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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려오는 改造의 물결 피어오르는 自覺의 불길|新東亞

밀려오는 改造의 물결 피어오르는 自覺의 불길

1920年代 서울

  • 박윤석│unomonoo@gmail.com

    入力 2012-01-19 12: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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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只今까지 이야기
    • 鏡城의 新聞社에서 10年째 일하는 記者 한림은 1929年 12月 歲밑에 옛 參政大臣 한규설을 訪問하여 25年 前 乙巳條約 當時의 事情을 聽取한다. 그 집에 이르는 청계천邊을 따라 朝鮮 5百年間 쌓여온 時間의 堆積層이 한림의 머리에 聯想된다. 되돌아 나오는 南村의 황금정 가로는 倂合後 20年 동안 進行된 近代化의 얼굴을 보여준다. 失望과 不安과 一抹의 期待 속에 맞이했던 1920年代는 1910年代와는 分明 달랐다. 이番號에서 한림의 마음은 10年 前으로 되돌아간다. 10年 空白을 깨고 朝鮮人의 言論이 制限的 自由를 되찾은 1920年 서울의 봄으로.
    (第6張)

    밀려오는 개조의 물결 피어오르는 자각의 불길

    朝鮮時代 大軍과 公主의 집으로 쓰인 安東別宮 建物 一部.

    1920年 3月 31日. 봄비를 맞으면서 한림은 야트막한 비탈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南으로 안국동(安國洞) 四거리를 向해 뻗어 내린 길은 곧고 길다. 이틀 連續 내린 비에 氣溫은 떨어졌다. 화동(花洞)의 기와집 낮은 담牆 밖으로 벗어나온 木蓮 가지 하나가 찬비에 흔들린다. 꽃을 부르는 碑라고 하기에는 어쩐지 궂은 날씨다. 날로 다사로워가는 봄볕을 따라 곧이라도 터질 듯 방긋대던 새끼손가락 끝마디만한 꽃봉오리는 놀라 움츠러든 表情이다. 가늘지만 꾸준히 내리는 비는 목덜미에 닿는 느낌이 선뜩하다.

    春來不似春(春來不似春). 봄은 왔지만 봄 같지가 않다. 似而非(似而非). 겉으로는 그런 듯하나 實際로는 아니다. 한림은 문득 그런 句節을 떠올리며 安東別宮(安洞別宮) 담牆 곁을 지난다. 두꺼운 돌담이 두 길도 더 되는 높이로 한참을 펼쳐진다. 여기가 어딘가. 只今 昌德宮에 계신 已往(李王) 電荷가 두 次例 嘉禮(嘉禮)를 올린 곳이다. 여덟 살 때 世子嬪을 맞는 慶事스러운 家禮를 위해 高宗과 閔妃는 이 別宮을 마련했다. 全國 處女들의 婚姻이 一時 禁止된 狀態에서 嚴選한 閨秀들로 여기서 세 番의 揀擇 行事가 치러졌고 最終 落點된 閔氏 집안의 閨秀가 여기서 宿食하며 석 달間 神父授業을 받고 宮中禮法을 익혔다. 그리고 여기서 婚禮를 올리고 世子嬪이 되어 入宮하였다.

    이 別宮 터는 일찍이 世宗이 여덟째 아들을 위해 처음 터를 잡고 邸宅을 지은 以來로 代代로 大軍과 公主들의 집이었다. 世宗은 이 집을 짓고 나서 몸져누웠는데, 이 집에서 지내기를 願해 이리로 居處를 옮기고 열흘 만에 昇遐했다고 한다.

    世宗의 子息 사랑 못지않은 熱情을 高宗과 閔妃는 아들에게 쏟았다. 婚姻 다섯 해 만에 어렵게 얻은 첫 原子(元子)를 닷새 만에 잃고 3年 後에 다시 얻은 貴한 元子는 돌을 맞기 무섭게 世子에 冊封되었다. 冊封의 圓滿性史를 위해 淸나라 朝廷에 請願도 넣고 淸國 駐在 日本公使를 통해 支援도 付託했다. 丙子修好條約으로 日本에 開港하기 한 해 前인 1875年이었다. 理解의 설날, 世子 冊封을 앞둔 高宗 內外의 벅찬 기쁨을 담은 高宗의 말이 實錄에 이렇게 적혀 있다.



    올해는 우리 太祖(太祖) 大王이 誕辰하신 지 아홉 番째 回甲이 돌아오는 해이다. 原子가 어느덧 자라 世子 冊封 禮式을 理解에 擧行하게 되니 나라의 根本을 確固히 하고 先代의 偉業을 빛나게 하는 意義가 있다. 自轉(慈殿)께서도 매우 기뻐하면서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朝鮮王朝의 歷代 婚禮 中 가장 華麗하고 盛大했다는 이 家禮式을 거쳐 高宗 內外는 1882年 初, 世子嬪을 맞이했다. 다섯 달 뒤 壬午軍亂이 일어났다. 軍人 兵士들이 暴徒가 되어 宮闕에 亂入해 王妃를 잡아 죽이겠다고 血眼이 되어 날뛰는 亂離를 避해 閔妃는 宮女로 變裝하고 宮을 빠져나가 都城 밖을 나서 地方으로 避身했다. 宮闕에 亂入해 王妃를 찾아낸다며 血眼이 되어 날뛰는 日本人들과 朝鮮人 協力者들을 避하지 못하고 閔妃가 弑害되기 13年 前의 일이다.

    乙未事變이라 부르는 그 現場의 慘澹함을 23歲의 나이에 온몸으로 겪은 왕세자빈은 그때 받은 肉身과 精神의 衝擊에 짓눌린 채 穩全치 못한 生을 아홉 해 더 延長하다 1904年 말에 이승을 下直했다. 乙巳條約 한 해 前이었다.

    乙巳條約 다음 해에 皇太子는 繼妃(繼妃)를 들이는 두 番째 家禮를 이곳 別宮에서 올렸다. 그리고 다음 해 高宗皇帝가 王座에서 밀려나자 順從이 되었다. 그리고 3年 만에 廢位되어 10年째 已往(李王)이란 稱號로 昌德宮에 居住하고 있다. 德壽宮에서 李太王(李太王)이란 稱號로 居住하던 高宗이 昨年 1月 昇遐한 以後 아직 三年喪中이다.

    安東別宮은 일없이 비어 있고 본채 殿閣 周圍로 늘어선 附屬 建物들엔 尙宮(尙宮)들이 居處하고 있다. 旅館(女官)이라 불리던 이들의 騰騰한 氣勢는 이제 찾아볼 길 없다. 그들의 視線은 오로지 마지막 호롱불처럼 남은 昌德宮 하나를 바라고 있을 뿐이다. 이미 많은 尙宮 나인이 오래前 宮闕을 떠나갔다. 명월관을 爲始한 料理집에 宮中飮食을 선보이거나 낙원동에 들어서는 떡집에 宮中 떡 製造祕法을 傳授하며 남은 人生을 보내고 있다. 昌德宮 正門 敦化門이 굽어보는 앞길 周邊에서 宮中 服飾을 선보이는 나인들도 있다. 이곳에 櫛比하게 들어선 國樂院에서 宮中 雅樂을 傳授하며 生活하는 樂工(樂工)들이나, 견지동과 仁寺洞 周圍에서 生計를 이어가는 圖畫署(圖畵署)의 花園(畵員)들도 類似한 處地다.

    焉敢生心 꿈속에라도 넘보지 못할 九重宮闕의 衣食住가 어느덧 萬百姓에게 公開되고 있다. 나라를 잃었다고 울부짖었지만 實은 임금을 잃은 것이었고 그를 擁衛하며 百姓의 稅金으로 祿俸을 받는 官吏들이 交替된 것이었다. 國權을 잃었다고 가슴을 쳤지만 實은 王權을 잃은 것이었고 日常生活의 規律을 定하는 權力의 主體가 바뀌었던 것이다. 問題는 朝鮮人만의 權力交替가 아니었다는 點이었다. 漢城(漢城)의 百姓은 이제 競技도 京城府(京城府)의 浮民이 되었다. 宮闕 밖의 百姓들은 이제 府民으로서 빈 宮闕 안으로 들어가보기도 한다. 安東別宮은 每年 한 次例 北村 住民들이 豫防接種 받으러 가는 公設 接種所가 되었다. 백신 맞을 때 한 番 가고, 며칠 뒤 接種이 잘되었는지 檢査하러 또 한 番 들른다.

