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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半導體 工場을 6個月 안에 어떻게 짓습니까” [經濟思想家 李健熙 探究?]|新東亞

2022年 5 月號

“半導體 工場을 6個月 안에 어떻게 짓습니까” [經濟思想家 李健熙 探究?]

世界 最大 尖端 半導體 工場, 器興 밸리의 誕生

  • 허문명 記者

    angelhuh@donga.com

    入力 2022-05-14 1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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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偉大한 리더십과 팔로우十

    • NEC 갔다가 풀만 뽑고 돌아오다

    • 서울서 가까워야 人材가 몰린다

    •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기흥반도체 공장 건설 당시 호암 이병철 회장(오른쪽 첫 번째)과 이건희 회장(오른쪽 두 번째). 왼쪽에서 두 번째가 이윤우 전 삼성전자 부회장. [이윤우]

    鬐興半導體 工場 建設 當時 湖巖 이병철 會長(오른쪽 첫 番째)과 李健熙 會長(오른쪽 두 番째). 왼쪽에서 두 番째가 이윤우 前 三星前者 副會長. [李潤雨]

    美國 실리콘 밸리에 三星半導體硏究所가 만들어진 때는 湖巖이 半導體 事業을 하겠다고 宣言한 지 두 달餘 만인 1983年 4月 29日이다. 草創期 이곳에서 일한 임형규 前 三星前者 社長(前 삼성종합기술원長)의 回顧談이다.

    “三星 海外硏修 1號로 美國 플로리다로 留學을 가 3年 만에 博士學位를 따고 韓國으로 돌아가려고 했더니 실리콘밸리 써니베일 三星 메모리 硏究所(SSI, Samsung Semiconductor Inc)로 가라는 指示를 받았습니다. 1984年 1月이었습니다. 그때는 設立 7個月餘가 지난 時點이었는데 메모리를 製作할 수 있는 工場(FAB) 設備를 保有하고 있었고 30餘 名의 엔지니어가 256KD램, 64KS램 開發에 沒頭하고 있었습니다.

    當時는 인텔, TI(텍사스 인스투르먼트) 같은 美國의 主要 半導體 企業들이 日本과의 메모리 開發 競爭이 너무 熾烈해 아예 事業을 抛棄하거나 CPU 開發 같은 새로운 分野로 옮기는 過程이었습니다. 有能한 메모리 技術者들이 일자리를 찾고 있었습니다. 三星으로서는 絶好의 機會였죠.

    美國에 硏究所를 세운 건 큰 意味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開發한 것들이 큰 成功을 거두지는 못했어도 最尖端 半導體 會社가 密集한 곳에 있다 보니 實時間 流通되는 最新 技術 情報와 市場 狀況을 現場에서 바로 習得하는 窓口 役割을 했으니까요.



    人材를 키우는 産室이기도 했습니다. 每年 三星에 갓 入社한 엔지니어 30餘 名 씩을 뽑아 現地 硏修를 시켰는데 이 ‘半導體 꿈나무’들이 後날 技術 自立에 크게 寄與하게 되니까요. 저는 1985年 11月 歸國했는데 다들 ‘서울 가지 말라’고 挽留한 記憶이 납니다. 三星이 ‘半導體 때문에 앞이 안 보이는 터널에 갇혔다’는 悲觀論이 澎湃할 程度로 赤字의 늪에 빠져 있었고 休日은커녕 週末도 없이 每日 밤늦게까지 일하는 狀況이어서 勤務 與件도 형편없었거든요. 하지만 저는 서울行 飛行機를 탔습니다. 三星이 반드시 해낼 것 같다는 確信이 있었거든요.”

    三星 샐러리맨 神話의 象徵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자와 이윤우 전 삼성전자 부회장. [이윤우]

    스티브 잡스 애플 創業者와 이윤우 前 三星前者 副會長. [李潤雨]

    三星에서 일한 任職員들을 만나보면 湖巖이나 李健熙 會長만 앞을 내다보고 挑戰한 게 아니라는 點을 알게 된다. 各自의 現實에서 各自 믿은 信念에 따라 勇氣를 내 挑戰한 사람들이라는 共通點을 찾게 되기 때문이다.

