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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신, 괜찮은 사람이니 잘 봐줘”|신동아

“김동신, 괜찮은 사람이니 잘 봐줘”

‘北風事件’과 김동신·이수동 로비 커넥션

  • 組成式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airso2@donga.com

    入力 2004-09-07 15: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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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9年 9月1日 낮 12時. 北風事件을 調査하던 靑瓦臺 民政首席室 K局長과 이수동氏가 만났다. 場所는 韓定食집 ‘忍冬草’. 李氏는 “김동신을 調査한다고 들었다” “김동신과 나는 親舊 사이여. 잘 봐줘” 하며 김동신 當時 陸軍參謀總長에 對한 ‘善處’를 付託했다.
    김동신 國防部長官이 1999年 靑瓦臺의 北風事件 調査 當時 이수동 前 아태재단 常任理事에게 救命로비를 했다는 疑惑이 提起됐다. 이 같은 事實은 ‘이용호 게이트’에 連累돼 拘束된 이수동 前 아태재단 常任理事의 行跡을 追跡하는 過程에서 確認된 것이다. 아울러 當時 陸軍 參謀總長이었던 金長官이 北風事件 調査官인 靑瓦臺 關係者에게 돈封套를 건넨 事實도 드러났다.



    김성재 民政首席의 報告


    1999年 9月 靑瓦臺 民政首席室은 김대중 大統領에게 北風事件에 對한 調査結果가 담긴 報告書를 올렸다. 여기서 말하는 北風事件은 1997年 大選을 앞두고 권영해 當時 安企部長이 主導한 것으로 알려진 ‘오익제 便紙事件’ ‘윤홍준 記者會見’ 等이 아니라, 1996年 4月 15代 總選을 며칠 앞두고 北韓軍이 板門店에서 武力示威를 벌이자 當時 靑瓦臺를 비롯한 與圈과 軍 首腦部가 이를 過大包裝해 選擧에 惡用한 事件을 일컫는다.

    當時 軍 首腦部는 數次例의 記者會見을 통해 言論 弘報效果를 極大化하는 한便 軍事機密에 該當하는 合參(合同參謀本部) 地下벙커(指揮統制室)와 北韓軍의 主要 軍事施設을 찍은 寫眞을 公開해 이를 全 言論에 크게 報道되도록 함으로써 對北 危機感을 高調시켰다. 北韓軍은 4月4∼6日(國防部 發表대로라면 4月5∼7日) 3日 동안 板門店에서 武力示威를 벌이고는 本來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言論은 4月7日 以後 總選 하루 前인 4月10日까지 나흘 동안 北韓軍의 ‘威脅’과 國軍의 ‘斷乎한’ 對應態勢를 大大的으로 報道해 國民의 安保意識을 鼓吹시켰다. 그 餘波인지 與黨인 신한국당은 總選에서 壓勝을 거뒀다. 野黨(국민회의)은 優勢地域으로 豫想했던 首都圈에서조차 慘敗했다.

    자칫 歷史의 그늘에 가려질 뻔했던 이 事件이 一般에 널리 알려진 것은 2000年 4月 金OO豫備役 陸軍大領의 國會 記者會見을 통해서다.

    北風事件 當時 合參 戰略情報課長이었던 金氏는 板門店 事態에 對해 軍 首腦部의 意志에 거슬리는 情報判斷報告를 했다가 無能力한 將校로 烙印 찍혀 그後 閑職을 돌고 여러 次例 昇進에서 漏落되는 等 人事上 不利益을 當했다고 主張했다.

    國防部는 報道資料를 통해 金氏의 主張을 反駁하며 ‘北風’의 實體를 否定했다. 하지만 言論의 取材 結果 金氏의 主張을 뒷받침하는 關係者들의 證言과 여러 情況證據가 드러남으로써 國防部의 解明은 說得力이 떨어졌다.

