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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語 科落 걱정 ‘少年工’ 李, 數學 難題 척척 ‘模範生’ 尹|週刊東亞

週刊東亞 1318

2021.12.10

英語 科落 걱정 ‘少年工’ 李, 數學 難題 척척 ‘模範生’ 尹

[李在明-尹錫悅 미셀러니] 學業·交友·리더십·戀愛… 돋보기로 成長 時節 들여다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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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진렬 記者

    display@donga.com

    入力 2021-12-11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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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DB]

    [東亞DB]

    1976年 봄 두 少年의 삶이 엇갈렸다. 한 名은 ‘新興 名門’으로 떠오르던 高校에 入學했다. 장난氣 많은 少年은 이곳에서 敎授의 꿈을 키워나갔다. 같은 時期 다른 少年은 얼굴을 찌푸리며 목걸이 工場에 出退勤했다. 初校 卒業狀을 쥔 언 손이 채 녹기도 前이다. 두 少年의 이름은 尹錫悅과 李在明이다.

    두 사람의 어린 時節은 共通點이 別로 없다. 오히려 正反對에 가깝다. 尹錫悅이 模範生으로 初中高校를 다닐 때, 李在明은 少年工으로 일한다. 反對로 李在明이 大學에서 敎授들의 期待를 한 몸에 받을 때, 尹錫悅은 逃避 生活은 勿論 司法試驗에도 8番 떨어진다. 두 사람이 나란히 巨大 兩黨 大選候補로 뛰는 只今은 어쩌면 ‘至極히 例外的인 時期’다.

    두 사람의 運命은 석 달 後 다시금 엇갈린다. 한 名은 大統領이 돼 人生의 頂點을 보내고, 다른 한 名은 落選의 쓴맛을 삼킨다. 各種 疑惑 搜査가 進陟되면서 難處한 일을 겪을 수도 있다. 두 사람의 엇갈린 運命은 1960年代 始作됐다.

    ‘인싸’ 尹錫悅, ‘아싸’ 李在明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후보(왼쪽)와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후보의 어린 시절.

    더불어民主黨 李在明 大選候補(왼쪽)와 國民의힘 尹錫悅 大選候補의 어린 時節.

    “尹錫悅 집은 雅淡한 韓屋이었는데, 먼지 한 톨 없을 程度로 깔끔했다. 在來式 化粧室이 水洗式 化粧室보다 깨끗하더라. 冊床 亦是 잘 整頓됐는데, 전기스탠드에 ‘이마’라고 쓰여 있었다. 무슨 뜻이냐 물었더니, 아버지 이야기를 하더라. ‘人相을 찡그리지 말고 활짝 웃는 얼굴로 살아라. 이마에 주름이 잡히지 않도록 하라’는 家訓을 내렸단다. 어린 尹錫悅은 이를 잊지 않으려고 스탠드에 이마라고 써놓았다.”

    初等學生 때부터 尹 候補의 竹馬故友로 지낸 李喆雨 연세대 法學專門大學院 敎授의 말이다. 李 敎授는 尹錫悅을 “宏壯히 外向的이고 親舊를 두루 사귀는 스타일”로 評價했다. 그의 말처럼 尹錫悅은 구김 없는 環境에서 살았다. 尹錫悅의 아버지는 經濟學者 윤기중 연세대 名譽敎授다. 그는 後날 尹錫悅이 司法試驗에 8番 떨어졌을 때도 재촉하지 않고 默默히 기다렸을 만큼 아들에 對한 信賴를 거두지 않았다.



    尹錫悅은 1967年 서울 城北區 대광國民學校(現 대광初)에 入學했다. 當時 대광初는 한 學年에 160餘 名이 다니는 작은 學校였다. 尹錫悅은 밝은 性格으로 또래 親舊들에게 人氣가 많았다. 요즘으로 치면 ‘인싸’였다. 初校 同窓들은 尹錫悅을 웃음氣 가득한 少年으로 記憶한다. 집안부터 交友關係까지 어느 것 하나 부러울 게 없는 環境이었다.

    李在明의 初等學生 時節은 正反對다. 그는 當時를 “‘인싸’에 낄 수 없는 ‘아싸’, 主流가 아닌 非主流. 內 非主流 歷史는 생각보다 뿌리가 깊다”고 回想한다.

    1970年 慶北 안동시 예안면 三界國民學校(現 월곡초 三界分校)에 入學한 李在明은 每日 5㎞ 山길을 걸어 登校했다. 學校에 到着해도 苦行은 이어졌다. 家庭 形便上 準備物을 챙기지 못해 혼나기 일쑤였다. 美化作業을 제대로 못 했다는 理由로 敎師에게 뺨을 27代 맞은 적도 있다. 學校는 가고 싶은 곳이 아니었다. 1學年 때만 結石이 80日을 넘겼다. 自然히 成跡도 微微微微美….

