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政治 琉璃天障 깬 金相姬 國會副議長|여성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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政治 琉璃天障 깬 金相姬 國會副議長

EDITOR_FEATURE 강현숙 記者 EDITOR_FASHION 惡寒別

2022. 01. 04

우리나라 最初의 女性 國會副議長인 김상희 議員이 女性東亞와 처음으로 畫報 인터뷰를 進行했다. 女性의 權益 增進에 앞장서온 市民運動家에서 政治人이 되기까지의 人生 스토리와, 孫子 보는 幸福에 푹 빠진 小小한 日常까지 털어놓았다.

2020年 6月, 憲政 73年 만에 21代 國會에서 첫 女性 國會副議長이 誕生했다. 金相姬(68) 國會副議長(더불어民主黨, 京畿 富川市病)李 그 主人公으로, 유난히 女性에게 門턱이 높은 우리나라 政治 領域에서 公告한 琉璃天障 하나를 깼다는 評價를 받았다. 金 國會副議長은 4線을 이룬 議員으로, 지난 2007年 大統合民主新黨 最高委員으로 政界에 入門한 뒤 18代 總選에서 比例代表로 現實 政治에 발을 들였다. 以後 19代 總選에서 保守의 牙城이었던 京畿 부천시 소사구 選擧區에 出馬해 ‘素砂宅’이라 불리며 再選에 成功했고, 20代·21代 總選에서도 같은 地域에 出馬해 내리 當選됐다. 2012~14年 國會 女性家族委員會 委員長을 맡아 女性의 人權 增進과 社會的 參與 擴大를 위한 法과 制度 改善에 注力했고, 2017年에는 低出産高齡社會委員會 副委員長에 任命돼 低出産 解決士로 다양한 行步를 보였다.

事實 金 國會副議長은 大韓民國 女性運動界에서 立志傳的인 人物이다. 梨花女大 制約學科 出身의 그는 朴正熙 維新 獨裁 時節 學生運動을 始作으로 30餘 年間 民主化運動과 女性運動, 環境運動에 邁進해왔다. 우리나라 最初의 進步的 女性 大衆運動 組織인 女性評迂廻를 始作으로 韓國女性民友會 常任代表, 女性環境連帶 共同代表를 맡아 團體를 이끌었고 民主化와 女性 人權, 兩性平等, 環境運動을 위한 여러 活動에 獻身해왔다. 2005年에는 性暴力特別法 制定과 戶主制 廢止 等 女性 關聯法 制定 및 改正에 寄與한 功勞를 인정받아 國民勳章 동백장을 받았다.

兩性平等 社會를 위해 積極的인 목소리를 내온 金 國會副議長을 2021年 12月 中旬 서울 서대문구 忠正路驛 자리한 東亞日報 出版局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그는 첫 畫報 撮影임에도 堂堂하고 自信感 넘치는 모습으로 積極的으로 포즈를 取하며 雰圍氣를 壓倒했다. 인터뷰 中 두 돌을 앞둔 孫子 이야기를 나눌 때는 따뜻하고 疏脫한 素砂宅 그 自體였다.

만나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畫報 인터뷰는 처음이신 걸로 알고 있어요.

政治人들의 인터뷰는 主로 말로 주고받는 形態이고 딱딱한 政治나 政策에 關한 內容들이 많기 마련입니다. 畫報 인터뷰는 아주 새롭기도 하고 익숙한 인터뷰 形式이 아니라 조금 語塞하기도 하네요. 政治人도 寫眞이 많이 찍히는 職業이긴 하지만 寫眞을 위해 포즈를 取하는 게 자주 있는 일은 아니라 조금 걱정되기도 합니다. 熱心히 해보겠습니다.

코로나19로 國民 모두가 힘든 時期입니다. 國會副議長님의 近況은 어떠신가요.

2021年 12月 9日에 定期國會가 마무리됐습니다. 國政監査와 2022年 豫算案 審議, 民生 法案 審議를 위해 저를 包含한 많은 國會議員들이 1百 日 동안 애를 썼지요. 그 結果 6百7兆원의 最大 豫算이 編成되었고, 定期國會 期間 동안 3百40餘 件의 案件을 本會議에서 處理했습니다. 長期化된 코로나19 팬데믹으로 國民 모두가 힘들어하시는 만큼, 國家가 제대로 役割을 할 수 있는 豫算과 立法을 이루기 위해 많은 努力을 기울였어요.



