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日本이 8月 7日에만 降伏했어도 分割 避할 수 있었다|신동아

日本이 8月 7日에만 降伏했어도 分割 避할 수 있었다

김학준이 다시 쓴 現代史 決定的 場面① 韓半島 分斷 75年… 왜, 어떤 過程을 거쳐 分斷됐나

  • 김학준 檀國大 碩座敎授

    .

    入力 2020-08-15 10:00:02

  • 글字크기 설정 닫기
    • 8月 15日로 우리 겨레는 分斷 75周年을 맞이했다. 오늘날 南과 北을 통튼 7600萬 겨레가 겪는 苦痛과 悲劇의 뿌리는 바로 이 分斷이다. 

    • 分斷이 있었기에 離散家族이 發生했고 戰爭이 뒤따랐으며 37個月을 끈 이 戰爭으로 國土는 蹂躪되고 수많은 同胞가 목숨을 잃거나 浮上했고 다시 한 次例 큰 規模의 離散家族이 發生했다. 무엇보다 南과 北 사이에 敵對感이 높아져 오늘날까지도 解消되지 않은 채 對決을 維持하고 있다. 

    • 最近에 와서는 ‘第2의 韓國戰’이 일어날 것 같은 雰圍氣마저 造成되고 있다. 그러면 이 分斷은 都大體 어떤 背景에서 이뤄진 것일까.

    論點1
    韓半島의 地政學的 位置를 내세우는 것은 宿命論으로 非難받아야 할까.

    1919년 3·1운동. [국가기록원 제공]

    1919年 3·1運動. [國家記錄院 提供]

    韓半島의 分斷은 地政學的 位置를 떠나서는 說明하기 어렵다. 새삼 말할 必要 없이, 韓半島는 海洋 勢力과 大陸 勢力 사이에 놓여 있어서 두 勢力의 戰略的 利害가 衝突하는 境遇 어느 한 勢力이 獨占的으로 掌握하거나 두 勢力이 妥協해 分轄함으로써 한 部分만이라도 갖고자 했다. 이러한 意味에서, 게르만 勢力과 슬라브 勢力 사이에 놓여 있어서 두 勢力의 戰略的 利害가 衝突하거나 一致된 境遇 두 勢力에 依해 分割되기도 했고 國家 自體가 消滅하기도 했던 폴란드에 比喩되곤 했다. 

    日帝 植民史學者들은 이 事實에 注目해 半島史觀(半島史觀)을 定立했다. 朝鮮은 半島가 주는 運命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따라서 日帝의 植民地가 됐다고 해도 運命으로 받아들인 채 살아야 한다는 뜻을 明示的이건 默示的이건 주입시킴으로써 朝鮮=韓國人의 氣를 꺾고자 했던 것이다. 實際로 朝鮮=韓國人들 가운데 여기에 기울어졌던 사람들은 우리 民族의 將來를 위해 우리 스스로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는 一種의 民族虛無主義에 빠졌던 것이 事實이다. 

    이 半島史觀에 積極的으로 挑戰한 國內의 代表的 國史學者가 이기백 敎授였다. 그는 半島가 주는 地政學的 制約을 認定하면서도, 우리 民族의 優秀한 頭腦와 進取的 氣像은 우리 民族으로 하여금 반드시 그 制約을 벗어날 뿐만 아니라 뛰어넘어 世界史의 進運을 先導하게 될 것임을 力說했다. 

    光復 以後 大韓民國의 歷史는 그 逆說이 억지가 아니었음을 보여주었다. 第2次 世界大戰이 끝난 뒤 獨立을 얻은 수많은 나라 가운데 民主化와 産業化를 同時에 成就한 나라는 大韓民國 하나뿐이라는 現實이 그것을 雄辯하고 있다. 大韓民國 國民은 허허벌판 위에 世界 10位圈의 經濟大國을 일으켜 세웠으며 “韓國에서 民主主義를 찾는다는 것은 쓰레기 속에서 薔薇꽃을 찾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한 英國 記者의 비웃음을 無色하게 만들 程度로 大韓民國을 ‘民主化의 鞏固化(鞏固化) 段階’로 進入시킨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大韓民國이 折半을 차지한 채 또 다른 折半을 차지한 이른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對峙하고 있는 땅인 韓半島’의 地政學的 性格을 아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오늘날에도 海洋 勢力을 代表하는 美國과 大陸 勢力을 代表하는 中國이 힘을 겨루면서 戰爭으로 치달릴 것 같은 險惡한 姿勢를 取하고 있는데, 萬一 두 强大國 사이에 戰爭이 일어난다면 그 불꽃이 韓半島로 번질 可能性을 排除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緊迫한 國際狀況에서 우리가 어떤 立場을 取하고 어떤 政策을 選擇하느냐에 따라 우리 앞날은 달라지게 된다.



    論點2
    38度線이 우리 歷史에서 最初의 分割線이었을까.

    우리는 흔히 1945年 8月 15日 光復과 더불어 주어진 北緯 38導線에서의 分割이 우리 歷史에서 最初의 分割이었다고 생각한다. 굳이 틀린 생각이라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正確한 事實은 아니다. 우리 歷史에서 最初라고 말할 수 있는 分割은 백제와 高句麗를 次例로 멸망시킨 新羅와 唐나라 聯合軍에 依해 7世紀 末에 이루어졌다. 그들은 韓半島 西쪽의 大同江과 東쪽의 원산만을 잇는 線을 境界로 以北은 唐나라에 歸屬시키고 以南은 新羅에 歸屬시켰던 것이다. 이 線은 大體로 北緯 39度 2分에 該當된다. 

