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盧武鉉-김정일-李明博 三國志|新東亞

2007年 11 月號

盧武鉉-김정일-李明博 三國志

金 氣勢에 밀린 盧, 부시 面談 날린 李 ‘최태민 報告書’ 놓고 血戰?

  • 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編輯委員 hoon@donga.com

    入力 2007-11-12 11: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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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盧 大統領, 김정일 委員長에게 ‘氣勢 敗’
    • 極에 達한 盧 大統領과 부시 大統領의 對立
    • 李明博-부시 面談 仲介한 B氏…會談은 왜 不發됐나
    • 國精院에 保管 中인 최태민 報告書, 內容만 빠져나갔다
    • 盧 大統領은 왜 이 候補를 名譽毁損嫌疑로 告訴했나
    노무현-김정일-이명박 삼국지
    10月3日 平壤에는 아침부터 거의 하루終日 부슬부슬 가랑비가 내렸다. 하늘도 매우 어두워 午後 5時까지도 아리랑公演을 할 수 있을지 不透明했다. 平壤을 訪問 中이던 盧武鉉 大統領은 이날 午前과 午後 百花園 迎賓館에서 김정일 北韓 國防委員長과 두 次例 南北頂上會談을 가졌다.

    點心食事를 마치고 다시 열린 午後 會談 첫머리에서 김정일 委員長은 ‘挑發’에 가까운 깜짝 提議를 했다. TV를 통해 放映된 그 對話를 옮겨보기로 한다.

    김정일 : 氣像이 좋지 않다는 報告를 받았습니다. 떠나기에 앞서 午餐이 있는데…. 1時間30分假量으로 豫定하고 있습니다. 오늘 日程을 來日로 미루고, 來日 午餐을 時間 품을 들여서 便安하게 앉아서 허리띠를 풀어놓고 食事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하루 日程을 늦추는 것으로 하시지요. 오늘 會議를 來日로 하시고, 모레 아침에 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窮塞한 盧 大統領의 對應

    盧武鉉 : …나보다 더 센 데가 두 군데가 있는데, 警護, 儀典 쪽과 相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김정일 : 大統領이 決心 못 하십니까. 大統領이 決心하시면 되는데….

    盧武鉉 : 큰 것은 제가 決定하지만, 작은 일은 제가 決定하지 못 합니다….

    짤막한 對話지만 南北 頂上은 瞬間的으로 氣(氣) 싸움을 벌였다. 김정일 委員長의 挑發은 대단했다. 그는 “허리띠를 풀어놓고 食事를 하시지요”가 아니라, “허리띠를 풀어놓고 食事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하루 日程을 늦추는 것으로 하시지요”라며 아랫사람 對하듯이 말한 것이다. 이에 對해 큰 일, 작은 일을 擧論한 盧 大統領의 對應은 왠지 窮塞해 보인다.

    南北頂上會談은 盧 大統領이 近 5年間 美國과 싸우다시피 해서 마련한 ‘決戰場’이었다. 南北頂上會談을 위해 그는 國內 保守陣營의 反撥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大統領選擧를 앞두고 北風(北風)을 일으키려고 한다는 政治權의 攻勢에도 끄떡하지 않았다. 그런데 정작 金 委員長을 만나서는 配布 있게 對하지 못했다.

    頂上會談 같은 큰 行事가 있으면 會談 議題와 關聯된 部處에서는 會談場에서 나올 수 있는 質問과 그 質問에 對한 明答을 찾는 作業을 한다. 우리가 意圖한 대로 會談을 끌고 가기 위해 相對의 機先을 制壓하는 날카로운 質問을 모으는 調査도 펼친다.

    이러한 調査에는 議題를 맡은 部署뿐만 아니라 國精院과 警察廳 情報팀度 參與한다. 對北 問題에서는 國精院이 統一部보다 훨씬 더 重要한 任務를 遂行한다. 이番 頂上會談은 김만복 國精院長이 마련한 것이므로 國精院은 細密한 豫想 對話 資料를 準備했어야 한다.

    김정일 委員長이 “하루 日程을 늦추는 것으로 하시지요”라고 했을 때 盧 大統領이 제대로 받아치지 못한 것은, 이 機關들에서 올린 豫想 問答 가운데, 金 委員長이 “더 있다 가라”고 提議하는 項目이 없었음을 의미한다. 多幸히 盧 大統領이 瞬發力을 發揮해 넘기긴 했지만 韓國의 準備가 疏忽했음이 고스란히 드러난 대목이다.

