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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突擊 앞으로’ 湖巖 앞에서 三星맨은 나자빠졌다 [經濟思想家 李健熙 探究?]|新東亞

‘突擊 앞으로’ 湖巖 앞에서 三星맨은 나자빠졌다 [經濟思想家 李健熙 探究?]

半導體 神話 일군 決定球 “웨이퍼 크기 늘려라”

  • 허문명 記者

    angelhuh@donga.com

    入力 2022-06-25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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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자의 도우’ 或은 農事에서의 논밭

    • 돈 먹는 裝備만 가득한 半導體 産業

    • 日 샤프度 5인치 技術뿐이던 時節

    • 偉大한 리더십, 偉大한 팔로워十

    • 李健熙 會長이 스스로에게 한 다짐



    5月 20日 尹錫悅 大統領과 조 바이든 美國 大統領이 京畿 평택시 三星電子 半導體 工場(平澤캠퍼스)에서 만나 芳名錄 代身 半導體 回路가 새겨진 웨이퍼에 署名하는 모습이 全 世界에 報道됐다. 두 頂上이 半導體를 통한 經濟安保 同盟을 얼마나 重要하게 여기는지 보여주는 象徵的 場面이었다.

    芳名錄 代身 웨이퍼에 署名한 韓美 頂上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5월 20일 경기 평택시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평택캠퍼스)에서 서명한 반도체 웨이퍼. [대통령실사진기자단]

    尹錫悅 大統領과 조 바이든 美國 大統領이 5月 20日 京畿 평택시 三星電子 半導體 工場(平澤캠퍼스)에서 署名한 半導體 웨이퍼. [大統領室寫眞記者團]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5월 20일 경기 평택시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평택캠퍼스)에서 최첨단 3나노 공정 반도체 웨이퍼에 사인을 하고 있다. [양회성 동아일보 기자]

    尹錫悅 大統領과 조 바이든 美國 大統領이 5月 20日 京畿 평택시 三星電子 半導體 工場(平澤캠퍼스)에서 最尖端 3나노 公正 半導體 웨이퍼에 사인을 하고 있다. [양회성 동아일보 記者]

    웨이퍼는 半導體 하면 떠오르는 반짝반짝한 동그란 얇은 板이다. 쉽게 말해 半導體 回路를 그려 넣는 圖畫紙다. 主成分은 실리콘(硅素)이다. 실리콘은 모래에서 抽出한다. 周邊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래가 웨이퍼로 탈바꿈한다고 생각하면 모래로서는 엄청난 身分上昇(?)李 되는 셈이라고나 할까.

    모래에서 抽出한 실리콘 粒子는 鎔鑛爐처럼 뜨거운 둥근 鎔解爐에 담겨 結晶體로 만들어지는데, 回戰 棒을 中心으로 回轉하면서 녹아야 性質이 均一해진다. 이렇게 해서 抽出한 圓뿔 模樣의 실리콘 結晶體를 ‘잉곳(ingot, 녹인 金屬을 일정한 型틀에 부어 凝固시킨 것)’이라고 한다. ‘잉곳’을 동그란 形態의 소시지라고 생각한다면 이걸 얇게 썰어 만든 것이 웨이퍼다.

    웨이퍼 크기는 지름에 따라 6인치(150㎜) 8인치(200㎜) 12인치(300㎜)로 나뉜다.(웨이퍼의 어원 Wafer는 얇은 조각을 뜻한다. 유럽에서는 얇고 바삭한 菓子를 일컬었다. 우리가 ‘웨하스’라고 부르는 菓子도 여기서 왔다)



    半導體 産業이 처음 始作됐을 때는 3인치였다. 大韓民國 最初 半導體 會社인 韓國半導體가 바로 3인치 웨이퍼 製造工場을 갖고 있었다. 以後 1980年代로 들어서며 6인치가 主流가 됐다. 1990年代 8인치, 只今은 12인치 時代를 맞고 있다.

    半導體 칩은 웨이퍼의 얇은 基板 表面에 微細한 回路를 새겨 만드는 데 우리가 흔히 먹는 와플을 생각하면 쉽다. 原形 와플에 새겨진 네모 칸 하나하나가 바로 半導體 칩이다.

    ‘잉곳’에서 얇게 썰어내 만들어진 웨이퍼는 表面을 거울처럼 매끄럽게 만들어주는 硏磨 作業을 第一 먼저 거치는데 이걸 잘해야 精密度가 높아진다. 이 過程을 거치면 本格的으로 半導體 回路라는 멋진 그림을 그려 넣을 수 있는 圖畫紙가 完成되는 것이다.

