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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0 女性 6人의 世上에서 가장 따뜻한 [라떼 : 나의 20代] 이야기|여성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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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story

2070 女性 6人의 世上에서 가장 따뜻한 [라떼 : 나의 20代] 이야기

글 이현준 이진수 記者

2021. 11. 04

創刊 88周年을 맞은 女性東亞가 20代 유튜버부터 70代 시니어 모델까지 女性 6人의 인터뷰를 통해 그들의 삶을 들여다봤다. 20代에 對한 記憶을 바탕으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이들의 이야기는 大韓民國에서 女性으로 살아온 것에 對한 생생한 記錄이자 時代와 트렌드, 사람에 對한 愛情 가득한 省察이다. 





유튜브 크리에이터 홍자민(28) 氏, 인플루언서 兼 온라인쇼핑몰 CEO 박현선(36) 氏, 파티시에 유민주(42) 氏, 主婦 오혜정(54) 氏, 火가 便所이(64) 氏, 시니어 모델 윤영주(72) 氏. 여기 20代부터 70代까지 6名의 女性들이 있다. 이들은 나이, 成長環境, 職業, 趣向이 모두 다르지만 大韓民國에서 女性으로서 살아왔다는 點에선 모두 같다. 그리고 이들 모두는 20代 初盤이라는 共通의 時期를 거쳤다. 特히 20代 初盤은 未成年者에서 벗어나 社會人으로 첫발을 내딛는 時期로, 트렌드에 敏感하고 購買力이 높기에 市場에서도 가장 注目을 받는다. 只今의 ‘Z世代’가 代表的이다. 이들은 幼年 時節부터 인터넷 等 IT에 露出돼 新技術에 친숙하고 이를 疏通과 消費活動에 積極 活用한다. 이메일, 實時間 채팅을 통해 빠른 速度로 疏通하며 온라인으로 物件을 購買하는 데 익숙하고 消費 波及力이 크다. 지난해 投資銀行 뱅크오브아메리카(BoA)가 發表한 報告書에 따르면 Z世代의 經濟力은 全 世代에서 가장 빠르게 커지고 있다. 10年 後엔 只今보다 5倍 增加한 33兆 달러에 이를 것으로 豫測된다.

여성동아는 올해 創刊 88周年을 맞이했다. 江山이 8番 變하고도 8年의 時間이 더 흐른 셈이다. 이 時間 동안 女性東亞는 女性들을 위한 敎養書이자 트렌드 길라잡이로서, ‘理想的 女性像은 무엇인가’라는 話頭를 提示하며 女性의 삶을 照明해왔다. 트렌드는 當時의 時代相을 反映한다. 그리고 時代相엔 그때를 살아간 女性들의 삶이 녹아 있다. 創刊 88周年을 맞아 女性東亞는 20代부터 70代까지의 女性에게 ‘自身이 20代 初盤이었던 時節’의 패션과 女性像에 對한 共通 質問을 던져 女性의 삶이 어떻게 變化해왔는지 이야기를 나눴다. 이들은 各各 다른 世代로 只今까지 만난 적은 없었지만 할머니, 엄마, 딸, 언니, 동생으로서 紐帶感을 드러내며 서로를 應援했다. 여성동아 또한 앞으로도 讀者들을 비롯해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女性들에게 아낌없는 應援을 보낼 것이다.

72歲 윤영주
시니어 모델

當時엔 어떤 패션이 流行했나요.

斷然코 미니스커트였죠. 뾰족구두에 올이 나간 街라스(日本語로 琉璃를 意味) 스타킹을 신고 꽃粉紅 투피스를 입곤 했죠. 그 後엔 男女 모두 입을 수 있는 ‘유니섹스’ 패션으로 靑바지가 流行했고요.



스타일을 先導했던 아이콘, 셀렙을 꼽자면.

歌手 윤복희 氏요. 짧은 머리에 미니스커트. 當時엔 엄청난 衝擊이었죠.

좋아했던 브랜드나 즐겨 했던 스타일은요.