    金氏는 記者會見을 갖기 10個月쯤 前인 1999年 6月 靑瓦臺에 이 事件을 陳情했고, 民政首席室에서 眞相調査에 나섰다. 그러잖아도 民政首席室 關係者는 1998年 9月부터 이 事件의 實體를 追跡하던 中이었다. 金氏의 提報로 民政首席室의 北風事件 調査는 活氣를 띠었다. 約 3個月間의 調査 끝에 報告書가 作成됐고, 當時 김성재 民政首席은 이를 金大統領에게 對面報告했다.

    靑瓦臺 報告書에 따르면 김동신 國防部長官(報告書 作成 當時 陸軍參謀總長)은 1996年 4月에 있었던 北風事件 當時 일정한 役割을 한 것으로 보인다.

    當時 中將으로 合參 作戰本部長이었던 그는 靑瓦臺 高位關係者로부터 北韓軍의 板門店 武力示威 事態를 言論에 積極 弘報하라는 指示를 받고 忠實히 履行한 後 그 結果를 김동진 合參議長(後에 國防部長官 歷任)과 이양호 國防部長官에게 報告했다는 疑惑을 받고 있다.

    靑瓦臺 報告書가 올라간 지 한 달이 채 안돼 김동신 當時 陸軍參謀總長은 任期 滿了 5個月을 앞두고 辭退했다. 對外的 名分은 後輩들에게 길을 터주기 爲한 ‘勇退’. 하지만 湖南軍脈의 先頭走者로 最初의 湖南 出身 陸軍參謀總長인 그의 갑작스러운 辭退는 疑惑을 사기에 充分했다.

    政治權과 軍 周邊에서는 北風事件에 對한 問責人事라는 얘기가 돌았다. 一部 日刊紙에는 이를 뒷받침하는 記事가 실리기도 했다.

    2000年 10月 國防위 所屬 민주당 정대철 議員은 國防部 國政監査를 통해 北風事件에 對한 徹底한 眞相糾明을 要求하기도 했다. 鄭議員은 “北風事件 當身 軍 首腦部가 北韓軍의 通常的인 武力示威活動을 軍事的 挑發이 濃厚하다고 歪曲·擴大시켜 國民을 不安하게 만들고, 다양한 弘報 메뉴를 開發해 言論을 相對로 8回 以上 公開 브리핑을 했다”고 主張했다.

    靑瓦臺 民政首席室 K局長이 北風事件 提報者인 金氏를 처음 만난 것은 1999年 6月19日. 當時 金氏는 大領으로 陸軍 情報學校 語學處長이었다.

    K局長은 金大領을 비롯해 領官級 將校 3名으로부터 北風事件 關聯 證言을 들었다. 이들은 北風事件이 있었던 1996年 4月 合參 狀況室(指揮統制室)에서 勤務했던 사람들이다. K局長은 이를 根據로 當時 軍 指揮部 關係者들을 相對로 確認作業에 들어갔다.



    돈封套와 餘下士官의 食事 시중


    K局長이 鷄龍臺에 있는 陸軍參謀總長 執務室에 찾아간 것은 1999年 7月14日이다. 그前에 參謀總長 祕書室을 통해 面談日程을 잡았다. 김동신 總長은 祕書室 關係者를 통해 “日程이 빠듯해 10分 以上은 時間을 내기 어렵다”고 傳했다. 그에 따라 面談時間은 午前 11時20∼30分으로 잡혔다. K局長은 11時쯤 到着해 祕書室에서 기다렸다.

    11時20分. K局長과 만난 金總長은 “大田에서 點心 約束이 있다”며 時間을 많이 내지 못하는 것에 對해 諒解를 求했다. K局長은 “딱 한가지만 물어보면 된다”고 韻을 뗀 뒤 北風事件을 끄집어냈다. 金總長의 얼굴빛이 바뀌었다. 애初 約束은 10分이었지만 面談은 한 時間 假量 이어졌다.

