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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떠돌이 丈人’ 身世… “길게 버티면 10年”|新東亞

어쩌다 ‘떠돌이 丈人’ 身世… “길게 버티면 10年”

世運商街 再開發로 쫓겨난 곳에 또 再開發

  • 진현준 高麗大 미디어學部 4學年

    jhj980912@korea.ac.kr

    入力 2022-07-05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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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第2의 세운’으로 통한 文來洞

    • “쫓겨난 社長님들 다 이리로 왔다”

    • “넓은 空室 없어 짐 줄여야 했다”

    • 아예 끊긴 去來先, 稀貴해진 部品

    • 이미 물밑 作業… “또 이 짓 反復”

    철거를 앞둔 세운지구 일대. 일부 구역에선 이미 재개발이 진행돼 아파트가 건설되고 있다. [진현준]

    撤去를 앞둔 世運地區 一帶. 一部 區域에선 이미 再開發이 進行돼 아파트가 建設되고 있다. [진현준]

    굵은 고딕체 글씨에 때 묻은 鐵製 看板, 녹슨 슬레이트 지붕 사이 굽이굽이 난 좁은 골목길. 쇠 두드리는 소리, 機械 돌아가는 소리가 兩옆에서 쏟아진다. 서울 都心 한복판, 世運商街 兩쪽으로 펼쳐진 서울 製造業의 搖籃 ‘世運地球’에는 5坪 남짓한 작은 店鋪에서 熱情을 태우는 小工人들이 있다. 大多數는 30年 넘게 같은 技術로 일해 온 熟鍊工이다.

    3年 前 熟鍊工 中 數十 名이 이곳을 떠났다. 世運地區 一部 區域에서 始作된 再開發 때문이다. 빨간 조끼를 맞춰 입고 反對 示威까지 벌였지만, 時空社로부터 通帳 押留 壓迫을 받고 法院까지 드나들어야 했다. 貰入者 身世에 더는 버틸 수 없던 사람들은 살길을 찾아 店鋪 移轉을 決定했다. 筆者는 그中 8割 以上이 向했다는 서울 永登浦區 文來洞과 구로구 신도림동으로 向했다. 이곳에서 세운지구와 離別한 後 소工人들이 밟아온 삶의 軌跡을 追跡했다.

    2019年 12月은 쫓겨난 이들에게 酷毒한 겨울이었다. 示威도 하고 言論에 呼訴도 해봤지만 再開發을 막을 수는 없었다. 結局 새로 定着할 곳을 찾는 方法밖엔 남지 않았다. 製造業者들에겐 製品 製作에 必要한 部品 및 資材 調達과 協業이 生命이다. 多樣한 分野의 熟鍊工과 稀少한 部品이 櫛比한 世運地區 내 店鋪는 最適의 選擇肢였다. 一部 小公認은 中區 산림동 一部 建物로 자리를 옮겼다. 再開發로 아파트가 建設되는 世運地球 3-1區域 코앞에서 시보리 工場을 運營하는 박춘삼(63) 氏는 “산림동 쪽으로 간 사람들이 조금 있다”며 “元來 있던 곳과 가까우니까 그리로 간 것”이라고 說明했다.

    不動産 발품 팔아 다시 뭉친 ‘世運地球 社長’들

    용접 기술로 프레임과 소기계부품을 제작하는 권영문(68) 씨, 2019년 12월 문래동 공업단지로 공장을 이전했다. [진현준]

    鎔接 技術로 프레임과 小機械部品을 製作하는 권영문(68) 氏, 2019年 12月 文來洞 工業團地로 工場을 移轉했다. [진현준]

    大部分은 世運地球 近處 空室을 찾지 못했다. 다음 候補地는 永登浦區 文來洞이었다. 世運地球 小公認들에게 문래동은 ‘第2의 세운’으로 통했다. 文來洞에는 金屬 加工 및 機械 製造 關聯 小公認 業體만 1300餘 個가 密集해 있다. 世運地球만 못하지만 基礎 金屬 加工부터 주조, 鎔接 接合, 熱處理까지 多樣한 工程을 한곳에서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이다.