톰보이(1977年 出市된 旣成服 브랜드로, 現在는 新世界인터내셔날이 運營한다)요. 國內에서 旣成服으로 出市된 첫 番째 브랜드로 記憶해요. 그때는 宏壯히 세련된 디자인이었기에 잊을 수 없어요. 저는 運動靴에 靑바지를 主로 입었는데, 當時엔 女性이 運動靴를 신는 것에 對해 안 좋게 보는 傾向이 있어서 눈총을 받기도 했어요.

人氣를 끌었던 物件이나 場所는.

明洞의 ‘오비스캐빈’李 핫 플레이스였죠. 이곳을 가보지 않고는 對話에 낄 수 없을 程度였어요. ‘세시봉’이 門을 닫은 後 생겨났는데 只今 基準으론 ‘펍 레스토랑’이라 할 수 있죠. 當時 筒기타 치던 사람들은 다 오비스캐빈 出身이에요. 代表的으로 歌手 양희은 氏가 있어요. 요즘에야 狎鷗亭, 淸潭, 街路樹길 等 핫 플레이스가 워낙 많지만 그때는 明洞 아니면 鍾路였죠. 明洞에서 노는 게 좀 더 멋쟁이 取扱받았고요.

現在와 그때의 패션을 比較하자면.

저는 그때나 只今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어요. 便安한 靑바지에 運動靴(웃음). 다만 只今은 그때와 달리 비싼 옷이 아니더라도 充分히 멋을 낼 수 있는 듯해요.

主로 어디서 옷을 샀나요.

大槪 南大門 市場이었죠. 이것도 마땅치 않으면 南大門, 東大門 市場에서 옷감을 떼어다가 洋裝店에서 옷을 맞춰 입었어요.

일하는 女性에 對한 認識은 어땠나요.

부러워하면서도 敢히 될 수는 없었던 存在였죠. 父母들도 좋은 집에 시집보내는 게 目標였던 時節이니까요. 딸이 工夫하고 싶어 해도 시켜주지 않는 집이 많았고, 結婚도 主로 仲媒로 했어요.

‘워너비’로 여겼던 女性像을 꼽자면.

좋은 곳에 시집간 女子가 成功한 女性으로 여겨졌어요. 親舊들끼리 만나도 “누가, 어느 大學 나온 男子를 만나서, 어떤 집에 시집갔다더라” 하는 內容이 주된 主題였죠.

只今 職業에 對한 當時 認識은 어땠나요.

當時 ‘모델’에 對한 社會的 認識은 그다지 좋은 便이 아니었어요. 挑戰하기엔 큰 勇氣가 必要한 職業이었죠. 시니어 모델은 아예 없었고요.

女子라서 差別받았다고 느낀 적이 있나요.

差別은 平生 받았어요. 一一이 얘기하기엔 너무 많을 程度로. 제가 大學 入試를 앞둔 時點에 오빠가 除隊해서 復學하게 됐는데, 父母님이 “네 오빠를 復學시켜야 하니 넌 大學에 가지 마라” 했어요. 大學에 合格했을 때는 家族 中 누구도 關心을 가져주지 않았죠. 또 저는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어 學校를 다녀야 했지만 오빠는 用돈 받으며 데이트하고 놀고(웃음). 結婚 後에도 育兒는 제가 專擔해야 했고 1年에 祭祀만 13番씩 지냈답니다(웃음).

같은 時代를 살아온 또래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일흔한 살에 모델로 데뷔했지만 늦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70代 程度 됐으면 自身이 뭘 좋아하는지 알잖아요. 겁내지 말고 저질렀으면 좋겠어요. 다만 무엇이든 하려면 健康해야 해요. 健康에도 꼭 留意했으면 좋겠어요.

오늘 20代부터 70代까지 女性들이 모여 인터뷰를 해요. 後輩 世代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요.

삶을 돌이켜보면 지루할 때가 많아요. 有限하고 외롭죠. 나이가 들수록 더해요. 돈을 버는 일과는 別個로 젊었을 때부터 즐거운 걸 찾길 바라요(웃음).

64歲 便所이
畫家

當時엔 어떤 패션이 流行했나요.

발등을 다 덮을 程度로 긴 喇叭바지에 ‘선반 口頭’라는 통굽 구두가 流行했어요. 선반 위에 올라선 것처럼 굽이 높아 붙은 名稱이죠. 상의는 길이를 줄인 니트類가 人氣였고요.

