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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 탱크 최경주의 人生 레슨|여성동아

PEOPLE

코리안 탱크 최경주의 人生 레슨

“掌匣을 벗을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마지막까지 알 수 없는 것이 人生이다”

글 | 金明熙 記者 寫眞 | 현일수 記者 동아일보 寫眞DB파트, 聯合뉴스 提供

2012. 11. 16

“神이 타이거 우즈를 選擇했다면 최경주는 神을 감동시켰다”는 말이 있다. 골프의 ‘골’자도 모르던 莞島 섬 少年 최경주는 誠實과 끈氣로 美國 PGA투어 韓國人 1號 골퍼가 됐고 그 以後 8勝이라는 大記錄을 達成했다. 그가 처음으로 털어놓는 드라마 같은 人生 이야기, 아내와 2男1女를 둔 家長으로서의 面貌는 탱크라는 別名이 無色할 程度로 구수하고 정겨웠다.

코리안 탱크 최경주의 인생 레슨


崔京周(42)는 1年 내내 필드를 누비는 사람답게 皮膚가 까맣고 눈빛이 매서웠다. 다부진 體格 때문인지 생각보다 키(172cm)가 작아 보였다. ‘작은 고추가 맵다’지만 한때 그 問題는 최경주에게 적지 않은 콤플렉스였다. PGA 進出 初盤에는 비제이 싱, 타이거 우즈, 어니 엘스처럼 2m에 가까운 長身 選手들이 豪快한 샷을 날리는 걸 보고 ‘큰 키에서 힘이 나오는구나’ 싶어 키를 늘리는 手術을 받으려고 相談까지 받은 적이 있다고 告白했다.
“키가 작다 보니 러프에 들어간 공을 쳐내는 것도 훨씬 不利했고, 그들이 긴 다리로 한 걸음 성큼 걷는 동안 저는 最小限 半 걸음 더 걸어야 했기 때문에 體力 消耗가 그만큼 컸죠. 키를 늘릴 수 있는 方法을 알아보다가 獨逸의 한 專門 病院에서 相談까지 받았어요. 다리뼈를 자른 다음에 핀을 여러 個 박은 뒤 外部에서 固定한 채 하루에 1mm씩 徐徐히 늘리면 된다고 하더군요. 10cm 程度 늘리려면 3年 동안 골프도 못하고 꼼짝없이 누워 있어야 한다는 計算이 나오더라고요. 結局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골프를 잘할 수 있다면 뭐든 하고 싶었어요.”
무쇠처럼 단단할 것만 같은 崔京周에게도 그런 人間的인 苦悶이 있었나 싶다. 하지만 알고 보면 최경주의 人生은 끝없이 콤플렉스를 克服해가는 過程이었다. 그의 라이벌 타이거 우즈는 두 살 때부터 골프채를 휘두른 神童이었고, 최경주는 열여섯 살에 ‘골프’라는 말을 처음 들어본 늦깎이였다. 우즈는 運動選手 出身인 아버지로부터 體系的인 訓鍊을 받았지만 그는 農夫이자 漁夫였던 아버지를 도와 山과 바다를 뛰어다녔다. 우즈는 골프를 즐기는 文化 속에서 讚辭와 激勵를 받으며 運動을 했지만 최경주는 골프가 大衆化되지 않은 環境에서 가난, 無名의 설움과 싸우며 運動을 해야 했다. 그가 가진 오직 한 가지 才能은 努力이었다. ‘이 程度면 됐어’ 하고 스스로 安住하지 않는 것, 모자란 것을 알면서도 自身과 妥協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그를 世界的인 프로 골퍼로 만든 힘이다.

