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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代는 어쩌다 ‘갈라파고스 世代’ 됐나|신동아

2022年 7 月號

40代는 어쩌다 ‘갈라파고스 世代’ 됐나

[奉達號 便宜店 칼럼] 1991年 5月 焚身 柾國과 至毒한 ‘喪失의 時代’

  • 奉達號 便宜店主

    入力 2022-07-02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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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주당 더 支持하는 唯一한 世代

    • 焚身의 基底, 挫折과 喪失

    • 支配勢力에 對한 總體的 不信

    • 勝利한 적도, 主流였던 적도 없어

    • 그들은 從屬된 世代가 아니다

    1991년 4월 26일 명지대 학생 강경대가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맞아 사망한 ‘강경대 폭행치사 사건’은 학생 시위에 불을 붙였다. 사진은 당시 학생과 전경이 격렬히 대립하고 있는 모습. [동아 DB]

    1991年 4月 26日 명지대 學生 강경대가 白骨團의 쇠파이프에 맞아 死亡한 ‘강경대 暴行致死 事件’은 學生 示威에 불을 붙였다. 寫眞은 當時 學生과 戰警이 激烈히 對立하고 있는 모습. [東亞 DB]

    고(故) 김지하 시인이 1991년 ‘분신 정국’ 당시 쓴 칼럼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는 학생운동권의 반감을 샀다. 사진은 2014년 5월 22일 ‘동아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는 모습. [허문명 기자]

    고(故) 金芝河 詩人이 1991年 ‘分身 政局’ 當時 쓴 칼럼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는 學生運動圈의 反感을 샀다. 寫眞은 2014年 5月 22日 ‘東亞日報’와 인터뷰하고 있는 모습. [허문명 記者]

    風景 #1 죽음의 굿판

    1980~1990年代 學生運動圈에서 사랑받은 民衆歌謠 가운데 하나인 ‘타는 목마름으로’. 노랫말의 原作者인 詩人 김지하가 5月 8日 81歲의 나이로 世上을 떠났다. 訃告에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엔 哀悼의 글句가 잇따랐지만 “그의 變節은 容恕할 수 없다”는 독한 글도 적지 않았다. 이런 글을 쓴 사람의 相當數는 40~50代. 學番으로 따지면 88~97學番쯤이다. 朴正熙 政權 때 民主化運動으로 死刑宣告까지 받았던 ‘運動圈의 맏兄’을 까마득한 後輩들이 變節者라고 貶毁하는 까닭은 그가 後날 朴槿惠 前 大統領을 支持했던 理由도 있지만 大槪 1991年의 ‘칼럼’ 때문일 것이다. 1991年 5月 焚身 政局 때 “죽음의 굿판을 집어치워라” 一喝한 그 칼럼이다.

    風景 #2 40代 進步大學生

    서울 所在 한 中堅企業 部長인 A(46)氏는 大統領選擧 以後로 뉴스를 보지 않는다. “어떻게 그런 사람이 大統領이 될 수 있느냐”면서 尹錫悅 大統領을 認定하지 않고 “그를 支持한 民心을 도무지 理解할 수 없다”며 목소리를 높인다. 뉴스만 나오면 氣分이 나쁘다고 채널을 돌려버린다. 인터넷 뉴스도 보지 않는다. 本人이 보고 싶은 媒體만 골라 본다. 그렇다고 熱烈한 政治參與者도 아니다. 그저 平凡한 職場人일 따름이다. 大學 時節 運動圈 언저리에 있긴 했지만 核心도 아니었다. 술자리에서 “요즘 會社 新入들은 우리보다 意識이 꽉 막혔고 自己밖에 모른다”며 혀를 끌끌 찬다. 요즘 20代는 A部長 같은 사람을 ‘40代 進步大學生’이라고 부른다. 21世紀型 ‘新(新) 꼰대’의 誕生이다.