    民間에 衛生觀念이 徹底하지 못하여 豫防할 생각이 아주 적음에 말미암아, 몹쓸 天然痘로 훌륭한 얼굴과 肉體의 完全한 아름다움을 損失함이 많으니 크게 注意하여 豫防할 必要가 있겠다. 特히 天然痘는 牛痘(牛痘)만 넣으면 걸리지 않는 法인데 우두도 넣기를 싫어하는 일은 實로 잘못된 觀念이다. 今番 鍾路警察署에서 施行할 봄철 種痘日子는 陽曆으로 4月 12日부터 나흘間을 施行하는데 日子와 時間과 處所와 區域은 別表와 같으니 鍾路警察署 管轄區域 안의 人民은 빠짐이 없이 牛痘를 넣게 함이 좋겠다 한다. △12日 團成社 △13日 安東別宮 [檢事는 18日 安東別宮에서]

    4月 中 機關別 行事 中에서 生活 情報가 될 만한 것을 골라서 記事 樣式에 맞춰 整理해두는 일이 한림이 맡은 일 中 하나다. 그러면 經歷 있는 記者가 그걸 한番 쓱 보고 토를 달거나 고쳐서 部長에게 올린다. 한림은 編輯局에 庶務로 入社했다. 編輯局의 살림살이를 돕고 他 部署와 業務連絡을 하고 社內外의 各種 雜務를 處理하고 어린 使喚들 데리고 淸掃도 함께 하는 職責이다. 入社하자마자 創刊 準備로 바빴던 3月 한 달은 記者들 일손이 不足해 取材 補助도 하고 校庭도 보며 이렇게 簡單한 案內 記事까지 作成하게 되었다. 한림은 新聞에 關한한 無經歷者이고 서울에 올라온 지도 얼마 안 되어 아직 物情에 어둡다. 記者들 中에는 官營新聞 每日申報에서 이미 잔뼈가 굵은 베테랑들도 있고 日本 新聞에서 活動하다 건너온 이들도 있다. 굳이 新聞일이 아니라도 外國에서 留學과 藝術活動 같은 것으로 見聞을 넓히고 온 사람들도 있다. 記者들은 거의가 서른 살이 넘지 않은 20臺였다. 가장 젊은 記者 이서구(李瑞求)는 翰林과 同甲이라 했고 柳光烈(柳光烈)은 한 살 위, 염상섭(廉想涉)은 두 살 위라 했다.

    한림은 차오르는 복받침 같은 것을 가슴께에 느끼며 安東別宮의 높고 긴 돌담을 벗어났다. 오늘 일은 一旦 끝이 났다. 첫 新聞이 나오는 날이다. 오랜 準備를 거친 創刊號 對面을 앞두고 다들 홀가분하면서도 緊張된 氣分이 되어있다. 新聞이 印刷 되어 나올 동안 暫時 會社를 빠져나와 가까운 周邊이라도 한 番 둘러보며 마음을 추스르고 싶었다. 水曜日의 午後였다.

    사람은 右側通行

    京城은 그에게 낯선 곳이다. 화동의 新聞社에서 南쪽으로 내리뻗은 이 길을 내려와 안국동 四거리에 설 때마다 한림은 서울이 왜 서울인지를 알 것 같았다. 北惡意 줄기를 屛風 삼아 왼쪽 東便으로 昌德宮이, 오른쪽 西便으로 景福宮이 咫尺에 바라보인다. 그 옆으로 鶴의 날개처럼 펼쳐진 仁王山과 낙산이 宗廟와 辭職까지 품고 있다.

    四通八達의 안국동 四거리에서 떠오르는 해를 안듯이 正面으로 南山을 바라보며 徐徐히 낮아지는 길을 따라 南으로 내려간다. 안개비 너머 남산은 마치 慶州와 伽倻와 백제의 古墳처럼 부드러운 上體를 소담스레 드러내고 있다. 견지동 大路를 따라 鍾路 四거리에 이르는 500m假量의 이 直線 區間이 한림이 鏡城의 新聞社에 出勤해 처음 接한 길이고 가장 익숙한 길이다.

    길의 오른便을 따라 걷는다. 右側通行이 早晩間 施行되리라 한다. 牛馬車(牛馬車)가 뒤섞여 複雜해져가는 都市의 大路上에서 人間이 가야 할 길과 그 方向에 對한 規則이 마련되었다. 步行者는 步差度가 區分된 곳이건 아니건 길 오른便으로 걷도록 誘導된다. 朝鮮 歷史上 처음 있는 일이다. 啓導期間을 거쳐 南村 本情警察署 管內에서 먼저 施行한 뒤 北쪽 鍾路警察署 管內로 擴散된다고 한다. 5月 中 揭載될 案內 記事文이다.

    最近 交通機關이 顯著히 發達되었는데 市民들이 法規를 지키지 아니하기 때문에 뜻밖의 禍를 입는 일이 자주 생기므로 本情警察署에서는 步行하는 사람의 右側通行을 實施한다. 警察派出所에 한層 嚴重히 團束하라고 指示하는 한便 各 貞洞(町洞) 代表에게 市民의 注意事項을 다음과 같이 懇曲히 依賴하였다. 길에는 때때로 물을 뿌릴 것, 아이들은 길에서 작난하지 못하게 할 것, 다섯 살 未滿 어린아이를 保護者 없이 길에 다니지 못하게 할 것, 길에다 수레나 其他 모든 物件을 늘어놓지 못하게 할 것, 길에서 許可 없이 무슨 일을 할 때 交通을 妨害하는 일을 하지 말 것.



    한 建物 앞에 한림은 멈춰 섰다. 漢城圖書株式會社가 入住할 豫定인 곳이라 한다. 出版은 勿論 印刷와 販賣 一切를 總括하는 企業型 出版會社가 한 달 뒤 出帆을 앞두고 있다. 只今까지 볼 수 없었던 일이다. 資本金 30萬 원. 한림이 入社한 新聞社의 資本金이 100萬 원이다. 그나마 株式 募集이 순조롭지 않아 株式會社 設立이 遲延되는 形便이다. 어쨌건 이番 봄 새로 생겨난 朝鮮人 經營의 3個 新聞社 亦是 10年 前의 新聞社들과는 質과 量 面에서 比較가 되지 않는 水準이다. 10年 歲月이란 그처럼 긴 期間이었다. 한바탕 긴 惡夢을 꾸고 난 것처럼 社會 全體가 부스스 먼지를 털고 일어나는 形象이다.

    ‘우리의 進步와 文化의 增長(增長).’ 그런 旗幟를 내걸고 漢城圖書는 이미 各界 人士들로 任職員을 構成하고 光化門통에 마련한 臨時 社屋에서 運營에 들어갔다. 單行本 發刊과 아울러 雜誌 發刊에 注力하고 있다는데 첫 作品으로 月刊雜誌 ‘서울’이 막 刊行되었다. 뒤이어 學生雜誌 ‘學生界’가 5月에 發行을 앞두고 있다. 父女雜誌 ‘家庭’도 7月 發行 豫定으로 編輯作業 中이다. ‘言論雜誌’를 標榜한 ‘서울’은 印刷분이 早期에 賣盡되리라는 展望이다.

