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硏修院 14期 同期들 “秋美愛, ‘無(無)法部 長官’ 嘲弄받을 줄이야…”|신동아

2021年 2 月號

硏修院 14期 同期들 “秋美愛, ‘無(無)法部 長官’ 嘲弄받을 줄이야…”

同期들이 말하는 秋美愛·朱豪英·洪準杓

  • 김우정 記者

    friend@donga.com

    入力 2021-01-27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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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秋 政治하리라 생각 못 해…영·호남 커플 殉愛보”

    • “秋 初任 때도 윗線과 자주 衝突, 愛酒家”

    • “朱 寡默한 佛子(佛子)인데 政界 進出해 놀라”

    • “朱 ‘少數派’ 영남대 出身 限界 克服한 根性”

    • “洪 周邊 늘 북적…多變·達辯이라 政治할 줄 알았다”

    • “洪 거짓말探知機度 마음 못 읽어낸 ‘强心臟’”

    • “1980年代 ‘負債感’이 政治 投身 原動力”

    서울 서초구 서울회생법원 청사. 14기 입학 당시 사법연수원으로 쓰였다. [뉴스1]

    서울 서초구 서울回生法院 廳舍. 14期 入學 當時 司法硏修院으로 쓰였다. [뉴스1]

    “硏修院 時節 秋美愛는 조용하고 차분한 이미지였다. 當時 드물던 女性 硏修院生이라 함부로 말 붙이기도 쑥스러웠다. 政治權 女丈夫로 이름을 날릴지 꿈에도 몰랐다.” -司法硏修院 14期 出身 A 辯護士

    “同期 相當數는 서울大 出身이었다. 朱豪英은 少數派라고 할 수 있는 영남대 出身으로 나이도 어렸다. 그럼에도 주눅 들지 않고 默默히 根性을 發揮했다. 조용한 佛子(佛子) 같았는데 政界로 進出해 놀랐다.” -司法硏修院 14期 出身 B 辯護士

    “14期 2班이었던 司法硏修生 洪準杓의 자리 周邊은 늘 시끌벅적했다. 말을 재미나게 잘해서 周邊 同期生들을 많이 웃기곤 했다. 多變·達辯이라 政治에 나설 줄 알았다.” -司法硏修院 14期 出身 C 辯護士

    司法硏修院 14期 出身 法曹人들은 政界에 進出한 動機를 두고 다양한 人物評을 쏟아냈다. 이들은 “政界 進出 後 同期들의 行步에 對해 쉽사리 評價하기는 어렵다”면서도 “動機 中 才能 있고 開城 뚜렷한 사람이 참 많다”고 했다. 

    14期 310名은 1983年 硏修院에 入學해 2年間 講義·實務(法院·檢察·辯護士 事務室 等) 敎育을 거쳐 이듬해 12月 修了했다. 司法試驗 24回(1982) 合格者(307名)가 主軸이다. 個人 事情으로 入學을 미룬 22回(1980)·23回(1981) 合格者도 少數 있다. 바로 前 期數 13期(273名)의 主軸인 司法試驗 23回(316名)부터 合格者 數字가 300名을 넘어섰다. 14期는 1971年 硏修院 開院 以來 첫 ‘定員 300名 時代’를 열었다.

    法曹界 ‘金배지 工場’ 硏修院 14期

    14期는 大韓民國 司法府의 中樞를 이루고 있다. 이기택 大法官과 권순일 前 大法官, 李錫兌 憲法裁判官과 강원일·安昌浩 前 裁判官이 代表的인 14期 出身 法曹人이다. 現在까지 唯一하게 檢察總長을 2名(채동욱·金鎭台 前 總長) 輩出한 旗手이기도 하다. 

    法曹界에서 14期는 ‘金배지 工場’이라는 別稱으로 통한다. 前·現職 國會議員 14名을 輩出하는 等 政界에서 頭角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現在 定價의 中心人物인 秋美愛(63) 法務部 長官과 朱豪英(61) 國民의힘 院內代表, 洪準杓(67) 無所屬 議員이 14期 動機로 세 사람 다 5選 議員을 지냈다. 秋 長官과 홍 議員은 硏修院에서 같은 2班(硏修院生 40~50名으로 構成돼 함께 授業·實習함)이었다. 辛基南 前 더불어民主黨 議員(4線)과 行政自治部 長官을 지낸 정종섭 前 未來統合黨 議員, 洪日杓 前 統合黨 議員도 14기다. 신동아가 司法硏修院 14期 出身 法曹人들에게 ‘硏修院生’ 秋美愛·朱豪英·洪準杓의 人物評을 물었다.