    半導體 種類와 製品 特徵에 맞게 回路 패턴을 만드는 것을 ‘回路 設計’라고 한다. 建築物에 比喩하면 집主人의 다양한 趣向에 맞춰 寢室, 부엌, 照明, 수도, 暖房, 內部 인테리어 等을 디자인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半導體 工場을 지을 때 가장 먼저 決定할 일이 웨이퍼의 크기다. 그게 決定돼야 工場 構造와 設備를 디자인할 수 있다.

    굳이 빗대자면 웨이퍼는 ‘피자의 도우’에 該當한다. 農事로 比喩하면 논밭이라고 할 수 있다. 둥근 웨이퍼 위에 네모난 形態의 칩들을 잘라 만들기 때문에 웨이퍼(논밭)가 커지면 여기서 나오는 칩 個數(收穫量)도 늘어난다.

    웨이퍼 크기를 늘리는 것이 生産性 面에서야 當然히 좋지만 企業들이 선뜻 나서지 못하는 것은 돈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이다. 向後 市場 狀況에 對한 不安과 퍼스트 무버(first mover)로서 堪當할 技術的 不確實性이 크다고 判斷되면 投資를 躊躇할 수밖에 없다.

    한 臺에 5000億 원 하는 노광기

    경기 화성시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엔지니어들이 웨이퍼를 살펴보고 있다. [삼성전자 제공]

    京畿 華城市 三星電子 半導體 工場에서 엔지니어들이 웨이퍼를 살펴보고 있다. [三星電子 提供]

    半導體는 裝備가 차지하는 費用이 壓倒的으로 많은 代表的 裝置 産業이다. 例를 들어 빛을 쪼여 웨이퍼에 回路를 그릴 때 쓰는 裝備인 노광기(네덜란드 會社 ASML이 獨占的 技術力을 갖고 있다. 李在鎔 三星電子 副會長이 6月 유럽 出張 當時 直接 本社를 찾아 話題가 됐다.)만 해도 한 臺에 2000億 원이 넘는다. 人工知能 時代에 脚光받고 있는 最尖端 極紫外線(EUV) 노광기는 한 臺 값이 無慮 5000億 원인 데도 物量 確保가 어렵다고 한다.

    半導體 工場에는 이 露光機만 해도 數十 臺가 必要하다. 이런 式으로 돈 먹는 裝備가 하나둘이 아니다. 웨이퍼 인치를 바꾸면 노광기 같은 機械도 그것에 맞게 바꿔야 한다. 半導體 工場에서 웨이퍼 인치를 늘리는 것은 아예 다른 工場을 짓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얘기가 있는데, 이런 理由 때문이다.

    機械만 갖춘다고 다가 아니다. 그에 따라 公正이 複雜해지기 때문에 技術者들을 다시 再敎育해야 한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웨이퍼가 깨지거나 휘어지기가 쉬워 收率이나 品質의 均質性을 確保하기 어려워진다. 피자 도우를 크게 만들수록 모서리를 均一하게 다듬는 일도, 두께를 일정하게 맞추는 일도 힘들어 지듯 말이다.

    이러다보니 半導體 業界에서는 次世代 웨이퍼 投資 타이밍을 놓고 熾烈한 눈치作戰이 펼쳐진다. 남보다 앞서가기는 해야겠는데, 언제 어느 時點에 들어가야 投資費用을 제대로 뽑고 不確實性을 줄일지 高度의 判斷力이 必要하다. 여기에 더해 한 배를 타게 될 裝備業體들까지 指揮할 수 있는 剛하고 說得力 있는 리더십도 必要하다.

    三星 半導體가 오늘날 世界 1位 자리에 우뚝 서기까지에는 이 웨이퍼 投資를 둘러싼 湖巖과 李健熙 會長의 果敢하고도 大膽한 決定과 그 決定을 完璧히 遂行해낸 三星맨들의 팔로워十(followership)이 있었다.

    5인치 아닌 6인치에 손들어준 湖巖

    지난 回에서 半導體 在庫가 山더미처럼 쌓여가는 데도 工場 增設을 밀어붙인 湖巖의 攻擊經營을 紹介했다. 이게 다가 아니었다. 웨이퍼 크기를 決定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湖巖은 器興 1工場이 着工된 지 不過 두 달餘 만인 1983年 11月 256K디램(以下 256K)을 生産할 2工場을 세우라고 指示했다. 64K디램 完全 動作 칩이 아직 나오지도 않은 狀況이었는데 말이다. 2工場을 세울 때 떠오른 爭點이 웨이퍼 지름을 5인치로 할지, 6인치로 할지였다. 5인치의 境遇 웨이퍼 한 張當 칩이 60~70個 程度, 6인치에서는 100個 程度 나왔다.

