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6運動圈 政治·이념적 破産… 곧 還甲, 짐 덜 주고 떠나라”|신동아

“586運動圈 政治·이념적 破産… 곧 還甲, 짐 덜 주고 떠나라”

學生運動 主役→膾집 社長 함운경

  • reporterImage

    이현준 記者

    mrfair30@donga.com

    入力 2022-02-26 10:00:01

  • 글字크기 설정 닫기
    • 1985年 美文化院 占據籠城 主導 586 運動圈 象徵

    • 變節? 現實에서 살다 보면 바뀌는 게 當然

    • 언제까지 親日派 타령하며 살 텐가

    • 無能한 데다 利益 耽溺에 내로남不·僞善

    • 當身 하는 거 보니 못 찍겠다고 尹에게 말했다



     횟집 ‘네모선장’을 운영하는 함운경 씨가 1월 25일 ‘신동아’와 만났다. [조영철 기자]

    膾집 ‘네모船長’을 運營하는 함운경 氏가 1月 25日 ‘신동아’와 만났다. [조영철 記者]

    “1980年代, 함운경 모르면 間諜이었다.”

    지난해 12月 22日 尹錫悅(62) 國民의힘 大選候補가 함운경(58) 氏가 運營하는 全北 군산시 膾집 ‘네모船長’을 訪問해 한 말이다. 咸氏는 서울대 物理學科 82學番으로 이른바 ‘586 運動圈’의 象徵的 人物 中 하나다. 1985年 結成된 全國學生總聯合(전학련) 傘下 組織 삼민투(民族統一·民主爭取·民衆解放委員會) 共同委員長으로 같은 해 5月 서울 美國文化院 占據籠城 事件을 主導했다. 이로 因해 2年 9個月 服役하고 1988年 釋放됐다. 繼續 運動圈에 남은 그는 國家保安法 違反 等으로 두 番 더 獄살이했다.

    收監 生活을 마친 後에도 波瀾萬丈한 삶은 이어졌다. 在野에서 社會運動에 邁進하다 政治판으로 뛰어들었지만 빛을 보진 못했다. 1996年 15代 國會議員 選擧에서 서울 관악甲에 無所屬으로 出馬했다가 落選했고, 2000年 16代 國會議員 選擧에선 故鄕 群山으로 돌아와 再挑戰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2002年 國會議員 再補闕選擧, 2006年 全國同時地方選擧, 2016年 20代 國會議員 選擧까지 쭉 群山에서 出馬했지만 연이어 苦杯를 마셨다.

    生業 前線에서도 孤軍奮鬪했다. 服役 後엔 學院講師로 일했고 群山으로 내려온 뒤 2011年부터는 造景業에 몸담았다. 事業이 失敗해 큰 빚을 졌고 2016年 信用不良者 判定을 받았다. 再起를 위해 그가 擇한 일은 水産物 流通·加工業. 멸치 膳物세트를 始作으로 온라인 販賣에 注力하다 지난해 9月 膾집을 열었다.
    咸氏가 다시금 世間의 關心을 끈 건 지난해 6月 言論 인터뷰를 통해 “장사해 보니 文在寅 政府의 所得主導成長 政策은 詐欺”라고 發言하면서부터다. 當時 尹錫悅 候補는 知人들에게 咸氏의 인터뷰 記事를 “한番 읽어보라”고 勸할 만큼 共感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12月 1泊 2日의 湖南 訪問 日程 中 짬을 내 咸氏의 膾집을 찾은 理由다.



    그를 만난 날(1月 25日)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서울에서 群山까지 가는 길이 豫想보다 막혀 約束 時刻인 午後 2時에 빠듯하게 到着했다. 膾집 門을 열고 들어가니 비릿한 내음이 코를 찔렀다. 咸氏는 15分쯤 지나 한쪽 다리를 절뚝거리며 나타났다. 2019年 10月 看板을 달다 墜落해 다리가 부러졌다. 아직도 걷기가 不便한 狀態라고 했다. 咸氏는 “설 連休 宅配勞組 罷業이 겹쳐 精神이 없다. 늦어서 罪悚하다”고 했다. 그는 매우 분주해 보였다. 電話機가 隨時로 울렸다. 연신 電話機를 붙잡고 物件을 販賣하려 애쓰는 모습은 영락없는 自營業者의 그것이었다.