스타일을 先導했던 아이콘, 셀렙을 꼽자면.

프랑스의 俳優 兼 歌手 諸人 버킨이요. 當時 ‘버킨 백’이 流行했어요. 物件을 막 구겨 넣은 라탄 백도요. 빈티지 데님에 헝클어진 머리와 액세서리 레이어링까지 하면 諸人 버킨 스타일이었죠.

좋아했던 브랜드나 즐겨 했던 스타일은요.

뱅뱅, 꾸레주, 지방시, 피에르 가르뎅이 人氣가 높았고 第一毛織度 많이 입었어요. 제일모직을 입으면 옷 잘 입는 사람으로 待接받았죠. ‘뼝뼝’이라는 브랜드도 생각나요.

人氣를 끌었던 物件이나 場所는.

저는 釜山 出身인데, 남포동 쪽에 敷衍劇場, 東明劇場이 男女 間 만남의 場所였어요. LP版을 하나씩 사서 들고 다니거나 손에 손手巾을 묶고 다니는 것도 ‘멋’으로 여겨졌고요.

現在와 그때의 패션을 比較하자면.

크게 變化가 없는 것 같아요. 流行은 돌고 돈다는 걸 느껴요. 제가 그때 입었던 와이드 팬츠, 버뮤다팬츠를 只今도 입잖아요. 빈티지 옷도 그렇고요. 제 境遇엔 그때에 비해 只今은 심플하고 헐렁한, 몸매가 잘 드러나지 않는 옷을 입어요. 저에게 더 맞는 스타일을 찾을 수 있게 됐죠.

主로 어디서 옷을 샀나요.

광복동, 남포동과 케네디 市場이라 불리던 골목이 主된 쇼핑 空間이었어요. 只今도 있어요. 거기서 救濟 衣類와 맞춤옷을 많이 샀죠. 맞춤옷은 願하는 스타일을 그림으로 그려 가면 그대로 製作해주곤 했어요.

일하는 女性에 對한 認識은 어땠나요.

職業보다는 結婚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 時期였어요. 일을 하면 結婚을 抛棄했거나 疏忽히 생각하는 女子라 여겨졌고, 집안 形便이 어려운 女子들만 職業을 가져야 한다는 認識이 있었어요.

‘워너비’로 여겼던 女性像을 꼽자면.

틀에 박힌 걸 拒否하고 內面과 外面의 아름다움을 지켜나가는 女性이 脚光 받았어요.

只今 職業에 對한 當時 認識은 어땠나요.

家庭環境마다 差異는 있었겠지만, 全般的으로 平凡한 存在로 認識되진 않았던 듯해요. 뭔가 특별한 存在랄까요(웃음).

女子라서 差別받았다고 느낀 적이 있나요.

差別이 너무 많아서 이를 當然하게 여기던 時節이었어요. “女子는 이래서, 저래서 안 된다”라는 말을 흔히 하던. 떠올려보자면 같이 밥床을 받아도 엄마가 오빠와 제 앞에 놓은 飯饌이 달랐어요. 女子가 먼저 좋은 飯饌을 먹으면 안 된다는 認識이 있었죠.

같은 時代를 살아온 또래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우리 나이쯤 되면 다 비슷할 것 같아요. 子息 걱정, 老後 걱정이 많죠. 하지만 그것만 하다 보면 自己 自身이 누구인지 잊어버리게 돼요. 아직 늦지 않았어요. 걱정은 접어두고 自己를 찾아 穩全한 自身의 삶을 살아가길 바라요.

오늘 20代부터 70代까지 女性들이 모여 인터뷰를 해요. 先輩 或은 後輩 世代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요.

只今 나이가 어떻든 우리는 모두 ‘나’예요. 또 時間이 흐른다고 할머니가 되는 게 아니에요. 저는 60代지만 제 內面은 如前히 20代 時節의 ‘나’를 품고 있어요. 모든 時節의 ‘나’가 조화롭게 共存할 수 있도록 內面의 틀을 넓혔으면 좋겠어요.

54歲 오혜정 
主婦

當時엔 어떤 패션이 流行했나요.

