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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正熙부터 노무현까지 ‘權力 입김’ 光化門 懸板을 어이할꼬|신동아

2022年 8 月號

朴正熙부터 노무현까지 ‘權力 입김’ 光化門 懸板을 어이할꼬

[名作의 祕密]

  • 이광표 西原大 휴머니티敎養大學 敎授

    kpleedonga@hanmail.net

    入力 2022-08-07 1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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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光化門 懸板 또 毁損, 2023年 새 懸板 걸린다

    • 現在 位置 復元 첫 懸板은 朴正熙 大統領 글씨

    • 노무현 政府, 朴 痕跡 지우려 해

    • 1865年 懸板 書體 文化財的 價値 낮아

    • 訓民正音體 한글로 새로 만들자는 意見도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광화문. 지금의 광화문은 2010년 복원한 것이다. [이광표]

    서울 종로구에 位置한 光化門. 只今의 光化門은 2010年 復元한 것이다. [이광표]

    광화문의 현판. 化자 오른쪽에 금이 가 있다. [이광표]

    光化門의 懸板. 化字 오른쪽에 금이 가 있다. [이광표]

    光化門 廣場, 光化門 戀歌, 光化門 글板, 光化門 네거리…. 光化門은 斷然 서울의 象徵이고 大韓民國의 象徵이다. 光化門은 歷史的이고 또한 浪漫的이다. 올해 6月, 景福宮 光化門 懸板에 금이 갔다. 검은色 化字 바로 오른쪽의 흰 바탕 위아래로 금이 간 것이다. 寫眞으로 찍어보면 갈라진 것이 눈에 확 들어온다. 2010年 復元된 이 懸板은 復元 以後 석 달도 지나지 않아 금이 가 世上을 놀라게 했는데, 이番에 또다시 금이 갔다. 2010年 금이 갔을 때, 文化財廳은 懸板을 다시 만들기로 했고, 2022年 現在 製作 中이다.

    光化門 懸板에 또 금이 가자 文化財廳은 “이미 修理한 部分에서 메움材가 탈락해 發生했으며, 旣存의 메움材 等을 除去하고 修理하겠다”고 했다. 새로 만드는 懸板에 對해선 “國立中央博物館 및 스미소니언博物館 寫眞과 日本 와세다代 所長 景福宮 營建日記 等 光化門 懸板 關聯 資料를 통해 原形 考證을 實施했고, 專門家 諮問을 거쳐 國家無形文化財가 參與해 懸板을 다시 製作하고 있다”며 “懸板의 各自(刻字)와 丹靑을 마무리했고, 現在 글字銅板을 設計하는 段階다. 검은色 바탕의 金箔 글字로 製作해 2023年 下半期에 마무리할 豫定이다”라고 說明했다.

    금이 간 現在의 光化門 懸板(2010年 作)을 修理하는 것과 別個로 來年 末이면 光化門에 새로운 懸板(2023年 作)李 걸린다. 2010年 버전이 갈라지고 또 갈라지면서 不過 10餘 年 만에 退出될 運命에 處했으니,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런데 그동안 今晩 간 것이 아니다. 글씨를 漢字로 할지 한글로 할지, 懸板의 바탕과 글씨는 무슨 色깔로 할지를 놓고 끝없이 論難에 휩싸였다. 그 論難은 2005年 始作됐다.

    光化門 受難史

    景福宮 重建 公社는 1865~1868年 興宣大院君에 依해 進行됐다. 그 過程에서 正門인 光化門은 1866年 重建됐다. 日帝强占期에 景福宮 흥례문(光化門 뒤쪽에 位置)을 헐어내고 朝鮮總督府 廳舍를 짓던 日帝는 1926~1927年 光化門이 總督府 建物의 視野를 가린다는 理由로 光化門을 解體해 景福宮 建春門 北쪽(現在 國立民俗博物館 正門 자리)으로 옮겼다. 6·25戰爭 때인 1951年엔 光化門 石築 위의 木造 樓閣이 爆擊으로 부서졌고 이때 光化門 懸板도 사라졌다.

