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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敎 銅鐘 껴안은 現存 最古 韓屋 敎會, 强化聖堂의 祕密|新東亞

2022年 7 月號

佛敎 銅鐘 껴안은 現存 最古 韓屋 敎會, 强化聖堂의 祕密

[名作의 祕密]

  • 이광표 西原大 휴머니티敎養大學 敎授

    kpleedonga@hanmail.net

    入力 2022-07-10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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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실리카, 江華島에서 韓屋을 만나다

    • 聖公會의 江華島 土着化

    • 儒敎·佛敎·基督敎 調和를 이루다

    • 果敢함·치밀함 어떻게 可能했나

    인천 강화군 강화읍에 위치한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한옥 양식 성당이다. [이광표]

    仁川 江華郡 강화읍에 位置한 大韓聖公會 强化聖堂은 韓國에서 가장 오래된 韓屋 樣式 聖堂이다. [이광표]

    강화성당 천장. 한옥과 바실리카 양식이 혼용돼 있다. [이광표]

    强化聖堂 天障. 韓屋과 바실리카 樣式이 混用돼 있다. [이광표]

    1900年 11月 江華島 한복판 강화읍 관청리의 야트막한 언덕에 西洋 敎會가 하나 들어섰다. 開化의 물결을 따라 들어온 西洋 敎會라고 하면 뾰족지붕 尖塔에 十字架가 우뚝 서 있어야 할 텐데 그 模樣은 韓屋을 닮았다. 豫想을 벗어난 外觀에 强化 사람들은 놀라움을 禁치 못했다. 西洋 敎會와 韓屋, 그 異質的인 것들의 만남은 낯선 風景이었다. 大韓聖公會 强化聖堂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韓屋 敎會 建物이다. 事實 韓屋 敎會는 곳곳에 있다. 그런데 强化聖堂은 흔히 만나는 韓屋 敎會와 좀 다르다. 낯선 것과의 만남의 樣相이 좀 더 複雜하고 內密하기 때문이다.

    江華島는 섬이다. 바다로 둘러싸인 섬은 一見 바다에 갇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反面 航海를 나선 사람들의 視角에서 섬은 一種의 通路다. 바다를 지나 陸地나 또 다른 섬으로 移動하는 停留場이 될 수 있어서다.

    섬과 바다는 世界로 進出하는 通路였지만 外部 勢力이 浸透하는 侵略의 橋頭堡로 惡用되는 境遇도 많았다. 近代期 韓半島의 섬들이 그러했다. 近代期 外部 勢力으로부터 侵略당한 섬들은 大部分 政治的·軍事的 要衝地였다. 要衝地는 疏通性이 剛하다는 걸 의미한다. 結局 섬의 疏通에는 안타깝게도 侵略이라는 要素가 숨어 있는 셈이다.

    서울의 關門인 江華島. 1876年 江華島條約 以後 20世紀 初까지 江華島는 西歐 近代 文物 流入의 最前線이었다. 그렇기에 江華島에는 이런저런 近代遺産이 많이 남아 있다. 近代 歷史의 傷痕도 많다. 到處에 丙寅洋擾(丙寅洋擾)와 辛未洋擾(辛未洋擾)의 痕跡이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프랑스軍의 ‘외규장각 儀軌 掠奪’도 이곳 江華島에서 벌어진 일이다. 江華島 海岸을 따라 造成된 廣城堡, 초지진 等의 軍事 遺跡도 그 뼈아픈 傷痕 가운데 하나다.

    江華島, 西洋 宗敎를 만나다

    西洋 宗敎는 近代期 强化 사람들이 만난 異國 文物 가운데 하나다. 그 무렵, 西洋 宗敎 流入은 江華島만의 일은 아니었다. 宗敎의 側面에서 봤을 때, 西歐 社會의 宗敎가 朝鮮 社會에 ‘合法的’으로 流入되는 過程이었다. 不過 數十 年 前만 해도 酷毒했던 天主敎 迫害가 벌어졌으니, 隔世之感(隔世之感)도 이런 隔世之感은 없었을 것이다.