    風景 #3 이대녀, 社對南

    3月 大統領選擧와 5月 地方選擧 結果를 壓縮하자면 亦是 世代와 性別日 것이다. 20~30代는 男性과 女性이 뚜렷이 對比되는 投票 性向을 보였다. 40~50代는 全體 年齡層을 통틀어 唯一하게 民主黨 支持가 더 높게 나타난 世代가 됐다. 特히 40代 男性의 民主黨 支持는 可히 獨步的이라고 할 程度다. 放送 3社가 發表한 地方選擧 出口調査 結果에 따르면 40代 男性의 63.2%가 민주당을 支持한 것으로 나타났다. 20代 男性과 正反對 性向이자 20代 女性과 더불어 民主黨 支持率이 가장 높게 나타나는 世代다. 왜 그럴까.

    오늘은 이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1991年 5月 ‘分身 政局’에 對한 回想, 그리고 大韓民國의 40代는 어찌해 다른 世代와 동떨어진 ‘갈라파고스’ 世代가 됐는가 하는 疑問 말이다. 이른바 86世代라고 불리는 50代들이 민주당을 支持하는 것은 一種의 同調 現象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40代가 그러는 것은 도무지 理解할 수 없다며 고개를 갸웃하는 사람이 많다.

    結論부터 말하자면 1990年代는 ‘喪失의 時代’로 定義된다. 그 時節 學生運動圈이 大學과 社會에 미치는 役割이 그리 크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靑年期 成長의 ‘雰圍氣’를 左右했다는 側面에서 不知不識間 相當한 影響을 미친 게 事實이다. 굳이 學生運動이 아니더라도 1990年代는 混沌의 時代였다. 過渡期的 時代이자 갈피를 잡지 못하는 時代였으며, 무언가가 무너진 바탕 위에 새로운 代案을 만들어야 한다는 조바심의 時代이자, 左派의 立場에서는 ‘뭘 해도 되는 것이 없는’ 挫折의 時代였다.



    사람들은 大體로 自身이 살아온 過程을 合理化하려는 傾向이 있다. ‘내가 살아온 길이 全혀 헛된 것만은 아니었다’고 慰安을 삼으려고 말이다. 오늘을 살아갈 勇氣를 찾는다는 側面에서 그러한 態度가 全的으로 잘못된 것만은 아니지만 때로 反省的 省察을 가로막는 原因이 되기도 하고, 잘못을 자꾸 外部 탓으로 돌리는 世代的 習慣으로 固着되기도 한다. 大韓民國의 40代는 어느 쪽에 서 있을까. 30年 前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몸을 태우며 번진 ‘죽음의 굿판’

    청바지에 청재킷을 입고 흰색 헬멧을 쓰고 다녀 이른바 ‘백골단’으로 불린 사복조 전경들은 ‘강경대 폭행치사 사건’을 일으켰다. 이들은 폭력적인 시위 진압으로 물의를 빚었다. [동아 DB]

    靑바지에 靑재킷을 입고 흰色 헬멧을 쓰고 다녀 이른바 ‘白骨團’으로 불린 私服兆 戰警들은 ‘강경대 暴行致死 事件’을 일으켰다. 이들은 暴力的인 示威 鎭壓으로 物議를 빚었다. [東亞 DB]

    1991年 5月 焚身 政局은 4月 26日 명지대生 강경대가 白骨團의 쇠파이프에 맞아 숨지는 事件으로 始作됐다. 當時 警察에는 ‘白骨團’이라 불리는 示威隊 逮捕 專擔 部隊가 있었는데, 靑바지에 靑재킷을 입고 흰色 헬멧을 쓰고 다녀 그렇게 불렸다. 防牌도 작은 것을 들어 一般的인 전?의경 部隊와 外樣부터 달랐다. 服裝이 가볍다 보니 示威 現場에서도 暴力性이 도드라졌는데, 當時 명지대에 갓 入學한 1學年 강경대가 示威隊가 後退하는 過程에 學校 담牆을 넘다 白骨團에 붙잡혀 毆打당하고 病院으로 옮겼으나 숨진 것이다. 當時 명지대 學生들의 示威 目的은 事實 政治的 이슈가 아닌 ‘登錄金 引下’였다. 1990年代 들어 學生運動 이슈를 좀 더 生活 속으로 擴大하자는 側面에서 그랬고, 新入生을 運動圈으로 끌어들이는 次元에서 學期 初엔 登錄金 이슈 같은 것을 들고 나가는 것이 하나의 慣行이기도 했다. 特히 명지대는 財團의 非民主的 運營이 늘 問題가 되던 學校였다.

