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티 나희선의 成功 가져온 꿈·選擇·애티튜드|여성동아

PEOPLE

story

도티 나희선의 成功 가져온 꿈·選擇·애티튜드

글 정혜연 記者

2021. 02. 25

放送局 PD를 꿈꾸던 就業準備生에서 2百44萬 팔로어를 거느린 크리에이터 ‘도티’를 거쳐 스타트업 ‘샌드박스네트워크’의 創立者로 서기까지, 남달랐던 나희선이 걸어온 길과 꿈 이야기.

서울 용산의 30層 높이 빌딩에서 내려다본 漢江과 汝矣島는 映畫에서나 나올 법한 全景이었다. 이런 곳에서 일한다면 愛社心도 절로 생길 것만 같다. 1人 放送 크리에이터들이 契約하고 싶어 하는 MCN(Multi Channel Network)으로 첫손에 꼽히는 ‘샌드박스네트워크(以下 샌드박스)’는 新築 빌딩 高層에 位置해 있다. 널찍한 事務室에는 20~30代로 보이는 2百餘 職員들이 奔走하게 일하고 있어 한창 成長하는 스타트業의 斷面을 보는 듯했다. 

샌드박스를 設立한 이는 1世代 크리에이터로 손꼽히는 ‘도티’ 나희선(35)이다. 2015年 나희선은 大學 同門인 구글 出身 이필성 代表와 ‘크리에이터들이 마음껏 活動하며 成長할 수 있는 놀이터를 만들자’는 目標로 샌드박스를 세웠다. 서울 江南의 한 住宅街 2層 자그마한 事務室에서 단출하게 始作한 샌드박스는 이제 高層 빌딩 3個 層을 통째로 쓰는 어엿한 中小企業으로 成長했다. 이는 나희선 代表가 유튜브 크리에이터로 成功하지 못했다면 不可能했을 일이다. 

나희선은 2013年 유튜브에 ‘도티TV’를 열었다. 平素 게임할 때 쓰던 도티라는 닉네임을 채널 看板에 달았다. 콘텐츠는 當時 全 世界的으로 人氣를 누리던 게임 ‘마인크래프트’로 定했다. 平素 게임을 좋아하던 나희선은 유튜브 콘텐츠를 物色하는 過程에서 直接 하는 게임과 보는 것이 재미있는 게임은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디지털 레고’ 性格이 剛한 마인크래프트는 創作者의 能力에 따라 ‘디지털 無限挑戰’을 만들 수도 있을 거라 直感했다. 當時 放送局 PD를 꿈꾸는 就業準備生이던 나희선은 ‘購讀者 1千 名만 모아 履歷書에 한 줄 써 넣자’는 心情으로 1人 放送을 始作했다. 3個月 만에 照會數 1千을 記錄했고, 첫 收益으로 30萬원이 通帳에 入金됐다. 以後 그는 돌아갈 다리를 불사르고 유튜브 채널을 키우는 데 專念한 끝에 2016年 팔로어 1百萬, 2018年 2百萬이라는 成果를 얻었다. 當時 初等學生을 對象으로 가장 尊敬하는 사람을 묻는 設問調査에서 도티는 金姸兒, 유재석에 이어 3位를 記錄했다. 4位는 李舜臣 將軍이었다. 

이른바 ‘超統領’李 된 나희선度 어릴 적엔 게임을 좋아하던 平凡한 學生에 지나지 않았다. 한父母 家庭에서 자란 데다 體軀도 矮小했으나 나희선은 스스로의 삶을 즐겁게 만들 方法을 알고 있었다. 人氣 있는 게임을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을까 硏究하고, 親舊들에게 게임 잘하는 法을 알려주며 人氣를 얻었던 것. 親舊들 사이에 ‘희선이랑 놀면 재미있다’는 所聞이 퍼진 건 當然한 結果였다. 

