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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때보다 위트 넘치는 尹汝貞의 2009年 입담|週刊東亞

週刊東亞 1287

2021.04.30

오스카 때보다 위트 넘치는 尹汝貞의 2009年 입담

[아카이브]

  • 金明熙 女性東亞 記者

    mayhee@donga.com

    入力 2021-04-27 15:5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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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第93回 아카데미 施賞式에서 映畫 ‘미나리’로 韓國 俳優 最初 女優助演賞을 受賞한 俳優 尹汝貞(74). 위트 있는 受賞 所感으로 全 世界를 사로잡은 그. 2009年 드라마 ‘그들이 사는 世上’ 終映 直後 俳優 尹汝貞과 進行한 ‘여성동아’ 인터뷰에서도 그런 魅力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인터뷰에는 이番 受賞 所感에 言及한 두 아들, 스크린 데뷔作 ‘下女’의 김기영 監督에 對한 內容, 人生 哲學까지, 오스카 受賞 所感보다 위트 넘치는 尹汝貞의 입담이 가득하다. 尹旅程이 왜 ‘쇼스틸러’인지 느껴보시길. <編輯者註>
    윤여정이 4월 25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돌비 극장에서 열린 제93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미나리'로 여우조연상을 받고 활짝 웃고 있다. [뉴시스]

    尹旅程이 4月 25日(現地時間) 美國 캘리포니아州 로스앤젤레스 돌비 劇場에서 열린 第93回 美國 아카데미 施賞式에서 映畫 '미나리'로 女優助演賞을 받고 활짝 웃고 있다. [뉴시스]

    尹汝貞에 對한 첫 記憶은 90年代 初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에서 “弘恩洞입니다”라며 電話를 받던 모습이다. 누구나 다 하는 “여보세요”가 아니었다. 엄마를 맡아도 그냥 平凡한 엄마가 아니라 自己主張이 剛하고 모던한 尹汝貞. 철없는 主婦(드라마 ‘沐浴湯 집 男子들’)도, 바람난 媤어머니(映畫 ‘바람난 家族’)도, 까칠한 女俳優(드라마 ‘그들이 사는 世上’)도 그가 하면 人生의 쓸쓸함이 묻어나는 듯해서 가슴이 휑하다.

    “내가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고 弘報한들 사람들이 믿어주겠어요?”

    ‘그들이 사는 世上’을 執筆한 노희경 作家는 最近 펴낸 隨筆集에서 “‘미친 年, 이 子息아’ 하는 막말조차도 尹汝貞의 입을 통해 뱉어지면 아픈 慰安이 되거나 쓸쓸한 人生에 對한 定義가 된다”고 했다. 좀처럼 인터뷰를 하지 않는 그와 迂餘曲折 끝에 2009年 서울 江南 에르메스 카페 마당에서 마주 앉았다. 場所 涉外는 그가 했다.

    名品 브랜드 에르메스家 寫眞까지 찍는 條件으로 인터뷰 場所를 提供하는 건 異例的이네요.
    “여기 支社長님을 잘 알아서… ‘담배를 좀 피워야 되니까 여기서 하겠다’ 그런 거예요.”

    에르메스를 즐겨 입나요.
    “내가 돈이 많이 생겨서 奢侈를 하자 그러면 가끔 사죠.”

    드라마 ‘그들이 사는 世上’ 以後로 尹汝貞 氏에 對해 궁금해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實際로도 드라마에서 오민숙처럼 까칠한지요.
    “내가 異常한 役割을 해서 그러나본데… 난 그런 사람 아닙니다(웃음). 내가 노희경 때문에 아주 미치겠어. 사람을 그냥….”



    ‘오민숙의 까칠한 面이 實際 윤여정氏의 모습과 비슷하다. 臺本 외울 必要 있나, 平素 하던 대로 하면 되지 않나’라는 反應도 있었어요.
    “내가 그런 面이 있긴 있어요. 사람이 딱 이런 面만 있진 않잖아요. 그런데 까칠하다는 게 뭐죠?”

