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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다 내 아들, 李韓烈.” ‘이한열 어머니’ 배은심 親筆 메모|여성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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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bituary

“보고 싶다 내 아들, 李韓烈.” ‘이한열 어머니’ 배은심 親筆 메모

글 이경란 이한열記念事業會 理事

2022. 01. 21

1月 9日 이한열 烈士 어머니 배은심 先生이 別世했다. 享年 83歲. 1987年 이한열의 목숨을 앗아간 示威 現場에 함께 있었고, 이한열記念事業會 理事로 活動하며 배은심 先生의 삶을 가까이서 지켜본 이경란 理事가 追慕의 글을 보내왔다.

李韓烈은 1987年 6月 9日 연세대 正門 앞에서 警察이 쏜 催淚彈에 맞아 死境을 헤맸다. 그가 催淚彈에 맞아 危篤하다는 事實이 알려지면서 많은 市民이 거리로 나와 “護憲撤廢, 獨裁打倒!”를 외쳤다. 피 흘리는 이한열의 寫眞이 新聞에 실리면서 抗爭은 더욱 거세졌다. 全斗煥 政權은 結局 20日 만에 “大統領을 間選制로 뽑는 旣存 憲法을 維持하겠다”(호헌·護憲)는 當初 立場에서 물러나 直選制를 받아들이는 6·29宣言을 하게 된다. 病床에 누워 ‘6月抗爭’을 陣頭指揮하는 듯했던 李韓烈은 直選制 改憲이 收容된 後인 7月 5日 끝내 숨을 거뒀다. 當時 연세대 經營學科 2學年이던 그의 나이는 21歲였다.

배은심 어머니는 1939年 全南 順天에서 태어났다. 이병섭 님과 婚姻해 2男 3女를 둔 多福한 家庭의 어머니였다. 위로 딸 셋을 낳고 넷째로 큰아들 寒熱을 얻었다. 子女 모두 健康하고 착하고 工夫도 잘해 부러울 것 하나 없었다. 特히 李韓烈은 키도 크고 人物이 좋아 바라만 봐도 흐뭇한 아들이었다.

아들의 죽음으로 바뀐 어머니의 삶

1987년 7월 9일 오전 연세대에서 열린 이한열 열사 영결식장에서 눈물을 흘리는 유족 및 지인들. 오른쪽부터 아버지 이병섭 씨, 장숙희 연세대 총학생회 종교부장, 어머니 배은심 씨.

1987年 7月 9日 午前 연세대에서 열린 이한열 烈士 永訣式場에서 눈물을 흘리는 遺族 및 知人들. 오른쪽부터 아버지 이병섭 氏, 장숙희 延世大 總學生會 宗敎部長, 어머니 배은심 氏.

1987年 6月 9日 이한열이 催淚彈에 맞아 쓰러지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그해 7月 9日 연세대 校庭에서 열린 ‘愛國學生 故 이한열 烈士 永訣式’에서 어머니는 痛哭하며 이렇게 외쳤다.

“우리 한열이는 이 世上에 없다. 우리 한열이는 없어…. 全斗煥·盧泰愚 殺人魔! 殺人魔…. 殺人魔는 물러가라! 殺人魔는 물러가…! 한열아, 다 이제 풀고 가라. 다 이제 풀고 가. 이 많은 靑年들이 네 가슴에 맺힌 恨을 풀어줄 거야. 안 되면 엄마가 갚을란다, 안 되면 엄마가 갚아…. 한열아 가자 光州로, 寒鴉 가자, 우리 光州로 가자, 한열아….”

그 뒤 35年을 正말 이 말씀대로 살았다. 배은심 어머니는 한동안 每日 이한열이 누워 있는 光州 망월동 墓地를 찾았다. 어린 孫女를 업고 버스에서 내려 한 時間을 꼬불꼬불 길을 걸어갔다. 아들 무덤을 붙잡고 어머니는 묻고 또 물었다. “왜 내 아들이 데모를 했을까? 왜 示威隊 가장 앞에 서 있었을까?” 아들 생각을 알아내야만 했다.

