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늑대 家族이 朴 大統領을 데려갔다”|여성동아

LIFE STYLE

#korea #scandal #interview

“늑대 家族이 朴 大統領을 데려갔다”

editor 金明熙 記者

2016. 11. 24

박근령 前 育英財團 理事長의 男便 신동욱 공화당 總裁가 털어놓은 衝擊的인 이야기들.

03 大統領의 제부, 申東旭 總裁 衝擊 인터뷰


朴槿惠 大統領의 女同生인 박근령 前 育英財團 理事長은 최태민 一家의 민낯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 中 한 名이다. 40年間 가까이서 그들의 專橫을 지켜봤고 1990年에는 동생인 박지만 EG 會長과 함께 노태우 大統領에게 ‘최태민에게서 언니를 救해달라’는 呼訴文을 보내기도 했다. 1990年 育英財團 理事長 자리를 놓고 朴槿惠·近令 姊妹가 한바탕 紛爭을 치른 事件에도 최태민 一家가 깊숙이 關聯돼 있다. 朴槿惠 大統領과 박근령 前 理事長은 그 일로 完全히 關係가 틀어져 只今까지 남남처럼 지낸다. 2008年 박근령 理事長과 結婚한 申東旭(48) 공화당 總裁 亦是 崔順實의 秘線 實勢 疑惑이 불거지기 前부터 ‘정윤회는 바지이고, 그 뒤에는 최순실이 있다’는 疑惑을 提起해왔다. 11月 4日 朴槿惠 大統領의 2次 對國民 談話가 있던 날 만난 申東旭 總裁는 崔氏 一家 때문에 朴槿惠 大統領 姊妹가 完全히 갈라섰고, 박근령 前 理事長은 徹底하게 社會에서 埋葬됐다고 主張했다. 이들 夫婦는 朴 前 理事長과 育英財團이 얽힌 몇 件의 訟事 等으로 數億원臺의 빚을 지고 있고 生計도 어려운 形便이다.

▼ 박근령 前 理事長도 함께 인터뷰를 要請드렸는데.

제 아내는 이제 와서 다시 事件의 中心에 서고 싶지도 않고, 螺旋들 大統領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하더군요. 錯雜하고 慘澹한 心情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沈默을 지키는 것이 家族 된 道理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事件에 對해 누구보다 많이 일고 있는 政治人으로서, 國民들의 알 權利를 위해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 朴 前 理事長은 최태민의 存在를 언제 처음 알았다고 하던가요.

2007年 한나라당 大選 候補 競選 때 최태민 問題가 불거졌는데, 當時 ‘최태민이 陸英修 女史 逝去 이듬해인 1975年 2月 ‘現夢 便紙’로 朴槿惠 大統領에게 接近했다’는 言論 報道를 보고 제 아내가 “그게 아닌데”라고 하더군요. 陸英修 女史가 生存해 계실 때 최태민 氏가 朴槿惠 大統領의 公式, 非公式 行事에 여러 番 登場했고, 이 때문에 警護室에서 報告가 들어가자 어머님이 두 姊妹를 불러놓고 이런 분은 操心해야 한다고 注意를 喚起시킨 적이 있다고 합니다. 陸 女史가 꿈에 나타났다는 건 최태민이 지어낸 이야기고, 意圖的으로 當時 令愛였던 朴槿惠 大統領에게 接近했다고 봅니다.



▼ 그럼 朴 前 理事長이 최태민 一家를 처음 만난 건 언제인가요.

朴槿惠·近令·지만 3男妹는 1979年 10·26 事態 以後 靑瓦臺를 나와 서울 신당동 집으로 居處를 옮겼습니다. 제 아내는 그때 어려서 최태민 氏를 記憶하지 못했는데, 最近 言論에 依해 새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신당동 時節에도 최태민 氏가 자주 드나든 것으로 보입니다. 아내는 1982年 城北洞 時節부터 記憶합니다. 그 무렵 男妹들은 新軍部의 逼迫과 가까운 사람들의 背信 等으로 인해 萎縮돼 있었는데 최태민 一家가 積極的으로 다가와 慰勞해줬다고 합니다. 아내는 그때까지만 해도 고마운 사람들로 생각했다고 하더군요.