    便하지 않다, 따뜻하지 않다, 그런 뜻 아닐까요.
    “그래요. 便하지는 않을 거예요. 제가 사람 사귀는 데 오래 걸려서 그럴 거예요. 처음 만나는 사람하고는 많이 힘든데 내가 힘들면 相對도 힘들겠죠. 싫은 건 싫다고 말하니까 더 그런가봐요. (드라마에서 오민숙은 自身을 番番이 ‘오민숙 氏’라고 부르는 助演出에게 손짓으로 門밖으로 나가라는 信號를 한다) 實際로 ‘윤여정 氏, 尹汝貞 氏’ 하던 助演出이 있었어요. 그래서 ‘윤여정 氏라고 말하는 게 法에 抵觸되지는 않는다, 그런데 學校에서 안 가르치는 거라 내가 얘기할게요. 例를 들어 ‘엄마 親舊더러 尹汝貞 氏 그러는 건 좀 그렇죠?’ 그랬더니 自己는 先生님이라 그러는 게 익숙지 않아서 그랬대요. 그 다음엔 같이 드라마도 하고 낄낄거리며 웃고 그랬죠. 노희경 氏가 그 事件을 그렇게 부풀려서 쓴 거예요. 實際로는 그렇게 못해요. 助演出을 쫓아 봐요. 내가 放送局에서 밥 벌어먹고 살겠어요.”

    마음을 열면 따뜻한 面도 있죠.
    “그렇겠죠. 젊은 사람들은 답답한 게 사람을 黑白으로 나누는 거 같은데 黑白으로 나뉘는 사람은 없어요. 사람이 이런가 하면 저렇고, 저런가 하면 또 이렇고…. 내가 뭐 아무 때나 까칠하겠어요.”

    인터뷰 안 하고 娛樂 프로그램에 出演 안하고, 드라마를 除外하고는 大衆과 거의 接觸이 없어요. 或是 神祕主義인가요.
    “개뿔 神祕主義는. 그 말 어디서 나온 거예요(웃음)? 나는 實用主義예요. 드라마는 내 일이잖아요. 그거는 합니다. 드라마 以外의 일은 귀찮고 몸도 힘들고…. 자꾸 내 얘기해서 뭐하겠어요. 사람들도 別로 남의 일에 關心 없어요. 나도 남의 일에 關心 없거든. 이 쪼그만 나라에서 神祕主義는 무슨(웃음)….”

    다른 사람들은 싫더라도 必要에 依해서 인터뷰도 하고 娛樂 프로그램에도 나가지 않습니까.
    “글쎄 弘報 때문이라는데 다른 사람들은 人品이 좋은가 봐요. 내가 믿고 있는 건 그 時間에 大使 工夫 熱心히 해서 演技를 잘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거예요. 내가 弘報한다고, 나는 이런 사람이고 좋은 사람이라고 그런다고 통하겠어요?”

    그러니까 一種의 自信感이군요.
    “꿀릴 건 많죠. 劣等意識도 많고 人物이 예쁜 것도 아니고 목소리가 예쁜 俳優도 아니고 皮膚가 예쁘지도 않고…. ‘어디에 重點을 두느냐’겠죠. 나는 臺本을 熱心히 하는 데 重點을 두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을 테고, 어느 게 낫다고는 말할 수 없는 거예요.”

    그게 그다지 콤플렉스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이젠 視聽者들도 익숙해져서.
    “그래요? 고마워요. 나는 그거에 너무 恨이 맺혀서. 목소리 때문에 拒否感 1位 俳優로 꼽힌 적도 있고….”

    2009년 인터뷰 중인 윤여정. [동아DB]

    2009年 인터뷰 中인 尹汝貞. [東亞DB]

    이화女高를 卒業한 그는 한양대 國文科에 進學했다. 하지만 所謂 一流大學에 進學하지 못한 게 自尊心이 傷했다. 집에 登錄金 달라고 하기도 憫惘해 아르바이트를 할 料量으로 탤런트가 됐다. 데뷔 初 그는 드라마 ‘張禧嬪’으로 旋風的인 人氣를 누렸고 映畫 데뷔作인 김기영 監督의 ‘化女’로 시체스 國際映畫祭에서 受賞했다. 그리고 그해 破格的으로 靑龍映畫祭 新人賞을 건너뛰고 주연상을 받았다. 이 當時 그의 寫眞을 보면 볼이 통통한 앳된 少女 같다. 하지만 이 時節에도 性格은 凡常치 않았던 것 같다. 無名時節 放送局에서 新人 10名을 뽑아 석 달 동안 練習을 시킨 뒤 最終 3名을 합격시켰는데 그는 最終에서 떨어졌다. 그 理由가 재미있다.