2020年 6月 우리나라 憲政 史上 最初의 女性 國會副議長으로 選出되셨어요. 感懷가 남다르실 듯합니다.

憲政 史上 最初의 女性 國會副議長으로 進出한 것은 個人的으로 큰 榮光이에요. 政治가 ‘男性과 女性이 함께 하는 것’임을 보여줄 수 있게 됐고, 兩性平等 社會로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象徵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同時에 이제야 女性 國會副議長이 나온 것은 우리 社會의 發展 經路에 비추어 너무 늦은 것 같습니다. 政治的·歷史的으로는 有權者의 折半이 女性임에도 憲政 73年 동안 國會議長團에 女性 代表者가 없었다는 點은 宏壯히 非正常的이었던 것이지요. 그런 面에서 女性으로서 代表性과 責任感을 갖고 지난 1年 半 동안 國會副議長의 職分을 遂行하기 위해 最善을 다해왔어요.

‘다 함께 잘사는 정의로운 福祉社會’를 위한 努力들

國會副議長으로 어떤 議政 活動에 集中하셨나요. ‘性平等 國會 實現을 위한 實踐 決議案’을 提出하신 點도 印象 깊었습니다.

國會副議長으로 出馬하면서 約束한 ‘性平等 國會’를 만들기 위한 課題들을 차근차근 實行했어요. 朴炳錫 國會議長님께 ‘性平等國會諮問委’ 新設을 提案 드렸고, 諮問委가 7個月間 性平等 國會로 가기 위한 改革 課題들을 추렸어요. 이 課題들을 決意한 形態로 2021年 10月 代表 發議했지요. 1百餘 名의 與野 議員님들이 共同 發意해주셨습니다. 關聯 法案도 提出되어 있는 만큼 남은 任期 동안 通過를 위해 最善을 다할 計劃입니다. 국회부의장으로서는 코로나19 對應에 國會가 제 役割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하는 國會를 만들기 위해 努力했어요. 또 韓國版 ‘클림非 報告書(英國 政府가 虐待로 死亡한 8歲 빅토리아 클림費에 對해 2年間 調査해 그 結果를 發表한 報告書로, 兒童保護 프로그램의 바이블로 認識됨)’를 導入해 兒童虐待 事件에 對한 徹底한 調査와 豫防 對策을 마련할 수 있도록 하는 ‘兒童虐待防止法 改正案’도 代表 發議했고, 女性 科學技術人 育成을 위한 政策들도 提案했습니다.

梨大 制約學科를 卒業하신 藥師 出身으로 30餘 年間 우리 社會의 民主化와 兩性 平等, 環境保護 等에 힘쓰셨어요. 藥師라는 保障된 進路 代身 市民運動家의 길로 접어든 契機는 무엇인가요.

大學을 다니며 學生運動에 參與하게 됐고, 卒業 後 藥師가 돼서도 女性運動·民主化運動을 竝行했어요. 當時에는 專業 市民運動家라는 槪念이 없었기에 한동안 藥師 일을 함께 하다 專業 市民運動家의 길로 들어섰지요. 제가 처음 市民運動을 始作한 1970年代는 權威主義的·家父長的인 社會 雰圍氣로 女性에 對한 前近代的 差別과 暴力이 蔓延했던 時期예요. 差別과 暴力에 對한 社會的 認識조차 稀薄했지요. 그런 狀況을 조금이라도 改善해보고자 始作한 女性運動이 市民運動家의 삶을 살게 된 契機입니다. 제가 이런 社會的 認識을 가질 수 있었던 背景에는 正義感 剛하고 活動的이셨던 어머니의 影響과 가르침이 자리해요. 어린 時節부터 어머니는 女性이 獨立的인 經濟力을 가져야 한다고 强調하셨고, 朴正熙 獨裁 時節에도 野黨 政治人을 後援하시는 等 所謂 말해 깨어 있는 분이셨어요. 제가 女性運動, 市民團體 活動, 民主化運動을 하는 過程에서도 늘 支持해주셨고요.

當時 社會 雰圍氣에서 女性의 經濟的 獨立에 對한 槪念을 일깨워주셨다니, 어머니가 참 대단하신 분 같아요.