    강경대가 死亡하자 全國 大學에 追慕 集會가 열리기는 했으나 그때만 해도 여느 5月의 初入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4月 29日 전남대에서 박승희가 焚身하면서 1991年 5月은 特別히 記憶에 남는 5月이 됐다. 이른바 焚身 정국이 發火한 것. 전남대 食品營養學科 2學年으로 校誌 編輯委員이기도 했던 박승희는 강경대 追慕 集會 途中 學校 廣場에서 온몸에 시너를 뿌리고 焚身했다. 集會가 進行되던 中이라 焚身 場面을 모두 目擊한 學生들의 精神的인 衝擊이 컸다. 事件 當時 筆者는 集會 現場에 없었는데, 그날 저녁 先輩가 넋이 나간 表情으로 깡소주를 들이켜며 限없이 울던 모습을 記憶한다.

    問題는 박승희의 焚身 하나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5月 1日 安東大 學生 김영균, 3日 경원대(現 嘉泉大) 學生 천세용이 박승희와 똑같은 方法으로 焚身自殺을 擇했다. 앞에서 言及한 김지하의 칼럼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는 이렇게 세 名이 잇따라 焚身을 敢行한 直後인 5月 5日 發表됐다. 事實 김지하가 붙인 칼럼 題目은 ‘젊은 벗들! 歷史에서 무엇을 배우는가’였는데, 新聞社에서 고른 副題(副題)가 더욱 有名해졌다. 該當 칼럼은 內容과는 相關없이 ‘運動圈은 目的을 위해서는 手段과 方法을 가리지 않고 生命을 敬遠視한다’는 輿論을 擴散하는 데 一助한 것으로 評價받는다. 나중에 김지하는 “學生들이 相當히 興奮해 있었다. 興奮한 그들에게 勸誘의 形態가 아닌, 날카로운 글을 쓴 것이 잘한 것 같지는 않다”고 스스로 評價하는 한便 “媒體 選擇을 잘한 것 같지 않다”고 後悔하는 內容의 인터뷰를 남겼다.

    이제 와 돌아보면 어쨌든 內容은 極端的 鬪爭 方式을 止揚하라는, 先輩가 後輩들에게 으레 건넬 수 있는 따끔한 助言이지만 金芝河 特有의 直說的 話法과 當時 情勢 等이 맞물려 그 時節 運動圈 學生들에게 적잖은 反撥을 불러일으켰다. “어떻게 김지하 先生이 그럴 수 있느냐”면서 말이다. 김지하의 詩에 曲을 붙인 ‘타는 목마름으로’를 自體 禁止曲으로 定해 한동안 부르지 않은 親舊가 있었을 程度다.

    抵抗하거나, 投降하거나, 各自 길을 가거나

    問題는 漸漸 더 커졌다. 焚身과 死亡이 끊이지 않은 것이다. 5月 8日에는 在野 運動團體인 全國民族民主運動聯合의 김기설 社會部長이 서강대 本館 屋上에서 焚身自殺했다(분신에 投信까지 했다). 그 이틀 前인 5月 6日엔 박창수 한진중공업 勞組委員長이 病院에서 숨진 채 發見되는 疑問의 事件이 있었다. 5月 10日 전남대에서 勞動者 윤용하가 焚身自殺했고, 5月 18日에는 勞動者 이정순이 연세대 正門 앞 鐵橋 위에서 焚身 및 投身했으며, 같은 날 全南 寶城高等學校 3學年 김철수가 5·18 記念式이 進行되는 途中 學校 運動場에서 焚身했다. 5月 22日에는 전남대병원 靈安室 屋上에서 勞動者 정상순이 自身의 몸에 불을 붙였다. 그렇게 1991年 5月에만 焚身自殺한 사람이 8名에 이른다. 警察의 示威 鎭壓 過程에 死亡한 사람이 2名, 疑問詞한 사람이 1名. 하루건너 한 名, 죽음의 消息이 들렸다.

