나 썩은 沙果나 馬廏間 냄새가 날 수 있다. 崔 代表는 “내추럴 와인에는 ‘二酸化黃’ 뿐 아니라 다른 어떤 添加物도 넣지 않는 게 原則”이라고 밝혔다. 旣存의 와인들은 地域에서 定한 特有의 와인의 빛깔이나 맛, 香을 맞추기 위해 넣는 天然色素나 甘味料 等을 넣는 境遇도 있다. 이러한 地域의 傳統을 無視하고 小規模 耕作地에서 有機農으로 栽培한 葡萄를 그대로 發效해서 만드는 내추럴 와인은 地域 特有의 色깔과 맛, 香과 다를 수도 있기 때문에 地域의 와인을 立證하는 A.O.C 等級을 받지 못하는 境遇도 있다. 한마디로 ‘獨立映畫’처럼 와인界에도 自身의 信念과 方式대로 만들어내는 와인인 셈이다. 그래서 어떤 젊은 내추럴와인메이커는 自身이 만든 와인에 ‘表現의 自由’(Liberte d’expression) ‘反逆者’(Rebelle)이라는 라벨을 붙이기도 한다. 파리의 힙스터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生마르탱 運河나 바스티유 廣場 周邊에는 이러한 新鮮하고 獨特한 맛을 즐길 수 있는 내추럴 와인바가 크게 流行하고 있다. 파리 11區에서 내추럴 와인바 ‘랭쥬 뱅’을 運營했던 와인 메이커 張 피에르 好비노 氏는 “다른 와인을 接하지 않고 곧바로 내추럴 와인을 接한 요즘 젊은이들은, 내추럴 와인을 받아들이는 速度가 旣成世代보다 越等히 빠르다”고 말했다. 旣成 와인의 맛과 香, 色깔에 익숙한 사람들은 와인에 對한 固定觀念을 좀처럼 바꾸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최영선 代表는 現地 生産者들과 國內 輸入社들을 連結해 2014年 처음 내추럴와인을 韓國에 들여왔으며, 2017年부터 每年 내추럴와인 祝祭 ‘살롱誤’를 開催하면서 國內 食飮料(F&B) 業界의 風景을 크게 변화시켜온 主人公이다. ●내추럴 와인 메이커스 崔 代表는 스스로 내추럴와인에 對한 궁금症을 풀기 위해 1980~90年代부터 어떤 添加物도 없이 와인을 만들기 始作한 先驅的인 와인메이커들을 찾아갔다. 이 인터뷰는 ‘내추럴 와인메이커스1,2’(한스미디어)라는 두 卷의 冊에 담겼다. 2020年에 나온 첫 冊은 내추럴 와인 革命을 이끈 傳說的인 1世代 와인 生産者 15名에 關한 이야기고, 올해 初에 나온 두 番째 冊은 現在의 내추럴 와인 市場을 이끌어가고 있는 보다 젊은 내추럴 와인 生産者 43人을 찾아간 스토리를 담았다. 그가 쓴 冊에서는 國內에 輸入되자마자 品切 現象을 빚을 程度로 有名한 내추럴 와인과 生産者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特히 두 番째 冊은 프랑스의 主要 와인 生産地를 따라 旅行하듯 챕터를 構成했다. 아르데슈에서 始作한 冊은 오베르뉴, 루아르, 알자스, 보르도, 부르고뉴, 쥐라&사부아, 랑그독 루시용 等 프랑스를 代表하는 有名 와인 山地를 두루 거치며 끝을 맺는다. 現場感이 넘치면서도 아름다운 寫眞들, 生産者들이 直接 들려주는 葡萄와 와인, 釀造에 對한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낸다. 그의 冊에 따르면 내추럴 와인의 1世代 開拓者로 불리는 쥘 쇼베(1907~1989)는 當代의 著名한 生物學者이자 化學者였다. 釀造家였던 그는 처음으로 二酸化黃을 넣지 않고도 完成度 높은 와인을 製造하는 方法을 科學的으로 提示했다. 그는 1951年 收穫한 葡萄로 두 個의 다른 와인을 만들었다. 하나는 二酸化黃을 넣은 와인, 다른 하나는 넣지 않은 葡萄였다. 그리고 試飮 後 다음과 같은 簡單한 記錄을 남겼다. ‘二酸化黃 未使用 와인 : 섬세하고 隱隱한 꽃 香이 微妙하고 豐富함.’ ‘二酸化黃 使用 와인 : 鈍濁하며 다양한 香이 사라짐.’ ―化學的 添加物이 葡萄와 와인에 어떤 影響을 미쳤나요. “1,2次 世界大戰이 끝나고 化學武器를 製造하던 사람들이 化學肥料와 除草劑, 殺蟲劑를 만들기 始作했어요. 이런 것이 땅과 農業을 망쳤습니다. 와인이 醱酵할 때 必要한 것이 이스트입니다. 化學 除草劑, 殺蟲劑를 쓰면 病蟲害 뿐 아니라 天然이스트까지 다 죽게 됩니다. 이스트가 죽으니까 培養 酵母를 넣게 됩니다. 培養 酵母를 넣는 瞬間 發效가 急激하게 일어나겠지만, 그건 더 以上 自然이 아닌 겁니다. 내추럴 와인 匠人들은 와인은 健康한 葡萄를 키우는 農事에서부터 始作해야 한다고 自覺한 사람들입니다. 도미니크 드랭은 30年 前 綺羅星 같은 有名 와이너리가 빼곡한 프랑스 最高의 와인山地人 부르고뉴에서 내추럴 와인을 만들게 된 理由에 對해 ‘어릴 적 할아버지가 가꾸던 葡萄밭의 爽快한 環境이 그리웠다. 農藥을 全혀 使用하지 않아 快適하고 향기롭던 그 雰圍氣. 난 그저 透明하고 率直하게 와인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어요. 보르도에서 내추럴 와인을 生産하고 있는 샤토 르 퓌(Chateau Le Pyu)의 張 피에르 아모로도 “化學 肥料를 使用한 葡萄밭은 겉보기에는 葡萄알의 크기는 비슷하지만 그 속에 들어 있는 營養分은 完全히 달라졌다”고 말합니다. 土壤의 90~95%가 回復되는 데는 7~8年이 걸리겠지만, 100퍼센트 回復되는 데는 300年이 걸린다고 했지요.” ―酸化防止를 위해 넣는 ‘二酸化黃(SO2)’은 어떤 것인가요. “내추럴 와인은 처음엔 ‘上 수프르(Sans Soufre) 와인’이라고 불렸어요. Soufre(皇, 硫黃)를 넣지 않은 와인이라는 뜻입니다. 古代 로마時代부터 와인을 만들 때 黃이 使用됐어요. 그런데 그건 火山 周邊의 돌에서 抽出하는 내추럴 黃이었습니다. 로마時代 때도 와인을 만들 때 消毒하는 過程에서 黃을 썼습니다. 그런데 天然 鑛石물에서 얻는 黃은 너무 비싸니까 化學的으로 만든 二酸化黃(SO2)을 넣기 始作하면서 몸에 나빠지기 始作한 겁니다. 요즘 내추럴 와인을 만들 때에도 甁入할 때나 釀造過程에서 ‘아주 조금’ 黃을 넣기도 합니다. 그것까지는 ‘톨레랑스(tolerance)’로 認定해주기도 하는거죠.”―내추럴 와인은 定해진 레서피가 있는가. “張 피에르 號非盧는 프랑스 루아르 地域에서 내추럴 와인을 生産하고 있는 匠人입니다. 그는 ‘내추럴 와인은 正答이 없다는 것이 正答’이라고 말했어요. 내추럴 와인은 컨벤셔널 와인 釀造처럼 定해진 레서피가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죠. 例를 들어 보르도 프리美에 와인같은 境遇에는 얼마間 發效하고, 熟成시키고, 언제 甁入을 하는지 딱 定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내추럴 와인은 그 해 酵母가 스스로 決定하는 速度를 사람이 그냥 따라갈 수 밖에 없습니다. 酵母가 約 1年, 2年 동안 發效하는 境遇도 있어요. 그럼 그걸 따라가야죠 어떻게 하겠습니까. 내추럴 와인은 테크닉이 아니라 哲學입니다. 쥐라의 살아 있는 傳說인 와인 메이커 피에르 오베르누아는 ‘내추럴 와인은 그저 葡萄주스를 單純히 발효시킨 것이니 할 일이 別로 없을 것이라는 錯覺은 禁物’이라고 警告합니다. 내추럴 와인은 修正이 可能한 物質을 全혀 넣지 않기 때문에, 單 한가지의 失手가 고스란히 失敗로 이어질 수 밖에 없기 때문(필립 長棒)입니다.” ―내추럴 와인에 對해 ‘힙스터의 술’, ‘패션 아이템’으로 貶下하는 사람도 있는데. “에르미타주 地域의 내추럴 와인 先驅者 ‘DARD & RIBO)의 르네-張 다르는 ‘내추럴 와인 生産者들을 藝術家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웃기는 소리다. 우리는 農夫일 뿐이다’라고 말했어요. 저는 이 말이 第一 좋아요. 이게 내추럴 와인 生産者들의 哲學입니다. 제가 만난 내추럴 와인 메이커들은 數十年 동안 ’左派, 히피, 아나키스트, 게으름뱅이(添加物을 넣지 않는다는 意味)‘ 等으로 비웃음과 逼迫을 받아 오면서도 默默히 自己 길을 걸어서 스타가 된 멋진 사람들입니다. 結局 와인은 마시는 사람들이 그 價値를 評價해주는거죠. 르네-張 다르는 ’내추럴 와인과 컨벤셔널 와인을 섞어 놓고 마시면, 다들 처음에는 컨벤셔널 와인이 더 맛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끝에 가면 내추럴 와인은 거의 다 마시고 없는데, 컨벤셔널 와인은 如前히 많이 남아 있는 境遇가 大部分‘이라고 말하죠. 實際로 저도 파리에서 外交官들이 行事를 할 때 試飮할 와인 5甁이 있으면 그 中에 한 甁은 내추럴 와인을 끼워놓습니다. 처음엔 아무 말도 안해도 내추럴 와인이 가장 먼저 없어집니다. 왜냐하면 목넘김이 깨끗하니까 마시면 또 마시고 싶어지거든요.”―내추럴 와인은 地域別 高級와인에 붙이는 A.O.C(原産地 統制名稱 와인) 等級을 받지 못하는 境遇가 많은데. “내추럴 와인 生産者들은 프리美에 크뤼, 그랑 크뤼 클라쎄 等 A.O.C 等級에 戀戀하지 않아요. 大部分 ’뱅 드 프랑스‘(Vin de France)나 ’뱅 드 따블‘(Vin de Table) 같은 日常와인 等級을 받아도 아무도 相關하지 않아요. 내추럴 와인이 그 地域 固有의 色깔과 맛, 香과 다르다고 하는데 그것이 元來 맛입니다. A.O.C 制度가 생긴게 얼마 안됐잖아요. 化學的 添加物이 생기고 난 다음에 만들어진 制度입니다. 그래서 只今은 다시 돌아가고 있습니다. 人爲的인 等級條件에 맞추기 위해 生産하는 와인이 아니라 眞짜 元來의 테루아(Terroir, 와인을 만드는데 影響을 미치는 氣候, 土壤, 降水量, 바람, 太陽, 葡萄栽培法 等의 總稱)의 맛으로 돌아가고 있는 거죠. 요즘 젊은 사람들은 와인을 工夫하는 代身 맛을 直觀的으로 받아들입니다. 왜 와인을 工夫해야 하죠? 이젠 무슨 냄새, 무슨 빛깔로 區分하는 와인 講義도 바뀌어야 합니다. 알자스의 수퍼스타 와인 메이커인 브뤼노 슐레흐는 ‘와인은 마시러고 만드는 것이지, 展示用이 아니다’라고 말했어요. ―내추럴 와인은 쉽게 傷할 수 있다는 短點이 있는데. “내추럴 와인도 適正한 溫度에 冷藏保管만 잘하면 數十年이 지나도 괜찮습니다. 溫度를 맞췄을 때는 오히려 더 맛있게 熟成이 되지요. 自然的으로 살아 있는 飮食은 保管 狀態가 좋지 않으면 傷하게 돼 있습니다. 自然狀態에서 傷하지 않는 게 異常한 겁니다. 化學的 防腐劑가 들어간 것이란 뜻이죠. 땅에 살아 있는 微生物을 생각하며 葡萄 農事를 짓고 와인을 만드는 내추럴와인 生産者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이들은 單純한 釀造가가 아니었습니다. 땅을 사랑하는 農夫이자, 野生 酵母를 끊임없이 硏究하는 醱酵 科學者이자, 多數가 가지 않은 길을 힘겹지만 뚜벅뚜벅 걸어가는 哲學者였습니다.”전승훈 記者 raphy@donga.com}

    • 2023-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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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개비]포르투의 푸른빛 亞줄레週

    포르투갈의 由緖 깊은 港口인 포르투는 對抗해 時代를 열었던 海洋 貿易의 據點 都市다. 聖堂이나 汽車驛 等 포르투의 遺跡地 建築物에는 獨特한 特徵이 있다. 안팎으로 푸른빛이 도는 세라믹 壁面인 ‘亞줄레週(Azulejo)’로 裝飾돼 있다. 5世紀 넘게 繼續 이어진 亞줄레週는 그림을 그려 만든 포르투갈의 陶瓷器 타일로 壁面을 裝飾하는 스타일이다. 亞줄레注意 痕跡은 라틴 아메리카와 필리핀 等 옛 포르투갈, 스페인 植民地에도 아직 많이 남아 있다.전승훈 記者 raphy@donga.com}

    • 2023-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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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채석강 海蝕洞窟[바람개비/전승훈]