    當時 女俳優로는 드물게 自意識이 剛했던 거 같아요. 學窓時節 어땠나요.
    “自意識이 强하다는 게 正確히 어떤 意味인지 모르겠지만 初等學校 6學年 때 擔任先生님이 계셨는데, 내가 그 問題도 잊어버리지 않아요. 算數에서 ‘汽車는 한 時間마다 出發하고, 電車는 20分마다, 버스는 10分마다 出發한다. 그런데 只今 같이 出發한 時間은 11時 몇 분이다. 다음엔 언제 같은 時間에 出發할까?’였어요. 나는 最小公倍數를 내야 된다는 걸 알았어요. 그런데 내가 最小公倍數 내야 된다 그랬더니 先生님이 내 意見은 默殺하고 다른 아이 이름을 부르면서 ‘네 생각하기엔 어떠냐’고 그랬어요. 걔가 ‘한 서너 時間 後가 아닐까요’ 그랬죠. 그 일로 난 그 先生님에 對한 信賴를 잃었어요. 그래서 學校를 안 갔죠. 模範生이던 아이가 學校 안 간다니까 엄마가 며칠 달래보다가 엄마 學校로 轉學시켰어요. 엄마가 學校 先生님이셨거든요. 그 先生님하고 싸우거나 그런 건 아니었어요. 우리 자랄 땐 先生님한테 學生이 反論을 한다거나 그런 건 못했으니까. 어쨌든 만만치는 않았나 봐요.”

    그런 일을 다 記憶하다니, 記憶力이 좋으세요.
    “아뇨. 많이 가물가물해요. 이제는 내가 登場人物을 바꾸기도 한대요. ‘그때 내가 이런 말하고 네가 이런 말 했잖니’ 그러면 누구와 누가 바뀌고 그런대요. 나이는 못 當해요. 슬픕니다.”

    大學은 國文科에 進學했습니다. 글을 쓰려고 했던 건가요.
    “아뇨. 元來 志望했던 大學에 떨어졌어요. 우리 땐 學校 떨어지면 집안 亡하는 거였어요. 그러니까 우리나라가 좀 웃겨. 우리 땐 財數가 흔하지 않았어요. 힘들게 再修해야 하나 苦悶하고 있는데 一家 中 오빠뻘 되는 사람이 ‘쟤가 글을 잘 쓰지 않나’하면서 自己가 入學願書를 받아다 다 써놨어요. 내가 國民學校 때 白日場에 나가 特選을 했거든요. 그래서 그냥 못 이기는 척하고 (大學에) 갔지.”

    當時 한양대 國文科 恩師 中 詩人 朴木月 先生님도 계셨다고 들었어요. 尹汝貞 氏를 아끼셨다고요.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 運命일지도 모르지만 내가 所謂 一流大를 갔으면 工夫에 邁進했을 거예요. 이렇게 얘기하면 한양대에서 너무 싫어해. ‘다시 와서 卒業狀을 따라’ ‘只今은 正말 좋은 學校다’ 그러는데 그때는 2次 大學이었어요. 1學年 다니는데 隨筆을 써내라 그래요. 써냈더니 朴木月 先生님이 그때 課長 先生님이셨는데 부르시더라고요. 이 隨筆은 잘 썼는데 方向을 잡아줘야겠다면서 每日 한 張씩 써오라 그러시더라고요. 그런데 그때 나는 劇場 구경도 가고 놀러도 다니고 그랬어야 됐거든요. 바쁜데 每日 한 張씩 어떻게 써내(웃음). 그러다 탤런트 試驗을 봤어요. ‘탤런트해서 用돈이라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우리 엄마한테 너무 未安하더라고요. 富者집도 아닌데 登錄金 달라 그러기가. 나중에 탤런트가 되고 나서 先生님을 만났는데 저를 記憶하시고 아무거나 잘하면 된다고, 俳優 잘하라고 그러셨어요. 참 感謝했습니다.”

    繼續 글을 썼더라면 어땠을까요.
    “김수현 先生께서 언젠가 그랬어요. 넌 나 쓰는 걸 그렇게 몇 年을 봤으면 흉내라도 못 내니, 넌 안되겠다(웃음).”

    한 放送局 탤런트 最終 試驗에 不合格한 理由가 ‘人事를 잘 안 한다’였다고요.
    “예. 그때는 내가 눈이 나쁜데 眼鏡 쓰는 게 싫었어요. 눈이 더 커 보이고 싶고 예뻐 보이고 싶잖아요. 그래서 眼鏡을 안 쓰고 다녔거든요. 사람이 잘 안 보이니까 人事를 안 했나 봐요. 審査委員이 ‘너는 먼저 사람이 돼고 와라’ 대놓고 그러더라고요. 우린 그렇게 殺伐한 時代에 살았다우(웃음).”

    映畫 데뷔作으로 主演賞까지 받았어요. 當時로선 무척 破格이었죠.
    “김기영 監督님 德分이죠. 只今 생각해보면. 어렸을 땐 잘 몰라요. 賞을 받으면 내가 잘해서 받나 보다 하는데 賞은 正말 韻이에요. 勿論 어떨 땐 正말 잘해서 받을 수도 있지만 90%가 韻이에요. 女優主演賞을 받았을 때도 나중에 그 內幕을 알았는데 따로 內定者가 있었지만 그해에는 特別히 ‘요番에는 正말 審査대로 해라’라는 指示가 있었답니다. 그런 게 韻이잖아요.”