    學年이 올라가면서 成績이 좋아졌다. 4學年 때 제법 좋은 試驗 點數를 받았지만 成跡에 戀戀하지 않았다. 中學校에 進學하지 못하리라고 내다봐서다. 1976年 ‘꽃다발도, 짜장면도 없는 國民學校 卒業式’을 마친 그는 故鄕을 떠난다. 그렇게 到着한 곳이 京畿 성남시 중원구 상대원동. 성남시와 因緣은 그렇게 始作된다. 尹錫悅과 李在明 두 사람의 삶은 이 時期 極端으로 갈린다.

    “卑賤했다”던 李 少年工 時節

    李在明의 삶은 大選 局面에서 다양한 方式으로 膾炙된다. 李在明은 12月 4日 全北 군산시 公設市場에서 “卑賤한 집안이라서 周邊을 뒤지면 더러운 게 많이 나온다”며 “내 잘못이 아니니까, 내 出身의 卑賤함은 내 잘못이 아니니까 나를 탓하지 말아달라. 나는 그 속에서도 最善을 다했다”고 演說했다. 兄嫂 辱說 等 過去 수많은 論難은 거친 成長 環境에서 비롯한 얼룩이라는 얘기다.

    野圈은 이를 두고 ‘牽强附會’라고 指摘한다. 國民의힘 中央選擧對策委員會 李亮壽 首席代辯人은 “家族史를 누구도 非難한 적 없는데 스스로 ‘出身이 卑賤하다’며 自身의 一生에서 벌어진 일 모두가 ‘卑賤한 出身 탓’이라고 돌려세웠다. ‘그분’의 ‘大庄洞 게이트 疑惑’ ‘殺人者 專門 辯護 論難’ ‘辯護士費 代納 疑惑’ ‘兄嫂 辱說 論難’에 이르기까지 모두 ‘卑賤한 出身 탓’이라는 것”이라면서 “周邊이 아니라 李在明 候補의 認識 自體가 淺薄하고 鄙陋할 뿐”이라고 批判했다.

    이렇듯 서로 다른 評價와 別個로 三界初 卒業 後 ‘少年工 時節’은 李在明 人生에서 가장 어두운 때로 描寫된다. 李在明은 성남시 상대원동 單칸房에 貰 들어 살며 工場에서 일했다. 고무를 다룬 ‘동마고무’, 野球 글러브를 만든 ‘大洋失業’, 時計를 만든 ‘오리엔트’ 等이 일터였다. 大洋失業은 1977年 지워지지 않는 傷處를 남겼다. 프레스에 손목 關節이 눌리면서 骨折된 것이다. 팔의 成長板이 다친 탓에 이듬해부터 왼팔이 굽었다.

    工場 일에 지친 李在明은 ‘高卒 資格’을 얻으면 管理者로 일할 수 있지 않을까 期待했다. 1978年과 1980年 次例로 高入·大入 檢定考試를 본 理由다. 少年工으로 일하면서 틈틈이 工夫했다. 危機의 瞬間도 있었다. 高入 檢定考試에서 國語 75點, 社會 72.5點, 數學 64點, 科學 82.5點, 體育 85點, 英語 45點, 農業 67.5點, 音樂 70點, 美術 70點을 받았다. 平均點數가 70.17로 合格 커트라인(60點)을 넉넉히 넘겼지만, 英語에서 자칫 科落할 뻔했다. 當時만 하더라도 40點에 未達하는 科目이 있으면 不合格 處理됐다.

    經濟的 어려움으로 檢定考試를 抛棄할까 苦悶하기도 했다. 多幸히 當時 성일學院 院長의 도움으로 工夫를 無事히 끝마칠 수 있었다. 김창구 前 성일學院 院長은 “돈이 없다”며 學院을 그만두겠다는 李在明에게 “工夫하고 싶으면 工夫해야 한다. 재명이 넌 工夫해야 될 놈이야”라고 말하며 그를 激勵했다고 한다. 李在明이 힘겹게 高校 課程을 마친 그 時期 尹錫悅은 數學 問題와 씨름하고 있었다.