1929年生이셨는데 그 年歲에 드물게 宏壯히 進取的이셨어요. 저희 집이 2男 3女인데, 딸들에게 “女子는 經濟力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結婚해서도 堂堂하게 獨立的으로 살 수 있다”고 말씀하시며 職業을 갖길 勸하셨어요. 저는 藥大, 언니는 看護隊, 女同生은 法大에 進學했지요. DNA의 힘은 無視 못 하는지 제가 性格도 그렇고 어머니와 참 많이 닮았어요(웃음). 2017年에 別世하셨는데 只今도 무척 그립습니다.

市民運動家로 活動하면서 다양한 社會的 이슈를 主導하셨는데 特히 記憶에 남는 活動은요.

30年間 女性에 對한 差別과 暴力을 解消하기 위한 여러 政策的·立法的 要求와 提案을 했어요. 現在의 ‘性暴力特別法’ ‘男女雇傭平等法’ ‘性賣買防止法’ ‘兩性平等基本法’ 等의 法律들이 制定되는 過程에 女性運動 勢力이 主導的인 影響을 미쳤지요. 特히 記憶에 남는 건 두 가지예요. 먼저 性平等과 民主的 家族法 具現을 위해 家族法 改正 運動을 벌여 1990年과 2002年 두 次例 改正을, 그 延長線上에서 2005年 戶主制 廢止를 이뤄냈어요. 두 番째로는 2004年 總選을 앞두고 比例代表 公薦에 女性을 義務的으로 50% 割當하는 選擧法 改正 過程을 主導한 거예요. 女性의 政治 參與 擴大와 女性 政治進出의 큰 물꼬가 터진 契機였기에 記憶에 많이 남습니다.

政治權에 뛰어드新 스토리가 궁금합니다.

1980年代 末부터 2000年代 初盤까지만 해도 政治權보다는 市民社會가 社會 改革 立法을 推動하는 中心 勢力이었어요. 2000年代 以後 우리의 民主主義도 成熟해지고 制度 政治權이 하나하나 제 役割을 하게 됐지요. 이렇듯 政治權이 제 役割을 찾아가는 時點에서는 政治가 國民들의 목소리에 제대로 應答할 수 있도록 하는 게 重要하다고 생각했어요. 2007年 參與政府 末期에 汎進步 진영이 深刻한 危機에 逢着해 있었고, 與黨을 中心으로 政治 改革과 國民 統合에 對한 要求도 提起됐습니다. 저는 當時의 政治的 狀況이 國民들이 鬪爭으로 일궈온 民主主義의 歷史가 後退하고 民生이 힘들어질 수 있는 危機라고 判斷했어요. 뜻을 함께하는 市民社會 出身의 여러 분들과 政治를 始作하기로 決心했고, 열린우리당과 統合 過程에 參與하며 政治權에 入門하게 됐어요.

19代부터 21代 總選에서 京畿 富川 素砂區에 出馬해 내리 當選되셨고, 4選 議員이십니다. 4線까지 이어나갈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일까요.

2012年 總選에서 제가 地域區 議員으로 當選되기 前까지 우리 地域은 16年間 保守의 牙城이었어요. 當選되고 한참 後에 地域 黨員들과 住民들께서 그동안 ‘새로움에 對한 목마름’이 있었다고 말씀해주셨어요. 30年 넘는 市民社會 活動으로 ‘變化와 改革’을 志向해온 것이 地域 住民들에게 새로움으로 評價받았다고 생각해요. 第 議政 活動의 指向點은 正義와 平等, 그리고 福祉입니다. 제가 꿈꾸는 나라는 ‘다 함께 잘사는 정의로운 福祉社會’라고 할 수 있지요. 恒常 이 基準에 符合하는지 諮問하며 議政 活動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地域區民들에게 眞心으로 다가가려고 努力했어요. 처음 地域區 活動을 始作하고 1年餘 동안 住民들을 만나기 위해 신발 밑창이 떨어질 만큼 坊坊曲曲 쉬지 않고 다녔습니다. 그때 겪었던 어려움을 只今도 記憶하며 眞心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어요.

地域 住民들과의 活潑한 疏通으로 ‘素砂宅’이라는 愛稱도 갖고 계세요. 國民들을 위한 政策을 펼치기 위해서는 이처럼 疏通이 必須인데, 特別히 힘쓰고 있는 部分은요.