    反面 北韓의 準備는 徹底하기 그지없었다. 10月2日 평양시 牡丹峯區域(區域은 우리의 ‘區’에 該當한다)의 4·25 文化會館 앞 廣場에서 열린 歡迎式에서 金 委員長은, 수많은 觀衆의 歡呼에도 不拘하고 마이크를 잡고 歡迎辭를 發表하지 않았다. 金 委員長은 北韓 人民이 들을 수 있는 마이크를 통해서는 育成을 들려주지 않는 것으로 有名하다.

    無視當하지 않기 위한 挑發

    그가 北韓 人民이 들을 수 있는 公開席上에서 마이크를 통해 育成을 傳한 것은 1992年 4月25日 朝鮮人民軍 創軍 60周年 記念 閱兵式에서 “英雄的 朝鮮人民軍 將兵들에게 榮光 있으라”고 한 것이 唯一하다. 왜 金 委員長은 北韓 人民에게 育成을 들려주지 않는 것일까. 김정일 委員長을 몇 次例 接한 한 消息通의 分析이다.

    “公開席上에 나온 金 委員長은 매우 威壓的이다. 그는 한눈에 사람을 알아본다. 아는 사람을 보면 ‘當身을 안다’는 뜻으로 가벼운 손짓만 한다. 그러나 絶對로 말을 걸지는 않는다. 金 委員長도 政治人이다. 當然히 大衆 앞에 서면 말을 하고 싶을 것이다. 金 委員長은 대단한 達辯家이지만 北韓 人民이 있는 자리에서는 絶對로 마이크를 잡지 않는다. 무서운 節制力을 發揮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歡呼한다고 해서 마이크를 잡고 말하다 보면 失手를 하게 마련이고 그러면 카리스마가 失墜된다. 金 委員長은 權力의 實體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기에 公開席上에서는 絶對로 말을 하지 않는다.”

    김정일 委員長은 2000年에 訪北한 김대중 大統領에게도 氣 싸움을 걸었다고 한다. 金 前 大統領으로부터 그 이야기를 들은 한 人士는 이렇게 傳했다.

    “김대중 大統領은 金 委員長보다 16歲 많은 年長者라는 利點을 갖고 있었다. 金 委員長이 民族問題로 攻擊을 하자 金 大統領은 ‘當身과 나는 우리나라를 둘로 나눠 統治하고 있는데, 各自가 統治하는 期間은 길고 짧다는 差異는 있을 수 있어도, 永遠할 수 없다는 共通點을 안고 있다. 그러니 우리는 民族을 위해 뭔가를 남겨보자. 우리 民族이 잘살고 못사느냐는 우리에게 달렸다’라고 받아쳤다고 한다. 年長者의 威嚴으로 金 委員長의 攻擊을 막아낸 것이다.”

    김대중 大統領과 一戰을 벌인 적이 있기에 金 委員長은 盧武鉉 大統領과의 만남에 最善의 準備를 했다고 한다. 2000年 南北頂上會談을 앞두고 北側은 日程을 하루씩 늦추었다. 이에 對해 金 委員長의 動線(動線)을 露出하지 않으려는 警護上의 理由라는 等 推測이 亂舞했지만, 北韓 事情에 精通한 사람들은 ‘김대중 大統領을 맞는 데 異常이 없도록 다시 한番 點檢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한다.

    이番 盧 大統領의 訪北은 한 달 가까이 延期됐다. ‘올여름 北韓을 휩쓴 水害’가 그 理由로 擧論됐다. 盧 大統領은 飛行機가 아닌 陸路로 訪北하므로, 盧 大統領이 지나가는 地域을 整備하기 위해 한 달을 延期했다는 分析이다. 이러한 分析은 옳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北韓은 水害 整備 以上으로 準備를 했다.

    北韓을 자주 訪問해본 사람들은 “南韓 사람들을 接할 때 北韓 사람들이 느끼는 가장 큰 스트레스는 무시당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北韓을 訪問하는 사람들은 事前 敎育을 받기 때문에 北韓을 無視하는 發言을 하지 않으려고 操心한다. 그러나 到着하는 瞬間 北韓의 國力이 형편없음을 보곤, 隱然中에 ‘北韓을 無視’하는 行動을 하게 된다.

    이러한 雰圍氣가 北側 사람들에게는 ‘머리를 숙여라’라는 壓迫으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北韓은 强勁하게 나온다. 韓國 사람들의 虛點을 찔러 機先을 制壓하거나 失手를 하면 剛한 攻擊을 퍼부어 우습게보지 못하게 한다.

