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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인 境遇會長 “섬김과 謙遜 리더십으로 150萬 ‘警友’ 심부름꾼 될 터”|新東亞

2021年 12 月號

김용인 境遇會長 “섬김과 謙遜 리더십으로 150萬 ‘警友’ 심부름꾼 될 터”

[인터뷰]첫 警察署長 出身 大韓民國在鄕警友會 中央會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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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지영 記者

    kjy@donga.com

    入力 2021-12-14 1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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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警友會 眞짜 主人은 會長 아닌 會員

    • ‘永遠한 警察인, 國民과 함께’ 志向

    • ‘좋은 것을 더욱 좋게’ 만든 肯定의 힘

    • 積極的인 思考方式과 근면함이 最大 競爭力

    • DJ에게 한 手 배운 效果 滿點 멘털 管理法

    • 깨끗하고 정의로운 境遇會長으로 記憶되길

    김용인 경우회장은 지난 5월 대한민국재향경우회 대의원 총회에서 높은 지지율로 당선됐다. [조영철 기자]

    김용인 警友會長은 지난 5月 大韓民國在鄕警友會 代議員 總會에서 높은 支持率로 當選됐다. [조영철 記者]

    大韓民國在鄕警友會(以下 警友會)가 58年 歷史上 처음으로 非幹部 警察署長 出身 首長을 맞았다. 지난 5月 21日 代議員 總會에서 出席 代議員 324名 中 177名의 支持를 받아 當選된 김용인(74) 第23代 警友會 中央會長(以下 境遇會長)이 바로 그다. 54.6%의 過半 得票率을 記錄해 決選 없이 1次 投票에서 當選이 確定됐다. 警友會는 退職한 警察官들로 構成된 法廷團體로 1963年에 만들어졌다. 警察 關聯 團體 中 規模가 가장 크다. 中央會를 비롯해 地方警察廳 單位의 19個 市·道境遇會와 警察署 單位의 275個 地域境遇會가 있다. 會員數는 約 150萬 名에 이른다.

    6月 1日 열린 就任式에서 김용인 회장은 “모든 境遇(警友)가 한마음으로 뭉치면 現職 時節과 똑같이 國家와 社會를 위한 다양한 奉仕와 意味 있는 役割을 할 수 있다”고 强調했다. 또 “透明하고 合理的 시스템에 依한 境遇回 運營과 境遇 同志들의 民主的 意思決定 參與를 擴大해 境遇會에 對한 社會的 信賴를 높이겠다”면서 “國民에게 尊敬과 사랑을 받는 새로운 境遇回를 만들어나가겠다”는 覺悟를 力說하기도 했다.

    警友會 眞짜 主人은 會長 아닌 會員

    金 會長은 1972年 忠南에서 巡警으로 警察 生活을 始作했다. 故(故) 金大中 前 大統領이 大選候補·大統領當選人이던 時節 警護隊長을 맡았으며 靑瓦臺 公職紀綱祕書室 行政官, 全南 谷城警察署長, 警友會 首席副會長, 器興컨트리클럽 代表理事 等을 지냈다. 就任 5個月이 지난 11月 3日, 初心을 다지며 하루를 25時間처럼 쓰는 그를 서울 麻浦區 警友會 執務室에서 만났다.

    - 지난 5月 警友會長 選擧에서 當選됐습니다. 當時 所感이 궁금합니다.

    “예전에는 長官이나 警察廳長 出身이 警友會長에 任命됐는데 김대중 政府 時節에 選擧制로 바뀌었어요. 우리 150萬 境遇會員 大多數가 平凡하게 巡警으로 入直한 분들이에요. 이제는 境遇回 主人이 누구인지를 보여줘야 한다는 共感帶가 커져 제가 제23대 中央會長으로 當選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當選의 기쁨도 暫時뿐 제가 境遇會員의 마음을 얼마나 더 잘 알고 있는지, 眞情으로 境遇會員들의 참된 심부름꾼이 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지만 期待에 副應할 수 있도록 熱心히 해야겠다는 覺悟와 決意를 다졌습니다.”

    - 選擧 過程에서 競爭이 熾烈했을 것 같아요.