    여기서 우리가 記憶해야 할 것은 列强이 以後 韓半島의 分割을 考慮할 때 自身들이 ‘韓半島의 목(neck of the Korean Peninsula)’이라고 부르는 이 線을 分割線 候補에 包含시킨다는 事實이다. 例컨대, 美國 國務長官을 지낸 헨리 키신저는 自身의 名著들 가운데 하나인 ‘外交’에 “1950年 가을에 유엔軍이 38度線을 넘어 北進을 繼續하던 때 이 線에서 멈출 수도 있었다”고 指摘했다. 이것은 이 線을 境界로 韓半島를 分轄함으로써 戰爭을 멈추게 할 수 있었다는 뜻을 含蓄하고 있다. 

    高麗 後期에도 이 線에 近接한 北緯 38度 5分의 線에서 分割된 일이 있었다. 元宗 10年인 1269年 서북면兵馬使英(西北面兵馬使營)의 機關(記官) 崔坦(崔坦)李 亂을 일으켜 오늘날의 平壤인 書經을 비롯한 北界(北界)의 54個 成果 자비령 以北의 黃海道 6個 城을 奪取한 뒤 원(元)에 歸附하자, 元 世祖 쿠빌라이는 자비령을 境界로 以北을 東寧府라 명명하고 원에 내속시킴과 同時에 崔坦을 東寧府 總管으로 임명한 것이다. 考慮는 그때로부터 21年이 지난 忠烈王 16年인 1290年에 이르러 겨우 이 地域을 돌려받아 分割에서 벗어났다.

    論點3
    왜 戰爭을 전후한 時點에 分割이 論議됐는가.

    朝鮮王朝에 들어와서는 韓半島가 分割된 일이 없었다. 그러나 朝鮮에서 列强이 介入된 戰爭이 豫見되거나 實際로 일어나게 되면 반드시 分割이 擧論됐다. 

    壬辰倭亂 때의 境遇 | 첫째, 壬辰倭亂 때였다. 宣祖 25年인 1592年 4月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命令에 따라 倭軍이 朝鮮을 侵略하자 7月 明나라는 軍隊를 보내 朝鮮을 支援했고 그 結果 1593年 4月 倭軍은 漢陽에서 撤收했다. 大陸國家人 中國은 朝鮮이 海洋國家 日本에 依해 掌握되는 것을 防止하고자 한 것이다. 

    大體로 이때부터 明과 왜 사이에 平和交涉이 開始됐는데, 6月에 이르러 도요토미는 7個項 條件을 提示하는 가운데 朝鮮의 景氣·輕傷·全羅·忠淸 4度를 自身에게 割讓하고 나머지를 朝鮮이나 名이 統治해도 좋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明나라 朝廷에서는 웨이쉐썽(魏學僧)을 中心으로 이 提議에 暫時 關心을 보였다. 그러나 最終的으로 이 要求를 拒否한 데 이어 李舜臣 將軍이 勝戰을 거듭한 朝鮮과 함께 倭를 敗退시킴으로써 分割은 豫防될 수 있었다. 

    淸日戰爭 直前의 境遇 | 둘째, 그때로부터 約 300年 지난 淸日戰爭 直前이었다. 朝鮮을 둘러싸고 淸나라와 日本 사이에 戰雲이 짙어가던 1894年 7月 22日 英國 外務長官 킴벌리 卿은 朝鮮의 北쪽을 請이 占領하고 朝鮮의 南쪽을 日本이 占領하는 條件 아래 두 나라가 戰爭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자는 構想을 두 나라에 提示했다. 그는 占領의 線을 提示하지는 않았으나 萬一 두 나라가 그 提議를 받아들였다면, 그 線은 大體로 北緯 38導線이었거나 거기에 近接했을 것이다. 

    청은 萬一 自身의 占領地에 朝鮮의 首都 漢陽이 包含된다면 그 提議에 應하겠다고 對答했다. 그러나 日本은 勝戰을 確信하고 있었기에 그 提議를 물리쳤다. 이 모든 過程에서 朝鮮 朝廷은 完全히 排除돼 그러한 論議가 進行되고 있다는 事實조차 몰랐다. 

    여기서 우리는 왜 英國이 仲裁案을 내놓았는지를 생각해 보게 된다. 海洋國家인 英國은 같은 海洋國家인 日本을 支援하고 있었다. 그런데 英國이 보기에 淸日戰爭이 일어나면 日本이 반드시 勝利하리라고 確信할 수 없었다. 그래서 日本이 于先 折半이라도 차지할 수 있게끔 分割案을 提示했던 것이다. 

    俄館播遷의 時期 : 38度線이 最初로 提示되다 | 셋째, 俄館播遷 時期와 還宮 以後의 時期였다. 淸日戰爭에서 日本이 勝利해 朝鮮에 對한 影響力을 더욱 크게 確保하게 되자, 朝鮮 朝廷은 大陸 勢力인 러시아(그때의 呼稱으로는 俄羅斯)의 힘을 끌어들여 海洋 勢力인 日本의 影響力을 牽制하고자 했다. 이러한 人痾擧逸(引俄拒日) 政策의 先鋒에 閔妃가 있었다. 日本의 對應은 野蠻的인 閔妃 弑害였다. 놀란 高宗은 1896年 2月 調整을 서울 駐在 러시아公使館으로 옮겨 거기서 親러內閣을 維持했다. 