素砂宅이란 別名은 2011年 傳統市場 商人께서 붙여주신 거예요. 人事를 드리기 위해 市場에 자주 찾아뵀더니 “그만하면 素砂宅 다 되었다”고 稱讚해주신 것이, 제게는 最高의 愛稱이 된 것이죠. 疏通은 잘 듣는 것인데, 좋은 소리만 들으려고 하는 건 疏通이라고 보기 어려워요. 不滿의 목소리도 잘 들어야 하지요. 이 過程에서 새로운 아이디어와 企劃도 얻을 수 있고요. 또 다양한 利害關係者들의 목소리, 現場의 목소리를 꼭 들어야 해요. 그래서 저는 討論會와 懇談會를 疏忽히 하지 않겠다는 信念, 다양한 목소리 가운데서 中心을 잘 잡겠다는 覺悟로 議政 活動을 하고 있어요. 茶筅 議員임에도 討論會·懇談會를 많이 한다는 評價를 들으면 마치 勳章을 받는 氣分입니다.

國會에서 女性家族委員會 委員長으로 議政 活動을 하셨고, 2017年에는 低出産高齡社會委員會 副委員長을 맡아 低出産 政策을 다루셨습니다. 政治權에서 많은 低出産 對策이 나오고 있지만 出産率은 繼續 떨어지고 있습니다.

低出産高齡社會委員會 副委員長으로 在職할 때는 低出産 政策을 對하는 國家 次元의 패러다임을 完全히 轉換하고자 努力했어요. 過去 政府에서 出産率과 出生兒 數 提高 目標를 세우고 이를 達成하기 위한 國家主義的 低出産 政策을 推進해왔다면, 저희는 個人과 家族의 選擇을 尊重해 全 世代의 삶의 質 向上을 目標로 하는 ‘사람 中心’ 政策으로 轉換했지요. 이런 基調 아래 男女雇用平等法과 ‘雇傭保險法’을 改正해 育兒期 勤勞時間 短縮 活性化와 配偶者 留級 出産 休暇 擴大, 男性 勤勞者의 育兒 參與 促進, 家族돌봄휴가제도 導入 等을 代表 發議하고 立法했어요. 돌봄 서비스의 大幅 擴大와 難妊 夫婦에 對한 積極的인 支援 政策도 成果가 있었고요. 하지만 如前히 가야 할 길은 멀고 不足한 點도 많습니다. 低出産 問題에 關해서는 일하면서 아이를 잘 키울 수 있도록 國家가 全方位的이고 촘촘한 支援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果敢한 政策的 決斷이 없으면 우리 社會도 持續 可能하지 않다는 危機意識으로 低出産 問題를 解消해나가야 하지 않을까요.

最近 아이를 國會에 同伴하며 ‘國會 會議場 아이同伴法’을 發議한 龍慧仁 基本所得當 議員 等 젊은 女性 國會議員들의 行步도 눈길이 갑니다. 後輩 女性 國會議員들에게 傳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더 큰 自負心과 召命 意識으로 議政 活動에 臨하면 좋겠습니다. 17代 國會부터 比例代表에 女性 동수 公薦이 이루어짐에 따라 女性의 政治 進出이 擴大됐어요. 特히나 17代 國會 以後 議政 活動의 質이나 政治 水準이 빠르게 높아졌는데, 女性 議員들의 役割이 매우 컸음을 否認할 수 없어요. 더 잘할 수 있다는 自負心을 갖고 일했으면 합니다. 꼭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女性 議員들은 女性의 代表性을 保障하기 위한 積極的인 措置에 따라 國會로 보내진 사람이라는 點이에요. 特別하게 性平等을 위한 時代的 召命으로 뽑힌 사람들인 만큼, 그 召命을 잊지 않고 議政 活動에 臨해야 한다는 點을 强調하고 싶습니다.

人生의 엔도르핀 孫子 보며 좋은 나라 苦悶해

人生의 座右銘이나, 큰 影響을 미친 롤 모델이 있으신가요.

金剛經에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應當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어라)’이라는 말이 있어요. 이 말을 마음속에 새기며, 最善을 다하되 거기에 執着하거나 머무르지 않고 淡淡하게 갈 길을 가려고 努力하고 있습니다. 제 人生에 큰 影響을 미친 人物은 2020年 作故하신 이이효재 이화여대 名譽敎授님이세요. 우리나라 女性學科 女性運動의 길을 開拓한 先驅者이자 恩師님이셨어요. 分斷과 獨裁로 어렵던 時節, 弱者들에 對한 持續的 關心과 愛情을 갖도록 日깨줘주셨던 스승이자, 제가 어떤 召命 意識으로 살아야 할지를 끊임없이 생각하게 해주신 분입니다.