데님과 正裝 스타일, 캐주얼 스타일이 共存했어요.

스타일을 先導했던 아이콘, 셀렙을 꼽자면.

트로이카로 불리던 3人坊(윤정희, 문희, 남정임), 정윤희, 브룩 실즈가 人氣가 많았죠. ‘컴퓨터 美人’이라고 해서 황신혜 氏도 많은 憧憬을 받았고요.

좋아했던 브랜드나 즐겨 했던 스타일은요.

리바이스, 뱅뱅, 써지오바렌테, 프로스펙스 等이요. 特히 프로스펙스 로고가 찍힌 신발, 가방은 다들 하나씩 갖고 싶어 했어요.

人氣를 끌었던 物件이나 場所는.

삐삐였죠. 저는 故鄕이 全南 順天인데, 시골이라 그런지 더 갖기 어려웠어요(웃음). 핫 플레이스는 國道劇場 바로 옆 ‘空間 사랑’이라는 카페가 생각나요. 茶房도 人氣 場所였어요. 紹介팅을 主로 하는 곳이었거든요. 撞球場도 꽤 많이 갔고.

現在와 그때의 패션을 比較하자면.

요즘 20代들은 모던한 스타일을 많이 입는 것 같고, 露出에도 두려움이 없어 보여요. 저희 때는 컬러풀한 스타일을 좋아했던 것 같은데, 實用的인 옷을 많이 입었어요. 저는 只今도 그렇고요.

主로 어디서 옷을 샀나요.

主로 브랜드 代理店에서 샀어요. 저 같은 시골 사람들은 다 그랬을 거예요. 저는 서울 親戚 집이 있어서 그곳을 訪問했을 때 兩쪽 어깨에 비닐封紙 메고 東大門 새벽市場에 가본 적도 있어요.

일하는 女性에 對한 認識은 어땠나요.

經濟活動을 하는 女子들이 크게 두드러지는 時代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저는 大學을 卒業하고 線을 봐서 結婚했는데, 일하는 女性들에 對해 딱히 憧憬은 없었어요.

‘워너비’로 여겼던 女性像을 꼽자면.

‘賢母良妻’였죠. 아직 女子들의 社會 活動이 많지 않았던 時節이었기 때문인지 大槪 內助, 育兒 잘하는 賢母良妻를 꿈꿨던 것 같아요. 父母의 말에 順從하는 게 孝道이자 美德으로 여겨지기도 했고요.

只今 職業에 對한 當時 認識은 어땠나요.

그땐 一般的이었죠. 賢母良妻가 롤 모델이던 時節이니까요. 女子가 家事 勞動, 育兒를 하고 男子가 밖에 나가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했고요.

女子라서 差別받았다고 느낀 적이 있나요.

男兒選好思想이나 長男을 優先하는 等의 家父長的 文化가 있긴 했어요. 性役割度 다르다고 認識됐고요. 다만 저는 家庭에서 差別받지 않았어요. 집마다 事情은 다 달랐겠지만.

같은 時代를 살아온 또래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結婚하고 이날까지 平生 主婦로 살아왔어요. 집이라는 空間을 벗어난 적이 없다가 이렇게 나와서 인터뷰도 해보게 됐잖아요. 뭐든 늦은 건 없으니 始作하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只今이 가장 젊고 아름다울 때니까요.

오늘 20代부터 70代까지 女性들이 모여 인터뷰를 해요. 先輩 或은 後輩 世代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요.

後輩 世代는 우리 世代보다 더 좋은 環境과 많은 機會가 주어졌어요. 무슨 機會든 잡고, 무엇이든 試圖했으면 해요. 反對로 先輩 世代는 우리 世代보다 더 힘든 일을 많이 겪고 機會도 적었겠지만, 女子는 태어나기보다 만들어지는 存在 같아요. 只今부터라도 自己 自身과 機會를 찾아 마음껏 挑戰하셨으면 좋겠어요.

42歲 유민주
파티시에

當時엔 어떤 패션이 流行했나요.