    마치 韓國 現代史의 成就가 ‘朴正熙’라는 英雄 한 사람이 이뤄낸 게 아니라 그와 國民들 間의 合作品이듯이, 三星의 成功도 偉大한 리더와 偉大한 팔로우十이 結合한 結果다. 勿論 이것은 三星뿐 아니라 成功하는 나라와 企業의 共通點이겠지만 말이다.

    이를 考慮하면 앞서 紹介한 이윤우 前 副會長 이야기도 다시 새겨 들을만한 內容이 많다. 三星電子 半導體 하면 흔히 진대제, 黃昌圭 前 社長 等 大衆的으로 이름이 알려진 스타 CEO(最高經營者)들이 떠오른다. 이들 모두 이 前 副會長이 닦은 基盤에서 빛을 發汗 사람들이다. 晉 前 社長, 黃 前 社長은 三星電子 半導體라는 飛行機에 搭乘한 뒤 高空飛行을 하며 스타 CEO가 됐다. 李 前 副會長은 海外 留學 한番 다녀오지 않은 純粹 國內派로서 剛한 意志와 實行力으로 밑바닥부터 커리어를 다지며 最高 자리에 올랐다. 그런 點에서는 名實相符 三星 샐러리맨 神話의 象徵이라고 할 만하다.

    李 前 副會長이 三星에 入社한 것은 1968年으로 三星物産 그룹 公採를 통해서다. 湖巖이 막 電子事業을 해야겠다고 한 때였다. 그는 어떻게 三星과 因緣을 맺게 됐을까.

    “서울대 電子工學科를 다녔는데 同級生이 20餘 名밖에 안 됐습니다. 어느 날 三星에서 사람을 뽑는데 關心이 있는 이들은 面接을 하라는 消息을 듣고 저도 志願했습니다. 當時 面接 자리에 湖巖이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 들었습니다. 저는 湖巖을 본 적이 없었으니 當然히 記憶에 없고요. 質問은 하지 않으셨던 것 같고 學生들이 말하는 態度나 印象을 본 것 같았습니다. 1969年 卒業이 豫定돼 있었는데 이미 그 傳해 봄 採用이 決定돼 여름放學 때부터 三星의 重要 事業場을 돌며 硏修한 뒤 卒業 直前인 1968年 11月에 入社했습니다.

    當時에는 ‘三星電子’라는 會社가 아예 없던 時節이어서 物産 電子事業部 企劃팀으로 들어갔습니다. 湖巖이 막 電子産業을 始作한 때였지요. 湖巖은 거의 每日 會議를 主宰했습니다. 잘 알려졌다시피 湖巖이 도쿄를 자주 오가면서 日本의 先進 技術을 갖고 오기 위해 애를 많이 썼는데 結局 NEC와 山腰 두 會社와 合作 會社를 만들게 됩니다. 그 事業 計劃을 짰습니다.”

    事業計劃이란 게?

    “投資는 어떻게 하고, 사람은 어떻게 採用하고, 賣出 計劃은 어떻고 이런 거죠. 그게 宏壯히 複雜합니다. 一一이 原價 計算도 해야 하고 財務諸表度 만들어야 하고. 이게 다 數字 아니겠습니까. 그때는 電子計算機가 없어 籌板을 썼습니다. 손으로 돌리는 ‘타이거’라는 機械式 電子計算機가 있긴 했는데 한 臺밖에 없어서 먼저 쓴 先輩들이 다 退勤한 밤이 돼서야 新參들 차지가 됐습니다. 프린터도 없었기 때문에 報告書를 全部 손으로 作成하던 時節이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報告할 內容을 손으로 모두 적어 前날 저녁 專擔 筆耕士한테 보냈습니다. 그 분이 밤을 새우다시피 해서 아주 얇은 종이인 靑寫眞에 써서 보내온 걸 받아 다음날 아침 일찍 謄寫機로 밀어 報告書를 만들어 會議를 했습니다. 그야말로 虎狼이 담배 피던 時節이었다고나 할까요(웃음). 제가 會議 때 選對 會長님 앞에서 報告書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擔當者였습니다. 會長님이 죽 다 들으시고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 바꿔라’ 指示하면 그걸 土臺로 修正하는 일을 反復했습니다.”

