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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정의 JAZZ&FRIENDS|여성동아

PEOPLE

윤희정의 JAZZ&FRIENDS

닿을 수 없는 그리움에 純情을 바치다

글 · 金明熙 記者 | 寫眞 · 조영철 記者, 민영주포토 JK 提供

2015. 07. 16

黑人이 만들고 白人이 키운 音樂, 재즈가 韓國에서 大衆化한 데는 ‘韓國 재즈의 代母’라 불리는 尹喜鄭의 持分도 적지 않다. 그 功을 認定받아 最近 2015 럭셔리 브랜드 모델 施賞式에서 公演藝術 對象을 받은 그女의 재즈를 向한 꽃 같은 純情과 탱크 같은 熱情.

윤희정의 JAZZ&FRIENDS
日本 作家 무라카미 하루키가 재즈 마니아라는 건 널리 알려진 事實이다. 젊은 時節 ‘피터 캣’이라는 재즈 바를 運營했고, 무엇보다 여러 小說과 에세이에서 재즈에 對한 偏愛를 公公然하게 드러내기도 했던 그는 “내게 있어 재즈 레코드 한 張 한 張은 寶物이었으며, 다른 世界로 들어가는 貴重한 入場券 같은 것이었다”고 말했다. 재즈가 새로운 世界로 들어가는 入場券이라면 하루키는 自身의 作品을 읽는 不特定 多數를 相對로 그 티켓을 空中에 撒布한 사람쯤 될 것이다.

윤희정(62)은 好奇心 半, 두려움 半으로 그 門 앞에 서서 망설이는 이들에게 재즈의 맛을 살짝 보여주고는 結局은 사랑에 빠지고야 말게 만드는 人物이다. 1997年부터 2百50餘 名의 政 · 財界 人士와 스타들에게 재즈를 가르쳐 ‘윤희정 · 프렌즈’라는 타이틀로 정동극장과 재즈 클럽 빅애플, 문화일보홀에서 2011年까지 200回 公演을 펼쳤으며, 이를 마무리하고는 ‘이 노래, 아세요?’라는 冊을 펴내 베스트셀러에 올려놓았다. 2013年부터는 재즈를 通한 힐링을 테마로 ‘재즈 프렌즈 파티’라는 프로그램을 運營하고 있으며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빅쇼를 열고 있다. 2001年 워커힐 호텔에서 始作한 이 公演은 5年 前부터 朝鮮호텔로 자리를 옮겨 ‘재즈 크리스마스’라는 이름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올해는 12月 21日 · 22日에 공연될 豫定이다. 그女가 國內에서 재즈를 大衆化한 代表的인 人物이라는 點에 딴죽을 걸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 그女가 5月 末 2015 럭셔리 브랜드 모델 施賞式에서 公演藝術 對象을 受賞했다. 施賞式 며칠 後 윤희정과 마주 앉았다.

“只今껏 재즈에 빠져 살았는데, 그 마음 變치 말라고 주는 賞 같아요. 재즈가 元來 그래요. 一週日 前까지 같이 트럼펫을 풀던 폴이 오늘 갑자기 안 보여서 ‘폴 어디 갔니?’라고 물어보면, ‘어제 죽었어요’ 하는 거. 世上을 떠날 때까지 永遠한 잡(일)을 갖는 거죠. 재즈의 女王이라 불리는 엘라 피츠제럴드度 綠內障에 末年에는 糖尿로 다리까지 切斷했지만 그 몸으로 끝까지 노래를 불렀어요. 한番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어요.”

元祖 오디션 스타에서 재즈 代母 되기까지

요즘 노래 좀 부른다는 사람들이 ‘슈퍼스타K’나 ‘K팝스타’ 같은 프로그램에 나가는 것처럼, 1970年代에 노래 깨나 한다는 젊은이들에겐 ‘KBS杯 爭奪 全國노래자랑’李 꿈의 舞臺였다. 當代 最高의 뮤지션들이 審査를 하는 이 大會 優勝者에게는 엄청난 商品과 함께 KBS 專屬 歌手의 特典이 주어졌는데, 그 첫 回(1971) 그랑프리 受賞者가 尹喜鄭이다. 中 · 高等學校 6年 동안 音樂班長을 지내며, 노래 잘한다는 稱讚을 달고 지냈던 그女는 이 일로 하루아침에 全國區 스타가 됐다.