    이재명 대선후보의 1978년 고입 검정고시 응시 원서 사진(왼쪽). 윤석열 대선후보의 1976년 고교 선발고사 수험표. [사진 제공 · 이재명 선거캠프, 사진 제공 · 윤석열 선거캠프]

    李在明 大選候補의 1978年 高入 檢定考試 應試 願書 寫眞(왼쪽). 尹錫悅 大選候補의 1976年 高校 選拔考査 受驗票. [寫眞 提供 · 李在明 選擧캠프, 寫眞 提供 · 尹錫悅 選擧캠프]

    “高等學生 時節 尹錫悅은 한 마디로 ‘模範生’이었죠. 班長을 하거나 班에서 ‘나대는 親舊’가 아니었어요. 그냥 성실한 學生이었습니다.”

    신용락 前 水原地方法院 判事의 말이다. 申 前 判事는 尹錫悅의 冲岩高(8期), 서울大 法大 動機다. 冲岩高 2學年 때부터 2年間 같은 班에서 工夫했다. 서울 恩平區에 位置한 冲岩高는 바둑, 野球 等에서 頭角을 보인 學校다. 特히 尹錫悅 入學 2年 前부터 ‘新興 名門’으로 浮上했다. 冲岩高 同期會長 出身 A氏는 “6期 卒業生을 起點으로 10餘 年 동안이 冲岩高 全盛期다. 每年 SKY(서울大·高麗大·연세대) 入學者를 100餘 名씩 輩出해 新興 名門으로 불렸다”고 說明했다. 高校 3學年 때 尹錫悅의 同級生이던 金某 氏는 “같은 班에 工夫보다 노래 等에 關心을 가지고 活動한 親舊들도 있었다. 尹錫悅은 이들과 接點이 크지 않았고 工夫에만 集中했다”고 回想했다.

    尹錫悅이 가장 關心을 보인 科目은 數學. 當時는 入試生이 大學別 ‘本考査’를 치르던 時節이다. 唯獨 惡名 높은 難度의 數學 問題가 있었다. 同期들은 어려운 問題가 있으면 尹錫悅에게 들고 갔는데, 그는 곧잘 풀었다고 한다. 申 前 判事의 말이다.

    “到底히 풀리지 않는 數學 問題가 있으면 일부러 尹錫悅한테 보여줬죠. 授業을 듣지 않으면서까지 하루 終日 問題를 들여다보더라고요. 證明 問題 等 까다로운 問題를 많이 보여줬는데 結局 終禮時間 前까지 다 풀었어요. 解答地에 없는 獨創的 方式으로 問題를 解決하는 境遇도 많았어요.”

    尹錫悅은 當初 大學에서 數學, 物理學, 經濟學 等을 工夫하고 싶었다. 아버지가 ‘具體性 있는 學問’을 勸하면서 마음을 돌려 法大 進學을 決定한다. 尹錫悅과 李在明은 1979年, 1982年 各各 서울대 法大, 중앙대 法大에 入學한다. 이 둘의 處地는 이때부터 交叉한다. ‘少年工 李在明’은 敎授들의 期待를 한 몸에 받으며 人生 처음으로 模範生 生活을 한다. 남들보다 빨리 司法試驗에 合格했고 父母, 檢定考試 學院 敎師와 함께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模範生 尹錫悅’은 軍事政權의 눈을 避해 ‘逃避 生活’을 하는가 하면 司法試驗에도 連거푸 떨어진다.

    逃避 生活·司法試驗 9修…

    始作은 大學 2學年 때 參與한 模擬裁判이다. 尹錫悅은 1980年 5月 서울對 學生會館 2層에서 12·12에 關한 模擬裁判을 한다. 裁判長을 맡은 그는 當時 신현확 國務總理와 전두환 中央情報部長에게 各各 死刑과 無期懲役을 宣告한다. 이 消息은 外部로 퍼졌고 保安司令部에 勤務하는 먼 親戚은 “避身하라”고 警告한다. 그는 外家 親戚집으로 석 달間 避身한다.

    結局 學校로 돌아왔고 ‘술’과 ‘親舊’를 좋아하는 性格은 그대로였다. 尹錫悅을 象徵하는 네 글字는 斗酒不辭(斗酒不辭)다. 申 前 判事는 “술을 마시면서 尹錫悅 人脈이 無知하게 넓어졌다. 高等學生 때와는 다른 사람이었다”고 評價한다. 尹錫悅은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에 살았기에 신촌과 光化門 一帶에서 親舊들과 어울렸다. 當時 光化門 地下道를 지나면 親舊를 꼭 마주칠 程度였다고 한다.