    江華島 地域에선 어느 곳보다 改新敎의 宣敎가 活潑했다. 江華島의 政治·地理的 特性 德分이다. 監理敎, 長老敎, 英國聖公會의 宣敎師들이 江華島로 들어왔고 江華島는 草創期 改新敎의 電波 過程에서 核心 役割을 했다. 改新敎의 仁川 宣敎는 1880年代 後半 始作됐고, 江華島 宣敎는 1893年 처음 始作됐다. 이듬해인 1894年 江華島에 最初의 改新敎 禮拜堂인 校山敎會(監理敎)가 생겼고, 以後 宣敎活動이 擴散되면서 1896年 紅衣敎會(監理敎)가 들어섰다. 江華島의 附屬 圖書인 석모도에도 1898年 첫 改新敎會人 三南敎會(監理敎)가 세워졌다. 當時 改新敎는 宣敎 過程에서 江華島 住民과 葛藤을 겪기도 했지만 地域의 有力 人士들과 손잡고 新敎育을 實施하고 啓蒙運動을 이끌면서 地域과 調和를 이뤄나갔다.

    强化人 마음 사로잡은 聖公會

    1906년 인천 강화군 길상면에 건립된 대한성공회 온수리 성당의 솟을대문. 이광표

    1906年 仁川 江華郡 길상면에 建立된 大韓聖公會 온수리 聖堂의 솟을大門. 이광표

    近代 改新敎의 江華島 宣敎에선 英國聖公會(以下 聖公會)의 活躍이 두드러졌다. 聖公會는 初期에 서울과 仁川 中心으로 宣敎를 展開했다. 1891年 서울보다 먼저 仁川에 最初의 禮拜堂인 내동敎會(미카엘 聖堂)를 세운 聖公會는 1893年부터 江華島 地域에서 宣敎를 始作했다. 豫備 信者가 생기고 禮拜에 參與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聖公會는 1897年 强化聖堂(性 베드로와 바오로 聖堂)을 設立했고, 이어 1900年 韓屋으로 敎會 建物을 新築했다. 그것이 바로 只今의 强化聖堂이다. 이어 1906年 韓屋으로 온수리 聖堂을 新築했으며 以後 1936年까지 繼續 韓屋으로 敎會를 지었다. 1910年에도 席毛島 석포리에 韓屋으로 석포리敎會(성모마리아會堂)를 지었다.

    이 같은 韓屋 敎會 新築 雰圍氣는 監理敎에도 影響을 주어 1923年 江華島의 附屬 圖書인 注文圖에 監理敎 西道中央敎會가 韓屋으로 지어졌다. 勿論 韓屋 敎會가 江華島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全北 金堤의 錦山敎會(1908), 忠南 論山 强勁의 북玉監理敎會(1923), 忠北 鎭川의 鎭川聖堂(1923) 等 여러 곳에 있지만 江華島처럼 한 地域에 集中的으로 韓屋 敎會가 造成되는 事例는 드물다.

    聖公會 信者도 많았고 敎會도 많았다. 1910年엔 江華島의 聖公會 敎會가 全國 聖公會 敎會의 37.5%를 차지했다. 江華島가 서울의 關門이었다고 해도 成功會 信者가 이렇게 많았다는 事實을 어떻게 理解해야 할까. 이를 두고, 聖公會의 ‘江華島 土着化’라고 說明하는 이들이 많다. 그럼, 여기 어떤 背景이 깔려 있는 것일까.

    海軍士官學校가 聖公會 宣敎에 미친 影響

    于先 江華島 特有의 思想的 情緖를 꼽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下曲學(霞谷學)으로 대표되는 强化學派(江華學派)의 思想이다. 夏穀學이라고 하면, 河谷(霞谷) 정제두(鄭齊斗)와 그 後學의 學問 世界를 말한다. 이들은 性理學의 名分論에서 벗어나 現實 中心의 陽明學을 土臺로 朝鮮 社會의 矛盾을 克服하고자 했다. 江華島의 이 같은 雰圍氣는 强化 사람들이 西洋 宗敎를 拒否感 없이 받아들이는 데 적잖은 도움을 주었다.