    다들 5인치로 決定되리라고 생각했다. 世界的으로도 5인치가 大勢였고 器興 1工場도 5인치였다. 그런데 一部 實務陣이 이참에 6인치로 가자는 안을 내면서 熾烈한 討論이 벌어졌다. 이때 湖巖이 6인치 導入 決定에 손을 들어줬다. 김광호 前 副會長 말이다.

    “半導體 값 暴落으로 生産할수록 損害를 보는 狀況에서 1工場도 제대로 稼動을 못 해 속이 까맣게 타고 있는데 2工場을 지으라고 하는 것도 모자라 이番에는 웨이퍼 지름까지 6인치로 하자고 하시니 다들 뒤로 나자빠졌지요. 當時 日本 샤프가 우리 쪽 工場 設備 技術을 提供하고 있었는데 自己네들도 5인치 技術 밖에 없다면서 難處해 했어요. 하지만 選對 會長이 물러서지 않으시니 結局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앞서 말했듯 半導體業界에서 웨이퍼 크기 늘리기 競爭은 持續的으로 이루어져 왔다. 지름 3인치, 4인치, 5인치는 美國이 先導했지만 6인치는 日本이 먼저 치고 나갔다. 美國을 뒤쫓던 日本이 美國을 追越해 世界 最大 半導體 生産國으로 浮上한 背景에도 攻擊的인 6인치 投資가 큰 役割을 했다. 하지만 湖巖이 6인치 導入을 決定할 當時엔 日本에서도 제대로 만드는 會社조차 없던 狀況이었다. 設使 만든다 해도 性能이 立證되지도 않은 狀態였다. 注文을 해도 最小 10個月에서 20個月은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도 湖巖은 ‘突擊 앞으로’를 외쳤다.

    結果的으로 湖巖의 6인치 決定은 3工場 增設과 함께 또 다른 神의 한수였다. 1988年 三星 半導體 大反轉의 歷史는 256K가 불티나게 팔리면서 可能했는데 이는 256K 量産 라인이던 2工場의 6인치 웨이퍼가 決定的으로 孝子 노릇을 했기 때문이다.

    半導體 1位에 서기까지

    只今까지 筆者는 三星 半導體의 初期 歷史를 훑었다. 요즘 ‘半導體’는 周知하다시피 産業의 쌀 水準이 아니라 現在와 未來의 技術 革命을 이끄는 源泉이자 各 나라의 經濟와 安保를 擔保할 戰略資産이 됐다. 韓國 半導體의 오늘은 偉大한 리더십과 팔로워十의 結果物이다. 取材하면서 湖巖의 超人的 判斷과 決斷力 德分에 半導體 神話가 可能했다는 點을 새삼 깨닫게 됐다.

    者, 이즈음에서 湖巖의 이야기를 마치고 李健熙 會長으로 넘어가보려 한다. 李健熙 會長은 湖巖 곁에서 半導體 産業에 對한 靈感을 繼續 심어줬다. 湖巖은 이를 決斷하고 實行했다. 그리고 地獄 같은 赤字의 터널을 뚫고 果敢한 投資를 이어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湖巖은 大反轉의 歷史를 보지 못하고 世上을 떠났다. 그 바통을 이어받은 사람이 李健熙 會長이다.

    李 會長의 마음과 어깨가 얼마나 무거웠을지 普通 사람으로서는 想像하기가 어렵다. 앞으로 紹介될 ‘李健熙 半導體’ 篇은 그와 함께 歷史를 이뤄나간 三星電子 最高經營者들의 인터뷰 內容을 中心으로 꾸며질 豫定이다. 고비마다 나온 李健熙 會長의 決定과 리더십을 생생한 肉聲으로 들으면서 오늘날 三星 半導體 神話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피땀으로 일군 奇跡의 成就였는지를 紹介하고 싶다.

    于先 이番 回에서는 6인치 웨이퍼 지름을 決定한 湖巖의 果敢함에 이어, 6인치에서 8인치로, 8인치에서 12인치로 大膽한 決斷을 했던 李健熙 會長에 對한 이야기로 始作하려 한다.

    李 會長은 冊 ‘생각 좀 하며 世上을 보자’에 실은 ‘半導體 1位에 서기까지’라는 글을 통해 半導體 事業을 하면서 歷史的 轉換點이 되는 決定的 選擇이 두 가지가 있었다고 紹介하고 있다.

    故人이 回顧하는 두 가지 中 하나가 바로 ①웨이퍼 인치에 對한 果敢한 決定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②4M(메가) 以後 칩 開發 方式을 스택(stack)으로 할 것인지, 트렌치(trench)로 할 것인지에 對한 決定이었다. 李 會長의 글은 時期上으로 먼저였던 스택과 트렌치에 對한 回顧부터 始作하고 있다. 글 全文을 읽어보자.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言語

    半導體 産業은 ‘타이밍 業(業)’이라고 할 수 있다. 不確實한 未來를 豫測해서 數兆원에 이르는 莫大한 先行 投資를 最適의 時期에 해야 하기 때문이다. 半導體 事業에서 最適의 投資時機를 決定할 때는 피를 말리는 苦痛이 뒤따른다.