    1967~1968年 朴正熙 政權은 光化門을 제자리로 옮겨 復元했다. 當時 朝鮮總督府 建物을 中央廳 建物로 쓰고 있을 때였다. 光化門을 中央廳의 正門으로 活用하고 同時에 서울 都心의 象徵 建築物로 삼으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光化門의 元來 자리에는 이미 대로가 들어선 狀況. 그래서 光化門은 北쪽으로 11.2m, 東쪽으로 13.5m 밀려났다. 또한 建物의 方向도 景福宮 南北 中心軸에서 3.75度 動向으로 뒤틀리게 配置했다. 中央廳 建物의 正門 役割을 하려면 中央廳 建物과 平行을 이뤄야 했다. 그런데 日帝가 흥례문을 撤去하고 朝鮮總督府 建物(中央廳)을 지을 때 意圖的으로 景福宮의 中心軸에서 어긋나게 配置했다. 그래서 中央廳 建物과 平行으로 配置하다 보니 景福宮의 中心軸과 어긋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1968年 光化門은 嚴密히 말해 原位置 復元이 아니었다. 게다가 石築 위의 樓閣을 나무가 아니라 鐵筋콘크리트 構造로 建立했으니 이래저래 半쪽짜리 復元에 그치고 말았다. 거기에 最高 權力者인 朴正熙 大統領의 한글 글씨 懸板이 걸렸다.



    歲月이 흐르면서 콘크리트 光化門(겉으로 보면 木造 光化門으로 속아 넘어갈 程度였다)과 朴正熙 한글 懸板은 서울 都心의 象徵 風景으로 굳건히 자리 잡았다. 1990年代 들어 景福宮 復元 事業이 始作됐다. 1993年 들어선 金永三 政府는 ‘歷史 바로 세우기’ 프로젝트를 稼動하면서 景福宮 復元에 拍車를 加했다. 이어 2006年부터 ‘光化門 제자리 찾기’ 事業이 始作됐다.

    2005年 光化門 懸板 騷動과 奧妙한 뒤끝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된 인화문 현판. [이광표]

    서울 종로구 國立故宮博物館에 展示된 印花紋 懸板. [이광표]

    그런데 노무현 政府 時節이던 2005年 1月, 文化財廳은 光復 60周年(2005年 8月 15日)에 맞춰 光化門 懸板을 交替하겠다고 發表했다. 2006年 光化門 復元 工事를 始作하기로 돼 있는데, 그에 앞서 懸板을 먼저 交替하겠다니, 뜬금없는 發表였다. 게다가 그때부터 作業을 始作해 約 7個月 만에 懸板을 새로 만들어 달겠다는 것은 物理的으로 不可能했다. 그런데도 强行한다면 不實 製作으로 이어질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곳곳에서 “朴正熙의 痕跡을 지우려는 政治的 意圖가 담겨 있는 것 아니냐”는 批判이 터져 나왔다. 當時 유홍준 文化財廳長은 “政治的인 意圖는 全혀 없다”고 했지만, 많은 이들은 그의 發表를 政治的이라고 받아들였다. 批判 輿論이 沸騰했고 文化財委員會가 制動을 걸었다. 結局 그해 懸板은 바뀌지 않았다.

    2005年 벌어진 光化門 懸板 騷亂. 누군가는 그저 하나의 해프닝 程度로 넘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넘기기엔 그 뒤끝이 매우 奧妙했다. 끝없이 이어질 論難의 前兆라고 해야 할까.

    光化門을 復元하려면 一旦 旣存의 콘크리트 構造物을 撤去하고 石築度 解體해야 한다. 그 工事가 始作되기도 前인 2005年 光化門 懸板이 먼저 社會 이슈로 浮刻됐다. 自然스럽게 懸板을 둘러싼 論議가 活潑해졌다. 懸板을 大體 어떻게 만들지에 關한 論議였다. 景福宮 復元 工事의 一環이니 光化門 懸板도 景福宮 重建 時點의 懸板 글씨로 復元해야 한다는 意見이 힘을 얻었다. 重建 當時 光化門의 懸板 글씨는 임태영(任泰瑛)이란 사람이 쓴 것으로 確認됐다. 1865年 景福宮 重建 當時 訓鍊大將이었던 임태영은 營建圖鑑製造(營建都監提調)를 맡아 景福宮 工事를 責任진 人物이다.