    그럼 여기서 提起할 만한 疑問. 1991年의 잇따른 自殺은 무엇 때문일까. 金芝河 詩人의 表現대로 ‘네크로필리아’, 卽 屍體選好(選好)證人 것일까. 亦是 김지하의 말처럼 싹쓸이 衝動, 自殺特攻隊, 테러리즘과 파시즘의 始作일까. 自殺이란 傳染되는 것일까. 地下組織에서 그 무슨 命令이나 指示를 내려 焚身自殺을 敢行했다는 主張은 想像만으로도 어처구니없는 發想이다. 當時 焚身 政局의 한복판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그 時節을 돌아보면 一種의 喪失感과 挫折感이 時代의 基底에 있지 않았나 싶다. 뜻대로 되는 것이 없으니 이렇게라도 해보겠다는 最後의 手段으로 自殺을 통한 煽動을 擇한 것이다.

    1990年代를 貫通한 運動圈 用語 가운데 하나가 ‘田民抗爭(全民抗爭)’이다. 全 國民이 들고일어나 抗爭을 일으킨다는 뜻인데, 말하자면 ‘Again 1987’이다. 1987年 6月 民主抗爭의 榮光을 되살려보자는 것. 이미 選擧를 통해 政權을 審判할 수 있게 됐다. 政黨을 만들 수 있는 自由도 限껏 늘어났다. 돌아보면 굳이 大規模 抗爭을 통해 政權을 뒤집어엎겠다는 發想이 우습기도 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지난날의 榮光에 對한 未練이자 推仰이 아니었을까 싶다. 或은 劣等感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先輩들이 이루었으니 우리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誘惑 말이다. 하지만 全民이 들고일어나는 일은 決코 이뤄지지 않았다. ‘都大體 民衆은 왜 우리를 따르지 않는 걸까’ 恨歎하며 懷疑感에 사로잡혀 갈수록 過激해지다 스스로 挫折해 버린 것이 1990年代 學生運動이다.

    1990년 1월 22일 민주정의당 총재인 노태우 당시 대통령(가운데)이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왼쪽),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와 함께 청와대에서 ‘3당 합당’을 공식 발표하고 있다. 3당 합당은 오늘날 국민의힘으로 이어지는 보수정당의 뿌리가 됐으며 현 40대에겐 ‘불신의 트라우마’로 남았다. [동아 DB]

    1990年 1月 22日 民主正義黨 總裁인 노태우 當時 大統領(가운데)李 金永三 統一民主黨 總裁(왼쪽), 김종필 新民主공화당 總裁와 함께 靑瓦臺에서 ‘3黨 合黨’을 公式 發表하고 있다. 3黨 合黨은 오늘날 國民의힘으로 이어지는 保守政黨의 뿌리가 됐으며 現 40臺에겐 ‘不信의 트라우마’로 남았다. [東亞 DB]

    1990年 1月 3黨 合黨이 있었다. 노태우의 민정당과 김영삼의 民主黨, 김종필의 共和黨이 하나로 합쳐 巨大 與黨이 誕生한 것이다. 곧 內閣制 改憲이 이루어지리라는 所聞이 播多했다. 어떻게 이룬 直選制 改憲인데, 制度的 民主化는 얼추 이뤘다고 생각했는데, 保守政黨이 內閣制를 통해 永久 執權할 것이라는 不安感이 掩襲했다. 韓國 40~50代들이 內閣制에 對해 갖는 至毒한 不信은 이때의 트라우마 탓이 크다. 그리고 이른바 ‘變節’에 對한 拒否感도 이때 김영삼에게 가졌던 背信感의 탓이 적지 않을 것이다. 민정당과 공화당이 합치는 일은 그러려니 하는데, 거기에 民主黨이 끼어든 것이 衝擊이었다. 大體 이 일을 어떻게 解釋해야 하는지 당황스럽기도 하고 憤痛이 치밀어 오르기도 했다. 1990年代엔 그런 일이 많았다. 時代가 慌忙했다.