    “꿈꾸던 나라 아니니 繼續 ‘할 말’ 하는 거 아니겠나”

    1985년 5월 24일 서울미문화원 점거농성에서 함운경 씨가 피로에 지친 표정으로 필담을 통해 창밖의 취재기자들에게 외부 동정을 묻고 있다. [동아DB]

    1985年 5月 24日 서울美文化院 占據籠城에서 함운경 氏가 疲勞에 지친 表情으로 筆談을 통해 窓밖의 取材記者들에게 外部 同情을 묻고 있다. [東亞DB]

    狀況이 整理되고 마주 앉으니 “내가 대단한 사람도 아닌데 뭐 볼 게 있다고 왔느냐”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첫 만남의 語塞함을 풀 兼 “요즘은 무슨 生鮮이 제철이냐”고 물으니 “겨울엔 生鮮이 地方을 많이 備蓄해 웬만한 건 다 맛있다. 回 包裝해 가시라”며 웃었다. “인자”라는 全羅道 사투리를 자주 썼다. 느릿하고 둥근 말套가 586世代를 論할 땐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날카로워졌다. “586 運動圈 勢力의 時代錯誤的 思考方式이 社會를 병들게 하고 있다. 그들의 時代는 끝났다”며 날을 세웠다.

    지난해 12月 尹錫悅 候補가 “1980年代에 함운경 모르면 間諜이었다”고 말했다. 當時 運動圈에서 位相이 어땠나.

    “알려진 것처럼 所謂 ‘우두머리’는 아니었다. 當時 核心 指導部 役割을 한 사람은 따로 있다. 金漢正(現 더불어民主黨 議員)이 代表的이다. 大型 로펌 代表 辯護士로 活動하는 親舊도 있다. 그들은 運動圈 先輩들로부터 學生運動을 指導할 力量을 갖췄다고 인정받은 人物이다. 나 같은 사람은 데모하며 現場에서 뛰는 거고(웃음). 삼민투 委員長도 우연한 契機로 맡았다. 서울 美文化院 占據籠城度 元來 서울對 工大 팀에서 準備했는데, 論議 中에 工大 副總學生會長이 못 하겠다고 해서 내가 맡았다. 얼굴마담 했다고 보면 된다(웃음).”

    언제부터 學生運動에 關心이 있었던 건가.

    “高等學校 때부터다. 내가 나온 群山제일고엔 意識 있는 先生님이 많았다. 學窓 時節 誤送回 事件(1982年 群山제일고 前·現職 敎師 9名이 利敵團體 組織과 間諜行爲 等으로 拘束된 事件)으로 잡혀 들어간 先生님들과 親해 影響을 많이 받았다. 大學에 들어와서 本格的으로 活動했다.”

    왜 學生運動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나.

    “當時 나에겐 두 가지 마음이 竝存했다. 工夫를 熱心히 하자는 마음과 現實에 對한 憤怒. 後者가 두드러지니 所謂 ‘스카우트’된 거다.”

    現實에 對한 憤怒?

    “父母님 두 분 다 公職에 계셨는데 아버지가 事業을 하다 家勢가 기울었다. 中産層에서 猝地에 貧民이 됐다. 두 분이 正말 熱心히 살았지만 運이 좋지 않았다. 衝擊이 컸다. 그때 알았다. 熱心히 努力해도 世上은 사람을 힘들게 할 수 있다는 걸. 어머니가 苦生하시는 모습을 보며 마음속에 憤怒가 생겼다.”

    火풀이하기 위해 學生運動을 한 건가.

    “單純한 ‘化’가 아니라 世上에 對한 憤怒. 이 世上이 좀 더 나아질 수 있는데, 努力하는 사람이 더 報償받을 수 있는데 그렇게 되지 못한 現實에 對한 憤怒. 當時엔 只今보다 不平等과 가난이 훨씬 甚했다. 歐露工團에 가면 劣惡한 條件에서 일하는 低賃金 勞動者가 가득했고, 서울대 앞 봉천동은 全部 貧民村이었다.”

    어떤 世上을 만들고 싶었던 건가.