    “當時 저는 警察署長 出身으로 出馬해 高位職을 지내신 두 분과 競合을 벌이며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비(非)幹部 警察署長 出身이 中央會長을 하면 다른 團體 會長이나 各級 國家機關을 相對할 때 格에 맞지 않는다고 卑下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고, ‘國會나 政府 部處와 警友會 關聯 事項을 論議할 때 對話의 相對로 認定하지 않을 것’이라고 貶毁하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勿論 제가 두 候補보다 不足한 面이 많지만 境遇回 發展을 위해 獻身하고 努力해야겠다는 熱情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自負합니다. 제가 境遇會에 들어오게 된 것이 전전임 會長 時節입니다. 警察大學에서 熱心히 일하던 모습을 印象 깊게 본 當時 警友會長께서 저를 警友會 總務企劃處長으로 뽑아주셨습니다. 그때부터 警友會에서 總務企劃處長, 副會長, 다시 首席副會長을 지내고 境遇會議 財源인 器興컨트리클럽 代表理事로 일했습니다. 그런 努力과 熱情, 제가 살아온 삶의 過程이 境遇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 過半數의 높은 支持를 얻어 警友會 史上 첫 警察署長 出身 會長이 되셨어요. 이것이 示唆하는 바는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高位職 出身이 要職을 차지한 國內 各種 職能團體에 큰 警鐘을 울렸다고 생각합니다. 職能 團體가 發展하고 志向하는 바를 이루려면 現職에 있을 때의 地位보다 所任을 誠實히 履行하려는 熱情과 意志가 리더에게 切實히 必要합니다. 警友會는 그동안 高位職 出身이 警友會長을 맡으면서 一般 境遇會員들에게 疏忽한 部分이 적지 않았습니다. 一部 會長은 警友會에 적잖은 被害를 끼치기도 했고요. 그러다 보니 非幹部 警察署長 出身이 中央會長이 되면 警友會의 不合理한 部分을 바로잡을 것이란 期待感에서 많은 境遇가 저를 選擇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選擧 公約 가운데 ‘水平的 組織文化 具現’이 눈에 띄었습니다. 水平 關係를 重視하는 건 平素 所信인가요.

    “警友會를 主로 高位職 出身이 이끌다 보니 權威主義的인 傾向이 剛했습니다. 하지만 境遇會議 實質的인 主人은 境遇會員들이며 境遇會員 大多數가 平凡한 一般 警察 出身입니다. 警友會長은 境遇會員 위에서 君臨하는 자리가 아니에요. 어깨와 목에 힘을 빼야 합니다. 境遇會員들을 위해 어떻게 하면 더 많이 奉仕할 것인지를 苦心해야 합니다. 그래야 警友會가 成長하고 發展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永遠한 警察인, 國民과 함께’ 志向

    김용인 경우회장이 6월 6일 현충일을 맞아 국립현충원 현충탑에 참배하고 있다. [대한민국재향경우회 제공]

    김용인 警友會長이 6月 6日 顯忠日을 맞아 국립현충원 顯忠塔에 參拜하고 있다. [大韓民國在鄕警友會 提供]

    - 事實 境遇回를 잘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어떤 活動을 하는 團體인가요.

    “150萬 退職 警察公務員으로 構成된 公益 社團法人이자 法廷團體입니다. 境遇會員 相互 間의 親睦 圖謀와 自由民主主義 守護, 國民에 對한 奉仕, 國家治安과 公益 增進을 目的으로 1963年 11月 21日 當時 內務部 長官의 認可를 받아 設立됐죠. 現在도 國家安保와 民生治安 協力 事業에 參與하고 있고, 特히 各種 犯罪와 交通事故 豫防 弘報活動과 兒童지킴이 活動 等에도 積極 나서며 地域社會 發展에 寄與하고 있습니다.”

    - ‘永遠한 警察인, 國民과 함께’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걸었더군요. 特別한 理由가 있나요.

    “지난 6月 新任 執行部 出帆과 더불어 새로운 캐치프레이즈가 必要해 全國 境遇會員들을 對象으로 이를 公募했습니다. 그中 警友會의 存在 理由를 가장 含蓄的으로 담은 것이 ‘永遠한 警察인, 國民과 함께’였습니다. 境遇會員들은 現職에 있을 때도 退任했어도 國家와 國民, 이 社會를 爲해 獻身 奉仕하는 마음을 늘 간직하고 있어요. 한番 警察은 永遠한 警察이지요.”