    1 “硏修院生 秋美愛는 고요·鎭重한 사람”

    추미애 법무부 장관. [뉴스1]

    秋美愛 法務部 長官. [뉴스1]

    同期들은 硏修院 時節 秋美愛 長官의 性格이 “차분하고 眞摯했다”고 입을 모았다. 14期 出身 A 辯護士는 “오늘날 世評과 正反對로 硏修院生 秋美愛는 오히려 內向的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조용했다”며 “政治人 秋美愛를 두고 支持者는 카리스마 있는 ‘錘다르크’라고 치켜세우더라. 反面 法務部 長官으로서 獨善的 이미지 탓에 ‘無(無)法部 長官’ 같은 嘲弄도 받지 않느냐. 坪이 極과 極으로 갈려 動機로서 안타깝다”고 말했다. 



    또 다른 14期 B 辯護士도 “硏修院 때 秋 長官은 고요하고 鎭重한 사람이었다. 政治할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좋게 말하면 剛斷 있고, 나쁘게 말하자면 우악스럽기까지 했던 法務部 長官으로서 行步와 比較하면 正反對 모습이었다”고 回想했다. 

    秋 長官은 硏修院을 修了하고 1985年 春川地方法院 判事로 첫 發令을 받았다. 以後 10年 동안 仁川·全州地法, 光州高法 判事를 지냈다. 判事 時節부터 自己主張이 剛한 ‘錘다르크’의 面貌를 보였다. 全斗煥 政權 때인 1985年, 檢察은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조세희)·‘轉換時代의 論理’(이영희) 等 ‘不穩書籍’을 押收한다며 各 法院에 全國 大型 書店을 相對로 押收搜索 令狀을 請求했다. 秋美愛 當時 春川地法 判事만 唯一하게 令狀을 棄却했다. 

    硏修院 13期 出身 D 辯護士는 判事 時節 秋 長官에 對해 “初任 判事 때도 固執이 强해 윗線과 여러 次例 葛藤을 빚은 것으로 안다. 다만 同僚 判事들과 술 한잔하며 곧잘 어울리는 愛酒家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秋 長官은 光州高法 判事로 勤務하던 1995年, 金大中 前 大統領(DJ·當時 새정치국민회의 代表)의 提案으로 政界에 入門했다. 大邱 出身(1958年 慶北 達城郡 出生, 大邱 慶北女高 卒業) 法曹人으로서 異例的으로 DJ(김대중 前 大統領)의 국민회의에 合流한 것.


    “秋 ‘無法部 長官’ 嘲弄받아 안타까워”

    秋 長官은 1996年 第15代 總選에서 서울 광진乙 地域區에 出馬해 當選됐다. ‘最初의 判事 出身 女性 國會議員’ ‘憲政 史上 첫 地域區 5線 女性 國會議員’ ‘TK 出身 最初의 민주당系 正當(더불어民主黨) 黨首’ 等 華麗한 政治 履歷의 始作이었다. 

    同期들이 떠올린 秋 長官의 또 다른 이미지는 ‘大邱의 딸, 湖南의 며느리’다. 生前 DJ는 秋 長官을 두고 “湖南 出身인 내가 大邱 며느리를 뒀다”고 評한 바 있다. 秋 長官은 實際로 ‘湖南의 며느리’다. 1985年 全北 井邑 出身인 서성환 辯護士(司試 27回·硏修院 17期)와 結婚했다. 徐 辯護士와 秋 長官은 한양대 法大 同期로 7年 熱愛 끝에 成婚했다. 嶺·湖南 葛藤으로 兩家의 反對가 거셌지만 두 사람의 剛한 意志로 突破했다는 後聞. 