어머니는 1987年 8月부터 같은 아픔을 가진 父母들을 만났다. 1980年代에는 民主化運動 過程에서 子息을 잃은 父母가 많았다. 그들이 全國民主化運動遺家族協議會(유가협·全國民族民主遺家族協議會 前身)를 만들어 서로 慰勞하고 子息의 뜻을 잇는 活動을 했다. 전태일 烈士 어머니 이소선, 박종철 烈士 아버지 朴釘祈禱 유가협 會員이었다. 전태일 烈士는 1970年 11月 “勤勞基準法을 지켜라!”라고 외치며 焚身한 분이고, 박종철 烈士는 1987年 1月 警察의 拷問으로 死亡한 분이다. 같은 아픔을 共有한 이소선·박정기·배은심은 곧 유가협 ‘三銃士’가 됐다.



이들을 비롯한 유가협 父母들은 學生 示威 現場뿐 아니라 勞動者大會, 農民大會, 撤去民 鬪爭 現場처럼 弱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소리치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 손을 내밀었다. 民主主義의 進展을 막는 일이 생기면 가장 앞장서 길을 냈다. 催淚彈 製造 會社에 찾아가 社長에게 謝過를 받아내기도 하고, 이 事實을 마치 會社와 遺家族이 서로 和解한 듯 報道한 言論社에 몇날 며칠 抗議해 訂正報道를 받아내기도 했다.

1980年代에는 警察이 示威隊를 잡아 태우는 버스를 ‘닭欌車’라고 했다. 示威隊가 던지는 돌에 부서지지 말라고 窓門에 鐵網을 달아놓은 것이 마치 닭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映畫 ‘1987’에는 警察이 示威 現場에서 主人公 演戱를 붙잡아 낯선 곳에 떨어뜨려 놓는 場面이 나온다. 유가협 父母들도 이런 일을 자주 겪었다. 서울에서 示威를 하다 强制로 닭欌車에 태워져 京畿 坡州나 문산 같은 곳에 한 名씩 내려지곤 했다. 그러면 배은심 어머니를 비롯한 父母들은 大衆交通이 있는 곳까지 걷기도 하고 지나가는 車를 얻어 타 돌아오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이 鬪爭이었다.

警察이 示威隊를 막으면 防牌를 잡아 뜯었고, 學生들을 잡아가면 “우리도 잡아가라”고 소리쳤다. 焚身과 投信으로 學生·勞動者·農民이 죽어갈 때 “죽을 힘이 있으면 살아서 싸우자. 죽지 말고 싸우자”고 앞장서 呼訴한 것도 이분들이다. 怯이 많아 밤에 혼자 化粧室 가는 것도 무서워했다는 배은심 어머니는, 鬪爭 過程에서 여러 屍身을 보며 삶과 죽음에 對한 恐怖를 뛰어넘었다. 子息 잃은 어미이니 무서울 것도 없었다. 어머니가 催淚彈을 뒤집어쓴 채 아스팔트 위에서 지내던 어느 날, 男便이 腦出血로 쓰러졌다. 그는 아픈 男便을 뒤로하고 全國 곳곳 아들이 살아 있다면 갔을 곳을 두루 다녔다. 看病은 큰딸이 堪當했다. 어머니는 긴 歲月 ‘한열이’만 붙잡고 산 것에 對해 男便과 다른 子息들에게 두고두고 未安해했다. 그러나 子息들은 “엄마가 그렇게 다니기라도 하시니 사셨을 것”이라고 理解한다.

아들 뜻 따라 山 民主化運動家 배은심

1987년 7월 6일 연세대 교문 앞에서 열린 이한열 열사 추모 시위(왼쪽). 1990년 2월 26일 연세대 학위수여식에서 배은심 선생이 아들을 대신해 명예졸업장을 받고 있다.

1987年 7月 6日 연세대 校門 앞에서 열린 이한열 烈士 追慕 示威(왼쪽). 1990年 2月 26日 연세대 學位授與式에서 배은심 先生이 아들을 代身해 名譽卒業狀을 받고 있다.