그렇다고 學業을 等閑視한 건 아니다. 그는 入試로 이름을 떨친 高等學校에 들어가 工夫에 沒入했다. 工夫도 게임에서 ‘퀘스트를 깨듯’ 成果마다 스스로에게 補償을 주는 式으로 해 힘든 줄 몰랐다고. 그 德에 延世大學校 人文 系列에 隨時로 合格했다. 그러나 大學 生活은 彷徨의 連續이었다. 富者가 되겠다는 一念으로 不動産 工夫를 始作했고, 旣往 工夫할 거 法學을 專攻해 司法試驗을 準備했지만 길이 아니란 생각에 이내 抛棄했다. 軍隊에서 偶然히 어느 企業 廣告를 보고 ‘文化를 만드는 사람’을 꿈꾸며 放送局 PD를 希望했다가 結局 크리에이터의 길을 걷게 됐다. 



뒤돌아보면 그의 人生에 플랜A가 成功한 境遇는 많지 않았다. 오히려 플랜B가 只今의 나희선을 만들었다고 해도 過言이 아니다. 그는 이런 이야기를 담은 自敍傳 ‘도티의 플랜B’를 1月 末 出刊했다. 2月 初 샌드박스 社屋에서 나희선을 만나 自身만의 특별한 人生 스토리와 꿈 이야기를 들었다.


1世代 크리에이터로 成功 街道를 달렸고, 스타트업 設立도 이뤘는데 感懷가 어떤가요. 

2013年 1世代 크리에이터로 포지셔닝되면서 롤 모델이 없는 狀況에서 熱情만 가지고 事業에 뛰어들었어요. 크리에이터 亦是 就業을 위해 始作했는데 그 안에서 즐거움과 才能을 찾았고 그게 ‘업(業)’이 될 거란 希望까지 가졌죠. 그렇게 1人 放送에 모든 걸 걸었더니 어느새 여기까지 왔네요. 샌드박스를 이필성 代表와 같이 세우긴 했지만 비즈니스는 이 代表가 맡아서 하기 때문에 저는 會社 運營에 關與하지 않아요. 所屬 탤런트로서 콘텐츠를 持續的으로 生産하고, 샌드박스에 合流하는 다른 크리에이터들이 成長할 수 있도록 도우며 그들이 믿고 따를 수 있는 存在가 된 것만으로 感謝하고 있어요. 

大學 時節 明確한 꿈 없이 不動産 工夫, 司法試驗을 準備하다 放送局 PD로 目標를 바꿨는데 冊을 보니 그마저도 可能性이 없었던 걸로 나와요. 20代 나희선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宏壯히 優柔不斷한 學生이었어요(웃음). 좋게 보면 많은 經驗을 한 것 같지만 事實 彷徨을 많이 했죠. 大學 親舊 셋과 2學年 여름放學에 한 달間 유럽 旅行을 다니며 ‘父子는 時間을 사고 가난한 者는 時間을 판다’는 걸 깨달았어요. 現實的인 사람이 되고 싶어서 不動産에 얕은 水準의 關心을 가지고, 敎養으로 法學 授業을 들었는데 學問的 興味를 發見했죠. 아예 轉科를 해서 司法試驗까지 準備했지만 그 當時 로스쿨 法案이 通過되면서 조바심이 났고, 時間이 갈수록 깜냥이 아니란 생각에 虛送歲月을 보냈어요. 돌이켜보면 전 世上에 휘둘리는 사람이었어요. 中心이 確固하지 않았기에 狀況에 따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생각했고, 그때마다 플랜B를 選擇해 實行하는 過程의 連續이었어요. 

履歷書에 한 줄 써 넣기 위해 마인크래프트 1人 放送을 始作한 逸話는 有名한데요. 그 當時 마인크래프트가 이렇게 오래 人氣를 끌 거라고 豫想하셨나요. 

當時 글로벌 트래픽의 折半 以上을 차지할 程度로 핫한 게임이었어요. 무엇보다 게임의 屬性 自體가 다르다는 點에서 可能性을 엿봤어요. 오픈 월드에서 무엇인가를 짓고 부술 수 있으니 ‘디지털 藝能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겠다 생각했어요. 콘텐츠가 無窮無盡하게 派生될 수 있으니까 10年이 아니라 30年 以上 가겠다 싶더라고요. 그런데 10代 初等學生들이 거기에 熱狂할 줄은 몰랐어요. 또 콘텐츠를 先占한 效果도 있어서 德을 본 것 같아요. 