    87年 半導體 歷史의 轉換點이 되는 重大한 고비가 있었다. 4메가 D램 開發 方式을 스택(stack)으로 할 것인가, 트렌치(trench)로 할 것인가를 決定하는 것이었다.

    두 技術은 서로 長短點이 있어서 量産 段階에 이르기 前에는 어느 技術이 유리한지 누구도 判斷할 수 없는 狀況이었다. 美國, 日本의 業體도 쉽게 決定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當時 나는 日本 半導體 會社의 製造 課長들을 저녁때 만나 새벽까지 討議했다. 이렇게 몇 次例를 거듭했지만 確實한 正答을 얻지 못했다. 半導體 專門家들도 두 技術의 長短點만 比較할 뿐 어느 쪽이 유리한지 斷定 짓지 못했다.

    나는 只今도 그렇지만 複雜한 問題일수록 單純化해 보려고 한다. 두 技術을 두고 單純化해 보니 스택은 回路를 高層으로 쌓는 것이고, 트렌치는 地下로 파 들어가는 式이었다. 地下를 파는 것보다 위로 쌓아올리는 것이 더 수월하고 問題가 생겨도 쉽게 고칠 수 있으리라고 判斷했다.

    스택으로 決定했다. 이 決定은 後날 트렌치를 採擇한 도시바가 梁山市 生産性 低下로 D램의 先頭자리를 히타치에 빼앗겼고, 16메가 D램과 64메가 D램에 스택 方式이 適用되고 있는 것을 볼 때 올바른 選擇이었다.

    그리고 1993年 또 한 番의 勝負手를 띄웠다. 半導體 5工場을 8인치 웨이퍼 量産 라인으로 決定한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半導體 웨이퍼는 6인치가 世界 標準이었다. 面積은 제곱으로 增加한다는 것을 勘案하면 6인치와 8인치는 生産量에서 두 倍 程度 差異가 난다. 그것을 알면서도 技術的인 危險 負擔 때문에 누구도 8인치를 選擇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苦心 끝에 8인치로 決定했다. 失敗하면 1兆 원 以上의 損失이 豫想되는 만큼 周邊의 反對가 甚했다. 그러나 우리가 世界 1位로 발돋움하려면 그때가 適期(適期)라고 생각했고, 越班(越班)하지 않으면 永遠히 技術 後進國 身世를 면치 못하리라고 判斷했다.

    半導體 集積 技術은 1983年에서 1994年까지 10年 동안에만 無慮 4000倍가 進步했다. 그만큼 技術開發 週期가 繼續 短縮되고 있어서 短期間에 技術을 確保하지 못하면 엄청난 機會 喪失을 招來한다. 그래서 나는 段階를 着實히 밟는 便安한 길을 버리고 越班을 擇한 것이다.

    그리고 1993年 6月 5라인을 竣工했고 숨 돌릴 새도 없이 6, 7라인에 着工하여 이듬해 7月부터 稼動했다. 當時 各種 專門機關의 需要 豫測이나 內部의 資金 事情은 追加 投資家 無理한 狀況이었으나 日本 業體들이 投資를 머뭇거릴 때 投資를 敢行하는 攻擊 經營이 必要하다고 判斷한 것이다.

    그 結果 16메가 D램 開發은 日本과 同時에 했지만 量産時期를 앞당기고 8인치 웨이퍼를 使用함으로써 生産力에서 앞설 수 있었다. 이를 契機로 世界 市場에서 日本 業體를 따돌리고 93年 10月 메모리 分野 世界 1位에 서게 된 것이다.

    半導體 事業이 世界 頂上에 오른 날, 나는 經營陣에게 이렇게 말했다. “目標가 있으면 뒤쫓아 가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한番 世界의 리더가 되면 目標를 自身이 찾지 않으면 안 되며 또 리더 자리를 維持하는 것이 더 어렵다.” 이는 나 스스로 하는 다짐이기도 했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言語로 自己誇示 없이 써 내려간 글에서 筆者가 가장 注目한 대목은 마지막 文章이다. 한番 世界의 리더가 되면 目標를 스스로 定하지 않으면 안 되고 그걸 維持하는 것이 더 어렵다는 말을 다름 아닌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이라고 하는 表現 말이다. 平生 現在에 安住하지 않고 늘 視線을 未來에 두고 ‘危機’를 말하며 自身을 끊임없이 다그쳤던 故人의 內面이 읽히는 文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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