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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는 목마름으로’ 결氣 그대로 산 眞正한 修行者|新東亞

2022年 8 月號

‘타는 목마름으로’ 결氣 그대로 산 眞正한 修行者

‘김지하 評傳’ 著者가 쓴 김지하의 마지막 10年

  • 허문명 記者·‘김지하와 그의 時代’ 著者

    angelhuh@donga.com

    入力 2022-07-28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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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 아들 大學 못 보낸 父母의 恨”

    • “革命家 自負하는 天才들이 돈 妻 먹어?”

    • ‘前線 離脫한 者’라는 辱說 받으며…

    • “옳다, 地下다… 더러운 이름이야”

    • 韓民族 뿌리 밝히려 한 큰 思想家



    필자가 생전에 찍은 김지하 시인의 모습. [허문명 기자]

    筆者가 生前에 찍은 金芝河 詩人의 모습. [허문명 記者]

    6月 25日 열린 故(故) 金芝河 詩人 49齋 追慕文化制에 미야타 마리에 氏가 參席했다는 것을 들은 건 親하게 지내는 日本人 記者로부터였다. 40代인 그는 1980年代 서울 特派員을 했던 會社 先輩로부터 金芝河 追慕祭에 가보라는 取材 指示를 받아 그날 낮 現場 取材를 했다고 한다. 아직도 日本에서는 김지하를 追憶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미야타 先生 追慕辭가 印象的이었다는 日本 記者의 말을 듣고 生前의 김지하 先生으로부터 들었던 바로 그분이구나 싶어 ‘꼭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追慕祭 이튿날 土曜日 午後 인사동에서 어렵사리 만날 수 있었다.

    작고 軟弱한 體軀의 80代 할머니였지만 銳利하고 힘 있는 눈빛에서 느껴지는 降壇과 몸 全體에서 풍겨 나오는 知的인 에너지는 只今으로부터 50餘 年 前 日本과 國際社會에 靑年 김지하를 널리 알린 人物답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이날 주어진 時間은 30餘 分이었다. 記者는 미야타 先生에게 ‘김지하 評傳’을 동아일보에 連載했고 冊으로 묶어냈다고 紹介했다. 그런데 意外의 反應에 初盤 雰圍氣가 낯설고 語塞해졌다. 金芝河 評傳을 왜 쓰게 됐느냐고 묻기에 “(김지하가) 박근혜 大選候補 支持 宣言을 했을 때를 契機로 民主化 勢力과 産業化 勢力을 統合하려는 試圖였다”고 答하자 先生의 얼굴이 굳어진 것이다. 自身은 아직도 “(朴 前 大統領을 支持했던) 故人의 行動이 理解가 가지 않는다”고 했다. 아, 미야타 先生은 김지하의 過去에만 멈춰 있구나, 왜 故人이 生前에 그런 行動과 말을 했는지 제대로 모르고 있구나…. 當惑스러움과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이날 그에게 “金 詩人을 日本과 世界에 알려주셔서 韓國人의 한 사람으로서 感謝하다”고 거듭 말했다. 眞情性이 傳해졌기 때문인가. 先生의 表情과 마음이 풀린 듯 말門이 열리면서 金 詩人과의 因緣을 차분하게 풀어놓았다.

    김지하라는 天才 알리고 싶었다

    1970년대 김지하 시집을 일본에서 출판하고 국제사회에 구명운동을 펼쳤던 전 ‘중앙공론’ 편집자 미야타 마리에 씨. [허문명 기자]

    1970年代 김지하 詩集을 日本에서 出版하고 國際社會에 救命運動을 펼쳤던 전 ‘中央公論’ 編輯者 미야타 마리에 씨. [허문명 記者]

    “‘김지하’라는 이름을 만난 건 1970年 6月이었습니다. 當時 저는 中央공論士(中央公論社)라는 雜誌 編輯者였는데 夜勤을 하다가 冊床 한구석에 놓인 ‘週間 아사히’를 펼쳤습니다. 김지하의 長篇 諷刺詩 ‘오적’ 全文이 日本語로 실렸는데 처음으로 읽는 韓國人 詩人의 壓倒的인 말의 힘에 完全히 魅了됐습니다.”(*중앙공론은 日本 最大 發行部數로 잘 알려진 요미우리新聞이 發行하는 月刊誌다. ‘문예춘추’ 다음으로 讀者를 많이 確保할 만큼 日本에서 影響力 있는 雜誌다.)