    “大學 다닐 때부터 半導體 꽂혔다”

    현 애플 CEO(최고경영자) 팀 쿡과 만난 이윤우 전 삼성전자 부회장. [이윤우]

    現 애플 CEO(最高經營者) 팀 쿡과 만난 이윤우 前 三星前者 副會長. [李潤雨]

    나중에 어떻게 半導體 開發에 參與하게 됐나요.

    “事實 大學 다닐 때부터 半導體에 꽂혔습니다. 1965年인가로 記憶하는데 英文 雜誌 ‘타임’誌를 보는데 커버스토리가 ‘半導體 IC가 開發됐다’는 記事였어요. ‘바로 저거’라는 感이 확 왔습니다. 그때부터 ‘꼭 언젠가는 半導體 開發하는 일을 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三星에 들어간 理由도 電子事業을 한다고 했기 때문이고, 結局 半導體 事業을 하게 될 것이라는 確信이 있어서였습니다.

    三星NEC가 出帆했을 때 ‘나를 보내 달라’고 손을 들었습니다. 當時 NEC에서는 眞空管을 만들고 있었는데 眞空管 다음으로 半導體로 갈 수 밖에 없다는 確信이 들었죠. 實際로 NEC本社는 膜 半導體 事業을 始作하고 있었고요.

    그렇게 해서 京畿 果川 허허벌판에 合作 工場을 짓게 됩니다. 그때만 해도 ‘半導體’가 뭔지 甚至於 三星NEC 안에서도 아는 사람이 없었어요. 저는 機會만 되면 ‘우리도 半導體를 만들어야 한다’고 主張했고 日本 NEC로부터 技術을 배워 와야 한다고 했습니다.

    제 主張이 받아들여져 ‘그럼, 가장 基本이 되는 工程인 웨이퍼를 만드는 技術을 NEC에서 배워 오라’는 指示가 떨어졌습니다. 絶對 核心 技術을 줄 수 없다는 NEC를 겨우 說得해 硏修生들을 데리고 日本 NEC로 直接 날아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오일 쇼크가 터진 겁니다. NEC로 몰려오던 注文이 딱 끊기면서 日本 사람들 일거리가 사라졌습니다. 硏修生들은 오죽했겠어요. 結局 運動場에서 풀 뽑고 돌 줍기 하다가 歸國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未來가 참 暗鬱했던 狀況이었죠. 내 人生도 이렇게 別 볼 일 없이 끝나나보다 脈이 탁 풀려 있는데 奇跡 같은 消息을 듣게 됩니다. 三星이 韓國半導體라는 會社를 引受해서 半導體 事業을 本格的으로 한다는 거 아닙니까.”

    그는 ‘當場 韓國半導體로 보내 달라’고 떼를 썼다고 한다. 辭表를 쓰겠다고 一週日 無斷缺勤까지 해서 겨우 承諾을 받아냈다는 것이다. 다시 그의 말이다.

    “바로 富川 工場으로 發令받아 本格的으로 半導體와 因緣을 맺게 됩니다. 1976年 일입니다. 다들 저를 理解할 수 없다는 反應이었죠. 잘 나갈 수 있는 커리어를 抛棄하고 남들이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던 半導體에 꽂혀서 스스로 아오지 炭鑛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그때부터 半導體와의 끝없는 戰爭을 벌이게 된 거죠.”

    半導體 어떤 點이 그렇게 魅力的이었나요.

    “섬세한 半導體 生産 過程은 한마디로 豫測 不可能의 連續입니다. 微細한 溫度差 때문에 品質이 엉망이 되기도 하고 어떤 땐 밤에만 生産이 제대로 되고 낮에는 不良이 쏟아지는 理解할 수 없는 일도 續出합니다. 하지만 前者라는 놈들이 硅素(실리콘)判 위에 地圖를 그리며 돌아다니면서 우리가 願하는 機能을 遂行한다는 게 너무 神奇했습니다.”