    “當時 ‘더 나은 世上’이란 마르크스가 豫言한 곳이었다. 1980年代 學生運動 底邊에 있던 思想은 ‘社會主義’다. 社會에 對한 工夫, 社會를 보는 視角 모두 社會主義 理論에 立脚한 것이었다.”

    그런 나라를 만들고 싶어 政治에 投身했나.

    “元來는 그랬지만 1989年 蘇聯이 沒落하며 많은 게 變했다. 理論으로 꿈꾸던 理想社會가 現實에선 不可能함이 證明된 事件이다. 當時 ‘運動’하던 사람들에겐 참여연대, 經濟正義實踐市民聯合(經實聯) 等 市民團體를 통한 市民運動이나 政治權 進入 外엔 選擇肢가 많지 않았다. 나는 政治를 擇했다. 내가 좀 앞서 뛰어든 便이고. 나중엔 더 많은 사람이 參與하더라.”

    다섯 番 落選했다. 結局 政治人이 되지는 못했는데.

    “大學生이 된 後부터 ‘政治活動’은 繼續했다고 생각한다. 꼭 政治를 해야 政治人인 건 아니다.”

    只今 世上은 學生 時節에 꿈꿨던 나라에 가깝나.

    “아니니까 繼續 ‘할 말’을 하며 사는 거 아니겠나(웃음).”

    “呪術(呪術) 같은 얘기를 아직도 하니 社會가…”

    學院 講師, 造景業을 거쳐 膾집을 열었다. 왜 水産業을 擇했나.

    “造景 事業 이야기부터 해야 한다. 첫 番째 選擧에서 落選하고 故鄕으로 돌아온 後였다. 丈人어른이 나무 農事를 지었는데, 나에게 造景 事業을 해보라고 해 始作했다. 그런데 建設業은 ‘로비’를 잘해야 되더라. 技術보다 資金을 融通하는 게 더 重要했다. 돈을 갖고 있는 사람과 엮여야 하고 脾胃도 잘 맞춰야 한다. 群山 公務員 中에 내 後輩가 많다. 官公署에 가서 그들이 만나주길 기다리곤 했는데, 스스로가 寒心해지더라. ‘내가 뭐 하고 있나’ 싶고. 이와 달리 水産物 流通·加工業은 消費者의 欲求에 맞춰 物件만 팔면 된다. 2016年 멸치 膳物세트 流通을 始作으로 生鮮을 取扱하기 始作해 只今에 이르렀다.”

    咸氏는 페이스북에 글을 자주 쓴다. 政治 懸案에 對한 ‘쓴소리’나 日常에 關한 글도 間間이 보이지만 大部分은 事業과 關聯된 일이다. 商品을 弘報하기도 하고 事業에 對한 어려움을 吐露하기도 한다. 지난해 11月엔 “새로 뽑은 職員이 4日 만에 그만뒀다”며 “쉬운 일이 없다”고 썼다.

    事業 現況은 어떤지 궁금하다. 賣出이 어느 程度 되나.

    “한 달에 4000萬~5000萬 원이다. 最低賃金으로 5名에게 給與를 줄 수 있는 水準이다.”

    月 4000萬~5000萬 원인데, 그렇게밖에 안 되나.

    “마진率이 낮다. 現在 職員은 4名이다. 잘 안 되는 달은 職員들 月給 250萬 원 주고 나는 150萬 원 가져간다. 1~2月이 第一 힘들다. 宅配로 物件을 팔아야 하는데 설 連休가 껴 있어 보름은 營業 못 한다. 이럴 땐 月給 주기도 힘들다. 當然히 난 한 푼도 못 가져간다.”

    온라인 販賣와 膾집 營業을 竝行하고 있는데.

    “2018~2019年엔 온라인 販賣와 生鮮가게를 竝行했었다. 그런데 잘 안 됐다. 傳統市場에 손님이 잘 오지 않는 데다가 水産物 購入을 위해 굳이 따로 生鮮가게를 찾지 않더라. 그래서 한동안 온라인으로만 販賣했다. 쿠팡, 네이버, 카카오 等 온라인 플랫폼을 통한 賣出이 大部分이다. 只今도 膾집은 賣出이 많지 않다.”

    플랫폼 手數料는 어느 程度 되나.