莞島 村놈 7番 아이언 잡고 140m 날리다
최경주의 父母는 全南 莞島에서 미역 養殖과 農事를 지었다. “慶州야, 물 보러 가거라이.” 어린 時節 최경주는 學校가 끝나면 고무 대야를 허리에 매고 갯벌에 나가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걷어오는 게 일이었다. 밀물이 들어오면 갯벌이 今方 잠기기 때문에 물때가 오기 前에 서둘러 나오지 않으면 危險했다. 물고기를 가득 담아 50kg이 넘는 대야를 허리에 동여맨 채 1km 程度 距離를 재빨리 빠져나와야 했다. 안 그러면 미끈미끈한 뻘이 對野 바닥에 착 달라붙어 옴짝달싹 못하게 된다. “밭에 거둬놓은 콩도 챙겨오니라.” “소여물度 베와야 한다~.” 물고기를 걷어 온 뒤에도 아버지의 注文은 쉴 새 없이 이어졌다. 가난한 집 長男은 할 일이 많았다. “아따 숨 좀 쉽시다~” 하면서도 어느 새 그의 발은 大門을 向하고 있었다.
“그렇게 갯벌과 들판을 누비다 보면 허벅지와 종아리가 뻐근해졌죠. 골퍼는 下體가 重要한데 그때 허벅지와 장딴지가 많이 鍛鍊되지 않았나 싶어요.”
中學校에 入學해서는 登錄金을 免除받을 수 있는 力道部에 들어갔다. 一旦 力道를 始作한 만큼 큰 大會에 나가서 메달을 따고 싶은 欲心은 굴뚝같았지만 다리가 짧고 팔이 긴 體型이라 練習을 많이 해도 생각만큼 實力이 늘지 않았다. 漸次 後輩들에게 밀리기 始作하더니 나중에는 候補 選手가 됐다. 結局 3學年 때 力道를 그만뒀다.
“運動을 그만두고 처음으로 英語 授業에 들어갔는데, 敎科書를 펴는 瞬間 앞이 캄캄하더라고요(웃음). ‘亦是 工夫는 내 길이 아니다. 뭘 하든 運動으로 勝負를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機會는 뜻밖의 곳에서 찾아왔다. 1988年 莞島水産高에 入學한 첫날 先生님은 ‘力道를 해봤거나 하고 싶은 사람은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先生님은 앞으로 나온 아이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더니 한 그룹의 아이들에게는 力道를, 다른 한 그룹의 아이들에게는 골프를 하라고 했다. 최경주가 처음으로 ‘골프’라는 單語를 接한 瞬間이다. 이날부터 ‘꿩 飼育場’처럼 생긴 演習場에서 練習을 始作했다. 그물網까지 볼을 치는 사람은 ‘볼 整理 列外’라는 말에 귀가 번쩍 뜨인 그는 野球 방망이를 휘두르듯 生涯 첫 티샷을 날렸다. 볼은 그물網을 훌쩍 넘었다.
“홈런을 쳤을 때보다 열 倍 더 좋았어요. 파란 하늘 위로 하얀 공이 抛物線처럼 날아가는 모습이 눈에 寫眞처럼 찍히더군요. 뭐라 說明할 수 없을 만큼 가슴이 벅차오르더니 곧 불붙듯이 뜨거워졌죠.”
공은 그물網을 넘어 멀리 共同墓地까지 날아갔고, 崔京周 혼자 練習에서 列外를 받았다. 최경주는 나중에야 自身이 그날 처음 쥔 골프채가 7番 아이언이었으며 공이 날아간 距離가 140m 程度 된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코리안 탱크 최경주의 인생 레슨


하지만 才能에 비해 環境이 뒷받침되지 않았다. 그는 제대로 된 레슨도 받지 못한 채 廢타이어를 땅에 파묻어놓고 쇠파이프로 때리며 스윙 練習을 했다. 莞島 옆 薪智島에 있는 明沙十里海水浴場에서 練習하며 바람과 벙커에 익숙해졌다. 莞島에 單 하나 있던 골프 演習場의 社長은 최경주의 才能을 알아보고 地域 有志들이 라운딩을 나갈 때 그를 데리고 가게끔 說得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不足했다. 그린피를 벌기 위해 練習場 손님 車를 洗車하고 잔심부름을 했다. 그러다 漢書高等學校 김재천 理事長에게 拔擢돼 서울路 골프 留學을 오게 됐다.
“留學 올 때 莞島水産高에서 許諾을 해주지 않는 바람에 迂餘曲折이 많았죠. 제가 뜻을 굽히지 않자 어느 날 아버지께서 欌籠에서 뭔가 꺼내더니 밖으로 나가시더라고요. 나중에 들으니 소 판 돈으로 先生님들께 洋服을 膳物했다고 하시는데, 정작 아버지께서는 只今까지 그 일에 對해서는 한 마디도 안 하셨어요.”