    雜誌는 이미 漢城圖書 外에도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開拓(開拓)’ 創刊號가 나왔고 ‘女子詩論(女子時論)’ 2號가 나왔다. 題號도 燦爛한 ‘서광(曙光)’과 ‘現代(現代)’가 各各 제3호를 앞 다투어 내었고, ‘여자계(女子界)’ 4號도 나왔다. ‘現代’는 東京의 基督靑年會에서 나오던 機關誌를 새 이름으로 바꿔내는 것이고 女子界는 東京女子留學生 親睦會가 年中 3回 發行하는 機關紙이긴 하지만 雜誌의 種類는 豐盛해지고 있다. 倂合 以來 昨年까지 10年間 外國人과 內國人이 펴내는 雜誌의 折半은 宗敎雜誌였다. 그러다 지난 겨울부터 桑田碧海가 일어났다. 그동안 同人誌 性格의 文藝誌 몇몇이 하나 둘 눈치 보듯 나오다 들어가곤 했을 뿐, 時事問題를 곁들이는 雜誌까지 쏟아져 나오는 일은 1年 前만 해도 想像할 수 없는 일이었다.

    販賣1位는 族譜冊

    漢城圖書株式會社에 뒤이어 7月 開業을 앞둔 朝鮮圖書株式會社度 資本金 25萬 원으로 創立 準備作業이 한창이라 한다. 漢城圖書와 雙璧을 이루리라는 世間의 豫想이다.

    갑자기 다가온 이러한 變化는 3·1運動의 結果物이었다. 己未年 萬歲運動의 所要와 犧牲의 結果로 朝鮮總督府의 統治 方式이 倂合 10年 만에 처음으로 變化를 맞았고 社會 經濟 文化의 各 方面에서 重要한 制度 變化가 뒤따랐다. 그中의 하나가 出版市場의 統制 緩和였다. 10年 동안 中斷되어 空白狀態에 있던 民間新聞의 發行이 許可된 것과 같은 脈絡이었다. 한림이 新聞社에 出勤해 첫 新聞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이 瞬間이나 現代式 出版企業들이 創立되고 있는 것이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가지들인 것이다.

    밀려오는 개조의 물결 피어오르는 자각의 불길

    1921年 경운동에 竣工된 天道敎 새 敎堂.

    80m 쯤 더 내려가면 오른便으로 들어가는 사잇길이 있다. 비스듬히 올려다뵈는 곧바른 길 막다른 곳에 寶城學校로 통하는 後聞이 멀찍이 보인다. 그 안에 普成社(普成社)도 들어 있다. 孫秉熙의 天道敎가 運營하는 보성사는 崔南善이 運營하는 新文館(新文館)과 함께 지난 10年間 暗黑期의 出版界를 짊어지고 왔다. 지난해 3月 1日 發表된 獨立宣言書는 崔南善이 써서 新文館에서 組版되어 普成社로 넘겨져 印刷되었다.

    보성사는 1910年 設立 以來 赤字가 累積되어 天道敎의 資金力에 기대어 겨우 버텨오고 있다. 經營陣이 손병희에게 閉鎖를 建議했을 程度라 한다. 1907年 門을 연 新文館 亦是 崔南善이 父親에게서 받은 資金을 消盡해가고 있다. 冊을 쏟아 낼수록 돈은 말라가고 있다. 出版市場 全體로 보면 아직도 圖書 出版 販賣에서 不動의 1位는 如前히 族譜冊이 차지하고 있다. 新小說과 古代小說이 그 뒤를 잇고, 옛 儒敎 經典과 文集들이 그 다음이다. 10年 前 20年 前과 크게 달라진 點이 없다.

    言論 出版의 自由가 保障되지 않은 지난 10年, 新文館은 雜誌에서부터 거의 모든 分野에 걸친 書籍들을 廣範하게 펴내어왔다. 보성사는 天道敎의 豐足한 財政을 바탕으로 各種 書籍을 印刷하고 刊行해왔다. 한림이 10代 靑少年期에 읽어온 冊 相當數가 이 두 곳에서 만들어져 나왔다. 이 兩大 先驅的 出版社와 印刷社는 이제 漢城圖書나 朝鮮圖書의 企業的 雰圍氣에 비추면 어느새 舊時代的인 印象마저 주면서 옆으로 한발 비켜서는 느낌이다. 1910年生과 1920年生은 매우 다르다.

    思想을 담은 글, 그 글을 大衆化하는 出版에서 1910年代의 代表 자리에 있던 崔南善과 孫秉熙는 只今 監獄에 있다. 그들이 主導한 3·1運動의 犧牲으로 微弱하나마 얻어진 結果物이 出版과 言論의 統制 緩和다. 그렇게 생겨난 1920年代의 圖書와 新聞 雜誌가 制限된 言論 出版의 自由 속에서 막 胎動하고 있다.

    寶城學校 構內에 있는 푸른 甓돌 2層 洋屋建物의 보성사는 3·1 萬歲 3個月 뒤 原因 모를 火災로 消失된 後로 回復하지 못하고 있다. 옛날 옛적부터 꾸부정히 마당에 서 있는 白松과 회화나무가 그을린 壁體만 앙상히 남은 普成社를 굽어보고 있다.

    沐浴湯은 없어도 理髮所는 많다

    洋服店을 비롯한 各種 商店들이 道路를 따라 이어져 있다. 日本商店도 눈에 많이 띈다. 한림은 右側 수송동 쪽으로 들어가는 작은 길을 건너 京城地方法院 뒤便으로 들어섰다. 이番 봄에는 大型 裁判들이 續續 벌어질 것이다. 裁判所 담牆을 따라 다시 洋服店과 母子點을 爲始한 다양한 商店이 줄줄이 이어진다. “朝鮮人 沐浴湯 하나 없는 京城에 理髮所는 많고 洋服(洋服)點 洋畫(洋靴)點이 櫛比하다.” 天道敎 靑年會의 박달성(朴達成)은 그런 말을 하곤 했다. 어떻게 하면 남에게 곱게 보일까를 늘 窮理하는 朝鮮人의 氣風에 對해 種種 이야기하는 그를 한림이 처음 만난 것은 이番 달 天道敎當 講演會에서였다. 天道敎는 3月에 靑年會를 發足했다. 지난해 9月 만든 敎理講演部를 改編한 組織이다. 京城은 勿論 全國을 돌며 巡廻講演을 벌이고 있다. “朝鮮人이 세운 圖書館 하나가 없는데 酒店은 셀 수도 없이 늘어가고, 집집마다 放榜에 있는 것이라곤 新小說과 歌謠노래集뿐, 實生活에 龜鑑이 될 만한 書籍은 보기가 힘들다.” 박달성은 啓蒙講演에서 그런 말을 種種 한다.

    法院 담牆가에 붙은 人力車 待機所를 지나 法院 入口에 닿는다. 저마다 事緣 하나씩 들고 이 스산한 곳을 奔走히 들고난다. 電車는 無心히 鍾路 四거리를 지난다. 한림은 東쪽으로 길을 건너 모퉁이 2層 木造建物 화신상회 앞에 선다. 거기서 南쪽 건너便으로 바라보이는 普信閣 앞에는 行人들이 露店을 둘러싸고 서 있다.

    왼쪽 鍾路 2정목 쪽으로 눈을 돌리면 連이어 선 鍾路警察署와 기독교청년회관(YMCA) 아래 行人들이 奔走히 오간다. 鍾路警察署 正面 屋上 위로 힘차게 솟은 圓筒 돔形 尖塔의 正面과 側面에 附着된 둥근 時計는 4時 班을 알리고 있다. 한림이 막 태어났을 때의 漢城電氣會社 時節부터 달려 있던 이 아름드리 지름의 時計는 韓美電氣, 京城電氣를 거쳐 會社가 저 아래 南大門通의 명치정 入口로 移轉한 只今도 20年 前 모습 그대로 달려 있다. 그래서 鍾路警察署는 俗稱 時計집으로 불리곤 한다. 交通의 中心 鍾路의 南쪽 東쪽 西쪽 어디서나 바라보이는 세 個의 名物 時計는 언제부턴가 제各其 가리키는 時間이 다 다르다.