    프랑스 레지스탕스 文學에 心醉해 大學(와세다)도 佛文學科에 들어갈 程度였다는 미야타 先生은 “不正과 腐敗에 빠진 統治者를 찌르는 말들이 슬픔이나 抵抗이 아니라 憤怒와 비웃음, 때로는 諷刺와 諧謔으로 가득해 言語라는 것이, 詩라는 것이 이렇게 힘이 있는 거구나 새삼 느꼈다”고 했다. 그는 以後 김지하라는 人物에 확 빠져들었다고 한다.

    “이 사람은 天才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以後 金 詩人이 ‘오적’ 때문에 中央情報部에 逮捕 連行됐고, 詩集 ‘황토’도 發賣禁止 處分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의 詩集을 韓國에서 出版할 수 없다면 日本에서 하자고 決心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김지하라는 韓國이 낳은 天才 詩人의 삶과 作品이 묻혀버릴지 모른다는 안타까움이 있었습니다.”

    마침내 김지하 詩集은 미야타 先生에 依해 1971年 12月 中央공論士에서 ‘긴 어둠의 끝에’라는 題目으로 發刊된다. 冊은 큰 反響을 불러일으켰고 김지하의 이름도 日本에 알려지기 始作했다. 以後 미야타 先生의 活動은 김지하 救命運動으로 이어진다.

    “冊이 나온 이듬해인 1972年 5月 金 詩人이 다시 逮捕되면서 出版 活動만으로는 充分치 않다는 생각에 日本의 文學人들에게 冊을 보내고 詩人을 돕는 運動을 했습니다. 金 詩人이 1974年 7月 ‘民靑學聯’ 事件으로 死刑 求刑을 받았을 때에는 ‘김지하를 죽이지 말라! 釋放하라!’라는 內容의 呼訴文을 朴正熙 大統領에게는 勿論 全 世界 知識人들에게도 發信했습니다.

    日本에서는 吳에 겐자부로, 엔도 슈사쿠, 마쓰茅島 세이조, 시바다 쇼, 다니가와 슌타로 等 大文豪들이 同參했고 海外에서도 사르트르, 보부아르, 마르쿠제, 하워드 陳, 노엄 촘스키, 에드윈 라이샤워 等 많은 著名人士들이 署名했습니다. 이어 1975年 12月 ‘불귀(不歸)’, 1978年 9月 ‘苦行(苦行)’이라는 題目으로 詩集을 펴냈습니다.”

    미야타 先生은 金 詩人이 環境運動을 하고 民主化運動 陣營과 距離를 두는 1990年代에도 그와 便紙로 交流했다고 한다. 그러다 朴槿惠 支持 宣言 以後 끊겼다고 했다. 그는 “이番에 무거운 마음으로 서울에 왔고 그 마음 그대로 도쿄로 돌아간다”고 했다. 故人을 만나면 묻고 싶은 게 많았는데 이제는 不可能한 現實이 돼버렸다는 것이다. 追悼辭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韓國의 民主主義는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民主化가 達成됐다고 게을러진 많은 사람이 김지하의 悽絶한 맨손의 싸움, 苦難에 찬 逃走의 날들을 想像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의 詩를 內密하게 飜譯할 때 또 힘없는 나를 依支해야 했던 故人의 외로움을 생각하면서 저는 아무리 힘들어도 그의 信賴에 應하고 싶어서 努力했습니다. 제 삶 亦是 苦難의 連續이었지만 詩人의 글에 感應할 수 있는 나 自身을 發見하면서 勇氣를 가졌습니다.”