    申 前 判事는 “通禁이 있는 時期였다. 신촌에서 놀다 通禁 時間이 臨迫하면 尹 候補 집에 가서 잠을 자는 式으로 놀았다”고 回想했다. 尹錫悅은 高等學生 時節부터 親舊들을 자주 집에 불러 함께 밥을 먹으며 友情을 다졌다. ‘食事 招待’ 社交術은 檢察 生活을 하면서도, 國民의힘에 入黨한 後에도 이어진다.

    술은 그에게 수많은 親舊를 만들어줬지만 그만큼 工夫할 時間을 빼앗은 것으로 보인다. 司法試驗에서 連거푸 苦杯를 마신 原因으로 親舊와 술이 擧論된다. 1次 合格은 79學番 中에서 빨랐고 成跡도 좋았다. 大學 同期인 이철우 敎授는 “尹錫悅은 在學 中 司法試驗 1次에 合格했다. 이른바 ‘司法試驗 1陣’에 낄 뻔했다. 1次 試驗 成跡도 合格者 中 열 손가락 안에 들 程度로 좋았다. 試驗工夫에만 全力投球해 順次的으로 2次 合格을 한 同期들과 달리 親舊들과 어울리느라 連거푸 不合格했다”고 말했다.

    人生事 塞翁之馬(塞翁之馬)다. 親舊, 後輩들과 술자리가 삶에 被害만 끼친 것은 아니다. 司法試驗에 合格하고 나니 그가 뿌린 씨앗은 그대로 되돌아왔다. 申 前 判事의 말이다.

    “水原地法에서 일할 때 尹錫悅이 뒤늦게 檢事가 돼 配置됐어요. 옛날 생각이 나서 ‘애들 데리고 와라, 밥 사줄게’라고 말했죠. 檢査時報 生活을 하는 後輩들에게 밥이나 사려는 생각이었어요. 點心時間이 되자 水原地檢에서 일하는 現職 檢事들이 ‘석열이 兄’ 하면서 졸졸 나오더라고요. ‘너는 部長檢事부터 始作하는구나’라고 弄談으로 말했죠.”

    尹錫悅의 ‘同期 사랑’은 只今도 이어지고 있다. 그는 大選候補 身分인 只今도 서울對 法大 同期들의 慶弔事에 花環을 보내며 챙긴다. 初中高校 및 大學 同期 多數가 只今도 尹錫悅을 마음으로나마 應援하거나 돕고 있다.

    이재명 대선후보의 대학생 시절(왼쪽). 윤석열 대선후보(왼쪽에서
두 번째)의 대학생 시절. [사진 제공 · 이재명 선거캠프, 사진 제공 · 윤석열 선거캠프]

    李在明 大選候補의 大學生 時節(왼쪽). 尹錫悅 大選候補(왼쪽에서 두 番째)의 大學生 時節. [寫眞 提供 · 李在明 選擧캠프, 寫眞 提供 · 尹錫悅 選擧캠프]

    “李在明한테 付託해라”

    尹錫悅이 한창 司法試驗을 準備하던 1982年 李在明은 중앙대 法大에 入學한다. 少年工 經驗은 중앙대를 選擇하는 데 決定的 影響을 미친다. 登錄金을 免除해주고 生活費를 補助하는 中央大 奬學制度는 무척 魅力的이었다. 李在明은 學校를 다니면서도 집안에 보탬이 되고자 課外 等 아르바이트도 했다고 한다.

    大學生 時節 李在明은 單科大 學長은 勿論, 中央大 隣近 飮食店 社長들의 期待를 두루 받았다. 중앙대 法大에 奬學生으로 入學한 그를 두고 敎授 사이에서는 “李在明은 司法試驗에 꼭 合格할 것”이라는 말이 오갈 程度였다. 李在明은 4年 後 司法試驗(28回)에 合格하며 期待에 副應했다. 중앙대 政治外交學科 82學番인 더불어民主黨 문진석 議員은 “大學 周邊 飮食店에서 社長님 紹介로 李 候補를 처음 대면했다. 當時 社長님이 ‘司法試驗 1次 合格한 親舊’라며 紹介해줘 合席했다”고 말했다. 3學年 때 처음으로 1次 試驗에 合格한 李在明은 2年 後 2次 試驗에 最終 合格했다.

    敎授와 商人은 勿論, 後輩들도 李在明을 좋아했다고 한다. 李在明을 두고서는 “後輩를 잘 챙겼다”는 評價가 많다. 後輩들 亦是 그를 잘 따랐다. 大學生 時節 ‘보스 氣質’ ‘解決士的 面貌’를 보였다는 評이 나오는 理由다. 李在明 入學 이듬해에 敎鞭을 잡은 以上돈 中央大 法學專門大學院 名譽敎授는 그를 이렇게 評價했다.