코리안 탱크 최경주의 인생 레슨

1 2007年 최경주 選手가 體育勳章 靑龍狀을 받기 위해 家族과 함께 靑瓦臺 本館으로 들어가는 모습. 왼쪽부터 아내 김현정 氏. 막내 강준, 둘째 신영, 첫째 戶主, 崔 選手. 2 2008年 오거스타GC에서 열린 마스터스 大會 파3 콘테스트에서 첫째 호준이와 함께한 모습.



함께 高速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온 아버지는 아들이 지내게 될 宿所를 둘러본 뒤 ‘밥 잘 챙겨 먹고 아프지 말라’는 말 外에는 아무런 當付도 하지 않았다.
“長男이 家業을 잇지 않고 골프 한다고 亂離를 치는 게 괘씸했을 法도 하셨을 텐데, 섭섭하다는 말씀 한마디 안 하시니까 더 짠하더라고요. 아버지의 크고 넓은 어깨가 그날따라 더 좁아 보이기도 하고…, 그 모습을 보면서 앞으로 1分 1秒도 허투루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죠.”
서울 生活은 생각만큼 碌碌지 않았다. 今方 할 수 있을 것 같던 優勝의 機會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高等學校를 卒業했다. 莞島 村놈 최경주는 서울에 온 뒤 “63빌딩을 10層까지 보는 것은 無料지만 그 以上은 돈을 내야 한다”는 親舊들의 놀림에 9層까지만 보고 눈을 내리깔았을 程度로 純眞했다. 軍 服務를 마치고 練習生으로 있던 時節 알고 지내던 牧師가 서울 文化를 익히는 데 도움을 받으라며 단국대 法大에 다니던 女大生을 소개시켜줬다. 只今의 아내인 김현정 氏다.
“雅淡한 키에 웃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죠. 몇 番 만나보니 結婚해도 좋을 女子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나보다 工夫를 많이 한 착한 서울 女子’를 만나면 結婚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內助의 女王’ 아내와의 運命的 만남
結婚 決心은 1993年 프로 入團 테스트를 받던 마지막 날에 했다. 3홀인가 남았을 때 언덕 위에 꽃다발을 안고 서 있는 金氏가 보였다. 大學 卒業을 앞둔 金氏는 이날 重要한 試驗도 抛棄하고 최경주를 應援하러 왔다.
“‘그러다 卒業 못하는 거 아니냐’고 했더니 ‘이것도 重要하다’고 하더군요. 놀랍고 고마워서 正式으로 交際하자고 했더니 ‘敎會에 같이 다니면’이라는 但書를 달더라고요(웃음). 우물쭈물하니까 ‘그럼 안 만나겠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一旦 ‘그러마’ 約束부터 했죠.”
그렇게 1996年 아내와 結婚했다. 하지만 敎會에 適應하는 데는 時間이 걸렸다. 敎會에 나가기는 하지만 篤實한 信者는 아닌, 어정쩡한 時間이 繼續됐다.