    時計에서 눈을 뗀 한림은 鍾路四거리를 버리고 몸을 돌려 오던 길 反對便 北쪽으로 거슬러 오르며 발걸음을 재촉한다. 亦是 右側通行이다. 인사동을 바라보는 公平洞을 지나 관훈동을 바라보는 견지동까지 올라왔다. 샛길 初入에 警察派出所가 있고 그 안쪽으로 侍天敎(侍天敎) 敎堂이 보인다. 乙巳條約 前부터 一進會(一進會)를 組織해 親日的 活動을 해오던 東學의 이용구(李容九)가 天道敎에서 떨어져 나와 設立한 宗敎團體다. 견지동 大路를 사이로 西쪽 天道敎의 寶城學校 普成社 團地를 건너다보고 있다.

    開化黨이 開化에 妨害가 되지 않도록

    견지동 집에서 나선 듯한 윤치호(尹致昊)가 마주쳐 지나간다. 사뿐한 걸음, 날씬하고 꼿꼿한 體格. 작은 키에 가는 눈, 類달리 번쩍이는 眼鏡. 길고 듬성한 鬚髥의 55歲이지만 40代 初盤으로 보인다. 鍾路 四거리 쪽으로 내려가는 그 活潑하고 輕快한 步幅은 아마 기독교청년회관으로 向하는 것일 게다. 3年間의 獄苦를 치르고 1915年 出獄한 以後 그는 週中에 鍾路의 YMCA에서 일하고 週日에 도렴동의 宗敎敎誨 가서 禮拜 보는 일을 生活의 中心으로 삼고 있다. 敎會는 家族들을 이끌고 걸어서 간다. 그는 自動車든 人力車든 어지간해서는 탈것에 依存하지 않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宗敎敎誨는 일찍이 1895年부터 尹致昊의 招請으로 美國에서 들어오기 始作한 남監理會 宣敎師들이 宗敎(琮橋)다리 附近 韓屋들에서 牧會를 해오다 1910年 이 자리에 고딕樣式의 2層 甓돌집으로 建築한 것이다. 宗敎다리는 鐘針校(琮琛橋)로 불리기도 하는데 傳해오는 末路는 成宗 時節 宰相 許從과 아우 許琛이 이 다리에서 떨어져 다쳤다는 핑계로 燕山君 生母 尹 氏의 廢妃問題를 論議하는 御殿會議에 參席하지 않아 뒷날 禍를 면하였다는 逸話에서 따온 이름이라 한다.

    그는 어쩌면 銀行으로 가는 길인지도 모른다. 代를 이은 大富豪이지만 잔돈푼도 꼬박꼬박 貯蓄하는 것으로 有名하다. 食前 散步를 거르지 않는 그이므로 別 볼일 없이 그냥 散步하러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朝鮮에 美國을 그만큼 잘 아는 사람이 없고 英語를 그만큼 잘 하는 사람이 없다는데 그는 거의 洋服을 입지 않고 朝鮮옷 차림으로 다닌다. 추운 날 겉옷만 樣式 外套를 걸친다. 美國式 實用主義가 몸에 배어있다.

    밀려오는 개조의 물결 피어오르는 자각의 불길

    1884年 푸트 駐韓 美國公使가 尹致昊의 집을 訪問했다. 右側 첫番째 흰 두루마기를 입은 사람이 윤치호이고 그 옆이 푸트 工事다.

    그는 1898年 10月 獨立協會 第2代 會長으로서 1萬 名이나 參席한 萬民共同會를 開催해 對外的으로 自主國權을 守護하고 對內的으로 自由民權을 保障하는 自主的 近代化를 이루자는 運動을 主導했다. 12月 政府에 依해 强制 解散되기까지 2個月이 그에겐 政治的으로 가장 華麗했던 時節이었는지 모른다. 들리는 말로는 비 오는 날이면 그는 꼭 長靴를 신고 흙 안 튀게 가만가만 마른 땅을 골라 짚고 다닌다 한다. 이슬비 그쳐 먼지 없이 촉촉한 길을 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어 내려간다.

    저기 鐘閣 四거리에 22年 前 33歲의 그가 萬民共同會의 熱氣를 뿜어내던 그 廣場이 있다.

    길 맞은便 아까 걸어 내려오며 보았던 普成社 後聞 入口와 그 위 漢城圖書 豫定地의 中間쯤에 郵政總局(郵政總局) 옛터가 바라보인다. 甲申政變이 일어난 1884年 12月의 그날. 두 해 前 壬午年의 軍亂을 淸나라의 3000 舊怨 兵力으로 鎭壓하고 再執權하는 데 成功한 閔妃 政權이 淸國의 屬邦化 政策에 順應하면서 開化黨의 自主近代化 政策을 억누르는 데 對한 反擊으로 벌인 武裝政變이었다.

    近代的 郵便制度를 擔當하는 行政官署의 落成式 날 그 祝賀宴會場에서 開化黨 行動隊와 日本人 協力隊員들의 몽둥이와 日本刀가 亂舞하는 그 流血 慘劇으로 郵政局은 막 열었던 門을 바로 닫았다. 郵政局 서울 總局(總局)의 總販 洪英植은 3日間 新政府의 右議政이 되었다가 被殺되었고, 그의 周旋으로 仁川 分局(分局)의 分局長이 된 이상재(李商在)는 34歲의 늦은 나이에 처음 얻은 官職을 잃고 落鄕했다. 英國 홍콩 日本과 맺은 郵便物交換協定은 쓸모없이 되었고 發行한 다섯 種의 郵票도 써볼 일 없게 되었다. 朝鮮의 郵便制度는 다시 舊式 驛站(驛站) 方式으로 되돌아갔다. 11年 뒤인 1895年 近代式 郵便制度가 다시 始作되었을 때는 이미 淸日戰爭이 끝나고 日本의 優勢가 뚜렷해져 있었다. 그리고 두어 달 뒤 閔妃는 弑害된다.

    政變의 主役인 金玉均 박영효 徐光範과 日本留學時節부터 各別히 親했던 尹致昊는 郵政局 行事場에 初代 美國公使 푸트의 通譯注射로 參席해 現場을 目擊하고 政變 失敗 後 中國으로 逃避했다. 그가 政變에 直接 加擔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아버지 윤웅렬(尹雄烈)은 政變 때 刑曹判書에 任命되었다가 3日天下가 끝나자 流配되었다.

    擧事 直前까지 美國公使를 찾아와 도움을 請하는 金玉均과 서광범에게 푸트 公社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조용히 時機를 기다려 知事를 모으고 皇帝의 寵愛를 견고히 하여 勢力을 삼아나가되 함부로 過激한 일을 하지 말라고 勸告했다. 性急히 앞으로 나아감으로써 도리어 開化에 妨害가 되지 않도록 하라고 當付했다. 이에 金玉均은 옳다고 答했다. 이런 對話는 모두 尹致昊의 귀와 입으로 通譯됐다. 開化黨이 開化에 妨害가 될 수도 있다는 逆說을 開化黨의 頭目들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알 수 없지만 그 모든 흐름의 복판에서 獨步的인 角度에서 現場을 바라보는 處地에 있었던 尹致昊의 腦裏에는 그 어떤 朝鮮人의 想念으로도 代身할 수 없는 複雜한 무엇이 있었을 것이다. 口傳으로만 듣던 尹致昊라는 存在의 實物을 길가에서 이렇게 다른 時間帶에 마주 보는 한림의 心情이 錯雜한 것은 그런 緣由 때문이었다.

    尹致昊가 그렇게 中國으로 떠나 3年 半을 머무르고 다시 美國으로 건너가 더 오래 머무르며 10年 歲月을 보낸 뒤 中國人과 結婚해 함께 歸國한 것이 1895年이었다.

    사람들이 羞恥心을 몰라

    밀려오는 개조의 물결 피어오르는 자각의 불길

    1883年 美國을 訪問한 조미修好通商使節團. 앞줄 왼쪽부터 通譯官 로웰, 府使 홍영식, 情事 閔泳翊, 서광범.