    唐慌한 日本은 1896年 5月 26日 모스크바의 우스펜스키 大社員에서 擧行된 러시아 皇帝 니콜라이 2世의 戴冠式에 國王의 特赦로 陸軍怨讐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派遣하고 그를 통해 6月 9日 러시아 外務長官 알렉세이 로바노프에게 朝鮮의 分割을 提議하게 했다. 38度線 以北의 朝鮮을 러시아의 影響圈 아래 두고 以南의 朝鮮을 日本의 影響圈 아래 두도록 合意하자는 趣旨였다. 38度線이 分割線으로 提示된 最初의 境遇였다. 

    로바노프 外務長官은 이 提議를 拒絶했다. 그때 러시아는 慶尙南道의 마산포(馬山浦·러시아語 表記로는 Mozampo)를 비롯한 南海岸의 不凍港들에 關心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朝鮮의 國王과 政府가 自國의 公使館에 들어와 있었기 때문에 日本의 提議를 받아들이지 않아도 自國에 決코 不利하지 않다고 計算했던 것이다. 

    러시아 皇帝의 戴冠式에는 朝鮮에서도 宮內府特進官 兼 全權特命公使 閔泳煥을 團長으로 하고 尹致昊를 團員으로 하는 使節團이 參席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흥정을 全혀 把握하지 못했다. 

    俄館播遷 淸算 直後의 時期 | 그때로부터 다시 2年이 지나서 高宗은 러시아公使館 生活을 淸算하고 慶運宮으로 돌아온 以後, 朝鮮을 大韓帝國으로 格上시키면서 改革을 推進하기 始作했다. 이러한 狀況에서, 朝鮮에 對한 러시아의 影響力은 줄어들었으며 日本의 影響力은 커졌다. 

    새로운 轉換을 目擊하면서, 1898年 朝鮮 駐在 러시아公使 알렉세이 드 스페이에는 朝鮮 駐在 日本公使에게 平壤을 包含하는 朝鮮의 北部를 러시아가 차지하고 漢陽을 包含하는 朝鮮의 南部를 日本이 차지할 것을 提議했다. 그러나 러시아와의 決戰을 準備하고 있던 日本은 拒絶했다. 

    러일戰爭 直前의 境遇 : 39度線이 最初로 提示되다 |
    넷째, 러일戰爭 直前이었다. 그사이 日本이 軍事力을 增强시킨 데 이어 1902年 1月 英國과 同盟을 맺고 러시아를 相對로 戰爭도 辭讓하지 않을 態勢를 보이자 러시아는 朝鮮을 分割해 日本을 撫摩시키고자 했다. 1903年 10月 3日, 駐日 러시아公使 로만 로마노비치 로젠 男爵을 통해 日本 政府를 相對로 (1)39度線 以北의 朝鮮을 두 나라 가운데 어느 나라도 軍隊를 보내지 않는 中立地域으로 만들고 (2)그 以南의 朝鮮에 對한 日本의 ‘특별한 利益’을 러시아는 保障한다는 안을 提議했다. 分割線으로서 39度線이 提議된 最初의 事例다. 

    이 提議에 對해, 日本은 恨만(韓滿) 國境을 境界로 삼아 兩쪽에 各各 50㎞의 中立地帶를 設置할 것을 提議했다. 이것은 朝鮮에 對한 러시아의 影響力을 完全히 排除하겠다는 日本 政府의 뜻을 담고 있었다. 러시아는 이 提議를 拒否했다. 이에 日本은 1904年 2月 10日 러시아를 相對로 선전포고했으며, 그 이듬해 러시아를 完全히 굴복시켰다. 

    여기서 다시 想起하고자 하는 事實은 같은 海洋國家인 英國의 積極的인 日本 支援이다. 大陸國家 러시아를 牽制하기 위해 英國은 러시아軍隊가 英國의 影響 아래 있는 수에즈運河를 通過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러시아軍隊는 아프리카大陸을 돌아 印度洋으로 빠져나오는, 길고 지루한 旅路를 航海했다. 이미 그 過程에서 러시아軍은 士氣가 떨어졌으며 막상 決戰場 東海에 當到하면서 禮記(銳氣)가 하늘을 찌를 것 같은 日本軍에게 一敗塗地(一敗塗地)하고 말았다. 

    이제 元來의 質問으로 돌아가기로 하자. 왜 韓半島를 둘러싸고 戰爭이 臨迫한 時點 또는 戰爭이 일어난 時點에 分割이 擧論됐는가. 海洋 勢力이나 大陸 勢力은 韓半島를 어느 한쪽이 獨占的으로 支配하는 것보다는 自身도 參與해 分轄함으로써 折半이라도 確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計算했기 때문이다. 

    淸나라를 패배시킨 데 이어 ‘强大國’ 러시아마저 굴복시킨 ‘新興國’ 日本의 完勝 앞에서, 韓半島를 獨占 支配하려는 日本의 野心을 抑制할 나라는 어디에도 없게 됐다. 그렇지 않아도 같은 海洋國家로서 日本을 支援해 온 美國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大統領은 곧바로 日本과 러시아의 代表를 美國 뉴햄프셔주의 軍港 포츠머스로 招請해 日本의 獨占的 朝鮮 支配를 뒷받침하는 條約을 성립시켰다. 英國은 이 條約을 支持했다. 여기에 힘입어 日本은 곧 朝鮮을 ‘保護國’으로 만들었으며 그때로부터 5年이 채 되지 않은 1910年 8月 朝鮮을 完全히 竝呑했다.