▼ 그때만 해도 男妹들이 사이가 좋을 때였죠.

네. 宏壯히 友愛가 좋았다고 합니다. 朴槿惠 大統領이 국을 잘 끓여 다함께 團欒하게 食事를 하곤 했답니다. 아내는 언니의 祕書, 코디네이터, 運轉技士 노릇을 하며 恒常 같이 다녔고요. 그러다가 아내가 풍산그룹으로 媤집을 가게 됐는데 新婚집이 當時 朴 大統領의 城北洞 私邸 바로 옆집이었다고 합니다. 언니가 보고 싶어 親庭에 자주 드나드니 媤어머니가 담에 작은 쪽門을 내줄 程度였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언니를 만나러 갔을 때는 거의 每番 집에 최태민 一家의 사람들이 와 있었다고 합니다.

▼ 2012年 한 言論이 ‘김종필 前 總理가 朴槿惠 大統領(當時 새누리黨 議員)에 對해 “최태민의 子息까지 있는 애가 무슨 政治를 하냐”고 말했다’고 報道한 적이 있습니다. 아내가 이 所聞에 關해 言及한 적이 있나요.

그 所聞에 對해 안타까워했습니다. “우리 언니는 絶對 그럴 사람이 아니다. 그건 내가 保障한다”고 하더군요.

▼ 그럼 金 前 總理의 말은 事實이 아니라는 말씀인지.

그건 김종필 前 總理에게 直接 물어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분이 가장 잘 아시겠죠.(이후 〈시사저널〉 11月 14日子는 ‘金 前總理가 인터뷰에서 “어떤 놈이 朴槿惠하고 내 사이를 끊어 놓으려고 그런 짓(말)을 한 것 같다. 그런 얘기를 내가 할 턱이 있나. 事實도 아닌데. (中略) 何如튼 (當時 최태민은) 늙어서 애를 못 만들어”라고 말했다’고 報道했다.)

▼ 다시 城北洞 時節 이야기로 돌아가서, 朴 前 理事長은 얼마 안 돼 美國으로 떠났죠. 그 틈을 비집고 최태민 一家가 朴 大統領과 더욱 가까워졌다고요.

아내가 첫 結婚에서 6個月 만에 離婚을 합니다. 제가 婚姻申告를 할 때보니까, 그때까지 法的으로 未婚이더라고요. 첫 結婚은 아예 婚姻申告도 안 했던 거죠. 아내 얘기를 들어보니, 媤집살이가 좀 힘들었다고 합니다. 靑瓦臺에서 곱게 자랐으니 그럴 수 있었겠죠. 그런데 그 當時 親庭에서 자주 만나던 崔氏 집안사람들이 “왜 그렇게 힘들게 사시느냐”며 자꾸 結婚에 關해 否定的인 이야기를 하더랍니다. 이제 와 생각하니 崔氏 一家 사람들이 離婚을 부추긴 것 같다고 하더군요. 어쨌든 아내는 前 大統領의 딸과 財閥家의 婚事로, 전두환 大統領 內外가 參席할 程度로 世間의 注目을 받는 結婚式을 치렀는데 6個月 만에 離婚을 했으니 부끄럽고 猖披한 마음에 美國行을 擇했어요. 그때 崔氏 一家가 아내의 빈자리를 代身해 祕書, 執事 노릇을 하며 孤立無援의 大統領을 사로잡은 거죠.

▼ 財産 問題와 關聯해 박근령 前 理事長은 어디까지 알고 있나요.