    견지동 길 막바지에 이르러 관훈동 인사동 길이 갈라지는 地點에 한림은 섰다. 다시 안국동 四거리다. 길모퉁이 同德女學校 담牆가에서 한림은 射距離 건너 北쪽 安東別宮을 正面으로 올려다본다. 別宮의 담牆 너머에 오래된 銀杏나무 한 그루가 上體를 드러내고 또 한 番의 봄을 맞을 準備를 하고 있다. 私立 同德女學校는 多年間 天道敎가 財政을 支援하고 運營하기도 했으나 昨年 孫秉熙의 投獄 以後 다시 獨立解 孤軍奮鬪하고 있다. 學校 二層 建物 뒷마당에서 비에 젖지 않은 바닥에 금을 그어놓고 少女들이 四方치기를 하며 놀고 있다. 발그레한 뺨에 댕기를 나풀거리며 납작한 돌을 차고 한쪽 다리로 깨금발을 뛰고 있다. 來日은 開學 날이다. 지난週에는 卒業式이 있었다.

    관훈동 내려서는 길목에서 行人들이 모여 웅성거린다. 是非가 붙은 模樣이다. 五十假量 된 갓 쓴 老人과 三十假量의 帽子 쓴 靑年 하나가 서로 밀고 당기며 險한 말을 퍼붓고 있다. 朝鮮人은 主로 말로 싸운다. 싸우는 方式은 主로 말꼬리 잡기다. 朝鮮語는 大槪 말꼬리가 길고 多樣하다. 말의 몸통보다 꼬리에 더 影響을 받는다. 變化無雙한 토씨와 어미는 感情을 쉽게 담으며 感情을 쉽게 刺戟한다. 몸통말은 主로 漢字語에서 왔고 어미가 主로 國産이다. 누가 말리고 나서자 新式 帽子 쓴 三十代는 이제 말리는 사람을 相對로 是非調로 憤풀이를 해댄다. 땔나무 짐짝 수북이 싣고 지나는 수레를 사이에 두고 마주 걷던 두 사람이 서로 엮이며 老人이 靑年의 발등을 밟은 게 싸움의 發端이었단다. 老少莫論하고 참 容恕하는 氣質이 不足하고 感情 露出이 헤프고 性急하다.

    사람들이 羞恥心을 몰라. 박달성이 日前에 해준 말을 되새기며 한림은 四거리를 건넌다. 그때 어디서 딸랑딸랑 鐘소리가 울려온다. 구경거리가 없어져 시들하게 흩어지던 사람들이 다시 耳目을 곤두세우고 周圍를 둘러본다. 新聞 配達夫가 四거리를 疾走한다. 허리춤에서 울리는 솔방울 크기만한 要領 소리 때문인가, 配達夫의 발놀림이 唯獨 輕快해 보인다.

    밀려오는 개조의 물결 피어오르는 자각의 불길

    1911年 무렵 경성고보 敎文.

    한림은 달리기 始作했다. 別宮 담을 따라 뛰어올랐다. 緩慢한 傾斜路이지만 내려올 때와 달리 이내 숨이 가빠온다. 甲申政變 때 初겨울 찬바람을 가르며 一團의 무리가 別宮 앞 四거리를 疾走하던 것이 36年 前이다. 이 別宮에 불을 질러 擧事의 信號로 삼으려 했으나 불길은 郵政局 뒷집에서 피어올랐다. 別宮 뒤便 어딘가에 徐光範의 집이 있었다 한다.

    올라가는 길 왼便 松峴洞(松峴洞)에는 天道敎當 2層 洋屋이 있다. 여기는 敎堂이면서 同時에 天道敎 首腦部의 中央摠部가 들어 있는 곳이다. 孫秉熙를 筆頭로 天道敎 人士들이 只今 監獄에 갇혀 있어 敎堂을 비우고 있지만 지은 지 10年 되는 敎堂은 늘 비좁다고 한다. 昨年 3月 1日 朗讀된 獨立宣言書에 署名한 33人 中 15名이 天道敎 사람이었다.

    敎堂과 中央摠部가 함께 들어설 雄壯한 建物을 경운동에 새로 짓고 있다. 來年 봄이 오기 前에 完工을 目標로 한다지만 敎主가 空席 中이라 어딘지 허전한 雰圍氣다. 己未年 獨立宣言書가 普成社에서 印刷되고 配布되기 꼭 석 달 前에 着工되었으니 이제 工事는 中盤을 넘어섰다. 東學 創始 以來 최제우 최시형 두 敎主가 當한 苦難 以後 最大의 試鍊이 第3代 敎主 孫秉熙와 그의 天道敎에 찾아들었다.

    卒業의 季節

    오르막길이 끝나가고 저기 北便 언덕 위에 경성고등보통학교가 서 있다. 新聞社는 學校 앞 언덕 아래에 있다. 경성고보는 지난주 火曜日 卒業式을 치렀다. 創刊 準備로 바쁜 新聞社 앞 좁은 길이 미어지게 人波가 오르내렸다.

    朝鮮 高等普通 敎育의 中樞機關이 되어 있는 경성고등보통학교 第10回 卒業式을 23日 午前 10時에 東郊의 넓고 넓은 運動場에서 擧行하게 되었는바, 正刻 열時가 되자 總督의 代理로 송영(松永) 外事課長(外事課長)李 着席하매 一同은 鄭重한 敬禮를 한 後 國家(國歌)로써 意識에 嚴重한 色彩를 더하였으며, 그 다음 校長 姜元甫(岡元輔) 氏의 敬虔한 勅語 奉讀(勅語 奉讀)이 있었으며 그 다음 송영 外事課長이 總督 閣下의 告別辭를 代身 朗讀하였는바…

    每日申報는 그렇게 傳하고 있었다. 卒業의 季節이다. 日本式 敎育制度를 移植한 朝鮮敎育令이 施行된 지도 10年째다. 모든 學事日程은 每年 4月 1日에 始作해 3月 31日에 終結된다. 경성고보 다음 날 양정고보度 盛大한 卒業式을 했다. 學校 貴하고 學生 貴한 朝鮮에서 卒業式 行事는 重要 消息이다. 지난 10年 동안 朝鮮人들은 唯一한 朝鮮語 新聞인 每日申報가 比重 있게 取扱하는 記事를 통해 몇 안 되는 學校의 卒業式 消息을 昭詳히 傳해 들어왔다.

    京城 南大門의 만리재 등성이에 높이 솟아 있는 樣式의 甓돌 二層집은 財團法人 私立 양정고등보통학교인데 例年과 같이 卒業式을 24日 午後 2時부터 擧行하였다. 正刻 2時가 되자 當局에서 나온 來賓, 곧 수야(水野) 政務總監, 宮朔(弓削) 學務課長, 共等(工藤) 京畿道知事, 이등(伊藤) 祕書官 其他의 朝野의 名詞가 式場으로 들어와 臨席下機가 무섭게 儀式이 擧行되었는바, 學生 來賓 一同의 國家(國歌) 高敞이 있었고 그 다음 蕭森(小杉) 部 敎藏의 勅語(勅語) 朗讀이 있었으며 同時에 副校長의 學事報告가 있은 以後 同巧 校長 엄주익(嚴柱益) 氏의 證書 授與式이 있었음과 同時에 敎藏의 懇切한 告別辭가 있었고 이를 多飮하여 臨席한 政務總監의 訓示와 京畿道知事의 告別辭 朗讀이 있었으며…

    순헌황귀비 嚴 氏의 조카 엄주익이 嚴 貴妃의 財政支援으로 設立한 養正義塾에서 出發한 學校다. 엄주익은 엄비의 所生인 英親王 이은(李垠)이 1907年 伊藤博文의 손을 잡고 日本으로 人質처럼 건너갔을 때 그를 모시고 따라간 11名의 使節 中 한 名이었다. 總督府의 第2人者인 미즈노 政務總監이 京畿道知事와 함께 直接 參與한 것은 王室 關聯 學校에 對한 禮遇로 보인다.