    “젊은 大統領의 配布를 떠보았다”

    複數의 對北 消息通은 “北側은 盧 大統領이 金 委員長보다 네 살 年下인 데 對해 무척 神經을 썼다고 한다. 이들은 젊은 大統領을 對하는 것이 나이 든 大統領을 對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判斷했다. 나이가 많은 大統領에게는 容納되는 것도 젊은 大統領에게는 통하지 않을 것으로 보고, 한 달을 延期해 會談 準備에 萬全을 期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南側의 젊은 大統領에게 無視當하지 않겠다는 것이 北側의 眞心이었다”라고 말했다.

    이들은 “10月3日 金 委員長이 盧 大統領에게 하루 더 平壤에 머물라는 提議를 한 것은 盧 大統領의 配布를 떠보는 同時에 眞心으로 盧 大統領을 잘 모시기 위해서였다. 그날 平壤에는 가을비가 내렸으므로 아리랑 公演을 보기엔 決코 좋은 條件이 아니었다. 金 委員長은 盧 大統領이 提議를 받아들이면 잘 모신 것이 되고, 받지 않으면 負擔을 느껴 北韓을 우습게보지 못 할 것이라는 計算을 했을 것”이라고 分析했다.

    決코 無視當하지 않겠다는 北韓의 意識이 드러난 代表的인 行動이 지난해의 미사일 무더기 發射와 核實驗이다. 北韓은 만만하게 보이면 當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反面 노무현 政府는 全혀 다른 생각을 해왔다. 이종석 前 統一部 長官을 媒介로 김대중 政府의 路線을 이은 노무현 政府는 韓半島 問題는 美國을 비롯한 外勢가 아니라 우리가 解決해야 한다는 視角을 갖고 있다.

    노무현-김정일-이명박 삼국지

    17代 大統領選擧는 盧武鉉과 李明博의 싸움이다. 盧武鉉 大統領은 김정일 委員長과의 會談을 산뜻하게 處理하지 못했고, 이명박 候補는 부시 大統領과의 面談을 성사시키지 못했다.

    이러한 생각을 貫徹하기 위해서는 먼저 北韓을 制裁下慮는 美國을 붙잡아놓아야 한다. 그리고 北韓과 對話할 機會를 만들기 위해 對北支援을 强化했는데, 韓國 社會에는 이를 “김정일 政權을 延命시키는 퍼주기”라며 拒否하는 勢力이 있다. 이들은 大槪 ‘우리가 對話해야 할 相對는 金 委員長이 아니라 彈壓받고 있는 北韓 人民’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盧 政府가 햇볕政策을 繼承한 ‘平和와 繁榮 政策’을 펼치려면 國內外의 두 反對 勢力을 물리쳐야 했다. 이 가운데 훨씬 어려운 相對는 ‘힘’을 가진 美國이다. 그런데 盧 政府는 出帆 直後, 1次 南北頂上會談 直前 DJ政府가 건넨 對北 送金 事件 搜査를 許容하는 失手를 犯했다.

    野黨의 主張으로 特檢이 만들어져 盧 政府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고 抗辯할 수 있지만, 搜査 結果 數億달러가 北韓으로 不法 送金된 事實이 確認됐다. 過去 國精院을 비롯한 對北 情報機關들은 北韓이 ‘슈퍼노트’라 불리는 僞造 달러를 製作해 流通시킨다고 主張해왔다.

    이에 對해 CIA 等 美國의 情報 搜査機關들은 별다른 行動을 取하지 않았는데, 對北送金 搜査가 있자 北韓의 僞造달러 製作에 關心을 돌렸다. 그리고 2005年 9月, 마카오에 있는 방코델타아시아(BDA)를 통해 北韓이 僞造달러를 洗濯해 流通시킨 嫌疑가 있다며, 北韓이 이 銀行에 預置한 2400萬달러를 갖고 가지 못하게 했다.

    美國은 僞造달러나 痲藥 等에 관여된 資金을 洗濯해준 銀行에 對해서는 美國과의 去來를 禁止하는 法律을 갖고 있다. 달러는 世界 唯一의 基軸 通話다. 따라서 美國과 去來하지 못하는 銀行은 國際 去來에 參與할 수 없다.