就業을 접고 크리에이터로 轉向했을 때 一週日 내내 밤낮없이 企劃, 放送, 編輯, 업로드를 했더라고요. ‘유튜브로 쉽게 돈 번다’고 말하기 未安할 程度였는데 무슨 마음으로 臨했나요. 

그때는 超人的인 에너지가 있지 않았나 싶어요(웃음).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잠을 줄여가며 放送에 熱中하는 게 너무 즐거웠어요. 映像을 올리면 照會 數가 50이었다가 1百으로 늘어나고, 피드백까지 오니 재밌더라고요. 제가 些少한 데 意味 附與를 하는 便인데, 20分짜리 映像을 1百 名이 봤다는 건 누군가의 2000分을 사로잡았다는 뜻이잖아요. 더 잘해야겠다는 欲心에 포토샵을 배워 텍스트 디자인과 섬네일 製作도 直接 했어요. 그러다 보니 時間이 絶對的으로 모자랐는데 그때 題目 달기, 映像 說明, 섬네일, 섹션 分割 等 하나부터 열까지 챙긴 經驗이 資産으로 남았죠. 그 일은 아무리 技術이 發展해도 人工知能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지루하고 힘든 일이지만 定해진 날짜와 時間에 例外 없이 업로드해왔어요. 유튜브 콘텐츠의 價値가 評價 切下되지 않았으면 해요. 

2015年 6月, 서울 삼성동 事務室에서 只今의 샌드박스를 創業했어요. 5年 만에 賣出 6百億원을 達成하고 신사옥으로 移轉했는데 成功 祕訣이 무엇인가요. 

一旦 크리에이터가 直接 運營하는 MCN이라 많은 크리에이터가 좋은 點數를 줬다고 봐요. 個人的인 努力도 있었지만 時代가 産業을 膨脹시킨 側面도 있고요. 디지털 生態系가 날로 成長하면서 디바이스는 勿論 네트워크의 發展 速度도 빨라졌죠. 事實 저희 會社는 時代에 끌려가듯 成長했다고 볼 수도 있어요. 또 롤 모델이 없는 비즈니스를 어떻게 이끌어나가야 하는지 苦悶도 恒常 있었어요. 勿論 글로벌 MCN도 많지만 國內 디지털 미디어 生態系는 全혀 다르거든요. 크리에이터 支援과 同時에 미디어 콘텐츠 事業을 함께 擴張해나가며 브랜드를 키워왔는데 훌륭한 任職員이 參與하면서 劇的으로 成長한 것 같아요. 이렇게 精神없이 나아가는 會社에서 力量을 發揮하고 있는 全體 스태프에게 매우 感謝해요. 

구글 다니던, 一名 ‘브레인’ 이필성 代表와 이미 成功한 크리에이터 도티가 뭉쳤기에 可能한 일 아니었을까요. 

스타트업은 팀이 重要해요. 投資者들은 創業者가 그저 ‘스웩’을 부리는 건지 眞짜 事業을 해보려고 하는 건지 다 알아요. 事實 이필성 代表는 저희 또래集團 사이에서는 羨望의 對象이었어요. 名門大를 卒業하고 只今도 들어가기 힘든 구글이라는 꿈의 職場에 就業했으니 다들 우러러봤죠(웃음). 저는 필성이가 親舊지만 그 當時 ‘敢히 필성이한테는?’ 이런 게 있었어요. MCN 創業이라는 꿈을 꾸면서 그런 필성이를 어렵사리 캐스팅해 같이 投資를 받으러 다녔는데, 投資者들이 보기에 ‘이 팀은 찐이다’라는 게 있었던 거 같아요. 


도티님의 人間的인 됨됨이가 投資者들에게 自然스레 드러나지 않았을까 싶어요. 어려운 環境에서도 반듯하게 자랐는데 그 時節이 힘들지 않았나요. 