    全北 扶安郡 邊山半島에 있는 채석강 海蝕洞窟은 自然이 빚은 天然 포토존이다. 퇴적암층이 數萬 卷의 冊을 쌓아놓은 듯한 絶壁에 바닷물이 侵蝕해 만든 洞窟이다. 이곳이 有名한 건 獨特하게 나타나는 실루엣 때문이다. 洞窟 안쪽에서 逆光으로 撮影하면 角度에 따라 洞窟이 유니콘 模樣, 韓半島 模樣으로 찍힌다. 特히 해가 질 무렵 水平線 周圍가 朱紅빛으로 물들 때 魅惑的인 판타지를 만들어낸다. 밀물 때는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물때表를 잘 보고 찾아가야 한다.전승훈 記者 raphy@donga.com}

    • 2023-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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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봄날에 걷는 ‘韓國의 산토리니’ 골목… 밤바다엔 도깨비 불빛이 흐르고[전승훈의 아트로드]

    “사랑이 어떻게 變하니?” 映畫 ‘봄날은 간다’(2001년)에서 俳優 이영애가 延期했던 隱修가 살았던 아파트는 江原 동해시 墨湖港 周邊에 있는 三本아파트다. 墨湖港 周邊은 港口를 따라 傳統市場과 山비탈 논골담길, 도째비骨스카이밸리, 추암海邊과 무릉계곡 等 봄날의 햇살을 즐기며 걸을 수 있는 旅行地다. 文化體育觀光部와 韓國觀光公社가 觀光客들이 꼭 가볼 만한 國內의 代表 觀光地 100곳을 모아 發表한 ‘2023~2024 韓國觀光 100線’에 새롭게 包含되기도 했다. 特히 日出로 有名한 東海 海邊마을인데도, 夜景까지 아름다운 곳이다. ●東海 墨湖에서 즐기는 도깨비 불빛 旅行 江原 東海 墨湖港 隣近에 있는 도째비骨. 어두운 밤에 비가 내리면 푸른빛들이 보여 ‘도깨비불’이라 여긴 사람들에게 도째비(도깨비의 方言)골로 불렸다는 이야기가 傳해온다. 도깨비불에 홀린 듯 時時刻刻 變하는 華麗한 照明 탓일까. 밤에 보는 ‘도째비骨 스카이밸리’는 現實世界를 벗어나 어디선가 외눈박이 도깨비가 房房이를 들고 나타날 듯한 幻想의 世界다. 세方向으로 이어지는 다리로 構成된 스카이밸리는 밤에 보면 푸르스름한 東海바다 墨湖港에 내려 앉은 宇宙船을 聯想케 한다. 急傾斜地人 墨湖港 도째비골은 災害危險地域이라 廢墟로 放置되던 곳이었다. 동해시에서 이곳을 安全하게 整備하고 2021年 바다를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展望臺(海拔 59m)와 도깨비놀이 施設을 만들었다. ‘하늘散策路(스카이워크)’, ‘스카이사이클(와이어를 따라 空中을 달리는 自轉車)’, ‘자이언트슬라이드(大型미끄럼틀)’ 等으로 構成돼 있어 낮에는 스릴 넘치는 즐거움을 滿喫하고, 밤에는 華麗한 照明이 색다른 볼거리를 提供한다. 스카이밸리에서 바다 쪽을 바라보면 ‘도깨비 방망이’ 模樣의 海上橋梁 해랑展望臺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해랑展望臺는 琉璃바닥으로 돼 있는 길이 85m의 바다위에 만들어진 스카이워크다. 발 아래로 부서지는 波濤 너울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다리 위로 해가지면 時時刻刻 變하는 照明이 더해지며 밤바다의 風景을 華麗하게 裝飾한다. 해랑展望臺에서 人生寫眞을 찍다보면 視線이 머무는 곳이 있는데 바로 ‘韓國의 산토리니’ 논골담마을이다. 墨湖港 뒤便 가파른 언덕에 자리잡은 논골淡 마을은 1960~70年代 東海에서 明太와 오징어잡이가 好況을 이룰 때 形成됐다. 全國 各地에서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 모여들자 住居 空間이 不足해 墨湖港 맞은便 오학산의 비탈진 傾斜面에 작은 집이 빼곡히 들어서기 始作한 것이다. 生鮮을 말리기 위해 소나무로 만든 작은 덕장度 곳곳에 세워졌다. ‘논골’은 오징어를 지게에 얹어 언덕 위까지 나르다 흘린 물로 길이 질퍽거렸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明太의 枯渴로 過去 東海의 好況은 사라졌지만, 이 마을 담벼락에는 ‘墨湖’의 이야기들이 壁畫로 알록달록 피어나 있다. 하얀 姿態가 아름다운 墨湖燈臺는 內部의 螺旋形 階段을 통해 올라가 360道路 周邊 風景을 鑑賞할 수 있도록 開放돼 있다. 燈臺 展望層에서는 멀리 백두대간의 頭陀山과 청옥산, 東海의 風景까지 同時에 鑑賞할 수 있다. 墨湖燈臺 앞에는 1968年 作 映畫 ‘미워도 다시 한番’ 撮影地임을 알리는 記念碑가 서 있다. 墨湖燈臺는 亦是 밤이면 形形色色의 LED 照明燈이 켜지며 색다른 볼거리를 提供한다. 特히 燈臺에서 바라보는 墨湖港 밤바다 오징어잡이 漁船들의 奔走한 움직임과 불빛들이 壯觀을 演出한다. ●波濤가 鐘소리처럼 들리는 추암 凌波對 東海를 따라 이어진 汽車길을 달리다 만나는 추암驛 앞 바닷가에는 日出 名所로 有名한 촛臺바위가 있다. 過去 TV 放送時間 規制가 있던 時節 愛國歌 첫 小節과 함께 촛臺바위의 日出 場面이 나오면서 有名稅를 탄 곳이다. 그런데 추암은 日出 뿐 아니라 요즘은 夜景 名所로도 뜨고 있다. 지난 2019年에 놓인 海上출렁다리(길이 72m)가 夜景 名所로 떠올랐다. 출렁다리는 바다를 건너는 짜릿한 스릴을 맛보면서 낮에는 푸른 東海바다와 奇巖怪石을 鑑賞하고, 해가지면 照明에 비친 밤바다의 韻致를 즐길 수 있는 포토존이 되고 있다. 추암에는 海岸을 따라 촛臺바위를 비롯해 다양한 模樣을 한 바위가 숲을 이룬 凌波對가 視線을 사로잡는다. 駐車場을 지나면 가장 먼저 海巖情이라는 고풍스러운 精子가 눈에 띈다. 海巖鄭은 高麗 恭愍王 10年(1361)에 三陟 沈氏의 始祖인 심동로가 벼슬을 물리고 내려와 처음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只今의 建物은 朝鮮 中宗 25年(1530)에 심언관에 依해 다시 지어진 것을 正祖 때 補修한 것이다. 가운데 懸板의 ‘해巖井(海巖亭)’이란 글씨는 尤庵 宋時烈, 오른쪽 ‘石鐘函(石鐘檻)’이란 글씨는 松江 鄭澈의 글씨라고 傳해진다. 石鐘은 해巖井 뒤쪽을 울타리처럼 에워싼 바위들을 돌로 된 種으로 比喩한 것이다. 바위에 波濤가 부딪치는 소리가 마치 鐘소리 같다는 意味다. ●무릉계곡 別有天地 동해시 무릉계곡은 많은 奇巖怪石과 絶景들이 長官을 이루고 있으며 1977年 國民觀光地 第1號로 指定됐다. 三和寺 三層石塔(寶物 第1277號), 三和寺 鐵造盧舍那佛坐像(寶物 第1292號) 等의 文化遺産을 保有하고 있다. 올해 동해시에서 ‘도째비骨 스카이밸리’와 함께 韓國觀光 100線’에 選定됐다. 무릉계곡은 頭陀山과 청옥산 아래 용추폭포에서 湖巖소까지 이르는 約 4km 길이의 溪谷을 말한다. 賣票所를 지나면 만나는 신선교에서 물속을 仔細히 들여다보면 물길을 따라 이어지는 검은 線이 보인다. 이것을 龍오름 길이라고 하는데 무릉계곡을 따라 용추폭포까지 길이가 6km에 이른다. 龍오름 길은 용이 지나간 痕跡이라는 것이다. 西域에서 온 세 名의 船人이 龍을 타고 溪谷을 오르던 中 各各 黑聯과 靑蓮, 金蓮을 가지고 내린 자리에 절이 생겼는데 그中 黑聯을 가지고 내린 곳이 三和寺다. 신선교를 지나 조금만 걸으면 ‘金蘭情’이란 이름의 程子와 함께 武陵盤石을 만난다. 武陵盤石은 千名이 앉아도 너끈할 만큼 큰 하나의 巨大한 바위로 그 넓이가 1500坪에 이른다. 맑은 溪谷물이 흐르는 바위 곳곳에는 漢字로 851名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主로 三陟府使 等 管理들의 이름이며 金亂階(親舊끼리 親睦을 위해서 모은 界) 같은 契員의 이름도 있다. 武陵盤石을 有名하게 만든 巖角書 12者도 發見할 수 있다. 꿈틀대듯 힘 있는 草書體로 쓰인 武陵船員(武陵仙源) 重大千石(中臺泉石) 두타洞天(頭陀洞天)은 ‘神仙이 노니는 이곳에 돌과 물이 어우러져 孕胎한 大自然 앞에 나도 世俗의 煩惱를 내려놓고 神仙이 될까 하노라’라는 意味를 담고 있다. 동해시 삼화동 ‘武陵別有天地’는 125m 上空에서 나는 듯한 氣分을 滿喫할 수 있는 스카이글라이더와 알파인코스터, 오프로드 루지, 롤러코스터型 집라인, 두르美展望臺는 家族과 함께 즐기기 좋은 體驗施設이다. 이 곳은 元來 2017年까지 쌍용시멘트會社가 石灰石을 採掘하던 곳이었다. 40年間 속살이 파헤쳐진 山에는 巨大한 웅덩이 두 個가 생겼고 節槪地 곳곳은 採掘에 따른 傷痕이 그대로 남았다. 會社는 더는 원석이 나지 않는 鑛山 敷地를 동해시에 寄附했다. 以後 깊게 파인 웅덩이는 湖水로 꾸며져 靑玉號와 금곡號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周邊에 라벤더 꽃밭과 힐링을 위한 休息의 空間이 생겨났다. 過去 커다란 돌덩이를 부수던 碎石腸은 博物館으로 再誕生했다. 內部에는 돌덩이를 부숴 가루로 만드는 過程과 시멘트를 만드는 過程, 過去의 모습을 담은 寫眞이 展示돼 있다. 4層에는 展望臺를 겸한 카페가 있다. 武陵別有天地 入場客은 無料로 運行하는 武陵別列車를 利用해 드넓은 敷地를 便하게 移動할 수 있다. 東海=전승훈 記者 raphy@donga.com}

    • 2023-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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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봄날에 걷는 ‘韓國의 산토리니’ 골목… 밤바다엔 도깨비 불빛이 흐르고[전승훈 記者의 아트로드]