    “天皇의 統治時代는 千年 萬年 이어지리라, 모래가 큰 바위가 되고 그 바위에 이끼가 낄 때까지…”

    여느 學校에서와 마찬가지로 日本의 國家 기미가요가 提唱되었다. 기미가요의 가사야 千年 가까이 된 傳統詩 句節이라지만 그 曲이 만들어져 불리게 된 것은 40年 前이다. 宮內性 職員이 지은 曲을 獨逸의 作曲家이자 指揮者인 프란츠 에케르트가 完成한 것이라 한다. 1880年이었다. 日本 海軍의 軍務局에서 일하던 에케르트는 20年 뒤인 1900年 大韓帝國에 軍樂隊가 創設되자 다음 해 敎師로 招聘되어 獨逸式 50人組 正統 軍樂隊로 編成했다. 그리고 다음 해 大韓帝國 國家를 만들었다. 高宗 卽位 40周年이었다. 그가 指揮하는 軍樂隊는 每週 木曜日에 塔골公園에서 모차르트를 비롯한 獨逸 古典音樂 콘서트를 열곤 했다.

    “…우리 臣民이 至極한 忠과 孝로써 億兆蒼生의 마음을 하나로 만들어 代代孫孫 그 아름다움을 다하게 하는 것이 우리 國體(國體)의 淨化(精華)인바, 敎育의 淵源 또한 여기에 있을 터이다…”

    校門을 나설 卒業生들 앞에 敎育勅語가 엄숙히 朗讀되었다. 日本 帝國 臣民들의 受信과 道德 敎育의 基本 規範을 定하고 있는 敎育 勅語는 1890年 메이지 天皇의 名으로 發表된 것이다. 기미가요는 이제 10年이 흐르는 동안 다들 能熟하게 부른다. 朝鮮人은 노래 솜씨가 좋아 기미가요度 日本人보다 더 잘 부른다고 日本人 敎師들은 稱讚한다. 發音도 훌륭하다. 國語(國語) 科目으로 日本語는 全 敎科目 中에서 壓倒的으로 많은 授業時間을 割愛하여 10年 동안 集中 學習되고 있다. 朝鮮語는 그 折半도 못되는 時間으로 外國語(英語 獨語 불어)보다 낮은 比重이다.

    양정고보보다 한 時間 앞서 寶城高普에서도 卒業式이 열렸다.

    搏動(薄洞) 골목을 들어서면 甓돌로 쌓은 담牆 안에 正面으로 들여다보이는 雄壯한 二層 建物은 우리 京城에 있는 여러 學校 中에 가장 歷史가 많고 또 우리 朝鮮사람의 一般 精神系로 하여금 잊지 못할 무엇을 주었을 뿐 아니라 그間에 수많은 英才를 이 집안에서 産出하여 우리 社會에 貢獻이 적지 않은 私立 寶城高等普通學校이다. 24日은 東郊가 高等普通學校로 學制가 變更된 뒤 第3回 卒業式이 擧行되게 되었고 겸하여 洞 初等學校의 第13回 卒業式이 擧行되었다. 正午부터 學生과 學父兄과 來賓들이 連續하여 着席하고 京畿道廳으로부터 유성준(兪星濬) 參與官(參與官), 聯想 詩學(淵上 視學)과 中央學校長 최두선(崔斗善) 氏, 私立 寶城法律商業學校腸 고원훈(高元勳) 氏 等 多數의 名詞가 着席한 後 壁像에 걸린 時計가 한 時를 알리자 땅땅 울리는 鐘소리로써 卒業式은 第一 講堂에서 엄숙히 열리었다. 寶城高等學校腸 정대현(鄭大鉉) 氏의 簡單한 食事가 있은 뒤에 ‘기미가요’의 國家를 아罍人 後에 먼저 京畿道廳으로부터 優等生에게 주는 商品을 有 參與觀이 登壇하여 授與한 後에 同巧 訴訟機(小松崎) 講師의 呼名으로 高等普通과 卒業生 代表에게 鄭 校長으로부터 卒業證書의 授與가 있었고…

    유성준은 兪吉濬의 동생이다. 1907年에 寶城學校 2代 校長을 歷任하기도 했다. 최두선은 崔南善의 동생이다. 이날 亦是 卒業式을 가진 숙명여학교는 8名의 卒業生을 輩出했다.

    붉은재를 넘어간 사람

    卒業生들은 나갔고 來日이면 新入生들이 들어온다. 경성고보 담牆 너머 홍현(紅峴)고개 위 어디에 金玉均의 집이 있었다 하나 집도 主人도 散散조각 나 아무 痕跡도 남은 게 없다. 흙이 唯獨 붉어 붉은재라 불리던 이 고갯마루 너머 東쪽으로 내려서면 스무 살 무렵의 金玉均이 私宿하던 朴珪壽의 집이 있었다. 그 집 가는 길에는 朴珪壽의 門下에서 함께 開化思想을 接하던 네 살 아래 洪英植의 집도 있었다.

    政變 主導者들이 日本 公使館으로 逃走한 뒤 끝까지 王과 함께 있던 洪英植은 中國의 名匠 關羽를 모시는 祠堂 北關墓에서 王을 넘겨받은 淸나라 軍隊와 官軍에 依해 殺害되었다. 仁川 앞바다에서 日本機先을 얻어타고 祖國을 빠져나간 金玉均은 10年 뒤 亡命地 日本에서의 苦楚를 견디다 못해 淸國의 上海로 건너갔다가 祖國에서 보낸 刺客의 칼에 숨졌다. 그리고 죽은 채로 故國 땅에 실려와 楊花津의 斬首터에서 陵遲處斬當했다.

    그렇게 고약한 逆謀였을까. 只今처럼 나라를 통째로 外國에 넘겨준 것만큼의 逆謀였을까. 한림은 생각한다. 王에 對한 反逆은 三族을 滅할 程度의 大逆罪다. 하지만 나라에 對한 反逆은 그것이 反逆인지 아닌지 왕이 判斷할 問題다. 罪가 되고 안 되고는 王의 마음이다. 그것이 王朝다. 朝鮮은 王의 나라이지 그 밖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政變은 많은 사람을 죽였고, 政變을 일으킨 사람들도 죽었다. 金玉均이 剖棺斬屍당하듯 두 番 죽음한 지 4個月 뒤, 甲午更張으로 開化派 政府가 樹立되어 雰圍氣는 一變했다. 金玉均이 日本으로 逃避할 때 亡命處를 美國으로 選擇했던 徐光範은 10年 만에 돌아와 法部(法部)代身이 되었고 甲申政變 開化派의 赦免復權을 要請하는 上訴를 王에게 올렸다. 이리하여 金玉均과 洪英植은 事後에 罪가 사라지고 奎章閣大提學의 벼슬을 받게 됐다. 두 사람에게는 衝(忠)字가 붙은 諡號가 아울러 내려졌다.

    새로운 政治란

    낡은 기와집 두어 채를 이어 붙여 널빤지와 洋鐵板으로 얼기설기 엮은 집이 新聞社다. 한때 學校가 있던 곳이다. 只今 거기서 다들 新聞 한 張씩을 펼쳐들고 있다. 그냥 커다란 종이 한 張을 半으로 접은 4面 新聞이다. 오늘은 創刊號라 特別히 종이 두 張에 8面이 印刷되어 나왔다.

    많은 記事가 그 두 張의 종이 앞뒷面에 籌板알처럼 빼곡히 실려 있다. 제때를 놓친 改革처럼, 제때에 處理되지 못한 事緣들이 날과 달과 해를 넘겨 뒤늦게 活字로 되살아나 몰려드는 形局이다. 많은 것이 이미 되담기에는 時效가 한참 지났다. 그럼에도 朝鮮人에 依한, 朝鮮人을 위한, 朝鮮人의 新聞이 朝鮮語로 씌어 自由롭게 配達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新聞이 없진 않았다. 하지만 朝鮮文, 或은 諺文(諺文)으로 읽을 수 있는 新聞은 朝鮮總督府가 發行하는 每日申報 하나뿐이었다. 그 밖에 많은 新聞이 流通됐지만 죄다 日本글 新聞이었다.