    論點4
    코리아에 對한 信託統治 構想에서 韓半島 分割의 起源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이승만. [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제공]

    大韓民國 臨時政府 初代 大統領 李承晩. [李承晩建國大統領記念事業會 提供]

    日帝가 韓半島를 竝呑한 뒤 國際社會는 그것을 旣定事實로 받아들였다. 어느 한 나라도 國權을 빼앗긴 朝鮮에 對해 弔意를 표하지 않았고 日帝의 暴擧에 對해 抗議하지도 않았다. 이제, 美國에서 李承晩의 抗日獨立運動을 도왔던 로버트 올리버 敎授의 表現으로, 코리아는 ‘잊힌 나라’가 됐다. 

    이처럼 매우 不利한 國際 與件 속에서도, 朝鮮=韓國人이 獨立을 要求하며 抗日運動에 나섰다는 것은 當然하면서도 놀라운 일이다. 3·1運動과 大韓民國臨時政府 樹立 그리고 韓國光復軍 創軍 等은 朝鮮=韓國人의 獨立 熱望과 鬪志를 反映했다. 그렇지만 國際社會는 如前히 無關心하거나 冷淡했다. 甚至於 스탈린의 蘇聯은 蘇聯 領土 안에서 活動하던 우리 獨立運動家들의 相當數를 追放하거나 迫害하기도 했다. 

    日本의 朝鮮=韓國에 對한 獨占 支配는 오래갈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日本의 決定的 敗着이 始作됐다. 美國과 英國 等 海洋國家들의 支援을 받아 朝鮮=韓國을 獨占 支配할 수 있었던 日本은 1941年 軍國主義者들의 잘못된 發想과 判斷으로 오히려 海洋國家들을 敵으로 돌리고 히틀러의 나치獨逸과 무솔리니의 파시스트이탈리아와 손을 잡은 데 이어 그들과 함께 ‘樞軸國’ 同盟을 形成한 채 太平洋戰爭을 일으킨 것이다. 

    當時 美國에서 獨立運動을 이끌던 李承晩이 自身의 名著 ‘日本 내막기’에서 豫見한 그대로였다. 이로써 日本은 나치獨逸과 파시스트이탈리아를 共同의 敵으로 삼은 美國·英國·蘇聯·프랑스·中華民國 中心의 聯合國과 戰爭關係에 들어가게 됐다. 

    이렇게 戰爭이 擴大되면서 聯合國 사이에서 一連의 會談이 열리게 됐고, 그 會談 가운데 몇몇 會談은 朝鮮=韓國의 將來를 다루거나 거기에 影響을 주기에 이르렀다. 이 會談들이 우리에게 익숙한 워싱턴에서의 美·英 外務長官會談(1943年 3月), 美·英·中 頂上 사이의 카이로會談(1943年 11月), 美·英·蘇 頂上 사이의 테헤란會談(1943年 11月), 美·英·蘇 頂上 사이의 얄타會談(1945年 2月), 美·英·蘇 頂上 사이의 포츠담會談(1945年 7~8月) 等이다. 

    이 會談들을 하나하나 個別的으로 分析하기에 앞서 꼭 指摘해야 할 事實이 두 가지가 있다. 첫째, 美國은 日帝가 敗亡한 以後 코리아에 卽刻的이면서 完璧한 獨立을 주기보다는 일정한 期間에 걸쳐 코리아에 관계된 國家들이 共同으로 參與하는 信託統治의 實施를 考慮했다는 事實이다. 카이로會談에서 ‘適當한 節次를 밟아(in due course)’라는 曖昧模糊한 句節로 처음 國際會談의 合意文書에 登場한 이 構想에 對해 서로 對立되는 分析이 提示돼 왔다. 이 構想이 結果的으로 蘇聯과 韓半島 分割에 參與하는 結果를 가져오게 되고, 日帝가 敗亡한 以後에도 蘇聯이 韓半島 問題에 介入하는 根據를 마련했다는 主張, 反面에 그 構想을 朝鮮=韓國人이 받아들였더라면 信託統治가 끝난 뒤 分割이 아니라 完全한 統一을 보게 됐을 것이라는 主張이 그것이다.

    論點5
    蘇聯을 極東展에 끌어들이려고 한 聯合國의 政策에서 韓半島 分割의 起源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둘째, 一連의 戰時 聯合國會談에서 特히 1943年 10月 以後, 日本을 相對로 하는 戰爭 이른바 極東展에 蘇聯이 參加하도록 美國이 끈질기게 要求한 事實이다. 日本과의 戰爭을 事實上 혼자 遂行하던 美國은 蘇聯이 同參해 준다면 負擔이 크게 줄어들고 또 戰爭을 빨리 끝낼 수 있을 것으로 期待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럽에서 獨逸과의 戰爭을 事實上 혼자 遂行하던 蘇聯으로서는 兵力을 東北아시아로 分散하기 어려웠다. 

    이 問題는 于先 테헤란會談에서 縫合됐다. 美國과 英國이 1944年 5月 1日 유럽에 進攻해 이른바 第2의 戰線을 形成함으로써 蘇聯을 도울 것이라고 約束하고, 蘇聯은 ‘獨逸이 完全히 敗亡한 뒤’ 對日戰에 參戰할 수 있을 것임을 約束한 것이다. 

    이 約束은 1944年 10月 모스크바에서 열린 처칠과 스탈린 사이의 會談, 처칠-스탈린 會談에 蘇聯 駐在 美國大使 해리먼과 住所(駐蘇)美國軍事使節團長 존 딘 所長이 合席한 會談, 美國과 蘇聯 사이의 高位 軍事會談 等에서 더 具體化됐다. 이 一連의 會談에서, 스탈린은 蘇聯이 極東의 日本軍을 擊破하기 위한 計劃을 說明하는 가운데 ‘코리아의 北邊(北邊)에 位置한 港口들’을 蘇聯의 陸軍과 海軍이 占領해야 한다고 提議했고, 美國과 蘇聯은 ‘默認’했다. 이로써 咸鏡北道의 港口들인 雄基·羅津·淸津 等에 對한 蘇聯軍의 作戰에 關해, 비록 默示的이지만, 美國-英國과 蘇聯 사이에 合意가 成立됐다. 