    6·25戰爭 때 懸板이 불에 타 사라졌기에 임태영 글씨의 懸板 모습을 確認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次에 1902年, 1919年 撮影한 光化門 懸板 寫眞의 原版이 日本 도쿄대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發見됐다. 임태영의 ‘光化門’ 글씨를 디지털로 擴大 復元해 懸板 製作에 活用하기로 했다. 2006年 12月, 旣存 콘크리트 光化門을 撤去하면서 復元 工事가 始作되었다. 2007年 1月엔 朴正熙 大統領 글씨의 한글 懸板(1969年 버전)을 떼어냈다. 이것은 現在 國立故宮博物館에 있다.

    임태영 글씨體로 懸板을 復元한다는 事實이 알려지면서 論難이 일었다. “왜 굳이 임태영 글씨여야 하느냐”는 反論이었다. 意見은 다양했다. “現在 우리 時代에 活動하는 現役 書藝家의 글씨로 하자” “正祖의 어필이나 韓石峯, 金正喜의 글씨를 集字(集字)해 懸板을 만들자” “漢字가 아니라 한글로 해야 한다. 訓民正音體나 朝鮮時代 한글 木版活字體로 하자” 等等. 그러나 1865年 重建 當時의 懸板 글씨로 復元한다는 大原則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製作한 光化門 懸板(2010年 버전)은 2010年 8月 15日 公開됐다. 庚戌國恥 100周年이 되는 해의 光復節이었다. 國權 喪失의 恥辱을 잊지 않겠다는 意味를 담아 光化門 復元 및 懸板 除幕式을 연 것이다.

    문화예술 분야 인사들이 구성한 ‘광화문 현판을 훈민정음체로’ 시민모임은 2020년 10월 8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 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한자 현판 대신 훈민정음 해례본 한글 서체로 ‘광화문’ 현판을 만들어 새로 달자”고 제안했다. [동아DB]

    文化藝術 分野 人士들이 構成한 ‘光化門 懸板을 訓民正音體로’ 市民모임은 2020年 10月 8日 서울 종로구 光化門 廣場에서 記者會見을 열고 漢字 懸板 代身 訓民正音 解例本 한글 書體로 ‘光化門’ 懸板을 만들어 새로 달자”고 提案했다. [東亞DB]

    不實 復元과 繼續되는 論難

    그런데 3個月도 지나지 않은 2010年 11月, 光化門 懸板에 금이 갔다. ‘光’字 왼쪽을 가로질러 금이 갔다. 不實 復元이었다. 問題의 核心은 懸板龍 木材를 充分히 乾燥하지 않은 탓이었다. 元來 12月 竣工 豫定이었는데 8月 15日 光復節 行事에 맞추려 空氣를 短縮하다 보니 이런 일이 일어났다. 文化財廳은 2011年 4月 懸板을 修理했고, 2013年까지 懸板을 다시 만들어 交替하기로 決定했다. 그러자 水面 아래 가라앉았던 論難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漢字 懸板이 아니라 한글 懸板으로 해야 한다는 主張이 또다시 提起된 것이다. 한글 團體를 中心으로 한글 懸板論이 强力하게 펼쳐졌다. 文化財 專門家들을 中心으로 한 反論도 만만치 않았다. 事實 2006年부터 2010年 사이에 이미 論議가 끝난 事案인데, 不實 復元으로 懸板을 다시 만들어야 하는 狀況이 發生하자 한글, 漢字 論難이 다시 고개를 든 것이다. 論難을 拂拭하고자 輿論調査, 公聽會, 專門家 論議 等을 數次例 거쳤다. 2012年 12月 文化財委員會의 結論은 ‘重建 當時 임태영 글씨體 그대로’였다.