    盧, “BDA 凍結 資金 풀어달라” 要求

    방코델타아시아는 꼼짝 못하고 2400萬달러(約 240億원)를 凍結했다. 2400萬달러는 個人에게는 큰돈일지 몰라도 國家 次元에서는 少額에 不過한데, 이 돈이 凍結되자 北韓은 悲鳴을 질렀다. 北韓은 그들이 가진 모든 媒體를 動員해 反美輿論을 煽動했다. 烏飛梨落(烏飛梨落)인지 몰라도 때 맞춰 韓國에서는 仁川 自由公園 안에 있는 맥아더 銅像을 撤去하자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盧 政府도 펄펄 뛰는 北韓 달래기에 나섰다. 2005年에 나온 ‘國防白書’에서 主敵(主敵)이라는 表現을 削除한 것이다. 軍事 用語에는 ‘敵’은 있어도 ‘主敵’은 없다. 國防白書에서 ‘主敵’을 削除한 것은 誇張된 表現을 바로잡는 行爲일 수 있다. 過去 蘇聯과 核武器 減縮會談(SALT, START 等)을 하던 時節 美國은 蘇聯을 ‘假想敵國’으로 表現했다. 第2次 世界大戰이 끝날 무렵 홋카이도(北海道) 東北쪽에 있는 4個 섬을 빼앗긴 日本도 蘇聯을 ‘假想敵國’으로 表現했다.

    美國과 日本은 蘇聯과 ‘修交’를 한 事實이 있으므로, 蘇聯을 敵으로 描寫할 수 없어 假想敵國으로 부른 것이다. 南北韓도 1992年 平和를 約束한 南北基本合意書를 締結했다. 그러나 이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있으니 그대로 北韓을 敵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國防白書’에서 主敵을 削除하며 敵으로 代替하지 않았다.

    盧 政府가 主敵 表現을 削除하자 韓國 社會는 들끓기 始作했다. 이러한 때인 2005年 9月8日, 盧武鉉 大統領은 美國 뉴욕에서 열린 유엔 60周年 頂上會議를 거쳐 멕시코와 코스타리카를 訪問하는 巡訪外交에 나섰다. 이때 外交 專門家와 情報 專門家들의 關心은 盧 大統領이 뉴욕에서 對北制裁를 主張하는 부시 美國 大統領을 만날 것인지에 쏠렸다.

    유엔 60周年 頂上會議는 9月14日 뉴욕에서 開幕됐는데 이날 盧 大統領은 코피 아난 유엔 事務總長이 主催한 午餐場에서 부시 美國 大統領을 만나 가벼운 人事만 나눴다.

    그리고 닷새 뒤인 9月19日, 베이징에서 열린 6者會談에서는 ‘北韓은 모든 核을 抛棄하고 美國은 北韓을 侵攻하지 않는다’는 것을 主 內容으로 한 9·19共同聲明이 發表됐다. 그러자 盧 大統領은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9月20日 盧 大統領은 부시 大統領에게 電話를 걸어 20分間이나 이야기를 나눴다.

    9個月 동안 對話하지 않은 韓美 頂上

    그러나 부시 大統領은 盧 大統領이 바라는 쪽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로부터 두 달 뒤인 2005年 11月18, 19日 釜山에서는 APEC(아시아太平洋經濟協力體) 頂上會議가 열렸다. 盧 大統領은 부시 大統領에게 “ 美國이 凍結한 BDA의 北韓 計座를 풀어달라”고 要求할 機會를 갖게 된 것이다.

    두 頂上은 APEC 開幕 前날인 11月17日 慶州에서 따로 만났다. 이 자리에서 盧 大統領이 방코델타아시아의 北韓 計座를 풀어달라고 要求하자, 부시 大統領은 손으로 테이블을 치면서까지 拒絶 意思를 밝혔다고 한다.

    그리고 8個月이 흐른 2006年 7月5日 北韓은 北韓의 人權 問題를 擧論하며 壓迫을 加하는 美國과 國際社會에 抵抗한다는 뜻으로 무더기 미사일 發射를 强行했다. 그 直後 부시 美國 大統領은 中國 日本 러시아 頂上과 緊急 通貨를 했으나 韓半島 問題 當事者인 盧武鉉 大統領과는 通話하지 않았다.

    2005年 9月 20日 通話 以後 두 頂上은 單 한 番도 通話하지 않은 事實이 밝혀졌다. 두 頂上의 사이는 크게 벌어져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두 달 뒤로 豫定된 韓美頂上會談에 關心이 쏠렸다.

    그리스와 루마니아, 핀란드 巡訪을 마치고 美國에 到着한 盧 大統領은 9月14日 부시 大統領과 午餐을 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 會談은 한 時間 만에 끝나고 말았다. 이는 두 頂上의 意見이 갈렸다는 뜻이다.

    會談이 끝난 後 두 頂上은 “(北核 問題를 풀기 위한) 6者會談 再開를 위해 兩國이 共同으로 努力해 나간다는 큰 틀의 合意를 보았다”고 發表했다. 따로 記者會見을 한 盧 大統領은 北核 問題 解決을 위한 韓美 合意를 묻는 質問에 “韓美 合意는 아직 完結되지 않았다. 그 內容은 매우 複雜하다. 이 자리에서 한마디로 答辯하기 어렵다”며 對答을 避했다.