“어느 날 제가 자고 있는데 人기척이 느껴져서 깼더니 아내가 제 발을 잡고 祈禱를 하고 있라고요. ‘내가 뭔데 이 사람이 이렇게 나를 위해 眞心으로 祈禱하나’ 싶은 게 좀 異常한 氣分이 들더군요. 누워서 祈禱를 받는 건 禮儀가 아닌 것 같아 그다음부턴 앉았어요. 또 그다음엔 발보다 손이 낫겠다 싶어 손을 잡고 祈禱를 했죠. 그러면서 마음의 門이 열렸고, 本格的으로 工夫를 해 洗禮를 받았죠.”
車範根, 선동렬 等 成功한 運動選手 가운데는 愛妻家가 많다. 이들의 共通點은 아내의 助言을 귀담아듣는다는 點. 崔京周 亦是 그렇다. 모든 일을 아내와 相議해서 決定한다. 아내는 그가 잘할 때는 謙遜을, 競技가 잘 안 풀릴 때는 ‘잘할 수 있다’는 勇氣를 불어넣어준다. 최경주는 運動選手 中에서도 達辯家로 所聞이 났는데, 그는 “아내가 放送이나 新聞 인터뷰도 모니터링해주는데 그 德分에 말솜씨도 느는 것 같다”고 자랑을 했다. “내 人生에서 아내는 로또 같은 사람”이라고도 했다.
아내를 만나서 그의 골프 人生도 꽃을 피웠다. 1996年과 1997年 2年 連續 賞金王과 MVP를 차지한 데 이어 日本 舞臺에 進出해 1999年 麒麟 오픈, 우베코산 오픈에서 優勝을 차지했다. 그는 어떤 狀況에서도 아내가 自身을 위해 祈禱하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힘이 난다고 했다.
“麒麟 오픈 練習 라운드 첫날 午前 좁은 寢臺에서 아들 호준이를 품에 안고 웅크린 채 잠든 아내를 보자 가슴이 뻐근해지면서 저도 모르게 祈禱가 나오더군요. 그 德分인지 景氣가 宏壯히 잘 풀렸어요. 마지막 홀에서는 共에서 홀까지 마치 호미로 파놓은 것처럼 퍼팅 라인이 鮮明하게 보여서 그대로 치기만 하면 됐죠. 그때가 첫 海外 優勝이었는데, 인터뷰를 하고 왔더니 아내가 큼직한 쇼핑백에 優勝 賞金을 現金으로 받아왔더라고요. 1億4千萬원이나 되는 큰돈이었죠. 너무 좋으면 입이 안 다물어진다던데, 正말 그렇더라고요(웃음).”
日本에서 乘勝長驅한 그는 그해 Q스쿨(Qualifying School : PGA에서 뛸 수 있는 資格을 獲得하는 方法 中 하나로 2011年까지 施行됐다)에 合格, 韓國人 最初로 PGA에 데뷔했다. 以後 迂餘曲折이 많았지만 2002年 컴팩클래식 優勝을 始作으로, 2011年 메이저 大會인 플레이어스 챔피언십까지 8勝을 올리며 韓國을 代表하는 골프 選手로 活躍하고 있다.
최경주는 膝下에 戶主(14), 신영(10), 강준(8) 3男妹를 두고 있다. 平素에는 아이들이 言論에 露出되는 걸 꺼리지만 1年에 單 한 番 오거스타 GC에서 열리는 마스터스 大會에는 恒常 아이들을 帶同한다. 이 大會 前날에는 派3 콘테스트라는 特別 이벤트가 있는데, 選手는 願하는 사람 누구든 人員 制限 없이 캐디로 同伴할 수 있다. 普通 家族이나 愛人을 招請하는데 최경주는 늘 아이들과 함께 그린에 오른다. 이날만큼은 아빠보다 아이들이 더 많은 플래시 洗禮를 받는다.