    “쿠팡의 境遇 10.2% 뗀다. 그런데 여기선 廣告를 하지 않으면 物件이 안 팔린다. 廣告費까지 考慮하면 賣出의 30%는 가져간다고 봐야 한다.”

    賣出의 3할이면 너무 큰 것 아닌가.

    “當然한 거다. 플랫폼이 없었다면 物件을 팔 생각조차 못 했을 거다. 플랫폼 事業者를 非難하는 건 옳지 않다. 더 많이 팔아 利得을 낼 수 있게끔 하는 게 옳은 마인드다.”

    事業하며 힘든 點은 없나.

    “뭐든지 생각대로 되는 일이 없다. 사람들과의 關係가 가장 어렵고.”

    지난해 言論과 인터뷰하면서 最低賃金의 急激한 引上을 批判했다. 事業이 더 어려워졌나.

    “더 힘들어진 건 맞지만 그보다는 政策 設計者의 思考方式이 못마땅하다. 國民所得을 늘리기 위해 가장 좋은 건 經濟가 成長하는 거다. 그런데 最低賃金 引上은 熱心히 일하는 事業主에게 뺏어서 나눠주겠다는 것 아닌가. 自身이 職員 雇用해서 月給 줘보면 그런 생각 못 할 거다. 給與는 社會的 需要와 供給이 맞아떨어져 形成된다. 人爲的으로 건드리면 非熟鍊 일꾼들은 市場에서 쫓겨난다. 人件費 比重이 큰 業障은 職員을 解雇한다. 保護하려 했던 階層이 오히려 打擊을 입는 거다. 지난 大選 때 現 政權이 내세운 公務員 增員 公約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젊은이들보고 公務員 되라고 督勵하는 나라가 앞으로 더 發展하겠나. 아니나 다를까 只今 社會를 병들게 하고 있다.”

    文在寅 政權을 代表하는 勢力이 586 運動圈 아닌가. 少時적 함께했던 사이 中 現在 高位職에 있는 사람도 많을 텐데.

    “職責은 相關없다. 否定할 수 없는 事實은 只今 社會의 主流가 民主化 勢力이라는 點이다. 故로 그들의 思考方式이 主流다. 社會 全般 核心을 차지한 人物이나 意思決定 權限이 있는 者가 그런 思考方式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그들은 冊 ‘解放 前後事의 認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日帝가 물러간 지 80年이 다 돼가는데 아직도 親日派 타령을 하고 있다. 淸算되지 않은 親日派가 獨裁를 거치며 ‘積弊’가 됐으니 淸算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呪術(呪術) 같은 이야기를 아직도 하고 있으니 社會가 제대로 굴러갈 理 萬無하다.”

    民主化 勢力이 旣得權 勢力이 됐다는 건가.

    “旣得權 勢力뿐이겠나(웃음). 社會의 主流로 자리매김해 權力을 가졌음에도 世上은 그대로다. 나이가 많은 게 問題가 아니다. 自身들이 憤怒해마지 않았던 社會의 不條理를 그대로 둔 채 利益에 耽溺하는 ‘내로남不’과 ‘僞善’이 問題다. 그런 點에서 民主化 勢力은 ‘過誤가 있다’ 程度가 아니라 政治的·이념적으로 ‘破産宣告’ 하는 게 맞다. 나도 서울 美文化院 占據籠城 事件 가지고 只今까지 살아왔지만 이제 더는 우리가 民主化運動을 해서 자랑스럽니 마니 하는 이야기는 그만하는 게 맞다.”

    以上이 아닌 現實에 答 있다

    지난해 12월 22일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함운경 씨가 운영하는 횟집을 찾았다. [동아DB]

    지난해 12月 22日 尹錫悅 國民의힘 大選候補가 함운경 氏가 運營하는 膾집을 찾았다. [東亞DB]

    咸氏는 지난해 11月 24日 페이스북 計定 紹介 글을 고치며 “전두환과 맞서면서 커온 民主化 勢力도 全斗煥이 죽으면서 役割을 다했다는 생각이 어제 문득 들었다. 전두환을 이겼다고 생각했는데 全斗煥보다 못한 實力밖에 안 된다면 恥辱이 될 것 같다. 只今은 그럴 可能性이 높다. 다른 사람들을 이롭게 하겠다고 했는데 不便만 주고 自己 몫도 제대로 못 하고 산다”고 썼다.