    精密機械를 製作하는 김영남(71) 氏도 같은 생각이었다. 世運地區에서만 30年 넘게 일한 金氏는 3年 前 어렵게 道林川 近處 大路邊에 자리를 잡았다.



    “여기가 工業地域이니까 쫓겨난 社長님들 다 이리로 오셨죠. 처음엔 힘들었어도 어떻게든 다들 자리를 잡긴 했어요.”

    金氏 外에도 20餘 個 業體가 문래동으로 넘어왔다. 空室을 찾고 建物主를 說得하는 고된 過程을 거쳤다. 鎔接 技術로 프레임을 製作하는 권영문(68) 氏는 문래동에 자리를 잡겠다며 不動産을 다섯 군데나 돌아다녔다. 한 달 동안 발품을 판 끝에 어렵사리 空室을 찾았다.

    “나는 겨우 옮겼지. 문래동이 唯一한 選擇地였는데 다른 데 어디를 가겠어. 다른 社長들이랑 같이 와야지.”

    신도림동에서 鑄物 工場을 運營하는 김학률(66) 氏도 週末에 時間이 날 때마다 돌아다니면서 空室을 찾았다. 30坪 規模의 큰 工場을 옮길 場所는 마땅치 않았다.

    “넓은 空室이 없어서 짐을 줄여야 했어요. 數千 個 되는 所重한 製品 샘플 中 80%를 녹여버렸죠. 그러고도 鑄物 工場이라는 理由로 받아주지 않는 곳도 있었어요. 불이라도 나서 建物이 망가질까 걱정돼 그런 거죠.”

    金氏는 2020年 7月에야 겨우 신도림동에 空室을 救했다. 文來洞 大路邊과는 徒步로 20餘 分 떨어진 외진 곳이다.

    2018년 철거 반대 시위 당시 사진작가 신희옥 씨가 찍은 사진들, 왼쪽 사진 가운데 피켓을 가장 높이 들고 있는 남성이 김영남(71) 씨다. [진현준]

    2018年 撤去 反對 示威 當時 寫眞作家 신희옥 氏가 찍은 寫眞들, 왼쪽 寫眞 가운데 피켓을 가장 높이 들고 있는 男性이 김영남(71) 氏다. [진현준]

    世運地球 出身 同僚 小公認은 서로 依支하며 살아간다. 권영문 氏는 아직 店鋪 近方에서 協業하는 몇 個 業體 社長 말고는 새로 알고 지내는 技術者가 없다. 代身 함께 떠나온 星雲精密機械 社長과 家族처럼 生活한다. 두 店鋪는 歌癖을 두고 서로 連結돼 있다. 店鋪 入口 앞에는 2018年 한 作家가 찍어준 옛 세운 同僚들과 함께한 모습이 담긴 寫眞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헤어지기 싫어서 일부러 이렇게 자리를 잡았지. 같이 온 사람들하고야 맨날 밥도 같이 먹고 繼續 얼굴 보면서 지내고, 일 없으면 앉아서 얘기도 좀 하고….”

    하루면 되던 일도 며칠씩 걸려

    김학률 씨는 2000여 개에 육박하는 제품 샘플을 녹이고 신도림으로 공장을 이전했다. 사진은 녹이지 않고 챙겨 온 제품 샘플. [진현준]

    김학률 氏는 2000餘 個에 肉薄하는 製品 샘플을 녹이고 新道林으로 工場을 移轉했다. 寫眞은 녹이지 않고 챙겨 온 製品 샘플. [진현준]

    空室을 救해 工場을 移轉했지만 適應은 또 다른 問題다. 새로운 協業 파트너는 勿論 資材와 部品을 調達할 去來處도 알아봐야 했다. 몇몇 小公認은 世運地球에 있을 때 確保해 둔 旣存 去來處와 去來를 維持해 安定的으로 工場을 運營한다. 김학률 氏는 세운지구에서부터 쌓아온 去來處와의 信賴 關係를 바탕으로 工場 移轉 後에도 去來를 이어가고 있다.