    創刊新聞의 記事는 프랑스 總理가 下院 演說에서 帝國主義와 無斷主義的 思想을 批判했다는 消息에서부터 始作한다. 帝國主義 援助國들이 帝國主義를 批判하는 것이 요즘 大勢다. 世界大戰이 끝나면서 생겨난 風潮다. 鴨綠江 너머 吉林과 朝鮮 간 境界에 있는 朝鮮人을 中國 地方官憲이 武力으로 解散했다는 消息이 그 다음에 있다. 그곳 日本 領事(領事)의 要求에 따른 措置라고 한다. 여기서 朝鮮人이란 武裝獨立運動과 관계된 사람을 뜻한다.

    朝鮮銀行券 發行額은 나날이 膨脹한다. 日本과 滿洲의 金融이 緊縮하는데도 朝鮮에는 資金 需要가 激增한다. 投機熱이 熾烈하고 物價가 上昇勢를 維持하기 때문이다. 市中銀行의 朝鮮銀行에 對한 資金需要도 늘어난다. 日本과 滿洲의 一般金利는 이미 引上하였기에 朝鮮의 資金이 日本과 滿洲에 流出될까봐 貸出 金利를 引上한다는 消息이다. 美國 大統領 윌슨이 3線 出馬를 抛棄할 것이라 한다. 民族自決主義를 提唱해 昨年 朝鮮民族에 온갖 설렘과 苦痛과 失望을 안겨준 그는 政治生命을 다해가고 있다고 한다. 그의 말과 信念은 한때 對外的으로는 ‘救世主의 福音’처럼 들리기도 했지만 國內的으로 ‘倫理的인 理想主義者’ ‘敎條的 民主主義 豫言家’라는 酷評에도 부딪혔다.

    밀려오는 개조의 물결 피어오르는 자각의 불길

    1920年의 新聞社.

    朝鮮時代의 遺習인 笞刑(笞刑)李 마침내 廢止되었다는 消息도 있다. 朝鮮 500年間 百姓들을 떨게 한 恐怖의 棍杖은 이제 맞을 일이 없게 되었다. “朝鮮人의 民度가 過去에 비할 바 아니어서 肉體에 直接 苦痛을 주는 制度는 撤廢함이 至當하다고 認定될 뿐만 아니라, 日本人 朝鮮人 間에 兄法制度上 差別이 있다는 것은 새로운 政治의 趣旨와 맞지 않으므로” 廢止되었다는 政務總監의 談話가 있다. 새로운 政治란 昨年 9月 新任 總督 赴任에 즈음해 施行된 大大的인 制度改正을 말한다.

    國家 存在의 理由

    많은 일이 昨年 9月부터 始作되었다. 新任 總督 赴任과 더불어 ‘文化政治’가 宣布되면서 생겨난 일이다. 朝鮮人 發行의 民間新聞 許可 亦是 그 一環이었다. 이 모든 것이 3·1萬歲運動의 結果物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萬歲運動의 關聯者들은 죽거나 다치거나 監獄에 服役 中이고, 一部는 아직도 心理가 進行 中이다.



    一年 동안을 두고 豫審을 끌던 손병희 一波 47人에 對하여 지난番에야 그 罪名이 內亂罪가 아니고 保安法 違反에 지나지 아니하므로 地方法院에서 裁判을 하는 것이 當然하다고 高等法院 特別刑事部에서 決定을 하여 京城地方法院의 公判에 부치게 된 일에 對하여 地方法院 檢事는 이렇게 말했다. “豫審記錄 쌓아놓은 것이 사람 키로 세 길이나 되고 피고 數爻가 84名이나 되니까 如干 時日이 걸리지 아니할 터이라 判事가 세 名, 檢事가 여섯 名이 매달려 全力을 다하여 調査하는 中인데, 더디어도 今年 여름 안으로는 速히 結末을 내릴 作定으로 全力을 다하여 調査를 進行하는 中이다.”

    3·1運動 主導者들은 1年이 넘도록 未決囚를 벗어나지 못한 채 지루한 審理節次에 골病이 들고 있다. 孫秉熙를 비롯한 高齡者들은 健康을 크게 해치고 있다 한다. 昨年 9月 新任 總督을 暗殺하려 한 강우규(姜宇奎)에 對한 裁判은 迅速하게 進行돼 벌써 1審 裁判이 끝났다. 求刑은 死刑이었다.

    남대문역에서 재등 總督에게 爆彈을 던져 한世上을 떠들썩하게 한 강우규는 京城地方法院에서 死刑宣告를 받은 것에 不服하고 京城覆審法院에 公訴하였는데, 5日에 公判을 改正한다.

    大型 公判들이 잇달아 열리려 하고 있다. 編輯局長과 社會部長을 겸하고 있는 이상협(李相協)은 이들 公判 取材를 直接 맡을 豫定이다. 記者 한두 名으로는 堪當하기 힘들기도 하거니와 그 自身이 이 方面 最高 經歷者이기 때문이다. 그는 昨年 3·1運動의 熱氣가 한풀 꺾이고 關聯者들이 거의 收監되고 난 5月까지 7年間 每日申報 記者로 있었다. 臨迫한 것은 公判만이 아니다.

    이왕세子 殿下의 家禮는 4月 29日로 택일되었으며 禮式은 東京 王世子저에서 純全한 日本式으로 擧行하신다.

    무슨 말인가. 열 살에 日本으로 건너가 日本陸軍士官學校를 卒業한 王世子 이은이 23歲가 되어 日本 皇室과 婚姻을 맺는다는 말이다. 百姓은 願하든 願하지 않든 事實上 李氏 王朝의 百姓이 아니다. 過去의 體制와 制度는 사라지고 王과 百姓 間의 慣性만 남아 있을 뿐이다. 徐徐히 消滅해가는 그 慣性的 感情을 한 番씩 激하게 요동치게 하는 事件이 일어나곤 하는데 지난해 1月 高宗임금 승하 때가 그랬다. 그 國喪에 즈음해 3月에 萬歲運動이 일어나 해가 바뀐 只今까지 그 餘震이 있는데 또 한 番 지난날의 아픔을 되살리게 하는 行事가 豫告되고 있는 것이다.

    國家가 어떻게 統治權을 갖는지, 個人이 어찌해서 他人의 意思에 服從해야 하는지, 個人이 왜 國家 全體를 위하여 自己를 犧牲할 義務가 있는지― 이 問題의 答案은 왜 個人이 國家를 認定할 수밖에 없는가를 깨달아 아는 데에 있다.

    國家란 무엇인가. 이 生疏하고 根本的인 質問을 담은 글 한 篇이 新聞에 실려 있다. 筆者는 屬望받는 辯護士이자 有名 知識人인 김우영(金雨英)이다. 京都帝國大學 法學部를 나온 그는 “國家 存在의 理由는 倫理的 問題다”고 斷言하고 있다. 무슨 말인가. 人類의 目的이 倫理 實現에 있는 것이라면 國歌는 倫理上 必要物이고 國家 成立의 理由는 倫理的으로 說明이 可能하다는 얘기다.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何如튼 國家 存在의 理由를 바로 理解해야 國民의 行動 準則이 선다고 西洋의 學說들을 綜合해 力說하고 있다. 時局事件 裁判에 不撤晝夜 바쁜 辯護士 김우영은 이番 봄 結婚式을 올린다고 한다. 相對는 나혜석(羅蕙錫)이다. 東京女子美術學校에 留學하고 小說을 發表하고 女性運動도 하는 이 畫家는 3·1運動 關聯으로 몇 個月 獄苦를 치르고 나서 김우영의 오랜 拘礙를 마침내 받아들였다 한다.