1982年 美國으로 건너간 後 1年 동안 通帳에 生活費가 꼬박꼬박 들어오더니, 그 後엔 들쭉날쭉하더랍니다. 朴 大統領은 그 當時 銀行 業務나 그런 걸 해본 적이 없으니, 아내는 崔氏 一家가 돈을 보냈을 거라고 斟酌하고 있더군요. 한 番은 돈이 다 떨어져 패스트푸드店 쓰레기桶에서 햄버거를 주워 먹으며 서러움에 북받쳐 울기도 했답니다. 그러다 1985年쯤 비자를 延長하려고 韓國에 들어왔는데, 崔氏 一家 中 한 사람이 집을 契約하자며 반포 韓信 아파트로 데리고 가더랍니다. 그렇게 해서 제 아내가 아파트 한 채, 박지만 會長이 아파트 한 채를 받았습니다. 전두환 大統領이 준 慰勞金만 해도 6億원이고, 그 돈이면 當時 아파트 20채 값(當時 江南 35坪 아파트 賣買價는 3千萬원 線)인데 나머지는 다 어디로 갔을까요? 저는 그 돈이 모두 최태민, 최순실 一家가 財産을 불리는 데 흘러 들어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최순실 特別法을 만들어 그들의 財産 形成 過程을 들여다보면 簡單히 答이 나올 거라고 봅니다.



▼ 朴 前 理事長이 崔氏 一家의 實體를 알게 된 건 언제부터인가요.

1982年 朴槿惠 大統領이 育英財團 理事長으로 就任하자 최태민이 實質的인 拷問으로 따라 들어가 各種 利權에 介入하는 等 여러 專橫을 저질렀습니다. 이를 보다 못해 靑瓦臺 警護室 出身 人士들을 主軸으로 만들어진 崇慕會가 최태민의 退陣을 要求하며 아내에게 도움을 要請합니다. 育英財團 定款에 理事長은 設立者의 特殊 關係人에 한한다고 明示돼 있거든요. 이때 아내와 朴 大統領 間에 誤解가 發生한 것 같습니다. 아내와 崇慕會는 최태민을 내보내라고 한 건데, 大統領은 ‘나의 側近을 내보내라고 한 것은 곧 나를 나가라고 한 것’이라고 받아들였답니다.

▼ 當時 大統領과 直接 만나서 誤解를 풀었더라면 좋았을 텐데요.

여러 番 만남을 試圖했지만 崔氏 一家가 언니를 에워싸고 있어서 連絡조차 어려웠다고 합니다. 以後 大統領이 오랫동안 隱遁 生活을 하다가 1998年 大邱 達城郡 補闕選擧에 出馬했을 때도 동생의 道理를 다해야 한다는 생각에 選擧 遊說를 도우러 갔지만 만나지도 못하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저는 朴 大統領과 아내, 박지만 會長이 멀어진 것도 최태민 一家의 工作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自身들이 오롯이 大統領의 손발이 되기 위해선 가장 가까운 피붙이들을 떼어놓아야 했을 테니까요. 實際로 최태민이 朴 大統領에게 “女性 大統領이 되려면 兄弟나 姻戚들을 絶對 만나선 안 된다. 만나면 不淨 탄다”고 여러 番 얘기했다고 합니다.

▼ 그래서 박근령 前 理事長과 박지만 會長이 1990年 노태우 大統領에게 ‘최태민에게서 언니를 救해달라’고 歎願書를 쓴 거군요.

그렇습니다. 아내는 自筆로 쓴 그 歎願書를 통해 “遺族이 核心이 된 各種 追慕事業體에 깊숙이 關與하고 會計帳簿를 造作해 많은 財産을 搾取했다”고 主張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믿지 않았죠. 言論에서도 別 關心을 기울이지 않았고요. 그런데 26年의 歲月이 흐른 只今 그 모든 것이 하나씩 眞實로 밝혀지고 있으니 얼마나 氣가 막힐 노릇입니까.

▼ 朴槿惠 大統領은 그동안 崔氏 一家의 實體를 把握하고 關係를 끊어낼 機會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렇게 하지 못했던 理由는 뭐라고 보나요.