    宣敎師들은 이런 雰圍氣를 積極 活用했다. 江華島와 韓國의 傳統文化를 理解하고 椄木하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强化 地域에서 活動한 宣敎師들은 宣敎 過程에서 江華島의 敎育事業과 啓蒙運動에 積極 參與했다. 그 中에서도 英國聖公會 宣敎師들은 韓國의 文化와 傳統에 더욱 각별한 關心을 쏟았다. 江華島의 歷史와 文化, 샤머니즘, 風水地理, 佛敎 같은 傳統 信仰에도 關心을 가졌다. 聖公會 宣敎師들은 韓國 宣敎를 始作하기 前 英國에서 韓國 宣敎 雜誌 ‘The Morning Calm’을 創刊했다. 이 雜誌에 江華島의 文化와 傳統, 宣敎 所感 等을 持續的으로 寄稿했다. 이 雜誌에 熱心히 寄稿한 宣敎師 가운데 한 名이 마크 트롤로프였는데 그가 바로 强化聖堂 建築을 主導한 人物이다.

    그런데 이것이 全部가 아니다. 英國聖公會의 流入과 宣敎는 當時 高宗의 海軍 養成 政策과 密接한 關聯이 있다. 1893年 高宗 政府는 海軍의 力量을 强化하기 위해 英國의 도움을 받아 幹部 養成 學校를 江華島에 設立했다. 冢弟영학당(總制營學堂)으로 只今의 海軍士官學校人 셈이다. 英國 海軍의 支援을 받았으니 敎官은 當然히 英國 海軍 將校들이 맡았다. 이렇게 해서 海軍 將校를 꿈꾸는 젊은이들이 江華島에 몰렸고, 冢弟영학당에 對한 强化 住民들의 期待도 높아졌다.

    이러한 雰圍氣는 聖公會의 宣敎에 肯定的으로 作用했다. 冢弟영학당은 이듬해 廢校됐지만, 1897年 聖公會가 冢弟영학당의 敎官 官舍와 땅을 買入해 宣敎 本部로 活用함으로써 聖公會의 江華島 宣敎는 더욱 活性化됐다. 高宗의 政治·軍事·外交的 判斷이 結果的으로 聖公會 宣敎에 커다란 影響을 미친 셈이다.

    儒敎, 佛敎 끌어안은 聖公會의 執拗함

    강화성당 정문인 외삼문. [이광표]

    强化聖堂 正門인 外三門. [이광표]

    聖公會는 이러한 餘勢를 몰아 强化聖堂을 짓기로 했다. 野心滿滿한 프로젝트였다. 1899年 이 프로젝트를 主導한 사람은 韓國 文化와 傳統에 關心 많은 트롤로프였다. 그는 강화읍 都心의 야트막한 傾斜地를 求해 배 模樣으로 造成했다. 노아의 方舟를 본뜬 것이다.

    建物은 韓屋과 비슷하게 짓기로 했다. 西洋 建築樣式을 固守하던 다른 敎會와 比較하면 破格的 宣敎 戰略이다. 100年 된 白頭山 소나무를 救해 鴨綠江 뱃길로 運搬해 들여왔으며 景福宮 重修에 參與했던 一級 都편수를 招聘했다고 한다. 그 都편수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트롤로프가 最高의 建築物을 짓기 위해 어느 程度 心血을 기울였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1900年 11月 完工된 强化聖堂은 國內에 現存하는 韓屋 敎會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경사진 길을 따라 石築 階段을 지나면 正門(外三門)-內三門(鐘閣)-聖堂 本堂-司祭館으로 이어진다. 本堂 建物은 重層(重層) 救助의 韓屋으로 東西 10칸, 南北 4칸이다.

    通常的 方式과 달리 側面을 正面 出入口로 活用함으로써 길쭉한 禮拜堂의 形態를 갖췄다. 外觀과 基本 목家具(木架構)는 傳統 韓屋 樣式이지만 內部는 바실리카 敎會 樣式을 取하고 있다. 바실리카 樣式의 가장 큰 特徵은 두 줄의 기둥을 세워 內部 空間을 3分割하는 것이다.