코리안 탱크 최경주의 인생 레슨

3 지난해 같은 大會에서 최경주가 딸 신영 孃에게 퍼팅 指導를 하고 있다. 4 5 최경주가 마스터스 大會에 첫 出戰했던 2003年에는 큰아들 호준이가 家族 代表로 파3 콘테스트에서 캐디백을 맸다. 只今은 아이들이 서로 가방을 매려고 競爭을 벌인다고 한다. 6 강준이는 野球에도 關心이 많다. 지난 7月 SK와 LG 京畿에서는 배트보이로 그라운드를 누비기도 했다.



“아이들과 그린 위를 걷는 氣分도 좋지만, 아이들에게도 돈 주고 살 수 없는 所重한 經驗이 될 것 같아서 恒常 아이들과 함께하죠. 2003年 첫해에는 豪俊이 혼자 캐디를 맡았는데, 클럽에서 흰色 캐디 옷을 빌려 입혔더니 너무 커서 아이가 옷에 파묻히더라고요. 그래도 아빠와 골프를 치는 게 좋은지 마냥 싱글벙글 웃던 記憶이 나네요. 이젠 둘째, 셋째도 제법 자라 서로 캐디를 하겠다며 다투기도 하는데, 그러면 나이順으로 호준이가 가방을 메고, 신영이가 타월을 들고, 막내 강준이는 물甁을 들죠.”
아이들과 함께하는 ‘파3 콘테스트’만 생각하면 그 亦是 運動會에 나가는 아이처럼 마음이 들뜬다. 사랑하는 家族 앞이기에 좋은 成跡을 내고 싶은 欲心도 크다. 하지만 올해는 그만 컷 脫落을 해서 콘테스트에 參席하지 못했다. 學校에 缺席屆까지 냈던 호준이가 失望할 걸 생각하니 목덜미가 뻐근해졌다고 한다.
“그런데 오히려 아이들이 ‘아빠 괜찮아. 다음에 잘 하면 돼’ 하고 慰勞를 해주더라고요. 競技가 없을 땐 아이들과 스키와 낚시를 다니면서 確實하게 놀아주고, 演習이나 競技가 있을 땐 ‘아빠 職業은 골프 選手다. 좋은 成跡을 내기 위해선 熱心히 訓鍊해야 한다’고 알려줍니다. 그래서인지 아이들도 아빠의 일에 對한 理解度가 높고, 特히 큰 녀석은 요즘 골프가 얼마나 壓迫感이 많은 運動인지, 아빠가 얼마나 힘들지 헤아리고 共感해주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時間이 가장 幸福한 平凡한 아빠
최경주는 最近 家族과 더 많은 時間을 보내기 위해 집에 머무는 동안은 午後 訓鍊을 접었다. 아이들이 學校에 갔다 돌아오면 함께 運動하고 저녁을 먹는다.
“父母와 子息은 얼굴 表情만으로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을 程度로 가까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아이들과 時間을 보내려고 努力하죠. 저 혼자 서울에 두고 내려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짠했지만, 率直히 그땐 아버지의 心情을 알지 못했습니다. 내 속도 모를 때인데 父母 마음을 어떻게 알았겠어요(웃음). 그런데 호준이가 中學校 갈 때가 되니까 불현듯 ‘그때 우리 아버지가 이런 마음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열 일 제쳐두고 學校에 찾아가 先生님도 만나뵙고, 이것저것 챙겼죠. 父母가 모든 걸 해줄 순 없지만 사랑받고 있다는 確信을 갖게 하고, 對話를 통해 스스로 길을 찾을 수 있게끔 도와주는 건 重要하다고 생각합니다.”
최경주는 最近 自身이 살아온 이야기와 人間的인 모습을 담은 冊 ‘코리안 탱크, 崔京周’(비전課리더십)라는 冊을 펴냈다. 印稅 全額은 그가 2007年 設立한 崔京周財團을 통해 골프아카데미를 包含한 複合 敎育 文化施設 ‘꿈의 둥지’ 建立 基金으로 쓰일 豫定이다. 그는 인터뷰를 마치며 自身을 成功이 아닌 努力의 아이콘으로 봐주면 좋겠다고 했다.
“제가 살아온 길을 돌아보면 바닥도 그런 바닥이 없었어요. 1999年 처음 美國에 進出했을 때는 韓國에선 時機尙早다, 잘되는지 두고 보자는 이야기도 많았고, 막상 美國에선 말도 안 통했고 Q스쿨에도 떨어지고… 慘澹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죠. 하지만 掌匣을 벗기 前엔 絶對 抛棄하지 않았습니다. 요즘 젊은이들 쉽게 抛棄하는 傾向이 있는 것 같아요. 只今 하는 거 抛棄하고 다른 걸 하면 잘될 것 같지만 世上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資質과 實力은 만들어가는 것이지 타고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條件을 타고나도 練習하고 訓鍊하지 않으면 自己 것이 될 수 없고, 그럼 즐길 수가 없어요. 즐거운 人生은 꾸준한 練習과 訓鍊 뒤에 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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