大統領이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도움을 준 사람들이 崔氏 一家입니다. 저는 그걸 늑대아이에 比喩하고 싶습니다. 어린아이가 숲 속에 홀로 남겨져 凍死하기 直前인데, 그곳을 지나던 늑대 무리가 그 아이를 世上과 完全히 斷絶된 곳으로 데려가 키웠습니다. 그렇게 40年이 흐르면 그 아이는 어떻게 될까요? 늑대 무리가 家族이고, 世上의 全部라고 생각하겠죠. 또 하나는 최태민 一家와 朴槿惠 大統領은 ‘大統領 만들기 프로젝트’를 위해 함께 달려온 政治的 同志입니다. 최태민은 큰 무당, 豫言家라고 하죠? 朴槿惠 大統領은 그 사람이 豫言한 대로, 大統領이 돼 아버지의 業績이 歪曲되고 貶毁된 걸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 박근령 前 理事長은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生活이 어렵다고 들었습니다.

알고 계신 대로 形便이 좋지 않습니다. 옷도 市場에서 사 입고, 신발도 5千원짜리를 신습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아내 名義의 반포 韓信 아파트는 育英財團 構造調整 過程에서 職員들 退職金 等을 支拂하기 위해 處分했는데 會計 記錄이 남아 있지 않아 돌려받을 方法도 없습니다. 最近까지는 제가 釜山의 建設 現場에서 日傭職 雜夫로 일해 빚도 갚고 生計를 維持했었는데, 이제는 그 일도 그만두게 돼 새 일자리를 찾고 있습니다. 얼마 前엔 채널A 再演 俳優 募集에 願書를 냈는데 書類 審査에서 탈락했어요.

▼ 總裁님 夫婦와 박지만 會長과의 關係는 어떤가요.

아내가 동생에 對해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 그 部分에 對해 말씀드리는 건 조심스럽습니다. 저와 朴 會長과 사이에 풀어야 할 問題들도 많이 있고요.

▼ 풀어야 할 問題라는 건, 總裁님이 “박지만 會長이 2007年 나를 中國으로 拉致해 殺害하려 했다”는 虛僞 事實 等을 流布한 嫌疑로 拘束돼 實刑을 살았던 일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當時 저를 中國으로 誘引했던 사람이 朴 大統領의 5寸 조카 박용철(朴正熙 前 大統領의 둘째兄 박무희 氏의 長男 박재석 氏의 아들)입니다. 제가 執拗하게 說得하자 그 사람이 나중에는 法廷에서 眞實을 밝히기로 했는데, 그로부터 얼마 안 돼 殘忍하게 살해당했습니다. 犯人으로 指目된 박용수(박무희 氏의 次男 朴在昊 氏의 아들)는 自殺을 했고요. 하지만 용수는 누굴 죽일 사람이 아닙니다. 용철이가 덩치도 훨씬 크고 힘도 좋고요. 그런데 用鐵 조카가 生前에 崔氏 一家에 對해, 무서운 사람들이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只今 생각해보면 그 일도 저와 박지만 會長을 離間질하기 위한 崔氏 一家의 公爵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이 事件이 再調査돼야 한다고 봅니다.

▼ 이番에 崔氏 一家와 關聯된 疑惑이 말끔하게 解消되고 나면 朴槿惠 大統領과 박근령 前 理事長의 關係도 回復될 걸로 보나요.

그에 對한 決定 權限은 저희가 아니라 朴 大統領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희가 먼저 손을 내밀면 大衆이 果然 “핏줄밖에 없다”고 할까요? 秘線 實勢를 떨어뜨려놨더니 이番엔 親姻戚이 나선다며 오히려 逆風이 불 겁니다. 제 아내는 1990年 歎願書 事件 以後 朴 大統領과의 關係도 完全히 틀어졌고, 여러 事件 事故에 휘말리면서 國民들에게도 事事件件 언니의 발목을 잡는 異常한 아줌마라는 烙印이 찍혔습니다. 이건 朴正熙 家門의 또 다른 悲劇입니다. 이番 機會에 國民들이 崔氏 一家의 40年 黑歷史를 明明白白히 밝혀주신다면, 그들에 依해 歪曲되고 造作된 아내의 삶도 조금 바로잡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04單獨 〈여성동아〉에서 찾은 최순실 게이트의 端緖들

최순실이 直接 쓴 아이 버릇 길들이기


朴槿惠 大統領과 최태민 氏 一家의 關係는 1987年 育英財團 紛糾 事態 때 이미 言論의 集中 照明을 받았다. 育英財團 職員들이 族閥 人事 體制 終熄 等을 要求하며 籠城을 벌였는데, 그들이 指目한 ‘族閥’이 바로 최태민 氏와 그의 딸 최순실 氏였던 것. 