“다음 날 아침에 보니까 雜誌 街販臺에 내 얼굴이 쫙 깔려 있더라고요. 당황스러웠지만 싫지는 않았어요. 副賞으로 받은 TV며 電蓄, 冷藏庫를 트럭에 바리바리 싣고 故鄕인 仁川으로 내려갔더니, 마침 서울對 法大에 다니던 오빠가 高等考試에 最年少로 合格해 집안이 온통 잔칫집 같았어요. 그 雰圍氣를 틈타 아버지께 歌手가 되겠다고 했더니, 우리 집안에 딴따라가 웬말이냐며 펄쩍 뛰셨죠.”

平安道 出身인 그의 아버지는 6 · 25戰爭 때 越南해 仁川에서 電子製品 販賣店을 꽤 크게 하고 있었는데, 그 時節 피란 내려와 온갖 苦生 끝에 以南에 자리 잡은 以北 사람들이 그렇듯 子女들에 對한 사랑과 敎育熱이 대단했다. 6男妹 中 다른 兄弟들은 이런 아버지의 期待에 副應해 모두 工夫에서 頭角을 드러냈고, 長成해서는 모두 博士 學位를 받았다. 그러나 그女는 冊床머리에 앉아 工夫만 하는 다른 兄弟들을 理解할 수 없었다. 工夫보다는 노래가 좋았다. 이 또한 아버지로부터 울림筒이 큰 聲帶와 엔터테이너 氣質을 물려받은 德分이다. 기타를 세 番이나 부쉈을 程度로 極甚했던 아버지의 反對는, 高等考試에 合格한 오빠의 說得으로 가까스로 克服했다. 이렇게 해서 스무 살에 ‘세노야’라는 音盤을 내고 本格的으로 音樂을 始作한 그女가 재즈와 因緣을 맺은 건, 그 後로도 20年이나 지난 마흔 무렵이 돼서였다.

“20代 中盤에 結婚해 아이들을 낳아 키우면서 한동안은 音樂을 못했고, 그 後로는 가스펠을 부르며 海外 宣敎를 많이 다녔어요. 그런데 왠지 空虛했어요. 뭔가가 더 있을 것 같은데 손에 잘 잡히지 않는 氣分이었죠. 그때 어떤 분이 저를 이판근 先生에게 소개시켜주더군요. 先生님 宅에 들어서니 度도 아니고 레度 아닌 異常한 사운드가 들리는데, 가슴이 막 뛰는 게 ‘그동안 내가 찾아 헤맸던 게 바로 이거구나’ 싶더군요.”

이판근 先生은 韓國 재즈界의 先驅者로 불리는 理論家이자 作曲家다. 정원영 · 김광민 · 이정식 · 강태환 等 숱한 뮤지션들이 그에게서 배워 各自의 音樂 世界를 構築했다. 윤희정이 찾아가자 이판근 先生의 첫마디는 “富者집 안主人처럼 생긴 사람이 왜 배고프고 고생스러운 재즈를 하려고 해?”였다. 뜻하지 않은 冷待에 慇懃히 自尊心이 傷했던 尹喜鄭은 여기에 刺戟을 받아 재즈를 始作한 以後 15年 동안 練習을 걸러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렇게 해도 音樂이 나에게 착 달라붙는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어요. 先生님께 15年을 배웠지만 5年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도 못했고, 조금 알아들은 게 10年이에요. 저는 只今도 제가 재즈를 잘하는 歌手라고는 생각지 않아요. 재즈를 알면서 짝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가슴이 뛰었고, 잘하고 싶어졌지만 能力이 不足했고, 늘 너무 어려웠어요. 어느 날은 이제 좀 알 것 같다 싶게 다가온 듯하다가도, 다음 날이 되면 저만큼 멀어져 있었죠. 抛棄하려고 하면, 거짓말처럼 제 몸에 音樂이 들어와 있기도 하고…. 그래서 저는 재즈를 熱情이 아닌 憐憫이라고 表現해요.”