    《“어떻게 사랑이 變하니?” 映畫 ‘봄날은 간다’(2001년)에서 俳優 이영애가 延期했던 隱修가 살았던 아파트는 江原 동해시 墨湖港 周邊에 있는 三本아파트다. 墨湖港 周邊은 港口를 따라 傳統市場과 山비탈 논골담길, 도째비骨스카이밸리, 추암海邊과 무릉계곡 等 봄날의 햇살을 즐기며 걸을 수 있는 旅行地다. 文化體育觀光部와 韓國觀光公社가 觀光客들이 꼭 가볼 만한 國內의 代表 觀光地 100곳을 모아 發表한 ‘2023∼2024 韓國 觀光 100線’에 새롭게 包含되기도 했다. 特히 日出로 有名한 東海 海邊마을인데도, 夜景까지 아름다운 곳이다.》●동해 墨湖에서 즐기는 도깨비 불빛 旅行東海 墨湖港 隣近에 있는 도째비骨. 어두운 밤에 비가 내리면 푸른빛들이 보여 ‘도깨비불’이라 여긴 사람들에게 도째비(도깨비의 方言)골로 불렸다는 이야기가 傳해온다. 도깨비불에 홀린 듯 時時刻刻 變하는 華麗한 照明 때문일까. 밤에 보는 ‘도째비骨스카이밸리’는 現實 世界를 벗어나 어디선가 외눈박이 도깨비가 방망이를 들고 나타날 듯한 幻想의 世界다. 세 方向으로 이어지는 다리로 構成된 스카이밸리는 밤에 보면 푸르스름한 東海 바다 墨湖港에 내려앉은 宇宙船을 聯想케 한다. 急傾斜地人 墨湖港 도째비골은 災害危險地域이라 廢墟로 放置된 곳이었다. 동해시에서 이곳을 安全하게 整備하고 2021年 바다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展望臺(海拔 59m)와 도깨비놀이 施設을 만들었다. ‘하늘散策路’(스카이워크), ‘스카이사이클’(와이어를 따라 空中을 달리는 自轉車), ‘자이언트슬라이드’(大型 미끄럼틀) 等으로 構成돼 있어 낮에는 스릴 넘치는 즐거움을 滿喫하고, 밤에는 華麗한 照明이 색다른 볼거리를 提供한다. 스카이밸리에서 바다 쪽을 바라보면 ‘도깨비방망이’ 模樣의 海上 橋梁 해랑展望臺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해랑展望臺는 바다 위에 琉璃바닥으로 만들어진 길이 85m의 스카이워크다. 발아래로 부서지는 波濤 너울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다리 위로 해가 지면 時時刻刻 變하는 照明이 더해지며 밤바다의 風景을 華麗하게 裝飾한다. 해랑展望臺에서 人生 寫眞을 찍다 보면 視線이 머무는 곳이 있는데 바로 ‘韓國의 산토리니’ 논골담마을이다. 墨湖港 뒤便 가파른 언덕에 자리잡은 논골담마을은 1960, 70年代 東海에서 明太와 오징어잡이가 好況을 이룰 때 形成됐다. 全國 各地에서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 모여들자 住居 空間이 不足해 墨湖港 맞은便 오학산의 비탈진 傾斜面에 작은 집이 빼곡히 들어서기 始作한 것이다. 生鮮을 말리기 위해 소나무로 만든 작은 덕장度 곳곳에 세워졌다. ‘논골’은 오징어를 지게에 얹어 언덕 위까지 나르다 흘린 물로 길이 질퍽거렸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明太의 枯渴로 過去 東海의 好況은 사라졌지만, 이 마을 담벼락에는 ‘墨湖’의 이야기들이 壁畫로 알록달록 피어나 있다. 하얀 姿態가 아름다운 墨湖燈臺는 內部의 螺旋形 階段을 통해 올라가 360道路 周邊 風景을 鑑賞할 수 있도록 開放돼 있다. 燈臺 展望層에서는 멀리 백두대간의 頭陀山과 청옥산, 東海의 風景까지 同時에 鑑賞할 수 있다. 墨湖燈臺 앞에는 1968年 作 映畫 ‘미워도 다시 한番’ 撮影地임을 알리는 記念碑가 서 있다. 墨湖燈臺는 亦是 밤이면 形形色色의 發光다이오드(LED) 照明燈이 켜지며 색다른 볼거리를 提供한다. 特히 燈臺에서 바라보는 墨湖港 밤바다 오징어잡이 漁船들의 奔走한 움직임과 불빛들이 壯觀을 演出한다. ●波濤가 鐘소리처럼 들리는 추암 凌波對東海를 따라 이어진 汽車길을 달리다 만나는 추암驛 앞 바닷가에는 日出 名所로 有名한 촛臺바위가 있다. 過去 TV 放送時間 規制가 있던 時節 愛國歌 첫 小節과 함께 촛臺바위의 日出 場面이 나오면서 有名해진 곳이다. 그런데 추암은 日出뿐 아니라 요즘은 夜景 名所로도 뜨고 있다. 2019年에 놓인 海上출렁다리(길이 72m)가 夜景 名所로 떠올랐다. 출렁다리는 바다를 건너는 짜릿한 스릴을 맛보면서 낮에는 푸른 東海 바다와 奇巖怪石을 鑑賞하고, 해가 지면 照明에 비친 밤바다의 韻致를 즐길 수 있는 포토존이 되고 있다. 추암에서는 海岸을 따라 촛臺바위를 비롯해 다양한 模樣을 한 바위가 숲을 이룬 凌波對가 視線을 사로잡는다. 駐車場을 지나면 가장 먼저 海巖情이라는 고풍스러운 精子가 눈에 띈다. 海巖鄭은 高麗 恭愍王 10年(1361年)에 三陟 沈氏의 始祖인 심동로가 벼슬을 辭讓하고 내려와 처음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只今의 建物은 朝鮮 中宗 25年(1530年)에 심언관에 依해 다시 지어진 것을 正祖 때 補修한 것이다. 가운데 懸板의 ‘해巖井(海巖亭)’이란 글씨는 尤庵 宋時烈, 오른쪽 ‘石鐘函(石鐘檻)’이란 글씨는 松江 鄭澈의 글씨라고 傳해진다. 石鐘은 해巖井 뒤쪽을 울타리처럼 에워싼 바위들을 돌로 된 種으로 比喩한 것이다. 바위에 波濤가 부딪치는 소리가 마치 鐘소리 같다는 意味다. ●무릉계곡 別有天地東海市 무릉계곡은 많은 奇巖怪石과 絶景들이 長官을 이루고 있으며 1977年 國民觀光地 第1號로 指定됐다. 三和寺 三層石塔(寶物 第1277號), 三和寺 鐵造盧舍那佛坐像(寶物 第1292號) 等의 文化遺産을 保有하고 있다. 올해 동해시에서 ‘도째비骨스카이밸리’와 함께 韓國 觀光 100線’에 選定됐다. 무릉계곡은 頭陀山과 청옥산 아래 용추폭포에서 湖巖소까지 이르는 約 4km 길이의 溪谷을 말한다. 賣票所를 지나면 만나는 신선교에서 물속을 仔細히 들여다보면 물길을 따라 이어지는 검은 線이 보인다. 이것을 龍오름 길이라고 하는데 무릉계곡을 따라 용추폭포까지 길이가 6km에 이른다. 龍오름 길은 용이 지나간 痕跡이라는 것이다. 西域에서 온 세 名의 船人이 龍을 타고 溪谷을 오르던 中 各各 黑聯과 靑蓮, 金蓮을 가지고 내린 자리에 절이 생겼는데 그中 黑聯을 가지고 내린 곳이 三和寺다. 신선교를 지나 조금만 걸으면 ‘金蘭情’이란 이름의 程子와 함께 武陵盤石을 만난다. 武陵盤石은 1000名이 앉아도 너끈할 만큼 큰, 하나의 巨大한 바위로 그 넓이가 5000㎡(約 1500坪)에 이른다. 맑은 溪谷물이 흐르는 바위 곳곳에는 漢字로 851名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主로 三陟府使 等 管理들의 이름이며 金蘭契(親舊끼리 親睦을 위해서 모은 界) 같은 契員의 이름도 있다. 武陵盤石을 有名하게 만든 巖角書 12者도 發見할 수 있다. 꿈틀대듯 힘 있는 草書體로 쓰인 武陵船員(武陵仙源) 重大千石(中臺泉石) 두타洞天(頭陀洞天)은 ‘神仙이 노니는 이곳에 돌과 물이 어우러져 孕胎한 大自然 앞에 나도 世俗의 煩惱를 내려놓고 神仙이 될까 하노라’라는 意味를 담고 있다. 동해시 삼화동 ‘武陵別有天地’는 125m 上空에서 나는 듯한 氣分을 滿喫할 수 있는 스카이글라이더와 알파인코스터, 오프로드 루지, 롤러코스터型 집라인, 두르美展望臺 等 家族과 함께 즐기기 좋은 體驗施設이다. 이곳은 元來 2017年까지 雙龍시멘트가 石灰石을 採掘하던 곳이다. 40年間 속살이 파헤쳐진 山에는 巨大한 웅덩이 두 個가 생겼고 節槪地 곳곳은 採掘에 따른 傷痕이 그대로 남았다. 會社는 더는 원석이 나지 않는 鑛山 敷地를 동해시에 寄附했다. 以後 깊게 파인 웅덩이는 湖水로 꾸며져 靑玉號와 금곡號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周邊에 라벤더 꽃밭과 힐링을 위한 休息의 空間이 생겨났다. 過去 커다란 돌덩이를 부수던 碎石腸은 博物館으로 再誕生했다. 內部에는 돌덩이를 부숴 가루로 만드는 過程과 시멘트를 만드는 過程, 過去의 모습을 담은 寫眞이 展示돼 있다. 4層에는 展望臺를 겸한 카페가 있다. 武陵別有天地 入場客은 無料로 運行하는 武陵別列車를 利用해 드넓은 敷地를 便하게 移動할 수 있다. 글·寫眞 東海=전승훈 記者 raphy@donga.com}

    • 2023-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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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개비]墨湖 논골담길 壁畫

    어머니가 머리에 이고 가는 고무 대야에는 아들이 호롱불을 켜고 밥床에 앉아서 工夫를 한다. 燈불을 환하게 켠 오징어 배와 明太, 그리고 子息은 어머니가 힘든 삶에도 웃음과 希望을 잃지 않을 수 있던 버팀木이었다. 아버지는 洋동이를 지게에 지고 앞으로 걸어가고, 키 작은 少女는 煉炭을 들고 따라간다. 江原 東海 墨湖港 논골담길에는 1960, 70年代 山비탈에 살던 庶民들의 哀歡이 담긴 壁畫가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전승훈 記者 raphy@donga.com}

    • 2023-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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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萬德 할망이 애타게 救恤米를 기다리던 浦口에 펼쳐진 緋緞처럼 고운 붉은 노을[전승훈의 아트로드]

    작은 民俗村으로 再現된 김만덕 客主朝鮮時代 上段 비즈니스 -濟州飮食 體驗 紗羅峯 언덕에서 바라보는 幻想的 落照百年 넘은 燈臺에서 커피와 展示도 즐겨 김만덕 位牌 모신 祠堂에 職銜 밝힌 墓碑救恤 義人의 삶 멀티미디어로 紹介 濟州島의 關門인 제주시 건입동 紗羅峯 언덕은 北쪽으로는 푸른 바다, 南쪽으로는 雄壯한 漢拏山을 볼 수 있고, 발 아래로 濟州 市內의 모습이 보이는 숨은 名所다. 特히 紗羅峯 北쪽 끝에 있는 山地燈臺에서 바라보는 붉은 노을은 絶景이다. 바다에는 濟州抗議 불빛이 반짝이고, 隨時로 陸地로 오가는 飛行機가 떠오르는 모습도 浪漫的이다. 건입동은 濟州의 擧上(巨商) 김만덕(1739~1812)의 스토리가 담긴 곳이기도 하다. 朝鮮 最初의 女性 CEO이자, 大災難에서 百姓을 살린 義人(義人), 女性에게 禁止된 꿈을 實現한 旅行家였던 ‘김만덕의 길’을 따라 걸어보았다. ●朝鮮 最初의 女性CEO, 김만덕의 客主濟州 北部의 件입包는 예로부터 濟州와 陸地를 잇는 關門이었다. 件입包 住民들은 봄이면 全北 群山-延坪島-海州-新義州까지 進出한 뒤 陰曆 10月이면 쌀과 各種 商品을 싣고 歸鄕했다. 萬德의 아버지도 件입布衣 商人이었다. 그러나 萬德이 12살 때 아버지는 風浪을 만나 목숨을 잃었고, 이듬해 어머니마저 世上을 떠났다. 親戚집에 살던 萬德은 어린 나이에 妓女(妓女) 敎育을 받고 妓生이 되었다. 스무살이 되었을 때 그女는 濟州 牧師를 찾아가 良人으로 還俗시켜줄 것을 要請했고, 客主를 차렸다. 朝鮮時代 客主는 다른 地域에서 온 商人들에게 宿所를 提供하면서 物件을 맡아주고, 팔아주고, 흥정을 붙여주는 일을 하던 집이다. 김만덕의 物産客主(物産客主)는 委託賣買는 勿論이고 宿泊, 金融, 都賣, 倉庫, 運搬 等 全方位的인 비즈니스를 했다. 濟州 北部 올레길 18코스가 始作되는 건입동에는 山地천 散策路가 있다. 漢拏山에서 發源한 山地천은 건입동을 貫通한 뒤 濟州港으로 빠져나간다. 産業化가 한창이던 1960年代에 山地천을 覆蓋하여 住宅과 商街 建物이 들어섰지만, 1990年代 中盤에 山地천을 復元해 歷史와 文化를 되살리려는 事業이 進行 中이다. 山地천을 걷다보면 復元된 ‘김만덕 客主’를 만난다. 작은 民俗村처럼 草家지붕을 이은 8채의 濟州 傳統家屋이다. 當時 客主와 上段의 모습이 再現돼 있는 이 곳은 無料로 觀覽이 可能하다. 한쪽 켠에는 實際 飮食을 販賣하는 酒幕도 運營되고 있다. 濟州 傳統 飮食인 몸國, 고사리肉개醬 等의 飮食을 맛볼 수 있다. 萬德의 事業成功 祕訣은 陸地와 섬에서 나는 物件의 時勢 差益이었다. 그는 濟州에서만 生産되는 濟州馬, 말총, 樣態, 晋州, 牛黃, 미역 等 特産物을 陸地에 販賣했고, 代身 瘠薄한 濟州로貴한 쌀과 소금을 들여왔다. ‘信用本位(信用本位)’를 내건 萬德은 積極的으로 船上(船商)을 誘致하고, 官家에 物品도 供給하며 濟州 最高의 巨商이 되었다고 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삶김만덕이 朝鮮時代 全國的인 人物로 알려지게 된 것은 正祖 18年(1794年)의 일. 濟州 사람들에게는 只今도 ‘갭寅年 凶年(甲寅年 凶年)’으로 불리는 慘酷한 災難의 해였다. 가뭄과 颱風이 反復된 그 해에 거리엔 굶어죽은 屍體로 가득했다고 朝鮮王朝實錄은 傳한다. 濟州 産地路에 있는 ‘김만덕 記念館’에 가면 各種 記錄과 멀티미디어를 통해 當時 사람들의 生命을 살린 ‘萬德 할망’의 行跡을 생생히 볼 수 있다.당시 濟州 牧師 심낙수는 “東風이 强하게 불어와 기와가 날아가고 돌이 굴러가 나부끼는 것이 마치 나뭇잎 날리는 것 같다”며 救恤米 2萬 섬을 要請하는 狀啓를 調整에 올렸다. 이에 正祖 임금은 濟州島로 急하게 救恤米를 보내라는 御命을 내렸다. 그러나 救恤米를 실은 배마저도 難破돼 災難은 더욱 심해졌다. “正祖 19年(1795年) 尹2月 賑恤穀 5000席을 실은 배 12隻 中 5隻이 바다를 건너오다가 難破됐다. 이즈음 濟州 百姓 3分의 1이 굶어 죽었다.”(정조실록) 이를 본 萬德은 平生 모은 財産을 털어내 救恤에 나섰다. 當時 萬德이 陸地에서 사들여 官家에 실어나른 쌀은 濟州道民 全體가 열흘間 목숨을 延長할 수 있는 量이었다고 한다. 德分에 數千名의 濟州民들이 굶주림에서 살아날 수 있었다. 正祖는 김만덕을 높이 致賀하고, 臣下들에게 그女의 삶을 널리 알리는 電氣를 執筆하라는 命을 내렸다. 社會經濟 改革을 통치 理念으로 삼은 正祖는 自身의 改革 意志를 밝히는 롤모델로 萬德을 내세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에 左議政 蔡濟恭을 비롯해 수많은 공경대神이 ‘萬德戰’을 지었다. 秋史 金正喜는 ‘은광연歲(恩光衍世·은혜로운 빛이 世上에 가득차다)’라는 글씨로 김만덕의 의로움을 讚揚했다. 김만덕은 朝鮮王朝實錄이나 當代의 많은 文集에서 ‘夾士(俠士)’ ‘烈俠(烈俠)’ ‘義烈社(義烈士)’라고 불렸다. 戰爭에서 功을 세우거나, 의로운 일을 해낸 英雄에게 던지는 讚辭다. 極甚한 가뭄에서 數千名의 목숨을 살렸으니 ‘救恤 義人’으로 불리는 것은 當然하다.●여행가 김만덕이 올랐던 紗羅峯과 山地等大祭酒올레길 18코스의 一部인 ‘김만덕의 길’은 紗羅峯과 山地等臺로 이어진다. 紗羅峯(海拔 148m)에서 바라보는 日沒은 ‘璽葑落照(沙峰落照)’라고 한다. 城山日出峰에서 바라보는 해돋이人 ‘성산日出(城山日出)’과 함께 濟州의 열두가지 아름다운 風光을 일컫는 ‘榮州(瀛洲·濟州의 옛 이름) 十二頃’ 中 하나에 든다. 紗羅峯에 오르면 濟州港에서 濟州空港까지, 濟州道審에서 漢拏山 자락까지 탁 트인 展望이 두 눈 가득 들어온다. 特히 紗羅峯 北쪽 끝자락에 位置한 산지등대는 밤이 깊어가면 漆黑같은 바다를 수놓는 數百隻 고기잡이배들의 불빛 饗宴을 볼 수 있는 손꼽히는 夜景名所이기도 하다. 1916年 以後로 濟州 바다를 지켜온 山地燈臺는 15秒에 한番 씩 반짝이며 48km 밖 바다까지 불빛을 비춘다. 數年前 無人燈臺가 된 後로 燈臺원이 머무르던 宿所는 카페와 展示 空間으로 活用되고 있다. 萬德은 紗羅峯 언덕에서 平生 旅行하는 꿈을 꾸었을 것이다. 正祖는 濟州 牧師에게 “사람들의 목숨을 살린 萬德에게 願하는 바를 들어주라”고 御命을 내렸다. 當時 58歲였던 萬德은 “바다를 건너 金剛山을 구경하고 싶다”는 所願을 밝혔다. 이 所願은 當時로서는 世上이 뒤집힐 일이었다. 朝鮮의 法典인 ‘經國大典’에 “婦女子가 山川에서 놀이를 즐기면 棍杖 100대에 處한다”고 規定한 데다, 濟州島의 平民은 섬 밖으로 나올 수 없다는 ‘出陸 禁止令’李 200年이나 持續됐던 時代였기 때문이다. 김만덕이 임금에게 “金剛山을 보고 싶소”라고 말한 것은 出六禁止令에 묶여 있던 濟州道 女人들의 怨望과 抱負를 代辯한 勇敢無雙한 宣言이었다. 正祖는 萬德의 所願을 듣고 金剛山 遊覽 뿐 아니라 漢陽 宮闕 구경까지 欣快히 許諾했다. 一般 平民이 뭍으로 나오는 게 不法이기 때문에 正祖는 萬德에게 ‘醫女 半修(醫女班首)’라는 벼슬도 내렸다. 萬德은 난生 처음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넜다. 正祖의 名으로 前例없는 配慮를 받고 移動한 萬德은 가는 고을마다 歡待를 받으며 全國的인 스타로 떠올랐다. 朝鮮時代 선비들에게도 金剛山 旅行은 平生의 꿈이었다. 朝鮮時代 金剛山 旅行은 오늘날의 海外旅行과 비슷한 準備와 時間, 費用이 必要했기 때문이다. 實學者 朴齊家는 김만덕에 對해 “이 世上에 태어나고 이 世上을 떠나는 동안 ‘멋쟁이’로 살다간 사람으로 貴하다 할 만한 사람”이라고 썼다. 萬德은 旅行을 마치고 濟州로 돌아온 後에도 前과 다름없이 장사를 繼續하면서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주고, 굶주린 사람에게 쌀을 주는 等 慈善事業에 힘을 쏟았다. 74歲의 나이로 世上을 떠날 때까지 그는 온 濟州島民으로부터 尊敬과 사랑을 받는 ‘萬德 할망’이었다. 김만덕의 位牌를 모신 毛蟲絲에는 그의 무덤도 있다. 碑文에는 ‘行首內醫女 김만덕至妙(行首內醫女 金萬德之墓)’라고 적혀 있다. 朝鮮時代 女性의 境遇 墓碑에 누구의 夫人, 누구의 딸, 며느리로 表現함으로써 男性의 이름과 字號, 職銜을 앞세우고 뒤에 숨는 게 普通이었다. 그러나 김만덕의 墓碑에는 堂堂하게 自身의 이름과 職銜, 삶의 行跡이 墓碑에 적혀 있어 歷史的인 意味가 담겨 있다. 전승훈 記者 raphy@donga.com}