    “제가 만들어준 製品에 問題가 생기면 損害를 甘受하고 그냥 밤새워 다시 만들어주기도 했어요. 그렇게 쌓은 信賴로 物理的으로 멀어진 只今까지 去來를 持續하는 거죠.”

    金氏는 只今까지도 一週日에 한 番은 世運地球에 들러 만든 製品을 納品한다. 文來洞 業體들과 協業 關係를 形成하거나 새로운 顧客을 確保하는 데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旣存 顧客들로 버티는데, 結局 持續性이 問題예요. 하도 외진 데 있어서 사람들이 찾아오질 않아요.”

    모든 小公認이 김학률 氏 같은 것도 아니다. 一部 業者는 아예 去來先이 끊겨 어려운 狀況에 處하기도 했다. 김영남 氏는 “大部分은 어떻게든 適應하긴 했는데, 몇몇 業體는 예전만 못하다”고 說明했다. 金氏도 알고 지내던 親舊들의 도움으로 어렵게 去來先을 開拓했지만, 隣近 鍍金業體들이 사라지며 困境에 處했다. 800坪에 達하는 鍍金團地가 팔리면서 數十 個 鍍金業體가 쫓겨난 것이다. 以後 金氏가 生産한 金屬 製品에 必須的인 避幕, 鍍金 作業이 어려워졌다. 金氏는 鍍金 한 番 하겠다고 仁川 南東工團이나 京畿 시화工團까지 오가야 하게 생겼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 사람들 다 가고 나면 여기서 하루면 되던 걸 또 이틀 사흘 걸려가면서 해야 해요. 時間도 들고, 돈도 더 들고, 漸漸 不便해지는 거죠.”

    部品이나 特殊 資材를 求하는 것도 世運地球에 있을 때보다 훨씬 어렵다. 世運地區에서는 걸어서 10分이면 살 수 있는 部品도 文來洞에선 쉽게 求할 수 없어 여러 店鋪를 찾아 헤매야 한다. 特殊 資材는 아예 찾아보기 힘든 境遇가 茶飯事다.

    “오죽하면 다시 청계천을 간다니까. 거기서 발로 뛰어다니는 게 더 나을 때도 있어요.”

    “높은 사람들은 새로 짓는 게 맞는 줄만 알지”

    어렵게 문래동에 定着했지만, 數年 後면 鍍金業者들처럼 또다시 쫓겨날 處地에 놓일지도 모르는 狀況이다. 文來洞1, 2, 4街 一部 地域은 2013年 7月 整備區域으로 指定됐다. 그中 文來洞4가에서는 2019年 再開發組合設立推進委員會가 構成됐다. 2021年 9月에는 再開發 住民同意率이 71%를 넘어서 再開發組合 設立 要件인 75% 目前에 다다랐다. 現在도 土地 및 建物 所有主를 對象으로 再開發 需要 調査가 進行되고 있다.

    현대건설, GS建設, 포스코建設, DL E&C 等 多數 建設社 關係者들은 文來洞4街 地域을 訪問해 土地所有主들과 물밑에서 接觸하고 있다. 이희영(48) 文來不動産 代表는 “主人들은 大體로 贊成하는 輿論인데, 다만 補償이 어떻게 이뤄지느냐의 問題”라고 說明했다.

    땅 主人들과 달리 製造業者들은 다시 生業의 터를 잃게 될까 걱정이 앞선다. 김영남 氏도 再開發 이야기가 나오자 한숨부터 쉬었다.

    “아직 찾아오지는 않는데, 땅 買入하는 물밑 作業은 이미 돌아가고 있어요. 狀況 돌아가는 거 보면 여기도 얼마 안 남았지. 난 길게 버티면 여기서 앞으로 10年 봐요.”

    권영문 氏도 再開發 消息에 걱정이 泰山이다.