    이 默示的 合意는 韓半島의 將來와 關聯해 重要한 意味를 가졌다. 우리가 앞으로 다시 살피게 되듯, 蘇聯軍의 韓半島 進入에 合意함으로써 結局 韓半島가 美國과 蘇聯에 依해 分割되는 端初를 열어놓은 것이다.

    論點6
    韓半島의 分割은 얄타會談에서 密約된 것인가.

    그 合意로부터 4個月 뒤인 1945年 2月 蘇聯의 얄타에서 美國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大統領, 蘇聯의 스탈린 總理, 英國의 처칠 總理 等이 參席한 聯合國 頂上會談이 열렸다. 얄타는 當時 蘇聯을 構成하던 15個 共和國 가운데 하나인 우크라이나共和國의 크림半島에 位置한 休養港口로, 蘇聯이 解體되면서 우크라이나共和國도 獨立하자 自然히 우크라이나에 歸屬됐다. 그러나 2014年에 러시아의 푸틴 大統領이 크림半島를 되찾아오면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러시아 所屬으로 굳어졌다. 

    한때 우리나라에서는 韓半島의 分割이 이 얄타會談에서 밀약됐다는 所聞이 定說로 받아들여졌다. 너무나 부자연스러운 曺國의 分割을 到底히 現實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韓人들은, 그 分割에는 自身들을 數千 年 동안 이러저러한 形態로 괴롭히거나 逼迫했던 周邊 强大國들의 ‘弄奸’李 介入됐을 것으로 確信했던 것이다.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前 大韓民國臨時政府 大統領이면서 ‘프린스턴대학교 政治學 博士’ 李承晩이 얄타會談 直後 ‘얄타密約說’을 提起하자 많은 사람이 쉽게 믿은 것이다. 李承晩이 大韓民國 大統領으로 選出되자 그의 見解는 定說로 굳어져 李承晩 政府 時代에는 敎科書에 그렇게 斷定的으로 쓰였다. 

    그러나 ‘얄타密約說’은 全혀 事實이 아니다. 이 會談에 關聯된 모든 文書가 公開된 뒤 살펴본 結果 어느 쪽도 韓半島 分割을 提起한 일이 없었으며, 韓半島와 關聯해 ‘分割’ 또는 ‘38度線’이라는 單語 自體가 登場한 境遇가 아예 없었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얄타會談이 韓半島의 分轄에 對해 無關하다는 것은 아니다. 이 會談에서 스탈린은 루스벨트의 提議를 받아들여 美國이 많은 代價를 支拂해야 한다는 前提 아래 “獨逸이 降伏한 때로부터 3個月 以內에 極東展에 參加한다”라고 公式 約束했다. 實際로 蘇聯은 그 3個月이 꼭 채워진 1945年 8月 8日 日本을 相對로 宣戰布告를 하고 對日戰에 參加하면서 코리아의 北邊 港口에 進入하기 始作한다.

    論點7
    트루먼 行政府의 出帆은 韓半島의 運命에 어떤 影響을 미쳤는가.

    그런데 얄타에서 또 하나의 重要한 諒解가 이뤄졌다. 루스벨트와 스탈린은 어느 한 나라에 依한 코리아의 軍事占領에 反對한다는 데 뜻을 같이함으로써 코리아에 對한 ‘共同占領’에 原則的으로 合意한 것이다. 그러나 그 具體的 方法과 內容을 끌어내지 못함으로써 韓半島의 將來를 如前히 曖昧模糊한 狀態로 남겨놓았다. 

    그때로부터 約 2個月이 지난 1945年 4月 12日 루스벨트가 病死했다. 自然히 副統領 트루먼이 곧바로 大統領으로 就任했다. 

    이렇게 트루먼 行政府가 出帆하면서 執行한 外交政策의 性格과 方向에 對해서는 오늘날까지 學界에서 討論이 進行되는데, 그 核心 論點은 2次大戰의 終結을 전후한 時點 以後 展開된 東西冷戰이 트루먼의 大統領職 繼承으로 始作됐다는 主張에 連結됐다. 

    그 代表的 論者가 美國의 國際政治學者 마크 갈리치誤 博士다. ‘冷戰은 아시아에서 始作됐다’는 冊을 쓴 그는 徹底한 反共主義者이면서 反訴主義者人 트루먼이 大統領이 되면서, 共産主義나 蘇聯에 對해 ‘理解하는’ 立場을 取함과 同時에 ‘宥和政策’을 편 前任者와는 달리, 蘇聯과 한 旣存 約束을 잘못된 것으로 생각하고 그 約束을 可能하면 지키지 않는 쪽으로 이끌었다고 主張한 것이다. 여기에 對한 反論이 뒤따른 것이 事實이지만, 트루먼 就任 以後 美國이 蘇聯에 對해 强勁한 政策을 쓰기 始作한 것은 事實이다. 그렇게 된 要因으로 적어도 다음 세 가지를 指摘할 수 있다. 