    그는 三星半導體通信 理事와 器興 工場長 鬐興半導體硏究所長을 맡게 된다. 오늘날 ‘鬐興 밸리’를 만든 산證人이라고 할 수 있겠다.

    “紳士遊覽團 格으로 美國 실리콘밸리에 派遣돼 初期 事業計劃書를 썼고 以後 곧바로 鬐興에 大規模 集積回路(VLSI) 工場을 세우게 되면서 工場 設立을 總括하게 됩니다. 半導體 工場은 24時間 돌아가야 하니까 거의 집에도 못 가고 會社에서 살다시피 했죠. 當時에는 技術이 워낙 없다보니 만들었다 하면 不良品만 나와서 苦生 많이 했습니다. 제가 器興을 맡고 富川 工場은 김광호 前 會長이 맡았습니다.”

    ‘鬐興 밸리’ 誕生의 飛火

    者, 이제 本格的으로 ’器興 밸리‘ 誕生 이야기를 始作해보자. 製造業에서는 사람도 사람이지만 工場을 어디에 지을지가 매우 重要하다. 工業用水로 쓸 물도 豐富해야 하고 資材 輸入과 製品 輸出이 便한 곳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半導體 工場은 餘他 製造業과는 唯一하게 달라야 하는 點이 있으니 바로 먼지가 없는 淸淨地域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半導體 生産은 微細 먼지가 한 톨만 떠다녀도 바로 不良이 나와 버린다. 이에 超高度 精密性과 淸淨性이 維持돼야 한다. 工場에 들어가기 30分 前에는 담배도 피워서는 안 되고 女職員들은 化粧도 禁止된다. 事情이 이렇다 보니 工場 周邊에 흙먼지가 많다거나 이미 다른 業種의 工場이 돌아가고 있으면 힘들다.

    湖巖이 또 重要하게 考慮한 項目은 서울과 가까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야 人材들을 確保하는 게 可能할 것이었다.

    유귀훈 氏가 쓴 冊 ‘湖巖의 마지막 꿈’에는 當時 器興 敷地 選定 作業과 關聯한 湖巖의 苦悶과 決定 過程이 紹介돼 있다. 冊에 따르면 工場敷地 選定 作業은 ‘도쿄 宣言’이 나오기 7個月餘 前인 1982年 7月부터 始作됐다고 한다.

    “서울에서 1時間 距離에 空氣 맑고 高速道路에서 進入하기 쉬운 坪當 1萬 원 程度 땅 5萬 坪을 찾아보라’는 指示가 떨어졌다. 不動産 買入팀이 달라붙었지만 3個月이 지나도록 進陟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 삼성전자 水原工場과 신갈 貯水池 사이에 있는 器興 敷地가 推薦됐다. 京釜高速道路에서 빠져나와 10分 안에 到着할 수 있는 距離였다.

    겉보기엔 雜木과 雜草만 茂盛하고 地形이 가팔라 누가 봐도 못 쓰게 생긴 땅이었다. 하지만 湖巖은 李健熙 副會長, 이임성 博士와 함께 헬기를 타고 現場을 둘러보더니 ‘되겠다’면서 ‘여기로 瑕疵’고 했다고 한다.

    1次로 한 달 동안 9萬2182坪을 買入했는데 當時 三星맨들이 땅을 팔지 않겠다는 사람들을 說得하고 가시밭 투성이 山을 뒤지며 無緣故者 墳墓 里長까지 해주어 가며 戰爭 아닌 戰爭을 하는 心情으로 땅을 사들였다는 後聞이다.

    問題는 用途變更이었다. 땅 大部分이 山林保全地域이거나 논, 上水道 保護地域이어서 工場을 지을 수가 없었다. 자칫 無用之物이 될 판이었다. 龍仁郡과 京畿道를 始作으로 建設部, 農水産部, 山林廳, 環境廳 等 關聯 部處를 對象으로 半導體 事業의 必要性과 國家經濟에 미치는 影響을 說明하는 全方位 說得作業이 始作됐다.