男便인 이목훈 前 호서대 敎授께서 2016年 總選 當時 支持를 呼訴하며 作成하셨던 ‘素砂區民에게 드리는 便紙’가 印象 깊었습니다. 市民運動에 이어 政治까지 쉽지 않은 길을 걷고 계신데 男便분께서 어떤 힘이 되고 있는지요.

男便이 多感한 性格은 아니지만 저희 夫婦 사이에는 信賴가 있습니다. 4年 程度 戀愛 期間을 거쳐 1980年에 結婚했는데 結婚式에서도 新郞 新婦 同時入場을 했어요. 事實 結婚式場에서 아버지가 딸을 데리고 들어가 新郞에게 引繼하는 건 마치 保護者 바통터치처럼 보이는 意識 中 하나였지요. 當時 生活 속 性平等 實現의 一環으로 저뿐 아니라 親舊들 亦是 結婚式에서 同時入場을 했습니다. 男便도 제 뜻을 尊重해줬고요.

요즘 ‘사람’ 김상희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關心거리는요.

곧 두 돌이 되는 孫子를 보는 게 가장 마음 설레는 일이에요(웃음). 워낙 아이를 좋아해서 아들을 키울 때도 어쩔 줄 몰라 했는데, 손주는 너무 예쁘더라고요. 日曜日마다 아들 집에 가서 2時間 程度 있다 오는데 이 時間이 最高의 幸福입니다. 男便 亦是 孫子를 너무너무 좋아하고요. 손주를 보면서 아이들에게 조금 더 좋은 나라, 持續 可能한 社會를 물려주기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苦悶도 많이 하고 있어요.

健康管理는 어떻게 하세요.

國會에 헬스場이 있어서 아침에 가면 運動을 해요. 國會議員들은 아침에 會議나 朝餐이 많아 일찍 나오는 일이 잦거든요. 나이가 들수록 規則的으로 運動 루틴을 만들어놓지 않으면 健康管理가 안 되는 것 같아 틈틈이 運動하고 있어요.

누구보다 熾烈하게 살아오신 워킹맘 先輩로서 이 時代의 워킹맘들에게 傳하고 싶은 助言은요.

제가 워킹맘으로 살았던 時代와 現在 워킹맘들은 社會的 與件이 完全히 다르므로 助言을 하기가 조심스러운 게 事實이에요. 女性들이 일하면서 아이를 키우고, 家庭을 維持하고, 自己啓發을 하고 살기 어려운 狀況이지요. 그러한 어려움이 低出産이나 經歷 斷絶 女性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助言보다는 應援을 해주고 싶어요. 제 個人的으로는 우리나라 모든 女性들이 抛棄하지 않고, 自身을 尊重하고 믿으며 끊임없이 나아가길 바라요. 女性들이 當面한 問題에 對해 우리 社會와 國家가 認識하고 있고, 이를 改善하기 위해 끊임없이 努力하고 있다는 點을 記憶하며 大韓民國이 이를 解決해나갈 거라는 希望과 믿음도 함께 가지면 좋겠습니다.

國會副議長님께 남은 任期 동안 어떤 모습을 期待할 수 있을까요.

政治는 社會를 정의롭게 만들고 弱者를 保護하며 우리 社會를 발전시키는데 가장 重要하고 힘 있는 道具입니다. 그 道具가 허투루 쓰이지 않도록 늘 正直하게 議政 活動을 하겠습니다. 特히 國會副議長 任期가 5個月假量 남았는데, 마지막까지 最善을 다하려고 합니다. “일하는 國會, 性平等韓 國會, 協治의 國會를 만들겠다”는 約束을 드렸는데 그동안의 成果를 點檢해보고 남은 任期 內에 할 수 있는 일들을 끝까지 잘해내고 싶습니다. “女性이 國會副議長이 되니 政治와 國會가 이렇게 달라졌구나”라는 評價를 받을 수 있도록 남은 任期를 잘 마무리하겠습니다.

寫眞 金度均 東亞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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