    첫째, 當時의 유럽 情勢였다. 蘇聯은 東유럽을 席卷하고 있었으며 特히 폴란드는 徹底히 蘇聯의 衛星國家로 자리를 잡은 것처럼 보였다. 이것은 스탈린이 얄타에서의 約束을 깨뜨리고 東유럽에서 領土的 膨脹政策을 追求하는 것으로 비쳤다. 또 蘇聯이 유럽에서 占領한 地域들에서 보여주는 人間基本權 侵害와 蹂躪은 트루먼의 反訴反共主義的 信念을 强化시켰다. 

    둘째, 英國 總理 처칠의 거듭된 警告였다. 그는 폴란드의 狀況은 東유럽을 蘇聯의 支配權 아래 두려는 스탈린의 政策을 그대로 證明하고 있다고 主張하면서 聯合國이 果然 얄타協定을 遵守해야 할 것인지 懷疑를 表示했다. 그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얄타協定의 修正을 要求하는 이른바 얄타修正主義를 이끌었다. 

    셋째, 美國 國內에서 그리고 行政府에서 對蘇(對蘇)强勁論이 優勢해졌다는 事實이다. 그들은 蘇聯의 行態에 미뤄, 東北아시아를 蘇聯의 支配權 아래 두려고 試圖할 危險性이 크다고 警告했다. 따라서 그들은 美國이 이제라도 얄타協定의 틀에서 벗어나 蘇聯의 對日戰 參加를 막아야 한다고 主張하기에 이르렀다. 이른바 얄타修正主義가 擡頭한 것이다. 

    트루먼의 大統領職 繼承 直後 大田은 終末을 向해 빠르게 進展됐다. 5月 8日 獨逸은 聯合國에 無條件 降伏했다. 나치獨逸의 同伴者였던 이탈리아는 1943年 7月 일어난 쿠데타로 무솔리니를 權座에서 追放한 데 이어 聯合國에 降伏했다. 이렇게 유럽에서 大田이 이탈리아와 獨逸의 敗亡으로 매듭지어진 狀況에서, 美軍은 6月 30日 오키나와 全體에 對한 占領을 完了했으며 日本 本土로의 眞空에 들어갔는데, 이로써 樞軸國들 가운데서 마지막 生存者인 日本의 敗亡은 눈앞에 다가온 것처럼 보였다. 이제 聯合國의, 特히 美國의 關心은 日本의 將來, 그리고 附隨的으로 日本의 植民地인 코리아에 對해서도 移轉 時期에 비해 훨씬 더 많이 쏠리게 됐다. 

    코리아에 對한 關心의 核心은 軍事作戰이었다. 이 問題와 關聯해 蘇聯의 對日戰 參加 問題가 다시 뜨겁게 討論됐다. 當時 戰況에 미뤄 蘇聯軍의 參戰이 不可避하다는 意見, 對照的으로 蘇聯軍의 參戰은 結局 코리아를 包含한 東北아시아를 蘇聯의 影響圈으로 편입시키게 될 것이므로 막아야 한다는 意見이 맞섰다. 그러나 大勢는 蘇聯軍 參戰, 蘇聯軍의 韓半島 進入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다만 例外的으로 美國 戰爭部(오늘날의 國防部) 傘下의 合同參謀本部에 所屬된 合同戰爭計劃委員會는 1945年 6月 28日에 作成한 計劃案에서 美國의 韓半島 單獨占領案을 採擇했다. 이완범 敎授가 指摘했듯, 美國은 蘇聯의 韓半島 北部에 對한 關心을 알면서도 코리아 全體를 自身의 勢力圈 안으로 편입시킨다는 方向으로 暫定的 結論을 내린 것이다. 萬一 美國이 이 案을 끝까지 貫徹할 수 있었다면, 韓半島의 分割은 回避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되듯 美國은 이 안을 버리고 蘇聯軍과의 共同點令案을 採擇한다.

    論點8
    蘇聯은 코리아에 對해 어떤 計劃을 準備하고 있었나.

    비록 廢棄되지만 美國의 合同戰爭計劃委員會가 美國의 韓半島 單獨占領案을 採擇한 그 時點에 蘇聯은 코리아와 關聯해 적어도 두 가지 計劃안을 마련했다. 첫째, 6月 28日 스탈린은 蘇聯軍이 咸鏡北道의 羅津·淸津·隆起 세 港口를 占領한다는 元來의 計劃을 公式的으로 裁可했다. 둘째, 그다음 날에 蘇聯 外務部 極東制2國은 코리아가 앞으로 蘇聯에 對한 攻擊의 발板이 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코리아에 ‘蘇聯과 코리아 사이에 友好的이고 緊密한 關係를 維持할 政府’를 세우도록 해야 한다는 建議案을 만든 것이다. 이 建議案은 “코리아에 對해 聯合國이 信託統治를 實施하게 되면 蘇聯은 두드러진 役割을 遂行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스탈린이 再嫁했을 것으로 推定되는 이 建議案은 무엇을 뜻하는가. 蘇聯은 日帝가 敗亡한 以後의 코리아에 對해 自身의 影響力을 行使할 수 있는 與件을 造成해 놓아야 한다는 意志를 分明히 밝힌 것이다. 이제 코리아에서 蘇聯이 自國의 利益을 놓고 美國과 競爭하거나 對立하게 될 可能性은 높아졌다.

    論點9
    韓半島의 分割은 포츠담會談에서 密約된 것인가.