    1990年 10月엔 獨逸이 統一됐다. 獨逸은 우리와 똑같은 分斷國家라고 여겼다. 그래서 東獨=北韓, 西獨=南韓이라고 생각하는 習慣이 있었는데, 東獨이 西獨에 吸收돼 버린 것이다. 東獨 市民은 共産黨을 물리치고 選擧를 통해 自發的으로 西獨에 吸收되는 길을 擇했다. 當時 運動圈엔 相當한 情緖的 衝擊이었다. 게다가 1980年代 後半부터 東유럽 社會主義 國家들이 흔들리기 始作했다. 社會主義 宗主國 소비에트聯邦(蘇聯)마저 民主化 示威와 民族 紛爭으로 極甚한 混亂을 겪었다. 及其也 몇 個 共和國이 離脫하는 事態가 發生했고, 1991年 12月 蘇聯은 公式 解體를 宣言했다. ‘蘇聯 崩壞’라는 네 글字가 큼지막하게 印刷된 號外(號外)가 距離에 나뒹굴던 겨울은 유난히 쓸쓸했다.

    不信이 果然 그들만의 잘못이랴

    게다가 1989年 6月 中國 天安門 廣場에서는 人民解放軍이 탱크로 示威 群衆을 밀어버리는 事件이 일어났다. 전두환과 똑같은 짓을 ‘人民의 軍隊’가 저지른 것이다. 거기다 노태우 政府의 北方政策으로 東歐圈 社會主義 國家들과 잇따라 修交하면서 헐벗은 社會主義의 實相을 더욱 또렷이 알게 됐다. ‘右派의 桎梏을 넘어 左派의 時代로 접어들 수 있겠다’ 생각하던 時節에 저쪽의 ‘오리지널 左派’들이 우수수 崩壞하고, 이쪽의 右派들은 結集하며 勢力을 擴張하는 模樣새를 갖추면서 左派의 挫折感은 한層 極甚해졌다. 그것이 1990年代를 貫通한 情緖다. 抵抗하거나, 投降하거나, 各自의 길을 가거나. 셋 中 하나를 選擇해야 했다.

    여기에 또 問題的 事件이 더해진다. 1991年의 焚身 政局을 回顧하자면 亦是 빠뜨릴 수 없는 事件은 이른바 ‘遺書 代筆 事件’. 5月 8日 死亡한 김기설은 事實 서강대와 아무런 因緣이 없는 人物이었는데, 서강대를 焚身自殺地로 選擇하면서 當時 서강대 總長이던 박홍이 이 問題에 介入하게 된다. 그가 “죽음을 煽動하는 어둠의 勢力이 있다”는 發言을 하면서 잇따른 焚身自殺이 그저 偶然인 것 같지 않다는 輿論이 擴散됐다. 公安 當局은 卽刻 ‘背後 追跡’과 ‘拔本塞源’을 公言했다. 게다가 김기설의 遺書가 그의 筆跡이 아닌 것 같다는 疑惑이 일었고, 그의 同僚 강기훈이 遺書를 代身 써준 사람으로 指目돼 拘束됐다.

    ‘韓國版 드레퓌스 事件’이라 불리는 이 事件의 結末은 모두가 아는 바다. 2015年 大法院은 再審을 통해 강기훈에게 最終 無罪를 確定했다. 한 사람의 運命을 悽慘히 짓밟은 이 事件의 顚末을 지켜본 사람들은 크게 3가지 不信을 갖게 됐다.