    “1980年代는 한창 學生들이 목소리를 낼 때잖아요. 한 番씩 學生들이 지나친 要求를 할 때도 있지 않겠어요. 學校에서도 골머리를 앓았는데 當時 單科大 學長이 學科長에게 ‘李在明한테 付託해 좀 가라앉히라’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만큼 後輩들이 李 候補를 잘 따랐어요. 統率力과 보스 氣質을 갖춘 學生이었죠.”

    李在明은 後輩들의 呼應에도 報答했다. 이 名譽敎授는 “學生運動을 하느라 試驗을 잘 치르지 못한 後輩들을 自身의 辯護士 事務室에서 일하게 하는 等 도움을 줬다”고 말했다. 文 議員 亦是 “李 候補가 運動圈 前面에 나서서 活躍하지는 않았지만, 大學生 時節부터 社會問題에 對한 關心을 이어왔다”며 “司法試驗에 일찍 合格해 相對的으로 이른 나이에 돈을 벌었다. 後輩들을 모아놓고 밥도 사주며 많이 챙겼다”고 말했다.

    다만 李在明은 親舊들에게 未安함을 느꼈다. 1980年代는 學生運動이 活潑하던 時期다. 李在明은 當時 社會運動 代身 工夫를 選擇했다. 李在明은 “于先 工夫를 좀 한 뒤 萬若 法曹人이 되면 判檢事가 아니라 辯護士가 될 것이라고 約束했다”고 回想했다. 하나 둘 監獄에 가는 親舊들을 보며 李在明은 罪責感을 느꼈다고 한다.

    戀愛와는 因緣이…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후보의 아내 김혜경 씨(왼쪽)와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후보의 아내 김건희 씨. [동아DB]

    더불어民主黨 李在明 大選候補의 아내 김혜경 氏(왼쪽)와 國民의힘 尹錫悅 大選候補의 아내 김건희 氏. [東亞DB]

    엇갈린 삶을 산 두 사람이 唯獨 共有하는 經驗이 있다. 바로 戀愛다. 李在明과 尹錫悅은 모두 戀愛에 서툴렀다. 李在明은 오리엔트 工場에서 일할 當時 ‘檢事室 그女’, 大學 入試를 準備하면서는 ‘讀書室 그女’, 大學生이 돼서는 ‘三界初 同窓 그女’를 向한 마음을 키워갔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세 사람 모두에게 感情을 表現하지도 못한 채 마음을 접었다. 그는 當時를 “쓸데없는 自尊心만 强해서 조금이라도 거절당한다 싶으면 마음을 접어버리곤 했다”고 回想했다. 李在明은 司法試驗에 合格하고 城南에서 辯護士 事務室을 開業한 後 只今의 배우자 김혜경 氏를 미팅을 통해 만났다.

    尹錫悅 亦是 마찬가지다. 男子들 사이에서 人氣가 많았지만 정작 戀愛에는 “둔감했다” “人氣 있는 스타일은 아니었다”는 評價를 받는다. 女性들과 關係가 나쁜 것은 아니었다. 親舊의 아내 或은 親舊의 女子親舊와는 잘 지냈다. 本人의 戀愛 戰線만 좋지 않았다. 마음에 드는 女性이 없진 않았겠으나 잘 되지 않았다. 좀처럼 戀愛를 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 親舊들이 안타까워했다. 大學 同期인 김영준 前 昌原地檢長이 들려준 逸話다.

    “단골 카페 1層에서 尹錫悅과 다른 親舊 한 名, 이렇게 셋이서 놀고 있는데, 2層에 女性 3名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줄곧 戀愛를 하지 않는 尹錫悅이 마음에 걸려 ‘저 사람들을 1層으로 데려오라’는 特命을 줬죠. 尹錫悅이 올라가더니 얼마 後 女性들이 내려와 合席했습니다. ‘숫氣 없는 親舊인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는 않구나’ 생각하며 마음을 놨습니다. 알고 봤더니 2層 淸掃를 해야 한다고 1層으로 내려가라고 했더라고요.”

    親舊들은 尹錫悅이 2012年 김건희 氏와 結婚 計劃을 알리자 기뻐했다. 쉰 살이 넘도록 結婚하지 못하자 “몽달鬼神 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오던 車였다. “나이 쉰에 結婚式 社會를 봐야 되는 것 아니냐”는 氣分 좋은 볼멘소리도 나왔다. 結婚式 社會는 結局 尹錫悅의 後輩 檢事가 맡았다.



    최진렬 기자

    최진렬 記者

    安寧하세요. 週刊東亞 최진렬 記者입니다. 産業界 이슈를 取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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