    • 2023-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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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財産 털어 數千名 살린 김만덕, 浦口의 붉은 노을 ‘할망’의 마음일까[전승훈 記者의 아트로드]

    《濟州島의 關門인 제주시 건입동 紗羅峯 언덕은 北쪽으로는 푸른 바다, 南쪽으로는 雄壯한 漢拏山을 볼 수 있고, 발아래로 濟州 市內의 모습이 보이는 숨은 名所다. 特히 紗羅峯 北쪽 끝에 있는 山地燈臺에서 바라보는 붉은 노을은 絶景이다. 바다에는 濟州抗議 불빛이 반짝이고, 隨時로 陸地로 오가는 飛行機가 떠오르는 모습도 浪漫的이다. 건입동은 濟州의 擧上(巨商) 김만덕(1739∼1812)의 스토리가 담긴 곳이기도 하다. 朝鮮 最初의 女性 最高經營者(CEO)이자, 大災難에서 百姓을 살린 義人(義人), 女性에게 禁止된 꿈을 實現한 旅行家였던 ‘김만덕의 길’을 따라 걸어보았다.》 ●朝鮮 最初의 女性 CEO, 김만덕의 客主濟州 北部의 件입包는 예로부터 濟州와 陸地를 잇는 關門이었다. 件입包 住民들은 봄이면 全北 群山∼延坪島∼海州∼新義州까지 進出한 뒤 陰曆 10月이면 쌀과 各種 商品을 싣고 歸鄕했다. 萬德의 아버지도 件입布衣 商人이었다. 그러나 萬德이 12歲 때 아버지는 風浪을 만나 목숨을 잃었고, 이듬해 어머니마저 世上을 떠났다. 親戚 집에 살던 萬德은 어린 나이에 妓女(妓女) 敎育을 받고 妓生이 되었다. 스무 살이 되었을 때 그女는 濟州 牧師를 찾아가 良人으로 還俗시켜 줄 것을 要請했고, 客主를 차렸다. 朝鮮時代 客主는 다른 地域에서 온 商人들에게 宿所를 提供하면서 物件을 맡아 주고, 팔아 주고, 흥정을 붙여 주는 일을 하던 집이다. 김만덕의 物産客主(物産客主)는 委託賣買는 勿論이고 宿泊, 金融, 都賣, 倉庫, 運搬 等 全方位的인 비즈니스를 했다. 濟州 北部 올레길 18코스가 始作되는 건입동에는 山地천 散策路가 있다. 漢拏山에서 發源한 山地천은 건입동을 貫通한 뒤 濟州港으로 빠져나간다. 産業化가 한창이던 1960年代에 山地천을 覆蓋하여 住宅과 商街 建物이 들어섰지만, 1990年代 中盤부터 山地천을 復元해 歷史와 文化를 되살리려는 事業이 進行 中이다. 山地천을 걷다 보면 復元된 ‘김만덕 客主’를 만난다. 작은 民俗村처럼 草家지붕을 이은 8채의 濟州 傳統家屋이다. 當時 客主와 上段의 모습이 再現돼 있는 이곳은 無料로 觀覽할 수 있다. 한쪽에는 實際 飮食을 販賣하는 酒幕도 運營되고 있다. 濟州 傳統 飮食인 몸國, 고사리肉개醬 等의 飮食을 맛볼 수 있다. 萬德의 事業 成功 祕訣은 陸地와 섬에서 나는 物件의 時勢 差益이었다. 그는 濟州에서만 生産되는 濟州馬, 말총, 樣態, 晋州, 牛黃, 미역 等 特産物을 陸地에 販賣했고, 代身 瘠薄한 濟州로 貴한 쌀과 소금을 들여왔다. ‘信用本位(信用本位)’를 내건 萬德은 積極的으로 船上(船商)을 誘致하고, 官家에 物品도 供給하며 濟州 最高의 巨商이 되었다고 한다.●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삶김만덕이 朝鮮時代 全國的인 人物로 알려지게 된 것은 正祖 18年(1794年)의 일이다. 濟州 사람들에게는 只今도 ‘갭寅年 凶年(甲寅年 凶年)’으로 불리는 慘酷한 災難의 해였다. 가뭄과 颱風이 反復된 그해에 거리엔 굶어 죽은 屍體로 가득했다고 朝鮮王朝實錄은 傳한다. 濟州 産地路에 있는 ‘김만덕 記念館’에 가면 各種 記錄과 멀티미디어를 통해 當時 사람들의 生命을 살린 ‘萬德 할망’의 行跡을 생생히 볼 수 있다. 當時 濟州 牧師 심낙수는 “東風이 强하게 불어와 기와가 날아가고 돌이 굴러가 나부끼는 것이 마치 나뭇잎 날리는 것 같다”며 救恤米 2萬 섬을 要請하는 狀啓를 調整에 올렸다. 이에 正祖 임금은 濟州島로 急하게 救恤米를 보내라는 御命을 내렸다. 그러나 救恤米를 실은 배마저도 難破돼 災難은 더욱 심해졌다. “正祖 19年(1795年) 尹 2月 賑恤穀 5000席을 실은 배 12隻 中 5隻이 바다를 건너오다가 難破됐다. 이즈음 濟州 百姓 3分의 1이 굶어 죽었다.”(정조실록) 이를 본 萬德은 平生 모은 財産을 털어내 救恤에 나섰다. 當時 萬德이 陸地에서 사들여 官家에 실어나른 쌀은 濟州道民 全體가 열흘間 목숨을 延長할 수 있는 量이었다고 한다. 德分에 數千 名의 濟州民이 굶주림에서 살아날 수 있었다. 正祖는 김만덕을 높이 致賀하고, 臣下들에게 그女의 삶을 널리 알리는 電氣를 執筆하라는 命을 내렸다. 社會經濟 改革을 통치 理念으로 삼은 正祖는 自身의 改革 意志를 밝히는 롤모델로 萬德을 내세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에 左議政 蔡濟恭을 비롯해 수많은 공경대神이 ‘萬德戰’을 지었다. 秋史 金正喜는 ‘은광연歲(恩光衍世·은혜로운 빛이 世上에 가득 차다)’라는 글씨로 김만덕의 의로움을 讚揚했다. 김만덕은 朝鮮王朝實錄이나 當代의 많은 文集에서 ‘夾士(俠士)’ ‘烈俠(烈俠)’ ‘義烈社(義烈士)’라고 불렸다. 戰爭에서 功을 세우거나, 의로운 일을 해낸 英雄에게 던지는 讚辭다. 極甚한 가뭄에서 數千 名의 목숨을 살렸으니 ‘救恤 義人’으로 불리는 것은 當然하다. ●旅行家 김만덕이 올랐던 紗羅峯과 山地等大祭酒 올레길 18코스의 一部인 ‘김만덕의 길’은 紗羅峯과 山地等臺로 이어진다. 紗羅峯(海拔 148m)에서 바라보는 日沒은 ‘璽葑落照(沙峰落照)’라고 한다. 城山日出峰에서 바라보는 해돋이人 ‘성산日出(城山日出)’과 함께 濟州의 열두 가지 아름다운 風光을 일컫는 ‘榮州(瀛洲·濟州의 옛 이름) 十二頃’ 中 하나에 든다. 紗羅峯에 오르면 濟州港에서 濟州空港까지, 濟州 都心에서 漢拏山 자락까지 탁 트인 展望이 두 눈 가득 들어온다. 特히 紗羅峯 北쪽 끝자락에 位置한 산지등대는 밤이 깊어가면 漆黑 같은 바다를 수놓는 數百 隻 고기잡이배들의 불빛 饗宴을 볼 수 있는 손꼽히는 夜景 名所이기도 하다. 1916年 以後로 濟州 바다를 지켜온 山地燈臺는 15秒에 한 番씩 반짝이며 48km 밖 바다까지 불빛을 비춘다. 數年 前 無人燈臺가 된 後로 燈臺원이 머무르던 宿所는 카페와 展示 空間으로 活用되고 있다. 萬德은 紗羅峯 언덕에서 平生 旅行하는 꿈을 꾸었을 것이다. 正祖는 濟州 牧師에게 “사람들의 목숨을 살린 萬德에게 願하는 바를 들어주라”고 御命을 내렸다. 當時 58歲였던 萬德은 “바다를 건너 金剛山을 구경하고 싶다”는 所願을 밝혔다. 이 所願은 當時로서는 世上이 뒤집힐 일이었다. 朝鮮의 法典인 ‘經國大典’에 “婦女子가 山川에서 놀이를 즐기면 棍杖 100대에 處한다”고 規定한 데다 濟州島의 平民은 섬 밖으로 나올 수 없다는 ‘出陸 禁止令’李 200年이나 持續되던 時代였기 때문이다. 김만덕이 임금에게 “金剛山을 보고 싶소”라고 말한 것은 出陸 禁止令에 묶여 있던 濟州道 女人들의 怨望과 抱負를 代辯한 勇敢無雙한 宣言이었다. 正祖는 萬德의 所願을 듣고 金剛山 遊覽뿐 아니라 漢陽 宮闕 구경까지 欣快히 許諾했다. 一般 平民이 뭍으로 나오는 게 不法이기 때문에 正祖는 萬德에게 ‘醫女半修(醫女班首)’라는 벼슬도 내렸다. 萬德은 난生처음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넜다. 正祖의 名으로 前例 없는 配慮를 받고 移動한 萬德은 가는 고을마다 歡待를 받으며 全國的인 스타로 떠올랐다. 朝鮮時代 선비들에게도 金剛山 旅行은 平生의 꿈이었다. 朝鮮時代 金剛山 旅行은 오늘날의 海外旅行과 비슷한 準備와 時間, 費用이 必要했기 때문이다. 實學者 朴齊家는 김만덕에 對해 “이 世上에 태어나고 이 世上을 떠나는 동안 ‘멋쟁이’로 살다 간 사람으로 貴하다 할 만한 사람”이라고 썼다. 萬德은 旅行을 마치고 濟州로 돌아온 後에도 前과 다름없이 장사를 繼續하면서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주고, 굶주린 사람에게 쌀을 주는 等 慈善事業에 힘을 쏟았다. 74歲의 나이로 世上을 떠날 때까지 그는 온 濟州島民으로부터 尊敬과 사랑을 받는 ‘萬德 할망’이었다. 김만덕의 位牌를 모신 毛蟲絲에는 그의 무덤도 있다. 碑文에는 ‘行首內醫女 김만덕至妙(行首內醫女 金萬德之墓)’라고 적혀 있다. 朝鮮時代 女性의 境遇 墓碑에 누구의 夫人, 누구의 딸, 며느리로 表現함으로써 男性의 이름과 字號, 職銜을 앞세우고 뒤에 숨는 게 普通이었다. 그러나 김만덕의 墓碑에는 堂堂하게 自身의 이름과 職銜, 삶의 行跡이 적혀 있어 歷史的인 意味가 담겨 있다.제주=전승훈 記者 raphy@donga.com}