    톱스타로 繼續 그 길을 밟았더라면 어땠을까요.
    “글쎄, 어땠을까. 只今쯤 와서는 같았겠지만, 人生이라는 게 그렇더라고요. 꼭 過程을 거쳐야 여기로 오게 되더라고요. 우리 다 아는 건데 어떨 땐 좀 (危機를) 건너뛰기도 하고 그러면 얼마나 좋겠수. ‘쟤는 머리도 좋은데 왜 저러고 살까’ 그러는데 人生은 그렇지 않더라고요. 그러니까 여기 이렇게 와 있겠죠. 내가 남한테는 시건방지고 까칠해 보이지만 只今 나는 일을 熱心히 하고 아끼거든요. 그때 俳優를 쭉 했더라면 아마 안 그랬을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나는 이런 거 참 싫어. 우리가 그때 안 그랬더라면, 그건 뭐 하나마나 한 이야기죠.”

    김수현, 노희경, 인정옥 作家 作品에 많이 出演했어요. 그러고 보면 이들 作家 作品의 캐릭터가 유난히 强烈하게 남아요.
    “그 사람들이 人物 表現을 제대로 해줘서 그랬겠죠.”

    “人生의 危機는 한꺼번에 오더군요”

    尹汝貞은 인터뷰 約束을 잡기 前 여러 가지 條件을 내걸었다. 먼저 離婚과 關聯된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지겹고 너무 오래前 이야기라 記憶도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英敏한 그가 그 當時 일을 記憶 못할 理 없다. 그 일로 尹汝貞은 삶이 碌碌치 않음을, 만만하게 봤다간 큰코다친다는 걸 알았던 것 같다. 그러니까 薔薇빛 人生에 對한 幻想이 깨지면서 얻은 깨달음이다. 演技 生活을 中斷하고 1973年 結婚, 美國에서 살다가 1985年 두 아들과 歸國했다. 現在 두 아들은 各各 컬럼비아대와 뉴욕大를 거쳐 美國에서 職場生活을 하고 있다. 美國 生活 中 그는 김수현 作家와 便紙를 주고받으며 鄕愁를 달랬다.

    김수현 作家와는 어떤 因緣으로 맺어졌나요.
    “김수현 先生 데뷔作을 제가 했어요. 그래서 어여삐 보인 거 같아요.”

    왜 예쁘게 봤을까요.
    “그때 내가 좀 달라보였대요.”

    두 분이 어떻게 다시 함께 作業하게 됐나요.
    “내가 돌아왔을 때 김수현 先生이 ‘너는 너 혼자서도 尹汝貞이라는 이름을 다시 찾을 수 있는데 내 것을 함으로써 빽이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을 거고 멍에가 될 수도 있을 거’라고 해서 안 하기로 約束했어요. 그런데 왜 나를 써줬냐면, 아무도 안 써주니까. 몇 十 年 前 離婚은 거의 朱紅글씨였어요. ‘離婚한 女子가 今方 TV에 나오면 안 된다’ 그런 것도 있었고. 요새 사람들은 그런 얘기 하면 알아듣지 못하는데 그런 時代가 있었답니다. 李朝時代 같은…. 우리 社會가 뭔가 다른 걸 願한다고 하지만 事實은 무서워하죠.”

    그런 걸 보면 김수현 作家는 마이너에 對한 愛情이 있는 거 같아요.
    “예. 그런 게 있으시죠. 그때는 正말 날 안 살려주면 안 될 程度로 힘들었어요. 내가 살아야 되는데…. 實用主義인데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요즘 김수현 作家 作品 出演이 뜸한데.
    “그러잖아도 그것 때문에 質問을 많이 받아요. 不敬罪에 걸렸다는 말도 있고(웃음). 김수현 先生한테 ‘뭐라 그럴까? 내가 까였다 그럴까?’ 그랬더니 ‘얘얘 그러지 마라. 시끄러워진다’ 電話로 그러더라고요(웃음). 김수현 先生이 언젠가 그랬어요. 내가 딴 作家와 作品하는 거 보면서 ‘시집갔다 못살고 돌아온 딸 本人이 再婚시켜서 잘살고 있는 거 같아서 이제는 마음이 놓인다’고.”

    요즘도 電話通話를 자주 하나요.
    “우리는 電話만 해요. 귀찮아서. 늙어서 사람 만나고 그러는 거 기운 없어요.”