    입으로만 ‘進步’ 말하는 사람들과의 鬪爭

    記者와 金 詩人은 2013年 1月 5日 江原 原州土地文學觀에서 처음 만났다. “인터뷰 안 한다”는 答을 들었지만 週末에 無酌定 찾아간 참이었다.

    그즈음 그는 뉴스 메이커였다. 그로부터 하루 前, 그는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再審 宣告公判에서 1974年 民靑學聯 事件에 連累돼 拘束된 데 對해 無罪를 宣告받았다. 몇 달 前에는 박근혜 大選候補 支持 宣言으로 新聞의 톱기사를 裝飾했다. 1990年代 初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라”고 一喝한 뒤 大衆의 記憶 속에서 거의 사라졌다시피 했던 그가 2013年 1月 突然 世上 밖으로 나온 것이었다.

    正初의 칼바람이 매섭던 그날, 아내인 金榮珠 館長만 혼자 文學觀을 지키고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서너 時間이 지났을까. 마침내 金 詩人이 저녁 7時頃 文化館으로 들어섰다. 잿빛 改良 韓服에 한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절뚝이는 걸음걸이였다. 그는 “혼자 旌善 아우라지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그가 그즈음 왜 不便한 몸을 이끌고 江原道를 휘젓고 다녔는지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얼마 뒤였다.

    記者는 그와의 첫 만남이 설레기도 했지만 조금 두렵기도 했다. 世間에는 그가 제精神이 아니라는 말이 돌았다. 或如 제멋대로 이야기하는 그가 無禮하거나 작은 말 한 마디에라도 마음이 傷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면 어쩌나 걱정이 일었다.

    直接 만나 본 그는 마음대로 말하는 사람은 맞았지만 事理分別이 明確했고 무엇보다 나라와 民族을 사랑하는 愛國心으로 가득했다. 當時 그는 TV 記者會見에서 느닷없이 ‘돈’ 이야기를 했는데 뉴스로만 짤막하게 傳해 듣는 사람 立場에선 참으로 뜬금없고 荒唐한 멘트였다. 그 멘트는 다음과 같았다.

    “27億 원씩 받고 도망간 女子(이정희 當時 統合進步黨 議員이 選擧 保全金으로 받았다는 돈을 말한다)도 있는데 死刑宣告 얻어터진 김지하가 몇 푼 받아서야 되겠느냐. 5億이 아니라 500億, 5000億 程度 주던가. 적어도 27億 以上은 줘야지.”

    김지하가 變節하더니 이제 돈毒까지 올랐다고 世上 사람들은 수군댔다. 그런데 事情을 듣고 보니 그 나름 다 생각이 있던 거였다.

    “只今까지 (내가) 數十 年間 떠든 게 民主主義였는데 民主主義 얘길 또 해? 지루하기 짝이 없지. 諷刺? 그게 아니야. 李正姬 議員이 大選候補를 辭退하는 데 27億 원을 補塡받는다는 記事를 읽는데 나도 모르게 ‘쥐새끼 같은 ×, 지랄하고 자빠졌네’라는 말이 튀어나왔어. 우습더라고. 하하하.

    記者들을 보니 뭔 말을 하긴 해야 하는데…. 느낌이 어떠냐기에 ‘아무 느낌 없다’ 하니 失望한 눈치였어. ‘이 子息들이 왜 失望하지?’ 다시 보니까 똥구멍 같은 내 입에서 뭔가 나오길 기다리는 것 같았어.

    그래서 돈 이야기 했어. ‘나는 요즘 돈이 좋다. 왜? 돈이 나빠? 돈 싫어하는 사람 손 들어봐.’ 아무도 손드는 사람 없대. 나는 옛날엔 돈을 惡(惡)의 徵標라고 봤어. 오래 살다 보니 돈이라는 게 사람과 사람 사이의 疏通 手段이야. 父子之間에도 그래. 돈이 얼마나 重要한데.”