    • 2023-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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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개비]統營大橋

    韓國의 나폴리로 불리는 慶南 統營市에는 미륵도로 連結하는 統營大橋가 있다. 낮보다 밤이 더 아름다운 다리다. 1998年 完工된 統營大橋(591m)의 中央 아치 部分에 달려 있는 燈불이 最高의 夜景을 자아낸다. 뉘엿뉘엿 해가 질 무렵 붉게 물드는 統營運河 위로 草綠빛, 보랏빛, 붉은빛으로 時時刻刻 變하는 統營大橋가 어우러진 浪漫的인 風景을 鑑賞할 수 있다. 다리 밑으로 배라도 한 隻 지나가면 더욱 아름다운 물결무늬가 생겨난다. 전승훈 記者 raphy@donga.com}

    • 2023-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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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明太는 말라 비틀어져도 맑은 눈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전승훈의 아트로드]

    ‘吉上(吉祥)이란 좋은 일이 있을 兆朕이다. 길(吉)은 선(善)한 것, 上(祥)은 아름답고 기쁜 일의 徵兆다. 좋은 기운을 줄 것으로 믿는 對象들을 生活 속에 象徵的으로 表現하며, 삶의 幸福을 祈願하는 마음이다.’ 서울 景福宮 內에 있는 國立民俗博物館에서 다음달 2日까지 열리는 ‘吉上 特別展’에는 우리 民族의 生活 속에서 만날 수 있는. 幸運과 福을 비는 象徵物들이 展示되고 있다. 그 中 入口에서 가장 처음으로 만나는 것은 집이나 가게 出入門 위에 걸어두었던 ‘北魚 실타래 裝飾物’이다. “실타래는 긴 실과 같이 오래 살기(장수·長壽)를 의미하고, 말린 明太人 北魚는 厄을 막아주는 意味로 祭祀나 故事에서 祭物로 使用된다.” (北魚 실타래 裝飾物 案內文) 北魚 실타래 裝飾物이 MZ世代 사이에서 幸運을 祈願하는 예쁜 아트商品으로 復活했다. 主人公은 정연중 디자인스튜디오 ‘버금’ 代表. 그는 우리 固有의 精神과 멋이 담긴 文化財를 아트商品으로 開發하는 디자인 專門家다. “明太는 말라 비틀어져 北魚가 되어도 눈이 宏壯히 맑아요. 그래서 明太에 ‘밝을 名(明)’字가 들어가는 지도 모릅니다. 明太에 흰色 明紬실을 감아놓은 形態 自體만으로도 正말 아름다운 디자인이라고 느꼈습니다.” 弘益大 廣告디자인學科를 卒業한 정 代表는 그동안 국립중앙박물관의 禁制遺物, 國立故宮博物館의 日月오봉度(日月五峯圖), 프랑스가 返還한 ‘朝鮮王朝儀軌’ 等을 모티브로 한 藝術商品을 만들어 큰 呼應을 얻은 바 있다. 特히 英祖정순후嘉禮都監儀軌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製作한 길이 5m의 簇子 商品은 500세트가 瞬息間에 完販될 程度로 人氣를 끌었다. 그가 지난해 리움美術館 再開館 特別展, 工藝트렌드페어에서 선보였던 새로운 아트商品은 바로 길상(吉祥)의 意味를 담은 ‘明紬실 北魚’다. 집이나 事務室을 移徙할 때, 車를 새로 샀을 때 福을 빌고, 厄運을 막는 意味로 걸어두던 民俗이다. 그는 明紬실을 감은 北魚를 直接 디지털로 彫刻해 3D프린터로 만들어 레드, 블루, 골드, 그린, 화이트 等 다채로운 色깔의 商品으로 만들고, 磁石을 붙여 아파트 門이나 冷藏庫에 붙일 수 있도록 했다. ‘Good Luck Fish(굿럭피쉬/明太)’라고 이름 붙인 이 아트商品은 지난 가을 리움美術館 아트숍과 工藝트렌드페어에서 3000餘 個가 팔렸고, 올初 카카오메이커스에서 5000個가 팔리는 等 突風을 일으켰다. ―우리 文化財를 素材로 한 아트商品을 開發하게 된 契機는. “中學校 修學旅行 때 慶州에 갔었어요. 佛國寺와 瞻星臺에 큰 感銘을 받아 記念品을 사려고 했는데, 너무 粗雜한 品質에 失望했습니다. 내 좋은 追憶을 오히려 망칠 것 같더군요. 그런데 디자이너가 되고 나서 그 當時 記憶이 났습니다. 國內外 사람들에게 우리만의 스토리텔링과 哲學, 藝術性을 記念할 수 있도록 퀄리티 있는 굿즈(Goods)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가장 記憶에 남는 文化財 아트商品은. “프랑스가 返還한 ‘朝鮮王朝儀軌’ 國立中央博物館 特別展 記念 굿즈였습니다. 英祖의 行次를 그린 圖鑑을 아트商品으로 만들었습니다. 英祖의 行次圖는 사람들이 實際 行次한 記錄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事實 이 그림은 行次를 하기 前에 行列 計劃을 짠 說明圖입니다. 王과 王妃는 어디에 있고, 臣下들은 몇 番째로 오고, 누가 말을 타고, 걸어서 가는지를 定해주는 그림이지요. 元來 冊에 한 쪽씩 붙어 있는 그림을 스캔해서 全體 行列을 한 눈에 볼 수 있게 5m 크기의 簇子로 만들었습니다. 總 500세트를 디자인해서 各 15萬원에 팔았습니다. 王室에서 쓰던 象牙(象牙) 裝飾을 달아서 簇子를 꾸미는 等 높은 퀄리티를 維持하려고 努力했습니다. 行列 全體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資料라 所藏 欲求가 暴發했는지 금세 賣盡되더군요.” ―明太를 굿즈로 만들게 된 契機는. “日本에 가면 손을 흔들고 있는 고양이 人形 하나씩 꼭 사오고, 뉴욕에 가면 ‘I♥NY’ 로고가 적힌 記念品을 사오잖아요. 우리나라도 韓國을 象徵하는 印象的인 記念品을 꼭 開發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런데 어릴 적에 보면 구멍가게마다 門 위에 걸려 있던 北魚가 생각났어요. 저는 이 北魚가 宏壯히 디자인的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했습니다. 明太가 눈을 똑바로 뜨고 있어서 雜鬼들이 무서워서 도망칠 것 같더라고요. 저는 北魚에 明紬실을 감아놓은 形態 自體만으로도 正말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정 代表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明太를 말려도 눈이 살아 있다는 理由로 告祀를 지낼 때 쓰고, 惡鬼를 물리치고, 幸運을 불러오는 象徵으로 집 안에 걸어놓기도 한다”며 “韓國人들에게 宏壯히 친숙한 生鮮이기 때문에 살릴 價値가 있는 우리 文化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明太는 韓國人들에게 너무너무 重要한 生鮮이었습니다. 新鮮한 明太는 生態湯을 끓여먹고, 얼리면 凍太湯으로 끓여먹어요. 明太를 半乾燥한 게 코다리이고, 明太의 새끼는 麥酒집에서 按酒로 最高인 노가리죠. 明太를 겨울 山속 눈바람에 얼렸다가 말렸다가 해서 만드는 게 黃太예요. 明太알로는 明卵젓을 만들고, 明太 창자로는 창란젓을 담궈요. 하나도 버리는 게 없어요. 明太는 東海岸에서 그물만 던지면 어마어마하게 잡혔던 生鮮입니다. 가장 흔하게 求할 수 있던 庶民的인 飮食이었죠. 이렇게 親熟한 生鮮이라 집이나 事務室 移徙를 하거나 車를 바꿨을 때 告祀를 지내고, 明紬실을 묶어서 門 위에 걸어놓거나, 트렁크 안에 넣어두었죠.” ―明太를 어떤 式으로 디자인을 했나. “처음엔 明太 寫眞을 을지로에서 木彫刻하시는 분에게 가져가서 깎아달라고 付託했습니다. 나무로 깎은 明太를 利用해 金型으로 製作해봤지요. 眞짜 明紬실을 감아보려고 했는데, 金屬에 明紬실을 감으니 미끄러워 다 풀려버렸습니다. 金型으로 製作한 明太가 귀엽고 예쁘긴 한데 제가 彫刻한 것이 아니라 그만두었죠. 그래서 제가 直接 3D프린터로 製作해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는 學院에서 3個月間 3D프린트 프로그램을 배워서 直接 디지털로 明太를 彫刻했다. 明太 위에 明紬실이 감긴 形態를 그대로 3D 디지털로 彫刻해냈다. 明太와 明紬실을 같은 材料로 하되 色相을 다양하게 해서 出品했더니 젊은 사람들까지 熱狂했다. 골드, 그린, 화이트, 블루 等 各自 좋아하는 色깔로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購入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가 디자인한 明太 아트商品은 文化體育觀光部와 觀光公社가 主催하는 韓國觀光記念品 公募展에 出品을 해서 銅像을 受賞했다. 리움美術館이 코로나 以後 再開館을 하면서 韓國的인 느낌이 나는 아트商品으로 그의 ‘굿럭피쉬/明太’를 팔았는데 3000個가 瞬息間에 팔렸다고 한다. 이 아트商品은 지난해 가을 서울 江南區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工藝트렌드페어에서도 선보였다. 明太는 3D프린터로 만든 模樣이지만 磁石이 달려 있어서 아파트의 鐵製 出入門에 잘 붙게 만들어졌다. “工藝트렌드페어에 온 觀覽客이 첫날 10個를 사갔는데, 다음날 또 와서 色깔別로 10個를 사가는 거예요. 어디에 膳物하실 거냐고 물었더니 아들, 孫子, 며느리, 親戚, 親舊들 줄 거라며 누구 大門은 빨간色이어서 이 色깔이 어울리겠다고 하더라구요. 明太를 膳物한다기보다는 ‘福 받으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 거라고 생각합니다. 眞짜 明太와 明紬실을 膳物하기에는 좀 꺼림칙하지만, 예쁜 액세서리龍 아트商品이 재미와 意味가 담긴 膳物로 便하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MZ世代까지 明紬실 明太 아트商品에 呼應하는 理由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패턴 購買者 分析을 해보면 20代도 많았습니다. 처음에는 日常 속 샤머니즘 같은 것이 어떻게 하면 아트商品으로 나올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어요. 若干 무거울 수 있는 메시지를 유니크하고 재미있게 풀었기 때문에 젊은 世代들도 좋아해주는 것 같습니다. 이게 웃긴 點은 機能이 없는 物件이라는 點이죠. 마우스나 펜, 컵처럼 機能이 있는 것이 아니라 象徵이잖아요. 福을 起源해주고, 厄을 막아주는 象徵일 뿐입니다. 댓글에 보면 ‘韓國에 이런 文化가 있었대’하고 엄마에게 물어보니 엄마가 說明해주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우리 文化가 끊어지지 않고 代가 이어지고 있는 것 같아서 氣分이 좋았습니다.” ―或是 물고기 模樣의 民俗 膳物에 對한 拒否感은 없나. “事實 물고기에 對한 象徵은 모든 宗敎에 다 들어 있습니다. 基督敎에서 물고기는 예수 그리스도와 基督敎의 象徵이었습니다. 佛敎에서도 물고기는 밤에도 눈 뜨고 잔다고 해서 修行者의 象徵입니다. 또한 눈을 뜬 물고기는 財物을 지켜준다고 해서 우리나라 자물쇠에는 거의 100% 물고기가 새겨져 있습니다. 昌德宮 後苑에는 蓮못의 돌에도 물고기가 彫刻돼 있고, 이어지는 樓閣에는 龍이 새겨져 있어요. 우리나라에서는 잉어가 오랜 修行을 하면 龍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韓國的인 文化를 아트 디자인 商品으로 만들면서 보람은. “예전에 제가 알고 지내던 스님을 찾아 절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스님이 臺돌에 고무신을 벗어놓고 들어가셨길래 나오실 때 便하시라고 신발 方向을 밖으로 돌려놓고 房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스님에게 魂이 났습니다. 손님이 벗어놓은 신발을 돌려놓는 것은 日本에서 온 文化지 우리 文化가 아니라는 說明이었습니다. 日本에서는 그걸 合理的인 禮節이라고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찾아온 손님이 오랫동안 餘裕있게 이야기도 하고, 천천히 가시라는 意味에서 신발을 돌려놓지 않는다는 겁니다. 勿論 나갈 때 신발 神技에 조금 어렵겠지만, 손님이 便安한 마음으로 머무르게 配慮하는 文化라는 說明이 너무 좋았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平素엔 關心없다가도, 韓國의 文化에 담긴 內面의 哲學을 알고 나면 熱狂的으로 反應하는 境遇가 많습니다.” ―다음에 韓國的 文化 아트商品으로 準備하고 있는 것은. “다음으로 開發하고 있는 것이 ‘孝子손’입니다. 孝子손은 등에 손이 안 닿는 곳을 긁어달라고 付託할 사람이 없을 때 긁어주는 悼懼잖아요. 그냥 ‘등 긁게’라고 하면 될 것을 우리나라 사람들은 ‘孝子손’이라는 이름을 붙였거든요. 저는 孝子손이라는 말이 너무 좋습니다. 至極히 韓國的인 脈絡에서 나온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孝子손은 落葉을 긁는 道具나, 밭을 가는 쟁기같은 農器具처럼 생겼습니다. 그걸로 등을 긁으면 眞짜 시원합니다. 模樣이 重要한 것이 아니라 ‘孝子손’이라는 이름을 붙임으로써 韓國的인 文化商品이 되는 것이죠. 臺돌에 신발을 거꾸로 돌려놓지 않는 것처럼, 韓國的인 槪念과 스토리텔링이 모티브가 되는 아트 디자인 商品을 만들고 싶습니다.” 전승훈記者 raphy@donga.com}