    學識보다 말이 能해

    頑固한 家庭에 숨었던 處女와 시집간 婦人네의 女學校 支援이 퍽 늘어가는 模樣이라, 이제는 女子라도 가르치지 않으면 사람구실을 못하며 배우지 못하면 살 수 없다는 깨달음이 깊어가는 듯하다. 진명女子高等普通學校에서 일어난 實話인데, 白髮老人이 쪽을 찐 며느리를 이끌고 와서 東京 가 있는 아들이 편지하기를 제 아내를 學校에 보내지 않으면 離婚을 하거나 妾을 얻겠다 하였으니 氣豫科에라도 넣어달라고 歎願을 하였다 한다.

    氣豫科는 裁縫과 手藝를 배우는 附設 學科다. 많고 많은 記事들 中에서도 한림은 唯獨 學生들에 關한 記事에 눈이 간다. 卒業과 入學. 이제 人生의 出發線에서 20代로 접어드는 靑春들의 開花(開花)가 始作되었다. 어쩌면 그것은 戰爭일지도 모른다.

    어느덧 눈이 녹아 김이 터지고 뜰가에 누른 풀잎 사이에서 파릇파릇한 새싹이 솟아나오니 市內 各 學校에서는 卒業生을 보내고 新入生 맞기에 한창 奔忙하게 되었다. 요 몇 해 前까지만 해도 가장 조용하고 便安한 곳은 學生과 學校였으나 밀려오는 改造의 물결과 피어오르는 自覺의 불길은 마침내 그들로 하여금 언제까지고 以前의 地境에 머물러 있지 못하게 하고 말았다. 일어 算術 冊을 집어던지고 天下大勢를 두루 論하며 繡틀과 골무를 뿌리치고 女子解放을 부르짖는 等 別別가지 現象이 많았던 터이라 이에 잠깐 今年 봄 中等 程度의 男女學校 卒業生과 入學生의 狀況을 살펴보면, 卒業生은 大槪 學識보다는 말이 能하며 每事에 對談 敏活한 것이 한 가지 特徵이라 하겠고, 다음에는 日本 留學가는 사람이 늘어가는 것이니 적어도 한 學校에 대여섯은 안 가는 곳이 없는 듯하며 留學生은 大槪 地方符號의 子女인 듯한데 그들은 흔히 말하기를 “서울 밥값이나 東京 밥값이나 別로 큰 差異가 없는 바에야 東京 가서 배우는 것이 낫지 않으냐” 하나 그들은 벌써 싱겁고 느린 京城 學群에는 마음이 멀어진 것이 事實인가 싶다.

    改造해야 살고 自覺해야 일어선다는 風潮는 昨年을 起點으로 더욱 뚜렷해졌다. 己未年 萬歲運動 以後의 學生은 以前의 學生이 아니었다. 새로운 總督으로 交替되면서 지난 10年을 짓눌러온 社會 雰圍氣도 一新했다. 具體的인 制度變化가 뒤따르고 있다. 그것이 設或 似而非 變化라 할지라도 變化는 變化다. 倂合 以前 10年과 倂合 以後 10年, 두 10年 사이에 生의 全部가 녹아들어 있는 이 20世紀의 첫 新世代 앞에 波濤와 같이 몰려오는 새로운 文明과 대면해야하는 一大 挑戰(挑戰)李 막 始作되고 있었다. 그것은 이른바 流行하는 말로 실존적 挑戰이었으며, 20世紀의 20年代에 20代를 始作하게 된 靑春들의 運命的 應戰(應戰)이기도 했다.

    總督도 불쌍히 여기시고 나도 죽지말라 河心인가

    己未年 3月 1日의 民心 暴發과 3月 3日의 賃金 葬禮로부터 꼭 6個月 뒤인 1919年 9月 2日. 새 時代의 開幕을 알리는 雙頭馬車가 南大門 停車場을 出發하려 하고 있었다.

    午後 5時. 흰色의 海軍大將 禮服 차림의 新任 總督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夫人과 함께 馬車에 오르고 있었다. 사이토 總督은 京釜線 汽車에서 내려 日本人 朝鮮人 外國人 出迎客들의 歡迎을 받으며 貴賓室에 暫時 머물다 나오는 길이었다. 눈앞을 덮칠 듯 펼쳐진 南山의 漢陽公園에서 禮砲가 울려 퍼지고 軍人 警察 貴族 管理 記者들이 周圍를 에워쌌다.

    驛 周邊 길목은 온통 흰옷 입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南大門에서부터 龍山 方面에 이르기까지 그 數를 가늠하기 힘든 人波였다. 그들은 歡迎客이라기보다는 無言의 示威隊처럼 보였다.

    그 瞬間 禮砲와는 소리가 다른 또 하나의 爆音이 울려 퍼졌다. 馬車 周邊에 있던 30名 以上의 사람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馬車 앞 땅바닥에 手榴彈 하나가 떨어져 暴發한 것이었다. 破片은 馬車와 總督의 옷을 스치고 지나갔다. 武裝 憲兵들이 몰려들고 死傷者가 실려 나가는 가운데 總督은 “비가 내려야 땅이 단단해지는 法”이라는 말을 남기고 悠悠히 官邸로 向했다.

    61歲의 老獪한 政客 사이토가 白髮을 덮은 海軍모를 다시 한 番 눌러쓰고 떠나자 10m 거리에서 이를 지켜보던 64歲의 강우규度 파나마 帽子로 白髮을 눌러쓴 채 徐徐히 現場을 빠져나갔다. 허리춤에 爆彈을 싸서 찼던 明紬手巾과 陽傘을 들고서 저고리와 두루마기 차림에 허름한 가죽신을 신고 걸어가는 이 시골風의 老人을 注目하는 사람은 없었다. 後날 강우규는 그때의 心情을 이렇게 回顧했다.

    “나는 던졌으니까 總督은 죽었으리라 하고 하나님께 祈禱만 하였을 뿐이다. 나는 춤을 추며 내가 지은 詩를 읊으려 하였는데 總督은 죽지 아니하고 馬車는 똘똘똘 굴러갔다. 나는 失望 落膽하였다. 騷動은 일어났으나 아무도 나를 잡지 아니하므로 나는 천천히 돌아 나왔다. 總督은 죽지 아니하고 나는 잡지 아니하므로 내 생각에 하나님이 總督도 불쌍히 여기시고 나도 죽지 말라 河心인가 하고 아무데로도 달아나지 않고 서울에 머물렀다.”

    60代 老人들 間의 戰爭이 驛 廣場에서 끝난 다음 58歲의 李完用은 驛 構內 貴賓室에서 웅성대며 右往左往하는 貴族들 사이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는 動搖하는 氣色 없이 다만 새끼손톱을 씹고 있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나오는 그의 버릇이었다.

    10年만이다. 伊藤博文이 하얼빈 驛前에서 銃을 맞고 그 自身이 서울의 天主敎會堂 앞에서 칼을 맞은 것이. 다들 검은色 西洋禮服을 갖춰 입고 나왔다. 어떤 이의 洋畫 구두는 찢어졌고 中山帽에는 手榴彈 破片 자욱이 鮮明했다. 李完用은 中折帽에 두루마기 차림이었다. 每日申報 記者를 갖 始作한 柳光烈이 다가가 人事를 건넸다.

    “大監, 놀라셨지요.”

    李完用은 조용히 웃으며 혼잣말처럼 對答했다.

    “놀라기는 뭘….”

    1910年代는 어느덧 저물어가고 저만치 1920年代가 다가오고 있었다.



    東亞日報/ 每日申報 / 開闢 / 동광 / 別乾坤 / 송우혜, 마지막 皇太子 1, 푸른역사, 2010 / 柳光烈, 記者半世紀, 서문당, 1969

    박윤석

    東아시아 三國의 近代를 探究하는 硏究者. 서울大學校 東洋史學科를 卒業하고 동아일보에서 記者로 20年 일했다. 建國大學校 言論情報大學院에서 韓國近代와 近代新聞에 對해 講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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