    첫째, 言論에 對한 不信. 常識的으로 죽으려는 사람이 굳이 遺書를 다른 사람에게 써달라고 할 理由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世上은 常識을 許諾하지 않았다. 國立科學搜査硏究院에서 ‘遺書의 筆跡이 강기훈의 것과 같다’는 鑑定을 해줬던 탓도 있지만 그의 便을 들어준 言論은 많지 않았다.

    둘째, 國家機關에 對한 不信. 國科搜의 筆跡 鑑定은 虛僞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文書를 鑑定한 國科搜 擔當者는 이 事件 以外에도 여러 文書를 虛僞 鑑定한 嫌疑로 나중에 拘束됐다. 90年代 學番들이 이런저런 陰謀論에 쉬이 휩쓸리는 것을 그들만의 탓이라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셋째, 檢察에 對한 不信. 正確히 이야기하자면 그 時代 ‘支配 勢力’에 對한 總體的 不信이라고 말할 수 있다. 91年 5月 박홍이 ‘어둠의 勢力’을 운운하자 公安機關은 卽刻 反應했다. 當時 治安關係對策會議를 열어 檢察에 徹底한 調査를 指示했던 法務部 長官이 바로 金淇春 前 大統領祕書室長이다. 當時 搜査 檢事들도 나중에 모두 乘勝長驅했는데, 그中 한 名이 곽상도 前 議員이다. 더 말해 뭐 하겠는가.

    ‘그때 그 사람들’ 때문에…

    1991년 6월 3일 한국외대 강의실 복도에서 당시 정원식 국무총리 서리가 학생들로부터 달걀과 밀가루 세례를 받아 안경이 벗겨지고 얼굴과 상체가 밀가루 뒤범벅이 된 채 학생들에 의해 밖으로 끌려 나가고 있다. 이는 학생운동권의 도덕성에 큰 타격을 입혔다. [동아 DB]

    1991年 6月 3日 韓國外大 講義室 複道에서 當時 정원식 國務總理 署理가 學生들로부터 달걀과 밀가루 洗禮를 받아 眼鏡이 벗겨지고 얼굴과 上體가 밀가루 뒤범벅이 된 채 學生들에 依해 밖으로 끌려 나가고 있다. 이는 學生運動圈의 道德性에 큰 打擊을 입혔다. [東亞 DB]

    業報가 代를 잇는 ‘막장 드라마’처럼 時代의 悲劇은 이어진다. 1991年 5月 焚身 政局의 ‘막장 하이라이트’를 裝飾하는 事件은 斷然 ‘정원식 總理 暴行 事件’ 아닐까. 只今 記錄을 살펴보는 사람들은 國務總理 署理(國務總理 자리가 空席일 境遇 國務總理 業務를 代理해 遂行할 사람. 大統領이 임명한다)로 任命된 고(故) 정원식에게 學生들이 밀가루와 달걀을 投擲한 單純한 抗議性 示威쯤으로 理解하는데, 當時 學生들은 페인트와 돌맹이, 술甁, 人分까지 가리지 않고 던졌다. 講義室에서 그렇게 悖惡질을 했을 뿐 아니라 硏究室에 避身한 사람을 찾아 끌어내 校內 여기저기를 쫓아다니면서 執拗하게 集團 毆打했다.

    當時 新聞 1面에 밀가루를 뒤집어쓴 總理 候補者 寫眞이 大門짝만 하게 실렸다. 國務總理에 指名됐으면서도 마지막까지 授業을 繼續한 정원식은 時代의 참스승 格으로 推仰받게 됐다. 스승을 暴行한 學生運動圈은 悖倫 集團으로 낙인찍혀 엄청난 社會的 指彈을 받았다. 이쪽이 失手하면 저쪽이 더 큰 失手를 해서 돌고 도는 것이 歷史다. 當時 政局이 그대로 흘러갔더라면 歷史엔 ‘遺書 代筆’이라는 公安機關의 헛발질만 남았을 텐데, 總理 暴行이라는 더 큰 헛발질이 일어남으로써 運動圈은 道德的으로 救濟받지 못하게 됐다. 餘談이지만 當時 정원식 總理를 學生들에게서 떼어내 警護員처럼 擁衛하며 救出한 熱情的인 記者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朴炳錫 더불어民主黨 議員이다. 當時 某 新聞社 政治部 記者였다. 歷史는 이렇듯 엇갈리며 돌아간다.