    建物은 곳곳에서 韓屋의 要素를 살렸다. 聖堂 지붕 龍마루에 올라앉은 十字架가 印象的이다. 그 八作지붕 合刻 아래에 ‘天主聖殿(天主性展)’이라는 漢字 懸板이 있고, 正面 기둥에는 柱聯(柱聯·기둥이나 壁에 걸어두는 文句)을 걸었다. 모두 聖經 文句를 漢字로 解釋한 것이다. 內部의 祭壇 中央 위엔 하느님을 의미하는 ‘萬有眞原(萬유진원)’ 懸板이 걸려 있다. 說敎臺와 洗禮臺 위에도 聖經의 意味를 表現한 漢字 文句가 여럿 새겨져 있다.

    內部 天障 空間은 서로 넘나드는 목家具 不在들이 어우러지면서 幾何學的이고 立體的인 雰圍氣를 演出한다. 이렇게 强化聖堂은 여러모로 異色的이다. 建物 구석구석에 그 낯섦이 살아서 꿈틀거린다. 妙한 魅力이다.

    트롤로프는 이런 모습을 통해 異質的 西歐 宗敎에 對한 强化 사람들의 拒否感을 稀釋하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 韓屋 敎會 强化聖堂의 낯섦은 近代期에 들어선 여러 韓屋 敎會와 質的으로 差異가 난다. 韓國的 傳統의 借用과 活用이 좀 더 깊고 執拗했기 때문이다. 東西洋의 單純한 만남의 次元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건 立地와 建物 配置에서 잘 드러난다. 强化聖堂에 가면 禮拜堂 建物에만 머물러선 困難하다. 周邊을 꼼꼼히 둘러보아야 한다. 그러면 豫想치 못한 어떤 것들을 만나게 된다.

    于先 儒敎的 雰圍氣를 들 수 있다. 强化聖堂은 立地와 建物 配置에서 韓國의 傳統 鄕校(鄕校)와 닮아 있다.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位置하고 있으며 階段-外三門-內三門(鐘閣)-聖堂 順으로 建物을 配置한 點이 그렇다. 이런 構成은 마을 어귀에 位置한 鄕校 雰圍氣를 풍긴다. 傾斜地의 이런 配置는 査察과 비슷한 點이기도 하다. 하지만 出入門(外三門)을 보면 영락없는 鄕校의 雰圍氣다.

    불교 사찰의 범종과 비슷하게 생긴 강화성당의 종.[이광표]

    佛敎 寺刹의 梵鍾과 비슷하게 생긴 强化聖堂의 鐘.[이광표]

    强化聖堂은 또한 佛敎的이다. 이는 菩提樹와 同種(銅鐘)에서 克明하게 드러난다. 强化聖堂의 境內에는 菩提樹가 있다. 菩提樹는 佛敎의 象徵이다. 이 菩提樹는 트롤로프가 印度에 苗木을 直接 注文해 심은 것이라고 한다. 놀라운 일이다. 銅鐘은 1914年 英國에서 만들어 가져온 것으로, 西洋式 敎會 種이 아니라 우리네 査察의 鐘 模樣이다. 그 銅鐘을 內三門 鐘閣(鐘閣)에 걸어놓았다. 트롤로프가 建築 空間 곳곳에 儒敎, 佛敎 等 韓國의 傳統 要素를 積極的으로 導入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그 異質的인 것의 調和는 우리의 想像을 뛰어넘는다. 트롤로프의 緻密함과 執拗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强化聖堂을 보는 여러 視線

    强化聖堂 入口 階段에는 이런 案內板이 세워져 있다.