    그는 가슴속에 담아뒀던 말을 쏟아내기라도 하겠다는 듯 쉼 없이 말했다. 돈이 없어 子息 敎育도 제대로 시키지 못했다는 말을 들을 때는 마음이 짠했다.

    “아들 둘이 大學엘 못 갔어. 요즘 世上에 大學도 못 나오면 어디에 쓰나. ‘두 아들이 大學도 못 갔다’ 해도 놀라는 사람이 없어. 辱 안 하기로 盟誓했지만 그럴 땐 ‘×발’ 소리가 절로 나와. 自己 子息들은 大學 졸업시켰으니까. 大學 못 보낸 父母 限(恨)을 모르는 거지. 어떻든 그날 記者들을 보니 갑자기 돈 이야기 한番 하자 생각이 들더라고. 젊은 記者들 얼굴이 하나같이 ‘네가 돈 때문에 (法院) 再審 申請했구나’ 하는 表情이야. 그걸 보고 더 하기 始作했지.”

    그는 겉으로는 ‘民主’와 ‘正義’를 말하면서 뒤로 돈과 權力을 챙기는 이른바 ‘입(口) 進步’들의 二重性을 거친 言語로 叱咤했다. 稅金 빼먹는 또 다른 盜賊이라면서 말이다.

    “내가 오적(五賊) 쓸 때도 事業家들이 賂物 주는 건 辱하지 않았어. 하지만 國庫金 빼먹은 놈은 찢어 죽여야 한다고 했어. 내 信念이야, 아니 民衆의 信念이야. 장사꾼이 賂物 주는 것은 상관없다 이거야. 그런데 國庫金이라는 건 庶民들이 헐벗어 바친 稅金이야. 그걸 떼먹어? 죽여야지. 거기에다 노무현 政權 末期에 (執權한 者들이) 돈을 처먹어? 스스로 革命家라고 自負하는 木浦, 光州 限(恨)의 天才들이? 망월동 핏값 받은 外에 또 받아?”

    마치 마당劇 舞臺에 선 듯 그의 말에는 韻律과 리듬까지 있었다. 그는 일찍이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라’는 글을 통해 ‘말로만 進步’를 떠들어대는 知識人들을 向해 “맥도널드 햄버거를 즐기며 反美를 외치고 戰士(戰士)를 自處하면서 反파쇼를 逆說”하는 ‘철不知들’이라 猛攻했었다.

    글이 나간 直後 民族文化作家會議는 金芝河 除名을 決定했고 그의 집에는 한 달間 밤낮을 가리지 않고 非難, 辱說, 脅迫 電話가 걸려왔다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이미 運動圈으로부터 孤立된 터여서 김지하는 그 일로 더 徹底히 隱遁한다.

    ‘보고 싶은’ 金芝河만 ‘보는’ 사람들

    김지하 시인과 마지막까지 교류했던 윤명철 전 동국대 교수. [허문명 기자]

    金芝河 詩人과 마지막까지 交流했던 윤명철 前 東國大 敎授. [허문명 記者]

    當時 그는 自身의 삶을 悲劇으로 몰아간 獨裁者의 딸을 支持했다고 해서 話題가 됐지만 정작 그가 朴槿惠 支持를 宣言한 理由는 다른 곳에 있었다. “음(陰)의 時代가 왔기 때문”이란 것이었다.

    “男子의 時代가 가고 女子의 時代가 왔다는 건 내가 오래前부터 해온 말이야. 3000年 동안 男性이 女子를 抑壓해 왔어. 男性主義, 家父長制 歷史에서 女性 指導者가 나올 때는 大勢가 움직인다는 거야. 只今이 바로 開闢期野. 음(陰) 開闢이야. 量(陽) 支配에서 音 支配로 넘어가는 때야.”