    秋 長官은 硏修院 時節에도 徐 辯護士와 交際 中이었다. 徐 辯護士는 秋 長官보다 3年 늦은 1985年 司法試驗에 合格해 硏修院 17基를 修了했다. 秋 長官과 硏修院 같은 班(2班)이었던 檢察 出身 C 辯護士는 秋美愛·서성환 커플에 對해 “英·湖南 커플인데다가 司法試驗 工夫가 힘들었을 텐데도 꿋꿋이 結婚에 골인했다. ‘殉愛보(殉愛譜)’ 같은 사랑이 印象的이었다”며 다음과 같이 敷衍했다. 

    “공교롭게도 徐 辯護士의 高校(서울 경복고) 後輩가 硏修院 14期로 우리와 같은 班이었다. 秋 長官은 紅一點이었다. 徐 辯護士는 다른 硏修院生들이 戀人에게 눈毒 들이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았겠나. 後輩에게 ‘다른 男子들이 接近하지 못하도록 막으라’고 當付했다는 所聞이 있었다(웃음). 勿論 秋 長官은 徐 辯護士 外에 다른 사람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工夫에만 邁進했다.”


    2 “寡默·음전한 佛子 朱豪英”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 [동아DB]

    朱豪英 國民의힘 院內代表. [東亞DB]

    朱豪英 院內代表와 硏修院 같은 班(1班)이었던 B 辯護士는 “當時 (週 院內代表는) 寡默하고 음전한 性格이었다. 佛敎 系統 學校(大邱 능인고)를 나와서 硏修院 때도 佛敎 동아리(般若會·法曹界 佛子 모임 ‘다르마 法迂廻’ 前身)에서 熱心히 活動한 것으로 안다. 그런 조용한 佛子(佛子)가 政治에 投身해 놀랐다”며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當時 硏修院은 서울對 出身 一色이었다. 그다음으로 歲가 剛한 것이 고려대였다. 나머지 大學 出身은 數字도 적었고 눈에도 잘 안 띄었다. 朱 院內代表는 그中에서도 少數派라고 할 수 있는 영남대 出身이다. 나이도 어린 축이었다(연수원 入學 當時 22歲). 그럼에도 주눅 들지 않고 默默히 根性을 發揮해 判事의 길을 걸었다.” 

    硏修院 動機 사이에서도 出身 高校·大學이 어딘지가 重要했다. A 辯護士는 “硏修院 動機란 것은 事實 所屬感이 느슨하다. 故鄕이 어디고, 어느 高等學校와 大學을 나왔는지가 더 重要했다. 出身 高校·大學校가 같으면 別途 모임을 꾸려 자주 만났다”고 말했다. 

    朱 院內代表는 1960年 慶北 蔚珍郡 出生으로, 中學校 時節 大邱로 移徙해 능인고·영남대 法學科를 卒業했다. 硏修院 修了 後 陸軍 法務官으로 兵役을 마치고 1988年 大邱地方法院 判事로 赴任했다. 2002年 部長判事를 끝으로 法官 生活을 마칠 때까지 한 次例(1999~2000年 水原地法 城南支院)를 빼고 大邱·慶北(大邱高法·大邱地法 盈德·常駐支援 等)에서만 勤務한 響板(鄕判)이었다.

    “朱, 工夫·政治 危機 모두 不審으로 突破”

    朱 院內代表는 2004年 第17代 總選 때 政界에 入門(한나라당 入黨), 大邱 壽城乙 地域區에서 當選됐고 내리 4選을 했다. 2009~2010年 李明博 政府 初代 特任長官을 지냈다. 第21代 總選 때는 大邱 수성甲에 戰略 公薦돼 더불어민주당 김부겸 候補를 꺾었다. 지난해부터 第1野黨 院內代表로서 存在感을 誇示하고 있다. 

    同期들의 說明처럼 朱 院內代表는 汝矣島에서 소문난 佛敎 信者다. 法名은 ‘자우(慈宇)’다. 20代 國會에서 정각회(國會 內 佛敎 信者 議員 모임) 會長을 맡기도 했다. 그는 지난해 6月 15日 민주당이 國會 常任委員長 選出 票決을 强行하자 院內代表職 辭意를 표하고 蟄居했다. 6月 16~24日, 忠北 報恩郡 法住寺·慶北 蔚珍郡 佛影寺·江原 固城郡 화암사 等 全國의 考察을 찾았다. 아흐레 동안 査察 巡禮를 마치고 6月 25日 國會로 復歸, 윈內代表로 再信任됐다. 