    結局 靑瓦臺 經濟팀 도움으로 1983年 6月末 전두환 大統領의 決裁가 이뤄졌고 7月 5日 用途變更에 成功, 9月 12日 着工에 들어갔다. 도쿄宣言이 나온 지 不過 7個月 만에 奇跡的으로 工場 建設이 始作된 것이었다. 땅을 사는 일에서부터 用途變更에 이르기까지 쉬운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 過程에서 한곳에서라도 어그러졌다면 只今의 三星半導體度 없었다. 果然 이런 事實을 只今 그곳에서 일하고 있는 三星맨들은 얼마나 알고 있을까.

    問題는 空氣(工期)였다. 이番에는 工場을 6個月 안에 만들라는 湖巖의 命令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器興 1라인 工場은 83年 9月 着工해 그해 12月 2日 建物 上樑式과 同時에 內部工事가 始作됐다.

    設計는 日本 淸水建設이 맡았는데 技術陣이 그린 內部 設計圖는 但只 參考用에 不過했다. 日本과 韓國 사이의 큰 인프라 差異로 인해 設計圖面대로 施工할 수 없는 狀況이 續出했던 것이다. 本社에서 一一이 會議를 主管하면서 工事 進行 狀況을 꼼꼼히 체크하던 湖巖은 豫告 없이 불쑥불쑥 現場에 내려왔다. 그 德에 現場 任職員들은 84年 5月 17日 竣工式까지 하루도 발 뻗고 쉬지 못했다.”


    工場을 6個月 만에 完成하라니

    이윤우 前 副會長은 앞서 紹介됐듯이 美國 滯留 中 湖巖으로부터 ‘鬐興 工場을 總括하라’는 命을 받고 急히 歸國했다.

    “工場을 6個月 만에 完成하라는 건 거의 不可能한 일이었습니다. 外國에서는 아무리 빨라도 2年, 最小限 1年 半이 걸리는 公社입니다. 이걸 6個月 안에 어떻게 끝냅니까. 집에도 못가고 텐트를 치고 자면서 工事를 始作했습니다. 每日 밤 11時에 會議를 하면서 그날 그날 問題點을 點檢하고 來日 할일을 計劃했습니다.

    가장 큰 問題가 콘크리트 養生이었습니다. 마를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기다릴 수가 없으니 히터를 켜고 불을 때가면서 말렸어요. 두 番째 難關은 클린 룸이었습니다. 工場에 먼지 한 톨이라도 들어가면 안 되는데 여기저기가 工事판이니 흙이나 먼지가 오죽 많았겠습니까. 룸 內部 淸掃를 다 하고 나서야 팬을 돌렸는데 그러다 보니 技術者들이 모두 代 걸레를 들고 淸掃하는 일이 주된 業務였습니다.

    가로 세로 1피트를 큐빅 피트라고 하는데 普通 그 안에 0.1마이크론 以上짜리 먼지가 100萬個가 들어 있습니다. 이걸 제로로 만든다는 게 말이 쉽지 어떻게 可能하겠어요. 먼지 붙은 채로 들어가면 絶對 안 되고 女職員들은 化粧도 안 됩니다.

    只今은 클린 룸이 食品會社나 製藥 會社 같은 尖端 工場에 많이 設置돼 있지만 그때만 해도 그걸 만들어본 사람이나 設置해놓은 會社가 없었습니다. 구경해본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結局 選對 會長은 日本의 스미즈라는 建設 會社에 設計와 建設을 맡겼습니다. 아무리 日本 사람들에게 맡겼다고 해도 實際로 現場에서 連結해 稼動될 수 있도록 하는 건 또 저희들 몫 아니었겠습니까. 게다가 急한 건 우리지 그 사람들이 아니다 보니 韓國의 ‘빨리 빨리’ 文化를 잘 理解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붙잡고 動機 附與를 해가면서 定해진 時間 內에 空氣를 맞추는 일은 참으로 힘든 일이었습니다.”