    - 150萬 境遇를 이끄는 만큼 리더십이 重要합니다. 어떤 마인드로 組織을 이끌어나가는지요.

    “人類 歷史上 世界 最大의 帝國을 建設하고, ‘워싱턴포스트’誌가 1001年부터 2000年까지 世界 歷史를 가장 크게 변화시킨 人物로 選定했을 程度로 그 影響力이 至大했던 몽골帝國 칭기즈칸은 ‘한두 사람의 꿈은 꿈으로 끝나지만 모든 이가 함께 꿈꾸면 그것은 現實이 된다’는 有名한 말을 남겼습니다. 저는 中央會長으로서 警友會를 바로 세우고, 尊敬받는 境遇回, 地域膾 中心의 警友會가 되도록 하기 위해 낮은 姿勢로 誠心을 다해 境遇들과 疏通하고 配慮하려고 합니다. 漢學者였던 先親에게 어릴 때부터 ‘近位無價之寶(勤爲無價之寶)’라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明心寶鑑’에 나오는 말로, ‘근면함은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배’라는 意味죠. 근면함을 바탕으로 저부터 率先垂範하는 가운데 謙遜과 섬김의 리더십을 發揮한다면 모든 境遇가 꿈꾸는 國民에게 사랑받고 後輩 警察에게 尊敬받는 境遇回路 거듭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만은 組織을 이끌기 힘들어요. 剛한 決斷과 推進力이 必要할 때는 果敢하게 밀고 나갑니다.”

    - 就任 後 한 일 가운데 特別히 기억나는 것이 있다면.

    “詩·都會와 地域膾가 잘 돌아가야 警友會가 發展할 수 있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境遇會長으로 就任한 後 一線 市·都會와 地域膾 境遇會員과 많은 意見을 나누며 京畿南部都會, 光州市會를 始作으로 서울·江原·全北·全南·慶南 地域膾를 直接 訪問해 現地 事情을 살핀 일이 記憶에 남아요. 잘 運營되는 곳은 會員들의 눈빛이 살아 있고 熱意가 대단한데 運營에 어려움을 겪는 곳의 表情은 正反對였어요. 來年부터는 더 많은 곳을 찾아가 境遇會員들을 激勵하고 疏通하려 합니다.”

    ‘좋은 것을 더욱 좋게’ 만든 肯定의 힘

    - 巡警으로 始作해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왜 警察이 되셨는지요.

    “예전에는 시골에 ‘4H俱樂部(4H클럽)’라는 것이 있었어요. 머리(Head), 마음(Heart), 손(Hand), 健康(Health)의 英語 머리글字를 따서 만든 것으로 美國에서 始作된 農村 靑少年 모임이에요. 거기서 다양한 活動을 展開했어요. 저도 4H運動을 통해 많은 걸 배우고 나서 農村指導所에 들어가 일하다 보니 앞으로는 農業보다 工業 展望이 밝다는 豫感이 들었어요. 그래서 農業과 關聯이 없는 다른 分野의 職業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周邊에서 警察을 勸誘했어요. 熱情的이고 성실한 性格과 잘 맞는 職業이라면서요. 그때부터 警察에 關心을 갖게 됐는데 마침 忠南 警察에서 巡警을 募集하더군요. 熱心히 工夫해서 좋은 成績으로 警察 試驗에 合格했어요.”

    - 警察이 適性에 잘 맞았나요.

    “天職이지 않나 싶습니다. 1972年 忠南 警察 20期로 巡警 生活을 始作하면서 ‘民生治安에 앞장서는 警察이라는 職業을 사랑해야겠다, 住民들이 警察에 對해 좋은 이미지를 갖도록 멋진 모습을 보여줘야겠다’고 覺悟를 다졌어요. 그러려면 規定을 잘 지켜야겠더라고요. 늘 服裝을 端正히 하고 時間에 꼭 맞춰 巡察을 돌았어요. 住民들을 보면 깍듯이 人事하고 늘 親切하게 對했죠. 그랬더니 모두 저를 좋아해 주셨어요. 犯罪 諜報도 일부러 저를 찾아 알려주셨죠. 住民들에게 信望을 얻은 德分에 外勤 業務 成績이 늘 1等이었고 警察로서 自負心을 느낄 수 있었어요. 派出所에서 警察署로 자리를 옮겨 事件 接受 業務를 맡았을 때는 法令 工夫를 熱心히 했어요. 罪名을 잘못 記載하는 誤謬를 犯하지 않기 위해서요. 그때 工夫한 것이 警察 生活 全般에 큰 도움이 됐죠.”