    페이스북에 전두환 前 大統領의 死亡과 함께 民主化 勢力도 生命이 다한 것 같다고 썼다.

    “전 前 大統領보다 더 못했다는 評價를 받을 수 있다고 본다. 너무 無能하다. ‘破産’이라는 表現을 쓰는 나도 가슴이 아프다. 하지만 民主化 勢力이 只今처럼 國運을 망가뜨린다면 歷史가 어떻게 評價할까. 1980年代에 運動을 통해 民主化에 寄與했으나 時代에 뒤떨어져 나라를 退步시킨 主役으로 불리지 않겠나. 反對로 軍部가 虐殺로 政權을 掌握하고 獨裁로 수많은 사람을 恐怖에 떨게 한 건 맞지만 國民의 삶을 풍요롭게 했다는 評價를 받으면 우리 世代의 삶은 송두리째 不正當하고 만다. 이 點이 안타깝고 火가 난다.”

    서울 美文化院 占據籠城을 主導했던 ‘同志’들은 1年에 한 番 定期的으로 만난다. 咸氏의 말에 따르면 그를 包含해 當時 서울대 總學生會長이던 김민석 민주당 議員, 고려대 代表이던 신정훈 民主黨 議員 等 現 政權 人士들도 參席한다.

    김민석 議員, 신정훈 議員과는 이제 見解가 많이 다를 듯하다.

    “다른 대로 그냥 사는 거다. 모임에 參席하는 사람 中엔 아직 ‘主體思想’을 信奉하는 親舊도 있다. 서로 다른 걸 알지만 20代의 經驗이 너무 强烈해 60살 다 돼가는 데도 아직 본다.”

    만나면 무슨 얘길 하나.

    “日常的 얘기도 하고 討論도 한다. 얼굴 붉히면서 싸우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또다시 본다(웃음).”

    그의 知人 모두가 ‘다름’을 認定하는 건 아니다. 現 政權과 586 運動圈에 對해 날 선 批判을 쏟아내는 그를 非難하는 知人도 있다. 咸氏가 지난해 12月 尹錫悅 候補와 만나자 그의 知人 中 하나는 咸氏의 페이스북에 “尹錫悅과의 晩餐 뉴스에 왜 함운경 이름 석 字가 나오나요? 참으로 失望입니다”라는 內容의 글을 쓰기도 했다. 咸氏는 “지난해 記事가 나간 以後 나를 變節者라고 辱하는 사람이 많다. 膾집에 쳐들어와 장사를 못 하게 하겠다며 脅迫한 사람도 있다”고 밝혔다.

    함께하던 同僚들에게 非難을 받으면 더 서운하지 않나.

    “氣分이 매우 나쁘지만 아무 말 하지 않고 듣기만 한다. 괜히 싸워서 일을 키우고 싶진 않으니까. 代表的인 非難이 ‘變節’했다는 건데, 무슨 朝鮮時代도 아니고 切開라니(웃음). ‘나만 왜 이렇게 變했을까’ 곰곰이 생각해봤다. 아마도 群山에 홀로 떨어져 있어서 그런 듯하다. 서울에서 벗어난 곳에서 世上을 보니 다른 面이 보이는 거다. 生業에서 奮鬪하며 깨닫는 것도 있다”

    그게 뭔가.

    “左派는 自身이 願하는 世上을 設計해 그것을 이뤄내려고 한다. 꿈에 그리는 ‘理想社會’가 存在한다. 그런데 現實에서 살다 보면 뜻대로 안 되는 게 너무 많다. 마음먹는다고 되는 게 아니다. 이것을 數十 年, 數十 次例 겪다보면 사람이 報酬化될 수밖에 없다. 保守는 經驗에서 배워 조금씩 더 나은 길을 찾아감을 의미한다. 衝突·摩擦과 妥協하며 徐徐히 變하는 것이다. 現實을 뜯어고치려 하면 잘 안 된다. 사람의 本性에 맞게 制度를 漸進的으로 바꿔줘야 한다. 그게 政治의 役割이다”

    當身은 左派인가 右派인가.