패션雜誌의 모델들이 트렌드를 先導했어요. 所謂 ‘江北 스타일’ ‘江南 스타일’도 있었는데, 江北 스타일은 깻잎 머리가 象徵이었고 江南은 워커, 綿바지, 폴로셔츠 等을 입었어요. 힙합 스타일도 流行했고요.

스타일을 先導했던 아이콘, 셀렙을 꼽자면.

김민희, 정려원, 아오이 乳牛 等이 옷 잘 입는 스타로 脚光받았고, 最高의 아이콘은 걸 그룹 ‘핑클’이었어요. 저도 李孝利 氏처럼 머리에 흰色 블리치를 넣은 적이 있고요(웃음).

좋아했던 브랜드나 즐겨 했던 스타일은요.

시스템, EnC와 SJSJ요. 特히 한섬의 라인업이 大勢였어요. 저는 斷定한 스타일을 選好해서 더 좋아했고요.

人氣를 끌었던 物件이나 場所는.

鴨鷗亭 로데오 거리의 많은 카페들, 梨花女大 停留場부터 正門까지의 신발 距離요. 鴨鷗亭 로데오 거리에선 紹介팅을 많이 하고 同性 親舊들과 쇼핑할 땐 이대 앞을 자주 갔어요.

現在와 그때의 패션을 比較하자면.

요즘 20代들은 ‘패스트패션(트렌드를 反映해 빠르게 製作, 流通하는 衣類)’이잖아요. 더 자유롭고 挑戰的인 것 같아요. 저는 패션에 關心이 많았지만 挑戰的이지는 못했어요. 代身 좋은 素材의 옷을 고르고 골라 少量으로 샀죠. 그래서 아직도 그때의 옷을 입곤 해요(웃음).

主로 어디서 옷을 샀나요.

百貨店이나 東大門 市場이요. 當時 옷은 크게 百貨店 옷과 東大門 옷으로 나뉘었어요.

일하는 女性에 對한 認識은 어땠나요.

大學을 卒業하면 잘났든 못났든 當然히 일을 해야 한다는 認識이 一般的이었어요.

‘워너비’로 여겼던 女性像을 꼽자면.

自由롭고 進取的인 女性이요. 李孝利 氏가 代表的인 것 같아요. 또 女性 리더도 롤 모델이었어요. ‘天才 少女’로 불렸던 윤송이(現 NC소프트 社長) 氏가 생각나요.

只今 職業에 對한 當時 認識은 어땠나요.

當時엔 只今 職業에 對한 槪念 自體가 없었던 듯해요. 저만 해도 다니던 大企業을 나와 가게를 열었는데, 엄마는 우시고 아빠는 한동안 오지도 않으셨어요. 親하게 지내던 知人들도 節 멀리하더라고요.

女子라서 差別받았다고 느낀 적이 있나요.

‘男女는 平等하다’는 敎育을 받아서일까요. 差別받았다는 記憶은 없어요. 다만 서울 黃鶴洞 廚房 距離에 道具를 사러 男동생을 데리고 가니 혼자 갔을 때보다 30%는 싸게 팔더라고요. ‘女子라서 만만히 보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죠.

같은 時代를 살아온 또래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40代는 自身의 커리어와 育兒 사이에서 葛藤과 슬럼프를 겪게 되는 것 같아요. 職場에서는 職級이 올라가면서 외로워지기도 하고요. 하지만 가장 아름다운 時節이라 생각해요. 커리어에서 많은 成就를 이뤄낼 수 있는 時期니까요. 같이 힘을 냈으면 좋겠어요.

오늘 20代부터 70代까지 女性들이 모여 인터뷰를 해요. 先輩 或은 後輩 世代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요.

우리는 失敗가 두려워서 挑戰을 하지 못할 때가 많아요. 나이가 들수록 두려움은 더 커지고, 失敗했다는 말을 꺼내기도 어려워져요. 他人의 評價에 눈치 보지 말았으면 하고, 自身의 世代가 어떻든 서로의 失敗를 慰勞할 수 있다면 좋겠어요.

36歲 박현선
인플루언서 兼 쇼핑몰 CEO

當時엔 어떤 패션이 流行했나요.

부츠컷, 로라이즈 靑바지에 블라우스, 카디건을 입는 게 流行했죠. 세븐陣, 트루릴리젼 靑바지에 힐을 신고 짧은 카디건을 입는 食餌요.