    - 어떤 자리, 어떤 곳에서든 確實한 成果를 냈다고 들었습니다.

    “4H運動의 모토 中 하나인 ‘좋은 것을 더욱 좋게’라는 말을 좋아해요. 警察大學에서 精神敎育 業務를 맡을 때도 그 말을 實踐했어요. 旣存에 없던 方式의 色다른 講義를 進行해 좋은 反應을 얻었죠. 조상현 國唱을 招聘해 國樂 理論과 失戀을 보여주고 우리 民謠와 韓國舞踊을 선보여 큰 反響을 일으켰어요. 그 外에도 여러 프로그램을 만들어 進行했더니 제가 警察大學의 名物이 돼 있더군요. 김용인 經緯가 있는 警察大學의 精神敎育이 아주 새로워졌다는 評을 들었습니다. 그때 警友會 전전임 會長이 警察大學에 敎育을 와서 저를 눈여겨봤던 것 같아요. 本人이 警友會長이 되자마자 저를 불러들여 總務企劃處長을 맡기셨거든요. 그때도 正말 熱心히 했어요. 그 努力을 인정받아 警友會 副會長에 當選되고, 以後 76.2%라는 壓倒的 得票率로 首席副會長이 됐죠. 또 그 因緣으로 器興컨트리클럽 代表理事가 됐고요. 器興컨트리클럽을 이끌 때는 쉬는 날도 없이 일했어요. 그러한 努力이 차곡차곡 다져져 여기까지 오게 됐다고 생각해요.”

    積極的인 思考方式과 근면함이 最大 競爭力

    - 警察로 살면서 보람을 느낀 적이 많을 것 같아요. 記憶에 남는 逸話가 있나요.

    “退勤길에 ‘쓰리꾼(소매치기의 隱語)’을 붙잡은 적이 있어요. 쓰리꾼들은 恒常 凶器를 갖고 다닌다는 얘기가 있어서 잠깐 갈등하기도 했지만 警察로서 모른 척할 수가 없었어요. 질긴 몸싸움 끝에 犯人을 檢擧했죠. 그 일로 警察局長에게 表彰을 받고 地域新聞과 境遇新聞에 報道되기도 했어요. 자칫 목숨이 危險할 狀況이었고, 內勤 職員임에도 警察官으로서 勇氣를 내 使命을 다했다는 點에서 가장 보람 있고 뿌듯한 일로 記憶하고 있습니다. 가장 자랑스러운 일은 1989年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漢陽派出所長으로 在職할 때 派出所에 컴퓨터非常벨을 國內 最初로 設置해 强盜傷害犯을 檢擧한 일 입니다. 犯罪나 危急 狀況에 對備하고자 管內 30個 主要 業所와 連結해 둔 컴퓨터非常벨 德分에 衣裳室에 든 도둑을 잡을 수 있었어요. 主要 新聞과 뉴스 프로그램에 報道돼 民生治安의 模範 事例로 큰 關心을 모으기도 했죠. 非常벨 德分에 外勤 業務에서도 頭角을 나타내 서울地方警察廳長 表彰을 여러 番 받고 地域 住民들에게도 많은 稱讚을 들었습니다.”

    - 힘든 날도 많았을 겁니다. 그럴 땐 어떻게 견디셨나요.

    ”積極的인 思考方式으로 克服했어요. 노먼 빈센트 筆 博士의 ‘積極的 思考方式’이라는 冊을 읽고 나서 ‘每事에 肯定的이고 積極的으로 臨하자’는 생각을 갖게 됐어요. 肯定的으로 생각하고 積極的으로 살다 보면 어떤 힘든 일이 닥쳐도 견딜 수 있다는 것을 人生 經驗을 통해서도 배웠어요.”

    - 每事에 肯定的, 積極的으로 臨하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텐데요.