길 위에서 지내는 時間이 쌓이면서 어머니는 어느 날 아들의 뜻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1980年 光州에서 많은 市民을 虐殺하고 權力을 잡은 全斗煥에게 抵抗하다 내 아들이 이리 됐구나. 저 혼자만 잘 먹고 잘 살려 하지 않고 같이 잘 사는 世上을 만들려고 했구나. 아들이 이루고자 했던 世上을 만드는 것이 아들 뜻이겠구나.” 이한열이 6月 9日, 왜 示威隊의 先頭에 있었는지 찾아가는 過程에서 그 自身이 民主化運動家가 됐다.

배은심 어머니의 演說은 언제나 쉽고 簡潔하면서 核心을 꿰뚫었다. 빼어난 煽動家였다. 일을 組織하는 能力도 뛰어났다. 그가 유가협 會長이던 2000年, ‘民主化運動 關聯者 名譽回復 및 補償 等에 關한 法律’(民主名譽回復法)이 制定됐다. 1997年 유가협 會長이 되면서부터 推進해온 일이다. 유가협 會員의 子息은 하나같이 軍部獨裁에 抗拒하다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政府는 犧牲者가 생길 때마다 家庭 問題 때문이라는 둥 女子關係가 어떻다는 둥 하면서 다른 理由를 댔다. 하루빨리 子息들 名譽를 되찾고, 國家가 그들의 功勞를 認定하게 해야 한다는 게 父母들 생각이었다.

이소선·박정기·배은심을 비롯한 유가협 父母들은 1998年 1月부터 온갖 社會團體를 찾아다니면서 民主化運動 過程에서 犧牲된 이들의 名譽를 회복시키자는 內容의 署名을 받았다. 그해 4月부터는 서울驛 앞에 死亡者 寫眞과 事緣을 담은 포스터를 붙이고 一般 市民에게도 署名을 받았다. 11月부터 國會 앞에 天幕을 치고 籠城도 始作했다. 김대중 大統領 在任期라 父母들은 內心 ‘大統領도 民主化運動을 한 분이니 年末이 되기 前에 法이 만들어지겠지’ 期待했다. 그러나 當時 野黨이던 한나라당 反對가 거셌다. 結局 天幕 籠城을 한 지 422日 만인 1999年 12月 28日이 돼서야 民主名譽回復法이 國會를 通過했다. 이 긴 時間 동안, 父母들은 추운 겨울과 더운 여름을 籠城場에서 보냈다. 그 中心에 배은심 當時 유가협 會長이 있었다.

그 뒤 ‘國家人權委員會法’ ‘眞實·和解를 위한 過去事整理 基本法’ ‘軍疑問詞 眞相糾明 等에 關한 特別法’ 等을 잇달아 制定했다. 軍事政權 時節 發生한 여러 抑鬱한 죽음의 眞相을 밝히게 된 데도 유가협의 役割이 컸다. 이 過程에서 배은심 어머니가 느낀 건 法을 만드는 것, 제대로 施行되도록 하는 것 어느 하나도 저절로 되지 않는다는 事實이었다. 民主 政府가 執權한 뒤에도 하나하나 要求해야 겨우 法이 만들어졌고, 제대로 施行되는지도 늘 눈을 부릅뜨고 지켜봐야 했다.

社會的 아픔 現場마다 찾아가 손 내밀었던 삶

2021년 6월 9일 이한열추모제에서 발언하는 배은심 선생. ⓒ설지원

2021年 6月 9日 李韓烈追慕祭에서 發言하는 배은심 先生. ⓒ설지원

김대중·노무현 政府를 거치며 學生 示威는 줄었지만, 勞動者·農民·撤去民 等 社會的 弱者의 外侵은 繼續 이어졌다. 2009年 1月, 서울 龍山에서 再開發 補償 對策에 反撥하는 撤去民들 示威가 벌어졌다. 當時 警察 鎭壓 過程에서 撤去民 6名이 死亡하고 26名이 負傷을 當하자 배은심 어머니는 龍山慘事汎國民對策委員會에 委員으로 參與했다. 所重한 家族을 잃은 遺族들 모습이 1987年 自身과 똑같아 보여 마음이 아팠기 때문이다.