    B 辯護士는 “週 院內代表의 保守 性向은 TK(大邱·慶北)이라는 地域 緣故보다 佛敎 信仰의 色彩가 剛한 것 같다. 지난해 節에 蟄居한 것도 쇼(show)라고 보긴 어렵다. 工夫든 政治든 危機를 不審으로 突破하는 性格 아닌가 싶다”고 評했다.

    3 “洪準杓는 시끌벅적 재밌는 사람”

    홍준표 무소속 의원. [뉴스1]

    洪準杓 無所屬 議員. [뉴스1]

    홍준표 議員의 硏修院 生活은 어땠을까. “재밌는 사람” “政治할 줄 알았다”는 評이 支配的이었다. 홍 議員과 같은 班이었던 C 辯護士는 “洪準杓의 자리 周邊은 늘 시끌벅적했다. 말을 재미나게 잘해서 사람이 많이 모였다”며 “周邊 同期生들을 많이 웃기곤 했다. 多變因 同時에 達辯이었고 豁達한 性格이라 政治에 나설 줄 알았다”고 말했다. 그는 “젊은 時節부터 홍 議員은 强心臟이었다”며 逸話를 하나 들려줬다. 

    “硏修院 時節 홍 議員과 함께 檢察로 實習을 나갔다. 只今이야 各 請에 거짓말探知機가 있지만 當時엔 서울地檢(現 서울中央地檢)만 保有하고 있었다. 地檢 關係者가 거짓말 探知 對象이 돼볼 사람이 있냐고 묻자 硏修院生 洪準杓가 自請했다. 探知機 作動 原理는 이랬다. 探知 對象이 속으로 1부터 5까지 數字 中 한 가지를 생각한다. ‘當身이 생각한 數字가 1이냐, 2냐…’ 하는 式으로 묻고 모두 ‘아니다’라고 答하게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 答辯 한 番은 心搏이 빨라져서 探知機가 作動한다. 그런데 홍 議員은 몇 番을 答해도 探知機가 作動하지 않아 다들 神奇해했다. 그만큼 强心臟이고 泰然한 性格이다.” 

    홍 議員은 1954年 慶南 昌寧郡에서 小作農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난 속에서 大邱 영남고를 거쳐 高麗大 行政學科에 進學했다. 苦學 끝에 司法試驗 24回에 合格했다. ‘强心臟’ 硏修院生 洪準杓는 1985年 檢事로서 첫 林地 淸州地檢으로 發令받았다. 1987年 大邱地檢 鬱散支廳(現 蔚山地檢)을 거쳐 이듬해 서울地檢 南部支廳(現 서울南部地檢) 特殊部에 赴任했다. 이 때부터 ‘江골 檢事’로 이름을 날리기 始作한다. 

    當時 그가 맡은 代表的 事件이 ‘鷺梁津水産市場 運營權 强奪 事件’이었다. 전두환 前 大統領의 親兄 전기환 氏(2019年 別世)가 1983年 鷺梁津水産市場 運營權을 强奪하고 5年 동안 市場 公金을 有用한 事件이다. 1988年 12月 當時 홍준표 檢事는 전기환 氏를 拘束 起訴하는 等 活躍했으나 곧 壁에 부딪혔다. 事件에 노태우 當時 大統領의 側近도 連累되자 윗線에서 事件을 덮으라는 壓力이 내려온 것. 結局 그는 光州地檢 强力部로 左遷됐다.


    “洪, 같은 檢査가 봐도 龜鑑인 搜査”

    홍 議員은 强力部 檢事로서 組暴 搜査에 나섰다. 마침 1990年 노태우 政權이 ‘犯罪와의 戰爭’을 宣布했다. 1992年 光州·全南地域 組織暴力輩 ‘國際 PJ派’ 搜査를 指揮해 組織員 數十餘 名을 拘束했다. 이듬해 그는 서울地檢 强力部로 다시 자리를 옮겨 ‘슬롯머신 事件’을 搜査했다. 當時 賭博用 機械 ‘빠칭코(슬롯머신)’ 運營을 둘러싼 利權에 組暴은 勿論 노태우 政權 實勢 박철언 前 체육청소년부 長官과 檢察 首腦部가 連累됐다. 홍 議員은 朴 前 長官과 이건개 當時 大田高檢長 等을 拘束 起訴했다. 檢査 洪準杓의 活躍相은 1995年 SBS 드라마 ‘모래時計’의 모티프가 됐다. ‘모래時計 檢事’라는 別名을 얻는 契機가 됐다. 