    • 2023-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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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개비]冬柏꽃

    慶南 統營의 街路樹는 冬柏이다. 統營의 길가에는 冬柏꽃과 梅花가 한창이다. 가장 아름다운 冬柏은 1606年(宣祖 39年)에 지어진 李舜臣 將軍의 位牌를 모신 祠堂인 忠烈祠에서 만난다. 고즈넉한 祠堂 앞마당의 樹齡 400年 가까운 冬柏나무에는 나뭇가지 아래에도 붉은 冬柏꽃이 뚝뚝 떨어져 피어 있다. 時人 百席은 忠烈祠 돌階段에서 統營의 한 少女를 그리며 ‘녯 長壽 모신 낡은 祠堂의 돌層階에 주저앉아서’라는 詩를 쓰기도 했다.전승훈 記者 raphy@donga.com}

    • 2023-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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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巨大한 波濤가 덮치는 신선대…울산바위 즐기는 4가지 方法[전승훈의 아트로드]

    江原道 束草에서 彌矢嶺 고개를 넘어갈 때 堂堂하게 서 있는 울산바위는 外雪嶽의 象徵이다. 恐龍의 등줄기를 닮은 巨大한 설악의 봉우리들이 어깨를 맞대고 늘어서 있는 가운데 山줄기에서 불끈 솟아 있는 울산바위는 壯快하기 그지없다. 北部 이탈리아 알프스 돌로미티 地域의 雄壯한 바위山脈이 부럽지 않은 韓國의 名所다. 요즘 MZ世代들이 熱狂하는 蔚山바위 찍기 좋은 핫플레이스 4곳을 찾아 江原道로 떠났다. ● 巨大한 波濤가 나를 덮치는 신선대 講院 麟蹄郡에서 束草市를 잇는 彌矢嶺터널을 빠져나가면 오른便으로 蔚山바위(海拔 873m)가 雄壯하게 서 있다. 高城郡 토성면 원암리에 있는 울산바위는 둘레만 4km에 이르고, 6個의 奇巖怪石 봉우리로 이뤄진 돌山이다. 넷플릭스 藝能 ‘피지컬: 100’에서 볼 수 있는 울퉁불퉁한 筋肉質 몸매가 屛風처럼 둘러싸고 있다. 우람한 봉우리 위에 작은 바위들이 華麗하게 繡놓여 있어서 王冠을 聯想케 하기도 한다. 壯快한 男性美뿐 아니라 바위 틈에서 자라는 소나무까지 어우러져서 藝術的 感動까지 느끼게 하는 自然의 偉大한 作品이다. 울산바위를 鑑賞하는 첫 番째 方法은 울산바위를 直接 올라가보는 것이다. 束草의 雪嶽山 小公園에서 始作해 神興寺, 흔들바위를 지나 蔚山바위 頂上 展望臺까지 오를 수 있다. 흔들바위부터 蔚山바위까지는 鐵製 階段으로 片道 1㎞ 距離임에도 1時間 程度 걸리는 가파른 오르막길이 펼쳐진다. 울산바위 同封 頂上에서 보면 大淸, 中靑峰과 千佛洞溪谷, 花菜稜線이 펼쳐져 선경이 따로 없다. 울산바위를 오르면 周邊 설악과 東海의 風景을 볼 수 있지만, 막상 蔚山바위 全體를 眺望하긴 힘들다. 울산바위를 鑑賞하기보다는 體驗하는 것에 가까운 코스다. 프랑스 파리 에펠塔을 제대로 보려면 에펠塔에 오르기보다는, 맞은便 언덕인 트로카데로 廣場이나 몽파트나스 타워 展望대로 가야 하듯이 말이다. 그래서 요즘 MZ世代들이 울산바위를 背景으로 人生샷을 찍으려 오르는 봉우리는 따로 있다. 바로 金剛山 화암사에서 올라가는 신선대(成人對)다. 지난 週末 束草에 살고 있는 知人과 함께 ‘金剛山 화암사 숲길’을 찾았다. 그는 “화암사에서 올라갈 수 있는 신선대는 海拔 645m로 雪嶽山에서는 낮은 봉우리에 屬하지만 蔚山바위 眺望에는 이만한 곳이 없다”고 귀띔해주었다. 화암사 入口 茶집 앞에서 登山靴에 아이젠을 신는다. 이곳에서 신선대(1.2km)까지는 천천히 걸어도 1時間이면 充分하지만, 눈이 녹지 않은 山길은 登山 裝備를 제대로 갖춰야 한다. 숲길을 오르다 보니 中間 즈음에 ‘水癌(穗巖)’이라는 바위를 만난다. 바위 模樣이 벼 낟가리를 쌓아놓은 모습이라 ‘쌀바위’라고 불리는 바위다. 바위를 두드리면 쌀을 布施한다는 쌀바위 德分에 이 절의 이름이 ‘화암사(禾巖寺)’가 됐다고 한다. 以後 한참을 오르다 보니 신선대(成人對)에 到着한다. 헬기場을 지나 조금 더 가면 展望이 탁 트이는 널찍한 巖盤이 나타난다. 駱駝바위가 있는 이곳이 울산바위를 眺望하는 最高의 포인트다. 雪嶽山 達磨峯부터 彌矢嶺 옛길, 神仙峯, 東海바다와 束草 市內까지 360度의 展望이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신선대 駱駝바위에서 마주 본 겨울의 울산바위는 山이 아니라 波濤였다. 彌矢嶺에서 올려다봤던 울산바위는 肉重한 屛風이나 城砦 같았는데, 높은 곳에서 마주 보는 울산바위는 氣韻生動(氣韻生動), 살아 움직이는 波濤였다. 설악에서 錦江으로 이어지는 山脈의 물결 위로 갑자기 불쑥 솟아오른 巨大한 波濤. 映畫 ‘인터스텔라’나 ‘퍼펙트 스톰’에서 봤던 波濤이자, 언젠가 颱風이 지나가는 浦項 앞바다에서 直接 마주쳤던 하늘에서 덮쳐내리는 波濤였다. MZ世代들이 人生샷 名所로 꼽는 곳이니만큼 보기만 해도 아찔한 바위 앞에서 果敢한 포즈로 寫眞을 찍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곳에서 만난 登山客 황현주 氏는 “드라마틱한 바위山을 좋아하는데 그中에서 신선대는 탁 트인 展望과 고즈넉한 雰圍氣가 있어서 자주 오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봄, 여름, 가을, 겨울에 보는 울산바위는 철마다 다르고, 날씨와 바람에 따라서도 느낌이 다르다”며 “아무리 疲困해도 한걸음에 달려오면 疲勞가 풀리고 기운과 힘, 에너지를 얻는 氣分”이라고 말했다. ● 湖水에서, 카페에서 鑑賞하는 蔚山바위 울산바위 오른쪽 彌矢嶺 고개 너머에 솟은 봉우리는 神仙峯이다. 金剛山 1萬2000棒의 南쪽 第1峯인 山이다. 神仙峯에 살고 있는 成人이 襄杆之風(襄杆之風)을 일으킨다고 傳해진다. ‘束草 바람’ ‘彌矢嶺 바람’이라고 불리는 襄杆之風은 봄철 東海岸의 山불을 일으키는 바람으로 有名하다. 울산바위의 틈새 구멍에서 襄杆之風이 불 때마다 바위가 큰 소리로 울어 ‘蔚山’ 바위로 불렸다는 傳說이 있다. 蔚山바위 이름에 對해서는 다른 有名한 스토리도 있다. 造物主가 全國의 有名한 바위를 모아 金剛山을 만들 때 울산바위度 金剛山에 가려고 길을 나섰다. 蔚山을 떠나 雪嶽山을 지날 즈음 1萬2000峯이 모두 채워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대로 눌러앉았다. 그런데 雪嶽山 遊覽을 나섰던 蔚山의 員님이 찾아와 “울산바위는 蔚山 고을의 所有이니, 神興寺에서 울산바위를 차지한 代價로 稅金을 내라”고 했다. 住持스님이 돈이 없어 걱정하자 童子僧이 나섰다. “稅金을 낼 돈이 없으니, 바위를 蔚山으로 옮겨 가세요.” 한 房 맞은 蔚山의 員님은 “바위를 재로 꼰 새끼로 묶어 주면 가져가겠다”고 맞섰다. 童子僧은 束草의 永郞湖와 靑草湖 사이에 자라는 풀로 새끼를 꼬아 울산바위에 둘러놓은 다음 불을 놓아 재로 꼰 새끼를 만들었다고 한다. 童子僧의 智慧로 良民을 收奪하는 官吏의 橫暴를 막을 수 있었다는 슬픈 傳說이다. 이 때문에 蔚山바위 아래 靑草湖와 永郞湖 사이의 洞네 이름이 ‘묶을 속(束)’ ‘풀 初(草)’字의 ‘束草’가 됐다고 傳해진다. 束草의 아름다운 潟湖(潟湖)인 永郞湖는 울산바위를 鑑賞할 수 있는 세 番째 포인트다. 永郞湖의 맑은 물 위로 비친 울산바위와 설악의 稜線은 알프스의 風景을 聯想케 한다. 最近엔 永郞湖 湖水 위로 ‘뜬다리’(浮橋)가 놓여 울산바위를 바라볼 수 있는 寫眞撮影 포인트가 되고 있다. 울산바위를 즐기는 네 番째 方法은 彌矢嶺 터널 附近에 있는 高聲 소노펠리체 델피盧 10層에 있는 카페 ‘더 엠브로시아’다. 울산바위 雪景이 눈앞에 펼쳐지는 前面의 大型 琉璃窓 앞 자리를 맡기 위해 午前 8時 카페 門을 열면 오픈런이 벌어진다. 이곳의 시그니처 메뉴는 울산바위 6個의 봉우리 模樣으로 彫刻된 디저트 ‘울산바위 오렌지 판나코타’. 크림, 雪糖, 牛乳를 젤라틴과 섞어 시원하게 먹는 이탈리아 後食인 판나코타와 함께 곁들이는 ‘솔방울 라떼’는 설악의 雰圍氣를 물씬 느끼게 해준다. ●가볼 만한 곳 束草 靑草湖에 있는 七星造船所는 東海岸의 고기잡이배를 만들던 小型 船舶 造船所였다. 요즘처럼 纖維强化플라스틱(FRP)으로 배의 模樣을 찍어내는 것이 아니라, 木手가 直接 손으로 나무를 깎고, 휘고, 다듬어서 배를 製造하는 工場이었다. 1952年 原産造船所로 始作해 2017年까지도 배를 만들고 修理를 했던 곳이다. 入口에는 造船所의 歷史를 볼 수 있는 博物館이 있고, 배를 進水시키는 레일이 놓여 있는 野外 作業場에는 테이블과 椅子가 놓여 있다. 造船所로 쓰이던 天障 높은 컨테이너 作業場은 複層 카페 建物이 됐다. 2層에서 내려다보는 束草港과 靑草湖의 風景은 색다른 맛이다. 커피에 곁들이는 소금버터빵이 人氣 메뉴다. 전승훈 記者 raphy@donga.com}

    • 2023-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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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氣韻生動하는 힘, 설악과 錦江 사이에 솟아오른 壯快한 波濤[전승훈 記者의 아트로드]