    現在 40代의 政治的 性向이 唯獨 도드라지는 理由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때 그 사람들’에 對한 認識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民政-民資-신한국-새누리-國民의힘 式으로 政黨의 系譜를 羅列하면서, ‘結局 우리 社會의 主流는 如前히 交替되지 않았고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고 想像하는 ‘繼續 革命’ 式의 思考方式 말이다. 事實 이와 絶緣할 責任은 40代 스스로에게 있으나 保守政黨에도 있다. 保守政黨이 舊態 人事(人士)와 關係를 끊고 革新하면서 40代의 思考方式을 낡은 것으로 만들어버려야 하는데, ‘찔끔찔끔’式 改革으로 ‘아직도 世上은 바뀌지 않았다’는 생각을 維持하게 만드는 것이다.

    90年代 學番들은 끊임없이 挫折했다. 勿論 가장 祝福받은 世代다. 하지만 政治的으로 ‘勝利’의 經驗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 世代이자 스스로 主流가 됐다는 經驗을 아직 獲得하지 못한 世代이기도 하다. 작은 勝利의 經驗이 있다면 盧武鉉 大統領이 當選된 것과 촛불 示威로 現職 大統領을 權座에서 물러나게 만든 것일 듯하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90年代 學番은 늘 群衆이었지, 主導 勢力은 되지 못했다. 또 自己 위 世代와의 關係 속에서 只今 自身의 世代를 가늠하기만 하지, 自己 아래 世代와의 關係를 充分히 가늠하지 못한다. 50~60代 나이에 이르러 子息들이 20代 成人이 되고, 現實의 苦悶을 世代的으로 重疊하며 政治的 思考가 다듬어진 86世代와 달리 90年代 學番이 如前히 ‘갈라파고스’로 남아 있는 理由다.

    70年代生 政治指導者 登場할 때

    어떤 이는 90年代 學番을 ‘從屬된 世代’라고 말한다. 86世代의 氣勢에 눌려 그들의 榮光만 讚美하며 살았을 뿐 ‘自己 머리로, 自己 생각을 갖고, 自己 목소리를 내본 적이 없는’ 世代라고 말이다. 一見 妥當하지만 지나친 貶毁다. 86世代가 유난히 有能하고 97世代(90年代 學番, 70年代 出生)가 유난히 無能하다고 말할 수 없다. 時代 條件이 各各 다르게 주어졌을 뿐이다. 社會 곳곳에서는 이미 86世代가 退潮하고 97世代가 主役이 된 지 오래다. 오직 政治權에만 唯獨 ‘86世代 카르텔’李 剛하게 維持되고 있다.
     
    좀 느닷없는 이야기지만 1991年을 돌아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해봤다. 이제는 70年代生 政治指導者가 登場할 때 아닐까. 이러한 機會와 條件이 주어질 때 ‘40代 進步大學生’도 現實 속에서 政治的 世界觀을 다듬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한동훈, 朴用鎭, 尹喜淑, 金海泳 같은 ‘次世代 旗手’들이 있지 않은가. 그들이 政黨을 떠나 “86의 時代는 끝났다. 이제 우리 時代가 됐다”고 함께 宣言하면 좋겠다. 40代의 壓倒的 世代 性向이 언젠가 이들과 結合해 健全한 影響力을 發揮하길 期待할 따름이다. 先輩가 아닌 同年輩를 指導者로 앞세우며 말이다. 그러할 때 우리는 비로소 1990年代 大學 時節을 휘감았던 ‘喪失의 時代’에서 벗어나 어른이 됐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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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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