    同期들은 홍 議員의 檢事 時節 活躍을 높이 評價했다. 檢事 出身 C 辯護士는 “檢査 홍준표를 두고 搜査가 거칠다는 評도 있었다. 달리 말하면 搜査의 脈을 잘 짚어 果敢하게 推進한다는 것이다. 그의 搜査는 같은 檢査가 봐도 分明 龜鑑으로 삼을 만했다”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예나 只今이나 大部分의 檢事는 庶民 犯罪를 다룬다. ‘나쁜 놈을 때려잡아서 正義를 具現하겠다’고 作定한 檢査가 얼마나 있겠나. 檢査 洪準杓는 노량진시장 利權을 챙긴 전기환 씨를 잡아넣었다. 强力部에서 組暴도 掃蕩했다. 멋있고 華麗해 보여도 權力層과 暴力輩와 角을 세우니 늘 不安하지 않았겠나. 그걸 克服하고 일에 忠實한 것만도 높이 評價한다.” 

    權力을 겨눈 搜査로 홍 議員은 檢察에서 모난 돌이 됐다. 윗線의 壓迫으로 漸次 檢査 生活에 懷疑感을 느꼈다. 그는 1996年 第15代 總選(送波 甲)에 신한국당 所屬으로 當選돼 政界에 데뷔했다. 當時 강삼재 신한국당 事務總長은 勿論 김영삼 大統領까지 나서 洪 前 議員의 入黨을 勸誘한 것으로 알려졌다. 慶尙南道知事(2012~2017)와 5線(15·16·17·18·21代) 議員, 19代 大選 候補를 지낸 有力 政治人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렇다면 硏修院 14期가 政界에 大擧 進出한 까닭은 무엇일까. B 辯護士는 “우리 同期들이 유별나기보다 周邊 狀況이 政界 進出에 유리하게 作用한 듯 하다. 1990~2000年代 政治權이 法曹人을 大擧 迎入했다”며 “14기가 硏修院 修了 後 法曹人으로 자리 잡은 때였다. 野心만 있으면 國會議員職에 挑戰하기 수월한 條件이었다”고 풀이했다. 

    C 辯護士는 14期가 가진 ‘負債感’을 原因으로 꼽았다. 그는 “14期는 主로 1970年代 末에서 1980年代 初 大學生이었다. 젊은 時節 軍事政權의 暴壓을 겪었는데 젊은 나이에 왜 鬱憤이 없겠느냐”며 “硏修院 時節과 판·檢事로서 社會에 進出했을 때도 時代的 激變을 目睹했다. 1980年代의 激動 속 工夫만 했다는 負債감이 있었다. 同期들이 政界에 投身한 것도 이런 負債감이 한몫했을 것”이라고 풀이했다.


    “同期 ‘뒷談話’ 싫지만…‘법무부 長官’ 秋美愛 0點”

    司法硏修院 14機들은 秋美愛·朱豪英·洪準杓의 政治 行步에 對해서는 말을 아꼈다. “動機를 ‘뒷談話’하는 것처럼 비칠까 함부로 評價하기가 조심스럽다”는 것. 다만 A 辯護士는 “法務長官 秋美愛에 對해선 法曹人으로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며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내가 政治人 秋美愛를 評價하기는 어렵다. 다만 같은 法曹人으로서 法務部 長官 秋美愛를 評하자면 0點이다. 改革은 舊態를 바로잡는 것 아닌가. 檢察總長을 괴롭히는 것이 왜 改革인가. 秋 長官이 다른 사람 말을 들을 사람도 아니지만 한마디 하고 싶다. 政治도 할 만큼 했다. 長官으로서 自身이 하고 싶은 것은 다하지 않았나. 이제 贖罪하는 마음으로 平凡한 市民으로 돌아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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