    “1910年 韓國을 强制로 倂合한 日本帝國은 植民統治 末期인 1943年, 大東亞戰爭 遂行을 위해 國民總動員令과 더불어 戰爭 物資 供出을 理由로 강화읍 敎會의 正門 階段 欄干과 種을 强制로 押收했다. 韓日 聖公會의 交流를 통해 이러한 事實을 알게 된 日本 聖公會의 聖職者와 信者들은 過去 日帝가 일으킨 侵掠 戰爭을 懺悔하고 韓日 兩國의 眞正한 和解와 東아시아의 平和 共存을 念願하는 마음을 담아 韓日强制倂合 100年을 맞이한 2010年 11月, 강화읍 敎會 築城 110周年 記念日에 正門 階段 欄干을 復元하여 奉獻하였다. 이에 大韓聖公會는 지난 過去의 過誤를 懺悔하고 平和를 向한 敎會의 永遠한 社名을 歷史 속에서 實踐한 日本 聖公會의 勇氣에 感謝와 連帶의 뜻을 표한다.”

    案內文이 感動的이다. 이렇게 欄干은 되살아났다. 同種의 境遇, 1989年 聖堂의 信者들이 힘을 合해 다시 만들어 設置해 놓았다.

    그런데 强化聖堂을 보는 눈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른 것 같다. 强化聖堂이 建立된 이듬해인 1901年 大韓聖公會의 1代 主敎 찰스 존 코프(C. J. Corfe)는 이렇게 말했다. “새 聖堂은 다른 建物들과 調和롭게 位置했으며 市內를 品格 있게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聖堂의 모습이 두드러지거나 傲慢함은 없습니다.”(‘The Morning Calm’, N.87, 1901. 박장희, ‘英國聖公會의 江華島 宣敎와 特徵’)

    누군가는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누군가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고개를 가로젓는 이들은 “强化 都心 한복판 높은 언덕에서 周邊 建物을 내려다보는 것은 그 自體로 傲慢함이 아닐 수 없다”고 批判한다.

    內密한 祕密

    저마다 생각은 다르겠지만, 트롤로프의 試圖는 매우 果敢한 것이었다. 그 果敢함은 다른 韓屋 敎會들과 比較할 때 뚜렷이 나타난다. 近代期 다른 地域의 韓屋 敎會는 大槪 밋밋히다. 그러나 强化聖堂은 全體的인 配置는 勿論이고 구석구석에서 緻密함을 發見할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1906年 建築된 聖公會의 江華島 온수리 聖堂에서도 發見된다. 온수리 聖堂은 솟을大門의 가운데 칸을 높게 올려 鐘閣으로 活用하고 있다. 놀라운 破格이다. 이 또한 트롤로프가 建築한 韓屋 敎會다.

    어떻게 이런 果敢함과 緻密함이 可能했을까. 그것은 트롤로프 個人의 意志와 熱情도 作用했겠지만, 江華島 定着 過程에서 聖公會가 確保한 自信感이 한몫했기 때문이 아닐까. 雜誌를 만들 程度로 韓國 文化에 體系的인 關心을 가졌던 聖公會 宣敎師들, 冢弟영학당 敎官 國家로서 누렸던 政治的 利點, 이에 對해 江華島 사람들의 友好的 反應, 이런 狀況을 正確하게 把握한 트롤로프의 緻密하고 具體的인 計劃…. 結果的으로 高宗이 重要한 한 軸을 擔當했다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强化聖堂은 單純한 韓屋 敎會가 아니다. 겉으로 보면 韓屋과 西洋 敎會의 平凡한 만남인 듯하지만 그 裏面엔 이렇게 複合的인 樣相이 重疊해 있다. 時代 흐름의 自然스러운 産物인 것 같지만 거기 政治的 意味가 숨어 있었고 宣敎師들의 緻密한 熱情이 녹아 있다. 이것이 19世紀 末~20世紀 初 江華島의 雰圍氣였다. 그 複雜多端한 모멘텀이 敎會 建築으로 絶妙하게 具現된 것이 바로 强化聖堂이다. 이것이 强化聖堂의 眞正한 魅力이 아닐까.


    이광표
    ● 1965年 忠南 豫算 出生
    ● 서울대 考古美術史學科 卒業
    ● 高麗大 大學院 文化遺産學協同過程 卒業(博士)
    ● 前 동아일보 論說委員
    ● 著書 : ‘그림에 나를 담다’ ‘손 안의 博物館’ ‘韓國의 國寶’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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