    “1996年 4月 北韓軍의 板門店 武力示威 事件 때 合參 狀況室에서 유종하 當時 靑瓦臺 外交安保首席의 電話를 받지 않았냐”는 K局長의 質問에 金總長은 “電話를 받는다면 김동진 合參議長이 받지 왜 내가 받겠냐”고 反駁했다. 提報者인 金大領 主張에 따르면 當時 유종하 首席과 김동신 合參 作戰本部長은 4月6∼8日 세 次例에 걸쳐 通話했다.

    金大領의 日記에는 具體的인 通貨日時와 通話內容(김동신 作戰本部長의 말)李 적혀 있다. 또 通話가 끝난 後 그때그때 金作戰本部長이 狀況室 勤務者들에게 下達했다는 유수석의 指示事項도 詳細히 記錄돼 있다. 主로 對言論 弘報 强化에 關聯된 內容이다.

    金大領 日記에 따르면 애初 유수석이 狀況室에 電話를 걸어 찾은 사람은 김동신 作戰本部長이 아니라 김동진 合參議長이다. 그런데 金合參議長이 자리에 없어 金作戰本部長이 代身 電話를 받았다는 것이다.

    金氏 日記 內容대로라면 金作戰本部長은 매우 ‘積極的인 姿勢로’ 유수석의 指示事項을 履行한 것으로 보인다(유 前首席과 金長官은 2000年 4月 金氏의 記者會見 直後 이 問題가 불거지자 通話 事實 自體를 否認한 바 있다. 다만 兪 前首席은 “김동진 合參議長과는 通話했을 수도 있겠지만, 기억나지 않는다”고 解明했다).

    K局長은 이날 한 가지 ‘失手’를 저질렀다. 金總長의 執拗한 要請에 提報者가 누구인지를 밝힌 것이다. 이것이 뒷날 問題가 됐다. 이날 金總長은 K局長에게 訪問 記念으로 陶瓷器를 膳物했다.

    7月18日, K局長은 민주당 임복진 議員을 面談했다. 任意원이 1996年 4月 北風事件 直後 國會 常任委에서 이 問題로 이양호 當時 國防部長官을 叱咤한 데다 그해 9月 國防部 國政監査 때도 이를 問題 삼았기 때문이다.

    林議員은 眞相調査를 위해 國防部 建物에 있는 合參 狀況室에 들어가려다 뒤쫓아온 김동신 當時 合參 作戰本部長의 制止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金作戰本部長은 林議員을 案內한 軍人에게 “왜 이런 데 議員을 들어오게 했냐”고 나무랐다.

    結局 林議員은 北風事件에 對해 疑惑만 提起했을 뿐 眞相調査에는 失敗했다. K局長이 北風事件에 對해 묻자 林議員은 “世上이 다 아는 일”이라며 當時 狀況을 說明해줬다.

    그後 K局長은 合參 作戰企劃課長 L大領의 電話를 받았다. L大領은 ‘김동신 總長의 指示’라면서 “當時 關聯 資料를 건네줄 테니 만나자”고 提議했다. 두 사람은 7月28日 午後 2時 國防部 面會室에서 만났다. L大領은 北風事件 當時 合參 指揮統制室長이었다.

    그는 金OO 大領이 提起한 疑惑에 對해 “그때 나는 赴任한 지 얼마 안돼 狀況을 仔細히 알지 못한다. 그 事件이 일어났을 때는 前任者가 남아 있으면서 일處理를 다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김동신 總長의 ‘嫌疑’와 關聯해선 “金總長은 當時 合參 作戰本部長으로서 靑瓦臺 首席으로부터 電話를 받을 만한 位置가 아니었다”고 說明했다. K局長은 그에게 金總長의 ‘嫌疑’를 仔細히 일러주면서 “總長한테 ‘認定할 건 認定하는 것이 좋다’고 傳하라”고 말했다.