    MZ世代 사로잡은 울산바위 江原 束草에서 彌矢嶺 고개를 넘어갈 때 堂堂하게 서 있는 울산바위는 外雪嶽의 象徵이다. 恐龍의 등줄기를 닮은 巨大한 설악의 봉우리들이 어깨를 맞대고 늘어서 있는 가운데 山줄기에서 불끈 솟아 있는 울산바위는 壯快하기 그지없다. 北部 이탈리아 알프스 돌로미티 地域의 雄壯한 바위山脈이 부럽지 않은 韓國의 名所다. 요즘 MZ世代들이 熱狂하는 蔚山바위 寫眞을 찍기 좋은 핫플레이스 4곳을 찾아 江原道로 떠났다. ● 巨大한 波濤가 나를 덮치는 신선대 講院 麟蹄郡에서 束草市를 잇는 彌矢嶺터널을 빠져나가면 오른便으로 蔚山바위(海拔 873m)가 雄壯하게 서 있다. 江原 高城郡 토성면 원암리에 있는 울산바위는 둘레가 4km에 이르고, 6個의 奇巖怪石 봉우리로 이뤄진 돌山이다. 넷플릭스 藝能 ‘피지컬: 100’에서 볼 수 있는 울퉁불퉁한 筋肉質 몸매가 屛風처럼 둘러싸고 있다. 우람한 봉우리 위에 작은 바위들이 華麗하게 繡놓여 있어서 王冠을 聯想케 하기도 한다. 壯快한 男性美뿐 아니라 바위 틈에서 자라는 소나무 等이 어우러져서 藝術的 感動까지 느끼게 하는 自然의 偉大한 作品이다. 울산바위를 鑑賞하는 첫 番째 方法은 울산바위를 直接 올라가 보는 것이다. 束草의 雪嶽山 小公園에서 始作해 神興寺, 흔들바위를 지나 蔚山바위 頂上 展望臺까지 오를 수 있다. 흔들바위부터 蔚山바위까지는 鐵製 階段으로 片道 1km 距離임에도 1時間 程度 걸리는 가파른 오르막길이 펼쳐진다. 울산바위 同封 頂上에서 보면 大淸, 中靑峰과 千佛洞溪谷, 花菜稜線이 펼쳐져 선경이 따로 없다. 울산바위를 오르면 周邊 설악과 東海의 風景을 볼 수 있지만, 막상 蔚山바위 全體를 眺望하긴 힘들다. 울산바위를 鑑賞하기보다는 體驗하는 것에 가까운 코스다. 프랑스 파리 에펠塔을 제대로 보려면 에펠塔에 오르기보다는 맞은便 언덕인 트로카데로 廣場이나 몽파르나스 타워 展望대로 가야 하듯이 말이다. 그래서 요즘 MZ世代들이 울산바위를 背景으로 人生샷을 찍으려 오르는 봉우리는 따로 있다. 바로 金剛山 화암사에서 올라가는 신선대(成人對)다. 지난 週末 束草에 살고 있는 知人과 함께 ‘金剛山 화암사 숲길’을 찾았다. 그는 “화암사에서 올라갈 수 있는 신선대는 海拔 645m로 雪嶽山에서는 낮은 봉우리에 屬하지만 蔚山바위 眺望에는 이만한 곳이 없다”고 귀띔해 주었다. 화암사 入口 茶집 앞에서 登山靴에 아이젠을 신는다. 이곳에서 신선대(1.2km)까지는 천천히 걸어도 1時間이면 充分하지만, 눈이 녹지 않은 山길은 登山 裝備를 제대로 갖춰야 한다. 숲길을 오르다 보니 中間 즈음에 ‘水癌(穗巖)’이라는 바위를 만난다. 바위 模樣이 벼 낟가리를 쌓아놓은 모습이라 ‘쌀바위’라고 불리는 바위다. 바위를 두드리면 쌀을 布施한다는 쌀바위 德分에 이 절의 이름이 ‘화암사(禾巖寺)’가 됐다고 한다. 以後 한참을 오르다 보니 신선대(成人對)에 到着한다. 헬기場을 지나 조금 더 가면 展望이 탁 트이는 널찍한 巖盤이 나타난다. 駱駝바위가 있는 이곳이 울산바위를 眺望하는 最高의 포인트다. 雪嶽山 達磨峯부터 彌矢嶺 옛길, 神仙峯, 東海바다와 束草 市內까지 360度의 展望이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신선대 駱駝바위에서 마주 본 겨울의 울산바위는 山이 아니라 波濤였다. 彌矢嶺에서 올려다봤던 울산바위는 肉重한 屛風이나 城砦 같았는데, 높은 곳에서 마주 보는 울산바위는 氣韻生動(氣韻生動), 살아 움직이는 波濤였다. 설악에서 錦江으로 이어지는 山脈의 물결 위로 갑자기 불쑥 솟아오른 巨大한 波濤. 映畫 ‘인터스텔라’나 ‘퍼펙트 스톰’에서 봤던 波濤이자, 언젠가 颱風이 지나가는 慶北 浦項 앞바다에서 直接 마주쳤던 하늘에서 덮쳐내리는 波濤였다. MZ世代들이 人生샷 名所로 꼽는 곳이니만큼 보기만 해도 아찔한 바위 앞에서 果敢한 포즈로 寫眞을 찍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곳에서 만난 登山客 황현주 氏는 “드라마틱한 바위山을 좋아하는데 그中에서 신선대는 탁 트인 展望과 고즈넉한 雰圍氣가 있어서 자주 오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봄, 여름, 가을, 겨울에 보는 울산바위는 철마다 다르고, 날씨와 바람에 따라서도 느낌이 다르다”며 “아무리 疲困해도 한걸음에 달려오면 疲勞가 풀리고 기운과 힘, 에너지를 얻는 氣分”이라고 말했다. ● 湖水에서, 카페에서 鑑賞하는 蔚山바위 울산바위 오른쪽 彌矢嶺 고개 너머에 솟은 봉우리는 神仙峯이다. 金剛山 1萬2000棒의 南쪽 第1峯인 山이다. 神仙峯에 살고 있는 成人이 襄杆之風(襄杆之風)을 일으킨다고 傳해진다. ‘束草 바람’ ‘彌矢嶺 바람’이라고 불리는 襄杆之風은 봄철 東海岸의 山불을 일으키는 바람으로 有名하다. 울산바위의 틈새 구멍에서 襄杆之風이 불 때마다 바위가 큰 소리로 울어 ‘蔚山’ 바위로 불렸다는 傳說이 있다. 蔚山바위 이름에 對해서는 다른 有名한 스토리도 있다. 造物主가 全國의 有名한 바위를 모아 金剛山을 만들 때 울산바위度 金剛山에 가려고 길을 나섰다. 蔚山을 떠나 雪嶽山을 지날 즈음 1萬2000峯이 모두 채워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대로 눌러앉았다. 그런데 雪嶽山 遊覽을 나섰던 蔚山의 員님이 찾아와 “울산바위는 蔚山 고을의 所有이니, 神興寺에서 울산바위를 차지한 代價로 稅金을 내라”고 했다. 住持스님이 돈이 없어 걱정하자 童子僧이 나섰다. “稅金을 낼 돈이 없으니, 바위를 蔚山으로 옮겨 가세요.” 한 房 맞은 蔚山의 員님은 “바위를 재로 꼰 새끼로 묶어 주면 가져가겠다”고 맞섰다. 童子僧은 束草의 永郞湖와 靑草湖 사이에 자라는 풀로 새끼를 꼬아 울산바위에 둘러놓은 다음 불을 놓아 재로 꼰 새끼를 만들었다고 한다. 童子僧의 智慧로 良民을 收奪하는 官吏의 橫暴를 막을 수 있었다는 슬픈 傳說이다. 이 때문에 蔚山바위 아래 靑草湖와 永郞湖 사이의 洞네 이름이 ‘묶을 속(束)’ ‘풀 初(草)’字의 ‘束草’가 됐다고 傳해진다. 束草의 아름다운 潟湖(潟湖)인 永郞湖는 울산바위를 鑑賞할 수 있는 세 番째 포인트다. 永郞湖의 맑은 물 위로 비친 울산바위와 설악의 稜線은 알프스의 風景을 聯想케 한다. 最近엔 永郞湖 湖水 위로 ‘뜬다리’(浮橋)가 놓여 울산바위를 바라볼 수 있는 寫眞撮影 포인트가 되고 있다. 울산바위를 즐기는 네 番째 方法은 彌矢嶺터널 附近에 있는 高聲 소노펠리체 델피盧 10層에 있는 카페 ‘더 엠브로시아’다. 울산바위 雪景이 눈앞에 펼쳐지는 前面의 大型 琉璃窓 앞 자리를 맡기 위해 午前 8時 카페 門을 열면 오픈런이 벌어진다. 이곳의 시그니처 메뉴는 울산바위 6個의 봉우리 模樣으로 彫刻된 디저트 ‘울산바위 오렌지 판나코타’. 크림, 雪糖, 牛乳를 젤라틴과 섞어 시원하게 먹는 이탈리아 後食인 판나코타와 함께 곁들이는 ‘솔방울 라떼’는 설악의 雰圍氣를 물씬 느끼게 해준다. ● 가볼 만한 곳 束草 靑草湖에 있는 七星造船所는 東海岸의 고기잡이배를 만들던 小型 船舶 造船所였다. 요즘처럼 纖維强化플라스틱(FRP)으로 배의 模樣을 찍어내는 것이 아니라, 木手가 直接 손으로 나무를 깎고, 휘고, 다듬어서 배를 製造하는 工場이었다. 1952年 原産造船所로 始作해 2017年까지도 배를 만들고 修理를 했던 곳이다. 入口에는 造船所의 歷史를 볼 수 있는 博物館이 있고, 배를 進水시키는 레일이 놓여 있는 野外 作業場에는 테이블과 椅子가 놓여 있다. 造船所로 쓰이던 天障 높은 컨테이너 作業場은 複層 카페 建物이 됐다. 2層에서 내려다보는 束草港과 靑草湖의 風景은 색다른 맛이다. 커피에 곁들이는 소금버터빵이 人氣 메뉴다.글·사진 전승훈記者 raphy@donga.com}

    • 2023-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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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밝은 눈 가진 ‘明紬실 北魚’ 膳物하면 厄을 막고 福을 가져다줍니다”

    “明太는 말려서 北魚가 돼도 눈이 宏壯히 맑아요. 그래서 明太에 ‘밝을 名(明)’字가 들어가는지도 모릅니다. 明太에 흰色 明紬실을 감아놓은 形態 自體만으로도 正말 아름다운 디자인이라고 느꼈습니다.” 어릴 적 가게 門 위에 걸려 있던 ‘흰色 明紬실을 감은 明太’를 아트 商品으로 만든 정연중 디자인스튜디오 ‘버금’ 代表(寫眞). 그는 우리 固有의 精神과 멋이 담긴 文化財를 아트 商品으로 開發하는 디자인 專門家다. 그는 국립중앙박물관의 禁制 遺物, 國立故宮博物館의 日月오봉度, 프랑스가 返還한 ‘朝鮮王朝儀軌’ 等을 모티브로 한 藝術商品을 만들어 큰 呼應을 얻은 바 있다. 特히 正祖의 華城行次 行列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길이 5m의 簇子 商品은 500세트가 瞬息間에 完販될 程度로 人氣를 끌었다. 그가 지난해 리움美術館 再開館 特別展, 工藝트렌드페어에서 선보였던 새로운 아트 商品은 바로 길상(吉祥)의 意味를 담은 ‘明紬실 北魚’다. 집이나 事務室을 移徙할 때, 車를 새로 샀을 때 福을 빌고, 厄運을 막는 意味로 걸어두던 民俗이다. 그는 明紬실을 감은 北魚를 直接 디지털로 彫刻해 3次元(3D) 프린터로 만들어 레드, 블루, 골드, 그린, 화이트 等 다채로운 色깔의 商品으로 만들고, 磁石을 붙여 아파트 門이나 冷藏庫에 붙일 수 있도록 했다. ‘굿럭피쉬/明太’라고 이름 붙인 이 아트商品은 지난가을 리움美術館 아트숍과 工藝트렌드페어에서 3000餘 個가 팔렸고, 올 初 카카오메이커스에서 5000個가 팔리는 等 突風을 일으켰다. “日本에 다녀온 사람들은 꼭 손을 흔드는 고양이 人形을 사옵니다. 韓國을 象徵하는 아트商品이 없을까 하다가 厄을 막아주고, 福을 祈願해주는 ‘明紬실이 감긴 明太’를 생각하게 됐어요. 明太 自體를 膳物하긴 어렵잖아요. 예쁜 물고기 模樣의 아트商品으로 만드니 젊은층이 反應한 것 같아요. 집의 인테리어에 맞춰 膳物用으로 다양한 色깔을 購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정 代表는 “高校 數學旅行 때 慶州 佛國寺에서 큰 感銘을 받았는데 記念品이 너무 粗雜해 오히려 좋은 追憶을 망쳤던 記憶이 있다”며 “우리만의 스토리텔링과 哲學, 藝術性이 살아 있는 높은 퀄리티의 아트 商品을 開發해 韓國觀光에 對한 좋은 記憶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전승훈 記者 raphy@donga.com}

    • 2023-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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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개비]‘바람의 언덕’ 선자령

    선자령은 江原道를 嶺東과 嶺西로 나누는 大關嶺 北部에 있는 ‘바람의 언덕’이다. 東海에서 出發해 고개를 넘는 秒速 6.7m 以上의 바람이 年中 내내 분다. 선자령은 海拔 1157m로 높지만 옛 대관령휴게소(840m)에서 出發하면 緩慢해서 散策하듯 올라갈 수 있다. 頂上에 서면 발왕산, 계방산, 五臺山, 黃柄山이 파노라마로 펼쳐지고 東海 바다까지 한눈에 볼 수 있다. 特히 눈 덮인 稜線에 巨大한 風車 50餘 氣가 돌고 있는 모습은 莊嚴하기 이를 데 없다.전승훈 記者 raphy@donga.com}

    • 2023-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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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개비]베네치아 카니발

    이탈리아 베네치아 카니발 期間 中 어린아이들이 假面을 쓰고 산마르코 廣場을 걷고 있다. 12世紀에 始作된 이 카니발은 이탈리아 最大 祝祭다. 每年 四旬展 前날까지 10餘 日 동안 열리는데, 올해는 2月 4日부터 21日까지 열린다. 카니발이 열리면 華麗하게 治粧한 보트들이 運河 위에서 퍼레이드를 벌이고, 華麗한 假裝行列과 불꽃놀이가 펼쳐진다. 코로나로 數年間 마스크를 껴야 했던 市民들이 眞짜 마스크(假面)를 쓰고 祝祭를 즐기는 것이다.전승훈 記者 raphy@donga.com}

    • 2023-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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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눈 내리는 光化門 風景[전승훈의 아트로드]