    以上에서 살폈듯, 코리아의 將來에 對한 論議가 活潑해지기 始作한 흐름 속에서 1945年 7月 17日 敗戰國 獨逸의 首都 베를린 近郊의 포츠담에서 戰時聯合國會談으로서는 마지막인 會談이 트루먼 美國 大統領과 스탈린 蘇聯 總理 및 처칠 英國 總理 사이에 열렸다. 이 會談이 進行되던 때 英國에서 實施된 總選擧에서 豫想을 깨고 勞動黨이 勝利함에 따라 7月 26日에 總理가 된 勞動黨 黨首 애틀리가 7月 28日부터 英國代表團을 이끌었고 敗北한 保守黨 黨首 처칠은 歸國했다. 

    한때 다른 나라에서도 그러했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이 會談에서 韓半島의 分割이 밀약됐다는 主張이 提起됐다. 얄타에서 決定된 것이 아님이 밝혀지자 그렇다면 포츠담에서 決定된 것이 아니었겠느냐는 推測에서 出發한 主張이다. 그러나 이 會談의 記錄이 事實上 모두 公開됨에 따라 그것 亦是 事實이 아님이 밝혀졌다. 다시 말하지만, 코리아에 關해 ‘分割’이라든지 ‘38度線’이라는 單語는 全혀 登場하지 않았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想起해야 할 點은 이때의 美國 大統領 트루먼이 前任者와는 달리, 共産主義 그 自體와 蘇聯에 對해 徹底히 不信하고 있었다는 事實이다. 그는 共産主義와 蘇聯은 ‘生來的인 惡(惡)의 存在’이면서 ‘속임數의 代價’인 만큼 처음부터 協商을 통해 共同의 目標를 達成할 수 있다는 見解는 非現實的이라는 信念을 지니고 있었다. 特히 會談이 열린 時點에 美國은 原子爆彈 實驗에 成功했기에 훨씬 더 큰 自信感으로 蘇聯을 相對할 수 있었다. 그래서 韓半島를 蘇聯과 나눠 갖겠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갖지 않았다. 

    오히려 트루먼은 ‘獨逸이 降伏한 때로부터 3個月 以內’에 對日戰에 參加한다는 스탈린의 얄타에서의 約束을 撤回시키거나 無效化시키고 싶은 希望을 가졌다. 바꿔 말해, 蘇聯의 參戰 없이 美國 單獨의 軍事力으로 日本의 降伏을 받아내기를 바란 것이다. 그래서 트루먼은 그 속셈은 감춘 채 스탈린에게 蘇聯이 對日戰에 參加할 뜻을 如前히 갖고 있는지 물었다. 스탈린은 參戰의 뜻을 分明히 밝혔다. 그러나 스탈린은 蘇聯의 參戰이 8月 15日 以前에는 不可能하다는 趣旨를 덧붙였다. 

    여기서 트루먼은 8月 初旬 日本에 原爆을 投下하면 蘇聯의 參戰 없이도 日本의 降伏을 받아낼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日本은 勿論이고 코리아와 滿洲도 美國 單獨으로 占領할 수 있다고 믿게 됐다. 그래서 트루먼은 7月 27日 于先 처칠과 共同으로 日本에 對해 無條件 降伏을 要求하는 포츠담宣言을 發表했다. 스탈린은 이 時點에서는 蘇聯이 日本과 中立·不可侵條約을 維持하고 있다는 事實을 考慮해 이 宣言에 同參하지 않았다. 그는 8月 8日 日本에 對해 선전포고하면서 비로소 이 宣言에 同參한다. 

    위에서 살폈듯, 포츠담 頂上會談에서는 코리아의 分割이 全혀 擧論되지도, 合意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트루먼을 遂行한 美國 軍事代表團과 스탈린을 遂行한 蘇聯軍事代表團 사이에서는 코리아에 다한 共同占領計劃이 原則的인 水準에서 論議됐고, 代替로 코리아의 北쪽은 蘇聯軍이 占領하고 南쪽은 美國이 占領한다는 데 諒解가 成立됐다. 美國 軍事代表團 안에서는 美軍이 占領하는 地域은 ‘38度線에 가까운 선’ 以南이 될 것이라는 意見이 提示됐다. 그러나 美國 軍事代表團이 이 意見을 蘇聯 軍事代表團과 나누지는 않았다. 

    여기서 記憶해야 할 대목이 하나 있다. 美國 軍事代表團 사이에서 ‘38度線에 가까운 선’을 境界로 美軍과 蘇聯軍이 各各 分割 占領한다는 이 意見이 提示된 자리에 合同參謀本部의 戰略·政策團長 조지 링컨 准將이 參席하고 있었다는 事實이다. 우리가 앞으로 보듯, 그는 美國 政府가 8月 12日, 蘇聯을 相對로 38導線에서의 分割을 提議하기로 決定하는 會議에 參席한다.

    論點10
    日本은 왜 降伏을 遲延시키고 있었는가.

    美國과 蘇聯이 코리아로의 眞空을 위한 軍事作戰을 論議할 程度로 戰況은 日本에 決定的으로 不利하게 展開되고 있었고, 무엇보다 美國과 英國은 共同으로 日本에 降伏을 要求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日本은 왜 降伏하지 않고 있었나. 

    이 重要한 時點에 日本은 蘇聯과 美國을 相對로 從前과 平和를 위한 이른바 和平工作을 祕密裏에 推進하고 있었다. 蘇聯은 日本의 交涉에 冷淡했다. 스탈린은 日本과의 戰爭에 들어가 勝戰國의 一員이 될 때 얻을 利益이 훨씬 클 것으로 豫想했다. 美國은 暫時 日本 提議에 應함으로써 엄청난 死傷者가 發生할 수 있는 日本 本土에서의 作戰을 避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原爆을 쓰는 것이 낫겠다는 判斷으로 기울어졌다. 