    이 會談에서 거둔 唯一한 成果는 韓美 FTA(自由貿易協定)를 早速히 성사시키자고 한 것뿐이었다. 消息通에 따르면 盧 大統領은 이 會談이 있은 後 몹시 火를 냈다고 한다. 부시 大統領과의 會談에서 그가 願한 것을 얻지 못한 것이다.

    이 時期 美國 政街의 氣流는 强力한 北韓 制裁 쪽으로 흘렀다. 美國은 人權 問題를 擧論해 北韓을 壓迫했다. 1年 前인 2004年 10月4日, 美國의 上下 兩院은 滿場一致로 北韓人權法案을 통과시킨 적이 있다. 이렇게 된 데는 基督敎界 韓國 保守 人士들이 큰 몫을 했다.

    황장엽氏를 비롯한 몇몇 人士는 美國을 訪問해 政治犯 收容所 等을 擧論하며 北韓의 人權 彈壓을 告發했다. 美 議會는 韓國으로 들어온 脫北者를 불러 北韓의 人權 彈壓에 對한 證言을 들었다.

    人權 問題로 北韓 壓迫한 美國

    美國이 앞장서자 國際社會가 따라왔다. 2006年 6月13日과 16日 日本의 衆議院과 參議員이 잇달아 北韓人權法案을 통과시키고, 6月15日에는 EU 議會가 北韓 人權法案을 通過시켰다. 그리고 그해 11月17日, 유엔 總會 第3委員會에서는 贊成 91, 反對 21, 棄權 60으로 北韓 人權決議案이 採擇됐다.

    이 票決에서 中國과 러시아는 反對했고 美國 英國 프랑스 韓國은 贊成했다. 이에 對해 김창국 유엔 駐在 北韓 次席大使는 “美國이 (2001年 9·11테러를 當한 後) 對테러 戰爭을 한다는 名分으로 弱小國을 侵略하는 것이 國際社會가 直面한 가장 時急한 人權彈壓이다. 이番 決意는 美國과 그 衛星國들이 北韓의 主權을 侵害하기 爲해 만든 政治的 陰謀의 産物이다”라고 反駁했다.

    盧 政府가 決議案에 贊成한 것은 意外였다. 이에 對해 北韓 祖國平和統一委員會 代辯人은 談話를 통해 “(南韓은) 北南關係에 障礙를 造成한 犯罪行爲로 招來될 모든 嚴重한 後果(結果)에 全的인 責任을 지게 될 것이다. 外勢의 눈치를 보면서 權力을 支撐하는 者들은 우리와 相從할 體面도 없을 것이다”라고 非難했다.

    美國이 主導한 攻勢에 北韓은 2006年 7月5日의 미사일 무더기 發射와 10月9日의 核實驗으로 對應했다. 이로써 美國을 붙잡아놓고 北韓을 달래 頂上會談을 해보려던 盧 政府의 꿈은 霧散되는 듯했다.

    盧 政府가 美國을 說得하는 데 失敗한 2006年 3月11日, 有力한 大統領 候補로 擧論되는 이명박 當時 서울 市長이 워싱턴 DC와 姊妹結緣을 한다는 理由로 美國을 訪問했다.

    이날 美國에 到着한 이 市場은 “豫想하지 않았지만 로버트 졸릭 美 國務部 副長官을 만나고, 美 貿易代表部의 로버트 포트먼 代表와도 面談할 豫定이다. 그리고 도널드 럼스펠드 國防長官 쪽에서도 갑자기 만나자는 提議가 와서, 朝餐을 함께할 豫定이다”라고 밝혔다.

    自信感이 넘쳤는지 이 市場은 “서울市長에 對한 그 程度의 禮遇는 자연스러운 게 아닌가 생각한다”는 蛇足을 붙였다. 그러고 나서 失手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米 國防部와의 朝餐에) 럼스펠드 長官이 參席할지는 아직 모르겠다”며 自身이 한 말을 訂正했다.

    有力한 大統領候補로 擧論된다 해도 都市間 姊妹結緣을 하러 간 市場이 美國 實力者를 만나기로 했다는 報道가 나오자 騷動이 일었다. 美國 行政府 實勢들이 이 市場을 만나준다면, 이는 美國이 이 市場을 次期 韓國 大統領으로 점찍었다는 것으로 解釋될 餘地가 있기 때문이다.