    “漢學者인 先親께서 宏壯히 부지런하셨어요. 그 影響을 크게 받았죠. 工夫나 다른 쪽은 몰라도 부지런함으로는 저를 이길 사람이 거의 없을 거예요. 規定된 일을 熱心히 하는 것도 부지런하기에 可能한 일입니다. 저는 携帶電話에 걷기 앱(애플리케이션)을 깔아놓고 하루 平均 1萬3000步를 걸어요. 작은 일이지만 근면함의 所産이죠. 근면함이란 自身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겁니다. 달콤한 誘惑을 뿌리칠 수 있어야 근면함이 發動합니다.”

    DJ에게 한 手 배운 效果 滿點 멘털 管理法

    1997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대선후보이던 시절 경호대장으로 활약한 김용인 경우회장(맨 앞). [대한민국재향경우회 제공]

    1997年 金大中 前 大統領이 大選候補이던 時節 警護隊長으로 活躍한 김용인 境遇會長(맨 앞). [大韓民國在鄕警友會 提供]

    김용인 會長은 1997年 現職 警察官 時節 大選候補이던 金大中 前 大統領의 警護隊長으로 猛活躍해 ‘大統領을 만든 사람들’(1998)이라는 11人 共同 著書와 金 前 大統領의 노벨平和賞 受賞을 記念하는 30人 共同 著書 ‘敬天愛人’(2002)에도 著者로 이름을 올렸다. ‘敬天愛人’은 金 前 大統領의 一代記를 담고 있다.

    - 金 前 大統領이 大選候補이던 時節 어떻게 警護隊長을 맡게 됐나요.

    “忠南 警察國에서 勤務할 때 因緣을 맺은 李無影 前 警察廳長이 그때 警察綜合學校 校長으로 在職하고 있었습니다. 그분이 저를 警護隊長으로 推薦했어요. 大選候補 警護隊長으로서 業務에 萬全을 期하기 위해 以前 警護 方式의 問題點까지 把握해 두고 具體的 指針도 마련했어요. ‘여기서 들은 情報는 무덤 속까지 가져간다는 覺悟로 保安을 지킨다. 내 몸을 던져 候補를 保護한다는 殺身成仁의 精神으로 警護 業務를 遂行한다’는 內容이었어요. 警護할 때 一絲不亂한 指揮體系의 最終 決定을 제가 直接 할 수 있도록 容認해 준 믿음과 期待를 저버리지 않기 爲해 莫重한 責任感을 안고 最善을 다해 業務를 遂行했어요. 警護뿐 아니라 記者들의 取材 便宜 提供에도 각별한 神經을 썼죠. 候補의 이미지에 누가 되지 않도록 柔軟性 있는 警護를 펼친 겁니다. 候補님도 ‘國民의 不便을 最少化하며 警護하라’고 當付하셨고요.”

    - ‘大統領을 만드는 사람들’과 ‘敬天愛人’에 共同 著者로 이름을 올릴 程度로 警護 指揮가 돋보였다는 評이 藉藉합니다. 警護隊長으로 活躍할 때의 재미있는 逸話를 떠올린다면.

    “警護隊長으로 決定됐을 때 마음속으로 이렇게 다짐했어요. ‘김대중 候補님, 當身은 저를 통해서 大韓民國 警察이 自己 맡은 바 任務를 얼마나 熱情的으로 熱心히 하는 사람들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大韓民國 警察의 멋진 모습을 저를 통해 한番 보십시오’ 하고요. 그 다짐처럼 警護隊長으로서 正말 熱心히 일했어요. 釜山에 내려갔을 때는 엘리베이터를 탄 候補보다 먼저 目的地인 建物 9層까지 階段으로 올라가 DJ(김대중 前 大統領)를 깜짝 놀라게 한 적도 있어요. 萬一의 事態에 對備해 죽기 살기로 階段을 뛰어올랐거든요. 다른 警護 職員들이 ‘너무 빨리 뛰어 心臟이 터질 것 같다’고 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기서 우리가 죽으면 殉職이고 殉國이야’ 하면서 빨리 뛰기를 재촉했죠. 그때 候補가 ‘이 사람들은 生命을 내놓고 일하는구나’ 하고 느껴 ‘大統領을 만든 사람들’에 제 이름을 올려준 게 아닌가 싶어요. 그 일은 警友會長이 된 것에 비할 수 없을 程度로 대단한 榮光이죠. 警護隊長으로 일할 땐 키높이구두를 신고 다녔어요. 키가 작은 것이 欠이 될까 憂慮해서요(웃음).”

