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社會의 品格 김병찬|여성동아

PEOPLE

#interview

社會의 品格 김병찬

EDITOR 金明熙 記者

2018. 10. 18

김병찬 아나운서는 2006年 프리랜서로 獨立한 後 KBS의 ‘看板’이라는 修飾語에서도, ‘카메라’라는 작은 프레임에서도 벗어났다. 이제는 따뜻한 사람들과 直接 疏通하며 틀에 얽매이지 않는 自由와 깨달음을 얻었다.

9月 5日 國會에서 열린 2018 國家브랜드컨퍼런스 國家브랜드對象 MC를 맡아 行事 進行을 마치고 곧바로 인터뷰 場所로 달려온 김병찬(55) 아나운서의 이마엔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國家브랜드振興院이 主催하는 國家브랜드對象은 全 世界에 大韓民國의 肯定的인 이미지를 擴散시키고 브랜드 價値를 높인 個人이나 團體를 施賞하는 行事로 올해 文化部門에서는 아이돌 그룹 워너원이 對象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의 耳目이 集中되는 큰 行事를 마친 直後라 氣盡脈盡해 있을 거란 豫想과 달리 김병찬 아나운서는 放送에서 보던 禮義 活氣 넘치는 모습 그대로였다. 

MC는 ‘Master of Ceremonies’의 줄임말로, 主催 側을 代身해 實質的으로 行事를 進行하는 사람이다. 大部分의 行事가 參席者들과의 疏通을 目的으로 한다는 點을 勘案하면 進行者야말로 行事의 成敗를 결정짓는 重要한 열쇠다. 그런 面에서 김병찬 아나운서는 主催 側이 그야말로 믿고 맡기는 MC다. 

兩班 洞네로 有名한 忠北 忠州 果樹園집 孫子로 태어난 김병찬 아나운서는 어릴 때부터 붙임性이 좋았다. “사람은 모름지기 人事를 잘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가르침에 따라 學校 가다가도 어른을 만나면 가던 길을 멈추고 꾸벅 배꼽人事를 하는 꼬마가 奇特했던 어른들은, 어느 집 몇째 아들이냐, 父母님은 安寧하시냐, 커서 뭐가 되고 싶으냐고 시시콜콜 물었고, 그렇게 어른들과 安否를 주고받느라 學校에 知覺하는 일도 있었다. 타고난 붙임性에 사람에 對한 好奇心, 느릿하지만 익살 넘치는 洞네 어르신들의 말套를 통해 體得한 才致 있는 言辯은 只今의 아나운서 김병찬을 키운 滋養分이다. 

1990年 KBS 公採 아나운서로 放送과 因緣을 맺은 그는 ‘演藝街中繼’ ‘挑戰 主婦歌謠스타’ ‘퀴즈探險 神祕의 世界’ ‘挑戰! 地球探險隊’ ‘사랑의 리퀘스트’ 等 人氣 프로그램의 MC를 맡아 아나테이너(아나운서+엔터테이너) 時代의 序幕을 열었다. 入社하자마자 看板 프로그램 ‘歌謠톱10’의 MC로 拔擢된 일은 아직도 放送街에서 傳說처럼 膾炙되고 있다. 그런 그가 2006年 KBS에서 나와 프리랜서를 宣言하며, 野生의 世界로 뛰어들었을 때 많은 이들이 成功에 對한 野望 때문일 거라는 推測을 쏟아냈다. 自身이 좋아하는 舞臺에서 大衆들과 만나고, 世上없는 愛妻家에 아들바보·딸바보, 詩를 좋아하고 쓰기도 하며 오롯이 自身에게 投資하는 평화로운 時間을 즐기는 것이 成功이라면 사람들의 그런 推測은 틀리지 않았다.

프리랜서 독립 후 일을 더욱 즐기고 자신의 삶에도 충실하게 됐다는 김병찬 아나운서.
나눔과 봉사에 대한 철학도 뚜렷했다.

프리랜서 獨立 後 일을 더욱 즐기고 自身의 삶에도 充實하게 됐다는 김병찬 아나운서. 나눔과 奉仕에 對한 哲學도 뚜렷했다.

直接 만나 인터뷰하는 건 처음인데, 오래 알고 지낸 것처럼 親近한 느낌이에요. 



洞네 洗濯所 아저씨 같다는 분들도 계세요. 제가 華麗한 걸 즐기지 않는 忠淸道 村놈이기도 하고, 放送을 통해 목소리를 많이 接해서 더 익숙하게 느끼실 겁니다. 