    李明博-럼스펠드 面談 不發 經緯

    美國에서는 對北 制裁에 對한 論議가 많던 때라 사람들은 “럼스펠드 國防長官과 朝餐을 하기로 했다”는 이 市場 말에 注目했다. 그러나 이 市場은 럼스펠드 長官을 만나지 못했다. 이 市長 發言이 報道된 直後 美 國防部는 이 市場을 만나기로 한 적이 없다고 發表한 것이다. 한 消息通의 傳言이다.

    “럼스펠드 長官 面談은 이 市場 最側近 人事의 付託으로 始作됐다. 그러나 한 機關의 代表가 다른 機關의 代表를 만나려면 ‘名分’이라고 하는 프로토콜(protocol)이 있어야 한다. 이 市場은 名分을 서울에 있는 용산基地 以前에서 찾았다. 美 國防部를 訪問해 용산基地 移轉을 擔當하는 實務者와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럼스펠드 長官이 지나가다 偶然히 이 市場을 만나는 것으로 이야기가 됐다. 握手와 人事 程度만 交換하는 2~3分짜리 만남에 不過하지만, 그 사이 이 市場은 럼스펠드 長官과 寫眞을 찍을 수 있다.

    仲裁한 사람은 이런 式으로 脚本을 짜고, 이 市場側에게 ‘偶然을 假裝해 럼스펠드 長官을 만나는 것이므로 事前에 絶對 말하지 말라’고 當付했다. 그러나 美國에 到着한 이 市場은 氣分이 좋았는지 記者들에게 이를 發說함으로써 다 잡은 機會를 놓쳐버렸다.”

    2005年과 2006年의 노무현 政府가 北韓을 制裁下慮는 美國을 붙잡아놓기 위해 全力을 기울였으나 失敗했다면, 그 時期 有力한 大統領候補로 指目되던 이명박 市場은 美國의 有力 政治人을 만나 韓國 保守主義의 代表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機會를 놓쳐버린 것이다.

    韓國의 두 政治 指導者가 各自의 目標 達成에 失敗하는 사이, 北韓은 願하는 것을 ‘한 放’에 이뤄냈다. 2006年 10月9日,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맞서겠다는 式으로 核實驗을 强行한 것이다. 여러 情況 證據로 볼 때 北韓이 터뜨린 核武器는 ‘짝퉁’일 可能性이 높았다. 7月5日 무더기로 發射한 미사일 가운데 가장 重要한 대포동 2號도 發射 直後 墜落했다.

    北韓의 對應은 粗惡하지만 勇敢했다. 그런데 이것이 ‘桶(通)’했다. 2007年 2月 盧 大統領의 懇請에도 不拘하고 열리지 않던 6者會談이 열린 것이다. 이는 ‘制裁’를 强調하던 美國이 ‘對話’로 돌아섰음을 의미한다. 方向을 바꾼 美國은 큰길을 열어주었다.

    2007年 2月13日 ‘9·19共同聲明 履行을 위한 初期 措置’라는 이름의 2·13合意가 發表됐다. 2·13合意는 ‘北韓은 現存하는 모든 核施設을 不能化하고, 5個國은 北核 施設이 不能化되는 時點까지 100萬t의 重油로 환산되는 에너지와 重油를 支援한다’는 것을 主 內容으로 담고 있다.

    이로써 國際社會에서는 北韓의 人權彈壓을 非難하는 목소리가 나올 수 없게 되었다. 이에 盧 政府는 러시아를 통해 南北頂上會談을 성사시키려 努力했다. 러시아 側은 過去 韓國으로부터 제공받은 次官을 蕩減받고, 南北韓이 連結되는 韓半島 經濟圈에 沿海州를 包含시켜 발전시키며 푸틴 大統領의 3連任 方案을 마련해보자는 생각이 있어 南北頂上會談 成事에 積極的이었다.

    러시아는 푸틴 大統領이 參與하는 南北韓-러시아의 3者 頂上會談까지 推進했으나 김정일 委員長의 拒否로 霧散됐다. 北核 問題를 풀기 위한 큰 실마리가 잡힌 만큼 北韓은 南北頂上會談에 應하려는 姿勢를 보였다. 北韓 制裁를 主張하며 南北頂上會談 推進에 對해 否定的이던 美國은 ‘닭 쫓던 개’ 身世가 된 것이다.

    부시 大統領과 다툰 盧 大統領

    南北頂上會談 日子가 10月2日로 確定되고 난 다음인 지난 9月7日, 濠洲 시드니에서 啞胎經濟協力體(APEC) 頂上會議가 열렸다. 부시 大統領으로서는 싫어도 盧武鉉 大統領을 다시 만나야 하는 狀況을 맞은 것이다. 9月8日 두 頂上은 55分間의 頂上會談을 가졌다. 會談이 끝난 後 靑瓦臺는 “매우 만족스러운 會談이었다”라고 評했고, 白堊館은 “이番 會談은 매우 부드럽게 進行됐다”는 評을 내놓았다.