    그後 김동신 總長의 行政副官 鄭아무개 中領이 K局長에게 電話를 걸어왔다. “總長이 같이 食事하기를 願한다”는 傳喝이었다. 參謀總長실 宋아무개 大領으로부터도 連絡이 왔다. 8月5日 낮 12時, K局長과 金總長은 두番째로 만났다. 場所는 國防部 뒤便에 있는 陸軍參謀總長 서울事務所. 美軍部隊와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두 사람은 點心을 함께했다. 정갈한 韓定食이 나왔는데, 美貌의 餘下士官 2名이 飮食시중을 들었다. 北風事件에 關한 얘기가 오갔다. 金總長은 自身의 ‘嫌疑’를 頑强히 否認했다.

    食事가 끝난 後 金總長은 K局長에게 封套를 건넸다. 休暇費 名目이었다. K局長은 頑强히 拒絶했으나 金總長이 强勸해 ‘마지못해’ 받았다. 封套엔 10萬원짜리 手票 10張이 들어 있었다. 大田 某 銀行에서 發行한 手票였다. K局長은 이를 靑瓦臺 事務室에 保管해뒀다.

    그 이틀 뒤인 8月7日 K局長은 海外로 여름休暇를 떠났다. 그가 休暇 간 사이 ‘일’이 벌어졌다. 北風事件 提報者인 金OO 大領이 陸軍參謀總長 直屬인 陸軍中央犯罪搜査團(重手段) 搜査官들에 依해 連行된 것이다. 8月10日 午前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어 金大領의 部下職員 8名도 줄줄이 重手段에 끌려가 調査를 받았다. 重手段은 金大領의 ‘非違事實’을 提報한 匿名의 投書를 내세웠다.

    하지만 投書는 疑問 투성이였다. 于先 作成者의 身分이 不分明하고 投書經緯가 釋然찮았다. 또한 그 內容이라는 것도 ‘諜報’ 水準의 얘기를 끌어모은 것이었다. 金順禮라는 民間人이 軍搜査機關에 提報했다는 이 投書에는 大略 네 가지 ‘非違事實’李 적혀 있었다.

    ▲金大領이 當時 勤務地인 情報學校에서 食堂 理髮所 等 福祉施設 利益金을 챙겼으며 ▲部隊 內 洗濯所 主人으로부터 謝禮費를 받았으며 ▲英語試驗 答案紙 流出 後 問題가 생기자 部下 職員에게 責任을 轉嫁했으며 ▲政治的 發言을 자주 하고 特히 全國區議員으로 進出한다는 얘기를 周邊에 했다는 것이다. 內容의 信憑性을 떠나 하나같이 民間人이 軍搜査機關에 鎭靜하기에는 適切치 않은 內容이었다.

    重手段은 엿새 동안 네 次例에 걸쳐 金大領과 그 部下들을 調査했으나 非違事實을 確認하는 데 失敗했다. 結局 金大領은 無嫌疑로 풀려났다. 北風事件에 對한 靑瓦臺 報告書와 金大領 證言에 따르면 當時 김동신 總長은 部下들을 시켜 金大領을 懷柔하려 했다는 疑惑을 받고 있다.

    8月11日 午後 6時, 重手段 所屬 某 中領은 國防部 뒤便 食堂 ‘용수정’에서 金大領에게 밥을 사주며 “參謀總長 앞으로 謝罪便紙를 쓰면 잘 處理해주겠다”고 提議했다.

    다음날엔 情報學校長 K所長이 비슷한 얘기를 하며 金大領을 ‘달랬다’. 8月13日엔 中搜團長 L大領이 나섰다. 이날 午後 4時 계룡대 골프場 클럽홀 2層에서 金大領을 面談한 L大領은 調査背景에 對해 “陸軍參謀總長室에서 指示받았다”고 알려주며 自身은 北風事件에 對해선 全혀 몰랐다고 했다.