    音이니 量이니 開闢이니 하는 말들은 낯설게 들렸지만 以後 그를 여러 次例 만나면서 그가 왜 韓民族의 뿌리와 東洋思想의 本質을 探究하게 됐는지 理解할 수 있었다. 그와 마지막까지 깊게 交流한 윤명철 前 東國大 敎授(現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國立大 敎授)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監獄에서 나온 뒤 鬪士도 아니었고 運動家, 政治人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가 쓴 많은 冊과 詩集, 어려서부터 畫家가 되고 싶어 그린 ‘亂(蘭)’ 그림에 담긴 것은 韓民族에 對한 津한 愛情과 바른 評價였다.

    그가 生前에 성치 않은 몸과 구멍이 난 精神을 이끌고 高句麗 땅, 파미르高原, 바이칼호, 안데스山脈, 캄차카半島, 中央아시아의 사마르칸트까지 찾아다녔던 건 우리가, 人類가 志向해야 할 그 무엇의 原形을 찾고, 그 原形에 담긴 우리 思想을 밝히기 위해서였다.

    그는 엄청난 執念으로 온몸을 불사르며 苦惱하고, 苦痛받으면서 生命思想을 찾아 올렸다. 그것을 現代 言語와 西洋 論理, 佛敎 思想으로 풀어내고, 世上의 普遍的 眞理와 結合하고자 無知無知하게 애를 썼다. 그런 點에서 眞正한 思想家였다고 생각한다.”

    1980年代 그는 숱한 知人들과 後輩들로부터 “데모대 先頭에 서달라”는 要請을 받았지만 “이제 政治가 아닌 다른 일을 찾고 있다. 더는 데모 안 한다”고 拒絶했다. 變節, 背信, 反動이라는 非難에서부터 ‘戰列을 흩뜨리는 者’ ‘戰線을 離脫한 者’라는 辱說이 쏟아졌다. 環境과 生命運動에 나서자 ‘생명교 敎主(敎主)’라는 비아냥도 거셌다. 時人이라는 여린 感受性을 가진 그의 마음에 世上의 辱說과 非難은 그대로 화살이 돼 꽂혔다.

    出獄 後 20餘 年 동안 精神分裂症으로 苦痛받아 10餘 次例 入院과 退院을 反復해야 했던 건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房 안에 멍하니 있다가 歡迎에 이끌려 집을 나가 行方不明돼 버리는 가장(家長)을 바라보는 아내와 子息들 心情은 어떠했을까.

    그와의 첫 만남 以後 記者는 그의 삶을 더 파고들고 싶었다. 그해 겨울 두 달餘間 원주를 오가며 100時間 以上 對話를 나눴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김지하와 그의 時代’는 길어야 60回로 豫想됐던 連載가 100回를 넘기면서 동아일보에 실렸다. 돌이켜 보면 그는 記者와 만났던 그때 人生에서 가장 平穩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것 같다.

    故人을 떠올려 보면, ‘젊을 적 너무 일찍 世上의 中心에 서다 보니 그것이 오래오래 사람들의 머릿속에 烙印처럼 固定觀念으로 자리 잡은 건 아닐까’ ‘사람들이 그의 생각과 行動의 變化를 쫓아가지 못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김지하는 繼續 새로움, 本質을 向해 나아갔지만 사람들은 自己가 보고 싶은 金芝河만 보려 했다는 생각 말이다. 그는 사람들의 二重性에 진절머리를 냈고 自身을 神祕化하고 英雄詩하는 것도 싫어했다. 뼛속 깊은 抵抗 精神을 가진 이답게 權力이나 制度圈에 對해서는 애써 距離를 두려 했다.