    동아일보는 光化門 네거리에 자리잡고 있다. 동아일보 編輯局 會議가 열리는 14層 會議室 窓門에서 바라보면 北岳山 아래 靑瓦臺와 景福宮, 光化門이 한 눈에 보인다. 눈이 내리는 날이면 北岳山과 仁王山, 그 뒤로 보이는 北韓産까지 온통 새하얗게 變하고, 光化門 廣場에도 하얀 눈발이 흩날린다. 2000年에 東亞日報 新社屋이 竣工된 以來 光化門 廣場의 風景을 가장 잘 眺望할 수 있는 名所 中의 하나가 바로 이 곳이다. 2002年 韓日월드컵 當時 國家代表 蹴球팀 붉은악마 應援團들은 처음엔 동아일보 舊社屋(現 一民美術館) 屋上에 있는 大型電光板이 마주 보이는 世宗路 건너便 동화면세점 앞에서 應援을 하기 始作했다. 그러던 것이 蹴球 國家代表팀이 4强까지 進出하자 붉은 옷을 입은 應援團의 數字는 漸漸 많아져 光化門부터 市廳앞 廣場까지 連日 가득 메웠던 것이다. 當時 이러한 莊嚴한 光景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숨은 名所가 바로 동아일보 社屋이었다. 光化門부터 市廳앞까지 가득메운 應援團들의 喊聲과 跳躍, 어깨를 걸고 추는 춤들이 地神밟기가 되어 光化門이 깨어났다. 그 때부터 光化門은 往復 20車線의 車道가 아닌 ‘光化門 廣場’으로 다시 태어났다. 월드컵의 喊聲이 道路를 廣場으로 변화시켰던 것이다. 월드컵이 끝난 後 히딩크 監督과 國家代表팀의 카퍼레이드를 벌이는 모습을 14層 會議室 窓門 밖으로 내려다보았던 記憶이 난다. 以後 光化門 廣場은 우리 社會의 가장 力動的인 政治的 空間이 됐다. 2009年 逝去한 盧武鉉 大統領의 路祭가 지나갔고, 狂牛病, 歲月號, 촛불集會, 太極旗 集會 等이 이어졌다. 日帝强占期인 1926年 完工된 區 동아일보 社屋(現 一民美術館)은 日帝 總督府와 軍事獨裁 時節 靑瓦臺를 마주보며 牽制하기 위한 空間에 지어졌다. 實際로 舊 동아일보 編輯局 記者들이 使用하던 男子 化粧室은 總督府(靑瓦臺)를 마주보고 있는 方向으로 小便을 볼 수 있는 構造다. 窓門 밖으로 總督府를 바라보는 狀態에서 小便을 보는 시원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는 傳說이 내려져왔다. 요즘 동아일보 社屋에서 光化門과 靑瓦臺를 바라보는 風景은 사뭇 달라졌다. 大統領 執務室이 용산으로 移轉하고, 光化門 廣場이 大幅 擴張돼 公園으로 다시 태어났기 때문이다. 靑瓦臺는 이제 權力의 空間이 아니라 市民들이 걸어다니는 文化와 散策의 한 軸으로 다가오기 始作했다. 仁王山-北岳山-靑瓦臺-景福宮-光化門-松峴洞으로 이어지는 都心의 散策 코스는 無窮無盡한 歷史와 文化가 숨쉬고 있는 踏査길이자 最高의 핫 플레이스다. 光化門은 그 自體가 異質的 時間의 複合體다. 過去와 現在, 榮光과 汚辱, 支配와 被支配, 韓國과 外國, 植民과 民族自主의 痕跡이 共存하는 이 거리의 特徵은 획일화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光化門의 大路邊은 파리의 샹젤리제를 聯想시키는 말쑥한 近代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러나 臺로 안쪽으로 열 발짝만 들어가도 실타래처럼 얽힌 골목들을 만날 수 있다. 골목마다 다른 履歷과 단골을 가진 밥집, 술집, 가게…. 光化門의 골목은 이 空間의 自由와 個性을 擔保해 왔다. 外國의 舊都心에 가면 廣場 周邊에 수많은 歷史 遺跡과 建物, 市場이 서 있는 곳이 많다. 서울의 境遇 自動車에 내주었던 都心이 漸次 廣場으로 回復하고, 散策路로 連結되고 있다. 올해 末 光化門 廣場 北쪽 月臺까지 復元되면, 光化門과 景福宮이 얼마나 더 가까워질지 期待가 된다.전승훈 記者 raphy@donga.com}

    • 2023-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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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겨울 나무가 絶對孤獨에서 피어낸 얼음꽃 [전승훈의 아트로드]

    눈 덮인 겨울숲으로 가자. 시베리아에서 불어오는 송곳같은 칼바람에도 꼿꼿이 서서 버텨내는 겨울나무에는 눈꽃, 얼음꽃, 서리꽃이 피어난다. 상고대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하늘은 바다처럼 푸르다. 나뭇가지에 맺힌 얼음꽃은 햇빛에 반짝반짝 빛나는 크리스탈 寶石이다. 江原道의 높은 山에서 ‘살아천년, 粥御天年’을 산다는 注目(朱木)과 하얀 눈밭에서 눈처럼 시린 銀世界를 펼쳐내는 자작나무까지. 겨울山을 지키는 나무에게서 眞正한 孤獨의 아름다움을 느껴보자. 발왕산 千年注目숲길高山地帶의 稜線에는 다른 큰 나무를 볼 수 없다. 붉은色 줄기에 푸른 잎을 가진 注目만 드문드문 서 있을 뿐이다. 注目은 우리나라에서 太白山, 智異山, 雪嶽山, 漢拏山 等 海拔 1000m 以上의 高山地帶에 自生한다. 韓民族의 끈氣와 忍耐를 象徵하는 注目은 오래 살고 죽어도 잘 썩지 않는다. 말그대로 ‘살아 千年, 죽어 千年’을 사는 나무다. 注目은 왜 그렇게 높고 추운 山에서 더 잘 살아가는 것일까. 注目은 1年에 不過 몇cm 밖에 자라지 않아 成長이 느린 나무로 有名하다. 쑥쑥 자라는 나무와의 競爭에서 到底히 이길 수가 없다. 그늘에서 햇볕을 받지 못하면 죽을 수 밖에 없는 運命이다. 注目의 選擇은 果敢하게 山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따뜻한 햇볕이 있지만 競爭이 熾烈한 레드오션에서 벗어나, 酷毒한 環境에서 自發的 孤立과 無限한 忍耐를 選擇한 것이다. 注目은 海拔 1000m가 넘는 高地帶에서 强추위와 칼바람을 견뎌내며 千年을 살아간다. 푸른 하늘이 가까운 발왕산 頂上이, 注目에게는 바로 블루오션이다. 講院 용평에 있는 발왕산(1458m)은 우리나라에서 12番째로 높은 山이다. 이곳엔 千年注目숲길이 있다. 50周年을 맞은 용평리조트가 새롭게 이름을 바꾼 발왕산 모나파크(Monapa가)가 지난해 만든 숲길이다. 발왕산 頂上部에 잘 保全된 注目 群落地를 發見한 모나파크는 數年間 山林廳, 平昌郡과 協議해 注目을 한 그루도 베어내지 않고 生態를 살린 無障礙 데크길(3.2km)을 造成했다. 케이블카를 타면 15分 만에 용평스키장을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발왕산 頂上에 있는 드래곤캐슬에 到着한다. 모나파크 스카이워크에 서면 선자령, 안반데기, 黃柄山으로 이어지는 山勢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밖으로 나오면 발왕산 頂上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다. 눈꽃, 얼음꽃 妖精이 살고 있는 상고대가 핀 나무들을 지나면 千年注目숲길이 나타난다. 오랜 歲月 欲心을 버리고 內面을 비워서 그럴까. 千年을 넘게 산 注目들은 속이 텅 비었다. 參禪의 나무, 苦惱의 注目, 王勃나무 注目…. 酷毒한 環境 속에서 生命의 싹을 띄워온 나무들에게는 스토리텔링이 담긴 이름이 붙어 있다. ‘苦海의 注目’은 나무 안에 한 사람이 들어갈 程度의 텅빈 空間이 있다. 나무에 감싸여 穩全히 혼자 있을 수 있는 곳에서 가만히 눈을 감아본다. 고개를 들어 보니 컴컴한 나무 속 작은 구멍으로 한줄기 빛이 쏟아진다. 告解와 冥想 끝에 얻을 수 있는 救援의 빛! 한 그루의 나무도 베지 않고 造成했다는 千年注目숲길은 걷다보면 데크길 慰勞 드리워진 나무들 때문에 허리를 숙이고 지나가야 한다. 누구나 自然 앞에 몸을 낮춰야 하는 ‘謙遜의 나무’다. 오래된 注目의 텅빈 몸통에는 다른 나무의 生命이 싹트는 境遇도 많다. 成人 세 名이 안아야 감쌀 수 있는 둘레 4.5m의 ‘어머니王注目’의 몸통 한 가운데에는 마가목의 가지가 삐쭉하게 뻗어나와 있다. 마치 나무가 出産하고 있는 場面처럼 보인다. 어머니王注目은 작은 마가목을 품에 안고 키운다. 隣近에는 든든한 어깨로 발왕산의 버팀木이 되고 있는 ‘아버지王注目’도 있다. 智慧를 象徵하는 王수리부엉이가 이 나무에서 家族과 함께 살고 있다고 하니 더욱 신령스럽게 보인다. 발왕산 千年注目숲길은 發往수(發王水) 가든에서 마무리된다. 발왕산의 純白의 눈이 스며든 맑은 石間水가 每日 410톤이나 쏟아지는 곳이다. 天然미네랄을 含有한 發往數는 톡 쏘는 맛이나 쇠맛 없이 깔끔하고 시원한 물맛을 자랑한다. 모나파크에서는 발왕산 正氣가 담긴 이 물로 발왕산 막걸리와 김치를 만든다. 발왕산에는 또다른 名品 겨울숲이 있다. 발왕산 애니포레에 있는 獨逸 가문비나무 숲이다. 애니포레는 鬱陵島에서 山나물이나 고로쇠물을 採取할 때 쓰는 작고 느린 모노레일을 타고 올라간다. 이 곳은 1960年代 火田民들이 移住한 터에 審은 獨逸가문비나무가 國內 最大 群落地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겨울에도 푸르름을 잃지 않는 쭉쭉 뻗은 獨逸가문비나무 숲에서는 피톤치드가 뿜어져 나온다. 발왕산의 基(氣)를 느끼며 걷다보면 呼吸이 맑아지고 머리도 爽快해진다. 날이 풀리면 獨逸가문비나무 숲 속에서는 요가 클래스도 열린다. 이 곳에는 알파카 農場도 있다. 南美가 原産地인 알파카는 푸들이나 비숑같은 伴侶犬처럼 몽글몽글한 털이 있어 귀여움 그自體다. 속삭이는 자작나무 江原道 麟蹄郡 원대리 자작나무숲에 들어서면 마치 廣闊한 시베리아 雪原에 온 듯한 異國的 風景에 가슴이 설렌다. 1958年 노벨文學賞 受賞作이었던 ‘닥터 지바고’ 映畫에서 나오던 라라의 테마 音樂이 들릴 듯하다. 戀人인 라라가 자작나무 숲 사이로 썰매를 타고 떠나가던 모습을 바라보던 지바고의 눈빛도 떠오른다. 北유럽과 시베리아, 우리나라 咸鏡道, 日本 홋카이도 等 추운 地方에서 自生하는 자작나무는 뽀얀 樹皮가 아름다운 樹種이다. 원대리 자작나무숲은 麟蹄國有林管理所가 山불 擴散을 막기 위해 1974~95年까지 41萬 坪에 69萬 그루를 심어 人工的으로 造成한 것이다. 자작나무숲에 가려면 駐車場에서 내려 藥 3,5km 賃搗를 걸어야 한다. 눈이 와 있는 요즘에는 登山靴와 아이젠이 必須다. 入口에서 1時間 쯤 걸으니 자작나무 숲이 나타났다. 눈부신 樹皮가 뿜어내는 은(銀)세계. 하얀 눈밭에 하늘을 찌를 듯 서 있는 자작나무 群落의 첫 느낌은 포근함이었다. 숨어들기 좋은 숲이다. 자작나무의 樹皮에는 일정한 間隔으로 무늬들이 있다. 山模樣, 호미模樣, 달팽이 模樣…. 처음엔 傷處처럼 보였는데 나무의 입처럼 느껴졌다. 바람이 불자 자작나무 숲에 있는 數百그루의 나무들이 입을 벌려 나지막히 속삭였다. 자작나무 숲에서 따뜻함과 포근함을 느꼈던 理由는 이 때문이었다. 자작나무는 零下 20~30度의 酷寒을 그리 두꺼워 보이지 않는 새하얀 나무 껍질 하나로 버틴다. 자작나무의 껍질을 손으로 만져보니 意外로 부드러웠다. 하얀 가루가 묻어날 것 같은데, 아무 것도 묻어나지 않았다. 자작나무는 保溫을 위해 종이처럼 얇은 껍질을 겹겹이 입고 있다. 겨울 登山을 할 때 두꺼운 옷 한 벌보다는 얇은 옷 여러벌을 겹쳐 입는 것이 좋다는 法을 자작나무도 아는 것 같다. 자작나무는 얇은 껍질 사이에 豐富한 기름成分까지 넣어 나무의 根源인 부름켜(形成層)가 얼지 않도록 한다. 두께 0.1~0.2mm 남짓한 흰 껍질은 매끄럽고 잘 벗겨지므로 종이를 代身하여 佛經을 새기거나 그림을 그리는 데 쓰였다. 慶州 天馬塚에서 나온 天馬圖를 비롯해 서조도(瑞鳥圖) 等은 자작나무 種類의 껍질에 그린 그림이다. 그래서일까. 麟蹄 자작나무 숲에는 訪問客들이 자작나무 껍질에 落書를 하거나, 껍질을 벗겨 毁損된 나무가 있었고, 이를 禁止하는 案內文이 적혀 있었다. 자작나무란 이름은 爵位를 받은 貴族같은 風貌에 붙여진 이름인 줄 알았는데, 탈 때 ‘者자작자작’하는 소리가 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자작나무 껍질은 기름氣가 많아 불을 붙이면 잘 붙고 오래가서 부엌 한 구석에 불쏘시개로 놓여 있던 나무였다. 結婚式 等 경사스러운 날에 불을 켜는 ‘華燭을 밝힌다’는 表現 또한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初에서 온 말이라고 한다. ‘山골집은 大들보도 기둥도 門살도 자작나무다/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山도 자작나무다/그 맛있는 메밀국수를 삶는 長斫도 자작나무다/그리고 甘露(甘露) 같이 단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산 너머는 平安道 땅도 뵈인다는 이 산골은 온통 자작나무다’ 時人 白石(1912~1995)李 1938年 咸鏡南道 함주에서 하얀 자작나무가 있는 風景을 담은 詩 ‘白化(白樺)’를 썼다. ‘온통 자작나무다’라는 表現이 무슨 뜻인지는 인제 원대리 자작나무숲에 가보면 알 수 있다. 전승훈記者 raphy@donga.com}

    • 2023-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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