    靑瓦臺 K局長이 休暇에서 돌아온 것은 8月16日. 自信이 없는 사이 金大領이 連行된 事實을 알게 된 K局長은 계룡대 陸軍參謀總長실로 電話를 걸었다. 電話를 받은 祕書室長 K准將에게 金大領 連行과 關聯해 거칠게 抗議하는 한便 北風事件에 對한 徹底한 調査 意志를 내비쳤다. 두 사람은 이날 辱說까지 하며 甚하게 다퉜다고 한다.

    K局長은 김성재 民政首席에게 金大領 連行事實을 報告했다. 그때까지 北風事件에 對해 半信半疑하던 金首席은 김동신 總長에 對해 憤慨하며 이 事實을 金大統領에게 報告했다. 金大統領은 “누가 그런 짓을 하냐’며 크게 火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

    8月17日, 김동신 總長의 祕書室長인 K准將이 金大領을 만나 “일을 擴大하지 말라. 너만 참으면 모든 것이 解決된다”고 說得했으나 金大領은 굽히지 않았다. 8月19日엔 重手段 K中領이 靑瓦臺로 K局長을 찾아왔다. K局長의 故鄕 後輩인 盧아무개 中領이 다리를 놓았다. 세 사람은 午後 5時20分께 靑瓦臺 面會室에서 마주앉았다.

    K中領은 金大領의 ‘非違事實’을 仔細히 說明하면서 “金大領은 ‘局長님이 쓸데없는 일을 해 自己만 곤란하게 됐다’며 局長님을 怨望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K局長이 김동신 總長한테 돈封套 받은 얘기를 슬쩍 끄집어냈다.

    이를 ‘脅迫’으로 받아들인 K局長은 “돈 封套 받은 것까지 首席한테 다 報告했다. 手票는 證據로 靑瓦臺에 保管하고 있다. 김동신한테 가서 똑바로 傳하라”고 火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8月20日 午後 7時, 陸軍參謀總長 祕書室長 K准將이 重手段 K中領과 함께 金大領 집 近處인 蠶室롯데호텔 일食堂에 자리를 잡고 金大領을 불러냈다. K准將은 金大領에게 “參謀總長을 왜 괴롭히느냐” “金大領만 조용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 “손잡고 함께 일하자”고 金大領을 ‘說得’했다.

    이에 金大領은 重手段이 自身을 連行한 데 對해 抗議하는 한便 김동신 參謀總長이 自身의 ‘安全保障’과 關聯해 覺書를 써줄 것을 要求했다. 結局 두 사람의 對話는 ‘合意點’을 찾지 못한 채 끝났다. 金大領은 이날 對話內容을 錄音해뒀다.

    이 즈음부터 김동신 總長의 政治權 救命로비가 始作된 것으로 보인다. 8月 下旬, 靑瓦臺 K局長은 平素 親分이 있는 與圈 實勢 K議員으로부터 電話를 받았다. K議員은 대뜸 “陸軍參謀總長 調査한다며?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當時 大統領에게 올라갈 北風事件 調査報告書를 作成하고 있던 K局長은 K議員에게 北風事件의 槪要를 說明해줬다. 說明을 듣고 난 K議員은 “알아서 잘 해보라”며 더 以上 다른 소리를 하지 않았다.

    비슷한 時期 K局長과 切親한 사이로 某 議員의 동생인 K氏로부터도 電話가 걸려왔다. 金總長과 光州一考 同期인 그는 “김동신, 내 同氣여. 잘 봐줘” 하고 付託했다.

    K議員이 김동신 總長 調査事實을 알게 된 것은 DJ 祕書室長 出身인 某 司法機關의 高位職 人事 C氏로부터 電話를 받고서였다. 北風事件 報告書가 大統領에게 올라간 後 K局長은 C氏를 만나 이 같은 事實을 確認했다.