    그런 過程을 거쳐 새로운 懸板을 製作하기 始作했는데 이番엔 또 다른 問題가 불거졌다. 바탕과 글씨의 色相에 關한 論難이었다. 2010年 製作된 懸板은 ‘흰色 바탕에 검은色 글씨’였다. 이것이 光化門 懸板 原形(1866年 作)의 色相인지 疑問이 提起된 것이다. 事實 이 疑問은 復元 直後부터 提起되었다. 景福宮 等 宮闕의 殿閣이나 城郭 城門의 懸板은 大部分 검은色 바탕에 흰色 또는 金色 글씨였다. 그렇기에 흰色 바탕에 검은色 글씨의 光化門 懸板(2010年 作)李 무언가 語塞했다.

    文化財廳은 새로운 懸板(2023年 作)을 製作하기 始作한 2015~2016年 무렵까지도 ‘흰 바탕 검은 글씨’를 固執했다. 當時까지 確保한 琉璃原版 黑白寫眞으로는 漢字 글씨體를 確認할 수 있어도 懸板의 바탕과 글씨 色깔을 正確하게 判斷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色깔에 關한 論議와 論難이 漸漸 擴散되더니 及其也 검은色 바탕에 金色 글씨였음을 보여주는 資料들이 나타났다. 結局 2018年 말, 새 懸板(2023年 作)은 검은色 바탕에 金色 글씨로 確定되었다.

    光化門에 드리운 權力의 視線

    ‘光化門 懸板 論難’은 文化財와 文化財 復元 等을 바라보는 觀點과 哲學, 復元 基準 時點과 復元 方法을 둘러싼 論議였다. 그런데 그 裏面은 그리 單純하지 않다. 겉으로는 文化財 復元 論難이었지만, 實은 매우 政治的이고 이념적인 對立이 숨어 있었다.

    그렇다면 光化門 懸板은 왜 이렇게 20年 가까이 論難의 對象이 돼온 것일까. 그건 光化門이기 때문이다. 옛 宮闕 景福宮의 正門이면서 同時에 只今 大韓民國의 象徵 空間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것을 記憶하고 消費하는 데 사람들이 큰 關心을 갖는 것이고, 虎視眈眈 權力과 政治가 介入하려는 것이다.

    興宣大院君이 景福宮과 光化門을 重建한 것도, 朝鮮總督府가 景福宮과 光化門을 毁撤한 것도 權力과 政治가 介入한 結果였다. 1968年 12月 朴正熙 大統領이 光化門의 鐵筋콘크리트 樓閣에 自身의 글씨로 懸板을 만들어 건 것도 政治的이었다. 그런데 이듬해 朴正熙 大統領은 그것을 떼고 글씨를 다시 써서 새로운 懸板을 걸었다. 1968年 懸板의 한글 글씨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게 해서 1969年 글씨를 다시 써 懸板을 달았고, 그것이 2007年까지 39年間 光化門에 걸려 있었다. 이는 光化門 懸板에 對한 朴正熙 大統領의 關心이 至大했음을 의미한다. 朴正熙 大統領은 光化門의 懸板을 自身의 政治的 이미지와 同一視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自身의 ‘光, 禍, 文’ 글씨 하나하나에 그토록 神經을 쓴 것이다.

    光化門은 예나 只今이나 그 自體로 大韓民國의 象徵이니, 權力者들이 光化門 懸板에 關心을 갖는 것은 너무나 當然한 일이다. 2005年 秒, 不過 몇 달 동안 뚝딱해서 光化門 懸板을 바꿔 달겠다는 發想을 내놓은 것도 그 自體가 政治的 欲望의 發露였다. 庚戌國恥 100周年이 되던 해 光復節에 復元 記念式을 맞추려고 懸板 製作 期間을 短縮한 것도 政治的이었다. 그렇기에 光化門 懸板의 傷處가 깊고 그 後遺症이 只今까지 이어지고 있다.

    숨어 있는 伏兵, 氣韻生動 問題

    論難, 考證, 騷亂을 거치다 보니 금이 간 懸板을 다시 製作하는 作業은 繼續 늦춰졌다. 結果的으로 금이 간 懸板(2010年 作)李 光化門에 12年째 걸려 있다. 금 간 部位를 메우고 修理해 肉眼으로 볼 수는 없지만 그건 儼然히 금 간 懸板이었고, 及其也 이番에 또다시 갈라지고 말았다. 2005年 始作된 光化門 懸板 論難이 不實 復元과 맞물리면서 끝없이 騷亂을 일으키는 形局이다.