    그러나 두 頂上의 會談에서는 懸隔한 視角 差異가 드러났다고 한다. 이 會談이 있은 後 美國 言論은 一齊히 ‘盧 大統領이 부시 大統領에게 6·25戰爭 終戰宣言 計劃을 밝히도록 壓迫했다’ ‘盧 大統領이 부시 大統領에게 挑戰했다’고 報道했다.

    부시 大統領은 北韓이 核을 完全히 廢棄해야 北韓과 平和協定을 맺을 수 있다고 했으나, 盧 大統領은 北韓이 核을 廢棄한 後 美國이 내놓을 비전을 밝혀달라고 要求했다는 것이었다. 靑瓦臺는 美國이 韓半島 平和體制 構築에 同意한 것처럼 몰고 가려고 했다.

    盧 大統領이 부시 大統領과 다퉈가면서까지 對北政策을 챙기고 있을 때 한나라당 競選에서 勝利한 이명박 候補는 全혀 다른 選擇을 했다. 10月 中旬 美國을 訪問해 부시 大統領을 만난다는 計劃을 推進한 것이다. 李 候補가 盧 大統領과 사이가 좋지 않은 부시 大統領을 만난다면, 이 候補에게 이番 大統領選擧는 ‘떼어놓은 堂上’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美國 大統領이 韓國의 野黨 大選候補를 만나는 것은, 內政 干涉으로 비칠 素地가 있어 正式 만남이 아닌 우연한 만남으로 推進하기로 했다.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 이 候補와 부시 大統領이 함께 參席함으로써, 가볍게 人事하는 機會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B氏 等이 中心이 돼 推進했으나 B氏 라인을 감추기 위해 다른 라인을 稼動하는 것으로 꾸미기로 했다. 알리바이를 爲해 만든 다른 라인 가운데 하나가 K氏 라인이라고 한다.

    이렇게 다양한 布石을 깔고 推進했지만 부시 大統領 面談은 뜻밖의 事件으로 霧散되고 말았다.

    9月17日 CBS(기독교방송) 라디오는 강영우 美 白堊館 障礙委員會 次官補와의 인터뷰를 통해 이명박 候補가 10月14日부터 17日 사이 美國을 訪問해 부시 美國 大統領을 만나기로 했다는 報道를 내보냈다. 이 인터뷰에서 姜 次官補는 “이명박 候補와 부시 大統領의 面談을 周旋하기 위해 國務部와 白堊館에 意思를 打診했으나 李 候補가 大統領이 아니기 때문에 外交 經路를 통해서는 만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美 共和黨 元老들과 前·現職 長官들을 動員해 李 候補와 부시 大統領의 面談을 성사시켰다”고 밝혔다.

    이 事實이 알려지자 言論은 한나라당을 相對로 取材에 들어갔다. 記者들이 달려들자 한나라당은 李明博-부시 面談을 公式化해버렸다. 그러자 바로 白堊館은 “이명박 한나라당 候補가 面談을 要請한 것은 事實이나 부시 大統領이 李 候補를 만나기로 計劃한 바는 없다”며 公式 否認했다. 言論 報道로 인해 럼스펠드 面談 不發을 겪은 이 候補는 또다시 ‘헛물’을 들이켜야 했다.

    盧武鉉의 李明博 攻掠 戰略

    李 候補는 부시 面談을 契機로 17代 大統領選擧 때까지 4强 外交에 盡力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 그러나 이 計劃이 霧散됨으로써 그는 自身을 向해 칼날을 벼리고 있는 盧 大統領과 一戰을 벌여야 하는 狀況을 맞게 되었다.

    오래前부터 政街 消息通들은 盧 大統領의 臺(對) 李明博 攻勢는 南北頂上會談이 있은 後 本格化할 것으로 展望했다. 南北頂上會談 成功으로 國民 支持度가 올라갔을 때 이 候補의 서울 도곡동 땅과 BBK 株價 造作 疑惑 等을 集中的으로 터뜨리는 것이다. 이 問題에 對해선 한나라당 競選 레이스에서 박근혜 候補도 攻擊을 했다. 그러나 盧 政府의 攻勢는 次元이 다를 것으로 展望된다.

    ‘살아 있는 雷管’ 최태민 報告書

    박근혜 캠프는 搜査權이 없으므로 ‘得聞(得聞) 情報’를 土臺로 李 候補를 攻擊했다. 그러나 盧 政府는 檢察과 國精院 國稅廳 警察 等 情報 搜査機關을 動員, ‘事實’을 根據로 이 候補를 壓迫한다. 이러한 攻擊의 出發線이 南北頂上會談의 成功인데 盧 大統領은 折半의 成功만 거뒀다. 한 對北 消息通의 分析이다.