이에 최순실 氏는 1987年 〈여성동아〉 10月號에 直接 寄稿한 長文의 手記를 통해 自身은 育英財團 紛糾와 全혀 關係가 없다고 主張했다. 그러면서 ‘우리 家族은 10年 前 아버지의 非理를 캐겠다는 惡夢 때문에 앞으론 조용히 살자고 約束했다. 絶對로 남의 일엔 參見하지 말자고 눈물을 뿌리며 約束했었다’고 밝혔다. 手記에 따르면 최순실 氏가 ‘家族들의 約束’을 깨고 朴 大統領과 再會한 건, 1986年 自身이 運營하던 江南의 초이幼稚園과 어린이會館이 姊妹結緣을 맺으면서부터다.

그때 育英財團은 〈어깨동무〉 〈꿈나라〉 等의 어린이 對象 雜誌를 펴내고 있었고, 최순실 氏는 幼稚園 敎育 프로그램과 敎材를 硏究하는 ‘兒童硏究所’라는 모임을 運營 中이었다. 그런데 그 무렵 최순실 氏가 〈꿈나라〉의 編輯과 製作에 關與했다는 疑惑이 일었다. “實情에 맞지 않는 아이템을 내놓고 事事件件 干涉했다” “崔氏 側에서 採用한 사람들이 (그女가 運營하는) 硏究所에서 指示를 받아왔다”는 것이 當時 記者들의 主張이었다. 하지만 崔氏는 이를 否認하면서 박근혜 理事長에게 責任을 떠넘겼다.    

‘(박근혜 理事長이 硏究所의 일에 對해) 무척 바람직한 일이라고 關心을 보였다.… 幼兒 雜誌 〈꿈나라〉 活性化 方案을 마련해달라는 付託을 해왔다.… 〈꿈나라〉 編輯陣과 우리 팀 間의 對話를 周旋해주셨다. … 朴槿惠 理事長의 命을 받은 어린이會館 館長의 請으로 (技士)아이템을 내놓았을 뿐이며 … 編輯會議에 들어가 主宰했다는 所聞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記者들과 落下傘을 타고 내려온 外部人들 간 內訌에 시달리던 〈어깨동무〉와 〈꿈나라〉는 1987年 5月 廢刊됐다. 記者들이 抗議 次元에서 集團 辭表를 提出했는데, 朴 理事長이 이를 受理한 것이다. 記者들은 朴 理事長의 背後에 최태민과 최순실 氏가 있다고 主張했다. 하지만 최순실 氏는 雜誌 廢刊의 原因이 財政 壓迫 및 競爭枝와 附錄 · 廣告 싸움에서 진 탓이라며 이를 否認했다.  

育英財團은 設立者인 陸英修 女史가 世上을 떠나고 全斗煥 政權이 들어서면서 政府 支援이 줄어 財政 壓迫을 받았던 것이 事實. 하지만 收益性이 있는 漫畫雜誌 〈寶物섬〉을 펴내는 等 나름의 自求 努力을 기울이고 있던 터라 記者들의 喪失感이 더욱 컸다.