    인정옥이나 노희경 作家는 어떤가요.
    “두 사람은 個性이 剛하죠. 그런데 그 사람들만 물어보니까, 어떨 땐 未安해요. 다른 作家하고도 因緣이 많은데 正말로 나를 사랑해주고 尊敬까지 해준 作家가 있었는데. ‘굳세어라 金錞아’를 쓴 李貞善이라고.”

    ‘금순이 할머니’도 좋았어요. 마치 우리 할머니를 보는 것처럼 짠했어요.
    “할머니 役割을 어렵게 付託하더라고요. 그때 내가 50代일 때인데 70代 役割이라 未安해하더라고요. 그런데 나는 괜찮다 했어요. 더 늙으면 臺詞 못 외워서 못 한다고. 그 드라마가 나한테 意味 있었던 게 내가 曾祖할머니한테 참 못되게 굴었어요. 할머니 더럽다고, 냄새난다고. 더럽고 냄새나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그래서 내가 只今도 밤마다 할머니께 容恕해달라고 빌어요.”

    노희경 作家 에세이 읽었나요.
    “읽어보고 ‘희경아. 未安하다. 나는 正말 疲困한 女子구나’하고 謝過했어요. 나는 몇 年 前 희경이한테 ‘드라마 참 못 쓴다. 죽어라 못 쓰더만’ 그랬는데, 나문희 氏는 ‘희경 氏는 하늘이 참 사랑하나봐. 큰사람 되라고 視聽率 안 주시나봐’ 그랬다잖아요. 나문희 氏는 참 푸근한 분이야. 그런데 나는 그렇게 말했다니…. 이番에 그걸 읽고 未安하다고 했더니 ‘아 그러지 마세요, 先生님. 징그러워’ 그러더라고요(웃음).”

    노희경 作家와는 演技者와 作家 以上의 關係인 거 같아요.
    “우린 主로 電話로만 通話하니까. 노희경이 電話로 ‘老親네 잘 있어?’ 그러면 ‘老親네 老親네 그러는 거 아냐. 氣分 나뻐’ 그러지(웃음). 노희경은 작은데 속이 많이 넓어요.”

    記憶에 남는 作品이나 名臺詞가 있다면.
    “그건 없어요. 이 나이에 돌아보면 人氣 있던 作品은 人氣가 있어서 좋았고, 人氣 없는 作品은 人氣가 없어서 作家도 안됐고. 저라고 그렇게 못 쓰고 싶었겠어요? 오죽하면 그렇게 썼겠수. 그래서 다 記憶에 남아요.”

    離婚 얘기는 하고 싶지 않다고요.
    “몇 十 年을 했더니 나도 지겨워. 나는 내가 그걸 언제 했는지도 잊어버렸거든요. 나는 이제 處女나 마찬가지야.”

    人生의 危機가 있었다면.
    “믿었던 사람한테 배신당했을 때.”

    그 外에는? 經濟的인 어려움이라든가.
    “그게 같이 왔죠. 부도나면 交通事故 난다고 그게 같이 와요. 精神이 없으니까.”

    只今 危機를 겪고 있는 사람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좋은 慰勞의 말들이 많죠. 聖經에서 流行歌까지. 그런데 내가 危機를 겪으면서 느낀 건 아무 말도 慰勞가 안됐다는 거. 그래서 내가 누구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견디세요. 견디면 時間이 가더라고요. 그 時間이 藥이더라고요.”

    그건 眞짜 맞는 말이던가요.
    “그거는 正말 그렇습디다. 歲月이 어떻게 藥이 되냐면 사람이 무뎌져요. 그 問題에 對해서. 그게 藥인 거 같아. 神이 우리에게 忘却이라는 좋은 藥을 주셨어요.”

    그렇게 한 番씩 어려움을 겪고 나면 그 다음엔 사는 게 좀 便해질까요.
    “어떤 사람은 그 어려움이 또 오고 또 오고 그러잖아요. 그게 八字인가, 性向인가. 나는 같은 失手는 안 하려고 애쓴 거 같아. 나는 ‘나하고 다른 사람에게 끌리는구나’라는 걸 알았어요. 내 眼目을 깨닫고 意志로 같은 짓을 안 하려고 努力했어요.”

    人生이 順坦하기만 한 사람도 있더라고요.
    “있어요. 있더라고. 運 좋아서 그런 사람 많죠. 그렇지만 나는 내가 스스로 運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그런지 그런 사람 보면 約 올라서 나 혼자 慰勞해요. ‘鐵道 참 없다. 나이가 60인데 저렇게 男便하고 아이밖에 모를까’하고. 그 사람들 宇宙는 男便하고 아이야. 내가 그 사람들 보고 그러는 건 抑何心情이지. 率直히 부럽죠. 부러워도 아무 소용없으니까 그러면서 스스로 慰勞를 하는 거죠(웃음).”