2014年 세월호가 沈沒했을 때도 그는 犧牲者 家族을 찾아가 慰勞했다. “歲月이 30年 가까이 흘러도 如前히 子息 잃은 아픔에 시달리는데, 이 父母들은 앞으로 어찌 살까” 걱정돼서라고 했다. 2016年 白南基 農民이 警察 催淚液에 맞아 쓰러졌을 때는 딸 白도라지 씨를 찾아가 慰勞했다. 배은심 어머니의 慰勞는 다른 사람 것과 달랐다. 어머니는 그이의 손을 잡고 말했다. “맘 단단히 먹소. 앞으로 더 기막힌 일이 많을 것이네.” 家族이 쓰러졌을 때 어떤 마음가짐이어야 하는지, 먼저 겪어 아는 사람만 해줄 수 있는 단단한 慰勞였다.

배은심 어머니는 李韓烈을 보낸 뒤 벌어진 民刑事 裁判을 통해 아들 죽음의 責任은 政府에 있다는 것을 分明히 하기도 했다. 當時 연세대 總學生會는 西大門警察署長, 鎭壓 戰鬪警察 中隊長 및 小隊長, 催淚彈을 쏜 戰鬪警察 1人 等을 殺人罪로 告發했다. 法院은 催淚彈을 쏜 戰鬪警察 1人을 特定할 수 없다며 棄却했다. 民事訴訟도 이어졌다. 이때는 李韓烈 家族이 直接 國家 責任을 물었다. 1990年 3月 大法院은 이한열의 죽음에 國家가 責任을 져야 한다며 約 1億 원 賠償 判決을 내렸다. 以後 다른 사람들도 民主化運動 過程에서 發生한 죽음의 責任을 國家에게 물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제 賠償金 處理가 問題였다. 李韓烈 家族은 當初 國家 責任을 分明히 하고 싶었을 뿐, ‘아들의 핏값’을 받을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그해 年末까지 돈을 받지 않으면 賠償金이 國家에 歸屬된다고 해 一旦 受領한 뒤, 1원도 쓰지 않고 작은 住宅을 購入해 李韓烈記念館 懸板을 달았다. 한 番 자리를 옮겨 2005年 서울 마포구에 세워진 李韓烈記念館에는 李韓烈과 6月抗爭 關聯 遺物이 保存 및 展示돼 있다.

배은심 어머니는 2020年 6月 10日 6月抗爭 記念式에서 ‘民主有功’으로 國民勳章 모란장을 받은 것도 달갑지 않게 여겼다. 勳章만 받은 것인데 사람들이 褒賞金이 얼마냐, 月給이 나오느냐고 물어 귀찮고 憫惘하다고 했다. 아들의 名譽가 제대로 回復되지 않았고 勳章을 받는다고 아들이 돌아올 것도 아닌데, 이게 다 무슨 所用이냐 싶었던 것이다.

어머니의 마지막 외침은 “民主有功者法 制定하라!”였다. 2000年 制定된 民主名譽回復法으로 民主化過程에서 犧牲된 이들이 犯法者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해졌다. 하지만 그들의 功勞를 國家가 認定한 것은 아니다. 오늘 大韓民國 社會가 1987年 만들어진 憲法에 基礎를 두고 있다면, ‘87年 體制’를 만드는 過程에서 犧牲된 이들의 功을 國家가 기려야 하는 것 아니냐는 게 어머니 생각이다. 그러나 아직 民主化運動 關聯者는 國家有功者로 認定받지 못하고 있다.