올해로 프리랜서 生活 13年째를 맞는데, 放送社 職員 時節과 프리랜서 MC의 가장 큰 差異는 뭔가요. 

저는 放送보다 行事가 더 맞는 것 같아요. 아나운서는 定해진 틀 안에서 움직여야 하고 그럼에도 視聽率을 神經 써야 하는데, 行事 MC는 마이크를 잡고 있는 限 제가 舞臺를 演出할 수 있어서 좋아요. 聽衆들의 反應도 卽刻的이어서 그에 따른 보람도 크죠. 

말을 잘하는 사람을 보면 늘 ‘저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 말을 잘하게 됐을까’ 궁금했어요. 

關心 있으면 觀察하고 觀察하면 洞察力이 생기고 그게 創造로 이어진다고 하는데, 말솜씨가 좋아지는 것도 그와 똑같은 理致 같아요. 말을 잘하는 사람을 보면 大體로 好奇心이 많고 洞察力이 있거든요. 듣는 사람 立場에서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내 얘기에 關心을 가질까’를 硏究하는 것도 좋아요. 저희 洞네에 週末마다 生鮮 트럭이 오는데 “눈을 떴다 감았다 하는 꽁치가 왔어요”라고 放送을 하더라고요. 實際로 生鮮이 살아서 눈을 떴다 감았다 하지는 않겠지만 그만큼 新鮮하다는 얘기죠. 그럼 재밌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해서 나가보게 되잖아요. 

2006年 갑자기 프리랜서 宣言을 해서 많은 사람들이 놀랐어요. 

放送局 入社 動機인 손범수, 정은아 아나운서가 1997年 먼저 프리랜서로 獨立했어요. 저도 當時 그런 마음을 갖고 있었는데 會社에서 많이 잡더라고요. 거기에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고, 不足한 저 自身을 조금 더 鍛鍊할 必要가 있다는 생각도 들어 留學을 擇했죠. 英國 웨스트민스터大學校 大學院에서 放送政策學을 工夫하고 2年 만에 돌아왔는데 放送 環境이 많이 바뀌어서 아나운서들의 立地가 以前보다 더 좁아졌더군요. 視聽者들은 콘텐츠 自體를 生産하는 進行者를 要求하는데, 아나운서들은 如前히 供給者 立場에서 콘텐츠를 傳達하는 仲介者 役割에 머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게 프리랜서를 選擇한 決定的인 理由죠. 

國際 行事에서 英語를 流暢하게 驅使하는 祕訣이 英國 留學 經驗 德分이었군요. 

大學 卒業 後 카투사(KATUSA·駐韓 美軍 勤務 韓國軍)로 軍 服務를 했고, 英國 留學 經驗도 도움이 됐죠. 그런데 돌이켜보면 제 境遇엔 留學을 다녀온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英語 實力을 쌓고 世界 市民으로서 自信感의 地平이 넓어진 건 좋은 일이지만, 演藝界가 企劃社 中心으로 바뀌고 H.O.T., 젝스키스 같은 아이돌 그룹이 막 나오기 始作한 時期에 그런 새로운 文化의 誕生과 흐름을 함께하지 못한 건 아쉬운 部分이에요. 

프리랜서로 活動하며 政府 主催 行事의 進行도 많이 맡았는데, 特別히 記憶에 남는 일이 있나요. 

記憶에 남는 일이라기보단 大統領마다 스타일이 달랐는데, 그런 點들이 재미있었어요. 김영삼 大統領은 行事場 안으로 들어오면서 來賓들과 一一이 握手하며 人事를 나누기 때문에 豫定보다 遲滯되는 境遇가 많아서 時間 맞추는 데 神經을 많이 써야 했고, 김대중 大統領은 臨機應變보다 定해진 대로 꼼꼼하게 하는 스타일이셨어요. 代身 行事가 다 끝나고 나서 수고했다며 關係者들을 激勵해주셨죠. 盧武鉉 大統領은 부끄러움이 많아서 進行者가 치켜세우는 멘트를 하면 “이 사람들이 저를 들었다 놨다 하는 사람들이죠”라며 쑥스러워하셨죠. 李明博 大統領은 宏壯히 프렌들리 해서 어깨를 툭 친다거나 하면서 親近感을 表現했고, 朴槿惠 大統領은 유머를 좋아했어요. 假令 일자리 創出 行事의 境遇 “우리 政府가 얼마나 일자리를 잘 만드는가 하면, 오늘 行事로 벌써 司會者부터 일자리가 생기지 않았습니까”라는 式의 멘트를 좋아하셨던 記憶이 납니다. 