    두 아들을 훌륭하게 키우셨어요.
    “‘훌륭하게’라는 말을 빼야 돼요. 지 밥벌이하고 살아요.”

    아이들 키우면서 學校 成跡엔 크게 戀戀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그게 相對的이에요. 큰아이는 너무 工夫를 熱心히 하는 아이라 工夫하지 말고 ‘자라, 자라’ 그랬는데 작은아이는 또 工夫를 너무 안 하는 아이라 ‘해라, 해라’ 그랬어요. 그렇더라고. 큰아이 키울 때는 다른 엄마들이 敎育에 對해 뭐라 뭐라 하면 ‘그냥 내버려두세요. 다 알아서 잘할 거예요’ 그럴 程度로 여유로웠답니다. 그런데 작은아이는 한 番은 試驗點數를 形便없이 받아와서 내가 다른 집 엄마한테 電話를 걸어 ‘그 집 아이는 몇 點 받았수’ 물었답니다. 그렇게 돼요(웃음). 그러니 나는 敎育觀이 ‘뭐 이렇다’라고 내세울 게 없어요.”

    藝體能이라든가, 남들 가르치는 건 다 가르쳤나요.
    “學校 工夫밖에 시킨 거 없어요. 워낙 비싼 學校를 다녀서 난 그걸로도 벅찼어요(웃음).”

    일하느라 아이들 곁에 많이 있어주지는 못했을 텐데. 어떤 部分에 重點을 두고 아이들을 키웠나요.
    “글을 모를 때는 冊을 많이 읽어줬지만 그건 남들 다 하는 거고. 내가 生活前線에서 엄마, 아빠 몫을 다했기 때문에 많이 못해줬어요. 그래서 내세울 게 別로 없어요. 내 깐에는 飮食을 미리 만들어서 얼려놓고 간다거나 했지만 내가 같이 해서 먹는 것만 못했겠죠. 敎育이라는 게 어떤 엄마는 좋은 말 안 하겠어요. ‘얘 이건 이렇게 해야 한다, 저건 저렇게 해야 한다’ 그러겠지만, 아이들이 말을 듣고 배우는 거 같진 않아요. 안 보이는 데서 걔가 나를 볼 거예요. 그걸 배우겠죠. 집안에 冊이 많고 엄마가 늘 冊을 읽으면 아이도 같이 冊을 볼 거예요. 또 敎育이라는 게 嚴格하게 따지면 아이들 몫이에요. 보세요. 오바마는 그렇게 어려운 環境에서 자랐지만 훌륭하게 됐잖아요.”

    아이들에게 特히 强調한 德目이 있다면.
    “‘너희가 하고 싶은 일 하고 幸福하게 살아라. 즐겁게 살아라’라는 거였어요. ‘뭐를 해라, 뭐가 돼라’ 그런 건 없었어요. 모든 사람이 大統領이 되고 辯護士가 되고 學者가 될 순 없잖아요. 내 깐에는 아이를 참 自由롭고 너그럽게 키운 것 같았는데 정작 누가 우리 작은아이한테 ‘너희 엄마는 쿨하니까 잔소리도 안 하셨지?’ 그랬더니 ‘왜요? 忠告가 많으셨죠’ 그러더라고요. 그건 잔소리가 많았다는 뜻이죠.”

    아이들은 美國에서 자리 잡았으니 繼續 그곳에서 살겠네요. 많이 보고 싶을 텐데.
    “사람 일은 모르는 거죠. 나도 美國에 살 때 繼續 살 줄 알았는데, 只今은 여기 있잖아요. 아이들이 왔다가 돌아갈 때 좀 그렇죠. 우리는 헤어지는 練習을 많이 해서…. 나는 決心을 했어요. ‘혼자되는 練習을 해야겠구나’라고. 子息은 둥지를 떠나야 獨立을 하는 거라 생각해서 잠깐 그랬다가 ‘걔네가 나를 必要로 안 하는 게 좋은 거다’라고 呪文을 외우죠.”