熱情은 時間이 지나면 식을 수도 있지만, 憐憫은 식지 않는다. 그女에게 재즈란 미워하고 싶어도 미워할 수 없는, 하지만 다가가면 그만큼 더 멀어지는 아득한 그리움 같은 것이다.

“그건 아마 재즈를 하는 뮤지션들이 다 똑같이 느끼는 感情일 거예요. 平生 滿足할 수도 없고, 듣는 사람에 따라 好不好가 갈리죠. 엘라 피츠제럴드와 30年 동안 呼吸을 맞춘 피아니스트 토미 플라羅巾에게 ‘當身이 생각하는 最高의 디바는 누구냐’고 묻자 그가 ‘재즈는 빌리(빌리 홀리데이)地. 빌리는 靈魂을 울리잖아’ 그랬다잖아요.”

재즈가 만들어준 因緣

그女가 한창 재즈의 妙味를 알아가던 1997年 서울 德壽宮길에 있는 정동극장에서 提案이 들어왔다. 한 달에 한 番 재즈 公演을 하고, 收益金의 60%를 가져가는 거였다. 戀人을 사랑하지만 거절당할 게 두려워 告白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망설이다가 結局 못 한다고 했다. 그랬더니 이판근 先生의 불벼락이 떨어졌다. “처음부터 虎狼이를 그리면 못해도 고양이는 되지만, 고양이부터 그리면 쥐밖에 더 되겠느냐”고. 스승의 호통에 精神을 차리고 다시 찾아가서 하겠다고 했을 땐, 그의 몫이 40%로 줄어 있었다. 機會를 놓친 代價였다. 이렇게 迂餘曲折 끝에 始作한 公演에서 그女는 每回 새로운 人物에게 재즈를 가르쳐 舞臺에 세웠다. 그래서 公演 타이틀이 ‘윤희정 · 프렌즈’가 됐다.

“나는 재즈를 해보니까 너무 좋은데, 사람들은 재즈 하면 다들 어렵다고 생각해요. 그 偏見을 깨고 같이 한番 즐겨보자는 趣旨에서, 프렌즈 公演을 始作했죠. 처음엔 재즈 한番 해보자고 하면 다들 무섭다며 逃亡을 갔어요. 飮食도 먹어본 사람이 맛을 알듯 재즈도 자꾸 듣고 불러서 익숙해져야 그 맛을 알게 되거든요.”

이렇게 舞臺를 거쳐간 사람이 2百50名 가까이 된다. 南景弼 京畿道知事 · 홍사덕 前 議員 等 政治人, 김영혜 國家人權委員會 常任委員 · 송인준 辯護士 等 法曹人, 박의승 삼성물산 副社長 · 변보경 코엑스 社長 等 財界 人士, 俳優 박상원 · 유준상 · 송일국 · 소유진 · 이하늬 · 이유리 · 김효진 · 김사랑, 歌手 유열 · 玉珠鉉 等 面面도 華麗하다. 그女가 게스트를 涉外하는 基準은 ‘直觀’이다. TV를 보거나 라디오를 듣다가 ‘목소리가 괜찮다’ 싶은 사람에겐 無酌定 電話를 걸어 “재즈 한番 배워보실래요?” 하는 거다. 그에게 ‘탱크’라는 別名이 붙은 理由다. 재즈를 배우고 싶다며 直接 찾아온 境遇도 있다. 大部分 俳優나 歌手들로, 作品이나 公演에 必要해서지만 노주현처럼 ‘외롭거나 기쁠 때 흥얼거릴 수 있는 노래 한 句節이 있다면 人生이 얼마나 풍요로워질까’ 하는 마음으로 배우러 오는 이들도 있다. 放送人 金美花度 그렇게 始作해 男便까지 재즈의 世界로 끌어들였다.