    8月末 K局長은 過去에 黨쪽에서 일할 때 親分이 있던 아태재단 行政室長 이수동氏로부터 여러 次例 ‘만나자’는 電話를 받았다. 李氏는 用件을 밝히지 않은 채 K局長이 “電話로 얘기하자”고 해도 繼續 만나자고 했다. 北風事件 때문일 것이라고 斟酌한 K局長은 李氏를 만날 때 報告書 草案을 들고 나갔다.

    두 사람은 9月1日 點心때 韓定食집 ‘忍冬草’에서 만나 食事를 함께했다. 李氏는 “김동신을 調査한다고 얘기 들었다”며 “김동신과 나는 親舊 사이여” “김동신, 참 괜찮은 사람이니 잘 봐줘” 하면서 金總長에 對한 ‘善處’를 付託했다. K局長이 “나이 差異가 나는데 어떻게 親舊냐”고 묻자 “兄 동생 하는 사이”라고 고쳐 말했다.

    K局長은 李氏에게 “김동신 總長은 北風事件의 核心人物은 아니지만 附和雷同한 側面이 있다”고 金總長에 對한 調査背景을 說明했다. 李氏는 說明을 듣고 나서 웃기만 했다. K局長은 “똑바로 알고 계시라”며 李氏에게 調査報告書 草案을 보여줬다. 李氏는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自身의 洋服 안주머니에 집어넣으려 했다. K局長이 “이거 가져가면 큰일난다”며 道路 뺏었다.

    李氏가 繼續 金總長을 斗頓하면서 ‘善處’를 付託하자 K局長은 “김동신 總長 關聯 部分이 빠져도 報告書를 作成하는 데는 問題없다. 報告書에서 김동신 總長의 이름을 빼줄 수도 있다”며 李氏를 안심시켰다. 李氏는 고맙다는 人事를 했다.

    當時 金總長의 政治權 救命로비 疑惑에 對해서는 이런 證言도 있다. 金總長과 親分이 있는 與黨 L議員의 補佐官은 金總長이 ‘救命’을 위해 몇몇 政治權 人士와 接觸했다는 ‘情報’를 接하고 金總長室에 電話를 걸어 그 事實을 確認했다. “그런 일 있으면 왜 우리한테는 얘기하지 않았느냐” 고 묻자 總長 祕書室의 한 關係者는 “조용히 處理하려다 보니 그렇게 됐다”고 對答했다.

    이수동氏가 K局長을 만난 다음날인 9月2日엔 또 하나의 事件이 벌어졌다. K局長에게 北風事件에 對한 金OO 大領의 證言을 뒷받침하는 陳述書를 써준 金OO(當時 호서대학교 學軍團長) 中領이 ‘怪漢’들에게 납치당할 뻔한 일이다. 北風事件 當時 合參 徵候分析將校였던 金中領은 韓美聯合司令部의 美軍側 實務者와 워치콘(WATCH CONDITION·情報監視態勢) 格上 問題를 協議했다(상자기사 參照).

    靑瓦臺 報告書에 添附된 金中領의 陳述書에는 當時 狀況이 仔細히 描寫돼 있다. 陳述書에 따르면 9月2日 새벽 2時30分께 金中領의 宿所(忠南 아산시 배방면 모산리 所在 보림빌라 305號)에 2∼3名으로 推定되는 ‘怪漢’들이 侵入했다. 그들은 房門을 두드리며 “金OO 中領이 맞냐?”고 身分을 確認한 後 “같이 가보면 안다”며 同行을 要求했다.

    金中領이 身分을 밝힐 것을 要求하며 門을 열지 않고 버티자 그들은 그냥 돌아갔다. 金中領은 卽時 部隊 當直室에 連絡한 後 執務室로 復歸했다.

    2000年 10月 민주당 정대철 議員은 國防部 國政監査를 통해 金OO 大領 連行事件과 金OO 中領 拉致未遂事件을 問題 삼기도 했다. 金中領은 自身에 對한 拉致企圖가 軍 搜査機關의 所行이라고 여겼다.