    영화 ‘여배우들’에 출연한 김옥빈, 김민희, 최지우, 고현정, 이미숙, 윤여정(왼쪽부터). [동아DB]

    映畫 ‘女俳優들’에 出演한 김옥빈, 김민희, 崔志宇, 고현정, 이미숙, 尹汝貞(왼쪽부터). [東亞DB]

    “고현정이 줄 잘못 섰다고 투덜거려”

    尹汝貞은 技士가 自身의 말과 다르게 나가는 것, 例를 들어 ‘感性’이라고 말했는데 ‘感情’이란 單語로 기사화되는 것은 견딜 수 없다고 했다. 自身을 일부러 좋은 사람으로 包裝하지는 말아달라고 했다. 본 대로 느낀 대로 쓰라는 것이다. 批判받을 覺悟가 돼 있을 때 인터뷰 자리에 나온다고 했다. 尹汝貞은 끊임없이 自身을 客觀化한다. 女俳優들이 흔히 빠지는 ‘自뻑’이란 것도 없다. 잘나가던 젊은 時節 이야기도 남 말하듯 덤덤하게 한다. 客觀化는 自身의 말마따나 예쁘지도 않고, 목소리도 非好感人 그가 熾烈한 生存競爭에서 살아남은 祕訣이다. 自身에게 嚴格한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도 날카롭다. 까칠하다, 무섭다는 이미지는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도 恒常 그의 周邊엔 사람이 많다. 최화정, 배종옥, 고현정 等 女俳優들이 特히 그를 따른다.

    1年에 한 作品 程度 出演하는데, 作品 選擇 基準은.
    “내가 낯가림을 하기 때문에 일했던 監督이나 作家가 優先이죠. 조금 損害 난다 해도 사람따라 가요. 그런데 結果는 이렇게 오래 일했는데 내가 아는 PD는 KBS에서 두 名, MBC에서 한 名, 그나마 MBC에서 切親했던 PD는 프리가 된 걸 한참 後에 알았어요. 이런 나의 人脈을 보고 고현정이 만날 ‘줄 잘못 섰다’ 그러죠. 사람이 먼저 안 오면 내가 안 했던 役割을 擇하려 애쓰고요. 만날 똑같은 엄마를 하면 보는 사람한테도 未安하더라고요. 똑같은 얼굴에, 똑같은 목소리. 그래서 내 깐에는 다르게 해보려고 애쓰죠.”

    努力을 많이 하는 便이죠.
    “재주는 젊었을 때 잠깐 눈에 띄는 거 같아요. 正말 나를 維持해주는 건 努力일 거예요. 하물며 베토벤도 美完成本을 보면 형편없대요. 勿論 그런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모차르트는 하늘이 준 사람이래요. 그런데 나는 내 才能이 하늘이 준 程度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努力해야죠. 더군다나 늙어서 감은 떨어지고….”

    作品에 함께 出演했던 송혜교, 현빈을 비롯한 後輩 演技者에 對한 생각도 궁금합니다.
    “그건 對答 안 할래요. 내가 演技評論家가 아니잖아요. 演技는 오래했다고 잘하는 게 아니에요. 新人 演技者가 더 純粹하고 더 맑기 때문에 演技를 더 잘할 수 있어요. 나는 너무 때 묻고 몸에 밴 게 있기 때문에 그거를 내가 안 하려 해도 瞬間的으로 그렇게 되는 게 많아요. 그리고 걔네들 다 競爭者라서 뭐라고 말할 수 없어요(웃음). 熱心히 하면 다 예뻐요.”

    前에는 유호정 氏나 고현정 氏 等 後輩들에게 演技에 關한 忠告도 많이 했다면서요.
    “그것도 이젠 안 하려고요. 사람들은 ‘忠告를 좀 부드럽게 하지 그래요’ 그러는데, 부드럽게 하면 잘 못 알아들어요. ‘얘, 거기가 좀 異常한 것 같은데 어떻게 잘해볼 수 없을까’ 그러면 잘 못 알아들어요, 毒하게 말하면 그제야 ‘좀 異常한가’ 생각하는 程度더라고요. 父母가 싫은 소리해도 못 견디는데 남이 그렇게 말하면 뭐가 좋겠어요. 그리고 내 胎生이 돌려 말할 수는 없으니까, 그렇다고 胎生을 바꿀 수도 없고…. 그러니까 忠告하면 恒常 後悔해. 앞으론 가슴 아픈 忠告는 안 하려고요.”

    고현정 氏나 배종옥 氏 等 後輩 演技者들이 많이 依支하는 거 같아요.
    “글쎄, 意志까지는 모르겠고요. 내가 ‘너희들은 내가 왜 좋아’라고 했더니 고현정 曰 ‘밥을 잘 사줘서요’ 였어요. 쉬지도 않고 對答하더라고요.”

    演技者에게 必要한 資質은 무엇인가요.
    “暗記力, 集中力, 觀察力, 賃金協商力(웃음). 臺詞를 完璧하게 暗記하지 않으면 延期할 수 없어요. 人物의 性格은 大使로 나오는데, 말이 그 사람을 表現하는 거잖아요. 大使 暗記가 안 된 狀態에서의 演技는 그 人物이 아니에요. 나인 거지. 集中力? 勿論 集中해야 돼요. 觀察力? 많이 보고 느껴야 돼요. 賃金協商力? 이거 重要합니다.”