當時 최순실 氏는 育英財團 紛糾 事態에 아버지 최태민 氏의 이름이 擧論되는 것에 對해 “子息 된 道理로 마음이 아프다. 잘못이 있다면 내게 있는 것이니 더 以上 아버님을 들먹이지 말아달라”고 吐露했다. 하지만 같은 달 〈어깨동무〉의 한 退職 記者는 〈여성동아〉와의 인터뷰에서 “(育英財團 問題로) 崔氏의 아버지를 두 番 만났다. 그가 만나자고 해서 찾아간 것이다. 財團의 아무런 職位도 없는 그가 만나자고 해서 約束 場所에 나간 나에게도 問題가 있다고 생각진 말아달라. 그 當時 雰圍氣는 約束 場所로 찾아가지 않으면 안 될 妙한 거였다. 그는 내게 一種의 忠誠 誓約을 要求했다. 그리고 育英財團을 위해 힘을 합쳐보자고 했다”고 털어놓았다. 育英財團 運營에 崔氏 一家가 實質的으로 介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 무렵 최순실 氏는 이미 財力家로도 關心을 모았다. 1985年부터 江南 新沙洞에 어린이 對象 學院을 運營하다 院生이 늘자, 幼稚園을 짓기 위해 隣近에 다른 사람과 共同으로 100餘 坪의 땅을 買入했고 1988年에는 얼마 前 押收搜索을 받았던 新沙洞 美僧빌딩 敷地를 買入했다. 30代 初盤의 젊은 女性이 이처럼 莫大한 財力을 所有한 點도 疑惑의 對象이었다. 최순실 氏는 手記에서 이렇게 解明했다. 

‘나의 所望인 幼稚園을 세우기 위해 조그만 小品 가게를 키워 衣裳 代理店으로 발전시키기도 했다. 그 衣裳 代理店에 웬만큼 프리미엄이 붙자 銀行 融資, 親戚에게 若干씩의 도움을 받아 幼稚園을 設立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韓國硏究者情報(KRI,www.kri.go.kr)에 登錄된 그女의 프로필을 보면 1981年부터 87年까지 美國 LA에 있는 퍼시픽 스테이츠 大學에서 幼兒敎育學 學事, 碩士, 博士 學位를 받은 것으로 나온다. KRI는 硏究者들이 直接 自身의 情報를 記載하도록 하고 있다. 財産 形成 時期와 大學에 다닌 時期가 正確히 一致하는 걸 보면 적어도 둘 中 한 가지는 거짓말이라는 結論에 이르게 된다.

최순실 氏는 1989年 金某 敎授와 함께 〈어린이 버릇 어떻게 바로잡을 것인가〉라는 冊을 出刊하고, 그해 〈여성동아〉 8月號와 9月號에 辱하고 깨무는 아이의 行動에 對한 解決策을 提示하는 ‘어린이 버릇 들이기’라는 題目의 칼럼을 連載했다. 

當時 崔氏가 使用한 職銜은 ‘美國 산타모니카 몬테소리 敎育大學 한국교육원長’. 元來 障礙人 敎育에서 着眼한 몬테소리 敎育은 아이의 個性을 尊重하고 스스로 깨우치도록 하는 것이 核心이다. 父母와 敎師의 權威的인 態度는 몬테소리에서 가장 警戒하는 것 中 하나다. 그런데 崔氏는 아이들을 ‘監視(大部分의 어린이는 깨무는 行爲에 對해 어른이 監視를 조금 늦추면 다른 場所까지 따라가서 親舊를 깨물려고 할 때가 있다)’의 對象으로 여기거나, ‘아이가 잘못하면 無言의 嚴한 表情으로 凝視하라’는 等의 솔루션을 提示하고 있다. 아이의 問題 行動은 잘못된 學習의 結果라는 前提 下에, 父母가 ‘全知的’ 觀點에서 아이의 行動을 一一이 觀察하고 거기에 맞춰 反應해가면서 習慣을 길들여야 한다는 것이 그女 主張의 核心인데 몬테소리의 哲學과는 全혀 關聯이 없다는  것이 敎育 專門家들의 意見이다.

이런 方式으로 對象을 길들이는 極端的인 境遇가 食事 鐘을 치기만 해도 침을 흘리도록 하는 파블로프의 개다. “최태민 氏가 催眠術로 사람을 홀리는데 能했다”는 崔氏의 조카 최용석 氏의 證言에 비추어보면 최태민과 최순실 氏는 사람들을 自身의 目的에 따라 길들이고 調整하려고 했다는 點에서 ‘不全如前’이라고 볼 수 있다.

寫眞 박해윤 記者 동아일보 寫眞DB파트




  • 推薦 0
  • 댓글 0
  • 目次
  • 共有
댓글 0
닫기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Copyright ⓒ 2020 By '전통문화연구회(傳統文化硏究會)' All Rights reserved.
 한국   대만   중국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