國家報勳 基本法은 獨立·護國·民主·公務遂行 等을 報勳의 要件으로 든다. 그런데 이때 ‘民主’에 該當하는 것은 4·19革命과 5·18民主化運動뿐이다. 全泰壹·朴鍾哲·李韓烈은 報勳 對象이 아니다. 이들을 비롯해 民主化運動 過程에서 犧牲된 사람을 國家有功者로 禮遇해달라는 內容의 法律案이 2000年부터 繼續 國會에 上程되고 있지만 제대로 論議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보고 싶다 내 아들, 李韓烈.”

6월항쟁 20돌을 앞둔 2007년 6월 5일 한울삶(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사무실에서 배은심 선생이 민주화운동을 하다 세상을 떠난 젊은이들의 영정을 바라보고 있다. 뒤에 앉은 이는 전태일 열사 어머니 이소선 씨다. 2020년 6월 10일 배은심 선생이 ‘민주유공’으로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는 모습. 1월 11일 광주 동구 5·18민주광장에서 열린 고 이한열 열사 모친 배은심 선생 노제에서 시민들이 헌화하고 있다(위쪽부터).

6月抗爭 20돌을 앞둔 2007年 6月 5日 한울삶(全國民族民主遺家族協議會) 事務室에서 배은심 先生이 民主化運動을 하다 世上을 떠난 젊은이들의 影幀을 바라보고 있다. 뒤에 앉은 이는 전태일 烈士 어머니 이소선 氏다. 2020年 6月 10日 배은심 先生이 ‘民主有功’으로 國民勳章 모란장을 받는 모습. 1月 11日 光州 東區 5·18民主廣場에서 열린 故 이한열 烈士 母親 배은심 先生 路祭에서 市民들이 獻花하고 있다(위쪽부터).

2020年 9月 禹元植 더불어民主黨 議員이 또 한 番 ‘民主有功者 禮遇에 關한 法律案’(民主有功者法)을 發議했다. 배은심 어머니는 이 法案 制定을 促求하며 2021年 6月부터 國會 앞에서 1人 示威를 했다. 10月부터 天幕 籠城도 이어갔다. 여든 넘은 老人이 子息과 同僚들의 穩全한 名譽回復을 위해 또 한 番 한여름 뙤약볕과 한겨울 찬 바람을 맞았다. 그러나 끝내 民主有功者法 制定을 보지 못하고 世上과 離別하고 말았다.

배은심 어머니는 늘 “나는 어디를 가든 혼자가 아니다. 한열이와 같이 가는 것”이라고 했다. “내가 어디를 가면 배은심이 가는 것이 아니라 李韓烈 엄마가 가는 것”이라고, “내가 움직여 李韓烈 이름이 한 番 더 불리면 사람들이 한열이를 한 番 더 記憶할 것”이라고도 했다. 어머니는 언젠가 아들이 잊혀 그의 犧牲이 헛되이 될 것을 걱정했다. 10年 넘게 이한열記念事業會 일을 해온 筆者는 李韓烈을 記念하는 여러 일이 家族 特히 어머니의 傷處를 헤집게 되지 않을까 죄송스러웠다. 그러나 그동안 한 일이 모두 그를 記憶하게 하는 일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조금 마음이 놓인다.

배은심 어머니 가시는 길에 많은 이가 함께했다. 有名한 이도 있었지만 大部分은 一般 市民이었다. 어머니가 내밀었던 따뜻한 손을 記憶하는 이들, 어머니가 사는 모습만으로도 힘을 얻었던 이들이 그의 冥福을 빌었다. 이한열의 삶과 죽음 못지않게 ‘배은심 運動家’가 길 위에서 보낸 35年 삶이 우리 社會에 미친 影響이 크다는 걸 깨닫게 하는 時間이었다.

아들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배은심 선생 친필. 유족들이 유품을 정리하다 발견했다.

아들에 對한 그리움을 담은 배은심 先生 親筆. 遺族들이 遺品을 整理하다 發見했다.

어머니 遺品을 整理하다 發見한 글이 있다. 限平生 마음속에 품고 산 말씀이겠지.

‘그래도 그립다 보고 싶다 내 아들, 李韓烈.’

寫眞 東亞日報 東亞DB
寫眞提供 이한열記念事業會 디자인 강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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