    - 김대중 當時 候補를 密着 警護하면서 記憶에 남는 逸話가 있나요.

    “1997年 10月 大選候補로 서강대를 訪問했을 때 한 學生이 이렇게 물었어요. ‘그동안 生死의 고비를 여러 番 넘기고 많은 苦難을 겪으셨는데 그때마다 難關을 어떻게 克服하셨느냐’는 質問이었어요. 김대중 候補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어요. ‘나는 商高를 나왔다. 上告에서는 부기를 배운다. 簿記에는 貸邊과 車變異 있다. 어떤 어려움에 直面하면 그걸 題目에 쓰고 내가 現在 가진 좋은 點을 大便에 羅列한다. 借邊에는 現在 잘못된 點과 고쳐야 할 點을 차근차근 쓴다. 그것을 보다 보면 내가 只今 겪는 어려움은 別것 아니다. 나는 이런 좋은 點을 갖고 있고 능히 克服할 힘을 갖고 있다. 이 程度의 일로 걱정할 必要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고요. 그 얘기를 듣고 學生들이 뜨거운 拍手를 보냈어요. 그 얘기가 一生에 도움이 됐어요. 어려운 일을 當했을 때 現在의 苦衷과 내가 가진 것, 못 가진 것, 克服할 힘을 적어보면 어떤 苦難도 능히 이겨낼 수 있어요.”

    깨끗하고 정의로운 境遇會長으로 記憶되고 싶어

    - 膝下에 1男1女를 뒀습니다. 平素 子女에게 어떤 點을 强調하시나요.

    “제가 밖에서는 부드러운데 집안에서는 딱딱한 便이에요 子女 敎育도 嚴하게 했고요. 平素 아이들에게 ‘近位無價之寶’와 ‘一身一身우일신(日新日新又日新)’을 强調합니다. 一身一身우일신은 나날이 새로워진다는 意味로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입니다. 驕慢을 警戒하라는 말도 자주 해요. 態度뿐 아니라 生活도, 마음도 교만해선 안 됩니다. 驕慢은 敝網의 지름길이에요. 現在 職場에 다니는 아들에게는 ‘會社에서 必要로 하는 사람이 되려고 努力해야 한다. 會社에서 주는 給與 外에 다른 利益은 1원도 탐해선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 앞으로 警友會 會長으로서 어떤 活動 計劃을 세워두고 있나요.

    “저를 비롯해 中央會 幹部와 任職員은 境遇會員의 심부름꾼이라고 생각합니다. 中央會가 올바른 方向으로 나아가야 境遇들도 함께할 수 있습니다. 豫算을 한 푼이라도 所重히 使用하고 地域膾가 發展할 수 있도록 激勵하면서 함께 成長하는 境遇回를 만들어나갈 것입니다. 特히 地域膾 財政 擴充에 힘쓰고 公約으로 내걸었던 △獨立 境遇會館 建立 △水平的 組織文化 具現 △境遇會法 改正 等도 任期 內 可視的 成果를 내려고 합니다. 제가 財團法人 境遇奬學會 理事長까지 兼職하는 만큼 저부터 率先해 奬學會 基金을 果敢히 늘릴 것입니다. 後輩 警察官들과 境遇들의 子女가 돈이 없어서 學業을 中斷하거나 抛棄하는 일이 없도록요. 境遇들의 일자리 創出과 共感과 同參을 이끌어내는 데도 功을 들일 겁니다. 不足한 저를 警友會長으로 세워준 境遇會員들에게 늘 感謝하고 있으며 莫重한 責任感을 느낍니다. 境遇會員들이 選擇을 잘했다는 것을 3年 後 반드시 結果로 證明해 보일 수 있도록 最善을 다하겠습니다. 그래서 後날 警友會를 깨끗하고 성실하고 正義롭게 이끈 會長으로 記憶되고 싶습니다.”


    #김용인 #警友會 #近位無價之寶 #新東亞



    김지영 기자

    김지영 記者

    放送, 映畫, 演劇, 뮤지컬 等 大衆文化를 좋아하며 人物 인터뷰(INTER+VIEW)를 즐깁니다. 요즘은 팬덤 文化와 不動産, 流通 分野에도 특별한 關心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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