    “現實을 어떻게 보는지에 달린 것 아닐까. 난 國民의힘은 歷史에서 退出돼야 할 政黨이고 民主黨은 審判받아야 할 政黨이라고 여겼다. 그저 眞正한 自由主義 政黨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尹 候補를 만나고 나니 猝地에 그의 選擧運動員이 된 ‘變節者’로 여겨진다. 난 장사하고 있는데 그가 찾아왔을 뿐이다.”

    豫告도 없이 온 건 아닐 텐데.

    “保佐陣이 먼저 電話로 連絡해 오긴 했다. 어떤 知人은 나보고 도망가라고 하더라. 本人이 온다고 하는데 뭘 막나. 와서 物件이나 많이 팔아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웃음). 尹 候補에게도 이렇게 얘기했다. 當身 하는 거 보니 못 찍겠다고(웃음).”

    尹 候補를 만나보니 어떤 사람 같던가.

    “人間的으론 괜찮은 사람 같았다. 周邊人들이 왜 ‘석열이 兄’이라고 하는지 알겠더라. 包容力 있어 보였다.”

    586, 짐이 되진 말아야

    咸氏는 뽑을 사람이 없어 苦悶 中이라고 했다.

    “李在明 民主黨 大選候補는 나라를 破滅로 이끌 國家的 災殃이라고 생각한다. 그를 大選候補로 定한 민주당도 寒心하다. 아무리 政治는 車線, 그게 안 되면 次惡을 고르는 거라지만 選擇肢가 없어 괴롭다.”

    그가 바라는 政治는 뭘까. 膾집 이름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네모 船長’은 프랑스 作家 쥘 베른의 小說 ‘海底 2萬浬’의 主人公 네모 船長(Captain Nemo)에서 따온 것이다. 네모 船長은 潛水艦을 타고 다니며 바닷속 寶物을 찾아 全 世界 被壓迫民을 돕는 人物이다.

    膾집 이름에 政治的 意味가 담긴 듯하다.

    “나는 世上의 도움을 많이 받은 사람이다. 中學校 때부터 大學校까지 群山의 財團에서 주는 奬學金으로 學校를 다녔다. 政治를 해보겠다고 出馬하면 群山市民들이 後援金을 걷어줬다. 膾집 한다고 하니 群山市民들이 株式會社를 만들어 도왔다. 내 삶은 빚쟁이 人生이다. 받은 恩惠를 다 돌려주고 죽는 게 나의 꿈이다.”

    그 手段이 政治였던 건가.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수 있지만 ‘반드시’는 아니다. 돈을 많이 벌어 社會에 還元해도 되지 않나. 群山이든, 大韓民國이든 내가 屬한 共同體에 善한 影響力을 남기고 싶다”

    大選이 얼마 남지 않았다. 政治가 어떻게 發展했으면 좋겠나.

    “國民이 希望을 가질 수 있게 해주면 좋겠다. 只今보다 未來가 더 나아질 거라는 믿음을 주는 거다. 政治하는 사람의 가장 큰 目的은 國民을 幸福하게 하는 것이다. 이番 大選을 통해 우리 社會가 좀 더 좋은 方向으로 나아갔으면 좋겠다. 特히 나와 같은 586 運動圈 世代에 말하고 싶다. 우리가 곧 還甲이다. 앞으론 더 젊은 사람들이 큰 役割을 해나가야 할 텐데, 그들에게 짐은 덜 주고 떠나야 하지 않겠나. 꼭 苦悶해 봤으면 한다.”



    이현준 기자

    이현준 記者

    大學에서 保健學과 英文學을 專攻하고 2020年 東亞日報 出版局에 入社했습니다. 여성동아를 거쳐 新東亞로 왔습니다. 政治, 社會, 經濟 全般에 걸쳐 우리가 살아가는 世上에 關心이 많습니다. 設令 많은 사람이 읽지 않더라도 누군가에겐 價値 있는 記事를 쓰길 願합니다. 펜의 무게가 주는 責任感을 잊지 않고 옳은 記事를 쓰겠습니다.

    不當 解雇 抗議하자 甲질 傍觀·責任 回避한 建國大 産學協力團

    HD現代重 vs 韓華오션 KDDX 爭奪戰 內幕

    댓글 0
    닫기

    매거진東亞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推薦記事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Copyright ⓒ 2020 By '전통문화연구회(傳統文化硏究會)' All Rights reserved.
     한국   대만   중국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