    김성재 民政首席을 통해 北風事件報告書가 大統領에게 報告된 것은 1999年 9月 中旬. 報告書에는 이수동氏의 ‘期待’와는 달리 김동신 總長의 이름이 빠지지 않았다. 金總長의 北風事件 關聯 行跡은 勿論 ‘靑瓦臺 調査 妨害 嫌疑’에 對해서도 仔細히 記錄됐다.

    金首席은 이날 한 時間 假量 金大統領을 單獨面談, 北風事件 調査結果를 報告했다. 大統領이 큰 關心을 보여 金首席은 뿌듯해 했다. 그 며칠 前에 金首席은 靑瓦臺 執務室에서 正服 차림의 金OO 大領과 만나 北風事件 關聯 證言을 直接 들었다.

    報告書가 大統領에게 올라간 後 某 國家情報機關의 丈人 A氏가 大統領을 面談, 김동신 總長의 無辜함을 主張했다. 김동신 總長이 辭退한 것은 그로부터 한 달쯤 뒤인 10月26日이다.

    現在 學術振興財團 理事長인 金成宰 前首席은 北風事件 報告書와 關聯해 “靑瓦臺는 搜査權이 없기 때문에 北風事件의 眞實을 完全히 밝히지는 못했다. 다만 輿論收斂 次元에서 大統領에게 報告했다”고 回顧했다.

    陸軍參謀總長에서 물러난 김동신氏는 민주당 安保委員會 顧問을 맡아 黨쪽에서 活動했다. 2000年 總選 때는 光州 地域에서 민주당 L議員에 對한 贊助遊說를 하고 光州市支部가 主管한 政黨演說會에 參席하는 等 選擧 支援에 나서기도 했다.

    ‘北風事件 關聯者’라는 꼬리票가 따라다니던 그가 지난해 3月26日 國防部長官에 任命되자 政治權과 國防部 周邊에서는 拔擢 背景으로 그가 軍內 代表的인 ‘美國通’이라는 點을 꼽았다. 當時 韓美關係는 햇볕政策에 對한 異見으로 크게 삐걱거리고 있었다. 그해 1月 出帆한 부시 行政府가 ‘힘의 外交’를 앞세워 對北强勁策을 폈기 때문이다.

    金長官 自身도 拔擢 背景에 對해 “最近 安保 側面에서 韓美關係가 重要하다. 軍生活을 하면서 韓美軍事關係에 對한 實務經驗이 있다는 點과 現在 美 行政府 安保팀의 主要 核心人士들과의 個人的 交分 等이 考慮됐을 것”이라고 말했을 程度다.

    金長官이 ‘美國通’이라는 事實은 軍經歷에서도 드러난다. 陸士21基인 그는 光州 出身으로 광주일고를 卒業했다. 初任將校 時節 서울대 英文學科에 編入, 1969年 卒業狀을 받았다. 1976年 美 陸軍 指揮參謀臺를 卒業했고 1980年代 後半에는 美 海軍大學院 硏修를 거쳐 英國 國防對를 卒業했다.

    主로 政策 部署에서 頭角을 나타낸 그는 國防部와 合參의 要職를 두루 거쳤고 1996年 10月엔 美國 政府의 입김이 剛하게 作用한다는 韓美聯合司 副司令官(大將)에 任命됐다. 그는 國防部長官에 任命되기 두 달 前인 지난해 1月 美國 政府로부터 功勞勳章을 받은 것을 비롯해 美國으로부터 네 次例 勳章 및 褒賞을 받았다.

    이런 經歷 탓인지 一部 言論은 그의 長官 任命과 FX事業을 비롯한 10兆원臺 武器事業의 向方을 連結시키기도 했다. 當時 몇몇 日刊紙는 長官 프로필 記事에서 그가 北風事件에 關聯됐다는 點을 짤막하게 言及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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