    生前의 그가 自身의 이름에 對한 얽힌 이야기를 했을 때도 記者는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

    “地下가 무슨 뜻이냐, 그럴듯해 보이지? 아니야 땅속에나 갈 놈이라는 뜻이야. 나중에 有識한 놈들이 漢字를 붙인 거지. 한글로 그냥 ‘地下’야. 서울대 文理科大學 다닐 때 詩畫展을 했어. 當時 우리 世界에서는 詩畫展 한番 하면 이름이 나게 돼. 그러니까 이름이 重要하잖아. 내 本名이 김영일이잖아. 그런데 같은 이름이 5名이나 됐어. 그러던 참에 동아일보에 있던 先輩 한 名이 술 사준다고 오라는 거야. 當時에 낮술 사주는 先輩는 큰 先輩였지. 얼큰하게 醉해 學校로 가려는데 돈이 한 푼도 없는 거야. 그래서 걸었어. 길가를 지나는데 ‘地下 理髮所’ ‘地下 茶房’ 옳다, 地下다. 그때부터 내 이름을 地下라고 한 거야…. 더러운 이름이야.”

    그는 때로 두 눈을 부릅뜨며 辱說과 호통을 치면서 火를 내고 때로는 어린아이처럼 純粹한 表情으로 깔깔댔다. ‘태어나서 저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사는 사람의 모습이 저런 게 아닐까’ 란 생각도 들었고 膈한 言語, 甚한 感情 起伏, 論理 飛躍 앞에서 당혹스러운 적도 많았다.

    하지만 한番 말門이 터지면 신들린 듯 9時間 10時間씩 말을 쏟아냈다. 正말 아는 것이 많은 사람, 自己 말을 眞情으로 들어줄 누군가를 渴求하는 사람이라고 느낀 적이 많았다.

    죽을 때까지 工夫하고 싶다

    허문명 기자가 2014년 출간한 저서 ‘김지하와 그의 시대’.

    허문명 記者가 2014年 出刊한 著書 ‘김지하와 그의 時代’.

    그는 外部와의 오랜 斷絶 속에서 自己 世界를 만들어온 사람 特有의 論理的 擴張이나 치우침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文化는 勿論이고 政治學·經濟學·社會學·女性問題 等 다양한 古典을 引用하며 自由自在로 넘나들었다.

    不便한 몸을 이끌고 踏査를 다니던 모습은 本質을 探究해 整理해 내고야 말겠다는 求道者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는 한 番도 民衆에 對한 愛情과 時代의 苦痛에서 避해간 적이 없었다. 過去를 팔아 權力이나 돈을 貪한 적도 없었다. 오적(五賊)을 썼을 때처럼,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라고 呼訴할 때의 결氣 그대로 平生을 살았다. 그가 뱉는 卑俗語, 誇張된 比喩, 걸쭉한 諷刺는 그만의 트레이드마크였지만 그런 點에서 天生 ‘詩人’이었다고 할까. 윤명철 敎授는 “天生 先生이었다”고도 했다.

    “그토록 지긋지긋하게 사람들에게 시달리면서도 뭔가 싹수가 있어 보이는, 自己 말을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면 無條件 말을 꺼냈다. 말 自體가 아니라 自己 생각, 世上에 對한 안타까움, 그리고 사람들에게 꼭 傳達하고 싶은 메시지를 冊으로, 詩로, 그림으로 傳達하는 것만 갖고는 性에 안 찬 듯했다. 그리고 正말 부지런했다. 江原道 頭陀山 一帶 사라진 藝脈인들, 堤川과 原州 等의 곳곳에 숨겨진 弓裔 痕跡들, 海月 崔時亨과 東學의 事緣들이 얽힌 原州, 堤川度 자주 다녔다. 專屬(?) 택시 運轉技士가 있을 程度였으니 돈이 얼마나 들었는지 모른다. 너털웃음을 지으면서 ‘마누라 몰래 택시를 貸切해 踏査 다니다가 또 ‘쿠사리’를 맞았어’라고 말하기도 했었다.”

    그는 記者에게도 죽을 때까지 工夫만 하고 싶다고 했다. ‘김지하와 그의 時代’ 連載를 끝내고 마주 앉았을 때(2013年 9月)였다.