스타일을 先導했던 아이콘, 셀렙을 꼽자면.

제 境遇는 제시카 알바요. 當時 파파라치들에게 찍힌 寫眞이 流行했는데, 그 옷차림을 많이 따라 하곤 했어요.

좋아했던 브랜드나 즐겨 했던 스타일은요.

저는 舞踊을 專攻해서 쥬시꾸뛰르의 벨벳 트레이닝服 세트를 校服처럼 입었어요. 마크제이콥스, 세븐陣 靑바지도 많이 着用했고요.

人氣를 끌었던 物件이나 場所는.

王 머리띠, 슈콤마보니 신발이 流行했고, 鴨鷗亭 로데오 거리가 핫 플레이스였어요. 맥도날드度 자주 갔고 ‘커피오카’라는 버블티 집도 人氣가 많았죠.

現在와 그때의 패션을 比較하자면.

비슷하지만 저희 때는 배를 잘 내보이지 않았어요. 요즘엔 재킷도 와이드한데 크롭트 티에 배기팬츠를 입잖아요. 허리를 强調하고 骨盤을 크게 表現하는 傾向이 있어요. 西洋 스타일로 많이 變한 듯해요. 또 저희 때는 부츠컷 바지에 힐을 主로 신었다면 只今 世代는 運動靴를 즐겨 神고요.

主로 어디서 옷을 샀나요.

百貨店에는 시즌別로 옷이 나오는데, 每番 스타일이 비슷하다 느껴서 海外 直球를 많이 했어요. 또 體軀가 작다 보니 旣成服은 사이즈가 잘 맞지 않을 때가 많았어요. 그래서 直接 만들어 입기도 했죠.

일하는 女性에 對한 認識은 어땠나요.

일하는 女性과 그렇지 않은 女性에 對한 區分이 뚜렷했던 것 같아요. 예컨대 일하는 女性은 ‘워킹맘’, 그렇지 않은 女性은 ‘아줌마’로 생각하는 食餌요. 또 일하는 女性은 ‘돈을 벌기 위해’ 職業을 가진 사람으로 여겨지곤 했어요. 只今은 自尊感과 커리어를 위해 일하는 女性들이 많은 것 같아요.

‘워너비’로 여겼던 女性像을 꼽자면.

李孝利 氏처럼 正體性과 自己主張이 剛한 女性들이 脚光받았어요.

只今 職業에 對한 當時 認識은 어땠나요.

저는 20代 初盤에 學校를 다니며 온라인쇼핑몰 運營을 始作했어요. “왜 그렇게 일을 熱心히 하냐, 집 事情이 어렵냐”라는 말을 듣곤 했죠(웃음). 요즘은 온라인 쇼핑이 너무나 一般的이지만 그땐 옷은 當然히 입어보고 사야 한다는 認識이 支配的이었어요.

女子라서 差別받았다고 느낀 적이 있나요.

性別 때문에 差別받은 記憶은 없는 것 같아요. 아, 事業을 하면서 나이가 좀 있는 男性들로부터 “女子가 뭘~” 이런 소리를 들은 적은 있네요(웃음).

같은 時代를 살아온 또래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저는 元來 모든 일에 안 돼도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無條件 부딪쳐보는 스타일이에요. 그런데 요즘은 20代 때보다 에너지가 덜해진 걸 느껴요. 아직 젊은데(웃음). 그러니 可能할 때 無條件 挑戰하면 좋겠어요.

오늘 20代부터 70代까지 女性들이 모여 인터뷰를 해요. 先輩 或은 後輩 世代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요.

自身만의, 할 수 있는 무언가를 가진 女性은 正말 멋있게 느껴져요. 누구든 自己 啓發을 꾸준히 하면서 自身의 正體性을 確實히 해나갔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自尊感度 지킬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28歲 홍자민
유튜브 크리에이터

當時엔 어떤 패션이 流行했나요.

치마 레깅스와 플로럴 패턴이 들어가 있는 옷이 流行했어요. 저도 科잠(學科 점퍼)에 플로럴 패턴을 새겼고요(웃음).