    “世運에서 나올 때도 집主人이 房 안 뺀다고 繼續 불러대 法院을 몇 番을 갔어. 또 이 짓을 反復한다니. 何如튼 높은 사람들은 좀 낡고 낮은 建物은 다 때려 부수고 새로 짓는 게 맞는 줄만 알지.”

    製造業者 大部分은 建物 貰入者 身分이기 때문에 再開發과 關聯해 醫師를 表現해도 反映되지 않는다. 다시 再開發이 始作되면 報償費 策定 節次를 거쳐 世運地球의 前轍을 밟는 수밖에 없다. 李 代表는 “再開發에 權利를 行使할 수 있는 건 집과 땅 主人이니 當然히 貰入者 權利는 保障되지 않는다”고 說明했다.


    “뿌리 産業, 이대로 죽일 순 없잖아?”

    권영문 씨가 용접 기술을 직접 선보이고 있다. [진현준]

    권영문 氏가 鎔接 技術을 直接 선보이고 있다. [진현준]

    어쩌다 ‘떠돌이 丈人’ 身世가 되게 생겼지만, 小公人들은 일을 繼續할 생각이다. 事實 60代 初盤이면 막내 축에 낄 程度로 大部分의 小公認은 隱退해도 異常하지 않을 나이다. 永登浦·경인로 都市再生志願센터 ‘마이팩토리’에 따르면 現在 文來 地域 小公認 中 80% 以上이 50代 以上으로 고령화됐다. 그럼에도 繼續 일하려는 것은 自身들의 技術을 지켜야 한다는 匠人精神과 使命感 때문이다.

    권영문 氏는 35年 동안 鐵製 프레임을 만들어왔다. 흔한 技術처럼 보여도 本人이 하면 精密함이 다르다며 自負心을 드러냈다.

    “完璧하게 할 수 있는 건 나처럼 나이 먹은 技術者들밖에 없어. 이런 게 丈人精神이지. 젊은 親舊들 해놓은 거 보면, 虛, 到底히 내가 일을 그만둘 수가 없어. 100살까지라도 해야지.”

    김영남 氏도 金屬 部品 製作과 加工 技術로 50年째 일하고 있다. 金 氏는 日曜日에도 往復 세 時間 걸려 出退勤하는 ‘熱血 丈人’이다. 韓國 最初 宇宙人 이소연 博士가 宇宙로 가져갔던 ‘等高線 撮影機’도 金氏의 손끝에서 만들어졌다. 日曜日 點心時間에도 金氏는 요트에 들어가는 金屬 部品을 3D 모델링하고 있었다. 0.0001㎜ 單位의 매우 精密한 作業을 要求하기에 꼼꼼함은 必須 素養이다. 金氏의 오랜 단골 顧客인 최원태(78) 氏는 競技 楊平 양수리에서부터 먼 길을 달려 코일 部品 샘플을 받으러 왔다. 崔氏는 金氏의 꼼꼼함에 아직도 去來를 이어가고 있다.

    “코일 샘플 만드는 데는 正確度가 生命이거든요? (金氏는) 참 正確하고 꼼꼼한 분이라 믿고 맡기죠.”

    文來洞 小公認 中 88.6%는 金氏와 權氏처럼 10年 以上 經歷을 保有한 熟鍊工이다. 平均 經歷만 22.7年. 이들의 高級 技術을 傳受받을 사람은 턱없이 不足하다. 3D 業種이라 여겨지는 金屬製造業에 젊은 世代가 關心을 두지 않는 데다 팬데믹(感染病의 世界的 大流行) 以後 外國人 勞動者들마저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實際 現在 文來洞 小功業體들의 從業員 數는 平均 1.29名에 不過하다. 적지 않은 나이에 工場을 移轉하면서도 小工人들이 繼續 일하려는 理由다.

    올해 七旬人 金氏는 앞으로도 繼續 일할 것이냐는 記者의 質問에 쓴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일할 사람이 없으니까 우리가 암만 버텨도 이대로라면 代案이 없어. 그래도 뿌리가 되는 産業을 이대로 죽일 순 없잖아? 나라도 힘닿는 데까지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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