    “내 專攻이 美學이잖아. 요즘 난 工夫밖에 안 해. 政治는 絶對 손 안 臺. 내가 只今 沒頭하는 것은 ‘아우라지 美學’이야. 모든 것을 한꺼번에 다 아우른다는 뜻이다. 韓半島는 비록 强大國은 아니지만 內的(內的)인 民族 아닌가. 世界가 只今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에 對한 方向을 提示할 수 있는 民族이다.

    白凡 金九가 解放된 뒤 들어와서 ‘只今 이 나라 形便에서 어떤 힘이 가장 重要한가?’라는 물음에 軍事力, 經濟力이라는 對答을 할 줄 알았는데 ‘文化力’이라고 했어. 나는 歲月이 갈수록 그 말의 意味가 深長해짐을 느낀다.

    우리는 植民地 經驗에다가 짓밟히기만 해서 우리 精神, 우리 歷史에 對한 理解가 많이 모자라다. 歷史學者들이 애를 쓰긴 했지만 그래도 모자라다. 서세동점(西勢東漸·西洋이 東洋으로 漸漸 밀려옴) 雰圍氣에서 外國 것, 西洋 것 배우자는 것으로 갔지만 이제 世界 흐름은 東아시아로 오고 있다. 앞으로는 文化가 밥을 먹여줄 것이다. 나는 이제 죽을 때까지 朝鮮의 思想을 硏究하다 갈 것이다.”

    ‘文化가 밥 먹여줄 것’이라던 그의 말은 K팝과 映畫가 世界를 휩쓰는 요즘을 내다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마지막 만남

    數年間 電話로만 安否를 傳하다 故人을 마지막으로 본 건 아내 金榮珠 館長이 世上을 뜨기 하루 前날인 2019年 11月 24日 日曜日이었다. 病院에 昏睡狀態로 누워 있던 金 館長을 만나기 前 原州 집에서 만난 金 詩人은 極度의 絶望과 希望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

    “退院해 집으로 돌아오길 懇切히 祈禱하고 있다”면서 “아내 없는 삶은 想像할 수 없다. 平生 幸福하게 해준 적이 없다. 꼭 살아야 한다”고 몇 番이나 말했다. 金 館長 房까지 열어 보여줬더랬다. 詩人의 懇切함에도 아랑곳없이 다음날 金 館長이 虛妄하게 떠난 以後 金 詩人을 다시 만나지 못했다. 코로나19 팬데믹 以前까지 交流한 尹 敎授가 傳한 그의 마지막은 이랬다.

    “兄嫂님이 돌아가신 後 絶望感에 힘들어 했지만 다시 그림을 그렸다. 意欲을 보이면서 다신 안 쓴다던 冊을 또 쓰겠다고 했다. 코로나가 發生하면서는 만난 적이 없다. 半年 쯤 전 或是나 하며 찾아갔지만, 집 밖에서 큰소리로 ‘先輩님, 저 명철이 왔어요’라고 외친 날도 있었다. 어느 날은 담牆을 艱辛히 넘어오다 멈춰버리는 힘든 목소리를 들은 적도 있었는데 얼굴을 볼 수 없으니 눈물만 흘리고 돌아왔다.”

    앞서 紹介한 미야타 先生은 追慕辭에서 古人의 時 ‘바다에서’를 紹介했다. 한줄 한줄 金 詩人의 辛酸했던 삶과 겹쳐져 마음이 아파온다.

    “눈이 내린다/술을 마신다/마른 가물치 위에 떨어진/눈물을 씹는다/숨이 지나온 모든 길/두려워하던 내 몸짓 내 가슴의/모든 歎息들을 씹는다/혼자다/마지막 가장자리/바늘로도 못 메울 틈 사이의 距離/아아 벗들/나는 혼자다”

    社會運動家였으며 詩人이자 藝術家였고 生命思想과 韓民族 精神의 뿌리를 밝히려 했던 思想家였던 김지하의 삶은 뭐라 한마디로 定義할 수 없다. 修行者이자 全人的 人間이었다고 할까. 저世上에서 아내와 만나 幸福하게 便安하시기를 두 손 모아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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