    “人生은 이거다 저거다 正確히 나눠지는 게 아니더라고요”

    尹汝貞은 數十 年째 담배를 못 끊고 있다. 周邊에서 끊으라고 成火지만 “그걸 끊으면 사는 樂이 없을 것 같다”고 했다. 健康에 해로운 담배를 繼續 피우는 걸 보면 眞正한 實用主義는 아닌 것 같다고 했더니 “사람이 다 이랬다저랬다 하는 거지”라면서 웃었다. 그 모습이 固執 센 老人네 같기도 하고, 귀여운 少女 같기도 하다.

    健康管理는 어떻게 하나요.
    “몸을 아끼는 게 健康管理예요. 무리 안 하고 안 움직이는 거. 타고나길 힘이 세지도 않고 오래 버티지도 못해요. 그러니까 내 몸을 사리느라고 일을 많이 안 해요.”

    살이 안 찌는 體質인가봐요.
    “그렇죠. 우리 어머니도 몸집이 나만 해요. 나는 말랐다는 말이 참 싫어요. 어깨가 좁아서 잠옷에도 뽕을 넣잖우. 최민수가 ‘잠옷에 뽕 넣는 女子는 처음 봤다’ 그러더라고(웃음). 나는 최화정처럼 볼륨 있는 사람이 부러워요. 여성스럽잖아요.”

    집안일도 잘하나요.
    “살림할 때는 株負傷 타야 할 程度로 잘했어요. 豆腐도 만들어 먹고…. 必要는 發明의 어머니라고. 美國에서 내가 살던 시골은 韓國 사람도 없었고 韓國 슈퍼도 없어 먹고 싶으면 다 自給自足을 해야 했어요. 커리어우먼이 되면서 안 하게 되더라고요. 只今은 싫어요. 난 아줌마 안 오면 굶어요.”

    男子에게는 魅力을 못 느끼나요.
    “언제부턴가 男子, 女子를 區別 안 하게 됐어요. 그냥 사람으로 생각하지.”

    理想型이라고 할 만한 스타일이 있나요.
    “생각을 안 해봤네. 아마 男女問題는 어느 瞬間 내가 整理해본 건데 생각 없이 動物的으로 끌리는 걸 거예요. ‘똑똑한 女子가 왜 저런 男子를 만났어?’ 그러는 게 理性과는 相關없이 끌리는 部分이 있을 거예요. 理想型이 있다 해도 그거와는 相關없이….”

    어느 날 멋있는 男子가 나타나면.
    “이젠 안 나타나죠.”

    내 人生의 屈辱이라 할 만한 事件이 있나요.
    “屈辱 많죠. 最近에도 있었어요. 지난해 釜山國際映畫祭에서 레드카펫을 밟는 條件으로 오라는 거예요. 어떻게 할까 하다가 周圍 사람들하고 相議해서 가기로 했어요. 드레스를 해 갖고 갔는데, 아니 釜山까지 가는 데 왜 7時間이 걸려. 내가 到着했을 때는 늦어서 이미 레드카펫 다 치우고 뒤로 가라고, 屈辱이지. 뒤로 들어갔는데 앉자마자 끝났어요. 호텔에 와서 一行하고(걔가 自己 이름은 絶對 밝히지 말라고 했어요) 둘이 드레스 입고 된醬찌개를 먹었잖아요.”

    드레스 입은 모습이 話題가 될 뻔했는데.
    “드레스 해준 사람은 TV를 보고 있다가 ‘왜 안 나오느냐’고 亂離가 났지. 그 다음 날 아이들이 ‘어머, 先生님 언제 오셨어요?’하더라고. 안 하던 짓 하면 꼭 이렇게 된다니까.”

    나이가 들면서 부드러워지는 쪽인가요? 아니면 本人 생각이 더 確固해지는 便인가요.
    “이렇게 인터뷰에 나온 게 부드러워진 거예요. 나이가 들면 그런 面이 생겨요. 노희경한테 잘못했다고 反省하는 것도 부드러워진 거죠. 그런데 또 ‘저 사람 아니다’ 싶으면 我執이 딱 생겨요. 잘 모르겠어요. 나만 그런 건지, 未安해요. 確答을 못 줘서. 그런데 이거다 저거다 正確하게 나눠지는 거면 왜 싸움을 하고, 戰爭을 하겠습니까. 나는 이렇게 생각을 하는데 다른 사람 얘기를 들어보면 또 다르고…. 人生이란 게 다 相對的인 거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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