行事를 進行하다 보면 손에 땀을 쥐게 되는 緊張된 瞬間도 많았을 것 같아요. 

한 番은 地方 美人選拔大會 社會를 본 적이 있는데, 參加者가 너무 緊張해서 앞만 보고 가다가 마이크를 지나쳐 舞臺 아래로 떨어진 적이 있어요. 視聽者들은 카메라가 흔들린 줄 알고 넘어갔지만 現場에 있던 사람들에게는 아찔한 瞬間이었죠. 또 한 番은 오정해 氏와 全國 춘향選拔大會 社會를 보는데, 當選이 確實할 거라고 豫想했던 參加者가 豫選에서 탈락했어요. 아무래도 異常해서 招待 歌手가 祝賀 公演을 하는 동안 關係者들에게 다시 한 番 確認해보라고 했는데, 集計가 잘못된 거였어요. 結局 그분은 上位圈에 入賞했고 나중엔 國立歌舞團(서울市뮤지컬團)의 有名한 俳優가 됐어요. 그런 일은 참 보람 있죠. 

2008年 한 言論에 離婚說이 報道된 적이 있어요. 아직도 김병찬 아나운서가 離婚한 줄 아는 분들도 있고요. 

서로 다른 環境에서 살아왔던 사람들이 夫婦로 만나 함께 生活하다 보면 티격태격하기도 하고 그러잖아요. 저희도 些少한 일들로 다투다가 法院까지 간 적이 있지만 只今은 서로에게 感謝하며 잘 살고 있습니다. 離婚 危機를 겪을 때 ‘結婚은 感情의 約束이 아니라 行動의 約束’이라는 金壽煥 樞機卿님의 主禮辭가 큰 힘이 되었어요. 그리고 지나고 보니 小小하게 부딪혔던 大部分의 問題들에 있어서 아내 말이 다 맞았더라고요. 

1998年 結婚해 1男 1女를 두셨죠. 아이들도 長成했겠네요. 

아들은 大學校 1學年인데 順둥이예요. 딸은 高等學校 2學年인데, 똑 부러지는 性格에 工夫도 곧잘 하고요.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果然 이게 옳은 길인지, 내가 父母 役割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苦悶을 하게 되는 瞬間이 있어요. 子女 敎育에 있어서 특별한 價値 基準이 있나요. 

아이들이 좋은 職業을 갖고 社會的으로 成功하고 그런 것도 좋겠지만 무엇보다 남에게 被害를 끼치지 않고 살기를 바라요. 그런 마음으로, 아이들 逍風이나 運動會는 안 가도 奉仕 活動하는 데는 꼭 따라갔어요. 周邊을 보면 漠然히 ‘우리 아이는 착해서 損害를 본다’거나, ‘내 子息이 學校 暴力의 被害者가 되면 어떡하나’란 걱정을 하는 父母들이 많은데 事實 自身의 子女가 加害者가 될 수도 있거든요. 저는 아이를 키울 때 盲目的인 肯定보다 좀더 客觀的인 姿勢를 가질 必要가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 社會가 많은 問題를 안고 있지만 公益을 優先하는 文化가 定着되면 그中 相當 部分이 解決될 거라고 생각해요. 

어려운 이웃에게 따뜻한 손길을 傳하는 TV 프로그램 ‘사랑의 리퀘스트’를 오래 進行했고, 지난해와 올해는 國際位러브유運動本部 ‘새生命 사랑의 콘서트’ ‘새生命 사랑 家族걷기大會’에 進行者로 나서 疏外된 이웃 돕기에 힘을 보탰습니다. 奉仕와 나눔에 對한 哲學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다른 사람을 돕는 데 있어서 絶對 同情心을 갖거나 報償을 바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남을 돕는다는 것은 그 사람을 救濟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남는 것을 나누는 거예요. 結局 自身을 위해 價値 있는 行動을 하는 거죠. 1萬원으로 物件을 샀을 때와 寄附를 했을 때, 어느 쪽이 더 기쁨이 오래 持續될까요. 저는 寄附라고 생각합니다. 새生命 사랑의 콘서트와 새生命 사랑 家族걷기大會에 힘을 보탠 것도 行事를 통해 누구를 돕고자 하는지 目標가 具體的이었고, 一回性 同情이 아니라 持續的으로 나눔을 實踐해왔기 때문입니다.

‘社會(司會)’ 品格이 다른 아나운서 김병찬은 價値 있는 삶을 통해 ‘社會(社會)’의 品格까지 높이는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寫眞 金度均 디자인 최정미
場所協助 로얄라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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