國會議員 時節 ‘윤희정 · 프렌즈’ 舞臺에 섰던 남경필 知事는 그女에게 재즈를 배우는 걸, ‘골프 皇帝’ 타이거 우즈와의 라운딩에 比喩했다. 노래 實力이 出衆하지 않아도 尹喜鄭의 도움을 받으면 재즈 한 曲쯤은 웬만큼 消化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박경림 氏 같은 境遇에도 갈라지는 목소리가 재즈에 어울릴지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平凡한 것보다 그런 목소리가 오히려 재즈에 잘 맞을 수 있어요. 8個月 동안 얼마나 성실하게 練習했는지 몰라요. 公演 때 ‘Bei mir bist du scho¨n’과 ‘Misty’ 를 自身의 스타일대로 正말 멋지게 消化해내서 가르친 보람이 있었죠.”

윤희정의 JAZZ&FRIENDS
윤희정의 JAZZ&FRIENDS


윤희정의 JAZZ&FRIENDS
아무리 有名한 弟子도 一定한 水準이 되지 않으면 舞臺에 세우지 않았다. 公演이 初等學校 學藝會 水準이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 原則에 따라 熱心히 했지만 結局 舞臺에 서지 못한 弟子도 있다.

“아유, 正말 가르치다 죽을 뻔한 사람도 있어요. 그분은 拍子를 못 맞추더라고요(웃음).”

舞臺에 서지는 않았지만 그의 노래를 사랑해서 公演마다 꼭 찾는 이들도 있다. 고 앙드레 金은 世上을 떠나기 直前까지 客席 앞자리 단골 觀客이었고, 大韓赤十字社 總裁이기도 한 金聖柱 성주그룹 會長도 윤희정 재즈 마니아다. 金聖柱 會長도 게스트로 한番 招請하지 그랬냐고 묻자 그가 큰 소리로 웃었다.

“제 直觀으로는 그분은 큰일을 하시는게 더 어울릴 것 같은데요. 하하하.”

‘윤희정 · 프렌즈’가 셀레브러티들에게 재즈를 가르쳐 舞臺에 세우는 公演이었다면, 2年 前 始作한 ‘재즈 프렌즈 파티’는 재즈를 통한 疏通과 힐링을 테마로 한 一般人 對象 프로그램이다.

“누군가가 재즈를 ‘平凡한 사람들의 非凡한 音樂’이라고 했듯, 재즈는 普通 사람들이 삶에서 겪은 哀歡을 表現하면서 생겨난 音樂이에요. 우리 모두가 經驗하는 삶의 喜怒哀樂이 담겨 있죠. ‘재즈 프렌즈 파티’는 그것을 함께 노래하며 共感하고 바쁜 日常에서 느끼기 힘든 餘裕와 配慮를 찾자는 趣旨로 始作했는데 現在 1, 2, 3基를 거쳐 4基를 準備 中이에요.”

I am a fool to want JAZZ

‘젊었을 때는 꽤나 빌리 홀리데이를 들었다. 그 나름으로 感動도 하였다. 하지만 빌리 홀리데이가 얼마나 멋진 歌手인가를 正말로 알게 된 것은 훨씬 後날의 일이다. 그러니 나이를 먹는다는 것도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재즈 에세이’ 中에서

요즘은 어딜 가나 재즈 音樂이 흘러나온다. 雰圍氣 있는 레스토랑에선 特히. 黑人 特有의 靈魂이 살아 있는 올드 재즈부터, 말쑥하고 댄디한 外貌의 젊은이들이 연주하는 모던 재즈까지 스펙트럼도 多樣하다. 그女 亦是 재즈가 大勢가 된 걸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在來市場에 자주 가는 便인데, 예전엔 商人들이 절 보고 ‘성악 하는 분?’ 그랬어요. 그때도 싫지는 않았지만 只今은 ‘재즈하시는 분이잖아요?’ 하고 다들 알아보세요. ‘그동안 재즈라는 이름을 붙여 이런저런 일들을 해왔던 게 헛되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죠.”

그女가 재즈의 바다에서 건져올린 또 다른 큰 寶石은 딸 김수연이다. 2003年 그룹 버블시스터즈로 데뷔한 김수연은 現在 作曲, 編曲, 드라마 OST 作業, 大學 講義 等과 함께 演藝 奇劃社 YG엔터테인먼트의 보컬 트레이너로 活動하며 아이돌 스타들을 키워내고 있다. 그는 앞으로 딸과 疏通하고 依支하며 만들어갈 音樂 世界에 對한 期待도 크다.