    톨게이트에서 工場 敷地까지 이르는 4㎞ 區間

    當時 工場長을 맡았던 이가 성평건 氏다. 韓國肥料와 三星石油化學 工場을 지은 이로 湖巖의 각별한 信任을 받았다. 그가 器興 工場 建設의 뒷이야기를 담아 펴낸 冊 ‘觀點을 바꿀 때 未來가 보인다’(1994년)에 나오는 대목을 引用해본다.

    “通常 大規模 工事에는 宿所와 食堂을 먼저 짓고 본 工事를 하는 것이 常禮였다. 그러나 工場을 6個月 안에 完成하라는 絶對 絶命의 課題를 達成하기 위해 倉庫를 事務室로, 假說 幕舍를 寄宿舍로 썼다. 하지만 任職員들은 勿論 建設關係 遙遠 女社員들 모두 이런 劣惡한 環境에 對해 不平 한마디가 없었다.

    6個月이라는 짧은 空氣(工期) 때문에 設計와 施工이 同時에 進行되는지라 設計가 修正되면 施工도 바뀌어야 하는 危險 負擔이 늘 常存했다. 每日 每日을 조마 調馬하는 마음으로 祈禱하며 보내야 했다. 24時間 進行되는 工事를 날마다 監督하고 任職員들을 督勵하며 日程을 計劃대로 推進해야 하는 管理者들의 勞苦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倉庫 事務室에서 煉炭불을 지피며 새벽 두세 時까지 일하기 일쑤였고 어떤 때는 일이 너무 많아서 不過 200餘 미터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寄宿舍조차 가지 못해 일하던 자리에서 바로 野戰寢臺를 펴고 새우잠을 자는 날도 많았다. 밤을 새우는 날도 不知其數였다. 寄宿舍 方道 모자라 한 房에 7, 8名이 함께 잤다. 빨래는 一週日에 한 番 집에 들를 때 바꿔 갖고 나왔다. 間間이 열리는 燒酒 파티가 心身의 疲勞를 달래는 唯一한 趣味이자 換氣口였다.”

    그의 回顧錄을 읽다 보면 스물 네 時間 오로지 일에만 沒頭하며 山, 그 옛날 産業化 時代를 일군 아버지들의 肖像이 겹친다. 또 大韓民國 半導體 神話가 거저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생각에 肅然함마저 든다. 다시 그의 글 一部를 引用한다.

    “世界 類例없는 짧은 工事期間, 그러나 실현시켜야 한다는 絶對絶命의 課題 앞에서 重要하게 생각한 것은 精神的 共感帶였다. 왜 우리는 半導體 事業을 하며 그것도 6個月 內에 進入해야 하는가를 모든 工事 參與者들에게 인식시켜야 했다.

    無謀한 目標에 걸맞게 無謀한 精神武裝으로 努力해줄 것을 付託하는 內容의 壁報를 製作해 事務室, 食堂, 臨時 幕舍에 붙여놓고 외우도록 했다. 協力業體 納品業體에도 一一이 便紙를 보냈다. 三星에서의 經驗이 成功하면 國內 事業 基盤 擴充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면서 말이다.”

    冊에는 器興1라인 工場 建設과 關聯해 不可能을 可能으로 만든 大韓民國 ‘빨리빨리’ 精神이 빛을 發한 象徵的 에피소드도 紹介돼 있다.

    “半導體 工程 中 가장 核心的인 工程이라 할 수 있는 게 웨이퍼 위에 寫眞을 찍는 方式으로 回路를 現像하는 寫眞 工程이다. 여기에 쓰는 寫眞機를 美國에서 輸入해야 하는데 精密 光學機械여서 振動에 매우 弱했다. 空港에 내려지는 瞬間부터 生産 라인으로 들여올 때까지 마치 琉璃그릇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옮기지 않으면 안 되었다. 苦悶 끝에 金浦空港에서 器興 工場까지 運搬 리허설을 했다. 트럭에 機械와 똑같은 무게의 짐을 싣고 車輛 速度를 調節하면서 振動을 測定한 結果, 時速 40km 以上으로 달리면 안 된다는 結論을 얻고 實際로 運送할 때는 指揮監督者를 定하고 時速 30km 以下로 運搬하기로 決定했다.”