    어쨌든 來年엔 새로운 懸板(2023年 作)李 걸린다고 한다. 그렇다면 只今까지 17年 동안 이어져온 論難이 가라앉을 수 있을까. 一旦 水面 아래로 가라앉을 것이다. 그러나 些少한 契機가 생겨도 또 論難이 불거질 可能性이 높다. 例를 들어, 금이 한 番 더 간다면 그때는 致命的이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또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조심스럽기만 하다.

    特히 懸板의 글씨를 한글로 할지, 漢字로 할지를 두고 불거진 論難을 注目할 必要가 있다. 21世紀 한글論이 重建 當時 復元 原則을 이길 수는 없다. 그러나 한글 懸板論은 隨時로 고개를 내밀 可能性이 적지 않다. 강병인 캘리그래퍼는 光化門 懸板을 訓民正音體로 바꾸어 한다고 主張하는 사람이다. 그는 “漢字로 된 現 글씨는 稀微하고 輪廓도 없는 작은 寫眞에서 擴大하고 想像으로 다듬은 글씨여서 原形의 價値가 없다. 書藝家 要求하는 기운生動(氣韻生動)도 없다”고 主張한다.

    여기서 氣韻生動이라는 말이 가슴을 뜨끔하게 한다. 實際로 只今의 글씨 卽 임태영의 書體엔 氣韻生動이 없어 보인다. 景福宮 重建 當時의 임태영 글씨(1866年 作)로 復元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그럼에도 그 글씨에 氣韻生動이 不足하다는 點은 否認할 수 없는 事實이다.

    요즘 國立故宮博物館에서 ‘宮中 懸板-朝鮮의 異常을 걸다’ 企劃展이 열리고 있다. 光化門을 通過해 景福宮으로 들어가면 바로 왼便이 國立故宮博物館이다. 印花紋(仁化門), 大安門(大安門) 等 宮闕의 正門에 달았던 懸板도 이番 展示에 出品되었다. 이 懸板들에 비하면 光化門에 걸린 只今의 금 간 懸板(2010年 作)은 矮小하고 힘이 떨어진다.

    名作인가 애物단지인가

    이제, 이런 質問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光化門 懸板은 果然 名作이 될 수 있는가. 늘 騷亂만 일으키는 애物단지로 記憶되는 것은 아닌가. 論難과 受難의 過程이 먼 後날 名作으로 待接받는 데 滋養分 役割을 하는 境遇도 있다. 하지만 光化門 懸板에 對해선 뭐라고 해야 할지 아직 모르겠다. 冷靜히 말하면, 只今은 애物단지다.

    2005年 以後 20年 가까이 온갖 受侮를 겪어온 光化門 懸板. 來年에 검은 바탕에 金빛 글씨로 다시 걸리겠지만 임태영의 글씨體는 如前히 氣韻生動이 不足하다. 勿論 懸板의 바탕色과 글씨色이 바뀌면 그 雰圍氣가 多少 바뀔 수도 있겠지만, 氣韻生動의 不足은 21世紀 光化門 懸板의 致命的 弱點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이러한 現實을 直視해야 한다. 그렇기에 다시는 꼬투리 잡히는 일이 없어야 한다. 다시 금이 가거나 不實 論難에 휩싸이면 많은 사람이 기운生動을 걸고넘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김없이 權力과 政治의 欲望이 끼어들 것이다. 光化門 懸板은 名作인가, 애物단지인가.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이광표
    ● 1965年 忠南 豫算 出生
    ● 서울대 考古美術史學科 卒業
    ● 高麗大 大學院 文化遺産學協同過程 卒業(博士)
    ● 前 동아일보 論說委員
    ● 著書 : ‘그림에 나를 담다’ ‘손 안의 博物館’ ‘韓國의 國寶’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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