스타일을 先導했던 아이콘, 셀렙을 꼽자면.

김나영 氏요. 放送人에서 한창 ‘패션 피플’로 떠오르던 時期로 記憶해요. 러블리한 느낌의 공효진 氏도 있었고요.

좋아했던 브랜드나 즐겨 했던 스타일은요.

셀린, 르메르 브랜드를 좋아했어요. 슬랙스, 靑바지를 즐겨 입었고 챙이 앞으로 나온 帽子도 캐주얼하게 쓰곤 했죠.

人氣를 끌었던 物件이나 場所는.

루피 망고 帽子요. 두꺼운 털실로 뜬 모者데 大流行이었어요. 이세이미야케의 바오바오 가방도 하나씩 들고 다녔죠. 핫 플레이스는 홍대 距離요. 特히 합정동으로 넘어가는 길에 있는 ‘三거리布車’에서 술을 많이 마셨어요(웃음).

現在와 그때의 패션을 比較하자면.

거의 다를 게 없어요. 그때도 過하지 않은 걸 좋아했어요. 어두운 色 或은 흰色, 검은色 같은 無彩色 系列을 選好했죠. 굳이 差異를 꼽자면 趣向이 더 클래식하게 變했어요. 조금이라도 더 심플하게, 하나 더 빼려고 하죠. 例를 들어 前보다 액세서리를 하나라도 더 줄이려 해요.

主로 어디서 옷을 샀나요.

길거리나 온라인쇼핑몰에서 購買했어요. 온라인쇼핑몰 中엔 ‘스타일난다’ ‘프롬비기닝’을 좋아했어요. 또 名品에 빠져서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아 하나씩 사기도 했는데, 첫 名品은 생로랑 클래식 체인 百이었어요(웃음).

일하는 女性에 對한 認識은 어땠나요.

女子가 일하는 게 너무나 當然하게 여겨졌죠. 就業 準備할 때 說明會에 가면 女子들이 더 많이 왔던 記憶이 나요.

‘워너비’로 여겼던 女性像을 꼽자면.

特定人을 꼽을 순 없지만 主體的이고 自己 主觀이 뚜렷한 女子가 理想的이라 여겨졌어요.

只今 職業에 對한 當時 認識은 어땠나요.

그땐 유튜브 크리에이터가 職業으로 생각되진 않았던 것 같아요. 유튜브 크리에이터에 앞서 아프리카TV 等에서 BJ가 먼저 流行했는데, 草創期 BJ에 對한 認識이 안 좋았던 것처럼 저희 亦是 ‘關心 種子’로 여겨졌어요. 事實 只今도 그렇게 友好的이진 않아요. 紹介팅을 하려 해도 제 職業이 부담스럽다며 相對가 받지 않는 境遇도 있었어요.

女子라서 差別받았다고 느낀 적이 있나요.

差別을 받은 記憶은 없어요. 하지만 差別的인 發言이라 느껴지는 말은 들었죠. “女子는 예뻐야 하고 몸매도 좋아야 한다”는 말이요. 自身이 예쁘고 싶은 건 상관없지만 ‘Must’가 된다면 差別이죠. 各自의 個性이 있다고 생각해요.

같은 時代를 살아온 또래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저는 다니던 會社를 관두고 이 일을 하게 됐어요. 理由는 ‘하고 싶은 걸 하기 위해서’였어요. 周邊 또래들을 보면 趣向이 뚜렷한 사람이 別로 없어요. 自己가 正말 뭘 하고 싶은지 찾기 위해선 많이 보고, 많이 다니고, 많이 들어야 해요. 自身이 하고 싶은 일을 꼭 찾았으면 해요. 앞으로의 삶이 길잖아요.

오늘 20代부터 70代까지 女性들이 모여 인터뷰를 해요. 先輩 世代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요.

모두 오랫동안, 內面과 外面 모두 健康하시면 좋겠어요. 엄마를 보며 種種 ‘무엇이든 엄마가 더 배우고 工夫했으면 좋겠다’ 생각하곤 했어요. 나이와 相關없이 더 재미있게 自身의 삶을 사셨으면 좋겠어요.

寫眞 조영철 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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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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