    드디어 機械를 들여오는 날이 됐다. 金浦空港에서부터 京釜高速道路를 타고 器興 톨게이트까지 엉금엉금 기어가다시피해서 進入하는 데까지는 成功했다. 마지막 고비는 톨게이트에서 工場 敷地까지 이르는 4㎞ 區間이었다. 非鋪裝 道路였던 데다가 트럭 한 臺가 겨우 지나갈 程度의 비좁은 길이었다. 이 마지막 4㎞ 區間에서 失敗하면 道路 阿彌陀佛이 되는 것이었다. 다시 성평건 氏의 肉聲이다.

    “그런데 正말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午前 일찍 空港으로 나설 때까지만 해도 分明히 非鋪裝이었던 道路가 싹 鋪裝이 된 것 아닌가. 게다가 2車線으로 擴張까지 되어 있었다. 午後 다섯 時 頃이었다. 내 눈 앞에 벌어진 光景을 눈으로 直接 보면서도 믿어지지가 않았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機械의 無事 運搬을 爲해 全 職員들이 動員되어 不過 몇 時間 만에 道路鋪裝을 마쳐 놓았다는 것이었다.”

    湖巖의 興奮

    三星電子 半導體 成功神話를 담은 ’외발 自轉車는 넘어지지 않는다‘(한상복 저)에는 물과 電氣를 끌어오는 過程의 어려움도 紹介돼 있다.

    “龍樹는 近處에 신갈 貯水池가 있어서 쉽게 解決될 것으로 생각했지만 供給量을 計算해 보니 형편없이 不足했다. 地下水를 다섯 군데나 팠지만 물이 모자라 不得已 삼성전자 水原 工場 물을 파이프로 끌어들여 썼지만 三星電子가 물 不足을 겪게 됐다. 結局 龍仁郡을 說得해 廣域 上水道로부터 直接 물을 끌어옴으로써 解決했다. 良質의 電氣를 確保하는 것도 큰일이었다.


    半導體 工場은 單 한 瞬間의 停電도 容納되지 않는다. 通風이 멎기 때문에 먼지가 發生하고 化學 物質 濃度가 自動으로 調節되지 않아서 不良이 나오기 때문이다. 停戰 한 番에 發生하는 損失은 12億~13億 원에 達한다.


    電壓도 일정해야 했다. 結局 鐵塔을 세워 單獨 線路를 끌어들임으로써 問題를 解決했다. 零下 15度라는 酷甚한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擔當 任員부터 施工業體 技能工들까지 全 任職員이 一心同體가 되어 스물네 時間 非常體制로 工事를 强行한 德分에 드디어 工場은 6個月 만에 完成된다.


    불도저와 덤프트럭 等 總 裝備 2000餘 臺가 動員됐고 26萬 名이 公休日은 勿論 新正, 舊正도 쉬지 않고 밀어붙인 大役事(大役事)였다. 이로써 國內 半導體 産業의 메카 ‘鬐興 밸리’가 태어나게 됐다. 그러나 이는 序曲에 不過했다. 10年 만에 世界 頂上을 오르는 데 있어 첫 걸음이었을 뿐이었다.”


    1983年 9月 12日 着工한 器興 第1라인 建設工事는 마침내 꼭 6個月 18日 만인 1984年 3月 末日에 完工된다. 湖巖은 當時 興奮을 이렇게 傳하고 있다.

    “先進國의 慣例로는 18個月 以上이 걸린다고 하는 걸 3分의 1로 短縮시켰다. 建設 公正과 詩 運轉 現場을 지켜본 美國의 인텔, IBM, 日本의 有數 메이커 關係者나 專門家들도 驚歎을 감추지 못했다,


    不撤晝夜 作業 스케줄에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熱誠을 다했던 作業 人員은 年 20萬 名에 이르렀다. 하루도 빠지지 않은 公休日 出勤은 다른 나라에서는 類例가 없는 일이다. 韓國은 이것 하나만으로도 將來에 큰 希望을 가질 수 있다는 自身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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