學窓 時節 힘들지 않으려고 努力했어요. 多幸히 外向的이었고 矮小한 體格을 커버하는 能力値가 있었어요. 게임을 좋아해 그것으로 親舊들과 疏通했는데 親舊들 사이에서 恒常 尊重받았어요. 또래集團에서 ‘희선이랑 놀면 재밌어’라는 雰圍氣가 形成됐죠. 아마 한父母 家庭에서 자라지 않았다면, 體格이 矮小하지 않았다면 努力하지 않았을 거예요. 缺乏이 누군가에게는 不幸으로 作用할 수 있지만 제겐 삶의 原動力으로 作用했던 셈이죠. 

父母님께서 아들을 자랑스러워할 것 같아요. 

그럼요. 새로 映像을 올릴 때마다 카카오톡 프로필 寫眞을 바꾸실 程度니까요(웃음). 유튜브를 始作할 때도 어머니는 제가 正確히 어떤 일을 하겠다는 건지 잘 모르셨어요. 그렇지만 걱정하지 않으셨고 제게 잘할 수 있을 거라고 應援해주셨어요. 그 德에 유튜브에 沒入할 수 있었죠. 

高等學校 때 ‘퀘스트를 깨듯’ 工夫하고, ‘하루에 (椅子에서) 3番만 일어난다’는 룰을 定해 工夫한 것도 흥미로워요. 元來 승부욕이 强한 便인가요. 

승부욕이 있다기보다는 工夫를 재미있게 할 수 있는 方法에 對해 苦悶을 했죠. 제가 入學한 高等學校가 ‘돌을 깨서 玉으로 내보낸다’는 評判이 있을 程度로 强壓的으로 工夫를 시켰어요. 優劣班으로 나눠 全校生 强制 自律學習을 시켰는데 全 右半에 屬해 있어서 特別 管理를 받았어요. 빡셌지만 그 속에서 재미를 찾아야 했기에 미션처럼 ‘挑戰 課題’를 만들어 스스로에게 補償을 주는 式으로 工夫했어요. 例를 들어 1團員을 다 풀면 시트콤 1篇 보기 같은 거요. 또 저보다 잘하는 親舊가 먼저 下校하면 10分 더 앉아 있었는데 그 時間에 굳이 工夫를 하지 않더라도 뭔가 그 瞬間 自體가 뿌듯하더라고요. 저만의 놀이였던 셈이죠. 1學年 첫 試驗에서 班에서 25等을 했는데 期末考査에서는 全校 1等을 했어요. 內申 成績이 좋은 德分에 大學도 隨時로 들어갈 수 있었죠. 

大學에서 彷徨하다가 뒤늦게 간 軍隊에서 人生의 단맛을 봤고 또 꿈도 생겼다고요. 

軍隊 生活이 재미있었어요. 後方에 配置받은 德도 있지만 行政兵이 適性에 잘 맞았어요. 빠른 時間 내 業務에 適應했고 幹部에게 人情도 받았어요. 助敎들 사이에 ‘쪼그만 애가 엄청 熱心히 한다’고 所聞이 퍼졌죠. 또 軍需司令部에서 主催하는 陰語暗語 解毒大會까지 나가 兵士 出身으로는 異例的으로 1等을 해 部隊에서 엄청난 歡待를 받기도 했어요. 前 다시 軍隊 가라고 해도 갈 거예요(웃음). 그때 하루 日課 中에 TV 視聽이 큰 慰勞가 됐는데, 廣告에서 본 ‘文化를 만듭니다’라는 슬로건이 와 닿았고 ‘저걸 해야겠다’는 생각에 轉役 後 放送國 就業에 뛰어들었어요. 

金姸兒 選手 덕후였던 것이 成功의 礎石이 됐다고요. ‘착한 過沒入’이란 무엇인가요. 