    여기서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대목이 있다. 그것은 트루먼 大統領의 委囑을 받아 후버 前 공화당 大統領이 이끈 諮問委員團의 建議였다. 그들은 코리아와 臺灣을 日本이 그대로 統治한다는 條件을 提示하면 日本이 從前에 合意할 것이라는 方案을 建議한 것이다. 트루먼은 이 建議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 建議는 美國이 境遇에 따라서는 코리아를 버릴 수 있음을 말해 주었다.

    論點11
    무엇이 日本의 降伏을 이끌어냈을까.

    트루먼 大統領의 決定에 따라, 美軍은 日本 現地時刻으로 1945年 8月 6日 아침 히로시마에 原子爆彈을 投下했다. 그런데도 日本이 降伏 意思를 表示하지 않자 美軍은 現地時間으로 8月 9日 午前 나가사키에 두 番째 原爆을 投下했다. 그때로부터 꼭 12時間이 지난 時點에 蘇聯은 日本을 相對로 한 戰爭에 들어갔다. 더는 버티기 어려워졌다고 判斷한 日本은 8月 15日 降伏을 宣言했다. 

    그러면 무엇이 日本의 降伏을 이끌어냈을까. 이 重要한 물음에 對해, 美國 政府는 當然히 美軍의 原爆 投下를 내세웠고, 蘇聯 政府는 蘇聯軍의 參戰을 내세웠다. 學界의 意見도 兩分돼 있다. 그러나 그때 外務大臣 도고 시게노리(東鄕茂德)가 美國이 히로시마에 原爆을 投下한 때로부터 이틀 뒤이면서 蘇聯이 宣戰布告를 하기 直前의 時點에 國王에게 原爆 投下에 關한 狀況을 報告하면서 이를 轉機로 삼아 戰爭 終結을 決心하도록 建議했으며, 國王이 이 建議를 받아들인 事實을 重視하는 境遇, 原爆 投下가 降伏을 이끌어냈다고 解釋해도 無理가 아닐 것이다.

    論點12
    日本의 늦어진 降伏이 코리아의 分割을 가져왔다.

    여기서 우리가 매우 遺憾스럽게 생각하는 事實에 着眼하게 된다. 그것은 日本이 平和工作에 매달려 降伏을 늦췄기에 自國 國民에게 엄청난 損害를 끼쳤을 뿐만 아니라 韓半島의 分割을 가져왔다는 事實이다. 트루먼 大統領이 한때 期待했던 대로 日本이 적어도 8~9日 前에만 降伏했어도 蘇聯軍의 韓半島 進入을 막을 수 있었고, 그렇게 됐으면 韓半島의 分割은 回避될 수 있었다. 이렇게 볼 때, 日帝는 敗亡하면서도 우리 民族에게 또 한 次例의 엄청난 損害를 끼쳤다는 非難을 받을 만하다.

    論點13
    마침내 38導線에서의 分割 : 分割線을 더 올릴 수 없었을까.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조인식. [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 제공]

    1953年 7月 27日 停戰協定 調印式. [美國國立文書記錄管理廳 提供]

    日本의 降伏이 臨迫했음을 確認한 美國 戰爭部는 8月 10日 저녁 韓半島에서 美軍과 蘇聯이 各各 占領할 地域을 確定 지을 線을 마련했다. 具體的으로, 戰爭部 次官補 존 매클로이의 指示를 받아 딘 러스크 陸軍 大領과 찰스 本스틸 陸軍 大領은 함께 그 線으로 38度線을 提示했다. 이미 蘇聯軍이 北緯 41度線까지 進攻해 온 現實을 考慮해, 적어도 首都 서울 그리고 第1項 釜山과 第2項 仁川을 美軍의 占領地域 안에 包含시키는 것으로 滿足할 수밖에 없다는 判斷에서 38度線을 採擇한 것이다. 이 決定을 매클로이 次官補는 그대로 받아들였는데, 그의 指示로부터 受諾까지 約 30分이 所要됐다. 

    매클로이는 38度線 案을 國務部·戰爭部·海軍部 調停委員會에 올렸으며, 이 委員會는 8月 12日 이 建議를 檢討했다. 이 자리에 우리가 앞에서 살폈던 존 링컨 准將이 參席해 積極的으로 支持했다. 이에 따라 이 委員會는 이 案을 8月 14日 트루먼에게 報告했으며, 트루먼은 이튿날 스탈린에게 ‘通告’했다. 스탈린은 卽時 그대로 받아들였으며, 이로써 38導線에서의 分割이 決定됐다. 

    여기서 우리는 分割에 서글픔을 느끼면서도 分割線의 上向 調整을 擧論한 가드너 海軍 少將의 意見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는 調整委員會議 討論 때 39度線을 提議했지만 링컨의 强力한 反論에 부딪혀 貫徹하지 못했다. 

    美國人 宣敎師로 韓半島의 地理를 깊이 硏究한 섀넌 매큔 敎授에 따르면, 38導線에서의 分割 結果로, 12個의 江과 75個 以上의 샛江이 잘렸고, 수많은 산이 갈렸으며, 181個의 작은 牛馬車길, 104個의 地方道路, 15個의 幹線道路, 6個의 鐵路가 切斷됐다. 이 分割線은 1953年 7月 27日 成立된 朝鮮=韓國停戰協定의 結果 休戰線으로 바뀌었고, 오늘날까지 持續되고 있다.



    댓글 0
    닫기

    매거진東亞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推薦記事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Copyright ⓒ 2020 By '전통문화연구회(傳統文化硏究會)' All Rights reserved.
     한국   대만   중국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