    “盧 大統領은 TV를 통해 放映된 김정일 委員長과의 氣 싸움에서 이겼어야 한다. 過去 盧 大統領은 젊은 檢事들과의 對話 때 ‘이제 막 가자는 것이지요’라는 말로 單番에 機先을 制壓한 적이 있었다. 金 委員長이 ‘하루 더 있다 가라’며 壓迫했을 때 盧 大統領은 流麗한 話術로 相對를 制壓했어야 한다. 金 委員長의 攻勢에 對한 模範答案은 이것이다.

    ‘좋습니다. 特別 隨行員으로 따라온 企業人 가운데는 年老한 이가 많고 此後 日程이 있는 사람이 많으니 그들은 豫定대로 돌려보내는 것으로 해놓고 이야기를 더 해봅시다. 하루가 아니라 사흘 나흘을 더 머물러도 좋습니다. 그런데 會談이 끝나는 날 金 委員長은 나와 같이 손을 잡고 軍事分界線을 넘어 서울로 가셔야 합니다. 金 委員長께서는 1次 頂上會談에서 서울 答訪을 約束한 바 있으니 나와 率直한 對話를 나눈 다음에 이를 우리 國民에게 報告하기 위해 함께 서울에 가는 겁니다. 그러한 約束만 해준다면 얼마든지 平壤에 더 머물며 對話할 用意가 있습니다.’

    盧 大統領이 이렇게 金 委員長을 制壓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國民 支持度는 急激히 높아졌을 것이다. 盧 大統領은 부시 大統領에게 큰소리 칠 수 있고, 이명박 候補를 確實히 壓倒할 機會를 잡았을 것이다. 그러나 盧 大統領은 가장 重要한 決戰場에서 膽大함을 보이지 못했다.”

    이명박 候補가 門前 臺試圖 해보지 못하고 機會를 霧散시켰다면, 盧 大統領은 門前 대시를 해놓고도 機會를 날려버렸다.

    이러한 兩쪽은 이제 國內에서 正面 對決에 들어간다. 이 對決은 盧武鉉 大統領側의 先攻으로 始作된다. 定價 消息通들은 盧 大統領이 BBK 株價造作 疑惑과 도곡동 땅 問題와 함께 최태민 報告書로 李 候補를 壓迫할 것으로 展望했다. 이 가운데 爆發力이 큰 것이 최태민 報告書다.

    消息通에 따르면 國精院에 保管된 최태민 報告書는 流出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이 報告書에 실린 內容은 빠져나갔다. 따라서 궁금症은 內容을 빼내간 사람이 누구냐는 데 쏠리고 있다.

    萬若 이 候補 캠프에 있는 사람(國精院 出身 人物 等)이 이 資料를 빼내는 데 干與했다면 李 候補側은 工作을 통해 祕密을 빼냈다는 非難을 避할 수 없다. 이렇게 되면 이 候補 支持率은 급전직하할 것이다.

    이와 關聯해 注目할 것이 9月11日 盧 大統領이 靑瓦臺 工作說을 提起한 李 候補를 名譽毁損 嫌疑로 고소한 事件이다. 萬의 하나 이명박 候補 캠프에서 누군가가 최태민 報告書를 빼내는 데 干與한 것이 밝혀진다면 盧 大統領의 告訴는 큰 힘을 發揮할 수 있다.

    한나라당의 競選은 熾烈했지만 眞짜 大統領選擧는 只今부터다. 盧 大統領은 汎與圈에서 누구를 다음 大統領으로 만드느냐보다 이명박 候補가 大統領이 되는 것을 막는 데 더 큰 힘을 쏟을 것이 틀림없다.

    17代 大統領選擧는 大統領이 되겠다는 이명박 候補와 무슨 수를 써서라도 李明博 大統領이 誕生하는 것은 막겠다는 盧武鉉 大統領 間의 싸움이다. 已往 벌이는 血栓이라면 豫備戰에서 멋진 勝利를 記錄한 後 벌였으면 좋을 뻔했다.

    盧 大統領은 김정일 委員長을 簡單히 制壓하고, 이명박 候補는 부시 美國 大統領과 韓半島 問題를 論議한 後 맞붙었다면, 韓國 大選은 한결 次元 높은 競爭 舞臺가 됐을 것이다. 豫選戰을 멋지게 通過하지 못한 兩側은 어떤 싸움을 벌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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