金姸兒 選手의 眞性 덕후였어요. 팬카페 活動을 하면서 金姸兒 選手의 映像을 죄다 모았고, 先着順 굿즈 共同購買도 빠짐없이 申請할 程度였죠. 누군가는 쓸데없는 짓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전 덕질의 順機能이 있다고 생각해요. 온라인에서 金姸兒 選手에 關한 새로운 콘텐츠를 每日같이 기다렸고, 그런 日常의 설렘이 現實에서 肯定的인 影響을 끼쳤거든요. 金姸兒 選手 映像을 더 보기 좋게 만들고자 映像 編輯을 배웠는데 그게 크리에이터로의 進入 障壁을 낮춘 契機가 됐어요. 돌아보면 世上에 意味 없는 일은 없는 것 같아요. 

크리에이터로 成功하려면 어떤 條件이 必要한가요. 

冊에 勇氣, 所信, 끈氣, 멘탈, 共感 能力 5가지를 꼽았는데 무엇보다 共感 能力이 重要하다고 생각해요. 유튜브 채널에선 크리에이터와 視聽者가 卽刻的으로 만나요. 크리에이터는 ‘내가 만든 스타’ ‘손 뻗으면 닿을 것 같은 스타’ ‘우리만의 스타’인 거죠. 主題는 다르지만 大部分 特定 趣向을 다루거든요. 그것을 좋아해서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理解해야 해요. 아이들이 “도티님 어떻게 하면 크리에이터가 될 수 있나요”라고 물을 때면 “게임만 잘한다고, 化粧만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내 옆에 있는 親舊 한 名과 잘 지내는 게 먼저”라고 말해줘요. 팔로어 1百 明과 잘 지내려면 疏通과 共感 能力이 第一 重要하지 않겠어요? 

크리에이터로 全盛期를 누릴 때 恐慌障礙가 찾아왔다고요. 어떻게 克服한 건가요. 

頻度가 줄긴 했지만 只今도 가끔 찾아와요. 한 番에 完治되는 건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처음 恐慌障礙가 왔을 때 放送을 中斷하고 外部 刺戟을 받지 않는 狀態로 蟄居만 했어요. 그런데 全혀 나아지질 않더라고요. 그 渦中에 MBC ‘라디오스타’에서 涉外가 들어왔는데 人生에 다시 없을 機會인 것 같아 나갔더니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1人 放送을 하다가 放送局에서 作家, PD, 製作陣이 協業하는 모습을 實際로 보니까 그런 프로세스가 神奇하기도 했고요. 以後로 大衆이 도티가 아닌 ‘人間 나희선’을 좋게 봐주셨고 저 亦是 ‘自然人으로도 사람들에게 좋은 影響力을 끼칠 수 있겠구나’ 하는 希望을 發見했어요. 꺼져가던 불씨가 다시 살아나는 느낌이 들었죠. 以後 ‘마이 리틀 텔레비전’ ‘全知的 參見 時點’ 等에 出演하며 恐慌障礙가 徐徐히 나아졌어요. 

요즘 꿈이 없다는 어린이들이 많아요. ‘꿈은 追求하는 게 아니라 發見하는 것’이란 冊 속 글句가 와 닿았는데, ‘超統領’으로서 助言 한 말씀 付託드려요. 

父母의 지나친 期待와 抑壓 속에 힘들어하는 어린이들이 많아요. 父母님들이 벌써부터 플랜을 다 짜놔서 그대로 해야 하는 아이들이 大部分이죠. 生放送을 하면 아이들이 苦悶을 털어놔요. “꿈이 없어요”라고 말하는 親舊들도 正말 많죠. 그 親舊들에게 “벌써부터 꿈이 確實한 건 잘못된 게 아닐까? 더 많은 發見과 試圖를 해봐야지”라고 말해줘요. 只今 한 가지에 埋沒되면 나중에 發見될 꿈을 놓치게 될 테니까요. 해야 할 것들을 하루하루 完遂하며 所重하게 日常을 꾸려나가는 것만으로도 充分해요. 그런 아이들에게 “도티는 여러분이 얼마나 所重한 사람인지 알고 있다”고 꼭 말해주고 싶어요.

寫眞 홍태식 寫眞提供 샌드박스네트워크



  • 推薦 0
  • 댓글 0
  • 目次
  • 共有
댓글 0
닫기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Copyright ⓒ 2020 By '전통문화연구회(傳統文化硏究會)' All Rights reserved.
 한국   대만   중국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