“수연이는 나보다 더 독한 音樂的 DNA를 갖고 태어난 거 같아요. 엄마 배 속에서부터 音樂을 듣고 자랐으니 그럴 수밖에요. 어릴 때 敎會에서 聖歌隊를 했는데, 自己 혼자 3度 和音을 넣더라고요. 윤복희 언니가 그때부터 神奇하다 그랬죠. 그러고 나서 10年도 더 지나 버블시스터즈로 TV에 나온 걸 보고 伏羲 언니가 電話를 걸어 ‘거기 얼굴 까만 애 네 딸 수연이 아니니? 音을 밀고 당기는 게 예사롭지 않다’ 라며 今方 알아보더라고요. 그리고 요즘 아이라 確實히 아이디어가 많아요. 音樂 속에서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攄得한 것도 많고 그쪽으로 最適化된 거죠. 우리 때는 樂譜 하나, 音盤 한 張도 얼마나 貴했던지, 다른 사람이 빌려달라고 하면 原本은 잃어버릴까 봐 겁나서 못 주고 複寫해주곤 했죠. 勿論 只今이 그때보다 環境이 나아진 건 事實이지만 쏟아지는 情報의 洪水 속에서 純情을 잃어가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도 있어요. 수연이가 어떤 面에서는 나보다 낫다는 걸 認定하지만 熱情만큼은 나를 따라오지 못할걸요(웃음).”

재즈 컬렉터이기도 한 아들은 美國에서 電子工學을 工夫하다가 料理로 專攻을 바꿔 現在는 푸드 비즈니스 事業에 從事하고 있다.

“멀쩡하게 工學을 工夫하던 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料理를 工夫하겠다니, 처음엔 氣絶하는 줄 알았죠. 그땐 몰랐어요. 料理가 只今처럼 大勢가 될 줄. 재즈의 長點은 料理든 美術이든 패션이든 어떤 장르와도 콜來步레이션을 할 수 있다는 點이죠. 아들은 只今 푸드 비즈니스를 하고 있는데, 어릴 때부터 재즈를 좋아해서 즐겨 들은 게 어떻게든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수많은 재즈 가운데, 그女가 特히 좋아하는 曲이 있다. ‘I am a fool to want you(當身을 願하는 나는 바보입니다)’다. 이 曲은 元來 프랭크 시나트라가 불렀지만 1958年 빌리 홀리데이가 自身의 앨범 ‘Lady in satin’에 收錄하면서 그女를 象徵하는 曲이 됐다. 빌리 홀리데이가 입안 가득 마른 나뭇잎을 머금은 듯 거칠고 갈라진 목소리로 이 노래를 부르는 걸 듣노라면, 뜨거운 사랑의 感情과 生의 虛無가 同時에 밀려온다. 하루키가 나이가 들수록 빌리 홀리데이의 音樂이 멋지게 다가왔다고 한 건, 그 亦是 빌리 홀리데이의 목소리에 담긴 生의 悽然함에 共感하게 됐다는 걸 의미한다.

“宏壯히 有名한 曲이지만 무겁고 부르기 까다로운 탓인지 ‘윤희정 · 프렌즈’ 게스트로 오셨던 분 中 그 누구도 이 노래에 挑戰하지 않았어요. 제 나름으로는 因緣이 깊죠. 빌리 홀리데이가 부른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衝擊은 只今도 잊을 수 없어요. 밤을 새우며 數十, 數百 番을 들었죠. 그리고 只今까지 數없이 이 노래를 불렀지만, 每番 그 느낌이 달라요. 부를수록 그 魅力에 빠지게 되는 노래라고 할까요? 또한 제겐 音樂的인 方向을 提示해주는 노래이기도 하죠. ‘흔들리지 않고 너만의 길을 가라’고요. 재즈에서는 넘버원이 있을 수 없어요. 온리원이 있을 뿐이죠. 앞으로도 저만의 色깔이 녹아든 재즈를 찾는 探險을 繼續해나갈 겁니다.”

디자인 · 최진이 記者

衣裳&小品協贊 · 비비·里 LINE(한만순) CHANLUU 이안옵틱

場所協助 · 핀치카페(02-517-5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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